산으로 가는 길
▶흐르는 음악 : Sweet people /La Foret Enchantee
오늘 산행도 역시 혼자다.
들머리는 화산보건소 안쪽길을 따라 들어오면 막다른 곳에 위치한 소림사다.
중국 영화에서 본 소림사와는 달리 아담하고 조용한 절이다.
더 이상은 진입할 수가 없어 차를 세운 후 등산화 끈을 단단히 묶고 배낭을 멘다.
용사골은 엊그제 내린 비로 흐르는 물 수량이 제법 많다.
시선이 머무는 곳에 마음도 따라 머문다.
산길 풀포기 하나에도 그들의 대화가 숨어 있고 숨결이 있다.
우리는 이럴 때에 가슴을 열고 다가가야 한다.
그래야 자연도 마음을 연다.
계곡 입구에서부터 성벽처럼 가로막는 화산저수지 제방이다.
10여년 전 이곳 마을 식수원으로 조성된 상수원지이다.
비가 많이 내리는 여름철이 아니면 보(洑)를 넘어오는 물이 없어
예전처럼 풍요로운 골짜기를 보기가 어렵다.
격세지감이다.
저수지 제방에서 내려다 본 아름다운 용사골 경관이다.
평일이고 많이 알려진 곳이 아니다보니 늦여름 산 속엔 적막감이 감돈다.
우리는 길을 떠나 그곳을 찾았을 때
경관적 아름다움 보다 그것의 배면을 이루는 삶의 결을 봐야 한다.
성공도 성취를 위한 뜨거운 열망이 아니라, 새가 나뭇가지 하나에 만족하듯이
척박한 자연 환경에 스스로를 길들이며 살아온 그 모습에서
'나는 산다는 일'의 거룩함을 본다.
나에게는 이것이 산 속에서 느끼는 아름다움의 실체다.
제방을 건너 저수지의 왼쪽 물가를 따라 시루봉으로 오르는 산길이 나있다.
수면 위로는 나무들의 주검이 선 채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오래도록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땅 속에 눕지도 못한 채 아직 머물고 있다.
저수지가 끝나면 잘 다듬어진 임도가 시작된다.
비온 뒤 진흙탕 길이라 신발 바닥엔 진창으로 들어 붙는다.
그래도 나뭇잎을 흔드는 바람소리에 섞여 들려오는 새소리가 정겹다.
정말, 걷기가 편한 길이다.
길은 오른쪽 산사면을 에돌아 작은 고개를 넘어간다.
옛길은 과거의 길이 아니라 하나의 '오래된 미래'다.
우리가 잊혀져가는 길을 온몸으로 숨 쉼으로써
파시즘적 속도에 지친 감각들이 되살아나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나는 지금 길 위에 서 있다.
숲의 길, 산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내가 선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몸을 틀면 시루봉으로 오르는 길이고,
왼쪽으로 내려서면 운곡서원 사리마을로 향하는 길이다.
나는 갈림길 앞에서 잠시 서성이다가 시루봉으로 향하는 좁은 산길로 접어든다.
산에 관한 한 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어찌 모르는 것이 산에 관한 것뿐일까!).
거기 깃들어 사는 생명들을 알지 못하고, 나무의 이름과 성질도 모르고,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지 못하는 것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한다.
산에 관한 한 나는 여전히 일자무식쟁이다.
하지만 그런 무식함이 부끄럽지는 않다.
왜냐하면 아무 것도 모르는 한 내게는 늘 무언가를 채워 넣을 수 있는 여백이 있는 셈이니까.
산이, 산을 아는 사람이, 내게 줄 것들이 여전히 많으니까.
자연 앞에서 나는 한없이 어수룩하고, 서투르고, 구멍투성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내게 오면 가르쳐줄 게 많다.
산도, 나무도, 풀도, 꽃도, 내게는 스승 아닌 것이 없다.
나의 서투름과, 나의 틈과, 나의 아무것도 모름과,
이 나이 되도록 아무것도 이루어놓은 것 없음이
때로는 세상과 소통하는 구멍이 될 것임을 나는 믿는다.
운제산에서 토함산으로 향하는 주능선길이다.
얕은 구릉지대가 가끔 앞을 가로막지만 거의 평지의 짙은 숲으로 이뤄진 걷기 좋은 산길이다.
출발하여 2시간 여만에 올라선 시루봉 정상이다.
인적이 없고 조망 역시 짙은 숲으로 가려 볼 폼이 없다.
물론 혼자 지도를 들고 산길을 더듬어 찾고, 사진을 찍으면서 걸어왔으나 많이 지체되었다.
그러나 등산(登山)은 때로는 치열함을 요구하지만
입산(入山)은 마른 수건에 물이 스며들 듯 자연 속에 인간이 흡수되어 유유자적함을 찾고 싶다.
한참 젊었을 때는 코 씩씩, 땀 뻘뻘, 산 정상을 고집했지만
예순을 넘은 지금은 산에 들면 그냥 좋지 않겠는가.
시루봉에서 내려와 시그널이 많이 붙어있는 이곳 삼거리가
토함산 종주길과 도투락목장 갈림길이다.
이정표가 없어 모르고 한 쪽으로 잘못가면 그 대가로 원치 않는 알바를 각오해야 한다.
나는 이곳에서 오른쪽 길을 선택한다.
잠시 내리막길이 시작되다가 산길은 다시 평지를 이룬다.
걷기는 풍경을 오래 간직할 수 있는 유일한 여행이다.
걷기는 몸을 쓰게 하고 마음을 열게 만들고 대상에 다가가게 한다.
발자국으로 남기는 몸의 흔적이자 지구에게 건네는 온몸의 인사다.
지금은 덕동댐 상수원지의 상류로 폐목장이 되었지만
방목된 소들이 마시던 연못(식수원)이다.
오래 전에 이곳에서 '태극기 휘날리며'라는 영화를 촬영했던 장소다.
소들이 떠나간 축사를 군인들의 막사 세트장으로 사용하였다.
풍경은 건너 편 오리온목장으로 오르는 무장사지골과 비슷하나
아직은 유명세를 많이 타지 않아 비교적 호젓한 산행을 즐길 수 있다.
그러나 머지 않아 이곳도 개발하여 골프장을 조성한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는 기쁨과 괴로움이 딱 반반씩 이뤄져 있다.
어떤 관계든, 부모 자식 사이에라도. 신이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행복이 있다면 외로움도 딱 그만큼 있다.
우리의 삶은 전부의 행복을 추구하지만 원래 절반은 비참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외로움을 하시하고, 고통을 외면하려고만 한다.
얼마 전에 자살한 연예인을 보면 그래서 안타깝다.
인간의 기본 조건을 잘못 인식한 거다.
오죽하였으면 그런 극단적인 일을 행동을 했을까마는 정말 바보 같은 선택을 한 것이다.
불행과 고독은 끌어 안고 부딪쳐야 한다.
우리가 하시하는 고통, 병, 비참함과 정면으로 대결해야 한다.
반 고흐도 그렇고, 모든 위대한 예술가가 그렇듯이 말이다.
약 4시간 가량 걸었으나 아직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길을 물어 볼 사람도 없거니와
이곳 저곳 얼키고 설킨 수많은 임도로 인해 진행해야 할 길찾기가 어려웠다.
규모는 작지만 오래 전에 몇 번인가 다녀 온 대관령 삼양목장 같은 분위기다.
끝없이 펼쳐진 구릉지대로 억새가 바람 결에 빗질하는 가을에 오면 더욱 좋지 않을까 싶다.
도투락목장 높은 언덕에 방치된 폐건물이다.
누군가 안쪽 벽에 '그랜드 호텔'이라고 장난스럽게 낙서를 해 놓았다.
아마 예전엔 이곳이 목장관리소라는 생각이 든다.
아뿔싸! 점심으로 라면 1개와 코펠 버너에 김치, 커피까지 챙겨오면서
라면을 끓일 물을 깜박 잊고 가지고 오지 않았다.
물이 흐르는 계곡까지 내려가려면 아직 2시간은 더 걸려야 하는데
요구르트 한 개에 사과 한 쪽으로 약식 점심을 해결한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자꾸 잊고 빼먹는 게 많아진다.
(자주 이러면 정말 곤란한데...)
세월 앞에 아물지 않는 상처는 없다.
봄이 오고, 가을이 가고, 다시 봄이 오고, 여름이 저무는 사이 상처도 추억도 흐릿해져 갔다.
어쩌다 아름다운 것을 볼 때나 부재의 추억이 새삼스러웠을 뿐,
혼자 해야 하는 모든 일들이 몸에 마음에 익어 갔다.
나는 지금 중얼거린다. '모든 사랑에는 순간의 진실함이 머무는 것을...'
서로 사랑하던 그 순간만은, 상대방에게나 자신에게나 진정이었고. 순정했다는 것을...
지나가버린 사랑은 때로 살아온다.
추억은 현재진행형이다.
아직 나는 저 산에 오르지 못한다.
단풍이 지고, 가을이 가고, 늦가을과 겨울이 겹치는 무렵이면
저 산에 오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바라보는 것과 사는 것은 다른 일이다.
바라보는 건 어디까지나 낭만이고, 존재하는 대상을 향한 관찰의 시선일 뿐이지만,
산다는 것은 치열한 현실이자, 존재하는 대상 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참여의 움직임이다.
나는 여전히 산을 낭만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래서 나에게는 아직 산의 덕성에 기대어 살 자격이 없다.
단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랑을 해 본 사람이면
그 흔들림이 무엇인가를 안다
그 어지러움이 무엇인가를 안다
그대가 머물다 간 자리에
바람이 불어와도
넘어지고 쓰러지는 것에
덤덤해지고 무뎌진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다 흔들린다
- 오창극의 시집《살아있는 모든 것은 다 흔들린다》중에서 -
여기에서 곧장 내려가면 오늘 산행은 끝나지만,
나는 아직도 머뭇거리며 산 능선 위에 서 있다.
저무는 햇살에 얼굴을 씻은 듯 해쓱한 들꽃들이 나풀거리고 있다.
도투락목장과 토함산을 가리키는 표지판 앞에서 내 눈동자가 흔들린다.
내 마음은, 내 머리는, 저 산에 오르자고 나를 달래지만, 내 몸은 멈칫거리고 있다.
살다보니 거의 모든 일에 있어
마음보다, 머리보다, 몸이 정직하다는 것을 깨닫곤 한다.
지금 나는 내 몸의 머뭇거림을 인정한다.
그래서 뒤돌아 온 길을 되짚어 내려온다.
첫댓글 등허리엔 가을바람을 데리고, 이마엔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홀로 산행을 하셨을 하셨군요.. 오랜만에 들러 글은 시간이 여의치 않아 읽어보지 못하고 사진만 주마간산 하듯 보고 갑니다. 화랑촌 목장 폐건물이 을씨년스럽군요.. 예전에 다래 따먹으로 갔던 기억이 선합니다.
우와~ 멋진 코스네요. 큰 고바위 없이 완만하게 이어지는 산허리길과 능선길. 구월 정기산행지로 강추!!
월지대사 칭구한테 말(馬) 좀 빌려온나~~! 난 저길을 말타고 가고 싶다...
그 친구 지금 잠수탔습니다. 그래서 조금 걱정됩니다.
우리네 삶이라는게 늘 행복과 불행의 반복이라고들 하지만 불행하다는 생각이 더 많이 자리잡고 있는건
행복했던 순간들을 우리 스스로가 너무 축소시켜서 그런거 아닌가 싶습니다...
걍~~! 하루 세끼 풍족하게 먹을 수 있는것도 물길러 가지 않고 집안에서 수돗물을 쓸 수 있는것도
아프리카 같은 먼나라까지 비교할것 없이 불과 몇십년전 우리 어릴적에 비하면 큰 행복이지요...
9월 산행 대상지로 현지답사 겸 먼저 다녀왔습니다. 개개인 기대치에 못미칠지는 모르나 근교 산으로 이 정도의 경관과 신선함이면 그런대로 괜찮을 것이라 사료됩니다. 앞서 당겨서 쓴 산행기, 이제 숙제는 끝냈으므로 저는 산행 당일엔 카메라를 갖고 가지 않습니다.
라면 드실 물을 안가져가셨다는 울 교주님! 밥 없으면 까칠해 진다고 소문난 도반이를 데리고 가셨더라면
적어도 굶지는 않으셨을텐데ㅋ ㅋㅋ 편안해 보이는 9월 산행 못갈것 같아서 아이들처럼 무다이 꼬장이 납니다.
.......도반님 안오면 난 어쩌지?.........
자운영님, 도반 안오면 어쩌긴? 꿈결 같은 산길을 늑대들 앞발 잡고 정답게 걸어가면 되지..ㅎㅎ
아우들이 명절 쉬러 와서 처가도 가고 빨리 돌아가 주면 갈텐데 꼭 명절 끝나는 날 가는지라
늑대님들 앞발 모두 자운영님께 양보 할께요. ㅋㅋㅋ
^^ 산행기 보고 모든것 다 제쳐두고 따라 나섭니다.
이런~~ 교주님 사전답사 글을 봤다면 열 일 제쳐두고 따라갔을 것인데 아깝네요.
여전하신 건망증은 나아질 희망보다는 숙명으로 안고 가셔야 하겠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