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찾아 . . .
거기에 . . .
거기에 있으니
비로소 입가에 웃음이
번지는구나 . . .
그것이 곧!
사랑이도다.
토,일,월까지 3일간의 우천으로 강화도여행은
9월넸째 23일로 연기 산행합니다
이점 양지 바라며, 신청 하신분이
그날 오시면 선물 제공합니다
1,일 시---2012년9월9(日) ------23일로 연기 합니다
2,일 정---12:00 진해출발(토요일)
10분 임마누엘
15분 남초,주상가
20분 시청,트레비앙,노블,
25분 허리
30분 씨엘
35분 39사
40분 덕재굴다리
50분 마산역
00:50 마산출발
01:10 중리
06:00 석모도 선박이동--------------45인승을 가지고 들어 갑니다
06:30 석가산 산행시작---40분소요
보문사탐방
09:30 민머루해변(세계5대갯벌)
10:00 산행(사찰탐방)종료
강화도로 이동
11:00 중식
12:00 마니산 산행시작
14:30 산행종료
15:00 전등사 탐방
17:00 석식(휴계소에서)
20:30 도착(창원시청기준)/해산
3,회 비--- 74,000원 -----아침,점심,저녁,간식,뒤풀이
석모도승선료/버스도선료/버스이용료
보문사,전등사입장료/마니산입장료/애기봉입장료(휴전선전망대)
4,산행코스---1,삼방리매표소~참성대~마니산~참성대~삼방리주차장
2,보문사~석가산~보문사주차장
마니산 거리6,3km 소요시간2시간30분
석가산 1,0km 30분
5,주요탐방 및 방문지~~~~~~~~~~~
마나산-참성단성화대
전등사
석모도-석가산-보문사
민머루해변(세계5대갯벌)
애기봉(휴전선전망대)
영종도대교
6,안전수칙 및 신청방법
`신청방법-------1.댓글 또는 신청
예)홍길동 마산역1명 명서다리1명
010-000-0000 좌석29번,30번
2.전화로 신청
`여사사`산행대장 011-9552-9105로
하셔서 신청 하시면 됩니다
`회비입금방법---경남은행 여사사 진 보경
529-22-0492823
`안전수칙------같이동행
1.항시 세사람 이상 동행하라(보호,구조,신고를 위해)
2.일행과 떨어지지 마라
한눈 팔지 말것
3.인솔자에 따르고 다수 의견에 동참하라.
사진,관망,나물 등을 보거나 찍거나 뜯는다고
바위및 기타 코스를 이탈 하지마라.
계절용품준비
4.계절마다 필요한 장비,장구 등을 꼭 챙겨 배낭에
가지고 다녀라.
(우의,장갑,방한복,구급약품,여벌옷,헤드랜턴,
스팻츠,아이젠,스틱 등)
체력과 무리,욕망
5.자신에 맞는 코스를 선택하라.
6.욕망에 사로 잡혀 무리한 판단을 하지마라.
7.만일에 사태에 대비해 각자 여행자 보험에 가입해라.
(1인 여행자보험 몇백원)
인솔자의 지시에 따르라
8.기타 위험이 초래 될시 산행대장이나 각 안내자에게
무전,전화,문자,고함,호각 등으로 도움을 요청하고
다소 시간이 걸려도 무리하게 혼자서 행동을
취하지마라.
9,출발전 충분히 안내자(산대장)에게 질문하고 현장을
숙지하고 섭득을 하라.
산행에만 신경쓰라
10. 특히 하산시 또는 바위길,낙엽밑 얼음길,나무가지가
튀어 나온길 등은 아주 미끄러우므로 잡생각을
버리고 발내디딜 보폭만 보고 하산하라.
그리고 어떠한 경우에도 휴대폰 사용시에는
보행을 멈추고 통화를 하시길 . .
10번유의사항을 꼭부탁!
----본인책임---
*산행 및 여행시 안전사고는 본인 책임이며,
이상의 기본 안전 수칙을 숙지하고 즐겁고 유익한
산행을 합시다.
*위의 내용은 만일에 경우 다소 일정이 변경 될수
있으며 우천시에는 취소 될수도 있습니다.
*꼭 여행자 보험에 가입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
하여야 합니다.
`공지사항-본 여사사 산악회에서는 타산악회와 달리 거리에 관계 없이
아침을 제공 합니다.
일반 도로거리 22,000원(경남지역) 회비에 조식,석식,다과
등을 감안하면 27,000원 정도의 회비가 각출 됩니다.
현재 물가와 인화물질을 싣고 다니지 못하게 되므로써 현지
식당의 임대비 등 어려운 점이 많아 부득히 회비가 인상이 됩니다.
산행 후의 하산주는 산님들의 땀을 흘린 후의 웃음 마당 이므로
없애지는 못하고 이렇게 회비의 인상으로 되신 합니다.
이점 양지 바랍니다.
7,개 요
오늘도 혼자서 사~알살 길을 나섭니다.
멀지않은 강화 전등사로....
국가사적 제 130호 인 삼랑성
고대 토성의 흔적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단군의 세 아들인 부여·부우·부소가 쌓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이후 토성 자리에 표면이 거친 할석(割石)으로 성을 쌓아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삼랑성은 성 안팎을 할석으로 겹축했으며 할석 사이마다 할석 부스러기로 쐐기를 많이 사용한 구조를 보이고 있답니다.
일반적인 토성과는 다른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삼랑성을 지나 전등사 가는길 입니다.
호젖한 길을 따라 저마다의 가슴을 지닌 사람들이 지나 갑니다.
양헌수 승전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을 물리치고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양헌수(1816~1888) 장군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1873년(고종 10)에 건립. 이 때는 아직 양헌수 장군이 살아있을 때였지만 대원군이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겪은 뒤 외침을 물리친 것을 널리 알리기 위해 기념비를 세운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고 합니다.
전등사 윤장대
불교경전을 넣은 책장에 축을 달아 돌릴수 있게 만든것.
윤장대를 한번 돌리면 경전을 읽은것과 같은 공덕이 있다고 합니다.
제생각으로는 예전에 글을 읽을줄 몰라 경전을 접할수 없는 중생을 위하여 그리 했던것 같습니다.
글을 읽을줄 아는이가 게을러서 경전을 읽지 않고 윤장대만 돌린다고 공덕이 쌓아 지지는 않겠죠?
그냥 저의 생각 입니다.
범종각
대조루
전등사의 남문이나 동문으로 올라와 두 길이 합치는 지점에 이르면 2층 건물이 보이고 1층 이마에는 ‘전등사’라는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이 건물이 바로 전등사의 불이문 구실을 하는 대조루.
1932년에 중건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건물 자체가 주변 경관과 잘 어울리며 전등사의 여러 건물 중에서도 아주 소중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대조루에서 대웅전을 바라볼 때의 시선은 25도쯤 위쪽으로 향하게 끔 설계를 하였다고 합니다.
보물 제178호 대웅보전
나부상
전등사는 1600년 이상의 역사를 간직한 가운데 여러 차례 화재를 겪고 이 때문에 대웅보전도 여러 번 중건되었다. 그 중 지금의 나부상이 만들어진 것은 17세기 말로 추측된다.당시 나라에서 손꼽히는 도편수가 대웅보전 건축을 지휘하고 있었다. 고향에서 멀리 떠나온 그는 공사 도중 사하촌의 한 주막을 드나들며 그곳 주모와 눈이 맞았다.사랑에 눈이 먼 도편수는 돈이 생길 때마다 주모에게 모조리 건네주었다.“어서 불사 끝내시구 살림 차려요.”“좋소. 우리 그림 같은 집 한 채 짓고 오순도순 살아봅시다.”도편수는 주모와 함께 살게 될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대웅보전 불사를 마무리하고 있었다.하지만 공사 막바지에 이른 어느 날 그 주막으로 찾아가보니 여인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며칠 전에 야반도주를 했수. 찾을 생각일랑 아예 마시우.”이웃집 여자가 말했다.도편수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여인에 대한 배반감과 분노 때문에 일손이 잡히지 않았고 잠도 오지 않았다. 그래도 도편수는 마음을 다잡고 대웅전 공사를 마무리했다. 공사가 끝나갈 무렵 대웅전의 처마 네 군데에는 벌거벗은 여인이 지붕을 떠받치는 조각이 만들어졌다.
이것이 전등사 대웅보전에 얽힌 전설이다. 이 나부상이 더욱 재미있는 것은 네 가지 조각이 제각각 다른 모습이라는 점이다. 옷을 걸친 것도 있고 왼손이나 오른손으로만 처마를 떠받든 조각도 있으며 두 손 모두 올린 것도 있기 때문이다.이 전등사 대웅전의 나부상은 희랍의 시지프스 신화를 연상케 한다. 그런가 하면 부처님을 모신 성스러운 전각이지만 그런 조각상을 세운 당시 도편수의 익살과 풍자, 그런 파격을 기꺼이 받아들일 줄 아는 전등사 스님들의 자비로운 마음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과연 그 대웅전을 중건했던 도편수나 스님들은 무슨 뜻으로 나부상을 올려놓았던 것일까?단순히 사랑을 배신하고 욕심에 눈 먼 여인을 징계하고자 하는 뜻만은 아닐 것이다. 도망간 여인이 잘못을 참회하고 세상을 올바르게 살아가라는 염원도 들어있는 것이다. 또 그런 조각상을 보게 될 후대의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자비로운 마음을 본받으라는 뜻도 담겨 있으리라.그렇기에 전등사 대웅보전의 나부상은 보면 볼수록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전등사 홈페이지 발췌)
靈山昔日如來囑(영산석일여래촉)
영산에서 옛날 부처님의 부촉으로
威振江山度衆生(위진강산도중생)
강산에 위세 떨치며 중생을 제도하고
萬里白雲靑장裡(만리백운청장리)
만 리 뻗은 흰 구름과 푸른 산봉우리 속에서
雲車鶴駕任閒精(운거학가임한정)
학이 모는 구름 수레 타고 한가로이 지내시네
佛身普遍十方中 (불신보편시방중)
부처님은 이 우주 모든 곳에 두루 계시니
三世如來一切同 (삼세여래일체동)
삼세의 부처님 다르지 않네
廣大願雲恒不盡 (광대원운항부진)
부처님의 넓고 큰 원력 다함이 없어
威光遍照十方中 (위광편조시방중)
여래의 위대한 빛 시방세계에 비추는데
月印千江一體同 (월인천강일체동)
천갈래 강에 비친 달빛은 모두가 하나라
四智圓明諸聖士 (사지원명제성사)
네가지 지혜에 두루 밝은 성인들이
賁臨法會利群生 (분임법회이군생)
법회에 임하시어 많은 중생 이롭게 하네
地藏大聖威神力 지장대성위신력
지장보살 대성현의 위신력은
恒河沙劫說難盡 항하사겁설난진
항하사겁을 두고도 말로 다할 수 없네.
見聞瞻禮一念間 견문첨례일념간
한 생각만으로 보고 듣고 예배하여도
利益人天無量事 이익인천무량사
인간과 천상의 이익은 한이 없어라.
대웅전에서 바라본 대조루
업경대
죽은 사람이 생전에 지었던 죄업을 보이게 하는 거울로 염라대왕이 갖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이승에서도 필요하지 않을까요?(특히 나에게...)
꽃무릇
상서화
슬픈전설의 상서화...
석모도&보문사
석모도 [席毛島]남한 인천 섬
인천광역시 강화군 삼산면에 속한 섬.
강화도 외포항에서 서쪽으로 약 1.5㎞ 떨어져 있다. 최고봉은 섬의 남쪽에 솟은 해명산(309m)이며, 서쪽과 북쪽에 각각 솟은 상봉산(316m)과 상주산(264m) 사이에는 간척평야인 송개평야가 있다. 해안선은 대체로 단조로우며, 북동쪽에 암석해안이 있을 뿐 대부분 간석지가 발달했다. 특히 남쪽 어유정도(魚游井島) 사이의 간석지는 농경지와 염전으로 간척되어 연결되었다. 한서의 차가 다소 심하며 강우량이 많다. 주민은 대부분 어업보다 농업에 많이 종사한다. 농산물로는 쌀·보리·콩·감자·고추 등을 생산하며, 특히 쌀은 품질이 좋고 생산량도 많다. 연근해에서는 병어·새우·숭어·꽃게 등이 잡히며, 자연산 굴 채취와 김 양식 및 제염업이 활발하다. 취락은 평야와 산저부의 경계를 따라 분포하며, 중심지는 중앙의 석모리이다. 산능선을 따라 작은 도로가 나 있으며 강화도 외포항에서 출발하는 정기여객선이 수시로 운항된다. 문화재로 매음리에 신라시대 635년(선덕여왕 4)에 혜정대사가 건립한 보문사와 보문사석실(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7호)·보문사마애석불좌상(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9호)이 있다. 특히 석실은 천연의 굴로 여름에도 추위를 느낄 정도이고 법당 안에는 20여 개의 자연석 돌부처가 있다. 또한 절 뒤에는 눈썹바위가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든다. 면적 42.43㎢, 해안선 길이 43.75㎞, 인구 2,178, 가구 914(2004).
우리나라 3대 해상 기도 도량인 보문사 유래
강화 석모도 보문사(普門寺)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삼산면 매음리629번지에 위치한 사찰로서 신라 선덕여왕 때(635)에 희정대사가 관음보살을 친견하고 지었다고 한다. 예부터 관음보살이 상주한다는 산의 이름을 따서 이곳 산 이름을 낙가산으로 짖고, 중생을 구제하는 관음보살의 원력이 광대무변함을 뜻하여 절 이름을 보문사라 불렀다고 한다. 창건이후 신라시대 역사는 전해오지 않고, 조선후기부터 전해지고 있다. 순조때(1812) 중건되었고, 고종 때 경산이 석굴 안에 처마를 이어 나한전을 건조하였다. 삼십년 뒤 명성황후의 지시로 객실을 중건하였고, 근래에 이르러 범종각과 요사채를 지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 절은 동해 낙산사(양양), 남해 보리암(금산)과 함께 우리나라 3대 해상관음 기도 도량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절을 처음 짓고 한 십여 년 후, 근처 마을 한 어부가 바다 속에서 그물에 걸린 돌덩이이십여 개를 건져 올렸다. 고기인줄 알았던 어부는 실망하고 바다로 던져버렸고, 다시 그물을 쳤지만 역시 그 돌이 올라왔다. 귀찮아진 그는 이를 버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꿈에 한 노승이 나타나서 천축국에서 보낸 귀중한 불상을 버렸다며 크게 꾸짖고, 내일 다시 건지거든 곱게 가지고와 명산에 잘 봉안하도록 일렀다. 이튿날 이를 건져 올린 어부는 꿈에 본 스님이 시키는 대로 이 쪽 산으로 옮기는데 이 절터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사람모습의 돌덩이가 무거워져 더 이상 옮길 수 없게 되었다. 어부는 바로 이곳이 영험한 장소구나 생각하여 굴 안에다 단을 만들어 모셨다 . 이후 근처에 법당을 지어 이 석불을 모시면서 절과 마을이 차츰 번성해 갔다고 한다.
마니산
마니산(摩尼山) 469.4 m 8,좌석배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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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용원팀---6명
지한두---2명
주미경----마역
윤미자---시청
허종섭입니다 정회원 계시판좀 봅시다/////////
허종섭-----씨엘
여사사회원-----6명
김석동님-----10명 감사합니다
송갑선---4명 진해1 마역3
시청1명 탑승(좌석5번)
옙![!](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54.gif)
백두대간-----2명 씨엘
박해미---임마
대방동 김씨,함씨
땡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