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1년 3월 9일, 오사카성에 도쿠가와 이에야스, 마에다 도시이에, 우키타 히데이에, 모리 데루모토, 우에스기 가게카쓰 등 다이로 다섯 명, 이코마 지카마사, 나카무라 가즈우지, 호리오 요시하루 등 추로 세명, 아사노 나가마사, 마시타 나가모리, 이시다 미쓰나리, 나가쓰카 마사이에, 도쿠젠 겐인 등 부교 다섯 명을 소집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참석해 회의를 시작했다.
"지금이야말로 동서 장수가 힘을 합쳐 명나라를 공격해 무너뜨릴 때요. 그러니 전 일본이 들고 일어나 싸웁시다. 도요토미 전하의 명성을 보여줄 기회가 될 것이오."
왼쪽 상석에 앉아 있던 도쿠가와가 소리 높여 마치 참석한 장수들을 고무시키듯이 힘을 주어 말했다. 그 뒤에 더 이상 다른 의견이 없어 도요토미가 이어서 말했다.
"규슈, 오우를 평정한 것도 여기 참석한 여러분의 조력이 있었기에 가능했소. 오다 노부나가 전하가 이루지 못했던 대사업이자 내 마지막 과업이며 일본 무가의 자랑이기도 하오. 명을 정복하면 천황을 명으로 옮겨드리고 히데쓰구를 간파쿠에 앉혀 다스리게 하고 조선 지역은 여기 출석한 다이로들에게 맡길 생각이오. 명 공략에 나서는 장수들에게는 그 활약에 따라 명과 조선의 영지를 나누어 줄 생각이오."
다이코 도요토미 전하는 가까운 시일 내에 명을 공략할 것이다. 그 길 안내에 대해서는 고니시 유키나가와 조선과 교류가 깊은 서쪽 지역 장수가 조선과 협상하고 있다. 조선이 답변을 안 할 경우에는 조선도 정벌할 것이다. 또한 출진기지를 규슈 나고야로 정했다. 선박 1천여 척을 담당하는 부교 자리는 구키 요시타카에게 맡기고 이세의 장수들에게 그 배를 만들라고 명령을 내렸다.
또 조카 도요토미 히데쓰구에게 간파쿠 직을 물려주고 앞으로 도요토미는 '다이코'라 부르라는 지침도 그 자리에서 고지했다.
도요토미의 명을 받은 쓰시마 번주 소 요시시게, 요시토모 부자는 하카타에 있는 쇼후쿠지의 승려 케이테쓰 겐소와 함께 조선 국왕에게 갔다. 도요토미는 조선 국왕에게서 인질과 공물을 바치겠다는 약속을 받아오라고 명령했지만 소 부자는 조선이 그런 약속을 해줄 턱이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명나라를 공격한가고? 동쪽 섬나라 왜가? 소 각하는 이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전하는 사절이 되어 일부러 한성까지 왔단 말이옹?"
"다이코 전하는 진심으로 조선과 명을 지배할 생각입니다."
"더워서 왜가 미쳐버린 거 아니오?"
"부디 통신사를 파견하시어 일본의 상황을 살피시고 다이코 전하의 생각을 들어보시기 바라는 바입니다."
1년 반이 지나 1591년 3월 도요토미를 알현한 조선통신사가 조선으로 귀국하여 즉각 국왕에게 보고했다.
그 보고회는 처음부터 혼란스러웠다. 정사 황윤길은 "일본군이 조선을 침략할 것이다."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보고한 데 반해 부사 김성일은 "당분간 침략은 없을 것이다."라고 에둘러 말했다. 정사 황윤길은 서인이고 부사 김성일은 동인에 속해 있었는데 이때는 동인의 세력이 조금 우세했다.
두 조선통신사는 1590년 3월에 한성을 출발해 4월 하순에 부산항을 떠나 7월에 교토에 도착하는데, 그때 일본 정부는 한창 오다와라를 침공하던 중이었다. 두 통신사는 11월 7일이 돼서야 겨우 도요토미를 주라쿠다이에서 접견했다.
도요토미는 환영 연회에서 어린 쓰루마루를 안고 연회석을 뛰어 돌아다니며 노는 형국이란 참으로 가관이었다. 도요토미가 조선통신사와 말도 하려 하지 않아 중신들은 기가 막혀 어이없어 했다.
조선통신사는 귀국 전에 조선 국왕에게 바칠 답서를 요청했다. 답서가 준비되지 않았음을 안 부사 김성일은 지난번 한성에 왔을 때 통신사 파견을 요청했던 소 요시토모와 게이테쓰 겐소에게 답장을 작성해달라고 재촉했다. 김성일은 사카이미나토 항구에서 답장을 받았지만 그 서찰은 유교 상식을 벗어나 무례하고 방자해 그것을 다시 겐소에게 수정토록 해서 가지고 돌아갔다. 한편 정사 황윤길은 처음에 건네 받은 도요토미의 원래 답장을 가지고 돌아갔다.
부사 김성일이 보고한 '일본군의 침략은 없다.'의 배경에는 '상식이 없는 무례한 나라가 대국 명나라 공격이라는 엄청난 계획을 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밑바탕에 깔려 있었다.
1진: 소 요시모토 하시바쓰시마 지주 쓰시마. 부추 나가사키현 5,000명
고니시 유키나가 세쓰노카미 히고.우토 구마모토현 7,000명
마쓰우라 시게노부 교부코 히젠.히라도 나가사키현 3,000명
아리마 하루노부 슈리다유 히젠. 히노에 나가사키현 2,000명
오무라 요시아키 시모탄노고카미 히젠.오무라 나가사키현 1,000명
고토 스미히로 야마토노카미 히젠.후쿠에 나가사키현 700명
2진: 가토 기요마사 가즈에노카미 히젠.구마모토 구마모토현 10,000명
니베시마 나오시게 가가노카니 히젠.사가 사가현 10,000명
하타 지카시 미카와노카미 히젠.가라쓰 사가현 2,000명
사가라 요리후사 미야우치다유 히고.히토요시 구마모토현 800명
3진: 구로다 나가마사 가이노카미 부젠.나카쓰 오이타현 5,000명
오토모 요시무네 하시바분고지주 분고.후나이 오이타현 6,000명
4진: 모리 요시나리 이키노카미 분고.고쿠라 후쿠오카현 2,000명
시마즈 요시히로 하시바사쓰마지주 오스미.구리노 가고시마현 10,000명
다카하시 모토다네 구로 휴가.아가타 미야자키현 2,000명
아키즈키 다네나가 산로 휴가.다쿠나베 미야자키현
이토 스케타카 민부다유 휴가.오비 미야자키현
시마즈 도요히사 마타시치로 휴가.사도와라 미야자키현
5진: 후쿠시마 마사노리 사에몬다유 이유.이마바리 에히메현 4,800명
도다 가쓰타카 민부노쇼 이요.오스 에히메현 6,900명
요소카베 모토치카 하시바도사지주 도사.우라도 고치현 3,000명
하치스가 이에마사 마와노카미 아와.도쿠시마 도쿠시마현 7,200명
이코미 치카마사 우타노카미 사누키.다카마쓰 가가와현 5,500명
구루시마 미치유키 도쿠이 이요.에라 에히메현 700명
구루시마 미치부사 이요.구루시마 에히메현
6진: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바고바야카와지주 지쿠젠.나지마 후쿠오카현 10,000명
고바야카와 히데카네 하시바구루메지주 지쿠젠.구루메 후쿠오카현 1,500명
다치바나 무네시게 시바야나가와지주 지쿠고.야나가와 후쿠오카현 2,500명
다카하시 무네마스 주젠 지쿠고.미이케 후쿠오카현 800명
지쿠시 히로카도 고스케노카미 지쿠고.후쿠시마 후쿠오카현 900명
7진: 모리 데루모토 아키사이쇼 아키.히로시마 히로시마현 30,000명
8진: 우키다 히데이에 비젠사이쇼 비젠.오카야마 오카야마현 10,000명
9진: 도요토미 히데카쓰 기후사이쇼 미노.기후 기후현 8,000명
호소카와 다다오키 단고쇼쇼 단고.미야쓰 교토부 3,500명
합계: 158,800명
자료: 히데요시와 분로쿠.게이초노에키(2007년 10월, 사가 현립 나고야성 박물관 소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1555년에 사카이에 있는 약장수 집안에서 태어나 전댕이 일어났을 때가 37살이었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천주교 신자가 되어 처음에는 우키타 히데이에의 외교 담당 사자로 일했다. 고니시는 전쟁 전략도 뛰어났지만 교섭 능력도 뛰어나 전쟁 마지막까지 이 전쟁을 피하기 위한 책략을 세워 도요토미가 조선 철수를 명하기 바로 직전까지도 강화 교섭을 전개했다. 일본군의 온건파라 할 수 있다.
한편 가토 기요마사는 1562년에 도요토미와 같은 고향 오와리노쿠니 나카무라에서 태어나 도요토미와 인연이 깊으며 전쟁이 일어났을 때가 30살이었다. 도요토미를 섬기고 수많은 전공을 세우면서 혈기왕성한 장수로 자라 평생에 걸쳐 충성을 바쳤다. 고니시와 함께 히고 지역 땅을 하사받아, 출진 3년 전에 고니시 소유 지역인 아마쿠사에서 일어난 반란을 고니시 유키나가보다 앞장서 출병해 순식간에 진압하는 등 선진속공의 장수로 무용을 제일주의로 생각하는 일본군의 강경파에 속했다.
1592년 4월 13일 새벽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제1진, 백여 척의 아타케 병선이 부산항에 줄줄이 도착했다.
조선왕조는 일본군의 침략을 예견하고 부산진성에 특사로 정발을 파견했다. 정 사렴관은 전날 영도로 사냥을 나갔다가 저녁에 해협에 있는 병선을 발견하고 서둘러 부산진성으로 달려갔는데 그는 일본군이 이렇게까지 대군일 줄은 미쳐 생각하지 못했다.
고니시와 소는 전쟁 시작 전부터 몇 차례나 해당지역을 방문해 부산이나 동래 같은 시가지나 성내 지리 정보는 물론 일본어를 할 수 있는 현지인의 소재 정보까지 파악해 놓았다.
고니시 군대는 오전 6시경에 상륙을 개시했다. 부산항 수비대는 화살을 쏘고 돌을 던졌지만 처음 보는 일본군의 화승총에 놀라 이내 응전을 포기하고 부산진성으로 도망갔다. 고니시 군대는 부산진성을 에워싸고 성의 후방에서도 공격해 불과 약 3시간만에 부산진성을 함락시켰다. 3백 채 민가를 불사르고 8천 5백명의 목을 자르고 2백여 명을 생포했다.
동래는 지방부가 있는 곳으로 성에는 중앙에서 보낸 병마특사 이각, 수군특사 박홍과 동래부사 송상현이 수비대 1만 2천 명을 통솔하며 성을 지키고 있었다.
"소는 서둘러 동래성 안에 있는 송상현 나리에게 '가도입명'이란 글을 보내 일본의 뜻을 잘 간파하고 직접 한성으로 가서 국왕과 재차 교섭을 주선하라 하시오."
동래부사 송상현은 전쟁 시작 전에 고니시와 소, 야나가와가 전쟁을 피할 목적으로 조선을 분주히 드나들 때 그들을 동래성에 초대해 친목 연회를 베풀어주며 수고한다고 위로해 주었던 사람이었다.
야나가와가 소에게 직접 설득할 것을 재촉하려고 진영으로 돌아간 사이 송상현은 갑옷을 벗고 붉은 조복으로 갈아 입고는 '달무리처럼 포위당한 외로운 성, 대진의 구원병은 오지 않는데, 군신의 의리는 무겁고, 부자의 은혜는 가벼워라.'는 유서를 남기고 소를 만나기 전에 자살했다.
그날 오후 2시 경에 동래성도 함락당했다. 소는송상현의 시신을 동문 가까이로 옮기고 목패를 세워 장례를 치렀다.
고니시 군대는 이틀 후에 한성을 향해 진군을 개시하여 4월 17일에는 밀양성을 공략하고 24일에는 상주에서 진을 치고 기다리던 병마특사 이일의 군대를 물리치고 한성의 요새인 충주 바로 앞까지 공격해 나갔다.
14일 동래성 공격 때 투항했던 울산군수 이언성에게 강화 교섭 의행을 적은 서한을 지참시켜 한성으로 올려 보냈다. 그러나 울산군수는 일본군 사자가 된 것에 대한 죄책감과 수치심으로 도망가 버렸다. 개전 후고니시의 최초 교섭전략은 실패로 끝났다.
이 수행자의 이름이 삼평이었다. 충청도 계룡산 기슭 학봉리에서 청년 다섯 명이 속리산 법주사로 불문수행을 하러 왔으며 나이토 조안 군대를 만나 처음으로 나라에 이변이 생겼음을 알았다.
4월 17일 가토의 병선이 고니시 군대보다 닷새 늦게 부산항에 도착했다. 가토는 부산항에 정박 중인 고니시의 병선을 보자 부산에서 서쪽으로 80리 정도 떨어진 웅천으로 방향을 돌리라고 명령했다.
가토의 병선을 따라온 나베시마의 병선은 부산과 웅천 중간을 흐르는 낙동강으로 들어가 하구에 있는 죽도에 상륙했다. 죽도는 출진 1년 전에 통력가로 데리고 온 이종환의 고향으로 지리를 꿰뚫고 있었다. 나베시마는 나중에 여기에 죽도왜성을 세우고 임진왜란 동안 조선 체재의 거점으로 삼았다.
제2진의 가토 군은 조선반도 동해 쪽으로 진군하며 한성으로 향했다.
제1진인 고니시 군대가 이미 부산, 동래, 밀양 그리고 상주 등 조선 경상도 요충지에서 일본군의 위세를 떨치기는 했으나 한편으로 동남해 쪽 경상도 조선 장수들이 비록 소규모지만 가토 군의 진군을 저지하려고 들판에서 싸움을 걸어왔다. 가토 군은 이들을 거침없이 격파하고 양산과 언양을 신속하게 공략하며 진군했다.
제2진 총대장인 가토는 본디 혈기왕성한 성격에다 점령지 영토 배분에서 고니시에게는 질 수 없다는 과잉 경쟁 본능이 가세해 도요토미가 내린 '군기유지규정'같은 것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4월 20일에는 경주의 고찰 불국사의 거의 모든 불당을 태우고 22일에는 영천에서 조선군을 격파하고 한성의 요새 충주를 향해 나갔다.
이들은 출진 전부터 충주에서 집결한 뒤 공조해 한성으로 진군한다는 전략이 짜여져 있었다. 또한 구로다 나가마사의 제3진과 모리 요시나리와 시마즈 요시히로의 제4진,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와 다치바나 무네시게의 제6진이 한성 공격에 가담한다는 전략도 이미 세워져 있었다.
고니시 군은 가토 군보다 빠른 속도로 충주로 진군해 조선왕조가 파견한 병마특사 신립이 이끄는 8천 기마대를 충주성에서격파했다. 다음날 28일에 가토 군은 충주로 들어가 교외 조령관문에서고니시 군과 합류해 한성 진군 노선을 의논했다.
두 사람보다도 나이가 많은 나베시마가 고니시를 타이르며 제안했다.
"고니시 각하는 선두로 출진하시어 훌륭한 성과를 올리셨습니다. 앞으로 양군이 하나로 뭉쳐 나가려면 명사 수가 많아 움직임이 둔해질 것입니다. 한성까지 가는 길을 알아보고 둘로 나누어 진군함이 어떤지요?"
그 결과 한강을 건너고 죽산을 경유해 한성 남대문에 이르는 총 백리의 노선과, 총 백2십리로 조금 멀고 산을 넘어야 하지만 큰 강은 없고 여주를 경유해 한성 동대문에 이르는 노선이 있슴을 알았다. 가토는 한강이 있다해도 거리가 짧은 쪽이 유리하다고 보고 먼저 죽산 경유 노선을 선택했다. 고니시는 슬며시 웃으며 여주 경유 노선을 승낙했다.
고니시는 한강 왼쪽 강변 쪽으로 먼저 가게 해서 연안에 있는 배를 떼어 놓거나 근처 민가를 불태워 가토 군이 한강을 건너는 것을 방해할 책략도 꾸몄다.
4월 30일에 한강 왼편에 도착한 가토는 강을 건널 배가 없고 뗏목을 만들려고 해도 민가가 불타버려 한성을 목전에 두고 두득이 바로 건너편에 진을 칠 수 밖에 없었다.
한편 고니시 군은 4월 30일에 한강 지류인 여천을 뗏목으로 건너 다음 날 5월 1일 동대문 앞에 도착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성문 겅뱁병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성내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한성 도성 주빈들은 일본군이 두려워 백성을 버리고 도망간 왕조에 분노하여 고니시 군이 입성하기 전에 관청 시설을 불태웠다. 백성들이 제일 먼저 습격한 곳은 호적이 보관된 장례원이었다.
동해 경주 쪽으로 간 가토 군과 달리 서쪽 전라도 쪽으로 진군한 것은 구로다 나가마사와 오토모 요시무네의 제3진, 모리 요시나리와 시마즈 요시히로의 제4진, 고바야시 다카카게와 다치바나 무네시게의 제6진을 햡해 4만명이었다. 4월 17일 히우, 부산포 혹은 낙동강 하구 김해나 구포에 연이어 상륙하여 창원과 창녕, 성주를 거쳐 서쪽으로 가서 청주를 경유한 뒤 한성으로 향했다.
이 진군을 막은 사람은 조선왕조 파견군과 지방의 의병이었다. 경상도에서 곽재우가 의병을 조직해 거병한 것을 기점으로 의령에서 봉기한 의병은 창녕에서 서쪽 전라도로 진군하려고 했던 고바야카와 군에 소속된 안코쿠지 에케이 군을 저지했다.
화승총이나 조총 그리고 긴 칼로 공격하는 일본군이 무서워 전쟁을 포기하고 줄줄이 도망가는 조선 관리들과 달리 화살과 죽창, 투석 같은 허술한 무기로 지리의 이점을 이용해 유격전을 벌이는 의병 쪽이 일본군을 더 힘들게 했다. 이 때문에 일본군은 행동 하나라도 혼자 하지 않고 백 명이 몰려다녀야 했다.
서쪽으로 진군하는 군대 중 제6진의 고바야카와 군은 성주에서 가야산, 덕유산의 북부 산중에서 금산으로 나와 한성으로 향했다.
제3진 구로다 군과 제6진 고바야카와 군은 4월 25일, 거뜬히 성주성을 점거하자 그 진에서 다도회를 마련했다. 성주 성내에는 분청사기 찻잔이 많이 남아 있어 다도회 자리에서 장수들은 "이대로 나고야에 가지고 가 다이코 전하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구려." 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도자기 제작이 활발한 히젠의 나베시마와 하타를 부러워했다.
그러고 나서 이틀 후 고바야카와 군에 소속된 다치바야 무네시게 군의 2천 5백 병사가 계룡산 기슭에 이르렀을 때 산 쪽 밭가에 많은 사람들이 무리지어 있었다. 다치바나 무네시게의 중신인 오노 시게유키의 부하가 발이 잽싼 병사 몇 명에게 무리를 헤집고 들어가라 고 명령했다.
"이 도자기를 만든 사람이 누구냐?"
"우리들 외에 다섯 명이 같이 구웠소. 그들은 속리산 절에서 수행 중인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소."
"너희 기술자와 그 도자기를 우리 전하에게 보여주고 싶은데 같이 가자."
나카무라가 그렇게 통역에게 말하고 병사들이 늘어놓은 도자기를 집어 들고는 옆에서 돕고 있는 여자의 팔을 잡자마자 마을 사람 한 명이 깨진 밥그릇 조각을 집어 들어 병사를 향해 던졌다. 그것이 병사의 얼굴에 맞아 피가 흘렀다. 얼굴이 피범벅이 된 병사는 가지고 있던 칼로 마을 사람의 오른쪽 가슴을 찔렀고 마을 남자 몇 명이 젊은이들을 지키려고 저항하자 오노의 병사들이 마을 사람들에게 칼을 들이대는 소동이 일어났다.
다치바나의 의향도 있어 우선 젊은 사기장과 여자 두 명을 고바야카와 와 합류하기로 한 곳까지 데리고 가기로 했다. 이 사기장이 바로 삼평의 형 규일이고 여자 한 명은 누나 이랑이고 다른 여자는 가마소 주인의 딸인 임이화였다.
그러고 나서 이틀이 지난 4월 30일 저녁에 속리산 법주사에 불문수행 하러 갔던 학봉리 젊은이 다섯 명이 귀향했다. 다섯 명은 마을 사람들에게서 이야기를 듣자마자 가마로 달려갔다.
도자기들과 가마 아궁이 벽돌이 산산이 흩어져 있고 여기저기 멍석 밑에는 참살당한 마을 사람들의 시체가 있었다. 다섯 명은 흉측하게 변한 시체들을 덧문짝에 싣고 산쪽으로올기기 시작했다.
고향에 돌아온 젊은이들은 학봉리의 부농이며 가마 주인 임씨의 장남 임원진이 18세, 평민인 김미석이라는 청년도 18세, 그 동생 김순석은 14세, 같은 평민이지만 땅도 없는 소작농인 대식이 16세 그리고 같은 신분인 삼평이 15세로 모두 다섯 명이었다.
학봉리는 계룡산 동남방에 있는 부채꼴 모양의 땅으로 금강 지류의 용수천과 그 지류 사기소천이 흐르고 있었다. 일대의 산 쪽에는 조선시대부터 가마가 산재해 있고 상감기법을 쓰는 분청사기의 산지이기도 앴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농사를 짓고 추수가 끝날 무렵부터 도자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당시 조선이나 일본에서 볼 수 있는 반농반도이 지역이기도 했다.
임원진과 친구들 다섯명은 학봉리 산속에 있는 동학사 스님이 이야기해준 속리산 법주사에 흥미가 생겨 그해 마지막 가마에 불을 다 땐 4월 10일부터 보름동안 수행을 하러 떠났다.
그런데 4월 20일에 불문 수행하던 법주사에서 고니시 군대의 나이토 군을 만나 화살을 맞을 뻔했던 삼평은 구사일생으로 살아 남았다.
임진강 전투
고니시 군대 앞에서 계속 도망치는 조선 국왕은 이에 대비해 임진강 남쪽 연안 일대를 불태우고 배는 모두 북쪽 연안에 정박시키고 조선 장수 김명원이 이끄는 1만 2천의 병력을 배치시켰다.
가토 군은 임진강을 건널 배를 찾아 서쪽 하구 방면으로 이동했다.
고니시는 가토 군이 없을 때 강화교섭을 진행하기로 했다. 그리고 연안에서 돌을 던져 조선쪽에서 섳ㄹ을 받았으면 했지만 가토 군이 강 연안으로 진을 치러 돌아고기 시작했기 때문에 건너편 조선군의 응답을 받지 못하고 실패로 끝났다.
다음 날인 27일 가토 군이 진을 해체하는 때를 가늠해서 야나가와 시게노부는 작은 배 한 척을 준비해 놓고 장대 끝에 서찰을 붙여서 보내자 건너편에서 작은 배 한 척이 다가와 강화교섭을 촉구하는 서찰을 받아가 겨우 성공했다.
야나가와는 이때 조선군을 자극하지 않도록 고니시 군이나 구로다 군을 연안에서 남쪽 파주로 물러가게 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세를 살펴보던 조선군 방어사 신할과 순찰사 한응인 등은 건너편 일본군이 후퇴하기 시작했다고 착각하고 김명원 등의 반대를 물리치고 임진강을 건너 고니시 군의 잔류 병선을 포위하고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 상황을 서쪽에서 보고 있던 가토 군 병선이 구원하러 달려와 조선군을 격파해 강화교섭은 즉시 깨져 버렸다.
"조선 국왕은 이곳 개성을 떠나 평양을 거쳐 지금은 국경 의주에 있습니다. 개성을 떠날 때 왕비와 왕자 둘은 의병을 모으기 위해 국왕과 헤어져 함경도를 거쳐 지금은 오랑캐 땅에 있다고 합니다."
"오랑캐 땅이라니 거기가 어디냐?"
"조선에서가장 북쪽 끝이고 명나라의 북동쪽에 있는 여진족의 나라입니다. 조선의 죄인이 유배 가는 곳입니다."
"겨울에는 춥겠군."
"추위가 너무 심해 얼어붙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합니다."
나베시마 나오시게 본진은 21일에 함흥성에 들어가 통역을 통해 성의 관리들에게 길주의 상황을 들었다. 함흥과 길주 사이에는 평안성을 비롯하여 수만의 병사가 굳건히 지키고 있는 난공불락의 성이 4개가 있다고 했다. 나베시마 나오시게는 나리도미 시게야스와 오가와 이에토시를 선봉으로 삼아 병사 2천 명이 공격해서 며칠 사이에 그 성 4개를 함락시켰다.
가토 군대의 선봉을 맡은 나베시마 군 소곡인 난리 시게토시에게 산속에 서 나온 남자가 고했다.
"임해군과 순화군 두 왕자가 바로 앞 들판에 있는 옥사에 갇혀 있소. 일본군이 구해 주기 바라오."
"왜 왕자가 옥에 있소?"
"왕자는 한 달 정도 전에 의병을 모아 회령 성내에 들어갔는데 그만 전날 성내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그때 잡혀서 지금은 여진족의 점령지에 있는 옥사로 옮겨졌소."
7월 23일 저젹 무렵 감시가 호홀한 시간을 틈타서 가토 군대의 정예부대가 줄줄이 축사로 돌진했다. 갇혀 있는 사람들은 임해군과 순화군 두 왕자와 왕비 12명 그리고 중앙정부의 관료와 시중을 드는 궁녀 등 총 2백명 정도였다. 며칠 동안 식사를 제대로 못했는지 공포심도 잊고 먹을 것을 달라고 했다.
회령부사국경인을 선봉대장으로 삼고 조선 왕자 둘을 경호하기 위해 하얀 깃발에 '남무묘법연화경'이란 일곱 자를 써서 말에 매달고 가토 스스로 후미를 맡았으며 조총부대에게 조총 2백정을 주고 경비를 맡겼다.
이때 여진족 기마대 3만 명이 공격해 왔지만 가토 세 군대가 힘을 합해 물리치고 거구이며 귀신처럼 생긴 적장 세류두자수 장군도 생포했다.
20년 전에 오슈 마쓰마에 에서 표류해 제주에 정착했다는 일본인 어부를 생포해 가토는 고토 지로라 이름 지어 주고 통역 담장으로가토 군대에 편입시켰다.
가토 군대는 사흘째에 고토 지로의 길 안내를 받아 함경도로 돌아가는 도중, 연하라는 마을에 진을 치고 자는데 이번에는 조선의병 2천 명이 공격해 왔다.
가토는 양양산 꼭대기에 진을 치고 견디었지만 의병이 계속 공격해 와서 나베시마 군이 있는 장교성으로 사자를 보내 지원을 요청했다. 나베시마 나오시게는 즉시 나리도미 시게야스 등 병사 2천 명을 지원군으로 보냈다.
가토 군대는 길주의 각 성에 가토 세이베나 구키 시로베 등중신들을 남기고 왕자와 왕비, 관료들을 데리고 9월 11일에 안변성으로 귀환했다.
고원성 근처에서 9월 하순에 의병이 봉기했다. 그 이후로도 함경도 각지에서 의병이 출몰하고 대부분이 성내 식량고를 노렸다.
10월 16일에는 의병 5만 명이 함흥성을 습격했다. 의병대 지휘관은 매천과 매백 형제인데 한남인으로 가토 군대가 여진족 지역에서 귀환할 때 귀환을 막으려고 끝까지 공격했다.
고니시는 힘을 잃은 조선 국왕보다도 목전에 있는 명나라를 공격하기로 이 전쟁의 목적을 바꾸었다. 고니시는 한성에 있는 총대장 우키타 이데이에에게 전하고 이 여세를 몰아서 고니시 군 2만은 압록강을 건너 명나라를 공격하고 싶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일의 중대성을 알 수 없었던 총대장 우키타는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명나라는 4월부터 일본 군대의 움직임에 대한 정보를 이미 파악하고 있었지만 즉시 지원군을 파견하기를 주저했다. 지금까지 조선왕조가 명나라의 허가 없이 일본에 국사를 파견하거나 그 후의 정세를 정기적으로 보고하지 않은 점에 의심을 품은 일부 관료가 "조선이 뒤에서 일본과 내통하는 게 아니냐,"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게다가 명나라는 신종 황제가 내정을 게을리 해 왕의 권력이 약히진 데다 조선 전쟁보다 부부 국경에서 계속 발생하는 반란 진압 대책에 쫓기는 등 자국의 안정책에 허덕이던 내부사정도 있었다. 그러나 조선 국왕이 상황 보고와 구원요청에 명나라도 이젠 결단의 필요성을 겨우 인식했다.
명나라는 7월 요동 국방군 조승훈을 총대장으로 삼아 파병을 결정했다. 그리고 조승훈은 의주에 주둔하고 있던 사유산 장군이 지휘하는 기마병 3천을 펴양의 서쪽 안정관으로 보냈다.
고니시 군대는 재빠르게 안정관으로 가서 16일에 공격을 감행했다. 사유산 장군은 전사하고 명나라 군대는 요동으로 도망갔다. 평양으로 돌아온 고니시는 명나라가 참전한 사실을 직접 나오야에 전하고 이시다 미쓰나리에게 기마병 6천 명을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때 다테 마사무네와 아사노 요시나가 등 능력 있는 장수의 출진도 요청했다.
그 후 조승훈 총대장은 심유경을 유격장군으로 의주에 파견했다. 심유경은 고니시와 성격이 비슷해 전략을 즐기는 장수로 8월 30일에는 즉각 평양에서 고니시를 만나 우선 50일 동안 휴전협정을 맺기로 했다. 그 사이에도 명나라는 지원군 준비를 진척시며 옹응창과 이여송을 대장으로 삼고 10만 벙사를 배치해 명나라의 지원군은 9월 25일에 북경을 출발했다.
심유경은 11월에 고니시와 평양에서 다시 회담을 열어 "명의 지원군이 요동에서 대기하고 있다." 협박하며 조선 왕자를 반환하고 일본군이 한성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고니시는 "본국에서 지원부대가 바다를 건너오고 있다." 고 허세를 부리며 이 제안을 거부했다.
고니시는 이때 7월 안정관 전투에서 명나라군을 격파한 기세를 타고 그 길로 명나라를 공격하지 못한 것을 굉장히 준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거듭되는 격전으로 병력이 점차 감소하는 데다 익숙하지 않은 겨울 전쟁에 내몰리고 있음을 숙지하면서 명나라군과 본젹적인 전투대세에 들어갔다.
명나라가 자랑하는 무적의 용사 이여송을 총대장으로 한 지원군 5만 명이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왔다. 의주에 있던 조선 장수 유성룡에게서 일본군의 정세를 들은 명나라는 대포를 주력무기로 해 평양으로 진군했다.
한성에 있는 총대장 모리 히데모토는 이 소식을 듣고 일본의 각 군 대장들에게긴급 소집 명령을 내렸다. 나베시마 군대는 시모무라 쇼운을 한성으로보냈다. 도중에 의병이 방해했지만 성 일곱 곳에서 10정씩 조통을 받은 조총부대가 경호했다.
이때 모리 히데모토 등 총대장 세 명은 명나라의 지원에 용기를 얻어 조선군은 물론 의병도전력을 증가시킬 것을 예상해 방어 태세를 재정비할 수 있게 한성으로 귀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함경도의 가토 세 군의 각 성은 폭설에 갇힌 가운데 이국에서 처음으로설날을 맞았다. 나베시마 군 일곱 개 성은 작년 11월 함흥 반란을 제압한 후로는 평온한 나날을 보내다 설날을 맞이해 활기찬 연회를 열었다. 그리고 닷해 후 시모무라의 보고를 받고 함경도의 성들은 한성 귀환을 준비했다.
안변성의 가토 기요마사는 작년 연말에 길주에 재차 주둔한 가토 군의 성 여섯 곳과 연락이 끊겨 그 안부가 걱정돼 설날 연회도 연기했다. 이 때문에 가토 군대는 길주 성 여섯 곳 부하들과 늦게라도 같이 한성으로 올라가기로 하고 함흥성의 나베시마 군대에게 조선 두 왕자의 경비를 맡기고 일단 길주로 향했다.
가토의 걱정은 적중해서 작년 가을부터 의병이 길주 성 여섯 곳을 습격했는데, 그 중 금산성에서는 의병이 겹겹으로포위해 2개월 남짓 동안 성에 갇혀 병사 수는 격감하고 남은 병사들도 피로가 중첩돼 상황이 아주 어려웠다.
가토 군대와 나베시마 군대는 포위한 조선군을 각 성에서 전부 무찌르고 가토와 사가라 군의 남은 병사들을 구출했다. 그러나 나베시마 군의 지원병 대부분이 죽어 겨우 1월 15일이 되어서야 귀로에 오를 수 있었다.
한성으로 귀환하는 길에서도 의병이 공격해 와 엄동설한 농성전에서 장수들 대부분이 동상을 앓아 만신창이가되어 2월 말에야 가토 세 군대는 겨우 한성으로귀환할 수 있었다.
조선 남부로 후퇴
"뭐지? 저 소리는?"
"모르겠습니다. 큰 불덩이가 날아와 우리 진을 파괴하고 다음에는 기마병이니 창칼을 든 보병이 공격해 옵니다."
"좋아, 조총부대가 쏴라!"
"추워서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조총을 쏠 수가 없습니다."
"도망가자, 움직일 수 있는가?"
"발은 내 발인데 꼼짝도 안 합니다."
명나라 군은 1593년 1월 7일, 평양에 도착해 진을 치고 일본군 조총에 맞서 대포로 공격했다.
고니시 군대는 처음 경험하는 대포전술에 고전하다가 부득이 후퇴해야 했다. 또한 병사들은 혹한과의 싸움에서 전의를 상실했다. 얼어붙은 대동강에서 지금까지의 전장에서와 달리 일본군은 갈팡질팡 도망가기에 바빴다. 고니시 군대는 개성까지 후퇴해서 태세를 정비한다는 전략을 세웠지만 이미 장수들의 모습에서 싸울 기력은 찾아볼 수 없었고 그저 명나라군에게 밀려 퇴각할 뿐이었다.
바다를 건널 때 1만 8천여명이던 고니시 군대는 20일 한성으로 귀환했을 때에는 7천 명까지 줄어들었다.
26일 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군에 소속해 있는 다치바나 무네시게 군 병사가 한성 북부에 있는 벽제관에서 밤 순찰을 돌다가 광석령에서 명나라 병사와 맞닥뜨려 다치바나 병사가 그들을 무찔렀다.이것이 전초전이 돼 그 다음 날에 이여송은 병사 2만 명을 이끌고 벽제관을 공격하고 고바야카와 군이 이에 맞서 싸웠다.
이여송은 대포부대 대신에 자신의 자랑스러운 기마대 2천 명으로 공격했다. 이때 고바야카와 군의 병사는 2만여명으로 고바야카와 군이 주력부대로 해서 싸우고 다치바나와 모리 군은 창과 칼로 기마대에 대응했다.
다치바나 군의 도토키 덴에몬이 가장 먼저 창을 잡아들고 이노우에 고로가 창으로 이여송을 찔렀다. 이여송은 갑옷으로 무장하기도 했지만 근처 부하가 구해 주어 간신히 살았다. 이 싸움에서 부대장 이여순을 비롯해 조명연합군 기마병 1천 명이 죽었다. 이 패전으로이여송은 힘을 잃고 파주로 후퇴한 후 명나라군을 개성으로 물러가게 하고자신의 전의 상실증에 빠져 평양까지 물러가 버렸다.
그 후 이여송을 대신하여 명나라군의 지휘를 맡은 송응창은 무익한 싸움을 벌이지 않고 우선 일본군을 한성에서 퇴각시키는 책략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벽제관 패배는 큰 오산에 기인했지만 임진강은 이미 명나라군 관리하에 있었다.
일본군도 개전 당시 15만 명의 전력이 8만 명까지 줄어들었다. 작년 5월에는 거의 부상자가 없는 상태로 한성에 집결해 조선 팔도 분할 통치를 협의하던 그 화려했던 한성의 하늘이 단번에 바뀌었다. 지금은 부하 대부분이 죽었고, 그나마 살아남은 자도 부상을 입거나 동상을 앓고 굶주림에 몰리는, 한성의 봄 하늘에느 무거운 공기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전황을 시찰한 이시다 미쓰나리도 더 이상 전투에 승산은 없으며 명나라로 진군하는 것도 도저히 불가능함을 실감하고 우선 먼저 철수 작전 검토에 들어갔다.
한편 조선왕조는 명나라의 군량 조달이나 병기 운반 작업 등 이중 부담에 허덕이면서도 일본군을 다시 공격해 달라고 시시때때로 재촉했다. 조선 군대와 의병대의 사기가 오르고 있는 지금 재빨리 명나라군이 일본군을 공격해 물리쳐 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명나라군은 그런 조선을 도외시하고 일본군만을 상대로 강화교섭을 했다.
명나라군 총대장 송응창은 1년간 계속 도망만 다니다 세월을 보낸 조선왕조의 무기력함을 평소 비난했는데 이제 상황이 좋아졌다고 끼어드는 조선이 힘히 불괘했다. 이해 3월에는 종종 명나라의 유격장인 심유경과 고니시 유키나가 둘만이 강화회담을 하더니, 4월 1일에는 일본군과 명나라군이 한성 남쪽 외곽에 있는 용산에서 강화회담을 열어 일단 쌍방 합의를 봤다.
그 내용은 '일본군이 우선 부산까지 철수하지만 조선이 원하는 왕자 두 명의 반환은 거부한다. 명나라군도 요동까지 후퇴하고 명나라의 강회회담 사신을 나고야에 파견한다.'는 것이었다.
1593년 4월 18일, 고니시 군은 동대문에서, 가토 군은 남대문에서 제각기 한성을 뒤로 했다. 일본군 속에는 가토가 함경도에서 생포한 임해군과 순화군 두 왕자 일행과 고니시와 심유경이꾸민 강화회담 내용대로 명나라의 가짜 사신, 사용재와 서일관 두 명도 동행했다.
1년 전과 달리 어느 군대도 앞을 다투는 일이 없었고 나베시마 군이 가장 마지막으로 뒤를 따라 조선 남동부 경상도 울산을 향해 떠났다.
나베시마 군 소속 류조지 이에히사의 부하인 마쓰라 사콘노죠의 하인이 마을로 식량을 조달하러 대열을 떠났는데 돌아오지 않자 마쓰라는 이에히사가 붙여준 조총부대 병사 다섯 명과 하메 마을을 수색했다. 하인은 의병대에 붙잡혔는데 그기에 사쓰마 병사도 함께 잡혀 있었다. 마쓰라는 틈을 엿보다 두 사람을 구출했지만 금방 의병들에게추격당했다. 류조지 조총부대 병사는 교대로 조총을 쏘며 도망갈 수 있었지만 사쓰마 병사는 참살당했다.
밀양성 가까이 있는 요산에 다다를 즈음에 이번에는 류조지 자신이 고열로 쓰러졌다. 쉴 새 없는 전투로 피로가 누적되었더도 그럭저럭 견디었지만 하타 지카시의 면직 소문을 듣고 고향 걱정이 지나쳤는지 결국 몸이 무너졌다.
류조지의 부하들은 요산에 들어가 약초를 모아 오기도 하고 얼음골 신에게 기도도 하며 회복하기를 기다렸다. 나베시마도 걱정이 되어 전속 의사를 붙어 간병하게 해서 류조지는 겨우 회복됐다.그리고 나베시마는 류조지를 배려해 배를 준비시켜 부하를 딸려 부산포로 보냈다. 나베시마 군대는 후미를 맡아서 나흘 늦게 울산에 도착했고 그대로 서생포에 진을 쳤다.
거의 1개월에 걸쳐 남하한 일본군은 연이어 울산에 도착했고 전부터 계획해 두었던 부산 주변의 성들에 주둔해 조선 남부 지역의 방위와 통치를목적으로 일본식 성을 몇 개 축조하기 시작했다. 즉 서생포, 기장, 김해 죽도, 안골포, 구포, 거제도 등에 왜성을 쌓았다.
일본군이 퇴각한 한성에는 용산 강화회담 때 요동으로 군을 물리기로 했던 명나라군이 4월 20일에 주둔했다. 그런데다 명나라군은 남하를 계속해 성주와 선산, 거창, 경주 등에 주둔해 경상도 남부의 일본군과 대치했다. 그러나 싸우지는 않고 일본군의 북상을 계속 감시했다.
원진과 삼평은 이로부터 한 달 보름 전 남쪽 금산에서 의병이 일본군에 전멸당하는 광경을 보았다. 눈물을 흘리며 희생자 7백 명을 무덤까지 옮기는 일을 도와주고 돌아왔다.
금산 의용군을 지휘한 사람은 승려 조헌과 영규대사였다. 금산 의용군은 금산에 주둔하고 있는 고바야카와 군대를 조선군 권율 장군과 협공하기로 했다. 그러나끝까지 조선군이 나타나지 않아 결국 의병대는 전멸당했다.
1593년 5월 23일 나고야 성내에서 도요토미의 향응을 받은 명의 가짜 강화 사절단, 사용재와 서일관은 숙소로 돌아가자마자 일본 국내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형, 마에다 도시이에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저택에서 이런 저런 신세를 졌지만 그들은 일본군의 조선 상황을 잘 모르는 것 같지 않소?"
"사 선생도 그리 생각하시는군요.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도요토미가 하는 말도 마치 일본이 한성을 우리 명나라에게 양보한 듯한 말투이니 말이오."
"오늘 나고야성 다실에서 도요토미 앞에서 한 장수들 행동은 이상했소."
"사 선생, 분명 도요토미를 비롯해 나고야에 온 고위관리들에게는 조선 상황이 정확하게 전달되지 않은 모양이오."
그리고 조선에 출진한 군대가 일본군의 일부로 선봉부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자 무턱대고 전투를 벌이기 보다 강화를 잘 맺어 일본군을 조선에서철수시키는 일이 중요함을 새삼 확인했다.
강화조건 7개조란 명나라 공주와 일본 천황의 결혼, 감합무역을 부활할 것, 명나라와 일본의 대신들은 화의 서약서를 교환할 것, 정복한 조선팔도 중 4도는 반환이 가능함, 조선 왕자와 대신들을 일본에 인질로 보낼 것, 조선 국왕은 위 사항들을 서약문서로 제출할 것, 이상을 지키지 않으면 두 왕자의 반환은 없다는 내용이었다.
도요토미의 머릿속에는 1년 전 한성에 무혈 입성했다는 보고만 들어 있어 일본이 여전히 조선을 지배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이번 명나라의 강화사신 파견은 명이 벽제관 패전으로 일본군의 전력을 두려워해 양보하여 이루어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명나라 사신이 나고야에 머무르고 있는데도 고니시에게 한 번 공격했다가 실패한 진주성을 다시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1593년 6월 15일 이후 일본 장수들은 조선 남동 연안의 각 성을 떠나 진주를 향해 출진하기 시작했다.
나베시마 군은 서생포에서 기마병 5천 명을 출진시키고, 나리도미 시게야스 군 2천 명은 바닷실로 출진시켰다. 도중에 웅천성에서가토 군대와 합류해 19일에 진주성의 동쪽 산 언덕에 진을 쳤다. 연이어 지난번의 굴욕을 씻어내겠다며위신을 걸고 도착한 병사 수가 9만 3천명이었다. 그날 중으로 남강 쪽만 빼고 성을 포위했다.
이 진주성 공격은 작년 10월에 전라도 진입을 노리는 호소카와 다다오키가 공략했지만 지방 관리인 김시민이 격렬하게 저항해 실패했다. 지난번 공방전에서 전사한 김시민 목사 대신에 이번에는 서예원 전 목사 등 조선군 병사 3천 명과 의병 김천일이 이끄는 의병대 6만 명이 성안에서싸웠다.
가토는 함경도에서 엄동설한 방비책으로활용하던 소 생가죽을 두르고 진격하는 '거북이 등 ' 전략으로대항해 승리를 거두었다.
사흘간 전투에서 일본군이 승리하고 조선군과 의병은 1만 5천여 명이 죽었다. 일본군 장수들은 하타 지카시 등 세 장수의 면직사건 때문인지 쓰러진 조선군의 귀를 경쟁이라도 하듯이 잘라 모아서는 소금에 절여 나고야로 보냈다.
1 부산왜성 1592년 모리 데루모토.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부산 동구 좌천동
2 가덕왜성 1592년 모리 데루모토 부산 강서구 눌차동
3 웅천왜성 1592년 고니시 유키나가 경남 창원 진해구 남문동
4 영등포왜성 1592년 시마즈 요시히로. 다다 쓰네 경남 거제 장목면 구영리
5 부산지성 1593년 모리 히데모토 부산 동구 범일동
동래왜성 1593년 요시카와 히로이에 외 부산 동래 칠산동
6 추목왜성 1593년 모리 데루모토 부산 영도 청학2동
박문구왜성 1593년 모리 데루모토 부산 중구 중앙동
9 임랑포왜성 1593년 모리 요시나리 부산 기장 장안읍
10 기장왜성 1593년 구로다 나카마사 부산 기장 기장읍 죽성리
11 구포왜성 1593년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부산 북구 구포동
12 죽도왜성 1593년 나베시마 나오시게 부산 강서 죽림동
13 가덕지성 1593년 모리 데루모토 부산 강서구 성북동
14 서생포왜성 1593년 가토 기요마사 울산 울주 서생면 서생리
15 마사왜성 1593년 나베시마 나오시게 경남 김해 생림면
농소왜성 1593년 나베시마 나오시게 경남 김해 주촌면 농소리
16 안골포왜성 1593년 와키사카.가토.구키 경남 창원 진해 안골동
17 웅천지성 1593년 소 요시모토 경남 창원시 진해구 명동
웅천지성 1593 마쓰우라 시게노부 경남 창원 진해구 명동
20 송진포왜성 1593년 후쿠시마 마사노리 외 경남 거제 장목면 송진포리
21 장문포왜성 1593년 하치스가 이에마사 외 경남 거제 장목면 장목리
22 견내량왜성 1597 소 요시모토 경남 거제 사등면
23 울산왜성 1597 아사노 유키나가 율산 중구 학성동
24 양산왜성 1597 구로다 나가마사 경남 양산 물금읍
25 마산왜성 1597 나베시마 나오시게. 가쓰시게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산호동
26 고성왜성 1597년 요시카와 히로이에 외 경남 고성 고성읍
27 사천왜성 1597년 모리 요시나리 경남 사천시 용현면 선진리
28 남해왜성 1597년 일본 수군 여러 장수들 경남 남해군 남해읍 선소리
순천왜성 1597년 우키타 히데이에 외 전남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
29 호포리왜성 1597년 불명 경남 양산시 동면 가산리
잠시 잠깐의 평화
가짜 국사를 북경으로
1593년 6월, 일본군 장수들이 진주성 공격에 한창 기를 뜨고 있을 때 고니시와 명나라 유격장인 김유경은 부산포에서 여전히 비밀리에 강화교섭을 하고 있었다. 이 무렵 협의는 주로 명나라를 진정시키는 대응책이었는데 가짜 일본 국사를 북경에 보내 '사과'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이 일은 그해 3월 한성 강화교섭 때부터 나온 이야기였다. 그러나 두달 후 명나라의 가짜 국사, 사용재와 서일관이 일본 나고야성에 갔을 때 도요토미가 내밀었던 비현실적 강화교섭 조건도 끼어 있어 강화교섭 최전선에 있던 고니시를 궁지로 몰았다.
"저희 중신 나이토 조안을 가짜 일본 사신으로 삼아 귀하의 황제에게 보내겠소."
"그때는 항복을 뜻하는 도요토미의 국사를 준비해 주면 좋겠소. 안 그러면 수습하기 어려울 것이오."
"모리 각하와 이시다 각하에게 가짜 국사 파견 건은 말씀드렸지만 항복 국서 건은 전하지 못했소. 어려운 이야기요. 다른 걸로 대체할 수는 없겠소?"
"가짜 국사로 이 상황을 넘기고 있는데 국서가 가짜든 진짜든 이제 와 무슨 문제가 되겠소? 현명한 고니시 각하라면 이 전쟁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계실 줄 알았소."
"알겠소. 앞으로 명나라 황제를 알현할 때까지 몇 가지 장애가 있을 텐데, 그 대처를 도와주고 나이토를 보호해 준다고 심 각하가 약속해 주시오."
"그건 걱정 마시오. 우리 명나라 군도 빨리 귀국해서 황제를 곁에서 섬기고 싶다오. 조선을 위해 죽을 생각은 털끝만치도 없소."
"이 일은 부디 비밀로 하고 즉시 준비에 착수합시다."
나이토이 출발 준비가 최종 단계에 들어섰을 때 고니시 진영에서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났다.
하나는 도요토미가 제시한 7개조 강화조건 서찰이 도착한 것이다. 고니시는 '언제 적 잠꼬대냐' 싶어 태워버리려다 생각에 따라서는 '명나라 황제 알현을 승인하니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의향을 전하라'고 확인해 주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의향을 전한다.' 는 점에 갈등도 있었지만 결국 심유경과 꾸민 '항복을 의미하는 사과 서한'을 들려 보내는 일이 마음에 걸려 '사과 서한'을 그 자리에서 태워버렸다.
또 가토 진영에서는 나이토를 방문한 사건이 있었다.
8월 1일에서야 겨우 한성을 출발할 수 있게 된 나이토는 개성, 평양을 거쳐 의주에 도착해 압록강을 건너 명나라 땅을 밟았다. 그리고 30일에 요종에 도착했다. 그러나 거기에서도 새로운 장벽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도요토미의 항복 서찰이 없으면 북경 입성을 허가할 수 없소. 그러니 왜국 장수는 이 앞을 한 명도 통과하지 못하오."
요동에 주둔해 있는 송응창이 말했다. 송응창은 벽제관의 전쟁에서 전의를 상실하고 퇴각했던 이여송 대신에 일본군을 한성에서 후퇴시킨 책략파 명나라 장수다.
"내가 인솔하고 있소. 한성의 이여송 총사령관도 '조공에 관한 국서를 전하는 거라면' 하며 통과시켜 주었소."
"아니, 나는 속지 않소. 항복을 나타내고 조선 철수를 약속하는 국서가 아니면 이곳을 통과할 수 없소."
송응창의 성격을 잘 아는 심유경은 더 이상 대화를 계속하면 역으로 약점이 드러날 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심유경은 고니시에게 도요토미의 항복과 사과 서한 위조를 다시 요청하려고 나이토 일행을 요동에 남기고 조선 웅천으로 가기로 했다.
서생포에는 가토 군대가, 웅천왜성에는 고니시 군대가, 근처 작은 성에는 소 요시토모와 마쓰우라 시게노부가 들어갔다. 거제도나 가덛도에도 왜성이 축조되어 모리나 시마즈, 구키 군대가 들어가 1593년 7월 말까지 스무 곳에 왜성을 더 쌓아서 4만 일본병사가 부산포 주변 방어태세를 굳건히 했다.
그리고 임해군과 순화군 두 왕자를 풀어 주었다. 명나라가 집요하게 요구한 '조선 땅에서 일본군 철수'와 맞바꾼 조건이었다. 처음에 가토와 나베시마는 많은 희생을 치루며 생포한 두 왕자인지라 모리 데루모토가 세 번이나 설득했지만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도요토미도 앞으로의 전략 차원에서 용인했다는 설명을 듣고 겨우 납득하고 승낙했다. 두 왕자는 가토와 자베시마에게 정중하게 서찰을 써서 보내고 부산진성을 떠났다.
부산포 주변 방어체제가 세워지고 명나라군도 그것을 에워싸듯이 진을 쳤지만 그 이상으로는 일본을 자극하려 하지 않았다. 무익한 전쟁은 피하고 강화교섭을 지켜보자는 자세를 취했다. 조선은 그런 명나라군에 대해 일본군 완전 소탕을 재촉했지만 명나라군은 모른척했다.
일본 각 성에서는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만 군량미는 결코 충분하지 않았다. 8월에 다시 부산진에 온 이시다 미쓰나리는 일본에서 보내기로 한 쌀 20만 섬 중에 5만 섬 밖에 조달되지 않았음을 알았다.
군량미 수송은 도쵸토미의 부하 마에노 나가야스가 담당했지만 국내 조달이 매우 힘든 상황이었다. 많은 병력을 모아 출진시킨 규슈나 시코쿠, 주고쿠 지방에서는 쌀 조달이 여의치 않아 일본 중앙, 북부지방에서 쌀을 마련해 수송했다.
마을로 가서 식량을 약탈하고 난방용 작장이 부족해 민가를 부수며 돌아다녔다. 게다가 마을 부녀자들을 폭행하기도 했다.
나베시마는 그날 밤에 류조지 이에히사를 방으로 불러 앞으로 있을 죽도 생활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우리 성만이 아니라 다른 성에서도 식량 부족이 심각한 모양입니다."
"아네가와 고이치자에몬이 낙동강에서 언제 얼마나 물고기가 잡히는지 장치를 설치해 연구하는 도중에 파도가 일어 전복해 버렸다고?"
"예, 아네가와 고이치자에몬과 하인 이세 야자에몬 둘이 쓸려갔고 아직 행방불명입니다.ㅇ
"이번 마쓰시마 고자에몬 사건도 그렇고 우리 군대도 상당히 지쳐 있는 듯해."
"그것도 묘안일지 모르겠지만, 얼마 동안은 명나라군이 공격해 오지 않을 듯하니 각 성 장수와 병사를 반씩 일본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은 어떨까 싶습니다."
"그렇군. 그러면 성에서 필요한 군량도 반으로 줄어들겠군. 즉시 모리 각하나 이시다 각하에게 말씀드려 보겠네."
1594년 장수들은 부산 주변의 성에서 새해를 맞이했다. 그리고 1월 8일, 부산진성 군사 회의에서 총대장 모리 데루모토가 장수들의 임시 귀국 이야기를 꺼냈다. 성 안에서는 환성이 울려 퍼졌다.
이시다 미쓰나리 등 세 관리는 지금까지 귀국할 때마다 조선의 상황을 나고야성의 도요토미에게 보고하고 명나라 공격에 대해 재고 해줄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도요토미는 이를 승낙하지 않고 진주성 공격을 명령한 뒤 고니시가 획책한 강화교섭 성립 여부를 기다렸다.
부산 주변의 각 장수들도 한동안 공격하지도 않고 공격을 받지도 않았다. 전투로 세월을 보낸 1년에 비하면 느즈러진 나날을 지루하게 보냈다.
장수들은 그 사이 호랑이 사냥이나 매 사냥을 즐겼다. 그중 몇 명은 성을 돌아다니며 다도회나 시 발표회를 열기도 했다. 그러나 하급 무사들은 마을을 습격해 배를 채우고 성욕을 충족시키는 일 이외에는 할 일이 없었다. 조선 민중들은 그런 일본군 병사의 희생양이 되었다.
1594년 2월에는 장수 대부분이 귀국했다. 그러나 가토는 귀국을 거절했고 나베시마도 이에 따랐다. 자베시마는 고향 사가의 가마소에 살게 했던 저선인 사기장을 조선으로 불러들여 부하 나가노 신자에몬과 함께 김해지방의 사기장을 잡아오게해 3백명이니 되는 사기장을 사가로 보냈다.
그 중에 낙동강 상류지역의 밀양과 삼랑진의 사기장이 있었는데, 그들 중에는 나중에 나고야 성 부근 마을에서 유명해진 범구 외에 사기장 10명이있었다. 범구 일행은 다음 해에 도선에 다시 돌아와 또 사기장들을 모으는 임무를 맡았다. 또한 다케오 영주인 고토 이에노부도 김해의 사기장인 최종전을 비롯해 10명 남짓한 사기장들을 데리고 돌아갔다. 나중에 최종전은 후카우미 신타로로 개명하고 그 사기장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도요토미는 기술이 특히 뛰어난 자를 오사카에 바치라고 장수들 앞으로 명령서를 보냈다. 그러나 장수들은 우수한 사기장을 자기 영지에 두고 위해 성 안이나 성 부근 가마소에 감시를 붙여 연금시키고 도요토미에게 바치지 않았다.
작년 5월에 다치바나 무네시게의 부하인 오노 시게유키의 부하가 공주 근교 학봉리에서 잡은 삼평의 형 규일과 누나 이랑 그리고 이화는 낙동강 왼쪽 구포 강변에 잡혀 있었다. 오노는 다치바나와 의논해서 소유지 지쿠고에서가마을 구축해 헌상품 제작에 착수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구포왜성을 축성하고 규일에게 성 근처 가마소를 둘러보게 한 뒤 솜씨가 뛰어난 사기장을 찾아내 10여 명을 잡아 들였다.
'도망가 봤자 배고픔이나 빈곤보다 더 힘든 지옥 같은 생활이 기다릴 거야.'
'이대로 조선에서 생활하기보다 왜군을 따라가면 사기장 대우도 받고 생활이 좀 편하지 않을까.'
사기장들은 일본 배를 타기 전에 몇 번이나 도망갈 기회가 있었지만 일본 쪽 생활이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한 자들도 적지 않았다.
가짜 항복 국서
"일본은 황제에 순종하며 그 진의를 조선을 거쳐 전할 작정이었지만 조선이 그것을 거절했기에 우리는 조선에 출병했을 뿐입니다."
라고 서두를 꺼낸 뒤,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일본 국왕의 칭호를 주신다면 일본은 명나라의 지배하에 후세까지 조공을 바치고 명나라 황제를 위해 일하겠습니다." 라는 내용의 서찰로 당연히 도요토미의 7개조 강화교섭 조건과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고니시는 이 가짜 국서에 대해 이미 모리 데루모토와 이시다 미쓰나리와도 협의했다. 이 후에 명나라 황제에게서 국서가 와도 도요토미는 한문을 읽을 수 없으므로 그때는 국서를 읽는 사람이 바꾸어 읽어 주면 된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가짜 국서 그것도 항복을 의미하는 사과 국서로 이 난국을 헤쳐나갈 책략을 궁리했다.
심유경이 가짜 국서를 가지고 다시 요동으로 떠난 것은 1594년 1월 20일이었다. 심유경은 3월에 드디어 나이토 군대와 요동에서 합류했다. 그리고 그 간의 사정을 나이토에게도 전하고 곧장 북경으로 갔다.
그 결과 명나라 황제는 이종성을 정사로, 양방향을 부사로 해서 국사를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이 국사가 북경을 출발한 것은 1595년 1월 말이고 부산진성에 들어간 것은 그해 10월이었다. 나이토는 실로 1년 6개월에 걸쳐 명나라 국사 파견을 이루어냈고 국사는 9개월 후 조선 남단에 도착했다.
명나라 국사 일행은 부산진성에 도착하자마자 즉시 일본 군대를 조선에서철수시키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이종성과 양방정은 고니시 유키나가에게서 그 동안의 경위를 자세히 듣고는 당황했다. 그리고 정사 이종성은 자기가 들고 온 명나라 황제의 국서에 도요토미가 노여워할 내용이 들어 있음을 알고 그날 밤 공포에 질려 의복을 벗어 버리고 뒷산으로 도망쳤다.
부산진성에서는 이종성 후임 수습 대책으로 시간을 보내가 부사 양방정을 정사로 승진시키고 경위를 잘 아는 심유경을 부사로 해서 체제를 정비했다. 오사카를 향해 사자를 겨우 출발시킨 때는 1596년이었다. 이때 조선왕조도 서둘러 국사를 정해 명나라 국사를 따라가게 했다.
명나라 국사 일행은 9월 1일에 오사카성에서 도요토미를 알현하고 명나라 황제가 보낸 칙명 국서와 선물로 금 인장 그리고 명나라의 황제를 만날 때 입는 붉은 관복을 내놓았다.
그 다음 날 도요토미는 오사카성에서 명나라 국사를 초대해 향응을 베풀었다. 연회석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마에다 도시이에도 참석했으며 그 자리 도요토미는 전날 받은 붉은 관복을 입고 등장했다. 심유경은 예상했던 일이라 놀라지 않았지만 양방정은 몹시 놀라 인사말도 나오지 않았다.
연회가 끝날 즈음, 도요토미는 전날 받은 황제의 국서를 승려인 쇼다에게 읽으라고 명했다.
"너를 일본 국왕에 책봉하노라."
"뭣이라?"
순간 도요토미의 얼굴은 갑자기 핏기가 가시고 창백해지더니 이내 피가 거꾸로 치솟아 붉으락푸르락 달아 올랐다.
"고니시! 고니시를 불러오라! 죽여 버리겠다!"고 화를 버럭 내며 소리를 질렀다.
조선 국사도 요요토미에게 회담을 청했지만 도요토미 자신이 획책했던 조선 분할 안건에 대한 답편도 없고 조선 왕자도 일본에 오지 않은 일에 도요토미는 매우 화가 나서 회담할 상황이 아니었다. 오히려 조선 남부 4도의 점령이라는 도요토미의 집념을 새삼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다.
고니시는 이시다미쓰나리 등이 도요토미를 설득해 겨우 목숨을 건졌지만 가짜 국서 작성에 가담한 심유경은 명나라에 귀국하자마자 처형됐다.
일본군 재침략
제2차 조선 출진군의 배치는 1579년 2월에 발표됐다. 이번 축진 군대는 14만 명이었다. 부산진 주변에 주둔한 10만이 안 되는 병력을 증강시킨 포진이었다. 이번 출진군의 사명은 조선 남부 4도의 점령 통치임을 명시했다. 그 대책으로 우선 임진왜란 때 통치를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조선 남서부 지바으, 전라도 공격을 시작으로 그 후에 충청도, 경기도를 지배하고 한성을 다시 쟁탈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즉 한성 재탈환이 도요토미가 바라는 조선 정벌의 한계선이었다. 각 장수들에게 4월 말까지 부산 주변으로 모이라고 명했다.
조선 왕 선조는 일본군이 다시 온다는 보고를 듣자 곧 왕자와 왕비들을 다시 피난시키고 북경에 사신을 보내 명나라군의 구원을 요청하는 등 이번에는 재빨리 임전 태세에 들어갔다. 명나라군은 전주나 남원, 상주, 대구 등 요충지에 병사를 보내 준비를 확고히 했다.
8월로 접어들자 일본군은 공격을 시작했다. 일본군은 의병이 속출하는 육로를 피해 주력부대는 병선 아타케선을 타고 해로를 이용해 이동했다. 7월 7일 도도 가게토라와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수군은 조선수군장수 이순신이 나타날까 두려워하며 조심조심 거제도 남쪽 해안으로 좌군을 선도하여 갔는데 조선 수군이 이를 저지했다. 바로 이날 벌인 해전이 정유재란의 최초 해전이 됐다.
일본 수군은 왜구라 불렸던 해적집단을 일본 수군의 통솔력이 강한 장수 밑에서 전쟁 경험을 쌓게 하여 수군 장수로 거듭나게 했다.
임진왜란 초기에는 해전에서도 일본군 전력이 조선군 전력보다 위에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순신이 조선 수군절도사로 임명되자 전황은 역전됐다. 이순신은 해역 지형이나 해류를 잘 파악해 기동력이 빠르게 병선을 개조하여 기지가 넘치는 작전으로 일본 수군을 혼란에 빠뜨렸다.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1년 반 동안 거제도나 남해도 연안의 해전에서 승리, 제해권을 확보하여 강한 전력을 뽐내는 일본 수군을 격파했다. 따라서 일본군은 이 섬들에 왜성을쌓고, 해안을 따라 조선 수군과 싸우는 전법을 바꿔야만 했다.
그러나정유재란이 시작되고, 5년 만에 양국 수군이 충돌한 그 해전에서 조선 수군은 전에 보여줬던 것과는 달리 실수를 반복하여 이레 후인 14일에 괴멸적인 희생을 치루며 패배했다. 이때 조선 수군절도사 이순신은 실각해서 이미 자리에 없었고 이순신의 활약을 질투해 집요하게 무고죄를 뒤집어씌운 원균이 전라좌도수군을 지휘하고 있었다.
원균은 부산항에 집결한 일본수군을 치기 위해 한산도에서 대병선을 이끌고 습격했다. 그러나 원거리를 단숨에 달려 노를 저어온 사공들이 그만 지친 나머지 부산항 목전인 영도에서 속도가 떨어지고 말았다. 그 후 도도 가게토라와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이끄는 교묘한 일본 수군의 전술에 넘어가 조선 수군은 뿔뿔이 흩어졌고 겨우 가덕도에 도착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새로운 가덕왜성이 있어 주둔하고 있던 다카하시 나오쓰구와 지쿠시 히로카도의 지쿠고 군대가 공격해 조선 수군 4백 명이 모두 참살당했다. 남은 조선 수군은 칠천도에 정박했지만 14일 저녁에 일본 수군의 총공격을 받아 대패했다. 원균은 사천에 상륙해 도망가다가 사천왜성에 주둔 중인 시마즈 군대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때 이순신의 맹우 이억기도 아끼는 거북선과 함께 바다에 침몰했다.
이 싸움으로 경상도에서 전라도에 걸친 남부 해역의 패권은 일본군이 장악하고 그 후 일본 좌군은 파죽지세로 전라도를 공격해 나갔다.
삼평 일행의 수레는 이 혼란을 피해 성벽 밖을 돌아서 광치천 옆길을 따라 북쪽으로 가 성벽을 따라 동쪽으로 달렸다. 더운 여름 햇살이 이윽고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을 즈음 요천을 건너고 여원 고개를 넘어 함양 쪽 산길로 접어 들었다.
경채가 위로하고 모두 기운을 내서 대답하자마자 길 왼쪽 절벽에 마애불상이 나타나 수레를 끌던 삼평이 그 앞에 발을 멈췄다.
"왜 그래, 삼평아?"
"이 마애불은 뭐지?"
"이것은 이 고개의 상징이야. 바로 앞이 우리 마을인데 옛날 큰 전쟁이있었을 때 적군의 습격과 승리를 예견한 할머니를 추모해서 세운 불상이래."
"언제 적 이야기인데?"
"2백 년 정도 전 이야기야. 그때 마을 사람들이 이 지역을 공격한 왜구를 물리쳤대. 황산이라는 강변 지역에 사당도 있고 그 하류 강바닥에 있는 붉은 바위는 그때 병사들의 피가 물든 거래."
'여기서도 마애불을 만나네. 필시 무슨 일이 일어날 거야. 지금이라도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속리산에서 나이토 군이 화살을 쏘았을 때 법주사 마애불이 방패가 되어 삼평을 지켜주었다. 그때의 기억이 아직 뇌리에 남아 있었다.
계곡 물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는 작은 집이었다. 경채 가족은 갑작스레 들이닥친 손님을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조금 떨어진 숲 아래에 있는 오두막을 숙소 겸 작업장으로 내주었다.
일본군의 조선 철수
전라도 절도사인 이복남 등 조선군 4백 명과 남원시민과 의병 1천 명, 명나라의 지원군 부장 쟝원이 이끄는 요종의 기마군 3천 명이 농성하며 수비했다. 이복남은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전주성에 있는 명나라 유격대 진우상에게 지원을 요청했지만 오지 않아 일본군의 10%도 못 미치는 병사로 응전했다.
이복남은 불리한 병사수를 보충하기 위해 양원에게 남원의 북서쪽에 있는 문룡산성에서 싸워줄 것을 요청했지만 기마병을 지휘하는 양원은 이를 거부하고 읍성에서 농성하겠다고 고집했다.
성은 16일에 함락됐다.
한편 경상도의 요충지인 함양의 황석산성에서는 일본 우군이 표고 1천 미터가 넘는 산성을 지키는 조선군을 공격해 8월 14일에 성을 함락시켰다.
가쓰시게 군대는 황석산성 함락을 확인하자 곧바로 남원성을 공격할 좌군을 지원하러 15일 아침 일찍 거창을 출발해 함양을 거쳐 남원으로 향했다. 도중에 사근산성을 공격한 가토 군대 일부와 합류해 지리산 북족 자락으로 올라갔다.
고원 같은 너른 대지에서 의병대를 만났지만 부하인 나카노 기요아키가 20정의 조총부대를 먼저 내보내 토벌하고 무사히 서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저녁 해가 서쪽으로 많이 기운 데다 너른 평야는 나베시마 군대의 방향 감각을 무디게 만들었다. 앞장 서 가던 나카노도 점차 남원으로 가는 길을 잃었다. 불안이 밀려들기 시작할 무렵 멀리서 젊은이들 소리가 들리는 민가를 발견하고 남원으로 가는 길 안내를 요청했다.
"너희들은 웬 놈이냐? 무슨 일이냐?"
영수가 잧선 차림을 한 병사를 보고 놀라 소리를 지르며 오두막 친구들에게 알렸다.
'역시 그 마애불이 알려준 대로 일본 병사가 왔다.'
삼평은 직감했다.
영수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놀란 원진과 다섯 명은 곧바로 오두막 밖으로 뛰쳐나왔다. 삼평은 천천히 물레에서 일어나 제일 마지막으로 밖에 나왔다.
"나는 일본 나베시마 나오시게의 부하, 나카노 기요아키라고 한다. 우리 나베시마 군대는 지금 남원으로 향하고 있으며 잠시 후면 본대도 도착할 것이다. 오늘 밤 안으로남원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날이 저불어 길을 잃어버렸다. 길 안내를 부탁하네."
"거절하면 어쩔테요?"
"이 칼로 너희 모두를 베어 버리겠다."
"단, 우리가 앞장서서 가는 것을 보면 의병이나 마을 사람들이 오해해 이집을 노릴 수도 있소. 우리를 결박해 강제로 끌고 가는 것처럼 해주시오."
삼평이 그렇게 말하자 나카노를 비롯한 무사들은 눈을 마주치며 감탄하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무사 한 명이 물었다.
"이름은 없소. 왜군에게 짓밟혀 없어졌소."
삼평은 퉁명스레 대답했다. 무사들을 자극해 차라리 죽었으면 하는 기분이 들었다. 칼에손을 대는 무사를 나카노가 저지했다.
밧줄에 묶인 일곱 명은 오두막을 나왔다. 길가에는 싸움에 진 의병의 시체들이 쌓여 있었다. 의병의 얼굴은 피투성이로 코나 귀가 잘려 있었다. 한동안 걸아가자 닷새 전에 올랐던 고갯길에서 남원 쪽으로 가는 내리막길이 나왔다. 삼평은 오른쪽에 있는 마애불을 보지 않았다.
"이 젊은이 일곱 명은 지금까지 본 조선 서민과 어딘가 좀 다릅니다. 우선 말하거나 생각하는 게 보통이 아니고 잡을 때 오두막에서 만들고 있던 자기는 제가 전에 영지를 둘러보았던 시모마쓰우라 모몬카와에 있는 고려요를 능가하는 솜씨였습니다. 그기서는 나이 든 사기장들이 만들었는데 이 자들은 아직 스무 살 전후로 보입니다. 나베시마 나리에게 빨리 보여주고 싶습니다.
감금시키고 나서 나카노는 중신 구라마치 한베의 진영으로 가서 감시인을 붙인 이유를 말하고 구라마치도 이를 승인했다.
이때에는 남원성 공방은 이미 대세가 기울어졌고 곳곳에서 조선군의 잔병이 봉기해 작은 싸움이 일어났다.
다음 날 아침 나카노는 삼평과 친구들을 나오시게 앞에 끌어다 놓고 그간의 경위를 보고했다. 전쟁 시에 포로를 영주 면전에 대령시키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일곱 명은 빨리 이마가 땅에 닿도록 머리를 조아리라는 명령대로 머리를 조아렸다.
"나는 나베시마 나오시게다."
나오시게는 일곱 명의 얼굴을 보고 나서는 별 말 없이 사가 지방은 다른 지방과 달리 이번 전쟁 이전부터 조선 사기장이 많이 활약하고 있다고만 말하고 "도기와 더불어 백자를 산업으로 육성하는데 힘이 돼 주기를 바라네." 하며 요청했다. 그리고 삼평과 친구들을 물러가게 한 뒤 나카노를 불러들였다.
"나카노, 그 여자도 사기장인가?"
"그렇습니다. 솜씨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지만요."
"여자 사기장은 신기하니 도요토미 전하에게 헌상하겠노라. 다른 장수들이 건드리지 않게 엄중히 감시하라."
도요토미는 출진한 장수들에게 사기장이나 재봉공 등을 연행하고 뛰어난 기술자를 헌상해 주기를 바라는 명령서를 종종 보냈다. 또 도요토미는 출진 전에 후시미에서 나오시게에게 솜씨가 좋은 사기장이나 진기한 기술자를 헌상해달라고 직접 부탁했다.
8월 17일, 나베시마 군대는 장수를 경유해서 전주성으로 갔다. 장수도 남원 사기소 권역에 들어가는 자기 제작이 활발한 지역이었다. 나오시게는 나카노에게 명령해서 가마소에서 12명의 사기장을 연행하고 제품 몇 개를 약탈해서 갑옷을 넣는 궤에 넣어 일본으로 가지고 갔다.
나베시마 군은 도중에 가토 군과 합류하여 의병대가 농성하는 산성을 협공해 함락시키고 전주로 갔다. 전주로 가는 또 다른 길인 임실을 경유하는 길은 가토 사마노죠와 시마즈 요시히로가 선두를 맡았다. 이는 우키타 히데이에게 전주에 주둔하고 있는 명나라의 유격장, 진우상이 남원을 지원하러 오는 길을 끊어놓기 위해 남원성 공격을 중단시키고 보낸 것이다. 그러나 진우상은 이미 남원성이 함락됐다는 보고를 듣고 한성으로 철수했다.
전주까지 함락시키고 나베시마 군은 서해안 쪽 금강하구에 있는 김제까지 나아갔다. 모악산 일대 사기장들을 납치해서 연행할 목적도 있었다. 이 전란에서 나베시마 군이 납치한 사기장은 백여 명으로 늘어났다.
이때 나오시게는 부산진성으로 회의를 하러 오라는 명령을 받고 사기장들을 데리고 창원으로 갔다.
연행해 온 사기장들은 주변 작은 성에 분산시켜 감금하고 그곳에 가마를 만들고 계속 사기를 굽게 했다. 분산시킨 이유는 집단으로 도망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울산왜성 전투
울산성에 진을 치기로 한 가토는 1597ㅓ년 11월 군회의에서 결정한 대로 바닷가에 있는 조산에 규모가 큰 왜성을 쌓기 시작했다. 한성에서 남하하는 명나라군을 차단할 방어책 중 하나로 쌓는 것인데, 서생포왜성에서는 아사노 유키나가, 언양성에서는 오타 가즈요시, 모리 히데모토의 부하 시시도 모토쓰구 등이 이에 가세했다. 공사를 강행한 끝에 12월말까지는 완성의 조짐이 보였다. 그때 우군 총대장 모리 히데모토는 무기와 장비 배분으로 부산진성에 있었다.
명나라 장수 양호와 마귀등은 명나라군 4만5천 명을, 조선군 도원수 권율은 조선군 1만 2천명을 이끌고 울산으로 향했다. 일본군 중 가장 강하다고 소문난 가토를 무찌를 목적이었다.
23일 공격을 받아 바깥 성이 파괴되고 성 안으로 후퇴해 힘든 방어전을 펼쳤다. 그 수가 9백명이었다.
다음 날 24일과 25일에도 싸움은 계속되었고 가토군대가총탄을 빗발치듯 쏘아대 사상자가 많이 나왔다.
이에 29일에는 명나라군쪽에서강화교섭 사자를 보냈다. 그 사자는 투항한 일본 장수였다. 그는 가토 앞에 나가자 갑자기 몸을 후들후들 떨며 명나라의 뜻을 전하지도 못했다. 가토는 이 사자를 크게 꾸짖고 단칼에 베어 버렸다.
성내 군량과 물이 다 떨어지고 나날이 전력은 소진되어 갔다.
가토는 아사직전 상태로 일어서기도 힘들었지만 지원군에게 비참한 모습을 보일 수 없다며 왼손으로 부하 쇼바야시 나오토의 어깨를 잡고 주변에서 달려온 지원군을 똑바로 바라보며 성벽을 내려갔다.그리고 남쪽 높은 지대에 있는 지원군의 진영으로 들어가자 코를 크게 골며 잠에 빠졌다. 매일 밤낮으로 계속되는 농성에 열흘 동안 잠을 한숨도 자지 못한 것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부보
울산왜성 공방전이 있은 후 출진 장수들은 부산진성에 모여 회의를 했다. 명나라군이 본격적으로 참전하는 데다 군량이나 무기조달도 여의치 않아 상황은 악화일로였다. 그 대책으로 울산이나양산, 순천 등의 지배를 포기하고 일본군 점령지를 줄이자는 방향으로 의견을 모으고 우키타 히데이에, 모리 히데모토, 하치스카 이에마사 등이 도요토미에게 진언하기로 했다. 가토는 요양중이라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다.
"울산, 양산, 순천에서 물러나겠다는 안건은 용납 못함. 내년에는 전력을 증강시켜 요동으로 다시 공격할 태세를 갖출 것."
도요토미는 서찰을 보내 장수들의 소극적인 태도를 꾸짖었다.
이번 울산 왜성의 공방전을 둘러싸고 출진 장수들 사이에서 이시다 미쓰나리파와 반 이시다 미쓰나리파의 내분이 겉으로 드러났다.
도요토미는 그해 6울에 병이 나 버렸다. 7월에는 장수들에게 친아들 히데요리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서약서를 쓰게 하고 당면한 안건이던 도쿠가와 이에야스, 마에다 도시이에, 모리 데루모토 등의 충성 서약서 초고를 마에다와 이시다에게 준비하라고 명령했다. 그러고 나서 며칠 후 병상에서 일어나 일단 조선에 보낼 군량을 마련하라고 지시했지만 8월에 다시 병이 악회 됐다.
5일에는 도쿠가와, 마에다, 모리 그리고 우에스기 가케카쓰, 우키타 히데이에 등 다이로 다섯명을 후시미성으로 불렀다. 그리고 도요토미는 다이로 다섯 명에게 히데요리를 국왕으로 추앙해 도요토미 체제를 굳건히 하는 데 지원해 줄 방책을 지시하고 눈물로 직접 쓴 유언장을 건넸다. 그리고나서 13일 후 1598년 8월 18일에 숨을 거두었다.
그 부보를 조선과 명에 그리고 출진한 장수에게도 숨기고 조선과 강화교섭을 획책하기로 결정했다. 이때 입안된 것은 조선에서왕자를 인질로 보내면 일본은 조선에서 물러난다는 안과 조선이 조공을 보내면 일본군은 부산성 하나를 남기고 철수하는 안 등이 있었다. 그리고 그 강화교섭을 조정하기위해 도쿠가와 나가마사와 미야기 도요모리를 조선에 보냈다.
그러나 조선은 그런 강화교섭을 받아들일 생각따위는 추호도 없어 이를 거부했다. 그리하여 다이로 다섯 명은 9월에 가토에게교섭 임무를 맡으라고 지시했다. 즉 가토를 인질로 보내 일을 마무리할 생각이었다.
그 무렵 조선 남부 일본군 점령지에서는 명나라가 병사를 증강시켜 조선과 연합해 공세를 가하고 있었다. 1월 격전지였던 울산왜성에 다시 명나라 군 장수 마귀와 조선 장수 김응서의 연합군 3만 명이 공세를 가했다. 가토는 3월 이후에 왜성 건축을 재개해 1만 명이 성에서방어했다. 그리고 열흘 동안 교묘한 전법을 구사하며 싸워 이번에는 자력으로 이 연합군을 무찔렀다.
한편 전라도의 고니시 군과 시마즈 군은 명나라군이 남쪽으로 내려와 육로를 끊어놓아서 고립되어 있었다. 그러나 근처 왜성에서지원군이 달려와줘서 명나라와 조선군은 이를 막아내느라 쩔쩔맸다.
10월 초에는 명나라 장수, 동일원이 병사 3만 명을 이끌고 사천 선진리왜성의 시마즈군을 공격했지만 시마즈 군대의 조총부대가 반격해 대패했다. 의기소침해 있는 명나라군에게 고니시는 이때도 강화교섭을 제안하여 조선장수를 인질로 보내고 일본이 안전하게 조선을 떠날 수 있도록 약속해달라고 했다.
도쵸토미의 사망 소식이 10월로 접어들면서 출진장수들은 물론 명나라와 조선에도 알려지자 출진 장수들 사이에서는 앞을 다투어 철수 움직임이 일어났다. 8월에 모색했던 강화교섭 철수 안은 명나라와 조선 군대가 공세로 전략을 바꾸면서 즉각 사라져 버렸다. 귀국준비를 서두르는 각 성을 명나라와 조선 군대 외에도 의병대가 공격하고 잡혀 있던 사기장이나 백성들도 도망갈 기회를 노렸다. 뒤숭숭하고 불안하고 어수선한 나날이 한동안 계속됐다.
11월 3일, 부산진성에서는 가토 기요마사, 아사노 유키나가, 구로다 나가마사, 모리 가쓰노부 그리고 나베시마 나오기게와 가쓰기게 부자가 모여 귀국 방법을 의논했다. 그때 고니시 유키나가가 나타났다.
"우리 군은 최후까지 남겠소. 그리고 앞으로도 명나라, 조선과 무역을 계속할 수 있도록 강화교섭을 마련한 뒤 귀국하겠소."
"고니시는 쓰시마 번주 이이 걱정돼 마지막까지 강화교섭에 집착하는 거란다." 나오시게는 뒤에 있는 가쓰시게를 바라보며 가토도 들으라는 듯 설명해 주었다.
11월 17일 밤 고니시 군대는 순천왜성을 빠져나와 광양만에 정박시켜 놓은 인양선을 타고 귀국 길에 올랐다. 고니시는 전에 밎은 교섭대로 조선 장수를 인질로 삼았기에 조선 수군의 공격은 없을 것으로 생각하고 마음을 놓고 있었다.
그러나 명나라 수군 진린이 이끄는 대병선이 고니시 군대를 치기 위해 남해도에 잠복하고 좁은 노량해협을 봉쇄하는 작전을 폈다. 명나라 수군의 움직임을 간파한 시마즈 수군은 고니시 군대의 귀국을 지원하기 위해 사천 선진리왜성에서 5백척을 보냈다. 이날 밤 하늘에는 보르달이 휘영청 떠올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명나라의 배가 제일 먼저 시마즈 군단을 향해 나갔다. 시마즈 병선에서 대포를 쏘고 그것이 명나라 배에 명중해 격침시켰다. 명나라의 배가 이에 동요해서 통제력을 잃고 뿔뿔이 흩어질 때 조선 수군 이순신의 배가 과감하게 달려와 공격했다.
이순신은 원균이 전사한 후 7월에 조선 수군절도사로 재취임했다., 다시 취임했을 때 수군에는 10쳑 남짓 전선이 남아 있었을 뿐이었지만 명나라 수군 사령관 진린의 지원을 받아 다시 일어서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한창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중에 총탄을 맞고 전사했다.
시마즈 수군은 이 전쟁에서 배 20척을 잃고 패배했지만 해전이 한창일 때 고니시 군대는 거제도에 도착했다.
한편, 가토와 나가마사 그리고 나베시마 나오시게 군대는 11월 16일에 부산항을 떠날 예정이었다. 그러나 조선 수군 100척이 몰려와 부산항에 있는 병선 아타케선을 에워싸고 귀국을 제지했다. 이에 가토와 나베시마의 군대는 성곽이나 주변에 불을 지르고 혼란한 틈을 타서 탈출을 꾀했다.
일본으로 잡혀간 주요 조선 사기장 일람표
아방 이마리.아보다니 가마 당진
안일관 기술지도로 오키나와 파견 시마즈 요시히로가 연행
아미야(이야) 초대 초지로 교토 라쿠야키 센노리큐가 창작한 다완을 만듦
영녀(고려노) 이마리. 시노미네 가마
아미무라 야지베이 마쓰우라 시게노부가 부산에서 연행
김영구 히라도. 오차완 가마 마쓰우라 시게노부 남녀120명 연행
김원 사가현 후지쓰군. 후도야마 가마를 엶 상원과 함께 연행됨
교산 나시야마가의 선조 아리타구로부타.야마히라마쓰 가마 구로무타로부터 소슈쿠에 성이 많음
귀 하쿠 아리타.고미조 가마 자기.높은받침 무유약의 그릇,접시등
거관 이마무라 야지베이 히라도.오차완 가마 김영구와 함께 연행됨
상구한 나가사키.니시오니키 가마 우쓰쓰가와야키. 일행13명 표류도착
종차관 나고야 성내에서 가마를 엶 마쓰우라 시게노부가 웅천에서 연행
정백(송백) 도사오도야키의 창시자
수산 겐나1(1651년)오무라 요시아키 사망
청육 아리타.세이로쿠노쓰지 가마 이삼평의 뒤를 이은 가마
손개 우에노 키죠다카쿠니 후쿠오카현 가가와군 모리 요시나리가 연행
종전 후카우미 신타로 다케오 고토우게마에 가마 아내 햐큐바센
상원 사가현 후지쓰군. 후도야마 가마를 엶 묘지 있음. 자손이 제사 지냄
심당길 나에시로가와 가마 작품 '히바카리'는 가보. 심씨 초대선조
김해 호시야마 추지 가고시마. 쵸사토 가마 시마즈 요시히로가 세토.미노지역에서 파견
장헌공 나하.와쿠타에서 가마를 엶 시마즈 소시히로가 오키나와 지역에 파견
장군타이한 돈로쿠 아리타.얀베타 가마
쓰치야 로쿠베 야미구치현 스사무라에 가마 마스다 모토나가가 연행
도진 나가사키현 이사하라.하지노오 가마 이사하야 도안이 연행
팔산 다카토리 하치조 후쿠오카현 노가타 구로타 나가마사가 연행
범구 나고야성 시로사키야마 나베시마 나오시게(히데요시 차도구 구움)
하방충 가고시마현 시마즈 요시히로 연행
하방진 가고시마현 가지키 아이라에서 가마를 엶 시마즈 요시히로 연행
박정장 오야마 사사헤에 하사미.햐칸 가마 오무라 요시아키가 연행
박평의 가고시마현 구시기노 가마 시마즈 요시히로 연행18성씨의 우두머리
윤각청 오시마 히코에몬 이마리.다시로 가마 메이지 초기 폐번치현으로가마 폐쇠됨
이우경 나카노 시치로에몬 하사미.하타노하라 가마 오무라 요시아키가 연행
이삼평 가네가에 산베이 다쿠.도진코바.아리타.덴구다니 가마 다쿠 야스토기가 연행
이작광 야마무라 하기.마쓰모토나카노쿠라 가마 히데요시의 명에 의해 모리데루모토 연행
이경 사카 하기.마쓰모토나카노쿠라 가마 미와 집안으로 가게 됨.이작광의 동생
이랑자 우츠와 요시히로나가가 연행
다쿠에서의 생활
1599년 정월이 되어 사흘이 지나, 가지미네 성 아래에 있는 나가노부의 저택에는 조선침략에 참여한 가쿠가와 가신과 조선에서 끌려 온 사람들 중 원진과 삼평 그리고 함안성에서 잡혀 온 사기장 11명 중의 우두머리인 영봉 등 세 사람이 불려왔다.
"나리의 행차이다. 허락이 있을때까지 머리를 숙여. 여이, 거기 조선인 세 사람 모리를 숙여.ㄹ"
"마타자에몬, 조선인은 아직 말을 알아들을 수 없다. 됐다, 됐어. 시간을 두고 일본말과 예법을 가르치면익숙해지겠지.
가쿠 류조지가의 중신이 된 쓰루타 마타자에몬을 영주인 류조지 나가노부가 달래며 말했다.
가마 불 때기의 순서
1 예열 불 때기
가마재임을 하기 전에 가마에 불을 때서 가마 속에 자욱한 수분을 미리 증발시키는 불때기 작업을 말합니다. 가마 하단의 봉통에 장작을 조금씩 넣습니다. 이때 가마 속의 온도를 필요 이상으로 높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2 산화염 불 때기
불꽃이 산화염이 되도록 하는 불 때기로 공기를 충분히 공급하여 완전연소 시키며 서서히 온도를 높입니다. 번조실의 아궁이와 불보기 구명은 막은 상태로 봉통에 장작을 넣습니다. 오름가마 전체가 연기가 지나가는 길 즉 연도가 됩니다. 오름가마에굴뚝이 없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가마 끝의 연기 구멍에서는 흰 연기가 올라갑니다.
3 환원염 불 때기
산화염 불 때기에 의해 산화된 성분들이 환원되게 공기의 공급을 차단하고 불을 때서 불완전연소가 되도록 하는 불 때기입니다. 가마 속 온도는 950℃ 정도를 목표로 산화 불 때기에서 환원염 불 때기로 전환합니다. 번조실의 아궁이에짜 넣은 벽돌을 꺼내고 거기에 장작을 넣습니다. 장작을 넣은 후에는 벽돌로 다시 막습니다. 즉 연기가 많이 나는 불 때기로 바꾸어 가마의 온도를 더 올립니다.
이때 봉통은 막은 상태입니다만 환원염 불 때기 상태에 맞게 반쯤 열기도 하고 장작을 넣으면서 조절해 갑니다. 가마 상부의 연기 구멍에서는 산화염 불때기를 할 때 나는 흰 연기 대신 검은 연기가자욱하게 올라가기 시작합니다.
불완전 연소를 시키면 환원염이 생깁니다. 이때 가마 속의 일산화탄소는 안정되려고 바탕흙과 유약에서산소를 거둬들여 이산화탄소가 되려고 합니다. 이때 광물을 녹이는 힘이 증가하여 청화는 녹자마자 푸르게 발색해 가고 바탕흙은 푸른빛을 띤 흰색이 됩니다. 유약도 녹아서 단단해지는 효과를 발휘합니다.
4 불 때기 끝
가마 속의 온도를 도기는 1,250℃, 자기는 1,300℃ 정도를 목표로 환원염 불 때기의 정도를 늦추어 갑니다. 장작 투입량을 서서히 줄이고 잠시 동안 온도를 유지합니다. 온도계가 없었던 시대에는 가마 속의 불꽃색과 시편만으로 도자기의 단계를 판단했습니다. 불 때기가 끝나면 가마의 모든 틈새에 도자기 흙을 반죽한 지게미를 발라 막고 천천히 식힙니다.
5 가마에서 꺼내기
가마가 식으면 각 번조실 장작 투입구의 벽돌을 제거하고 가마 속으로 들어가 제품을 꺼냅니다. 도자기를 굽는 가운데 가장 긴장되는 시간입니다. 불안정하게 겹쳐 구워 쓰러지기도 하고 큰 것은 급하게 식어 깨어지기도 해서 그때까지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기는 흰색과 물드는 색이 중요하며 투명함을 겨루게 됩니다. 이 때문에 토석류에서 불순물을 빼고 장석수와 나무껍질재를 섞어서 유약을 만들었습니다. 아리타에서는 떡갈나무 껍질을 태운 재를 섞어서 사용한 것 같습니다.
청자: 청자의 경우는 주로 청자유를 조합하였습니다. 이 청자유는 산화염에서 적갈색으로 변하지만 환원염에서는 푸른빛을 띠어 물총새의 날개색으로 보이는 우수한 제품을 만들어 냅니다.
야나가와 공격과 긴모우잔 산
1600년 9월 16일 도요토미 히데요시정권을 노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를 방패로 정균 유지에 분주한 이시다 미쓰나리가 세키가하라에서전쟁을 벌여 일본의 정국은 크게 변하려 하고 있었다.
명나라를 치기 위해 조선 땅에서 함께 싸운 동지들이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적군과 아군으로 나뉘어 전장에서마주해야만 했다.
이싸움은 도쿠가와 이에야스 군이 승리했는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양 침략 때 병력이 약한 출진 장수를 도와 조명연합군과 싸운 이시다는 패해서 칩거를 명령받았지만 후에 도쿠가와의 명령으로 자신이 살던 사와야마 산성에서 처형되었다.
자석광 발견
"틀림없어. 이거야."
삼평은 골짜기 냇물에 있는 바위덩어리 하나를 주워들고, 끌로 잘라서 모두에게 보여주었다. 단면은 아주 흰색이었다.
'여기 바로 건너편 조금 높은 소나무 숲이야말로 쇼에몬 일행의 사기장들이 내려다 본 백자광산이 틀림없어.'
삼평은 몸이 떨렸다. 그리고 골짜기 냇가를 따라 조금 올라가서 적은 양의 비라면 피할 수 있을 것 같은 바위 아래에 지게를 내려놓았다. 그 바위도 틀림없는 도석이었다.
사기장들은 무두 그 지세어 한 목소리로 대답하고 급히 짐을 정리하여 나무숲 속을 세 방향으로 흩어져 갔다. 소나무와 메밀잣밤나무 등의 무성한 수풀을 지나 땅 표면에 있는 흙을 걷어내자 흰 바위의 표면이 보이고 잘라보니 틀림없이 백자의 원료가 되는 도석이었다. 그 바위는 곳곳이 노출되어 상당히 큰 광맥이라는 것을 삼평 일행의 사기장 세 사람이 조금 걸어다녀 보았을 뿐인데도 확신할 수 있었다.
삼평을 비롯한 고미조의 사기장 아홉 명은 마침내 백자광산을 발견한 것이었다. 1616년 6월 1일의 일이었다.
나카노는 삼평과 경채에게 세 아들을 소개했다.
화제는 조선전쟁 때 나카노의 무용담, 남원에서삼평 일행과 만난 이야기 등이었다. 더나아가 삼평의 기술력과 자석광 발견 등의 공적이 아버지로부터 자식들에게 전해지는 자리이기도 하였다.
"삼평 님은 공적도 있고 연세도 있는데 '삼평'이라고 불리는 것은 이상하지 않습니까? 아버님."
삼남 사다마사가 나카노를 향해 말하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나카노의 대답에 귀를 귀울였다.
"그렇구나. 과연 젊은이라 사고방식이나 보는 방식도 다르구나."
다이칸인 미쓰노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면서 말하자 나카노가 천천히 일어나서 삼평에게도 일어나라고 하듯이 손짓하면서 말했다.
"좋아. 이 자리에서 삼평에게 일본 이름을 지어주도록 하지. 금강 출신이라고 들었으니 성은 '가네가에' 이름은 '산베이' 로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자리에 있던 사람들로부터 박수가 터져 나왔다.
"감사한 말씀입니다만 저는 고국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부모님께서 지어 준 '삼평'이라는 이름으로 계속 불러주셨으면 합니다."
삼평은 나카노와 다이칸에게 실례라고 생각하였지만 의연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자리에 앉아 깊이 고개를 숙였다. 경채도 당황하여 삼평을 따라 고개를 숙였다.
'만약 나베시마 나리와 나카노 나리에게 선물이 무사히 전해지면 녹미까지는 아니더라도 내년에도 올해와 같은 정도의 미곡물은 받을 수 있을텐데.'
나베시마 나오시게는 그 다음 해인 1618년 6월 4일에 사망했다.
삼평의 선물은 무사히 병상의 나오시게에게 전달되었다. 나오시게는 그 사발과 그릇을 후계자에게 사가 번주인 가쓰시게에게 건넸고 덴구다니를 비롯하여 아리타 마을을 일본 최대의 자기 산지로 하겠다는 꿈을 이루어 달라고 부탁하면서여든 해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쳤다.
이 성터는 굽이굽이 흐르는 오카와 강 가장자리에 있어 동서로 천연의 요새를 이루고 있으며 산등성이에는 성곽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서쪽 끝의 봉화대에서는 북쪽으로 바다가 보였다. 승려의 이야기로는 그 바다의 만이 이마리항이고 조선침략 때에는 나베시마 군대가 이 바다의 만에서 출진과 회군을 반복하였다고 하였다.
'나도 조선에서 바다를 건너 저 이마리항에서일본 생활을 시작하였지.'
편지의 발신인은 야모코토 시게즈였다. 삼평은 곧 나카노의 차남인 줄 알았다.
"산베이 님, 지난 10월 26일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의 몸에 열일곱 군데나 베인 상처 자국이 있는것을 보고 용맹스럽고 무술에 뛰어나셨던 아버지의 인생을 저는 새삼스레 깨닫고 존경심이 절로 우러났습니다. 3년 전에 아리타의 관청에서 술자리를 가진 후, 아버지는 병상에 누우 계시는 일이 많아졌습니다만 날씨가 좋은 날에는 영내의 가마소를 방문하셔서 사기장들과 좋아하는 술을 나누어 드시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 짐은 생전에 아버지가 산베이 님에게 전하라고 하셔서 맡아 놓았던 것입니다. 저에게는 파란 돌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만 아버지는 귀중한 물건이라고 하셨습니다."
'만약 나카노와 만나지 않았다면 가난하지만 고국에서 도공으로서 잘 살았을텐데. 이렇게까지 심하게 증오심이 끓어오르는 일도 없이 살았을텐데..."
삼평은 그런 생각이 들자 무슨 이유로 이렇게 나카노의 죽음을 애석해 하는지 그것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조선에서도 명의 경덕진에서도 관요 라고 하는 가마소가 있어서 거기에서는 연중 가마에 불을 때고 있었소. 지금 야나카 마을에는 가마를 만든 일본인이 '왜 같은 백자를 굽고 있는데 삼평 일행만 녹미를 받는 거야?' 라고 하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소?"
다카하라가 내뱉는 날카로운 말 속에서 그 동안 세공이나가마에 대하여 도움을 청하러 왔던 일본인 이주자들의 차가운 시선을 차츰 이해할 수 있었다.
삼평은 경채로부터 정화 할멈의 이야기를 듣고 35년 전에 다쿠에서 아리타로 이주하는 도중에 후카우미 신타로 일행이 하고 있던 망향의 연회에서 맞딱드린 일을 떠올리고 경채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보름달이 뜬 밤에 삼평은 요스케자에몬과 세에고자에몬에게 업혀서 외출을 했다. 경채와 나쓰 그리고 두 며느리들은 누먹밥과 규일의 묘가 있는 벌판에서 뜯어 온 산나물을 푹 삶아 가지고 왔다.
큰 바위의 산 정상에는 내산 안에 있는 가마소에서 일하는 조선 사기장들이 모여 있었고 세에고자에몬에게 업힌 삼평이 나타나자 사기장들은 조선노래를 부르며 마중 나왔다. 남자들은 이미 상당히 술에 취해 있었다. 큰북과 종이 모자라서 항아리와 병을 사용하여 즈럴 듯하게 장단을 맞추고 있었다.
이윽고 큰 보름달이 하기시이즈미의 도석장이 있는 방향에서떠오르자 낯선 사기장 한 사람이 일어서서 조선말로 큰 소리로 외쳤다.
"고국 조선에서우리들의 가족도 이 달을 보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우리는 당신들과 작별인사도 못하고 이별했지만 이렇게 일본 땅에서 살고 있습니다.
저는 새로운 가족과 함께 일본에서조선에서 구웠던 것과 같은 도자기를 굽고 있습니다.
언젠가 우리 가족은 이 도자기를 가지고 반드시 조국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삼평!"
경채가 외치는 소리에 한순간 매미들의 울음소리가 그쳤다. 삼편이 규일의 묘석 앞에 웅크리고 앉은 듯이 쓰러져 있었다.
소란스러운 소리를 듣고 달려 온 아마모토는 합장한 손이 크게 떨리며 잠시 동안 진정을 하지 못했다. 겨우 그 손을 풀고 가지고 온 보자기 속에서 하얀 하오리와 하카마를 천천히 꺼내어 삼평의 시신에 걸쳐 주고 다시 떨리는 손을 계속 모으고 있었다. 그리고 곁에 있는 경채, 요스케자에몬 세에고자에몬과 나쓰에게 말했다.
"아버지께서 생전에 갑작스러운 사테에 대비하여 가지고 계시던 옷입니다. 아버지께서 숨을 거두시며 '삼평이 조국으로 돌아갈 때에 이 옷을 입히도록 하라'고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조선에서는 흰색을 숭상하니까 그리고 백자도 흰색이니까.'라고 말씀하셨지요."
1655년 8월 1일 향년 77세였다.
-끝.
첫댓글 옮기면서... 재삼재사 약소국의 참담함이 뼈져리다.
지금 우리는 조선의 멸망의 과정을 반면교사 삼아
강대국으로 재침탈 당하지 않을 만큼
물질.정신적으로 단디한가!!!
트럼프가 당선되고, 아베는 전쟁국가를 선포하고
중국은 최강대국이 되어 있고
북한(이것도 우리나라겠지만)은 핵으로 무장했는데
우리는 박근혜레임덕에 빠져서 낼.모래 토욜엔
서울광장에서 3백만이 모여 '하야' 촛불집회를 연다
참담하다. 이 부끄럽고 안개같은 현실이......
삼평이 일본에서 도석장을 찾아내고
이런저런 과정을 겪는 모습은 구태여 옮기지 않았다.
어느 곳이나 삶의 아귀다툼은 구태의연한 모습일테니까..
삼평에게 감탄하고 숭배하려고 쓴 그런 글도 아니다
내 딴에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기간
일본의 전쟁 사정과 물밑 움직임, 이 부분을(명나라와 협상 등)
이순신장군은 늘 궁금해했었다고 생각되고 그래서 비교적 자세히
기술하려 애썼다.
오늘 2016년 11월 28일 옮김을 종료終了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