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에게 보내는 열여섯 번째 편지(16, 동그라미두개와의동행)
아침 이슬이니 참 이슬이니 하는 말이 노래 제목이든 술 이름이든 이슬하면 그냥 쉽게 떠올려지는데 반해 흰 이슬이라는 말은 잘 떠올려지지는 않지만 벌써 열다섯 번째 절기인 백로(白露)입니다. 그리고 백로하면 떠오르는 하얀 새의 이미지, 봄부터 가을까지 논이나 습지 강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새, 숲에서 잠을 자고 이른 아침부터 강가에서 긴 다리만큼 고개를 깊게 숙이고 개구리나 물고기를 잡아먹은 해오라기의 이름이 백로(白鷺)입니다. 이 녀석들이 하얀 날개를 펴고 날다가 황혼으로 물든 석양에 보금자리인 둥지로 내려앉는 모습은 한마디로 아름다운 자태를 한 것 뽐낸다고 볼 수도 있지만 사람이나 조류나 겉모습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이 백로는 겉모습만 흰색일 뿐 부리와 다리는 물론 속살까지 검답니다. 반대로 까마귀는 겉모습이 마귀할멈의 모습처럼 검고 울음소리와 함께 음흉해 보이지만 속살은 흰색이랍니다. 또 무언가를 잘 잊어버리는 사람에게 '까마귀 고기를 먹었나' 하고 핀잔을 주지만 실제론 도구를 이용하는 지능을 가지고 있고, 낳아주고 길러준 어미 새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며 죽을 때까지 봉양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검은색이든 흰색이든 하늘을 날고 나는 새는 날개를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지만, 사람은 생각이나 필요에 따라 걷고 뛰고 달릴 수는 있으나 날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날고 싶다는 욕망마저 저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달나라에는 계수나무도 토끼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우리나라에서도 대기권 밖의 우주공간을 향해 나로호 로켓을 쏘아 올렸잖아요. 비록 완전한 성공을 하지는 못했지만 대체적으로 물질문명의 발달은 편리성에 비해 정신적 나태와 폐해를 부르는 경향도 있습니다.
兄.
"가마를 타고 가는 임금은 빨리 죽고 가마를 매고 가는 신하는 오래 산다. 화가는 빨리 죽고 조각가는 오래 산다." 이런 말을 자주 들어보셨을 거예요. 임금처럼 잘 먹고 안 움직이는 것과 언제나 정으로 돌을 쪼는 조각가에 비해 밀폐된 공간에서 유화 등 화학성 물감을 다루는 화가는 환경이나 건강 면에서 좋을 리 만무하고, 가마꾼처럼 임금보다 맛있고 건강한 음식을 마음 것 취할 수는 없겠지만 적게 먹고 몸을 많이 움직이는 운동이 좋다는 것은 알겠는데 실천하기란 참 힘든 일입니다. 저 자신도 동네 슈퍼마켓에 음료수 한 병을 사러갈 때도 승용차를 운행해 갔거든요. 승용차를 운행한다는 것은 편리성도 있었지만 물건을 사가지고 쇼핑백에 들고 온다는 것이 창피하다는 어설픈 존재였기 때문이었죠. 그러던 어느 날 남을 위해서 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충만한 삶을 살아야겠다는 의식이 저를 지배했죠. 나도 모르게 지배당했던 물질적 삶에서 정신이 충만한 삶으로의 전환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습니다. 숨 막히는 장난감 같은 도시의 콘크리트 숲을 벗어나 초목이 자라고 맑은 바람이 불어주는 산길에서 찌들고 찌들었던 영혼의 때를 벗기면서 제일먼저 한 일이 부인의 동의하에 승용차를 없앴습니다. 그 이유는 평소 걷고 필요시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만약에 나이가 들어 자리를 양보하는 젊은이가 있다면 그 날로 승용차를 한 대 구입하는 조건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처음엔 조금 불편했는데 그 불편도 잠시 차라리 차량을 소유했을 때보다 없을 때 더 자유롭고 편한 것들이 많았습니다. 주차를 하러 빙빙 도는 일도 없고 운전을 할 때보다 오히려 책을 한권 들고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글을 읽는 즐거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유익함이었고 문학기행이나 답사여행을 떠날 때도 기차를 타고 버스를 타고 가는 시간은 조금 더뎠지만 '느림의 미학'이라는 말을 진정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천천히 에 극한 된 것이 아니라 마음의 여유를 말하고 있는 느슨한 것입니다. 그런 마음의 여유는 과거 고급승용차를 보면 힐끔힐끔 도둑질하듯 훔쳐보았지만 가치의 기준이 다른 지금은 그따위 차를 봐도 데면데면하다는데 있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그런 그 마음의 여유를 느끼게 해주고 즐길 수 있는 것은 바로 자연이었습니다. 산길의 자연은 바람을 맞으며 걷지만 강변길을 거닐 때는 바람을 가르며 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구입한 것이 자력으로 가는 자전거 이었는데 한꺼번에 두 대를 구입했습니다. 부부가 함께하기 위함 이였죠. 자전거를 타거나 걷는 거나 두 발을 움직여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때론 부부가 나란히 가기도하고 앞서거나 뒤서거나를 하면서 달리다 보면 기쁨은 하나가 됩니다. 아마도 이렇게 달리는 모습을 옆에서 보는 입장이라면 동그라미가 두 개였다가 네 개이고 때론 세 개로 보일 수도 있을 겁니다. 비록 날지는 못하고 달리는 것은 새가 날개를 움직이지 않으면 날을 수 없듯이 자전거도 페달을 밟지 않으면 멈춰버리고 말겠죠. 이런 자전거는 세워져 있을 때는 쇳덩어리나 다름이 없지만 주인이 페달을 밟을 때 비로소 달리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페달을 밟은 만큼 달리며 사람의 일부가 되는 거죠. 다른 점이 있다면 내리막길에서는 사람은 쉬지만 자전거는 변함없이 굴러간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산다는 것도 자전거를 타는 것처럼 페달을 끊임없이 밟아야 하는 일이죠. 그런데 자전거가 바람을 가르고 길을 흘려보내며 질주만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네 인생도 힘들고 험난한 고난도 있고 고통이 있듯이 길에는 분명 오르막이 있습니다. 자동차나 모터사이클은 기름만 더 소비하며, 오염원을 발산하며 달리면 되지만 자전거는 나의 에너지를 분출함과 함께 체내의 나쁜 기운도 분출하며 오릅니다. 기어를 낮게 해서 느리게 올라가면 힘은 분산이 되겠지만 내리막의 희열은 그렇게 크지가 않습니다.
兄.
제가 어린아이였을 때, 그때는 우량아 선발대회가 있었다고 해요. 당시에 어머니께서는 읍사무소에서 개최한 우량아 선발대회에 저를 참가시켰는데, 뭐 특별한 것이 아니고 저울에 몸무게 달고 줄자로 가슴둘레를 재고 발육상태를 체크하는 것인데 몇 등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분유, 원기소 등 여러 가지 부상 중에서 세발자전거를 탔다고 하니 제법 등수에 들었나 봅니다. 그런데 이 세발자전거는 페달을 밟아서 가는 원초적이고 아날로그적인 자전거가 아니라 앉아 있기만 하면 가는 자동세발자전거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어릴 때 아버지의 직장인 학교 관사에 살았고 중학생 고등학생인 형들은 쉬는 시간만 되면 저를 자전거에 태우고 밀고 다녔고 오히려 형들이 뒤에서 밀어주는 것이 더 좋았었나 봅니다. 사실 그때는 믿으실지 모르겠으나 기성품 자전거 보다 나무로 만든 장난감 같은 세발자전거가 있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리고 두 바퀴로 가는 기성자전거 타는 것을 배운 것은 초등(국민)학교 4~5학년 때로 기억됩니다. 자전거 타는 것을 가르쳐 주신 분은 바로 아버지였는데 학교운동장에서 이었고 자전거가 넘어지려고 하면 몸을 반대쪽으로 하지 말고 넘어지려하는 쪽으로 함께하면서 페달을 힘껏 밟으면 그 힘에 의해서 자전거가 바로 서서 안정적으로 간다는 것은 교범이고 교훈이었지만 넘어지기도 많이 넘어졌고, 심지어는 내 키보다 더 깊은 논에 처박히기도 하며 틈만 나면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는 것에 대해 자전거 타는 것을 가르쳐준 아버지에 의해 압수되고 중학교 1학년 때 저의 담임선생이셨고 아버지의 동료 이었던 선 선생님께 양도 되었습니다. 아마도 그냥 양도 한 게 아니고 막걸리라도 한잔 사기로 약조가 되었을 겁니다.
당시에 선생님들은 대부분 걸어서 아니면 자전거를 타고 가을이면 코스모스 피어있는 신작로 길을 달려 출퇴근을 하셨는데 우리 집은 관사생활 이후에 학교 정문 앞으로 이사를 했기 때문에 선 선생님과 아버지가 옥자누나네 선술집에서 자주 막걸리를 마시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선술집 바닥에는 어른도 풍덩 빠질 만큼 큰 막걸리항아리독이 묻어져 있었고 옥자누나네 아버지는 마을 사람들이 수조 씨라고 불렀는데, 수조 씨가 흰 플라스틱으로 된 막걸리 통을 한 두 개도 아니고 뒤에서 보면 사람은 안 보이고 짐바리라는 자전거가 막걸리통과 함께 굴러가는 기이한 모습이었지만 이제 이런 모습은 빛바랜 누런 흑백사진 속에서나 찾을 수 있을는지......, 지금은 옥자누나도 할머니가 되었을 것이고 어디선가 힘들게 자전거를 타며 자식을 위해 헌신하신 수조 씨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늙어 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시절이 지나 고교시절 여름방학 때 공부보다는 심심해서 학교에 놀러 갔는데 선 선생님께서 원래 제 자전거였던 그 자전거를 타고 농협에 가서 예금인출을 해오라고 심부름을 시켰는데 왠지 그 자전거를 타기가 싫어서 사환형의 멋진 빨강색 삼천리호 자전거를 빌려 타고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그날 오후 선 선생님은 자신의 자전거로 퇴근하던 중에 군용트럭에 치여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그날 밤 아버지가 숙직이셨는데 아버지를 비롯하여 모든 선생님들이 유명을 달리한 상갓집에 가시고 제가대신 학교교무실에서 전화도 받고 숙직을 하고 있으라는 말씀에 거역은 못하고 백열등이란 등은 모두 켜놓고 교무실 한 가운데 의자를 놓고 있었지만 시선은 선 선생님의 책상에 고정이 되고 시커먼 복도에서 유리 창문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리면 온몸에 소름이 돋고 이제는 선 선생님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그렇게 두렵고 무서웠고 공포가 엄습해왔습니다.
그런 두려움이 있었던 까까머리 시절이 지나고 몇 뜻있는 친구 넷이 자전거 여행을 떠나기로 결의를 했습니다. 목적지는 월출산으로 유명한 영암으로 정했는데 그리 녹녹치 않는 거리였습니다. 국도를 따라 직선거리로만 해도 60여 km가 넘었고 왕복하면 120km가 넘는 대략 500리 여정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촌놈들이 고향을 떠나보고 싶은 욕망이 꿈틀대던 시기로 젊음의 의지는 꺾이지 않고 실행에 옮겼습니다. 네 명의 촌놈들은 저를 포함해 건화, 혁찬이, 인석이로 아무도 자전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었기에 자전거포에서 주민등록증을 잡히고 사이클이라는 경주용 자전거를 대여했습니다. 당시에는 친구들끼리 놀러 가면 야외전축과 통기타가 필수였는데 자전거라는 특성상 기타를 메고 달릴 수도 없고 야외전축과 레코드판을 실을 곳도 없었고 설령 싣는다고 해도 휴식을 할 때마다 펼쳤다가 다시 실어야 되는 불편함으로 포기하고 혁찬이가 당시 신식이라는 카섿테이프를 빌려와 자전거 핸들에 장착하고 신나는 출발과 함께 긴 여정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때 테이프에서 흐르는 음악은 당시 신인가수인 이종용이 부르는 최고의 히트곡 "너"라는 노래였지요. '낙엽 지는 그 숲속에' 이런 노래로 기억이 됩니다. 고향인 송정리를 출발해 영상강의 본류인 극락강을 지나고 전투병과 학교가 있는 광주 상무대를 지나 화정동, 백운동 등 광주를 벗어나 곽재구의 "사평역"의 배경이 되는 남평역 주변의 드넓은 들녘을 보면서 나주 배의 주산지인 금천면을 따라 그때만 해도 오염되지 않은 영산강의 물길을 보았습니다. 까투리 한 마리 푸드덕 날아든다는 금성산의 나주였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송정리에서 나주까지 17km 정도 되는 길을 놔두고 단지 아스팔트 포장 길을 택해서 간다고 20여 km를 더 돌아서 온 결과였습니다. 나주를 지나 손암 정약전과 다산 정약용 형제가 유배길 에 영영 이별을 해야 했던 율정점 영산포를 지나니 저 멀리에 월출산이 그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영산포를 지나고 신북면을 지나 영암에 안착한 촌놈들은 한옥의 아담한 여관에 숙소를 정하고 소읍의 거리를 자전거를 타고 겁 없이 누비고 다녔는데 이 모습이 원래 영암사람이 아닌 외지인이라는 것을 구분하기에는 워낙 작은 고을 영암에서 금세 뭇사람들의 눈에 띠였을 것이고, 그래서 소위 말하는 촌놈들의 텃새라 해야 하나요. 일행 중 건화와 둘이 걷고 있는데 열댓 명의 왈짜패들에게 빙 둘러 포위를 당했습니다. "야, 느그들 어디서 온 새끼들이여" "여그 영암이 느그들 것이여" 숫제 시비를 걸고 들어오더군요. 그래서 등 뒤에 있는 친구에게 물었죠. "건화야 어떻게 할까?", 이에 친구가 말하기를 "채석아! 오늘 여기서 죽어 불자" 였습니다......,
兄.
자전거를 이야기하다보니 거의 잊혀 진 옛 이야기들이 추억의 상자에서 끄집어 낸 것처럼 오롯이 떠올려지는군요. 마치 구르는 바퀴처럼......, 오늘 아침에도 일찍 자전거를 타고 집에서 2.5km 남짓 떨어진 낙동강변에 가기위해 열심히 페달을 밟았습니다. 홈플러스, 활어마트, 뜨레쥬르, 제일약국, 할매재첩국, 지코바치킨, 새마을금고, 곽치과, 모아꽃집, 중앙학원 이런 간판들을 흐르는 강물처럼 흘려보내며 강가에 도착하면 푸른 갈대와 억새가 키 재기 하듯 훌쩍 자라 꽃대를 올리고 꽃을 피우고 바람에 하늘거리기도 하지만 새들의 아늑한 보금자리이기도합니다. 부들이 부들부들 피어난 풀숲 습지에는 해오라기, 작은물때새, 쇠물닭이 먹이 찾기에 여념이 없고, 하늘 높이 구름 속에서 울던 종다리가 그 모습을 드러내고, 노란색의 마타리, 붉은색의 주홍서나물, 닭의 오줌냄새를 풍긴다는 계요등, 할아버지 수염을 닮은 까치수염, 홑씨를 바람에 실려 보내는 박주가리, 울밑이 떠올려지는 봉숭아, 구절초를 닮은 쑥부쟁이, 달팽이관처럼 말아 올린 물봉선, 거대한 강아지풀 수크령, 흰빛 분홍의 예쁜 고마리꽃, 조보다 적은 알갱이들이 모여 있는 것 같은 여뀌 등이 여유로운 자연의 풍경을 연출하고 호랑나비, 흰 배추나비도 너울너울 춤을 춥니다. 빨간 고추잠자리가 허공을 휘졌고 강은 가을의 정취를 느끼게 해주는 푸른 하늘과 하얀 뭉게구름을 물속에 담고 그 위에 소금장이가 가늘고 긴 다리를 움직여 헤엄을 칩니다. 이에 질세라 물속에는 뒷다리와 가운뎃다리를 번갈아 가며 장구애비가 헤엄을 치며 앞으로 나가는 모습이 흡사 장구채를 들고 장구를 치는 모습 속에 우체부가 형에게 소식을 전하듯 시원한 강바람이 자연의 소식을 전해주고, 완연한 가을을 재촉이라도 하듯 참새들이 군무를 이루며 훠이훠이 날아듭니다. 이에 질세라 가마우지와 청둥오리들도 고단한 날개를 쉬기 위해 습지주변 풀숲으로 뚝뚝 떨어지듯 내려않는 모습을 보며 새들은 집으로 갈 때 저렇게 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방에서 콕 처박혀있는 것보다 집을 벗어나 잠시만 페달을 밟아도 생명이 살아있는 자연과 만날 수 있고 잠시 쉬는 시간에 책이라도 읽다가 강물을 붉게 물들여 놓는 저녁놀을 쳐다보면 서쪽하늘에 어느새 반짝이는 별 하나, 개밥바라기별에게 세상의 안부를 물으며 집을 향해 다시 힘차게 페달을 밟습니다.
兄.
산다는 것이 뭐에요. 저는 끊임없이 발을 놀려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은 나비가 나풀나풀 날개를 접었다 폈다하며 날개 짓하는 것을 보고 우아하고 아름답다고 했는데 실제로는 살기위한 몸부림에 불과하다더군요. 물위에 둥둥 떠서 시냇물이나 연못을 헤엄치는 오리들을 보면 한가로워 보이지만 발은 물속에 빠지지 않으려고 물갈퀴처럼 생긴 오리발을 하염없이 움직인다고 하더군요. 사람도 베풀지 못하고 받는 데만 익숙한 사람은 그저 놀고먹는 타성에 젖어 살아 있어도 사는 것 같지 않는, 먹어도 배부를지 않는 아귀와 같은 생활을 하지만 어려운 환경에서도 가족을 지키며 꿋꿋이 살아가는 사람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중에서 남편의 외도로 이혼하고 보증금 백만 원이 없어 세 자녀를 데리고 모텔에 투숙하고, 찜질방에서 자고, 일터인 식당아르바이트를 위해 낮에 아이들을 동네 체육공원에 진종일 기다리게 하고 일을 하면서 이혼할 때 약속한 양육비 한번 못 받아 전남편에게 아이들을 보냈지만 아이들은 하루도 안 되서 쫓겨나고, 또 아이들을 시설에도 보냈지만 울면서 걸려온 큰아이의 말은 "엄마 거지로 살아도 좋으니까 함께 살자."는 그 말에 앞날의 행복을 위해 현제의 고난을 감수하며 가족을 지키려는 한 어머니의 모성은 위대했습니다.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노력은 마치 우리가 자전거를 타는 것처럼 쉬면 넘어지기 때문에 가족이라는 이름을 무너트리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발을 놀려가는 엄마와 같은 것이 아닐까요. 그 엄마는 정말 삶이 고단하고 힘들지만 다 헤진 신발을 바꾸지도 못하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지만 주변의 아름다운마음을 가진 사람의 알선으로 무보증에 월세 십만 원의 습기가 가득하고 곰팡이 냄새가 진동하는 지하방을 얻고 난 다음날, 어린 두 아들은 정착할 곳이 없이 유랑하는 생활을 하다가 비록 허름하기 짝이 없지만 그저 날개를 접고 쉴 수 있는 새들의 둥지 같은 코딱지 같은 단칸방에 만족하며 전단지를 붙이는 아르바이트를 위해 하루 종일 발을 놀립니다. 진정한 땀을 흘리며 대가를 받은 아이들은 그 수입금으로 엄마에게 새 신을 사서 선물합니다. 저는 거기에서 끊임없이 발을 놀리는 자만이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끊임없이 페달을 밟나봅니다.
단지 정신이 미성숙하고 생각이 좁아서 자가용이 없는 것이 창피하게 느꼈던 때가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오히려 그런 우치한 생각을 가졌던 자신이 더 부끄럽게 생각되는, 조금은 성숙된 지금. 그때는 남이 가지고 있는 만큼은 다 가져야 되고 왜 매사에 빨리 빨리 빨라야만 하는 조급증에서 헤어나지 못했지만, 정신의 성숙은 달팽이처럼 느리게 천천히 사는 것은 무언가에 쫓기지 않아도 된다는 여유로움 속에 삶의 깊이를 느끼고, 자신도 모르게 물질문명의 노예가 되어 수동적이나 기계적으로 사는 인간에서 나의 본 모습을 찾는 것으로 잃어버린 지혜를 찾는 격이라고나 할까요. 아마도 그것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속에서 그 살아가는 것을 관조할 수 있는 제 삼의 심인 같은 것은 느낍니다. 달리 일상의 삶속에서 찾은 망중한 같은 것......, 사람들은 말합니다. 열심히 벌어서 나이 들면 온갖 것 다 구경하면서 살겠노라고, 그런데 노래에 보면 '노세 노세 젊어서 놀아 늙어지면 못노나니~'하고 상반됩니다. 그러고 보면 벌어놓고 나중에 논다는 것은 다리에 힘이 다 빠진 후에 남의 부축이나 받으면서 구경한다는 것이고, 늙어지면 못논다고 젊어서 놀아버리면 늙어서는 먹고 살 것을 걱정해야하는 것도 모순입니다. 그래서 제가 말하는 것은 현제의 삶 자체가 즐겁게 사는 것 말입니다. 과거 폴 사이먼과 아트 가펀클이 남미 페루의 민요를 채보해서 부르는 노래 "엘 콘도르 파사"라는 노래, 철새는 날아가고를 들어보면 욕망을 노래합니다. 달팽이보다는 참새가 되겠다고, 못보다는 망치가 되어야겠다고, 도심의 거리보다는 숲이 되겠다고 노래합니다. 어떻게 보면 꿈이지만 욕심일수도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주변의 사람들도 두 부류로 나뉩니다. 남을 이야기할 때 나쁜 말만하며 로또만 사면 일확천금이 당장 내 것이 될 것 같은 사람과 남에게 언제나 자신을 낮추며 일확천금 따위의 유혹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저도 그런 탐욕과 같은 욕망의 늪에서 허덕이던 때도 있었지만 그 어리석은 어둠의 늪에서 빠져나오는 작은 지혜는 벤츠만을 꿈꾸다가 이제는 자전거의 페달을 신나게 밟거나 수시로 걸으면서 척박한 땅에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올려 꽃을 피우는 식물의 삶과 나의 삶이 다르지 않다고 느낄 때였습니다, 마음으로 보는 눈은 분명 자유로운 영혼으로 세상이 아름답고 매사가 즐겁다는 것을 느꼈고, 그것이 진정한 자유요 마음의 여유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兄.
낙엽과 어우러진 자전거
메타세콰이어 길의 자전거
우리집의 또 다른 자전거
제가 사용하는 자전거
주로 짐을 나르는데 사용한 자전거
추억의 자전거 잠금장치
추억의 자전거 헤드램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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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부부의 자전거 여행을 따라 내 눈 자전거는 열심히 아름다운 강변을 풀 숲을 따라 여행을 다녀 왔습니다. 글도 좋고 사진도 좋고 부부의 사랑도 두바퀴 되엿다 네 바퀴 되엿다 세바퀴 되엿다. 하는 모습을 죽 따라 갓다 왔습니다. 대단한 멋쟁이시며, 자연과 몸을 동시에 사랑 하시는 님의 모습이 아주 경쾌하고 건강하시군요.
선생님 안녕하세요. 이번에도 어설픈 글 읽어보셨군요. 저는 집에서 가까운 곳에 낙동강이 흐르고 있어서 자연을 벗삼아 부인과 함께 페달을 밟고 잠자리가 높이 날으는 강변을 질주하며 불어오는 강바람에 감사하고, 풀벌래소리에 감사하고 작은 풀꽃을 보며 큰 행복을 느끼며 살아간답니다. 오늘은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행복하시라고......, 부산에서 대준_()_
부부가 함께 할수있다는것은 아름다움의 시작이랄까요? 화목의 정겨움이 가득합니다. 자전거와걸어서 여행을 할수있다는것은 놓치고 살아가는것에서 많이 되돌아보고 나아 갈 수 있으리라봅니다.편리에 물들다보니 소중하고 아름다운것을 놓치고 지나가는것이 너무 많은것같네요.자연사랑 인간사랑 그리고 추억을 담아낼 수 있는 좋은 글감사히 잘읽었습니다
경원님 안녕하세요. 언제나 감사합니다. 실제로 뵙지는 못했지만 작은 공간에서 수시로 뵈니 실제로 만나도 오래전부터 만난 친구처럼 몹시도 반가울 것 같습니다. 만나면 실제로 풀벌래소리 들리는 강변의 억새밭, 갈대밭 길을 거닐며 많은 이야기 나누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대준_()_
자연을 벗삼아 담소를 나누다면 행복의 한장이 열리겠지요.제가 20년전에 부산에있을때 문득 떠오르네요
20년 전에는 부산에 계셨군요. 저는 1983년 부터 부산에 살고 있습니다. 당시만 해도 해태를 응원했는데 지금은 롯데와 기아를 응원하는 부산갈메기가 다 되었나 봅니다. 언제 많나면 많은 이야기 나누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벌써 백로네요!! 백로에는 자전거를 타는 것이군요, 사모님과 함께 자전거타는 모습니 낙엽과 절묘하게 어우러져 보는 이의 눈을 즐겁게 해줘 고맙습니다, 가마꾼은 오래살고 임금은 일찍 죽는다? 그거 아주 명언 중의 명언입니다. 그래서 저도 노구를 이끌고 열심히 헬쓰에 가서 운동을 했더니 이니마도 건강을 유지 한답니다,근데 이제는 자전거타기가 두려워요!! 젊었을 때는 자전거 여행도 다녀봤는데, 에구 늙으면 .....열 여섯 번째 편지 잘 읽었습니다!!
회장님! 오늘 영산에 가시는 날이 아닌지요. 성지의 방언답 주변에 갈대가 서걱거리는 그 길을 그냥 걸어만 보아도 좋을듯 합니다. 그리고 언제 기회가 된다면 자전거로 영산을 출발해서 백수 해안도로를 따라 백수교당의 탁혜진 교무님께 인사도 드리고 다시 영산으로 오는 페달을 밟아보고 싶습니다. 기대가 크면 이루어 지겠죠. 아무튼 계획된 스케줄에 따라 큰 일정 잘 마치시기 바라오며, 불갑의 꽃소식도 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대준_()_
그럼 아예 내일 영산에서 만납시다!! 탁혜진 교무님과는 특별한 인연이 있으신 모양이지요? 저는 내일 새벽 6시에 출발합니다. 11시부터 영산대학에서 특강이 있거든요!! 말씀대로 갈대밭 서걱거리며 걸어 시상을 가다듬겠습니다!!
네, 아주 특별한 인연입니다. 그리고 영산에 함께 했으면 좋은데 아쉬움으로만 남습니다. 언제 부산에서 함께하였으면......, 합니다. 대준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