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헌신/ 요12: 1-11
성경에는 우리를 놀라게 하고 깊은 감동에 젖게 하는 한 주간의 사건이 몇 가지 기록
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신약과 구약에서 중요한 것 한 가지씩만 말해 본다면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창조의 한 주간과 요한복음 12장 이하에 나오는 수난 주간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창세기 1장에는 하나님께서 일주일 동안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어떤 면
에서 우리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장엄한 스케일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말씀을 읽을 때면 창조의 웅장함과 신비를 다 알지는 못하지만 황홀함과 놀라움으로
인해 가슴이 벅차 오르는 것을 느낍니다. 한편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12장 이하에
는 예수님이 수난을 당하신 한 주간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 1절에
"유월절 엿새 전에"라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까? 이 날로부터 시작해서 그 다음 돌아오는
금요일까지의 육일 동안의 사건이 12장 이하로 집중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의 죄를 지고 골고다로 향하는 멀고도 험한 고난
의 여정을 보게 됩니다.
이 한 주간 동안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과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음의 말씀이 얼
마나 소중한지요. 사도 요한은 자기가 쓰는 요한복음의 전체 분량 중 거의 2분의 1을 할
애해서 이 한 주간 동안에 있었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사역하
신 3년의 90퍼센트에 해당되는 기간에 있었던 이야기에 대해 열 한 장을 할애한 것과 비
교해 볼 때 그가 마지막 한 주간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를 가늠케 하기에 충분합니
다. 마태와 마가, 누가도 자기들이 쓴 복음서의 30퍼센트 이상을 이 마지막 한 주간의
사건을 다루는데 할애하고 있다는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 복음서 기자들이 하
나 같이 이 한 주간을 이렇게 강조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구원받는 결정적인 진
리가 이 한 주간 안에 다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우리가 성령이 가르쳐주시기를 기도하며 오늘 본문으로부터 전개되
는 말씀 앞에 좀더 진지하고 겸손한 자세로 앉아야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신앙생활을
이미 수년간 하신 분들이 거의 대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교회 처음 나오신 분들에
게는 조금 죄송합니다만 여러분이 알아듣기 쉽지 않은 설교가 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귀담아 들으시면 한마디라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리라고 봅니다. 여러분들 대부분은
신앙생활을 수년간 하신 분들이라 나름대로 성경도 많이 읽고 설교도 많이 들으셨을 것
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본문을 읽으면서 '아, 오늘 무슨 설교를 하겠구나. 대충 이런
내용을 얘기하겠지?' 하고 감을 잡으시리라 봅니다. 왜냐하면 본문이 담고 있는 메시지
가 워낙 명료하고 단순하다 보니 백 명의 설교자가 서서 설교한다 해도 대동소이한 내용
을 말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옥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이
본문의 내용을 얼마나 깊이 설명하느냐가 아니라 이 말씀이 주는 메시지를 어떻게 나와
연관시켜서 깊이 생각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여러분이 설교를 들으면서 계속 되새김질하면서 물어야 할 세 가
지 질문을 먼저 드립니다. 먼저는, '내가 예수님을 사랑하는가?'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내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그 사랑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나의 사랑의 표현은 헌신적인 것인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세 가지 질문을 마
음에 두고 반복해서 묻고 답하면서 설교를 들으면 성령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시리
라 믿습니다.
용기 있는 헌신
본문 말씀에는 세 사람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입니다. 그들
은 지금 베다니에서 예수님을 모시고 잔치를 벌이고 있습니다. 똑같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마태복음 26장 6절 이하를 보면 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집은 나사로의 집이 아니라
문둥이 시몬이라고 하는 사람의 집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마 한때 문둥병자였는데 예
수님을 만나서 기적적으로 고침을 받고 예수님의 은혜에 특별히 감격하고 있었던 사람인
가 봅니다. 아무튼 이들은 당시의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참으로 용기 있는 사람들입니다.
요한복음 9장 22절에서 알 수 있듯이 그 당시는 누구든지 예수님 편에 서서 예수님을 하
나님의 아들이라 말했다가는 유대 사회에서 완전히 매장될 수도 있는 살벌한 분위기가
감도는 때였습니다. 사람이 사회로부터 매장되어 외톨이가 되는 것만큼 무서운 것은 없
습니다. 제가 직접 당해본 일은 없지만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요즈음 대통령 아들이라는 분의 처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그의 입장이 되었
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길을 걸어다닐 수 있습니까? 어떤 신문기자가 그가 살고 있는 아
파트의 경비원과 한 이야기를 잠깐 들은 일이 있는데, 그 경비원이 지나가는 말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요즘 어디 함부로 사람들 보는데 드나들겠어요? 요즘에는 꼼짝도
안 하세요." 그의 경우만 보아도 사람들로부터 돌멩이질을 당하고, 외톨이가 되고, 사회
로부터 도태되어 버린다는 것이 당사자에게 얼마나 끔찍한 고문인가 하는 것을 우리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을 고려한다면 예수님이 베다니에 와 계시는 이 기간에 예수님 편에
선다는 것은 웬만한 용기가 아니고는 못할 일입니다. 그러나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
아, 시몬은 그런 위협에도 아랑곳 않고 예수님을 위해 잔치를 벌였습니다. 주님께로부터
받은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세상이 무어라고 하든지, 자신들이 세상으로부터 따돌림을
받든지, 욕을 먹든지 상관하지 아니하고 주님께 감사의 표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유대인들이 가만히 넘어갈 리가 없습니다. 10절을 보면 이 일 이후로 유대인들은 이제
나사로까지도 죽이려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를 꼭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원하는 사람은 예수님
을 위해서라면 자기 목숨이라도 걸고 헌신하기를 원하는 바로 이런 용기 있는 사람들이
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사람을 일컬어 '제자'라고 말씀합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자기를 따르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이 왜 이런 사람들을 원하셨을까요? 이 세상을 변화시
키고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다른 길이 없다는 사실을 주님이 분명히 아셨기 때문
입니다. 세상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구원하는 것은 방법론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문제
입니다. 인간은 방법론을 구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구하십니다. 용기 있게 자기를 주님
앞에 헌신하는 제자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세상을 떠나가면서도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주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교회만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입으로만 고백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버림을 당할지라도 용기 있게 예수만 따라가고 예수를 위해서 헌신
하겠다고 하는 제자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헌신의 세 가지 모델
어떤 면에서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예수님에게 헌신하는 사람의 세 가지 모델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먼저 마르다를 살펴봅시다. 그는 예수님을 초대했습니다. 제자들
까지 합하면 한 20명 내외 정도였으니 아무리 적당하게 대접한다고 해도 특별한 연회를
준비했다면 얼마나 뒷손질이 많았겠습니까? 그래서 본문을 보면 마르다는 부엌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마르다는 참 이상한 사람입니다. 성경에서 그는 언제나 부엌에서 일하는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참 매력적인 여성입니다. 저는 이런 여성을
좋아합니다. 팔을 걷어붙이고, 남이 보든 안보든 신나게 이리 뛰며 저리 뛰며 봉사하는
부인들을 보면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집니다. 마르다는 주님을 위해 몸으로 헌신하는
전형적인 인물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보면 시간과 정력을 쏟아서 자기 몸이 지쳐 쓰러질
때까지 봉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르다 형의 헌신자라고 할 것입니다.
둘째로는, 나사로입니다. 그는 예수님 덕분에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그를 보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살려주신 예수님을 증거하
는 입장이 됩니다. 말 한마디 안해도 사람들은 그를 보고 예수님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
니다. 우리 가운데도 나사로와 같은 헌신자들이 많은데 오늘 1부 예배 때 간증을 하신
형제가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그분은 참 유명한 만화가인데 술독에 빠져 지내던 자기
가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되고 술에서 해방되게 되었는지에 대해 은혜로운 간증을 들려
주었습니다. 사실 그분처럼 폐인처럼 되다시피 했다가 중도에 예수를 믿고 인생을 새롭
게 시작한 사람들은 회사에 가든, 어디로 가든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면 됩니다. 그와
술친구 하던 사람들이 달라진 그를 보며 누구를 생각하겠어요? 예수를 생각하게 되는 것
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렇게 극적으로 예수를 믿고 돌아오는 것도 필요한 것 같습니다.
저처럼 3,4대째 믿는 집안 출신은 도대체 할 말이 없으니까 재미가 없는데, 나사로는 같
은 유형의 헌신자는 가만히 있기만 해도 예수님의 은혜를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마리아입니다. 마리아는 자기가 애지중지하던 그 값비싼 향유 옥합을 몰
래 가지고 나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씻겨드렸습니다. 참으로
독특한 헌신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세 가지 스타일의 헌신을 놓고 어느 것이 더 좋으냐 덜 좋으냐 하고 판단
해서는 안됩니다. 그 어떤 스타일의 것이든, 주님께 드려지는 헌신이기에 아름답고 가치
가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의 헌신이 특별히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사실입니다. 마리아의 헌신은 우리의 관심을 끌고도 남습니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마 마리아의 헌신에 대해 예수님이 내리신 평가 때문일 것입니다.
마태복음26장 6절 이하의 말씀과 오늘 읽은 말씀을 나란히 놓고 보면 예수님이 유독
마리아의 행동에 대해서만 특별하게 코멘트를 하고 계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마리아가 향유를 가지고 자기에게 붓고 머리털로 씻기는 것을 보시고는 "저가 내
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26:10). "그 일은 아름다운 일이다. 나
에게 기쁨과 만족을 주는 일이다."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헌신에 대해 매우 흡
족하게 여기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예수님은 그녀의 행동을 자신의 죽음을 위
한 것으로 해석하셨습니다. "이 여자가 내 몸에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
이니라"(마26:12). 장례식을 위해서 마리아가 향유를 자기 발에 부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보다 깊은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주님은 마리아가 자신의 고난에 동참하고자
하는 심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읽으신 것입니다. 당시 예수님은 며칠 후면 져야 할 십
자가를 기다리며 내면의 불안과 공포를 고스란히 다 겪고 계셨습니다. 본문 27절을 보십
시오.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
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 예수님의 고민과 갈등
을 그대로 읽어볼 수 있지 않습니까? 마리아는 예수님의 그런 심정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몸은 잔치 자리에 와 계시지만 심령으로는 몹시 고통스러워하시는 주님께 조금이
라도 위로가 되고 싶어 그 귀한 향유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리아는 어떻게 예수님의 마음을 이렇게 잘 읽을 수 있게 되었을까요? 정
확하게는 모르지만 성경을 통해서 보면 한가지 힌트는 얻을 수 있습니다. 마르다는 예
수님 오실 때마다 항상 부엌에 있는 여자였지만 마리아는 항상 예수님 발 앞에 앉아있는
여자였습니다. 손님이 오면 나가서 대접할 생각을 해야 할 텐데 마리아는 예수님 발 앞
에 앉아서 이야기만 들으려고 했습니다. 유대 나라에서 '발 앞에 앉는다'는 것은 배우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마리아가 예수님 발 앞에 앉아서 무엇을 기대했겠습니까?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생명의 말씀을 듣고싶어 했던 것입니다. 그때 주님도 그런 마리아를 보시
고 마음에 있는 이야기를 많이 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또 어떤 면에서는 예수님이 인간적으로
자기가 마음에 갖고 있는 감정도 마리아에게 털어놓았을 지도 모릅니다. 마리아는 주님
의 말씀을 이토록 많이 들었기에 그 만큼 주님의 마음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던 것입니
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이런 심정을 아시고 큰상을 약속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6장 13절
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
는 것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이 말씀대로 그녀가 죽은 지
벌써 1,900년이 훨씬 지났음에도 오늘 우리가 마리아의 헌신을 생각하며 다시 한번 은혜
를 받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마리아 자신에게 얼마나 큰 영예가 됩니까? 주님께서 마
리아에게 이와 같은 큰상을 주신 것입니다.
사랑은 값을 따지지 않는다
이 모든 말씀을 종합해 보면 마리아가 옥합을 깨트려 주님의 머리와 발에 부었던 헌
신은 부엌에서 열심히 식사 준비를 했던 마르다의 헌신이나 예수님 곁에 앉아 자기를 다
시 살려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는 나사로의 헌신과는 분명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마리아의 헌신이 특별히 다르게 보이게된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값비싼 향유
옥합 때문일까요? 물론 그것도 부분적인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마리
아의 헌신이 특별히 돋보이게 된 가장 주된 이유는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마리아
의 행동에는 향유보다 더 진한 향기를 토하는 사랑이 배어 있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억누를 수 없어 그렇게 행동한 것입니다. 사랑은 행동으로 말합니다. 입으로 말하지 않
습니다. 마리아의 행동은 사랑으로 말하는 행동이었습니다. 사랑으로 하는 헌신은 독특
한 면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마리아의 헌신에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독특한 면을
발견할 수 있다고 봅니다.
첫째로, 사랑으로 하는 헌신이기 때문에 마리아는 주님께 최고의 것을 드렸습니다.
사랑은 최고의 것을 드리게 되어 있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이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향
유 옥합을 깨어서 예수님의 머리와 발에 부었습니다. 그것은 가룟 유다의 계산대로라면
300 데나리온, 곧 노동자가 일년 동안 수고해서 벌 수 있는 금액에 해당하는 엄청난 것
입니다. 요즘 시세로 따지자면 1,000만원 내지 1,200만원 정도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
다. 대단한 액수입니다. 그녀는 그것을 주님께 부어 드렸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랑
은 값을 묻지 않습니다. 사랑은 계산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다 주는 것입니다. 값을 따
진다면 그것은 사랑의 행위가 아닐 것입니다.
우리 교회 젊은이들인지 아닌지 제가 정확하게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만 사랑하는 두
남녀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두 사람은 결혼할 날짜까지 정해 놓고 있었는데 한번은 둘
이서 백화점에 가게 되었습니다. 서로가 사랑하니까 좋은 것을 사주고 싶지 않겠습니까?
예비 신부는 잔뜩 기대에 부풀어서 따라 다니는데 이 남자가 집는 물건마다 가격을 보더
니 "야, 너무 비싸다. 좀더 싼 데 가보자."라고 하면서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것이 아닙
니까? 결국 이 일이 화근이 되어 가지고 두 사람이 헤어지고 말았다고 합니다. 물론 돈
을 아끼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럴 때는 차라리 값을 묻지 말든지, 돈이 모자라 비싼
것을 사줄 수 없으면 아예 값비싼 물건이 없는 곳으로 가든지 해야지 괜히 값을 따지면
서 이리저리 끌고 다닌다면 순수한 사랑의 꿈을 꾸고 있는 예비 신부가 얼마나 마음이
상하겠습니까? 사랑이란 원래 값을 묻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더 주지 못해서 미안하고, 더
잘해 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인 것입니다. 이게 바로 사랑의 마음입니다. 여러분이 젊어
서 연애할 때 다 경험해 보시지 않았습니까? 그 때 심정이 어땠습니까? 뭐든지 다 주고
싶었잖아요? 그게 사랑입니다. 마리아의 심정이 그랬던 것 같습니다. 우리 예수님께 너
무 비싸서 드리지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 마리아의 심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
리를 사랑해서 자기의 모든 것을 다 주셨습니다. 하늘 보좌의 영광도 내놓으신 분입니
다. 자기의 생명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다 주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 그를 사
랑한다면 최고의 것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값을 따지지 않고 아낌없이 주는 것이 사
랑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고 싶으냐? 네가 정말
나를 사랑하고 싶으냐? 그러면 이렇게 사랑해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
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나를 사랑해라." 한마디로 말해 우리의 최고의 것을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인 것입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이 받으신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
리의 최고의 것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분이십니다. 그 자신이 우리를 위해 모든 것,
최고의 것, 완전한 것을 다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모든 것을 요구하시
면서도 조금도 미안하게 생각하시지 않으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마리아의 행동은 조금도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어느 선교사의 글을 읽으면서 무척 충격 받았습니다. 오래 전에 인도에서 선교
사역을 하시던 어느 미국 목사님이 어느 날 갠지스 강가로 나갔다고 합니다. 거기에 나
가보니 한 여인이 두 아들을 데리고 강둑으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인도에서 오랫동안
선교 사역을 하면서 그가 직감적으로 느끼는 것이 있었습니다. '아, 저 여자가 두 아이
중 하나, 아니면 둘 다 갠지스 강에 집어넣어서 신에게 제사를 드리려고 가는구나.' 그
래서 그는 부리나케 달려가서 그 부인을 붙들고 "제발 그런 미련한 짓을 하지 말라. 그
건 아무 쓸 데 없는 일이다. 왜 아이를 희생시키려느냐?" 하고 간곡히 만류했지만 그 여
인은 완강했습니다. 너무 불쌍해서 아이들을 보니 한 아이는 아주 참하게 생긴 남자애입
니다. 그리고 또 한 아이는 몸이 불구인데다가 장님입니다. 그 여인에게 아무리 설득을
해도 소용이 없는 줄 알고 선교사는 발길을 돌렸습니다. 한참을 있다가 궁금해서 또 강
가로 나갔는데 아까 전의 그 여인이 강둑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습니다. 두 아이 중 하나
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가까이 가서 보았더니 잘 생기고 성한 아이는 없어지고
불구요 장님이 된 아이만 데리고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는 너무 놀라서 "아니, 신에게
바치려면 불구에다 눈이 멀어 인생을 살아가기가 어려운 이 아이를 바칠 것이지 왜 성한
아이를 바치셨나요?" 하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여인은 정색을 하며 이렇게 대답
했다고 합니다. "선생님, 미국에서는 어떤 신을 믿고 있는지 모르지만 여기 인도에서 우
리가 섬기는 신은 우리가 그에게 최선의 것을 드리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배웠고 또 그렇
게 믿고 있습니다. 드리려면 두 아이 중 좋은 아이를 드려야지 어떻게 덜 좋은 아이를
드리겠습니까?"
여러분, 저는 인도의 힌두교 신이 어떤 신이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그 신이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늘의 보좌를 내버리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습니다.
그 신이 우리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의 생명 대신에 자기 생명을 십자가에 내어놓
고 희생하셨다는 이야기도 못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에게 최선의 것
을 드려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며 가슴이 뜨끔해지
는 것을 느꼈습니다. 우리가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지 않나 하는 두려운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가끔 예수를 믿는 사람들 가운데 매정하고 인색한 분들이 너무 많지
않은가 하고 생각을 해 봅니다. 하나님이 자기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대신 희생시키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을 확신한다면, 우리의 반응이 뭔가
달라야 할 것 같은데, 너무 속이 들여다보이는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
다.
6.25 전쟁이 나서 남편을 잃어버린 부인이 있었습니다. 그 부인이 얼마 후에 유복자
를 낳았습니다. 20대에 과부가 된 그 부인으로서는 삶이 비록 고달팠지만 그 아들이야
말로 생명 그 자체요, 꿈이요, 기쁨이었습니다. 그 부인은 젊음을 바치고 평생을 바쳐
아들을 키웠습니다. 때가 되어 결혼도 시켰습니다. 그렇게 한 2,3년을 아들 내외와 함께
참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 부부가 어머니를 찾아왔습니다. "어머니,
우리 이민 가겠습니다." 그 어머니는 너무나 충격을 받아 입만 벌리고 쳐다보고만 있습
니다. 이런 어머니는 아랑곳 않고 아들 내외는 모든 수속을 다 마치고 이민을 떠나버렸
습니다. "어머니, 생활비는 보내드리겠어요."라는 한 마디를 남기고는 훌쩍 떠나버린 것
입니다. 이런 아들을 보고 우리가 한가지 분명히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는 어머
니에 대한 사랑이 눈꼽만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머니를 위해서 희생하고 싶은
생각은 더더군다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머니 곁에서 멀리 떠나고 싶은 생각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까짓 생활비 조금 보낸다고 어머니를 사랑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불행하게도 교회를 다니는 많은 분들 가운데서 주님의 사랑에 대해 이런 식으로 보답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참으로 서글픈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
러분, 인간이 진정 행복한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아끼지 않고
내놓을 바로 그 때입니다. 그것이 자녀를 위한 것이든, 남편을 위한 것이든, 아니면 예
수님을 위한 것이든 간에 마음속에서 사랑이 끌어 올라서 도저히 내가 움켜쥐고 있을 수
가 없어 아까운 줄 모르고 흩어줄 때가 가장 행복한 것입니다. 반대로 사람이 언제 가장
불행한지 아십니까? 움켜쥐고 내놓지 않으려고 벌벌 떨고 있을 때 인간은 가장 불행합니
다.
저는 교회 안에도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고 봅니다. 행복한 신앙생활을 하는 그룹과
불행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그룹이 그것입니다. 행복하게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은 날마다
예수님의 사랑에 감격합니다. 나 같은 것을 구원하기 위해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자기 생명 다 바쳐주셨다고 하는 그 사실만 생각하면 그분을 향한 사랑이 항상 가슴에
차 오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면 그분에게 좀더 기쁨을 드릴까? 그분에게 더
좋은 것을 드릴까? 그분에게 더 최고의 것을 드릴까? 하는 빚진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
서 주님이 기뻐하신다면 시간도 아끼지 않습니다. 돈도 아끼지 않습니다. 내 몸도 아끼
지 않습니다. 기쁨으로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고 드립니다. 이런 사람들은 항상 얼굴이
밝습니다. 기쁨이 충만합니다. 신앙생활이 그들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는 똑같이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왠지 어두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들을 가만히 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내놓지를 않습니다. 그 마음이 너무 인색합니다.
지극히 계산적으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풍족하게 가져도 불행해지는 것입
니다. 늘 안 내놓으려고 벌벌 떨고 있으니 불행한 것입니다. 그들에게 신앙생활 하는 것
이 얼마나 부담스럽겠습니까? 차라리 안 믿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할 것입니다. 이 얼마나 불행한 사람입니까? 우리는 마리아처럼 최고의 것을
드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늘 행복하게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마음속으로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주님을 사랑하는
가?' '사랑한다면 나의 표현은 어떤 것인가?' 그리고 '나의 표현은 헌신적인 것인가?'
사랑은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둘째로, 사랑으로 하는 헌신이기 때문에 마리아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주님께 드렸습
니다. 마리아는 옥합을 깨트려 예수님의 머리에 붓고, 발에 부은 뒤 자기의 치렁치렁한
머리털을 그 발을 씻었습니다. 이것을 본 가룟 유다는 속에서 분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
습니다. '세상에, 저걸 저런 식으로 못쓰게 만들다니. 도대체 저 여자가 정신이 있나 없
나?'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한 마디를 내뱉고 말았습니다. "아니, 차라리 가난한 자들에
게나 줄 것이지. 이게 무슨 짓이야? 삼 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거액을 이렇게 한순간에
다 날려버리다니. 원, 세상에."
가룟 유다는 계산이 빠른 사람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돈을 많이 만져본 사람입
니다. 더욱이 그는 제자들 가운데서도 살림을 맡고 있는 회계였습니다. 예수님에게 돈이
있었다 해도 얼마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가끔 제자들과 함께 생활을 해야했기에 어느
정도의 돈은 필요했을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누가 주든지 간에 헌금이 들어오면 그것을
받아 가지고 장부를 정리하고 포켓에 집어넣고 다니면서 필요할 때 지출하는 일을 맡고
있었던 것입니다.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이다 보니 그는 아마도 이렇게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마리아가 제정신이 있는 여자라면 그것을 그대로 들고 와서 "주님, 이것 받으
세요. 값이 꽤 나가는 것이니 팔아서 주님이 사역하는데 필요할 때마다 쓰세요."하고 주
님께 드렸을 것이요, 그러면 주님은 그것을 회계를 맡고 있던 자신에게 넘겼을 것입니
다. 그러면 그는 그것을 시장에 가지고 나가서 300 데나리온에 팔고는 장부에는 250 데
나리온만 쓰고 50 데나리온은 자기 주머니에 넣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그러고도 남을 사람입니다. 6절에 보면 요한은 그를 '도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공
금을 슬쩍 하는 일이 이전에도 가끔 있었던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자기가 한 몫 챙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마리아가 날려 버렸다는 생각에 괜히 화가 났던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이렇게 불평을 하자 마태복음에 보면 다른 제자들도 그 불평에 동조를
하고 나섰습니다. 그의 선동적인 기질이 유감없이 발휘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가 정말
가난한 자를 생각해서 그렇게 말하는 것으로 오해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중인격자
입니다. 그는 가난한 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가난한 자를 볼모로 하여 자기
욕심을 채우려고 했을 뿐이었습니다. 이 일이 있은 지 불과 며칠이 안되어 그는 드디어
자기의 본색을 드러냈습니다. 자기 선생되신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아 넘겼던 것입니다.
은 삼십 하면 데나리온으로 따지면 한 120 데나리온 정도밖에 안 되는 돈입니다. 마리아
가 예수님에게 드린 향유 옥합의 액수의 반도 안 되는 미미한 액수입니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그는 그 돈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팔아 넘긴 악한입니다. 입으로는
자선을 외치면서 속에 악한 욕심을 숨기고 있는 사람, 입으로는 군자의 말을 하면서 속
으로는 무서운 계산을 하고 있는 탐욕의 사람, 이런 사람의 눈에는 사랑으로 하는 모든
행동이 허비요, 낭비로 보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유다가 무슨 소리로 비난을 하든 일언반구 대꾸하지 않고 그것을 주
님께 드렸습니다. 사랑은 귀머거리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도 보면 마리아처럼 별나
게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가끔 보이면 주변에서는 그들에
대해 이런저런 말이 생겨납니다.
집안에서 부인이 별나다 싶을 정도로 예수를 믿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남편 입장
에서는 그런 부인이 참 불안할 것 같습니다. 헌금을 했는데 또 헌금하겠다고 그러지를
않나요? 십일조를 바친다면서 거의 십의 오조를 가져다 바치지를 않나요? 남자가 쩨쩨하
게 장부를 뒤적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냥 놔두자니 광신자가 될 것만 같아 은근히 불
안한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잔소리도 해보고, 더러는 쥐어박기도 하지 않습니
까? 그러나 여러분, 염려하지 마십시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성령에 감동이 되어
주님께 드리려고 하는 사람은 앞뒤 없는 행동을 절대 안 합니다. 남편을 사랑합니다. 자
식도 사랑합니다. 집안 살림도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염려한 나
머지 뒤에서 이런저런 말을 하는 경우가 가끔 있는 것입니다.
또 어떤 가정에서는 남편이 예수님에게 미쳐 가지고 주머니에 있는 것마다 다 내놓으
려고 하니 그 부인이 안절부절을 못합니다. 또 어떤 집에서는 자녀가 예수님에게 미쳐
가지고 젊음을 바쳐 헌신하겠다고 나서니 그 부모가 야단법석을 떱니다. 머리가 총명한
것이 앞으로 대학 졸업하면 판검사나 교수가 될 것이라고 잔뜩 기대했었는데 어느 날 갑
자기 선교사로 나가겠다니 부모가 충격을 받는 것입니다. "야, 너는 예수를 믿어도 뭐
그렇게 별나게 믿냐? 판검사가 되어도 얼마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잖아, 이놈
아."하면서 그 뜻을 꺾어 보려 하지만 막무가내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젊은이는 예
수님의 사랑을 마음속에 뜨겁게 깨닫고부터는 한번밖에 없는 젊음이지만 그것을 옥합으
로 깨트려 주님께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집안 식구나 학교의 선생님이나, 친구
들이 그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이런 일들이 왕왕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런 사람을 비난하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이런 사람을 기뻐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미지근한 태도에 맞추려
고 자신의 뜨거운 열정의 온도를 낮춰서는 안됩니다. 자신의 옥합을 입으로는 "주여, 주
여" 하면서 주의 제단에 드리기는 인색하기 그지없는 그런 사람들의 헌신과 비교할 필요
가 없습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면 두리번거리며 남의 이야기를 들을 것이 없습니
다. 우리 마음을 주님께 드리면 그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받으신 주님께서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엄청난 축복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을 분명히 믿습니다. 이 축
복은 주님께 드린 자만이 알 수 있는 놀라운 은혜요 축복인 것입니다.
사랑의 우선 순위
셋째로, 사랑으로 하는 헌신이기 때문에 마리아는 주님께 최우선으로 드렸습니다. 가
룟 유다는 마리아를 보고 왜 그 값비싼 향유를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데 쓰지 않고 예수
님의 발에다가 쏟아 낭비하느냐고 화를 냈습니다. 돈을 쓰는 용도가 틀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도리어 그의 우선 순위가 잘못된 것임을 밝히 말씀하셨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그
렇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사랑은 구제보다 앞서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태복음 22장 37절
이하에 나오는 대계명을 보아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
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첫째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그 다음
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순서를 절대 바꾸면 안 됩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같이 죽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에 조
금이라도 동참하고 싶어했습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음이 번민하여 죽게 되
었을 때 같이 갔던 세 제자를 불러 놓고 자기와 함께 깨어 있어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들이 가만히 앉아서 눈만 뜨고 있기만 해도 자기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되겠다는 것입
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잠들어버렸습니다. 가장 고독한 순간에 예수님과 함께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저는 7년 전에 불면증으로 1년 반 동안을 씨름한 일이 있습니다. 저는 잠을 도무지
못 이루고 있는데 옆에 있는 사람이 코를 쿨쿨 골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럴 때면
마음이 얼마나 허전한지 모릅니다. 우리 집사람이 그랬다는 말이 아닙니다. 환자의 경우
누군가가 자기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나누고 싶어서 잠이 와도 잠을 자지 않고, 나가고
싶어도 나가지 않고 붙어 있어 줄 때 제일 고맙고 위로가 되지 않습니까? 마리아는 주님
께 바로 그런 사람이 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마리아는 이제 예수님이 자기 집으로 찾
아올 기회가 다시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직감하고 있었습니다. '이게 마지막 기회야. 이
때 내 사랑을 표현하고, 주님의 고난에 내가 마음을 쓰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다.'
그래서 그것을 주님께 드렸던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는 예수님을 기쁘게 하고 찬양하고 예배하고 높이는 일
을 가장 앞세웁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과 가난한 자를 위하는 것을 동등하게 보시면
안됩니다. 예수님을 예배하는 것과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것을 혼동하시면 안됩니다. 예
수님의 영광과 사회 복지를 동일하게 다루시면 안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최우선순위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바로 이와 같은 소중한 교훈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는 것
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지금까지 우리는 마리아의 행동을 통해 사랑으로 하는
헌신의 세 가지 독특한 면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는 최고의 것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남
이 뭐라고 하든 개의치 않고 주님께 드렸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최우선으로 드렸습니다.
우리 모두 이와 같은 아름다운 헌신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어떻습니까? 진정 주님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사랑한다면 그 사
랑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 표현은 과연 얼마나 헌신적인 것입니까? 해
링톤이라고 하는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마귀가 가장 요긴하게 사용하는 사람은 활
동적인 죄인이 아니라 비활동적인, 다시 말해 헌신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다." 오늘
날 사탄은 제 세상을 만난 것처럼 날뛰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 안에 헌신기피증이
전염병처럼 퍼져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두들 조금 살만 하니까 헌신하기를 기피합니
다. 쉽게 예수 믿고, 편하게 신앙 생활을 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보면 헌신
자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오늘날 왜 교회가 이토록 힘을 잃고 있습니까? 이 나라에
교회가 몇 만개나 되는데도 세상 꼴이 이 모양입니까? 헌신하기를 원하는 그리스도의 제
자들이 자꾸 줄어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득실을 계산하면서 철저히 자기 본위로만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이 수만 명이 모인다 한들 그런 교회가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인도의 간디를 잘 아실 것입니다. 저는 그가 얼마나 위대한지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인도 사람들에게 그는 가히 신적인 존재나 다름없는 인물입니다. 그의 일대기를 서술한
자서전이 400권이 넘습니다. 그의 어록만도 80권이 넘습니다. 1948년 1월, 그가 어떤 미
치광이에 의해 피살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인도 전역에서 그를 따라서 자살한 사람이
몇 명인지 아십니까? 학자들의 계산에 의하면 많이 잡으면 100만 내지 200만이고, 적게
잡으면 20만 내지 60만이라고 합니다. 간디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 많은 사람들이 자기
의 생명을 바친 것입니다. 진정 내 마음을 드리는 대상이면, 정말 내가 사랑하는 대상이
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심지어 자기 생명까지라도 아깝지 않은 것입니다.
간디 같은 사람을 위해서도 생명을 바치는 사람이 수십만 명이었다고 한다면 하늘의
모든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 대신 죄인이 되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사랑을 한 몸으로 받고 있다고 고백하는 우리야 어떠해야겠습니까? 주
님은 헌신자를 부르고 있습니다. 주님은 사랑의교회에 몇 만명이 모이느냐에 대해서는
별로 개의치 않으십니다. 주님이 찾으시는 것은 마리아처럼 사랑으로 헌신하는 사람입니
다. 여러분 그런 생을 살다가 주님 앞에 서고 싶지 않습니까?
제가 드린 세 가지 질문을 다시 한번 마음속으로 되뇌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예
수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내가 사랑한다면 나의 사랑의 표현은 어떤 것인가?' '그리고
그 사랑의 표현은 헌신적인 것인가? 아니면 이기적인 것인가?' 한번뿐인 인생을 우리가
주님을 위해 깨트리는 옥합으로 드려야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그
사랑을 표현하기 원한다면 우리가 가진 능력이나 재산, 시간, 그 무엇이든 전부 주님께
드립시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요구하십니다. 주님이 먼저 자신의 모든 것을 우
리를 위해 아낌없이 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번 한 주간 동안 성령께서 하늘 문을 여
시고 예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풍성히 부어 주사 그 사랑에 젖게 하시기를 원합니
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 그 사랑에 감격해서 우리의 남은 생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온
전히 드릴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하시기를 하여 그분을 위하여 드리는 아름
다운 제물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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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양로원 갑천뉴스타트 원문보기 글쓴이: 엘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