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이야기가 길어지네요? 좀 짧게 정리하겠습니다.
그분의 수행에 대한 확신과 실천은 확고했던 것 같습니다.
스물입곱의 첫 안거 이후, 사업을 하는 와중에도 종종 안거에 들었고, 일제시대의 그 척박하고
고단한 환경속에서도 그분은 금강산 마하연에까지 가서 수행하는 열의를 보입니다.
용성스님, 만공스님, 한암스님, 동산스님, 효봉스님 등 당대의 선지식들을 찾아다니면서
법을 묻고 공부하는 것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하니, 대단한 신심의 소유자이자
실천력이 강한 사람이었죠.
사업을 하면서 도를 구하던 아버지를 회고하면서 그분의 다섯째 아드님(70세)은 이렇게 말하더군요.
동국산업 회장으로 있는 그분은 현재 아버지가 머물렀던 암자의 요사채에 살면서
참선수행하고 있답니다.
"기업하는 분이 하안거, 동안거를 찾아다녔으니까, 기업을 제대로 했다고는 할 수 없지요.
적어도 젊은 시절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지금 수행을 좀 해보니까,
참선을 습관적으로 하면 저절로 자기가 해야 할 일이 정리되고,
어떠한 문제에 대한 답도 나오게 되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쨋든 경쟁에서 이겨야 하는 기업정신은 무욕과 무아를 추구하는 종교정신과는 안 맞지만,
아버님의 지혜는 수행에서 나온 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나이드니, 진정한 무심일 때 세상을
정확히 보고 다루는 지혜가 나오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회사일은 산재해 있고 밥먹이고 가르쳐야 할 자식들은 많은데,
젊은 날부터 종종 석달 열흘 산에 들어가서 안거에 들었던 것은
수행이 현실생활에 큰 힘을 발휘한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었겠죠..
근검절약할 줄 알고 성실하게 올바른 길만 가면 되는 거지요. 아버지가 저희들에게 주신 교훈입니다."
그분은 기업가라기보다는 구도자였던 사람이죠.
육이오 전쟁이 났을 때의 일입니다.
1949년 가마니업과 창고업을 겸하면서 사업을 하고 있던 그에게 예기치 않은 제안이 들어옵니다.
못장사를 한 번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이었죠. 그를 눈여겨보던 사업가 한 사람이 자신의 회사를
인수하라고 권했던 겁니다. 여유가 있던 그는 그 회사를 인수했고, 또 예기치 않게 전쟁이 나자
피난처에 판잣집을 짓느라 못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자 그는
‘가마니로 돈을 쓸어담을 정도’로 돈을 법니다. 동국제강을 창업하는 종자돈이 되었다고 하니까
그때 얼마나 많이 돈을 벌었는지 알 수 있죠.
부산에 회사를 두었기 때문에 전쟁중에도 참화를 입지 않고 승승장구했던 걸보면
그가 얼마나 복인인지 짐작할 수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감동적인 것은 그때 그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부에 동요하지 않고 전쟁중임에도 불구하고
산사를 찾았다는 겁니다. 해인사에서 부산으로 피난와 금정사에서 결제를 하고 있던 효봉스님을
찾아가 함께 참선공부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 일을 보면 50대 초반이던 그가 당시 얼마나 수행에 대한 확신에 차있는지 알 수 있죠.
한 선방에 앉아 참선을 하면서 그를 눈여겨보았던 효봉스님은 얼마되지 않아 그가 동국제강을
설립하고 국내 최고의 철강그룹으로 발돋움하고 있을 즈음, 고개를 끄덕이면서
상좌인 보성스님(송광사 조계총림 방장)에게 말씀했다고 합니다.
“내, 성품이 맑은 사람이라 절대 실수 안 할 줄 알았지..” 라고 말이죠..
평소 지인들에게 그는 ‘불교는 중생교화다’라고 말씀했다고 합니다.
그런 그가 중생교화에 적극적으로 발걸음을 한 것은 육십이 넘으면서부터입니다.
육십이 넘자 그는 수행에 더욱 몰입하면서 회향의 방법에 대해 고민합니다.
60대 초반, 그는 한 작은 암자에서 한철 안거에 들면서 하루 아홉시간의 정진을 하는데,
그때 함께 정진했던 스님은 ‘세달 동안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상당한 경지에 가 계시구나’ 하고
느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가 진갑이 되던 해 양산의 한 토굴에서 단 둘이 수행을 했던
성수스님(현 조계종 원로의원)은, ‘묵묵히 앉아 수행하는 모습이 마치 저 옛날의 조사스님네를 보는
것 같았다, 그는 어느 경계에서도 절대 속지 않는 경지에 가 있었다’라고 회고하셨습니다.
당시 30대 초반의 스님은 지금 여든 셋의 연세에 와 계신데, 오늘날 그를 회고하면서
“수행과 교화에 있어 근현대를 통털어 동양 제일의 거사였다”고 말씀하시더군요.
그 즈음 그는 사업의 일선에서 거의 물러나 있었습니다.
이미 장성한 아들 여섯이 사업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고,
평소에 그는 나이 60이 되면 일선에서 물러나 수행에만 전념하고 싶다고 말해 왔다고 합니다.
그러나 회사의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일은 그가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비교적 순탄했던 그의 사업은 60년대 초중반 중대한 결단을 요구하는 위기를 맞습니다.
부산 용호동 20만평의 바다를 메워 철강공장을 짓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땅의 철강산업의 발전을 위해서 누가 해도 해야할 일을 그가 자처한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거대한 공장을 지어놓고 생산을 시작하면 일년의 반은 공장을 가동시키고
반은 쉬어야 하는 상황이었다고 해요. 우리나라 철강수요량이 당시는 그렇게 밖에 안되었다는 거죠.
당시로서는 손해볼 것이 불보듯 뻔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결단을 내리죠.
그는 자식들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사람 가는 길은 천 번 물이 꺾이는 것과 같다고 했다. 꺾이지 않고 단숨에 가는 길이란 의미가 없다.
가다가 혹 꺾인다 하더라도 좌절하지 말라. 한쪽 길이 막히면 다른 한쪽으로 길이 열려있는 게
세상사 이치다. 원칙을 ‘진실’에 두기만 하면 된다.
동국제강을 성장시켜서 내가 사는 이 나라에 보답한다는 생각만 하라.”
모든 일의 흐름을 막는 것은 ‘나’와 ‘나의 소유’가 존재한다는 생각에 막혀 있을 때 아닙니까?
그는 ‘나’라는 생각이 없을 때 모든 일은 자연히 이뤄짐을, 또 불이(不二)에 생각의 근원을 두면
막힘 없이 흘러가는 게 세상사 이치라는 것을 터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20만평의 갯벌을 메워 매머드 철강공장을 짓는 것을 보고 당시 재계에서는
‘무모한 도전이다, 이제 곧 동국제강이 문을 닫게 될 것이다’라는 염려의 시각으로
바라보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수행으로 인한 그의 판단은 역시 정확했습니다. 공장을 짓고 나자 생각지도 않게
월남전이 터지면서 월남전을 전후한 호황과 1960-1970년대의 새마을운동을 중심으로 한
건축공사가 크게 신장하고 철근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남에 따라 그의 철강업은
순풍에 돛단듯하여 산하 그룹 18개의 회사를 갖고 국내 5대 기업의 하나로 등극할 수 있는
기반을 닦게 됩니다.
그는 물러서고 나아가야 할 때를 정확히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국가에서 지금의 포항제철 설립을 계획하면서 그에게 경영해줄 것을 부탁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큰 사업은 국책사업으로 해야지 민간으로선 무리한 일이라고 사양했다고
하는군요.
당시 그는 외국출장을 가면서 작은 방석 하나를 꼭 가지고 다녔다고 합니다.
참선을 하기 위해서였죠. 당시 그를 회사에서 보았던 사람들은 일이 없을 때는 언제나 회사에서도
좌선을 하고 있었다고 해요. 집에서도 만찬가지입니다.
그의 며느리들은 아침에 상을 들고 들어가면 언제나 좌선을 하고 있는 시아버지의 모습을
보았다고 회고하더군요. 그리고 그를 옆에서 가까이 모셨던 한 분은,
‘5 16혁명이 나던 날 회장님이 안보여 직원들이 찾아다니느라고 난리가 났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조계사 법당에 앉아 좌선하고 계시더군요.’ 라고 증언하시더군요.
아무튼 그는 60이 넘어 더욱 수행에 박차를 가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함께 회향의 방법에 대해 고심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종합수도원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매머드 수도원을 만들어 인재 불사를 하고
병원, 방송국, 신문사, 양로원 등 복지시설을 만들어 불국토를 만들려고 했다고 합니다.
해서 1백만평의 땅을 마련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가 왕성히 활동했던 60년대 이 땅의 불교계 풍토에서는 그의 선진적이고
이상적인 꿈이 실현되기 어려웠던 모양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73년도에 남산에 현대식 불교회관인 대원정사를 짓는 것으로 마무리를 합니다.
대원정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불교의 산실이라고 일컬어지는 초현대식 5층의 건물로
당시로서는 꽤 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대원정사는 산사에만 머물러 있던 고승들을 시내에 내려오게 해서 대중들에게 법문을 듣게 하면서
대중 교육의 문을 엽니다. 한국불교가 늙고 낡은 것에서 벗어나려면 대중교육부터 시작되어져야
한다고 믿었던 그는 대원정사 내에 대원불교교양대학을 열었습니다.
당시 동국대 불교대학 교수들이 대거 참여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수강생들에게 저녁을 무상으로 제공하고 차비까지 주면서 공부를 시켰죠.
대원불교교양대학은 오늘날 여러 사찰이나 단체에서 행하고 있는 불교교양대학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한국불교에서 처음 시도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시민선방을 개원합니다. 초현대식건물에 선방을 마련해서 호남제일의 선사라고 불렸던
해안스님을 직접 부안 내소사로 찾아가 삼고초려한 끝에 산속에 있던 선사를 도심으로 나오게 합니다.
참선을 실수하게 하고 24시간 선방을 개방한 것입니다. 누구나 와서 선방에 공부할 수 있게 한 거죠.
요즘 한창 시민선방이 각광을 받고 있는 걸 보면 그는 참으로 시대를 앞서간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선진적인 모습은 여기에서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불교방송을 개국하기 위해 발로 뛰기 시작하며 남산에 대불을 세우려고 하기도 합니다.
당시 서울역에서 바라보면 대원정사가 있는 곳이 보였다고 하네요.
그는 거기에 대불을 세워 오가는 사람들이 우러르게 하고 싶어했다고 합니다.
남산 고도 제한에 걸려 그의 꿈이 이뤄지지 않았지만, 그는 그렇게 대중과 부처님의 뜻을 함께
나누고 싶어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여의도 땅에 불국사 같은 고전적인 대 가람을 세우고 싶어했다고
합니다. 오가는 사람들이 들러 편히 쉴 수 있는 사원, 누구나 들어와 참선할 수 있는 곳을 만들고
싶어했다는 것이죠. 오늘날 빌딩숲으로 이뤄진 여의도에 불국사 같은 사원이 들어섰다면
얼마나 장엄했겠습니까?
오늘날 한국불교의 위상이 달라졌으리란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시간은 그를 기다려 주지 않았습니다.
복인에게도 생로병사의 피할 수 없는 손님은 찾아왔습니다.
첫댓글 대원정사의 완공이 73년인 모양이군요. 73년보다 전에 대원정사가 이미 일을 시작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_()_
'자아를 발견하여 지상에 낙원을 이룩하자'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사단법인 대원회 활동을 먼저 시작했습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선구자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분심을 내어 가행정진해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무 아미타불_()_
꼭 전하고 싶은 그의 아내에 대한 이야기 둘.. 그녀는 '내 목숨(命)이 다하는 한이 있더라도 남편의 말을 거스르지 않겠다."라고 했다는 군요. 평등을 주장하며 남편에 대해 늘 시비분별을 멈추지 않는 저에게 경종을 울려주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그녀는 동국제강 초창기 시절,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밥을 직접 해주었다고 합니다. 힘든데 다른 사람시키시죠, 하는 자식들의 조언에 그랬다고 합니다. "부처님께 공양하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 시킬 수 있느냐?" 그리고 그녀는 일꾼들이 먹다 남긴 밥과 반찬을 버리지 않고 그 상에서 다 먹었다고
합니다. "아침이면 새벽부터 시작된 어머님의 '천수경' 읽으시는 소리에 잠이 깨었습니다." 라고 가족들은 전합니다. 절에 들르면 꼭 108배를 잊지 않았던 그녀였다고 합니다. 나무관세음보살!!_()_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_()_
감사합니다.나무아미타불_()_
감사합니다. 아미타불 _()_
나무아미타불.....감사합니다~~ 잘 모셔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