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최고의 스켄들 어을우동에 대한 고찰
근래 세간에 회자(膾炙)되고 있는 성종 치세 때 '안방 스캔들'의
중심에 서 있었던 어우동(於于同)에 관한 이야기는, 전설 아닌 전설로
여러 형태의 이야기로 내려오고 있다.
조선 9대 성종의 치세 시기는 성리학을 중추로 하는 '유교 국가'로서
그 뿌리가 막 내려지고 있을 무렵이었지만, 그녀의 애정행각은 여전히
고래(古來)로부터 내려온 자유분방한 '안방의 사고방식'으로써,
그 변화에 따라가지 못했다는 반증을 여실히 보여주는
무척 중대한 사건이었다.
9대 성종(成宗, 1457~1494)이 살았던 시기의 양반 지배층은
전체 인구에 비해 그리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상류층의 특권의식'은 조선시대 통틀어 가히 최고조에 달했다.
특히 '종실(宗室)의 권위'는 어디 내놓아도 공신(功臣)과 사대부(士大夫)
세력의 위신을 능가할 정도의 위세를 가지고 있었던 시기였다.
종실의 위세에 대한 예를 보인다면, 종실은 정실 본부인 외에도
천첩(賤妾) 뿐만 아니라 관비(官婢)의 소생 일지라도 '종실의 혈통'
으로 인정되면, 모조리 종친부(宗親府)의 직첩을 얻어 사족(士族)
으로 행세할 수 있었다. 또한 어떠한 가문일지라도 상대가 원하던
원치않던 간에, 특정가문을 지정하여 종실이 단자(單子)를 보내면
바로 혼인(婚姻)이 가능할 정도로 거절 못하는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만일 단자를 보내었는데 상대방에 의해 거절 당하면, 종실은 국왕께
바로 소청 올려서 강제로 자녀를 내어 놓도록 할 정도의 위세를 때론
내보이기도 하였다. 이에 미천한 여인의 자식일지라도, 아비가 종실
이라면 어느 사족의 여인이라도 골라서 장가를 들 수 있었던 시기가
바로 이때였다.
성종의 치세에 대표적인 종실 가문은 대부분 태종(太宗)과 세종(世宗)
의 자손들에게서 나왔다.
우리가 흔히 알고있는 '어우동(於于同)', 조선왕조실록엔
'어을우동(於乙于同)'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 어우동의 애정행각은
종실(宗室) 가문과의 혼인으로부터 이야기는 출발하고 있다.
어우동의 성은 박씨(朴氏)이며 그녀의 부친 박윤창(朴允昌)은
1429년인 세종(世宗) 11년 식년시(式年試)의 동진사(同進士)
시험을 11등으로 급제한 문과(文科) 출신의 엘리트 관리였다.
박윤창에 관한 기록은 후일 아들과 딸이 모두 행실이 바르지 못하여
패가 망신하는 바람에 많이 삭제되어 현재 남겨진 자료가 거의 없다.
왕조실록과 문과방목의 기록들을 의거해 본다면 관직은 승문원 지사
(承文院知事, 종3품)와 성균관 사예(成均館 司藝, 정4품), 군수
(郡守, 종4품)를 지냈고, 본관은 상세히 나와있지 않으나 '음죽현(陰竹縣)
사람'으로 쓰여져 있어서 음성(陰城)이 아닐까 추측된다.
문과를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한 박윤창은 당시 '최고의 종실 어른'
으로 통하던 효령대군(孝寧大君, 1396~1486)의 가문과 혼인관계를
이루는데, 당시 효령대군에게는 적자(嫡子) 6남1녀와 서자(庶子)
1남1녀가 있었다.
그 중 다섯 번째 아들이 영천군(永川君)에 봉해진 이정(李定)이란
인물로 영천군은 장수(長壽)를 하여 죽어서 시호를 호안공(胡安公)
이라 하였으며 본부인은 권씨로 아들은 못낳고 딸만 3명 있었다고 한다.
이에 영천군이 여러 첩실(妾室)을 들여 아들들을 얻었는데 그 중 첫째가
바로 태강수(泰康守, 정4품) 이동(李同)이었다.
'태강수 이동'의 선원록(璿源錄) 기록엔 어우동이 빠져있으며, 어우동을
버린 후 현감을 지낸 신숙(申淑)의 딸을 부인으로 들였으나 사이에
자식은 없고, 여러 첩들에게서 승평부령(昇平副令, 종5품) 이전(李전)
와 응천부령(凝川副令, 종5품) 이소(李蘇), 유성부령(柳城副令, 종5품)
이지(李芝), 문현부령(文峴副令, 종5품) 이란(李蘭), 운성부령
(雲城副令, 종5품) 이손(李蓀)을 얻었다고 한다.
어우동... 즉 박씨(朴氏)는 고위관리를 지낸 관리를 아버지로 하여,
당대 최고의 종실과 혼인을 하였으나 생애는
순탄한 '사족(士族)의 여인네 일생'은 아니었다. 어우동이 1480년
죽은 이후 1488년 종국엔 어우동의 친정조차
풍지박산이 나면서 결국 대가 몰락하는데 집안 내력에서 '음력(淫力)
의 기질'이 있었다고 실록은 전하고 있다.
어우동의 어머니는 정씨(鄭氏)로 그다지 행실 좋은 여인은 아니었다고 한다.
정씨는 집안의 노복(奴僕)과 정을 통하여 결국 남편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그리고 그의 아들인 박성근(朴成根)이 어릴적 주변 사람들에게
‘나는 어미가 잠잘 때에 발이 넷이 있는 것을 보았다.’라는 식의 발언으로
인해 정씨가 아들을 무척 미워했다고 한다.
이에 아들을 궤짝에 넣어 밤마다 감금하였고, 의식주를 천한 종의 자식보다
못하게 주어 아들 박성근이 이를 많이 원망하였다.
박성근이 성장하여 재산을 나누어 달라고 하였는데, 토지와 노비를 적게
나누어 주자 이에 아들은 이런 어머니 정씨를 증오하였고, 어머니에 대한
아들의 증오의 복수극은 처참한 결과를 불러온다.
정씨가 친정 조카인 정소(鄭韶)의 집에 머무르는 것을 알고, 노비인 약덕(若德),
내은산(內隱山), 내은동(內隱同), 왕석(往石)과 더불어 강도로 위장하여
돌아오던 어머니를 죽게 만든 것이었다. 이는 성리학에서 말하는 최고의
'강상(降常)의 죄'였다. 아무리 사족(士族)일지라도 죽음은 면할 수 없어,
결국 앞서간 누이처럼 사형 당하고 만다. 이에 박윤창의 가문은 자식들의
계속된 패륜(悖倫)으로 몰락을 하여 기록조차 가물가물하게 된 것이다.
효령대군의 손자인 태강수(泰康守, 정4품) 이동(李同)과 혼인한 어우동이
남편에게 버림받게 된 계기는 바로
천한 남자와 정(情)을 통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집을 드나들던 은장(銀匠)
즉 은세공 기술자랑 눈이 맞아 소문이 돌자 바로 버림을 받았고, 이에 버림
받은 직후 많은 남정네들이 혼자 사는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방산수(方山守) 이난(李瀾)과 수산수(守山守) 이기(李驥), 이 두 명의
종실이 '어우동의 윤리스캔들' 소재를 제공해 준 남자들이었다.
방산수(方山守) 이난(李瀾)은 세종의 둘째 서자 왕자인 계양군
(桂陽君, ?~1464)의 서출 아들이었고, 수산수(守山守) 이기(李驥)는
정종의 아홉째 서자 왕자인 석보군(石保君)의 손자로 봉사손(奉祀孫)이었다.
특히 '방산수 이난'의 어우동에 대한 감정은 남달랐다고 한다.
남편의 재종형제간이었던 방산수와의 추문은 조정의 귀에 들어가,
율이 장(杖) 1백 대, 도(徒) 3년에 고신(告身)을 모조리 추탈하는
데에 해당되는 법의 심판을 받게 된다. 이때가 바로 성종11년인
1480년 7월 9일의 일이었다.
종실인 방산수와 수산수의 처분이 있은지 이틀이 지난 7월 11일,
의금부(義禁府)에서 어우동이 간통한 조정의 관리와 유생 등
사족 남자들에 대한 처분을 상소하게 되는데 여기서 엄청난 남정네
들의 이름이 거론되기 시작한다.
박강창, 홍찬, 어유소, 노공필, 김세적, 김칭, 정숙지, 김휘 등 조정의
쟁쟁한 관리들의 명단이 쏟아져나오자, 국왕 이하 모든 대소 신하들이
어이없어 하는 것이었다. 이 모든 이름은 의금부에 갇힌 '방산수
이난'이 토해낸 이름들이었는데 종국엔 김칭과 정숙지, 김휘가
의심을 받아 의금부 옥에 갇히게 된다.
9월 2일 최종적인 어우동의 조사 결과가 나와 처분이 내려지는데,
그 대상자는 수산수(守山守) 이기(李驥)와 방산수(方山守) 이난(李瀾)
·내금위(內禁衛) 구전(具詮)·학유(學諭) 홍찬(洪燦)·생원(生員)
이승언(李承彦), 서리(書吏) 오종련(吳從連)·감의형(甘義亨),
생도(生徒) 박강창(朴强昌)·양인(良人) 이근지(李謹之)·사노(私奴)
지거비(知巨非)로 어우동과 간통한 죄가 인정되어 율(律)이 결장(決杖)
1백 대에 유(流) 2천 리(里)에 처분되게 된다.
당시 법전엔 사족의 죄는 형벌이 미치지 않는다고 하여 대부분
체형(體刑)은 속(贖)을 받쳐 면하도록 되어있었다.
그래서 조정 대신들은 어우동이 '사족의 딸'임을 감안하여 사형에
이르는 중죄를 주지 않으려고 두둔하는 발언을
많이하게 되는데, 잘못이 크더라도 형이 사족에 이르는 예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였던 같다.
그러자 국왕 성종은 몹시 노해 하였는데 특히 종이었던 지거비(知巨非)
와 사통한 점에 대해선 분노의 극에 달했다고 한다. 지거비의 주인은
종실이었던 밀성군(密城君)이었는데 태강수(泰康守)와 당숙질(堂叔姪)
간이어서 강상의 죄가 극에 달했다고 몹시 불쾌해하였다.
조정 대신들의 처분에 대한 갑론을박(甲論乙駁)에 대해 성종은
자신의 개인적 의중을 남김없이 드러내는데,
“어을우동은 종친(宗親)의 아내로 음행을 자행함이 거리낌이 없어서
유복지친(有服之親)에 이르기까지 간통하였으니, 그 죄가 더욱 심하다.”
라고 일침을 놓는다. 결국 국왕의 고집으로 어우동의 죄는 '
생명형 극형(極刑)'에 처하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1480년 성종11년 10월 18일 어우동은 지엄한 왕명에 의해 교형(絞刑)
에 처해지는데 이는 '교수형'을 말한다. 양반의 딸인지라 피는 보이지 않고
교수형에 처해 그의 화려한 인생을 마감시켜 준 것이었다.
실록에 전하는 어우동의 애정행각은 화려하다. 이 애정행각은 어우동이
의금부로 잡혀온 이후, 문초를 통해 얻은 기록들로 상당히 상세히
사관(士官)이 기록해 놓고 있는데 어떻게 어우동이 남자들을 침실로
끌여들였는지 그 정황까지 아주 구체적으로 서술해 놓고 있다.
첫 애정행각의 대상은 은장이었다. 남편인 태강수가 은장(銀匠)을
집에다 맞이하여 은기(銀器)를 만드는데 어우동이 은장을 보고 좋아하여
거짓으로 계집종처럼 하고 나가서 서로 이야기하며 마음 속으로 가까이
하려고 하였다고 한다. 태강수가 그 사실을 알고 곧 집에서 쫓아내어
어우동은 소박맞고 어머니 집으로 돌아와서 홀로 앉아 슬퍼하며 자신의
기구한 일생을 탄식하고 있는데 계집종이 위로하기를,
“사람이 얼마나 살기에 상심하고 탄식하기를 그처럼 하십니까?
오종년(吳從年)이란 이는 일찍이 사헌부(司憲府)의 도리(都吏)가 되었고,
용모도 아름답기가 태강수보다 월등히 나으며, 족계(族系)도
천(賤)하지 않으니, 배필을 삼을 만합니다. 주인께서 만약 생각이 있으시면,
제가 마땅히 주인을 위해서 불러 오겠습니다.”라고 말하자 어우동이
머리를 끄덕이었다고 한다. 어느 날 계집종이 오종년을 맞이하여 오니,
어우동이 맞아들여 간통을 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두 번째 애정행각이라고 한다.
일찍이 미복(微服)을 하고 종실이었던 방산수(方山守) 이난(李瀾)
의 집 앞을 지나다가, 방산수가 그녀를 보고 맞아들여 간통을 하였는데,
정호(情好)가 매우 두터워서 방산수가 자기의 팔뚝에 이름을 새기기를
청하여 먹물로 이름을 새기었다고 한다. 이것이 세 번째 애정행각이라고 한다.
단오(端午)에 화장을 하고 나가 놀다가 도성(都城) 서쪽에서 그네뛰는
놀이를 구경하는데, 종실이었던 수산수(守山守) 이기(李驥)가 어우동을
보고 좋아하여 그 계집종에게 묻기를, “뉘 집의 여자냐?”하였더니,
계집종이 대답하기를, “내금위(內禁衛)의 첩(妾)입니다.” 라고 대답하자
수산수가 동하여 마침내 남양(南陽) 경저(京邸)로 맞아들여 정을 통했다고 한다.
이것이 네 번째 애정행각이라고 한다.
전의감 생도(典醫監 生徒) 박강창(朴强昌)이 종(奴)을 파는 일로
인해 어우동의 집에 이르러서 값을 직접 의논하기를 청하니,
어우동이 박강창을 나와서 직접 보고 반하여 꼬리를 쳐서 맞아들여
간통을 하였는데, 어우동이 가장 사랑하여 또 팔뚝에다 이름을 새기었다고 한다.
이것이 다섯 번째 애정행각이라고 한다.
이근지(李謹之)란 양인(良人)이 있었는데 어우동이 음행(淫行)을 좋아한다는
소문을 듣고, 간통하려고 하여 직접 그의 문에 가서 거짓으로 방산수(方山守)
의 심부름 온 사람이라고 칭하니, 어우동이 나와서 이근지를 보고 문득
붙잡고서 간통을 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여섯 번째 애정행각이라고 한다.
내금위(內禁衛) 소속 무관인 구전(具詮)이 어우동과 담장을 사이에 두고
살았는데, 하루는 어우동이 그의 집 정원(庭園)에 있는 것을 보고, 마침내
담을 뛰어넘어 서로 붙들고 방으로 들어가서 간통을 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일곱 번째 애정행각이라고 한다.
생원(生員)이었던 이승언(李承彦)이 일찍이 집앞에 서 있다가 어우동이
걸어서 지나가는 것을 보고, 그 계집종에게 묻기를, “지방에서 뽑아 올린
새 기생(妓生)이 아니냐?” 하니, 계집종이 말하기를,“그렇습니다.”하자,
이승언이 뒤를 따라가며 희롱도 하고 말도 붙이며 그 집에 이르러서,
침방(寢房)에 들어가 비파(琵琶)를 보고 가져다가 탔다고 한다.
이에 어우동이 이름을 묻자 대답하기를 이 생원(李生員)이라고 하니
어우동이 말하기를, “장안(長安)의 이 생원(李生員)이 얼마인지 모르는데,
어떻게 성명을 알겠는가?” 하면서 비꼬았다고 한다. 이에 어우동 말에
발끈한 이승언이 대답하기를, “효령대군의 손자 춘양군(春陽君)의 사위
이 생원(李生員)을 누가 모르는가?”하면서 자랑을 하니,
어우동이 좋아하면서 마침내 함께 동숙(同宿)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여덟 번째 애정행각이었다고 한다.
학록(學錄) 홍찬(洪璨)이 처음 과거에 올라 유가(遊街) 하다가
방산수(方山守)의 집을 지날 때에 어우동이 살며시 엿보고 간통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그 뒤 길에서 만나자 소매로 그의 얼굴을 슬쩍
건드려주자 홍찬이 마침내 그의 집에 이르러서 간통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아홉 번째 애정행각이었다.
서리(署吏) 감의향(甘義享)이 길에서 어우동을 만나자, 희롱하며
따라가서 그의 집에 이르러 간통하였는데, 어우동이 감의향을 매우
사랑하여 또 등에다 이름을 새기었다고 한다.
이것이 열 번째 애정행각이었다.
종실 밀성군(密城君)의 종(奴)이었던 지거비(知巨非)가 이웃에서
살았는데 틈을 타서 간통(奸通)하려고 하여, 어느 날 새벽에
어우동이 일찌감치 나가는 것을 보고 위협하여 말하기를,
“부인(婦人)께선 어찌하여 밤을 틈타 나가시오? 내가 장차 크게
떠들어서 이웃 마을에 모두 알게 하면, 큰 옥사(獄事)
가 장차 일어날 것이오.”하니 어우동이 두려워서 마침내 안으로
불러 들여 지거비랑 간통을 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열 한번째 애정행각이었다.
어느 바람난 여편네의 애정행각이 커다란 사회이슈가 된 것은 바로
어우동이 종실의 아내로서 다른 종실과 간통한 일이 이른바
'근친상간(近親相姦)'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성리학의 윤리
로서는 도저히 상상이 안될 정도의 인륜의 법도를 어긴 사건...
남편의 8촌 이내의 남자들과 애정 행각을 벌린 어우동의 행각은 '
왕실의 지엄한 위엄'을 송두리째 뽑아버린 중차대한 일인 것이다.
거기다가 위세 높은 종실의 아내가 천하디 천한 사내종과의 애정놀이
는 당시 '종실(宗室)의 수장(首長)'인 성종(成宗)의 눈엔 대단히
모욕적인 행위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거기다가 사건이 더 커진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방산수(方山守)
이난(李瀾)이 옥중(獄中)에 있으면서 어우동에게,
“예전에 감동(甘同)이 많은 간부(奸夫)로 인하여 중죄(重罪)를 받지
아니하였으니, 너도 사통(私通)한 바를 숨김없이 많이 끌어대면,
중죄를 면할 수 있을 것이라.”하였는데, 이것은 많은 지배층이
연루되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사건을 은폐하고 축소하고
싶어하는 지배층의 동지의식에 의한 보호본능을 자극하기
위한 방산수의 노림수였다.
이로 인해 어우동이 간부(奸夫)를 많이 열거하기 되고,
방산수 이난도 조정의 실력자들이었던 어유소·노공필·김세적·
김칭·김휘·정숙지 등의 이름을 끌어대었지만 그들은 모두 증거가
없어 방면하게 된다.
방산수 이난이 의금부에서 공술(供述) 하기를,
“어유소는 일찍이 어우동의 이웃집에 피접(避接)하여 살았는데,
은밀히 사람을 보내어 그 집에 맞아들여 사당(祠堂)에서 간통하고,
뒤에 만날 것을 기약하여 옥가락지를 주어 신표(信標)로 삼았으며,
김휘는 어우동을 사직동(社稷洞)에서 만나 길가의 인가(人家)를
빌려서 정(情)을 통하였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자못 어우동의 어미 정씨(鄭氏)도 음행(淫行)이 있을 것
을 의심하였는데, 정씨가 일찍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사람이 누군들
정욕(情慾)이 없겠는가?
내 딸이 남자에게 혹(惑)하는 것이 다만 너무 심할 뿐이다.” 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어우동의 모친도 당시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지만,
그녀의 애정행각은 말 그대로 '찻잔 속의 태풍'으로 그 심각성을
의심하지 않았다. 방산수가 앞서 언급했던 '감동(甘同)의 사건'도
역시 어우동과 유사한 애정행각 사건이었으나 말 그대로 가벼운 처분
에 그치었다. 즉 천한 여인네의 치마 관리는 국가가 관여하지 않는다는
지배층 나름의 논리적 해석에 의한 결단이었다.
그러나 어우동은 혼인을 '왕실의 지친(至親)'과 하여 그녀의 신분과 위치가
너무나도 높고 커진데다가, 상대한 남자들이 당시 이름 값을 하는
내노라하는 인물들이 다수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단순한 애정행각(?)'
을 당시 지배층이 지나치게 확대 및 해석을 유발했을 지도 모른다.
애정에 관한 윤리관의 확대 해석은 그녀에게 애정행각에 대한 '
확대 경계의 추궁과 책임에 대한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성종 때의 사회적 분위기는 고려가 남겨준 '불교적 윤리'
유산과 조선의 새로운 '성리학적 윤리'가 마지막으로 충돌하던 시기였다.
수 십년간 여러 대에 걸쳐 조선의 군주들과 사대부들이 사회에 뿌리
내리고자 했던 성리학적 사고방식을 이때에 이르러, 모든 지배 사대부들의
뇌리 속에 '애정에 관한 윤리의 경각심'으로 남겨준 하나의 전환기적 사건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종국엔 이러한 성리학적 윤리관의 희생양으로 바쳐진 인물이 바로 어우동,
바로 여인(女人)이었다
첫댓글 예나 지금이나 정치인들의 추잡한 애정행각은 오십보 백보 군요 모르고 있었던 상식 잘 깨우치고 갑니다
김선생님!! 괜히 읽었단 후회도 되시죠!! 어느분의 리플을 각색 해 봅니다......빼어난 미모 흠모하는 마음을 다스릴줄 아는 덕목까지 지녔다면 말 그대로 금상첨화. 경국지색 이란 말이 괜한 말이 아니였다. 남자를 치마폭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하는것 여자의 능력 이라면 능력이다. 여자 뿐아니라 남자도 사랑 한다는 말을 듣고 싶어한다. 자신의 마음은 당연히 알아줄거라 생각하는 여자 또는 남자, 나에게는 당신 밖에 없다 말하는 여자 또는 남자, 착각 내지는 자기최면에 빠지시는건 아닌지요. 돌아서면 무 자르듯 싹둑 냉정하게 자르는건 여자 라네요^^*
후회는 하지않습니다 그러한 세계도 있었구나--하고 감탄할 뿐입니다 저는 70평생을 살아왔어도 저러한 내용에 관심을 둬본적도 없고 신경도 쓰지 않아서 사실 전혀 모르고 온것인데 느즈막에 많이 알고 갑니다 주변에서 듣던 얘기들이 실제였구나--하고 말입니다...저는 여자의치마폭에 안기고 싶은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제가 여자를 제가슴속에 깊이 묻어둘수는 있지만......
저도 왕과 나 드라마 때문에 첨으로 어을우동에 대해 알게 되었답니다~~ 전혀 관심도 없었는데 말입니다!! 그나저나 제가 드라마를 보니까요 남자라면 누구나 어을우동에게 사랑을 느껴 빠져 들던데요(수염없는 내시빼고)~~ 김선생님 그렇게 말씀하심은 연세가 많으신 까닭으로 그리 말씀하시는건 아니온지요?^^& 지금 시를 한편(웃을수 있는 비결) 올리다 말구 리플쓰기에 1시가 다 되버렸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