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름 6월 병진일에 태조가 포정전(布政殿)에서 왕위에 올라 국호를 고려(高麗)라 하고, 연호를 천수(天授)라 고쳤다. 과거에 세조(世祖)가 송악의 남쪽에 집을 지었는데, 중 도선(道詵)이 문 밖 나무 아래에 와 쉬면서 탄식하기를, "이 땅에 마땅히 성인이 날 것이다." 하였다. 세조가 이 말을 듣고 신도 거꾸로 신은 채 따라 나가 맞이하여 그와 함께 송악산에 올랐다. 도선이 굽어 살피고 우러러 보더니 글 한 통을 지어 세조에게 주면서, "공이 내년에는 반드시 귀한 아들을 얻을 것이니 자라거든 이것을 주십시오." 하였는데, 글은 비밀에 부쳐져 세상에서 알지 못하였다. 태조의 나이 17세 때에 도선이 다시 와서 보기를 청하고서, "족하(足下)는 백육(百六)의 운수를 만났으니 말세의 창생은 공이 널리 구제해 주기를 기다리오." 하고, 곧이어 군사를 내고 진을 설치하는 데 필요한 지리ㆍ천시(天時)의 법과 산천에 제사지내는 데 관한 감통과 보우(保佑)의 이치를 말하여 주었다. 이때는 신라의 정치가 문란하여 뭇 도적들이 다투어 일어나던 때로 견훤(甄萱)은 반역하여 남쪽 고을을 점거하여 후백제(後百濟)라 일컫고, 궁예(弓裔)는 고구려의 옛땅을 점거하여 철원(鐵圓)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 이름을 태봉(泰封)이라 하였다. 세조는 송악군(松嶽郡)의 사찬(沙飡)이었는데, 그 고을을 거느리고 궁예에게 귀부(歸附)하니, 궁예가 기뻐하여 즉시 그를 금성태수(金城太守)로 삼았다. 세조가 곧이어 궁예를 설득하여 아뢰기를, "대왕께서 만약 조선ㆍ숙신(肅愼)ㆍ변한(卞韓) 땅의 왕이 되시고자 하면, 먼저 송악군에 성을 쌓고 저의 맏아들을 그 성주(城主)로 삼는 것이 가장 좋을 것입니다." 하였다. 궁예가 그 말에 따라 태조에게 발어참성(勃禦?城)을 쌓게 하고, 이어 성주로 삼으니 이때 태조의 나이 20세였다. 그 후에 광주(廣州)ㆍ충주(忠州)ㆍ당성(唐城 경기 남양(南陽))ㆍ청주(靑州)ㆍ괴양(槐壤 충북 괴산(槐山)) 등의 고을을 쳐서 이를 평정하니, 그 공으로 아찬(阿飡)을 임명받았다. 또 수군(水軍)을 거느리고 금성군(錦城郡)을 쳐서 이를 함락시키고 10여 고을을 쳐서 빼앗았으며, 이어서 금성을 나주(羅州)라 고쳤다. 양주(良州 경남 양산(梁山))가 위급함을 고하므로 궁예가 태조더러 가서 구원하게 하였다. 돌아와서 변방을 안정시키고 국경 지역을 개척할 계책을 말하니, 좌우의 신하가 모두 눈여겨 보았으며 궁예도 역시 기이하게 여겨 벼슬을 올려 알찬(閼飡)으로 삼았다. 상주(尙州)의 사화진(沙火鎭)을 쳐서 견훤과 여러 번 싸워 이겼다. 태조는 궁예가 교만하고 포학함을 보고 다시 외방에 장수로 나갈 뜻을 가지게 되었는데, 마침 궁예가 나주의 일을 근심하여 드디어 태조더러 가서 진압하게 하고 벼슬을 올려 한찬 해군대장군(韓飡海軍大將軍)으로 삼았다. 태조가 성심으로 군사를 위무하고 위엄과 은혜를 아울러 베푸니, 적이 두려워하여 굴복하였다. 궁예가 알찬인 종희(宗希)와 김언(金言) 등을 부장으로 삼아 주었다. 전함(戰艦)을 수리하여 광주(光州) 진도군(珍島郡) 고이도성(皐夷島城)을 쳐서 함락시키고 덕진포(德眞浦)로 나아가 머무르자 견훤이 전함을 배열하였는데 목포(木浦)에서 덕진포까지 전함이 서로 앞뒤로 잇닿아, 바다와 육지를 누비며 군사의 세력이 심히 강성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이를 걱정하였으나 태조는, "군사가 이기는 것은 화합(和合)하는 데 달린 것이지, 수가 많은 데 있는 것이 아니다." 하고, 진군하여 급히 치니, 적의 전선이 조금 물러났다. 그러자 바람이 부는 방향을 따라 불을 지르니, 불에 타거나 물에 빠져 죽은 자가 반수 이상이나 되었고 5백여 급(級)을 베었는데, 견훤은 작은 배를 타고 도망쳐 돌아갔다. 이보다 앞서 왕의 군진이 나주 관내의 여러 고을과 거리가 먼데 적병이 길을 차단하였으므로 서로 응원할 수가 없어 자못 근심과 의심을 품고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다 안정되었다. 김언 등이 스스로 공은 많은데 상이 없다고 생각하여 자못 마음이 흐트러지자 태조가 말하기를, "부디 태만하지 말라. 오직 힘을 다하고 딴마음을 가지지 않으면 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주상이 죄없는 사람을 많이 죽이고, 참소하고 아첨하는 무리가 권세를 잡아 조정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제 몸도 보전하지 못하니, 밖에서 정벌에 종사하여 힘을 다해 나라를 위함이 나을 것이다." 하니 여러 장수들이 이 말을 옳게 여겼다. 드디어 반남현(潘南縣 전남 나주군(羅州郡) 반남면(潘南面)) 포구에 이르러 적의 국경에 간첩(間諜)을 놓았다. 이때에 압해현(壓海縣 전남 무안군(務安郡) 압해면(押海面))에 있던 적의 장수 능창(能昌)은 해도(海島) 출신으로 수전을 잘하여 수달이라고 불렸는데, 도망친 자들을 불러 모으고 갈초도(葛草島)의 작은 도적들과 서로 결탁하여 태조가 올 때를 엿보아 해치고자 하였다. 태조가 여러 장수들에게 이르기를, "능창은 이미 내가 올 것을 알고 있으니 반드시 섬의 도적과 함께 변란을 꾀할 것이다. 적의 무리가 비록 적지마는 만약 힘과 세력을 합쳐서 우리의 앞을 막고 뒤를 끊으면 승부를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헤엄을 잘 치는 자 10여 명을 시켜 갑옷을 입고 창을 가지고 가볍고 작은 배를 타고 밤중에 갈초도 나룻가에 가서, 왕래하면서 일을 꾸미는 적을 사로잡아서 그 꾀를 저지시켜야 할 것이다." 하니, 여러 장수들이 모두 이 말을 따랐다. 과연 작은 배 한 척을 잡아보니, 바로 능창이므로 잡아서 궁예에게 보내어 목베었다. 궁예가 태조를 파진찬(波珍飡) 시중(侍中)으로 임명하고 불러들였다. 이에 태조는 지위가 백관 중에 가장 높았으나 감정을 누르고 조심하였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참소당하는 것을 볼 때마다 모두 해명하여 구해 주니, 조신(朝臣)과 장사들이 모두 흡족하여 마음으로 그를 따랐다. 그러자 태조는 자기에게 화가 미칠까 두려워하여 다시 외직(外職)에 나가기를 청하였는데 궁예 역시 말하기를, "수군의 장수가 인망이 가벼워서는 적을 위압할 수 없다." 하고, 태조의 시중 벼슬을 해임하고 다시 수군을 거느리고 나주(羅州)에 주둔하게 하니 후백제와 해상의 도적들이 태조가 다시 왔다는 말을 듣고 모두 두려워 복종하여 감히 난동하지 못하였다. 태조가 돌아와서 배를 이용하는 이점과 변고에 대응하는 알맞은 방법에 대해 고하니, 궁예가 기뻐하여 좌우의 신하에게 말하기를, "나의 여러 장수들 가운데서 이 사람과 겨룰 만한 사람이 누구인가." 하였다. 이때 궁예는 터무니없는 반역죄를 꾸며서 날마다 많은 사람을 죽였다. 어느 날 태조를 급히 불러 성난 눈으로 뚫어지게 보며 말하기를, "경이 어젯밤에 여러 사람을 모아 놓고 반역을 모의한 것은 어째서인가?" 하니, 태조가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어찌 그런 일이 있었겠습니까." 하였다. 궁예가 일찍이 스스로 미륵불(彌勒佛)이라 일컬었었는데, 이에 말하기를, "경은 나를 속이지 말라. 나는 남의 마음을 꿰뚫어보기 때문에 아는 것이다. 내가 지금 선정(禪定)에 들어가서 관찰할 것이다." 하고, 눈을 감고 뒷짐을 지고는 한참 동안 하늘을 우러러보고 있었다. 이때, 장주(掌奏) 최응(崔凝)이 곁에 있다가 일부러 붓을 떨어뜨리고 뜰에 내려와 이를 줍고는 곧이어 빠른 걸음으로 태조의 곁을 지나면서 귓속말로, "자복하지 않으면 위태합니다." 하였다. 그러자 태조가 곧 깨닫고 말하기를, "신이 진실로 반역을 꾀하였으니, 그 죄가 죽어야 마땅합니다." 하니, 궁예가 크게 웃으면서 말하기를, "경은 정직하다고 하겠다." 하면서, 곧 금과 은으로 장식한 말 안장을 태조에게 내려 주었다. 태조가 일찍이 9층 금탑이 바다 가운데 서 있는 것을 보고 그 위에 올라가는 꿈을 꾼 적이 있었다. 이해 3월에 객상(客商) 왕창근(王昌瑾)이 당 나라에서 와 저잣거리의 가게에 있었는데, 문득 저자 안에서 어떤 사람을 만나니, 용모가 웅장하고 수염과 머리터ㄹ은 희며 옛 관을 쓰고 거사(居士)의 옷을 입었으며 왼손에는 바리때를 들고 오른손에는 헌 거울을 쥐고서 창근에게 말하기를, "내 거울을 사겠느냐?" 하므로, 창근이 쌀을 주고 거울을 사서 시장 담벼락에 걸어 놓았다. 거울에 햇빛이 비치자 은은히 가느다란 글자가 드러나 읽을 수 있었는데 그 대략에, "삼수중(三水中) 사유하(四維下) 상제(上帝)가 아들을 진(辰)ㆍ마(馬)에 내려보내어 먼저 계(鷄)를 잡고 뒤에 압(鴨)을 칠 것이다. 사년(巳年) 안에 두 용이 나타나 한 용은 청목(靑木) 속에 몸을 감추고 한 용은 흑금(黑金) 동쪽에 형상을 나타내어, 성함을 보이기도 하고 쇠함을 보이기도 하는데 하나가 성하고 하나가 쇠하면 나쁜 진재(塵滓)를 없앨 것이다." 하였다. 창근이 처음에는 글이 있는 줄을 알지 못하였다가 이를 보고는 예사로운 것이 아니라 여기고 궁예에게 바쳤다. 궁예가 창근에게 명하여 물색(物色)해서 그 사람을 찾게 했으나 찾지 못하였다. 다만 동주(東州) 발삽사(勃颯寺)에 진성(鎭星)의 낡은 상이 있었는데, 그 사람의 모양과 같았으며 왼손과 오른손에 역시 바리때와 거울을 쥐고 있었다. 창근이 기뻐서 자세히 그 모양에 대해 아뢰었더니, 궁예가 감탄하고 기이하게 여겨 문인(文人) 송함홍(宋含弘)ㆍ백탁(白卓)ㆍ허원(許原) 등을 시켜 이를 해석하게 하였다. 함홍 등이 말하기를, "삼수중 사유하 상제가 아들을 진ㆍ마에 내리셨다는 것은 진한(辰韓)ㆍ마한(馬韓)이요, 사년 중에 두 용이 나타나 한 용은 청목 중에 몸을 감추고 한 용은 흑금 동쪽에 형상을 나타낸다 한 것은, 청목은 송(松)이니 송악군(松嶽郡) 사람으로 용(龍) 자 이름을 가진 사람의 자손이 왕이 될 것을 이른 것이다. 왕시중(王侍中)이 왕후(王侯)의 상(相)이 있으니, 이분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흑금은 철(鐵)이니 지금 도읍한 철원(鐵圓 철원(鐵原))을 이름이다. 지금의 임금이 처음 이곳에서 성하였는데 아마 마침내 이곳에서 멸망할 것인가 보다. 먼저 계를 잡고 뒤에 압을 친다는 것은 왕시중이 나라를 다스리게 된 뒤에 먼저 계림(鷄林 신라(新羅))을 얻고 뒤에 압록강까지 수복한다는 뜻일 것이다." 하였다. 세 사람이 서로 말하기를, "왕이 시기하여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니, 만약 사실대로 아뢰면 왕시중이 반드시 해를 입게 될 것이며, 우리들 역시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하고는, 이윽고 거짓으로 꾸며서 고하였다.
○ 6월 을묘일에 기병장(騎兵將) 홍유(洪儒)ㆍ배현경(裵玄慶)ㆍ신숭겸(申崇謙)ㆍ복지겸(卜智謙) 등이 은밀히 모의하고 밤에 태조의 집으로 가서 왕으로 추대할 뜻을 말하려 하였는데, 부인(夫人) 유씨(柳氏)에게는 이 일을 알리지 않으려고 하여 유씨에게 말하기를, "동산에 아마 새 오이가 열렸을 테니 그것을 따 오시오." 하였다. 그러나 유씨가 그 뜻을 알아차리고 북쪽 문으로 나가서 몰래 장막 안으로 들어갔다. 이에 여러 장수들이 아뢰기를, "지금 왕의 정치가 문란하고 형벌이 지나쳐서 아내와 아들을 죽이고 신하들을 베어 죽이며 백성은 도탄(塗炭)에 빠져 왕을 원수처럼 미워하니 걸(桀)ㆍ주(紂)의 악도 이보다 더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어두운 임금을 폐하고 밝은 임금을 세우는 것은 천하의 큰 의리이니, 공은 은(殷) 나라와 주(周) 나라의 일을 행하소서." 하였다. 태조가 정색을 하고 거절하여 이르기를, "나는 충의를 자부하는 터이니, 왕이 비록 포학하더라도 어찌 감히 딴마음을 가질 수 있겠소. 신하로서 임금을 치는 것을 혁명이라 하지마는, 나는 실상 덕이 없는 사람이니 어찌 감히 탕왕(湯王)ㆍ무왕(武王)이 한 일을 본받을 수 있겠소. 훗날 이를 구실로 삼으려 할까 두렵소. 옛사람이 말하기를, '하루 임금이 되면 종신토록 임금이 된다.' 하였으며, 더구나 연릉계자(延陵季子)는, '나라를 차지함은 나의 일이 아니다.' 하고는, 떠나가 밭을 갈았으니, 내가 어찌 계자의 절개보다 낫겠소." 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아뢰기를, "때는 만나기는 어렵고 잃기는 쉬우니, 하늘이 주는 것을 취하지 않으면 도리어 그 재앙을 받을 것입니다. 나쁜 정치의 피해를 입은 나라 안의 백성들이 밤낮으로 보복하기를 생각하고 있는 데다가 권세와 지위가 높은 사람은 모두 죽음을 당하였으니, 지금 공보다 덕망이 높은 사람이 없으므로 여러 사람의 마음이 공에게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공이 만약 이 말에 따르지 않으시면 우리들은 얼마 안 가 죽게 될 것입니다. 하물며 왕창근의 거울에 쓰인 글이 그러한데, 어찌 하늘의 계시를 어겨서 독부(獨夫) 의 손에 죽겠습니까." 하였다. 그러자 유씨가 나와서 태조에게 아뢰기를, "의로운 군사를 일으켜 포학한 임금을 대체함은 예로부터의 일입니다. 지금 여러 장수들의 의논을 들으니 저도 오히려 분기가 일어나는데, 하물며 대장부이겠습니까." 하고, 손수 갑옷을 가져다 태조에게 입혔다. 여러 장수들이 태조를 부축하고 나와, 동이 트자 곡식더미 위에 태조를 앉히고서 군신(君臣)의 예를 행하고 사람을 시켜 말을 달리며 소리치게 하기를, "왕공(王公)이 이미 의기(義旗)를 들었다." 하니, 바삐 달려와 이르는 백성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으며, 먼저 궁문에 이르러 북을 치고 떠들며 기다리는 자 역시 만여 명이나 되었다. 궁예가 이 소식을 듣고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미복(微服)으로 북문을 빠져 나가서 바위 골짜기로 도망하였다가 조금 후에 부양(斧壤 평강(平康)) 백성에게 살해되었다.
2. 정사일에 조(詔)하기를, "태봉주(泰封主)는 사군(四郡)이 흙무너지듯이 붕괴할 때에 도적들을 제거하고 영역을 점차로 개척하였으나, 국내를 통일하기도 전에 다만 혹독하고 포학하게 백성을 억압하고, 간사함을 지극한 도리로 삼았으며, 위협과 모욕을 요긴한 술책으로 삼아 부역이 번거롭고 납세가 과중하여 인구는 줄고 국토는 황폐해졌는데, 궁실이 제도를 지나치고 노역(勞役)이 끊이지 않자, 원망과 비난이 마침내 일어났다. 이에 참람히 존호(尊號)를 일컬으며 아내를 죽이고 아들을 죽였으니, 하늘과 땅이 용납하지 않고 신과 사람이 함께 원망하여 왕업을 실추시켰으니 경계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짐이 추대에 응하여 외람되이 높은 자리에 올랐으니, 망한 왕의 전철(前轍)을 경계로 삼고 벌가(伐柯)의 법칙을 취하여 백성들과 함께 새로 출발하여 풍속을 고치고 임금과 신하는 고기가 물을 얻은 듯한 즐거움을 같이하여 나라 안이 태평의 경사로 화합하게 할 것이니, 조정 안팎의 모든 사람들은 모두 짐의 뜻을 잘 알지어다." 하니, 뭇 신하들이 배사(拜謝)하며 아뢰기를, "신들은 태봉의 세상을 만나, 어질고 착한 신하가 해를 입고 죄없는 백성들은 학대를 받아 늙은이나 어린이나 할 것 없이 울부짖으며 원한을 품지 않는 이가 없었는데, 이제 다행히 성스럽고 밝으신 주상을 만나 목숨을 보전하게 되었으니, 감히 힘을 다하여 보답하기를 도모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3. 왕이 청주(靑州 충북 청주(淸州)) 사람 한찬(韓飡) 총일(聰逸)에게 이르기를, "태봉주가 청주 고을이 토지가 비옥하고 사람 중에 호걸이 많으므로, 변란을 일으킬까 두려워 그들을 모두 죽이려 한다. 그리하여 윤전(尹全)ㆍ애견(愛堅) 등 80여 명의 군인이 모두 죄가 없는데도 칼을 씌워 끌려 가고 있는 도중이니, 경은 빨리 가서 그들을 전리(田里)에 놓아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4. 기졸(騎卒) 태평(泰評)을 순군낭중(徇軍郞中)으로 삼았다. 평(評)은 서책을 많이 보아 행정에 밝았으므로 일찍이 염주(鹽州)의 적장인 유긍순(柳矜順)의 기실(記室)이 되었었는데, 궁예가 긍순을 쳐부수자 평이 항복하였다. 그러나 궁예는 그가 오래도록 항복하지 않은 데에 화가 나 군졸로 편입시켰으므로 드디어 태조에게 속했는데, 건국할 때에 참가하여 공이 있었던 것이다.
5. 마군장군(馬軍將軍) 환선길(桓宣吉)이 죽음을 당하였다. 일찍이 선길은 그 아우 향식(香寔)과 함께 왕을 추대한 공이 있으므로, 왕이 심복으로 위임하여 늘 날래고 용맹스러운 군사를 거느리고 왕궁을 숙위(宿衛)하게 하였었다. 그런데 그의 아내가 말하기를, "당신의 재주와 능력이 남보다 훨씬 나으므로 사졸들이 복종하고 있으며, 또 큰 공이 있는데도 정권은 다른 사람에게 있으니 부끄럽지 않습니까." 하니, 선길이 마음속으로 그 말을 옳게 여겨, 드디어 병사들과 몰래 결탁하고 틈을 엿보아 변란을 일으키려 하였다. 복지겸(卜智謙)이 이를 알고 은밀히 왕에게 고하였으나, 왕은 그 형적이 드러나지 않았다 하면서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느 날 왕이 전상(殿上)에 앉아서 학사(學士) 두서너 사람과 국정을 의논하고 있는데, 선길이 그 무리 50여 명과 함께 병기를 가지고 내정(內庭)으로 갑자기 뛰어 들어와서 바로 왕을 범하려 하였다. 그러자 왕이 지팡이를 짚고 서서 성난 목소리로 꾸짖기를, "짐이 비록 너희들의 힘으로 임금이 되었지마는 어찌 천명(天命)이 아니었겠는가. 천명이 이미 정해졌는데 네가 감히 이럴 수 있느냐." 하였다. 선길이 왕의 말과 얼굴빛이 평상시와 같이 침착함을 보고 복병(伏兵)이 있는가 의심하여 무리들과 함께 달아났는데, 숙위하던 군사가 쫓아가서 그를 죽였다. 향식은 뒤에 오다가 일이 실패한 것을 알고 역시 도망했으나, 추격하던 군사가 그를 죽였다.
6. 조(詔)하기를, "관직을 설치하고 직무를 나누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데 먼저 할 일이요, 풍속을 변화시키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데는 어진 사람을 쓰는 일이 시급한 것이니, 진실로 관직에 소홀함이 없으면 어찌 정사가 황폐해지는 일이 있겠는가. 따라서 짐이 자나깨나 걱정하는 것은 오직 사람을 밝게 알아보지 못하여 관직을 살핌에 실수가 많을까 하는 문제일 뿐이다. 조정 안팎의 여러 관료들이 각기 그 직무에 충실하면, 당시에는 다스림을 이룩하고 훗날에는 훌륭하였다고 칭송을 받게 될 것이다. 제후(諸侯)들을 등용하고 여러 공경(公卿)을 두루 시험함에 인재를 정하게 뽑도록 힘써서 모두 여러 사람이 화합하게 하여야 할 것이니, 조정에서 외방(外方)까지 모두 짐의 뜻을 알지어다." 하였다. 드디어 김행도(金行濤)를 광평시중(廣評侍中)으로, 금강(黔剛)을 내봉령(內奉令)으로, 임명필(林明弼)을 순군부령(徇軍部令)으로, 임희(林曦)를 병부령(兵部令)으로, 진원(陳原)을 창부령(倉部令)으로, 염장(閻?)을 의형대령(義刑臺令)으로, 귀평(歸評)을 도항사령(都航司令)으로, 손형(孫逈)을 물장성령(物藏省令)으로, 진경(秦勁)을 내천부령(內泉部令)으로, 진정(秦靖)을 진각성령(珍閣省令)으로 삼았는데, 이 사람들은 모두 타고난 성품이 단정하고 일을 처리함이 공평하고 성실하여 창업한 시초부터 왕을 추대하는 데 공로가 있던 사람들이다. 임적여(林積璵)를 광평시랑(廣評侍郞)으로, 능준(能駿)과 권식(權寔)을 함께 내봉경(內奉卿)으로, 김인(金?)과 영준(英俊)을 함께 병부경(兵部卿)으로, 최문(崔汶)과 견술(堅術)을 함께 창부경(倉部卿)으로, 박인원(朴仁遠)과 김언규(金言規)를 함께 백서성경(白書省卿)으로, 임상란(林湘煖)을 도항사경(都航司卿)으로, 요인휘(姚仁暉)와 향남(香南)을 함께 물장경(物藏卿)으로, 능혜(能惠)와 희필(曦弼)을 함께 내군경(內軍卿)으로 삼았는데, 이 사람들은 모두 일찍부터 사무에 통달하고 공직에 종사함에 태만함이 없으며, 처결하는 데 민첩하여 진실로 여러 사람의 뜻에 흡족한 사람들이었다. 강윤형(康允珩)을 내봉감(內奉監)으로, 신일(申一)과 임식(林寔)을 함께 광평낭중(廣評郞中)으로, 국현(國鉉)을 원외랑(員外郞)으로, 예언(倪言)을 내봉이결(內奉理決)로, 곡긍회(曲矜會)를 평찰(評察)로, 유길권(劉吉權)을 순군낭중(徇軍郞中)으로 삼았으며, 그 밖의 사성(司省)에는 각기 낭사(郞史)를 두었으니, 대개 건국한 초기에 어진 인재를 잘 골라 뽑아서 모든 정무를 성취하려고 함이었다.
7. 박질영(朴質榮)을 시중으로 삼았다.
8. 소판(蘇判) 종간(宗?)과 내군장군(內軍將軍) 은부(??)가 죽음을 당하였다. 간(?)과 부(?)는 모두 간사함과 아첨으로 궁예의 사랑을 얻어 어질고 착한 이들을 참소하여 해쳤으므로, 왕이 즉위하자 맨 먼저 이들을 목베었다.
9. 은사(隱士) 박유(朴儒)가 와서 왕을 뵙자, 왕이 예를 갖추어 그를 접대하고 이르기를, "다스림을 이룩하는 도리는 오직 어진 사람을 구하는 데 달려 있는데, 이제 경이 왔으니 부암(傅巖)과 위빈(渭濱)의 선비를 얻은 것과 같다." 하고, 관대(冠帶)를 내려 주고, 그에게 명하여 기무(機務)를 맡게 하였으며, 왕씨(王氏)의 성을 내려 주었다. 유(儒)는 성품이 질박하고 정직하며 경서(經書)와 사서(史書)에 통달하였다. 일찍이 궁예에게 벼슬하여 원외(員外)가 되었다가 벼슬이 옮겨져서 동궁기실(東宮記室)에 이르렀었는데 궁예의 정치가 문란함을 보고 드디어 집에서 나와 산골짜기에 숨었다가 왕이 즉위했다는 말을 듣고 그제야 온 것이다.
10. 조하기를, "나라를 다스림에는 절약하고 검소하도록 힘써야 하니, 백성이 넉넉하고 창고가 차 있으면 비록 물난리나 가뭄ㆍ굶주림 등의 재앙을 당하더라도 근심이 없을 것이다. 내장(內莊) 및 동궁(東宮)의 식읍(食邑)에 쌓여 있는 곡식이 썩어 손실되기까지 한 것이 많으니, 내봉낭중(內奉郞中) 능범(能梵)을 심곡사(審穀使)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11. 비로소 관제(官制)를 정하고 조하기를, "짐이 듣건대, 알맞은 때를 타서 제도를 고칠 때는 그릇된 것을 바로잡는 데 상세히 하여야 하며, 풍속을 인도하고 백성을 가르칠 때는 호령을 반드시 신중히 해야 한다고 하였다. 태봉주가 신라의 품계와 관직ㆍ고을의 이름이 모두 비루하고 저속하다고 하여, 새 제도로 고쳐서 이를 시행한 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도 백성들이 익혀 알지 못하여서 미혹하고 어지럽게 되었으니, 이제 모두 신라의 제도를 따르되 그 명의(名義)가 알기 쉬운 것은 새 제도를 따르도록 하라." 하였다.
12. 일길찬(一吉飡) 능윤(能允)이 상서로운 지초(芝草) 한 포기를 바쳤다. 자기 집의 동산에서 얻었는데 아홉 줄기에 세 개의 이삭이 패었다. 왕이 내창(內倉)의 곡식을 내려 주었다.
13. 마군대장군(馬軍大將軍) 이흔암(伊昕巖)을 저자에 내어 죽였다. 흔암은 무인(武人)으로 이익을 취하는 데 조급하였고 궁예를 섬겨 은밀한 일을 탐지해 바치는 것으로 신임을 받았었다. 궁예의 말년에 이르러 웅주(熊州)를 습격해 빼앗았으므로 그대로 그 곳을 지키게 하였었는데 왕이 즉위한 소식을 듣고 몰래 해치려는 마음을 품고서, 부르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떠나오니 사졸들이 많이 도망해버렸으므로 웅주가 다시 후백제의 소유가 되었다. 수의형대령(守義刑臺令) 염장(閻?)이 흔암과 서로 이웃에 있었으므로 그 음모를 알고 왕에게 자세히 아뢰니, 왕이 이르기를, "흔암이 지키던 땅을 버리고 제 마음대로 와서 변경의 땅을 잃었으니, 그 죄는 실로 용서하기 어렵다. 그러나 나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 주군을 섬겨 그전부터 정분이 있었으니 차마 죽일 수는 없는 데다가 그 반역한 형적이 드러나지 않았으니, 저도 반드시 변명할 말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염장이 은밀히 사람을 시켜 흔함을 살펴보도록 청하였으므로, 왕이 나인(內人)을 염장의 집으로 보내어 장막 안에서 흔암의 집을 엿보게 하였는데, 흔암의 아내 환씨(桓氏)가 뒷간에 갔다가 그 곳에 사람이 없는 줄로 알고 오줌을 누고 나서 탄식하며 말하기를, "내 남편의 일이 만약 제대로 되지 않으면 나도 화를 당할 텐데." 하고는 말을 마치자 들어가 버렸다. 나인이 사실대로 아뢰자, 드디어 흔암을 옥에 내려 가두니 모두 자백하였다. 백관(百官)에게 그 죄를 의논하게 하니, 모두 아뢰기를, "마땅히 목베어야 될 것입니다." 하였다. 왕이 친히 흔암을 꾸짖어 이르기를, "네가 평소부터 흉한 마음을 먹고 있다가 스스로 죽을 죄에 빠졌구나. 법이란 것은 천하의 공정한 것이니, 사사로운 정 때문에 법을 어지럽힐 수는 없다." 하니, 흔암은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저자에서 목베게 하고 가산을 적몰(籍沒)하였으나 그 도당들에게는 죄를 캐묻지 않았다.
14. 가을 7월에 조하기를, "태봉주가 백성을 괴롭혀 제 욕심을 채워서 오직 거둬들이기만 하고 예전 제도를 따르지 않아 토지 1경(頃)에 조세(租稅)를 6석이나 받으며, 역(驛)에 소속된 호(戶)에 실[絲]을 3속(束)이나 부과하여 드디어 백성이 농사를 걷어치우고 길쌈을 그만두고서 떠돌아다니고 도망하게끔 하는 일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니 앞으로는 조세의 부과는 마땅히 천하에 공통된 법을 써서 상례(常例)로 삼으라." 하였다.
15. 광평시랑(廣評侍郞) 순필(荀弼)이 병으로 면직되고 병부경(兵部卿) 열평(列評)이 이를 대신하였다.
16. 청주(靑州)의 영군장군(領軍將軍) 견금(堅金)과 부장(副將) 연익(連翌)ㆍ흥현(興鉉)이 와서 뵙자, 각기 말 한 필씩을 내려 주고 능백[綾帛]을 차등 있게 주었다. 이전에 왕이, 청주 사람은 속임수를 쓰는 이가 많으니 일찍 대비하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이라 하여, 그 고을 사람인 능달(能達)ㆍ문식(文植)ㆍ명길(明吉) 등을 보내어 가서 탐지하게 하였다. 능달이 돌아와서 아뢰기를, "다른 마음은 없었습니다." 하였는데, 문식과 명길은 그 고을 사람인 김근겸(金勤謙)과 관준(寬駿)에게 은밀히 말하기를, "능달은 비록 다른 마음이 없다고 아뢰었지마는, 새 곡식이 익으면 변란이 있을까 염려된다." 하였었다. 이때에 와서 견금 등이 말하기를, "본 고을 사람이 서울에 있는 근겸(勤謙)ㆍ관준ㆍ김언규(金言規) 등과 마음이 다르니, 이 두서너 사람만 제거하면 근심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자 왕이 이르기를, "내 마음은 죽이는 것을 그치는 데 있으니 죄가 있는 사람도 오히려 나는 이를 용서하고 싶다. 하물며, 저들 두서너 사람은 모두 힘을 써서 의거를 도운 공이 있으니, 한 고을을 얻자고 충성스럽고 어진 사람을 죽이는 일은 내 하지 않을 것이다." 하니, 견금 등이 부끄럽고 두려워서 물러나갔다. 근겸과 언규 등이 이 말을 듣고 아뢰기를, "일전에 능달이 다시 '청주 사람이 다른 마음이 없다.'고 아뢰었으나, 신들은 진실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견금 등이 말하는 것을 보니, 그들이 다른 마음이 없다고 보장할 수 없습니다. 그러하니 그들을 머물러 두어 그 동태를 보소서." 하니 왕이 그 말을 따랐다. 얼마 후에 견금 등에게 이르기를, "지금 네가 말한 것을 비록 따르진 않지마는, 너의 충성을 깊이 가상하게 여기니 일찍 돌아가서 사람들의 마음을 안정시키라." 하였다. 견금 등이 아뢰기를, "신들이 외람되게 이해(利害)를 진술한 것이 도리어 무고와 참소 같았는데도 죄를 주지 않으시니 이보다 큰 은혜가 없습니다. 고향에 돌아간 뒤에는 성심으로 나라를 돕기로 맹세하겠습니다. 그러나 한 고을의 사람도 사람마다 각기 제 마음이 있으니, 만약 난을 일으키는 자가 있으면 제어하기 어려울까 염려됩니다. 그러하니 관군을 보내어 성원하여 주소서." 하였다. 왕이 그 말을 옳게 여겨 마군장군(馬軍將軍) 홍유(洪儒)ㆍ유금필(庾黔弼) 등을 보내어 군사 1천 5백 명을 거느리고 진주(鎭州 충북 진천(鎭川))에 주둔하여 대비하게 하였다. 이 후에 도안군(道安郡 충북 괴산군(槐山郡) 도안면(道安面))에서 아뢰기를, "청주(靑州)에서 은밀히 후백제와 서로 화호(和好)를 통하며 반역하려 합니다." 하므로, 왕이 마군장군 능식(能植)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진무(鎭撫)하게 하니, 이로 말미암아 반역하지 못하였다.
17. 직예(職預)를 광평시랑(廣評侍郞)으로 삼았다.
18. 8월에 왕이 뭇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짐은 여러 도의 도적들이 짐이 처음 즉위함을 듣고 혹시 틈을 타서 변방의 근심이 될까 염려하여 사자를 보내어 폐백을 후하게 하고 언사(言辭)를 낮추어 화호의 뜻을 보였더니, 과연 귀부하는 자가 많았으나 후백제 견훤만은 교빙하지 않는다." 하였다.
19. 삭방(朔方) 골암성(?巖城)의 장수 윤선(尹瑄)이 항복하였다. 선(瑄)은 침착하고 용맹이 있으며 병법을 잘 알았다. 궁예의 말년에 화를 피하여 북쪽 변방으로 달아나 무리 2천여 명을 거느리고 골암성에 있으면서 흑수(黑水) 오랑캐를 불러들여 변방 고을들을 침해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왕이 사자를 보내어 초유(招諭)하는 말을 듣고 드디어 항복하였으므로 북쪽 변방이 편안해졌다.
20. 조하기를, "태봉주가 참서(讖書)를 믿어 송악(松嶽)을 버리고 부양(斧壤)으로 돌아와 거처하며 궁실을 지으니, 백성이 토목공사에 피곤하고 삼시(三時 봄ㆍ여름ㆍ가을)에 농사 시기를 놓쳤으며, 더구나 기근이 거듭 이르고 뒤이어 전염병이 일어나서 부부가 헤어지고 길에서 굶어 죽는 자가 끊이지 않으며, 세포(細布) 1필 값이 쌀 5승(升)과 맞먹게 되었다. 평민들이 몸을 팔고 자식을 팔아 남의 종이 되게까지 하였으니, 짐이 매우 민망히 여긴다. 그 지방의 해당 관원을 시켜 실정을 자세하게 기록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니, 이에 1천여 명을 찾아내어 내고(內庫)의 포백(布帛)으로 몸값을 갚아 주고 돌려 보냈다.
21. 조하기를, "주(周) 나라 무왕(武王)은 은(殷) 나라 주(紂)를 내쫓고 곡식과 재물을 흩어 백성을 구제했으며, 한(漢) 나라 고조(高祖)는 항우(項羽)를 멸망시키고 산택에 은신한 백성을 각기 전리(田里)로 돌아가게 하였다. 짐은 덕이 적은 사람으로서 왕업을 창건한 것을 깊이 부끄럽게 여긴다. 비록 하늘이 도와주는 위엄에 힘입었으나 역시 백성이 추대하는 힘에 의뢰하였으니, 백성들이 편안히 살면서 집집마다 모두 착한 사람이 되게 하려 한다. 그러나 무너진 국운을 잇고 있는 마당에, 만일 조세를 면제해 주고 농사와 길쌈을 권장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하게 할 수 있겠는가. 백성에게 3년 동안의 조세와 부역을 면제하고 사방으로 떠돌아 다니는 자는 전리로 돌아가게 하며, 곧 크게 사면령을 내려 함께 휴식하게 하라." 하였다.
22. 조하기를, "개국(開國)을 도와 기이한 계략을 운용(運用)하고 세상을 뒤덮는 높은 공을 세운 신하에게 모토(茅土)를 나누어 주고 높은 관작으로 포상하는 것은 여러 대에 걸친 떳떳한 법이요, 영원토록 전해오는 큰 규범이다. 짐은 미천(微賤)한 출신으로 재주와 식견이 용렬하나, 진실로 뭇 사람의 신망에 힘입어 왕위에 올랐으니, 포학한 임금을 폐하던 때에 나에게 충신의 절개를 다한 사람에게는 마땅히 포상을 시행하여 훈공을 권장해야 할 것이다. 홍유(洪儒)ㆍ배현경(裵玄慶)ㆍ신숭겸(申崇謙)ㆍ복지겸(卜智謙)을 제1등으로, 견권(堅權)ㆍ능식(能寔)ㆍ권신(權愼)ㆍ염상(廉湘)ㆍ김낙(金樂)ㆍ연주(連珠)ㆍ마난(麻煖)을 제2등으로 삼아 각기 금은 그릇과 비단 요이불과 능라ㆍ포백을 차등 있게 주고, 제3등인 2천여 명에게도 능라ㆍ포백과 곡식을 차등 있게 주라. 짐이 공들과 함께 생민을 구제하고자 하여 마침내 신하의 절의를 지키지 못하고 이것을 공으로 삼게 되었으니 어찌 부끄러운 덕이 없겠는가. 그러나 공이 있는데 포상하지 않으면 장차 공을 권장할 수 없게 되므로 오늘 포상을 하니, 공들은 짐의 뜻을 밝게 알지어다." 하였다.
23. 견훤이 일길찬(一吉飡) 민합(閔?)을 보내어 왕의 즉위를 축하하였으므로, 왕이 대중전(大中殿)에 나아가서 축하를 받고 후한 예로 그를 대접하여 보냈다.
24. 병부경(兵部卿) 훤식(萱寔)을 내봉경(內奉卿)으로 삼았다.
25. 웅주(熊州 충남 공주(公州))ㆍ운주(運州 충남 홍성(洪城)) 등 10여 주ㆍ현이 배반하여 후백제에 붙었으므로, 전 시중(侍中) 김행도(金行濤)를 동남도 초토사 지아주제군사(東南道招討使知牙州諸軍事)로 삼아 대비하도록 명하였다.
26.유문율(柳問律)을 광평낭중(廣評郞中)으로 삼았다.
27.9월에 마군장군(馬軍將軍) 복지겸이 아뢰기를, "순군리(徇軍吏) 임춘길(林春吉)이 그 고을 청주(靑州) 사람 배총규(裵悤規)와 계천(季川 전남 장흥(長興)) 사람 강길(康吉)ㆍ아차귀(阿次貴)와 매곡(昧谷 충북 회인(懷仁) 사람 경종(景琮)과 함께 반역을 모의하였습니다." 하였다. 왕이 사람을 시켜 잡아서 신문하니 모두 자백하므로 명하여 그들을 목베게 하였으나 총규(悤規)는 도망하여 죽음을 면하였다.
28. 청주(靑州) 사람 현율(玄律)을 순군낭중(徇軍郞中)으로 삼으니 마군장군(馬軍將軍) 현경(玄慶)ㆍ숭겸(崇謙) 등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임춘길이 순군리가 되어 반역을 꾀하다가 일이 누설되어 죽음을 당하였으니, 이것은 곧 병권을 맡고 청주를 후원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또 현율을 순군낭중으로 삼으니 신들은 의아하게 여깁니다." 하니, 왕이 "옳다." 하고 곧 현율을 병부낭중(兵部郞中)으로 고쳐 임명하였다.
29. 전 시중 구진(具鎭)을 나주도 대행대시중(羅州道大行臺侍中)으로 삼았는데, 구진은 태봉(泰封) 때 오랫동안 힘들었다고 하면서 가려고 하지 않았다. 왕이 불쾌하게 여겨 유권열(劉權說)에게 이르기를, "예전에 나는 험난한 일을 두루 겪었지만 한번도 힘들었다고 말한 적이 없는 것은 진실로 왕의 위엄을 두려워함이었다. 그런데 지금 구진이 굳이 사피하고 가지 않으니 옳다고 하겠는가." 하였다. 권열이 대답하기를, "상을 주어 선을 권장하고, 벌을 내려 악을 징계하는 것이니, 마땅히 엄한 형벌을 내려 여러 신하들을 경계시키소서." 하니, 왕이 그 말을 옳게 여겼다. 구진이 두려워하여 사죄하고 드디어 떠나갔다.
30.상주(尙州)의 장수 아자개(阿字盖)가 사자를 보내와 항복하자, 왕이 명하여 의식(儀式)을 갖추어 맞이하게 하였다. 구정(毬庭)에서 의식을 연습할 적에 문무관(文武官)이 모두 반열(班列)에 나아갔는데, 광평낭중(廣評郞中) 유문율(柳問律)이 직성관(直省官) 주선길(朱瑄?)과 위차를 다투었다. 왕이 듣고 이르기를, "사양은 예의 으뜸이요, 공경은 곧 덕의 근본이다. 지금 예를 갖추어 손님을 맞이하여 그 완성을 보려 하는데, 문율과 선길이 위차를 다투니 어찌 공경하고 신중히 하는 것이겠는가. 마땅히 둘 다 변방으로 귀양보내어서 그 죄를 드러내라." 하였다.
31. 왕이 뭇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옛 도읍인 평양이 황폐한 지 이미 오래되어 가시나무가 우거지고 번인(蕃人)들이 그 사이에서 사냥하고 침략하니 마땅히 백성을 평양에 옮겨 살게 하여서 번병(藩屛)을 튼튼하게 하도록 하라." 하였다. 드디어 황주(黃州 황해 황주)ㆍ봉주(鳳州 황해 봉산(鳳山))ㆍ해주(海州)ㆍ백주(白州 황해 배천(白川))ㆍ염주(鹽州 황해 연안(延安)) 여러 고을의 인호(人戶)를 나누어 평양에 살게 하여 대도호(大都護)로 만들고, 당제(堂弟) 식렴(式廉)과 광평시랑 열평(列評)을 보내어 지키게 하고, 참좌(參佐) 4, 5명을 두게 하였다.
32. 진각성경(珍閣省卿) 유척량(柳陟良)을 광평시랑으로 삼았다. 혁명할 즈음에 갑자기 일어난 일로 여러 관료들이 모두 흩어져 달아났으나, 척량만은 그 직책을 조심스럽게 지켜서, 맡아보던 창고에서는 잃은 것이 없었으므로 특별히 광평시랑으로 임명하였다.
33. 겨울 10월에 능률(能律)을 광평시랑으로, 직예(職預)를 내시서기(內侍書記)로 삼았다.
34.청주(靑州)의 장수 파진찬(波珍飡) 진선(陳瑄)이 그의 아우 선장(宣長)과 함께 반역을 꾀하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35. 11월에 팔관회(八關會)를 베풀었다. 유사가 아뢰기를, "전대의 임금이 해마다 중동(仲冬)에 팔관재(八關齋)를 크게 베풀어서 복을 빌었으니 그 제도를 따르소서." 하니, 왕이 이르기를, "짐이 덕이 없는 사람으로 왕업을 지키게 되었으니 어찌 불교에 의지하여 국가를 편안하게 하지 않으리오." 하고, 드디어 구정(毬庭)의 한 곳에 윤등(輪燈)을 설치하고 향등(香燈)을 곁에 벌여 놓고 밤이 새도록 땅에 가득히 불빛을 비추어 놓았다. 또 가설 무대를 두 곳에 설치하였는데 각각 높이가 5장 남짓하고 모양은 연대(蓮臺)와 같아서 바라보면 아른아른 하였다. 갖가지 유희(遊?)와 노래ㆍ춤을 그 앞에서 벌였는데 사선악부(四仙樂部)의 용(龍)ㆍ봉(鳳)ㆍ상(象)ㆍ마(馬)ㆍ차(車)ㆍ선(船)은 모두 신라의 고사였다. 백관이 도포를 입고 홀(笏)을 들고 예를 행하였으며, 구경하는 사람이 서울을 뒤덮어 밤낮으로 즐기었다. 왕이 위봉루(威鳳樓)에 나가서 이를 관람하고 그 명칭을 '부처를 공양하고 귀신을 즐겁게 하는 모임[供佛樂神之會]'이라 하였는데, 이 뒤로부터 해마다 상례(常例)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