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헤롯대왕의 죽음부터 아그립바1세까지(B.C.4-A.D.41)
a. 왕위의 계승.
-- 헤롯이 유다와 마티아스를 죽인 행동은 반란의 빌미가 되었다. 로마에 의하여 헤롯의 후계자로 지명받은 아르켈라우스는 군대를 보내 진압을 시도했는데 실패하고 재차 새로운 군대를 보내어 유혈진압에 성공했다.
아르켈라우스가 왕위를 인준받기 위하여 로마로 떠났을 때 또 다시 소요가 일어났으나 시리아의 통치자 바루스에게 진압당했다. 그러나 반란의 시도는 계속되었고 규모도 점점 커져 갔다. 나중에는 헤롯의 군사들까지도 반란에 가담할 정도가 되었다. 유대밖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는데, 갈릴리에서는 에제키아스의 아들 유다에 의하여 일어났고, 베뢰아에서는 옛날 노예였던 시몬의 지휘하에 일어났다.
마침내 바루스는 나바테아의 왕 아레타스4세(B.C.9년-A.D.40년)가 보낸 원군을 포함한 병력을 동원하여 반란군을 진압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반란진압과정에서 이천명을 십자가형으로 처형했다.
--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이런 소동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 헤롯왕가의 대다수는 헤롯의 유언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로마에 모여 있었다. 헤롯의 세 아들이 참여.
a) 아르켈라우스: 헤롯이 지명한 왕위계승자
b) 안티파스: 갈릴리와 베뢰아
c) 빌립
-- 두 명의 사절단이 로마에 도착.
a) 한 유대인은 헤롯왕가 가운데 누구도 왕위를 계승해 주는 데 반대, 대제사장에게 정부를 맡겨줄 것을 요청.
b) 가다라, 히푸스, 가자의 헬라도시에서 온 사람은 이 도시들을 로마에 합병시켜 줄 것을 요구.
-- 로마황제 아우구스투스 헤롯의 유언장에 따라서 이렇게 조치했다.
a) 헬라 이름이 붙여진 세도시들은 시리아로 합병.
b) 아르켈라우스는 유대, 사마리아, 이두매를 차지.
c) 헤롯 안티파스는 갈릴리와 베뢰아를 차지
d) 빌립은 아우라니타스, 트라고니타스, 이두레아를 차지.
e) 이들 중 누구도 왕으로 부르는 것을 금지시키고 아르켈라우스는 분봉왕, 나머지 두사람은 사분봉왕(tetrarch)이 됨.
b. 유대와 사마리아 통치.
아르켈라우스가 이들 중 그 잔인함에 있어서 아버지 헤롯을 가장 많이 닮음. 그러나 B.C.4-A.D.6년까지 통치. 아우구스투스는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온 사절단의 불만을 받아들여 아르켈라우스는 폐위시키고 Gaul 지방으로 유배. 아르켈라우스의 영토는 로마에 귀속되고 총독이 직접 통치.
B.C.6-7년 로마총독 퀴리나리우스에 의하여 인구조사가 실시됨. 인구조사에 반발한주민들이 반란을 일으킴. 대제사장 요아잘이 인구조사를 받아 들이도록 설득했으나 실패하고 갈릴리 출신 유다의 지휘 하에 반란이 계속됨. 로마는 무력으로 반란을 진압했고, 유다는 살해됨.
본디오 빌라도(주후26-36)는 예루살렘에 황제의 초상화가 그려진 방패를 세워 유대교인들의 감정을 건드림. 유대인들은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 티베리우스에게 항의하였고, 티베리우스는 이 방해를 가이사랴에 있는 주둔지로 가져 가도록 빌라도에게 명령.
유대인들은 로마군대의 군복무를 면제받았다. 산헤드린이 국내문제에 있어서 이전보다 더 많은 권한을 행사했다(마5:22). 디아스포라에 종교적인 영향력을 행사함(사울이 산헤드린의 칙서를 받아 들고 다메섹으로 기독교인들을 체포하러 감). 황제에게 울리는 직접세를 책임지고 있었다.
c. 빌립의 영토(B.C.4-A.D.33-34)
-- 아우구스투스에 의하여 팔레스타인의 북쪽과 동쪽을 배당받음. 거의 대부분 비유대인거주지역. 관대하게 통치했고 건축사업에 힘을 쏟음. 파니아라는 옛 도시를 재건하여 가이사랴 빌립보로 부름. 빌립사후에 빌립왕국은 시리아의 속주로 편입되었다가 37년에 아그립바1세의 왕국으로 귀속됨.
d. 헤롯 안티파스의 영토(B.C.4-A.D.39)
-- 갈릴리와 베뢰아를 차지. 건축사업에 몰두하겨 티베리우스황제의 이름을 딴 티베리아시를 건립.
-- 나바테아의 와 아레카스4세의 딸과 결혼. 이 아내를 버리고 형제 빌립의 전처인 헤로디아와 결혼. 이 때문에 나바테아와 싸웠는데, 이 싸움에서 패배. 안티파스는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가 춤추는 것을 보고 미혹되어 헤로디아의 사주를 받은 살로메의 청원을 듣고 세례요한의 목을 벰(마14:3-13). 안티파스를 옹호하던 티베리우스가 죽고 카리큘라가 황제로 등극하자 곧 폐위당하여 골로 유배당했다.
e. 당시의 조세제도.
-- 직접세(산헤드린공의회가 직접 거둠), 사용세(수입세, 수출세, 도로, 항구, 시장사용에 대한 세금, 사람들이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쳐야 하는지 바쳐서는 안되는지를 물었던 세금으로서 시리아와 유대주민들에게 무거운 부담이었다), 토지세(B.C.63년 이래로 납부한 세금), 인두세(가장 많은 반감을 불러 일으킴).
-- 세금의 징수는 징세청부업자들에게 위탁됨. 징세청부업자 밑에는 실제로 세금을 거두는 부하직원들이 있었다. 삭개오는 징세청부업자였고(눅19:1-10), 레위(막2:14)는 세금을 거두는 징세공무원이었다. 후자는 사회적으로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했고, 매우 박한 임금을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부패가 있을 수 있으리라는 것은 불가피한 일.
이들은 가난한 사람들이나 일용 노동자들에 의해서도 자주 경멸의 대상이 되었는데, 그 이유는 이들은 사용세를 면제받고 부자들 곁에 있었고, 공무를 이용하여 작은 돈들을 축재했기 때문. 예수님이 세리의 친구로 불리워졌다는 것은(마11:19) 예수님이 사회적 편견을 거스렸음을 의미한다.
f. 토지제도.
-- 마20:1-15, 막12:1-11에는 대토지 소유자들이 등장한다. A.D.1세기부터 대토지소유자들이 등장. 많은 농부들이 병이나 가뭄, 높은 세금을 감당해내지 못하게 되자 할 수 없이 토지를 매각하고 임차인이나 일용노동자들로 전락했고, 토지를 사들인 지주들은 점점 대토지 소유자가 되어감.
이들은 도시(예루살렘)에 살거나 여행을 하면서 소일했다(눅16:1-8) 대제사장 가문의 많은 친척들과 상인들이 지주들이었다. 이들은 소유물에 대한 감독을 청지기들에게 위임하고, 실제적인 일은 일용노동자들, 노예들, 임차인들에 의하여 행해짐. 토지를 임차한 농부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했고, 수확한 것들 가운데 일부(1/3 또는 1/2)을 소유주에게 바치거나 돈으로 임대료를 바침. 이들은 매우 힘든 생활을 했다.
-- 일용노동자들 중에는 토지를 임차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적어도 일주일에 하루는 지주들을 위하여 노동을 해야 했다.
-- 일용노동자들 중에는 고정적인 노동계약을 맺고 일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들은 자주 실직. 포도원품꾼비유에서 보면 제11시(오후5시)에도 일을 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마20:6이하).
-- 노예들: 빚을 갚을 형편이 안되면 스스로 노예의 길을 찾음. 무자비한 종의 비유(마18:25)에 따르면 채무자는 돈을 상환하지 못할 경우에 빚을 갚은 두가지 방법이 있음을 시사. 첫째는, 채무자와 아내 재산이 모두 한꺼번에 팔리는 것(노예가 되는 길). 둘째는, 빚을 갚을 때까지 감옥에 들어 앉아 있는 것.
-- 시골에 거지가 많았다(거지 나사로, 눅16장).
g. 종교생활
-- 예루살렘 성전은 종교생활의 중심. 성전은 유대 및 주변지역 그리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종교생활의 중심이었다.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은 1년에 한차례 반세겔의 성전세를 바침. 예루살렘 순례에 참여. 세 큰 절기에 참여하기 위하여 수만명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모임.
-- 제사는 아침과 저녁에 드림.
-- 재정과 경제에서도 예루살렘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함. 많은 희생제물이 필요했고, 성전세 및 기증품의 납부가 있었다. 성전이 일종의 은행으로 기능. 그러자 만민의 기도하는 집으로서의 기능이 망각되고 장사하는 집이 되기도 했다(막11:15-17).
-- 회당의 완전한 유대교적 발전은 A.D. 70년 예루살렘 멸망후에 본격적으로 이루어졌지만 이 당시에도 이미 회당이 있었다. 성경읽는 것과 기도하는 것이 회당예배의 핵심.
-- 산헤드린은 헤롯대왕이 통치하던 기간 중에는 거의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다. 그러나 통치권이 로마로 넘어간 뒤에는 상황은 약간 달라졌다. 산헤드린의 주 업무는 율법을 해설하고, 소송사건들을 판결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로마총독의 승인이 없이는 어떤 결정도 내릴 수 없었다. 산헤드린은 고위제사장들, 서기관들과 장로들로 구성. 고위제사장들은 사두개파,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바리새파. 산헤드린에서는 사두개파가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 대제사장은 제사장들의 우두머리. 헤롯대왕 시대 이후에는 정치적 지도자는 아니었지만 산헤드린의 의장은 계속 맡고 있었다. 로마시대에 대제사장은 지역을 관할하는 총독에 의하여 임명됨. 예수님 당시에 가장 잘 알려진 대제사장은 가야바라는 별명을 가진 요셉이었다. (A.D.18-36) / 의식을 집행할 때 24반열로 나누어진 제사장들의 도움을 받음(예컨대 사가랴는 아비야 반열, 눅1:5, 24반열에 대해서는 대상24:10을 참조). 제사장 가문의 회원은 성전제물 일부를 취할 수 있었다. 낮은 계급의 제사장들은 시골에 살았고 수공업에 종사했다. 이들의 주요 임무는 성전에서 희생제사를 드리는 일이었다.
-- 소페림(책의 사람, 서기관). 하나님의 메시지를 연구하고 해석하는 업무를 맡음. A.D. 70년 예루살렘 멸망 후에 두각을 나타냄. 서기관들은 바리새파와는 다른 또 하나의 집단을 형성. 많은 서기관들이 바리새인이었지만, 모두가 바리새인은 아니었다. A.D.70년 이후 이들은 랍비집단을 형성했다.
-- 샴마이학파와 힐렐학파. A.D.70년 이전에는 대등한 위치에서 경쟁하다가 A.D.70년 이후에는 힐렐학파가 우세. 샴마이는 보다 보수적, 힐렐은 진보적. 힐렐은 바빌론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후 성인이 되어 예루살렘으로 왔고, 샴마이는 유대에서 전 생애를 보냈다.
-- 예수님은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모두와 논쟁을 벌이셨다. 예수님은 두 파 모두에게 비판적이셨으나, 바리새파와 더 가까웠다. 사두개파는 소수였으나 정치적으로는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했던 귀족계급. 평민들과는 별로 접촉이 없었다. 예수님의 재판과 관련해서는 바리새인에 대한 언급이 없다. 예수님에 대한 재판에도 바리새인은 관여하지 않았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 대한 재판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으며 예수님에 대하여 좀더 동정적이었다. 사도들이 사두개인 대제사장에 의하여 감옥에 갇혔을 때도 바리새인 가말리엘이 이들을 보호하여 석방시켰다(행5:17-42). 예수님 동생 야고보가 사두개인 대제사장의 명령으로 A.D.62년에 죽임을 당했을 때 바리새인들이 아그립바2세에게 항의하여 면직시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