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 한용운
호가 만해(萬海, 卍海)이신 시인 한용운(韓龍雲, 한유천, 韓裕天)은 본명이 한정옥(韓貞玉)입니다. 본래는 독립운동가였습니다. 1879년 충남 홍성에서 아버지 한응준(韓應俊) 어머니 온양 方씨 사이에 차남으로 태어나 1944년 65세에 사망했습니다. 그가 남긴 유명한 시와 재미있는 글이 많은데... 그중 맘에 와 닿는 시 한수를 소개해 드립니다. 언젠가는 -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언젠가… 말 못할 때가 옵니다. 따스한 말 많이 하세요. 언젠가… 듣지 못할 때가 옵니다. 값진 사연(事緣), 값진 지식(智識) 많이 보시고 많이 들으세요. 언젠가… 웃지 못 할 때가 옵니다. 웃고 또 웃고 활짝 많이 웃으세요. 언젠가… 움직이지 못 할 때가 옵니다. 가고픈 곳 어디든지 가세요. 언젠가… 사람이 그리울 때가 옵니다. 좋은 사람 많이 사귀고 만나세요. 언젠가… 감격(感激)하지 못할 때가 옵니다. 마음을 숨기지 말고 마음껏 표현(表現)하고 사세요. 언젠가… 우리는 끝자락에 서게 될 것입니다. 사는 동안 최선(最善)을 다해 후회(後悔)없는 삶을 살다 가시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그저 물처럼 지혜롭고 쉬지 않고, 냉정(冷情)하게 흐르는 인생으로 늘 웃음 가득한 나날들 되세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 인생은 사람에 따라 차이(差異)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분명(分明)한 것은 오직 하나뿐인 일회적(一回的) 인생(人生)을 살다가 간다는 사실(事實)입니다. 옛 현인(賢人)들은 우리들의 인생(人生)을 첫째: 참되고 진실(眞實)되게 살고 둘째: 아름다운 삶을 영위(營爲)하며 셋째: 보람있는 삶을 추구(追求)하며 살라는 답(答)을 주신 것 같습니다. 인생의 시작(始作)과 끝! 결국 내가 가져온 것도 내가 가져갈 것도 없는 것입니다. 다만 주어진 삶속에서 성실하고 착하게 살아가면서 적당(適當)한 즐거움과 행복(幸福)을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 자신의 참다운 인생(人生)을 사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어김없이 가을이 또 다가왔습니다. 세월(歲月)이 가면 모든 것은 놔두고 빈손으로 왔었던 그 자연(自然)으로 다시 돌아가는 인생입니다. 그것이 바로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인생(人生)입니다. 따라서 지금 이 시간(時間)이 가장 중요(重要)한 시간(時間)임을 잊지 마시고 오늘도 더 멋지고 더 아름답고 더 행복한 인생 여정(旅程)을 만들어 가는 멋진 하루되시기를 소망(所望)합니다. 만해 한용운 시 와서는 가고, 입고는 벗고 잡으면 놓아야 할 윤회의 이 소풍길에! 우린 어이타 깊은 인연이 되었을꼬! 봄날의 영화 꿈 인듯 접고 너도 가고 나도 가야 할 저 빤히 보이는 길 앞에 왜 왔나 싶어도! 그래도... 아니 왔다면 많이 후회 했겠지요? 노다지처럼 널린 사랑 때문에 웃고, 가시처럼 주렁주렁 미움 때문에 울어도 그래도, 그 소풍 아니면 우린 어이 정다운 인연이 맺어졌겠습니까? 한 세상 살다 갈이 소풍길! 원없이 울고 웃다가 개똥 밭에 굴러도 이승이 더 낫 단 말 빈말이 안 되게 말 입니다! 우리 그냥 어우렁 더우렁 그렇게 더불어 즐기며 살 다가 미련없이 소리없이 그냥 훌쩍 떠나 가십 시다요! 모셔온 글 입니다 출처: 님의침묵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일대기 한용운은 1879년 8월 29일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아버지 한응준과 어머니 방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본명은 정옥이었고 아명은 유천입니다. 한용운의 집안은 대대로 벼슬을 한 선비 가문이었고 1884년 6세 때부터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습니다. 공부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중국의 역사책 통감을 비롯 소학 등을 모두 떼어 마을에서는 신동이 났다고 한용운을 칭찬했습니다. 공자의 가르침을 담은 대학을 읽던 한용운은 그 설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였을 정도로 이미 나름대로 경전을 해석할 수 있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던 것이었습니다. 14세 되던 1892년 집안에서 정해준 전정숙과 결혼했고 16세 되던 해인 1894년부터는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과 1895년 을미사변을 거치며 한용운이 살던 충청도 홍주 지역에서도 의병이 일어났고, 싸움 도중 아버지 한응준과 형 한윤령을 잃게 되었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싶던 한용운은 19세에 한성으로 떠났고 그러던 도중 앞날을 위해서는 실력을 기르고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충청북도 보은 속리산에 있는 속리사(현 법주사)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한용운은 강원도 인제의 설악산 백담사에 있는 탁몽성 스님을 만나게 되었고 그곳에서 일을 하며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김연곡 스님이 가져다 준 음빙실문집과 영환지략이라는 책을 읽고 나서 보다 넓은 세상을 직접 보고 배워야겠다는 생각으로 우선 블라디보스토크로 넘어갔습니다. 하선하려는 찰나 사람들이 한용운에게 달려들었습니다. 일본 앞잡이 노릇을 하며 조선 사람들을 괴롭혔던 일진회 사람으로 착각했던 것입니다. 한용운은 이 사건을 겪은 후 같은 동포끼리도 믿지 못하고 목숨마저 노린다는 사실에 안타까워하며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습니다. 1908년, 30세가 되던 한용운은 세계 문물을 더 알고자 일본 도쿄로 갔고 일본 스님의 도움으로 조동종 대학에 들어가서 불교와 서양 철학 등을 공부했습니다. 또한 측량 기기를 사들고 국내로 들어와서 한성에 명진 측량 강습소를 개설하고 우리 민족이 신식 측량 기술에 대해 알고 절이나 개인 소유의 땅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1911년 경상남도 양산에 위치한 통도사에 간 한용운은 팔만대장경을 주제별로 요약한 불교대전을 완성했고 이내 불교계의 주요 인물로 떠올랐습니다. 1913년 한용운은 조선 불교 유신론과 불교대전 국한문 편찬을 하고, 전국을 다니며 젊은 승려들을 일깨우고 있었습니다. 한용운은 민족의 역사와 전통을 지키려 노력했고 천도교, 기독교 인사들과도 만나며 3.1 운동 독립 선언서 작성에도 참여했습니다. 1919년 3월 1일 태화관에서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기념 연설을 하고 독립 만세를 외쳤고 일본 경찰에 붙들려 마포 경찰서로 가게 되었습니다. 한용운은 조선 사람이 조선 민족을 위해 스스로 독립 운동을 하는데 일본 사람이 무슨 재판을 할 수 있냐며 늘 당당했습니다. 징역 3년 동안 간수들에게 모진 고통을 당하면서도 한용운은 한결 같은 모습으로 좌선을 했고 1921년 마침내 서대문 형무소에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1923년 민립대학 설립 운동에 앞장섰고, 1924년 조선 불교 청년회를 조직했습니다. 1925년에는 설악산 오세암으로 들어가 십현담 주해를, 백담사에서 시집 님의 침묵을 완성했습니다. 한용운이 살아온 삶을 온전히 담은 시집이 바로 님의 침묵입니다. 1933년 53세 때 한용운은 유숙원과 두 번째 결혼을 했고 성북동에 생애 첫 집인 심우장(소를 찾는다, 불교에서는 소를 깨달음의 경지라고 뜻함)을 지었습니다. 1935년부터는 조선일보에 소설 흑풍을 연재하기 시작했고 그 뒤에도 신문 연재 소설 후회, 박명 등 작품활동을 이어나갔습니다. 신경통, 각기병, 영양실조 등으로 몸이 약해진 한용운은 청소를 하던 중 갑자기 쓰러졌으나 일어나지 못했고 결국 1944년 6월 29일 중풍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사후 1962년 대한민국 건국 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만해 기념관 출처: 광주여행 홍성 만해 한용운의 생가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1879~1944)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며 스님이자 시인으로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태어났다. 1904년 내설악의 오세암으로 출가하여, 1905년 백담사에서 득도하였다. 본관은 청주, 자는 정옥(貞玉), 속명은 유천(裕天)이며 계명은 봉완(奉玩), 법호는 만해(萬海), 법명은 용운(龍雲)이다. 3.1독립운동을 이끈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와 공약 삼장을 작성하였다.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았으며 1926년 '님의침묵'을 출간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서고 민족혼을 깨우려고 노력하였다. 만해 한용운은 1911년 이회광 일파의 친일매불 책동을 격파하였으며 1913~1914년 조선불교 유신론과 불교대전을 간행하였고 1919년 3.1운동 민족대표(33인), 1922~23년 민립대학 기성회 중앙집행위원 1923년 조선불교청년회 회장, 1927년 신간회 경성지회장, 1930년 만당 당수 1931년 '불교' 속간, 이후 창씨개명과 조선인 학병출정 반대운동 등을 펼쳤다. 1926년 '님의 침묵' 을 발표하여 우리나라 문학사에서 최초의 근대시인과 최고의 시민문인, 저항시인으로 위치하게 되었다. 1930년대 후반기에는 '후회', '철혈미인', '박명' 등의 소설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노년에 일제의 삼엄한 감시와 경제적 고난 속에서 고통스런 시간을 보내면서도 창씨개명 반대와 학병 출전 반대운동을 펼치며 꿋꿋한 지조와 절개를 지키며 살았다. 자유는 만유의 생명이요 평화는 인생의 행복이라. 1919년 3.1독립만세운동 후 옥중에서 집필한 옥중 독립선언서인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 첫머리에서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 하였습니다. (님의 침묵중에서) 1879~1944)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른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 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새끼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짚검불도 가락잎도 머리카락도 헌겊 조각도 막대꼬치도 기왓장도 닭의 깃도 개터럭도 타는 모닥불 재당도 초시도 문장(門長) 늙은이도 더부살이 아이도 새사위도 갓사둔도 나그네도 주인도 할아버지도 손자도 붓장사도 땜쟁이도 큰 개도 강아지도 모두 모닥불을 쪼인다. 모닥불은 어려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 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상하니도 몽둥발이가 된 슬픈 역사가 있다. 백석의 본명은 백기행(白夔行), 필명은 백석(白石)이다. 조선일보 기자, 함흥 영생고보 교사, 문학예술총동맹 외국문학 분과위원 역임 시인, 국문학자) 아가는 밤마다 길을 떠난다. 하늘하늘 밤의 어둠을 흔들면서 수면(睡眠)의 강(江)을 건너 빛 뿌리는 기억(記憶)의 들판을 출렁이는 내일의 바다를 나르다가 깜깜한 절벽(絶壁) 헤어날 수 없는 미로(迷路)에 부딪치곤 까무라쳐 돌아온다. 한 장 검은 표지(表紙)를 열고 들어서면 아비규환(阿鼻叫喚)하는 화약(火藥) 냄새 소용돌이 전쟁(戰爭)은 언제나 거기서 그냥 타고 연자색 안개의 베일 속 파란 공포(恐怖)의 강물은 발길을 끊어 버리고 사랑은 날아가는 파랑새 해후(邂逅)는 언제나 엇갈리는 초조(焦燥) 그리움은 꿈에서도 잡히지 않는다. 꿈길에서 지금 막 돌아와 꿈의 이슬에 촉촉이 젖은 나래를 내 팔 안에서 기진맥진 접는 아가야 오늘은 어느 사나운 골짜기에서 공포의 독수리를 만나 소스라쳐 돌아왔느냐.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 진 그 위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곳 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이육사의 본명은 이원록(李源綠) 또는 이원삼(李源三)으로 원삼은 주로 가정에서만 불렀다고 하며, 개명은 이활(李活), 자는 태경(台卿). 아호 육사(陸史)는 대구형무소 수감번호 "이육사(二六四)"에서 취음한 것이다. 작품 발표 때 '육사'와 '이육사(二六四)' 또는 활(活)을 사용하였다. 아버지는 이황(李滉)의 13대 손인 이가호(李家鎬)이다.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을 알지도 못 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날을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1922~1990, 국문학자) 하늘 위에 구름이 떠가면 잠시 기다리자 새소리가 들리면 잠깐 멈춰서자 그리고 구름 위에 아무 소리 없이 태양이 가는 굉음을 들어보자 나는 나루ㅅ배 당신은 行人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얕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 갑니다. 나는 나루ㅅ배 당신은 行人 |
대구사범동문회 소정 정경자 총무가
카톡으로 보내준 동영상 편집
청산 노승렬
첫댓글 소정 정경자 총무님
만해 한용운 시인의 '언젠가는' 시에 예쁜 그림을 넣고
마르티니 작곡 사랑의 기쁨 배경음악까지 넣으셔서
동영상을 만들어 보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나이 많은 사람들이 들어야 하는 좋은 시를 즐감했습니다.
편집을 하여 카페에 올려서 공유하겠습니다.
플래쉬인지 앱으로
동영상 만드는데 초보자는 하루 종일 걸렸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글, 사진, 동영상 퍼오는 데도 아주 힘이 드는데
만드는 사람의 노고는 말할 필요도 없지요.
즐거운 휴일이 되시기 바랍니다.
靑山 노승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