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黑白顚倒(흑백전도)
黑:검을 흑, 白:흰 백, 顚:꼭대기 전, 倒:넘어질 도.
어의: 흑백이 뒤집혔다.
전국시대 초나라의 시인 굴원의 “흰색이 변하여 검은색이 됨이여!”(變白以爲黑兮. 변백이위흑혜) 라는 시구에서 나온 성어다.
그 후 진(晋)나라 때 부함(傅咸239~294)이라는 사람의 글에도 반백위흑(反白爲黑)이라는 문구가 있는데, 모두 다 시비(是非)가 전도된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전도흑백 또는 혼효흑백(混淆黑白)이라고도 하는데, 전도시비(顚倒是非. 옳고 그름이 뒤집혔음)과 같은 뜻이다.
(임성욱 엮음 고사성어 대사전에서)
黑白混淆(흑백혼효)
黑:검을 흑, 白:흰 백, 混:섞을 혼, 淆:뒤섞일 효.
어의: 검은 것과 흰 것이 어지럽게 섞였다는 뜻으로, 시비나 선악, 사정(邪正) 등을 비유한다.
후한(後漢) 안제(安帝) 때의 유명한 문인 양진(楊震)은 청렴결백하고 인품이 중후하여 관서(關西)의 공자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후한의 양진(楊震)은 그의 해박한 지식과 청렴결백으로 관서공자(關西公子)라는 칭호를 들었다고 한다. 그가 동래(東萊)태수로 부임할 때의 일이다. 그는 부임 도중 창읍(昌邑)이란 곳에서 묵게 되었다. 이때 창읍 현령인 왕밀(王密)이 그를 찾아왔다. 그는 양진이 형주(荊州)자사로 있을 때 무재(茂才)로 추천한 사람이었다. 밤이 되자 왕밀은 품속에 간직하고 있던 10금(金)을 양진에게 주었다. 양진이 이를 거절하면서
“나는 당신을 정직한 사람으로 믿어 왔는데 , 당신은 나를 이렇게 대한단 말인가.”하고 좋게 타일렀다. 그러자 왕밀은,
“지금은 밤중이라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고 마치 양진이 소문날까 두려워하는 식으로 말했다.
양진은 그의 말을 받아 이렇게 나무랐다.
“아무도 모르다니,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그대가 알고 내가 아는데, 어째서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한단 말인가.?(天知地知子知我知.천지지지자지아지)
또 한번은 안제가 자기 유모의 은공을 갚는다는 명분으로 국고를 털어 호화로운 저택을 지어 주었는데, 그런 호의를 악용한 유모와 그 딸은 환관들과 결탁하여 매관매직에까지 손을 뻗치는 등 그 폐해가 상당했다.
이 시실을 안 양진은 분개하여 황제에게 상소를 올렸다.
“일찍이 고조(高祖)께서는 공이 없는 자에 대해서는 등용하지도, 포상하지도, 작위를 주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한 치의 공도 없는 자들이 관직에 들어와 녹봉을 받고 있습니다. <흑과 백이 뒤섞여 밝고 탁함을 구분하지 못함(黑白混淆.흑백혼효)에 따라 사람들의 의논도 중구난방이 되었고, 돈이 만사를 지배하여 부정과 오직(汚職)이 만연해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이 점을 통감하시어 하루 빨리 바로잡으시옵소서.”
양진의 상소는 조정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간신배들은 자기 보신을 위해 갖은 소리로 모함했고, 양진은 고향으로 추방되었다. 양진이 떠나는 날, 그의 인품을 흠모하는 많은 사람들이 낙양 밖 역참까지 따라 나와서 위로하며 전송했는데, 양진은 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이 명색이 대관의 자리에 앉아 있었으면서 간신들을 몰아내어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지 못했으니 실로 부끄럽기 짝이 없소.”
그리고는 고향으로 내려가서 독을 마시고 자결해 버렸다.
(노재덕 편저 중국고사에서)
黑牛生白犢(흑우생백독)
黑:검을 흑, 牛:소 우, 生:날 생, 白:흰 백, 犢:송아지 독.
어의: 검은 소가 흰 송아지를 낳았다는 뜻으로, 재앙이 복이 되기도 하고 복이 재앙이 되기도 함을 비유하는 말
이다.
출전: 열자 설부편(列子 說符篇)
송(宋)나라 사람 중에 어질고 의로운 행동을 즐겨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 집안은 3대째에 계속 어질고 의로운 일에만 힘썼다. 그런 어느 날 집에서 기르는 검은 소가 흰 송아지를 낳았다.(黑牛生白犢.흑우생백독)
갑자기 이런 변괴가 일어나자 공자(孔子)에게 이유를 여쭈었다. 공자가 듣더니 말했다.
“이것은 길한 징조니, 흰 송아지를 하늘에 바치시오.”
그로부터 1년이 지났는데, 그의 아버지가 갑자기 눈이 멀었고, 집의 검은 소는 또다시 흰 송아지를 낳았다. 아버지는 다시 아들에게 이 일에 대해 공자에게 여쭤보라고 하였다. 그러자 아들이 반대하며 나섰다.
“지난번에 그분에게 여쭤보았다가 눈이 멀었는데 왜 또 여쭤보라고 합니까?”
이에 아버지가 말했다.
“성인의 말씀은 처음에는 어긋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에는 들어맞는다. 어서 다시 가서 여쭈어 보거라”
하는 수 없이 아들이 공자에게 다시 물어 보니, 공자는 역시 길한 조짐이라며 다시 그 송아지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라고 했다. 아들이 돌아와 그의 아버지에게 공자의 말을 아뢰자 아버지는 공자의 말대로 행하라고 말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나자 그 집 아들도 또 눈이 멀었다.
그 뒤 초(楚)나라가 송나라를 공격하여 그들이 사는 성까지 포위당했다. 극심한 굶주림에 지친 사람들은 자식을 바꾸어 잡아먹고 유해를 쪼개 밥을 지을 정도로 끔찍한 곤경에 빠졌다. 장정들은 모두 성 위로 올라가 싸우다가 절반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이들 부자(父子)는 모두 눈이 멀었기 때문에 재앙을 면할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난 뒤 두 사람의 눈은 다시 정상으로 돌아와 사물을 볼 수 있게 되었다.
黑白風雨(흑백풍우)
黑:검을 흑, 白:흰 백, 風:바람 풍, 雨:비 우.
어의: 검은 바람에 흰 비, 흑풍은 바람이 거세게 일어 먼지가 흩날려 사방이 어두워지는 것을 말하고, 백우는
세차게 내리는 소낙비를 말한다.
이 성어는 두 시인의 작품 속에 나오는 구절 중 일부를 따서 구성되었다.
이하(李賀.791~817)의 <호가(浩歌)>에서는 흑풍을 땄다.
黑風吹山作平地(흑풍취산작평지) 검은 바람 산으로 몰아쳐 평지를 만드니
帝遺天吳移海水(제유천오이해수) 하나님이 천오를 보내 바닷물을 옮겼도다.
王母桃花千遍紅(왕모도화천편홍) 서왕모의 도화는 하나같이 붉은데
彭祖巫咸幾回死(팽조무함기회사) 팽조와 무함은 몇 번이나 죽었던가.
靑毛驄馬參差錢(청모총마참차전) 청총마는 동전만한 얼룩이 있고
嬌春楊柳含細煙(교춘양류함세연) 청춘을 뽐내는 버들은 가는 연기를 머금었다.
전편은 모두 8연 16구로 된 칠언절구다.
시인이 자신의 마음속에 담긴 회포를 호탕하게 노래한 것이다. 인생무상과 자신의 불만을 함축적이고 유려한 필치로 서술하고 있다. 천오(天吳)는 바다의 신이다.
팽조(彭祖)는 전설상의 장수(長壽)한 인물이며, 무함(巫咸)은 요(堯)임금의 의사로 있던 무사(巫師)로, 살아서는 상공(上公)이었고, 죽어서는 귀신(貴神)이 되었다고 한다. 청(靑)은 사실은 검정색을 말한다. 총마(驄馬)는 흑색의 얼룩무뉘가 있는 말이다.
또 소식(蘇軾.1037~1101)의 <六月二十七日 望湖樓醉書.육월이십칠일 망호루취서) 5수 가운데 제1수에서는 <백우>를 땄다.
黑雲翻墨未遮山(흑운번묵미차산) 먹구름 검게 일어도 산을 가리진 못했는데
白雨跳珠亂入船(백우도주난입선) 흰 소나기 구슬이 듣듯 뱃전으로 쏟아지네.
卷地風來忽吹散(권지풍래홀취산) 땅을 뒤집을 듯 바람 불어 홀연히 흩어지니
望湖樓下水如天(망호루하수여천) 망호루 아래 호숫물은 하늘인 듯하구나.
6월27일에 망호루(望湖樓)에서 술에 취해 썼다는 제목으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망호루에서 호수를 바라보며 전개되는 날씨의 변화를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임성욱 엮음 고사성어 대사전에서)
欣欣向榮(흔흔향영)
欣:기뻐할 흔, 向:향할 향, 榮:꽃 영.
뜻 : 초목이 무성하게 자라다. 사업이나 일이 날로 발전하고 융성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도연명(陶淵明. 365~427)은 심양 자상 사람이다. 그의 증조부 도간(陶侃. 259~334)은 진(晉)나라 때의 대사마였고, 조부와 아버지가 태수(太守)를 지냈으며, 외조부는 정서 대장군을 지낸 당대의 명문거족(名門巨族) 집안이었다.
그러나 그의 대에 이르러서 형편이 궁핍해져 남의 밥을 얻어먹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부끄럽게 여기지도 않았고, 당시 정치에 염증을 느껴 벼슬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도연명은 성품이 고상하고 선비다웠으며, 학문은 넓고 깊었다. 그뿐 아니라 시와 문장에도 일가를 이룬 훌륭한 문인이었다. 그는 늘 산수와 자연을 벗삼아 노닐면서 시를 짓고 읊조리는 일을 낙으로 삼으며 살아갔다.
그러나 집안이 너무 가난해 할 수 없이 친구의 주선으로 제주를 담당하는 관리가 되었는데, 그는 관리들을 대우하는 일에 익숙지 않아 얼마 안 있어 사직하고 팽택현(彭澤縣)의 현령이 되었다.
그가 팽택현의 현령이 된 지 80여 일쯤 지났을 때 조정에서 독우관(督郵官)이 파견 나왔다. 그러자 그의 부하들이 그에게 모자를 바로 쓰고 허리띠를 잘 맨 뒤 독우관을 마중 나가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그러자 도연명은 한숨을 쉬면서 말하였다.
“나는 다섯 말의 봉록(俸祿)을 위해서 허리를 굽히고 상관을 영접하는 일은 하지 않겠다.”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그 길로 벼슬을 그만 두고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때의 심경을 적은 글이 바로 유명한 귀거래사(歸去來辭)인데 그 중 한 구절에 이런 말이 나온다.
나무들은 싱싱하게 자라나고 木欣欣以向榮(목흔흔이향영)
샘물은 풍풍 흐르기 시작한다 泉涓涓以始流(천위위이시류)
만물이 때를 얻음을 부러워하노니 羨萬物之得時(선만물지득시)
내 삶이 가다가 머묾도 느끼겠도다. 感吾生之行休(감오생지행휴)
이 귀거래사의 구절 가운데 흔흔향영이라는 부분이 나중에 성어가 되었다. 원래는 초목이 무성하게 자라는 모습을 형용한 것이지만, 오늘날에는 그 뜻 외에도 일이나 사업이 뜻하는 바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비유하기도 한다.
興高采烈(흥고채열)
興:일 흥, 高 :높을 고, 采:캘 채, 烈:세찰 열.
어의: 기뻐서 어쩔 줄 모르다. 신바람 나다.
출전: 남북조 시대 유명한 문학 평론가 유협(劉勰. 466~539)의 문심초룡(文心초龍). 문심초롱은 중국 문학이
론사에서 정연한 체계를 갖춘 이론서로 중 불휴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저적이다. 흥고채열이라는 성어는
제29편인 체성(體性)편에 나오고 있다.
체성편에서 저자는 어떤 작가든지 그의 문체와 풍격 등은 작가의 개성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논술하면서 한(漢), 위(魏), 진(晉) 등 각 왕조의 유명한 작가들을 예로 들고 있다.
숙야(叔夜. 즉 嵇康.혜강)의 풍격을 말할 때 <혜강의 문풍은 당당하고 호협하기 때문에 흥취는 높고 문채는 씩씩하다.(叔夜儁俠 故興高而采烈. 숙야준협 고흥고이채열)고 하였다. 즉 숙야의 성격이 호방하기 때문에 그의 글도 기백이 있고 아름답다는 것이었다.
성어 흥고채열은 이와 같이 처음에는 작가의 풍격을 비유하는 말로 쓰였지만 나중에 점차 기뻐하는 모습을 비유하는 말이 되었다. 그리고 이 성어는 보통 긍정적으로 쓰이고 있지만 간혹 부정적으로 쓰이는 경우도 있다.
(임종욱 엮음 고사성어 대사전에서)
興一利不若除一害(흥일리불약제일해)
興:일 흥, 一:한 일, 利:날카로울 리, 不:아닐 불, 若:같을 약, 除:섬돌 제, 害:해칠 해.
어의: 한 가지 이로운 일을 시작함은 한 가지 해로운 일을 제거함만 못하다는 뜻. 곧 새로운 일을 하나 시작하
는 것보다 해로운 일을 한 가지 제거하는 편이 훨씬 낫다는 말이다. 한 가지 일을 새로 만드는 것은 한 가
지 일을 줄이는 것만 같지 못하다.(生一事不如省一事. 생일사불여성일사)는 구절과 같이 쓰인다.
출전: 원사(元史) 야율초재(耶律楚材)전
남송(南宋)과 금(金)나라가 오랜 기간 싸움을 되풀이하고 있을 때, 몽고에서는 영웅 징기스 칸이 나와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그 징기스 칸과 오고타이 칸 2대에 걸쳐 재상으로 봉직하며 뛰어난 보좌역을 수행했던 이로 야율초재(耶律楚材)가 있다.
그는 요(遼)나라 출신이었는데, 1215년 연경(燕京)이 몽고군의 손에 들어갔을 때 포로가 되었다가 그의 유명한 이름을 전해들은 징기스 칸이 불러 중용했던 사람이었다. 천성이 현명하고 충직하여 직언을 서슴지 않았고 권세와 이익에 굴하지 않았다. 그는 이 같은 재능을 살려 내정을 충실히 함으로써 몽고제국 초창기의 기반을 굳힌 인물이다.
그는 어느 날 오고타이 칸에게 백성을 위한 자신의 신조를 이렇게 말했다.
“한 가지 이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은 한 가지 해로운 일을 제거하는 것만 같지 못하고, 한 가지 일을 만들어내는 것은 한 가지 일을 줄이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이는 즉 진정으로 백성을 위한다면 어떤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여 백성을 번거롭게 만드는 것보다는 원래 있었던 일 가운데 해로운 일, 필요 없는 일을 제거하는 것이 훨씬 백성들을 위해 좋은 것이라는 말이다.
(최근덕 편저 고사성어 백과사전에서)
犧牲(희생)
犧:희생 희, 牲:희생 생
어의: 종묘에 제사 지낼 때 바쳤던 소. 어떤 사물, 사람을 위해 자기 몸을 돌보지 않음
[출전] 《書經.서경》
犧(희)와 牲(생)은 약간 다르다. 犧는 소(牛)의 기운(羲)이라는 뜻이다. 祭祀(제사)를 지낼 때 소를 바침으로써 神으로 하여금 소의 기운을 누리게 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같은 소일지라도 얼룩소는 禁物(금물)이었다. 곧 犧는 털에 雜色(잡색)이 섞이지 않은 소를 뜻한다.
한편 牲은 소(牛) 중에서도 살아있는(生) 소를 뜻한다. 그것은 소를 잡아 고기를 바친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소를 바쳤다는 뜻이다.
곧 犧牲은 天地神明(천지신명)이나 宗廟(종묘)에 제사를 올릴 때 제물로 올렸던 소를 의미한다. 다만 암컷은 바치지 않고 튼튼하고 우람한 수컷만을 골라 바쳤다. 그런데 犧牲에는 소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었다. 본디 '三牲'이라 하여 양이나 돼지도 제물로 쓰곤 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가축 대신 사람이 犧牲이 된 적이 있었다.
夏(하)나라의 暴君 桀王(걸왕)을 정벌한 湯王(탕왕)은 殷(은)나라를 세웠다. 天下를 잘 다스렸지만 때아닌 旱魃(한발)로 백성의 고통이 말이 아니었다. 무려 5년간 비가 오지 않아 草根木皮(초근목피)로 연명해야 할 판이었다. 백성을 누구보다도 사랑했던 그는 자신이 직접 犧牲이 되어 기우제를 올렸다.
그는 머리를 깍고 사지를 묶은 다음 犧牲이 되어 제단위에 섰다. 그의 정성에 감격한 天神(천신)이 큰 비를 내렸음은 물론이다.
이때부터 남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바치는 것도 犧牲이라고 하게 되었다.
출처:1)고사성어 이야기 윤미길 엮음, 2)고사성어 대사전 임종욱 엮음. 3)신 고사성어 백과사전 신옥희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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