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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시내가 손에 잡힐 것처럼 가까운 곳으로 느껴지는 곳이지만 이곳은 조용했다.
도로에서 내려 나무사이를 헤치고 일백여미터를 올라가면 길인지 분간이 잘 안갈만큼 작고 가파른 오솔길이 나타났다. 그 오솔길을 따라 다시 육백미터 정도를 올라가면 작은 암자가 보였다.
북한산의 중턱에 마치 숨듯이 지어진 작은 암자였다. 산새소리와 바람소리만이 흐르는 곳이었다.
오솔길을 벗어나면 숲으로 담장을 삼은 작은 건물 세 채가 나온다. 정면에 보이는 것이 부처님을 모신 법당이다. 그 뒤에 칠성각이 세워져 있고 우측편에 요사채가 자리잡고 있는 형태였다. 법당의 문이 열려 있었다. 그 문밖 섬돌밑에 40대 중년인이 공손한 자세로 서서 법당안을 보며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법당안은 썰렁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단출했다. 정면 중앙의 대위에 석가모니 부처님상이 모셔져 있고 그 아래 향을 피울 수 있는 향로가 하나 있을 뿐이었다. 지금 50대 중반의 회색가사를 걸친 초로인이 경건한 자세로 큰절을 반복하고 있었다. 백팔배가 끝이났다.
초로인이 법당 밖으로 걸어 나왔다. 섬돌위에 놓여져 있는 고무신을 신은 그는 뒷짐을 지고 천천히 요사채를 돌아갔다. 요사채 뒤쪽은 벼랑이었다. 깍아지른 듯하다고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급한 경사를 갖고 있었다. 서늘한 산바람이 불고 있었다. 조금씩 초로인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초로인의 시선은 한 방향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북한산의 능선뿐이다. 숲이 이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눈길을 계속해서 따라가다 보면 푸른 지붕을 이고 있는 아름다운 건물이 나타날 것이다. 초로인의 입이 열렸다.
"그가 마음에 들었나 보군!"
"대단한 능력을 가진 젊은입니다. 차장님"
"능력이 있다고 온전히 믿을 수는 없지 않겠나, 남부장?"
"그에 대한 모든 것을 조사했습니다. 의심할만한 구석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초로인의 시선이 푸른 하늘을 향했다. 생각에 잠긴 얼굴이다.
"그가 회에 대해 알고 있나?"
"그것은 아직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
침묵이 흘렀다. 입을 연 것은 50대의 초로인 한충우였다.
"그가 회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도 우리와 합류할 것이라고 자신할 수 있나,남부장?"
"그는 상대가 두려워 꼬리를 마는 스타일은 아닙니다. 차장님. 그건 자신할 수 있습니다."
"그래?"
"그렇습니다. 차장님"
남기호의 자신에 찬 말을 듣던 한충우가 말을 받았다. 어딘가 쓸쓸한 어조였다.
"우리가 외부의 도움을 필요로 할 지경이 되다니......"
"죄송합니다. 차장님."
남기호의 고개가 깊이 숙여졌다. 자신의 임무를 생각한다면 앞에 있는 사람에게 저히 얼굴을 들 수 없는 것이다.
"자네가 죄송할 것이 무언가. 그들이 너무 강한 것뿐이야."
말을 하던 그의 눈빛이 점점 강해졌다. 눈빛이 변한 것만으로 그의 인상이 일변했다. 무기력해보이기만 하던 그의 모습이 강철처럼 단단해졌다.
"그들이 아무리 강해도 우리는 그들을 막아야만 하네. 틈이 있을 것이야.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이 이 나라의 앞날에 이롭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우리도 잘 모르게 움직이고 있는 자들의 꿍꿍이를 믿을 수는 없어. 자네의 역할이 정말 크네!"
그가 고개를 돌려 남기호를 보았다.
"아직 시간여유는 있어. 그를 좀 더 살펴보게. 믿을 수 있다고 판단되면 그를 끌어들이게. 최종적인 판단은 자네에게 맡기겠네. 내게는 사후보고로 충분해. 현장을 지휘하는 사람의 판단이 가장 정확한 법이지."
"알겠습니다. 차장님."
"가장 중요한 것이 보안이라는 것을 잊지말게. 가보게, 늘 조심하고!"
한충우는 20여년 동안 자신과 함께 생사를 넘나든 부하를 온화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늘 변함없는 모습으로 자신의 오른편에 서 있는 사람이었다. 서로의 목숨을 구해준 적도 여러 번이었다. 이종하의 저택에서 한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보였던 40대의 사내, 남기호는 한충우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 암자를 물러나왔다. 오솔길을 걸어 내려가는 그의 답답한 가슴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산새들의 울음소리가 한적한 산길에 울려퍼지고 있었다.
수원에서 서해안의 제부도 방향으로 40여분을 자동차로 달리면 남양면이라는 작은 도시가 나온다.
아직은 도시라고 부르기도 뭣한 곳이지만 최근 개발이 계속되고 있는 곳이다. 남양면의 입구격이라 할 수 있는 도로의 좌측에는 면을 통틀어 가장 큰 병원이 있는데 서해병원이다.
서해병원 5층의 분위기는 살벌했다. 인테리어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은 곳이라 병원특유의 창백한 흰색이 사방벽과 천정을 더 병색짙게 만드는 곳이었다. 그런데 그런 곳에 떡대라고 부를만한 검은 양복을 입은 젊은 남자 수십 명이 복도에서 서성거리거나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다.
한눈에도 직업을 알 수 있을 만한 인상들이라 데스크에서 일을 보는 간호사들도 그들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얼핏봐도 덩치들의 숫자는 스물이 넘어 보였지만 복도는 쥐죽은 듯 조용했다. 그들중에는 지금 이곳 병실에 누워있는 사람들의 신경을 거스르게 할만한 신분이 없는 것이다. 또 떠들만한 분위기가 아니기도 했다.
5층 엘리베이터문옆의 신호에 파란불이 들어왔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문이 열렸다.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다섯 명의 사내가 그 안에서 내렸다.
문진혁과 최윤길 일행이었다. 문진혁의 얼굴은 석고상처럼 굳어 있었다. 납득이 안가는 이준형의 전화를 받고 찾아간 이종하의 저택은 그의 부하 서너명이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도 이종하가 어디로 갔는지 모르고 있었다.
최윤길을 통해 이종하의 행방을 알아내고 급하게 달려오는 길이었다. 이종하는 특실 623호 침대에 누워 있었다. 오른쪽 다리에 허벅지까지 깁스를 하고 있었다.
블라인드를 친 창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햇빛이 이종하의 얼굴에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그의 눈은 텅 비어 있었다.
그들이 병실에 들어섰음에도 이종하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얼굴색도 변하지 않고 있었다.
꼭 정신이 딴 곳에 있는 사람 같았다. 문직혁과 최윤길의 얼굴이 동시에 찡그려졌다. 어제 밤에 만났던 이종하와 지금 병실 침대에 누워있는 자가 동일인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사장님!"
최윤길이 이종하를 불렀다. 하지만 이종하의 자세에는 변함이 없었다. 눈빛조차변하지 않았다. 최윤길의 얼굴이 굳어졌다. 지금 이종하는 자신이외의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는 상태라는 것을 안 것이다. 최윤길이 옆에 와 있다는 것을 안다면 이종하의 간이 배밖으로 나오지 않은 다음에야 이렇게 무시할 수는 없다.
최윤길은 자신의 옆에 서 있는 화성파의 넘버 투 정준기에게 고개를 돌렸다.
정준기는 이종하와는 다른 스타일이다. 이종하가 돈과 악으로 화성파를 만든 자라면 그는 화성파의 의지를 주먹으로 실천하는 자다. 180 정도 되는 키에 몸무게가 100킬로는 나가 보였다.
주먹 하나가 어린아이 머리통만하다. 지금 그는 당황하고 있었다. 상상도 못한 일에 직면한 자의 얼굴이었다.
"어떻게 된 일인가?"
"저도 정확한 정황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최윤길은 정준기가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의 대답은 정중하다고까지 할 수는 없었지만 그 나름의 예의를 충실히 지키고 있었다. 정준기의 대답을 들은 최윤길이 혀를 찼다.
명색이 부두목이라는 자가 아직도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하고 있는 듯 했던 것이다. 예전에 보았던 정준기의 모습은 흔적이 없었다.
"그게 무슨 소린가? 이사장님에게 말을 듣지 못했나?"
"사장님이 말씀을 하실 생각을 하지 않으십니다."
정준기는 말을 할수록 점점 더 당황하고 있었다. 자기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말이 스스로도 어이없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최윤길의 목소리에 의혹과 짜증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그는 이렇게 명백한 상황을 설명하지 못하는 정준기에게 화가 치밀고 있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사장님이 어제 일에 대해 아무리 물어도 입을 열지
않으십니다."
"이사장님이? 그 자리에 스물이 넘는 자네 식구들이 있었지 않나, 그들에게 얘기를 들으면 되잖은가?"
최윤길의 기분을 읽은 정준기의 속에 열불이 치솟았다. 자신이 최윤길에게 이런 대접을 받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필사적으로 표정을 숨겼다. 자신의 기분을 드러낼 상대가 아니라는 것쯤은 그도 아는 것이다.
"그들은 아는 것이 없습니다. 상대가 한명이었다는 것 정도뿐입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인상착의를 기억하는 녀석도 없습니다.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상대의 눈빛밖에 없답니다. 스물이 넘는 녀석들의 말이 별 차이가 없습니다."
"한명? 지금 한명이라고 했나?"
최윤길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정준기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예, 한명이었답니다."
"화성파의 정예 이십여 명이 단 한명에게 당했다고?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나?
상대가 람보야?"
"애들 말을 들으면 람보는 상대도 안 됩니다."
최윤길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정준기의 대답이 기도 안차다는 얼굴이었다.
"상대 모습을 기억나는 대로 몽타쥬한 게 있나?''
"예? 없습니다. 처음 그 자를 상대했던 박용수 말로는 사장님과 그자가 서로 알고 있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사장님이 정신을 차리시면 말씀을 해주실 텐데 몽타쥬 같은 게 필요없잖습니까?
정준기의 말을 들은 최윤길이 이제야 생각이 났다는 듯 이종하를 돌아보았다.정준기의 대답이 뜻밖이어서 정작 물어봐야 할 것을 묻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이사장님의 상태는 어떤가? 정상이 아니신 것 같은데?"
정준기의 얼굴이 침통해졌다. 대답하는 그의 음성도 무거웠다.
"의사말로는 심리적 공황상태랍니다. 무슨 말인 지는 잘 모르겠는데 큰 충격을 받으셔서 외부와 연결되는 의식이 끊어지고 자기만의 세상에 고립되어 계시답니다."
"언제쯤 회복된다는 말은 있나?"
"정해진 것은 아니랍니다. 사장님이 자기 의지로 세상과 연결된 의식을 회복하셔야한다고 의사가 말하더군요. 저희는 기다리는 것 외에 딱히 할 일이 없답니다."
말을 알아들은 최윤길이 옆에 서서 침대에 누워있는 이종하를 내려다보며 그들이 하는 대화를 듣고 있던 문진혁을 쳐다보았다.
"상황이 묘하군요."
최윤길의 눈길을 받으며 무표정한 얼굴로 말하는 문진혁의 어조에는 강한 의혹이 깔려 있었다.
"무슨 뜻입니까?"
"저희와 헤어지자마자 이사장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자에 의해 말을 하지도 못하는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는 것이 묘합니다. 마치 우리가 이사장에게 도움을 받을 수 없도록 하기 위해 벌인 일 같지 않습니까?"
"까마귀가 날자 배가 떨어졌다는 말씀인데...."
최윤길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자 문진혁의 눈이 빛났다. 그는 품에서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내어 정준기에게 내밀었다. 의아한 얼굴로 정준기가 종이를 받아들었다.
"이게 뭡니까?"
"저희가 찾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사장님 저택에 있다 당한 친구들도 이병원에 함께 있다더군요. 그들에게 이 사진의 자가 찾아왔었던 것인지에 대한 확인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문진혁의 말을 들은 정준기가 최윤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문진혁이 최윤길과 함께 왔기 때문에 별말은 하지 않았으나 그의 신분이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다. 정준기의 눈길을 받은 최윤길이 무슨 뜻인지 알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분 말씀대로 해주게. 이사장님에게도 이 자를 찾아달라고 부탁했던 일이었으니까."
"알겠습니다."
대답을 하고 부상당한 부하들이 입원해 있는 아래층에 갔던 정준기가 돌아온 것은 30여분 후였다. 그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문진혁과 최윤길의 눈이 동시에 빛났다. 병실에서 그를 기다리던 그들에게 뛰듯이 다가온 정준기가 격앙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 자가 맞답니다."
"으드득"
문진혁의 입에서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얼굴이 살기에 물들었다. 옆에 있던 최윤길의 눈은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으나 자신을 찾아온 자와 이종하를 방문했던 자가 동일인으로 확인된 것이다. 그의 상상을 초월하는 고수였다. 사시미를 든 화성파의 정예 이십여 명을 단신으로 부수다니, 영화에서나 가능하다고 생각하던 일이다.
최윤길이 정준기에게 물었다.
"이 자가 누군지 알고 있는 사람이 있던가?"
정준기가 고개를 저었다.
"이 그림의 자가 자신들을 상처 입힌 자라는 것은 확인했지만 누군지 알아보는 자는 없었습니다. 우리 계통에서 이 정도의 솜씨를 가진 자라면 소문이 나도 벌써 났을텐데...조금 이상하긴 합니다."
"천상 이사장님이 정신을 빨리 차리셔야한다는 말인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최윤길이 문진혁을 보고 있었다. 문진혁은 천천히 뒷짐 지고 있던 손을 풀었다.
"그 자가 이 지역에서 움직이는 자인 것은 맞다고 생각됩니다. 이사장님이 정신을 차릴 때까지 무한정 손 놓고 기다리고 있을 수 만은 없으니 찾아봐야죠."
최윤길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수원은 인구 100만에 육박하는 큰 도십니다. 동네에서 사람 찾는 것과는 틀립니다."
"대한민국 전역이라도 뒤져서 찾아야하는 자가 수원에 있는 자일 것이라고 지역이 좁혀진 것만으로도 감사해야할 판입니다. 20대에서 30대 중반의 남자들 중에 이 자가 있을 겁니다. 이유는 필요 없습니다. 무조건 찾아야합니다."
"알겠습니다."
형식은 공대지만 내용은 명령이었다. 최윤길은 속으로 이를 앙다물었다. 언젠가는 이 수모를 갚아줄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정준기를 돌아보았다.
"이 자를 찾는데 자네 식구들 도움이 필요할 듯하네."
"당연히 돕겠습니다. 우리 일이기도 하니까요."
정준기의 고개가 정신없이 끄덕여졌다. 최윤길이 찾고 있는 자라면 유사시에 경춘파의 도움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자신들의 힘으로 안 되는 일이라도 경춘파의 도움을 받는다면 해결할 수 있다. 정준기는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이다. 블라인드를 통해 들어온 어둑해진 햇볕아래 여전히 공허한 눈빛인 이종하의 얼굴이 있었다.
침대에 누워있는 그의 얼굴에 음영이 더욱 짙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