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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자료 제417호(봉화군)봉화삼계서원(三溪書院)소개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삼계리
과거 닭실마을로 오르는 초입부분 우측편에 자리하고 있는 삼계서원은
조선 중종때 명신 충재 권벌(1478∼1548)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당시 안동부사였던 김우옹이 조선 선조 21년(1588)에
건립하였다고 한다.
사진 위로부터
삼계서원 입구
담장너머로 보이는 삼계서원
삼계서원 사당
삼계서원 지붕
삼계서원 서재
삼게서원 동재
삼게서원 강당근경
삼계서원 강당
삼계서원 원경
조선 선조 31년(1601)에 한강 정구(鄭逑)가 사당을 충정공사(忠定公祠),
당호를 정일당(精一堂), 동재를 사무사(思無邪), 서재를 모불경(母不敬),
정문을 환성문(喚惺門), 문루를 관물루(觀物樓)라 각각 명명하였다.
그리고 현종 1년(1660)에 삼계서원으로 사액받았다.
고종 5년(1868)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충정공사·환성문·관물루가
훼철되었다가 1951년에 복원하였다.
권벌은 연산군 2년(1496)에 진사가 되고 중종 2년(1507)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지냈다.
명종 2년(1547)에 양재역벽서사건에 연루되어 평안도 삭주에 유배되었으며,
이듬해에 그 곳에서 죽었다.
삼계서원 근처 마을 정경과 삼계서원 여기저기
서원의 배치는 앞에는 공부하는 공간을 두고, 뒤에는 제사 지내는 사당을
배치한 전학후묘의 형식이다.
서원 출입은 전면에 자리하고 있는 중층의 관물루 아래에 설치된 환성문으로
들 수 있도록 하였으며 문을 들어서면 전면에 강당이 자리하고 전면 좌우에
동·서재가 있다.
삼계서원의 편액
강당 우측으로 돌아들면 토담장으로 공간이 구획된 제향공간인 사당(충정공사)이
자리하고 있으며 서재 좌측편에 서원을 관리하는 관리사가 대문채를 두고
위치하고 있다.
동재 전면 우측에는 1906년 사림에서 세웠다는 신도비와 비각이 자리하고
있으며 서원 좌측에 관리사가 있다.
삼계서원의 이모저모
봉화 삼계서원은 정연한 전학후묘의 배치법을 지니고 있으며 공간의
위계성이 돋보인다. 관물루와 사당은 복원된 건물로 당시의 모습은
지니지 못하고 있으나 동재와 서재에서 당시의 모습을 부분적이나마
찾을 수 있다.
*보물 제261호 충재일기(沖齋日記)
(봉화군 삼계서원 소장;사진 아래)
이 책은 중종조의 학자이며 관료인 충재 권벌(1478∼1548)이 직접
손으로 쓴 일기이다.
권벌은 중종 2년(1507) 문과에 급제하여 관리로 지내다가 기묘사화로
인해 파면당하기도 했다. 후에 다시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귀양을 갔다가
그곳에서 목숨을 다하였다.
일기의 내용은 권벌의 문집인『충재집』에도 실려있으며,『중종실록』을
편찬할 때에도 기초자료의 하나로 채택되었다.
이와같이 당시 관료로서 생활의 실태와 중앙정부의 일상행사가 소상히
기록되어 있는 것은 임진왜란 이후에는『승정원일기』가 남아있어
그 상세한 기록이 있으나, 선조 이전의 것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져
유희춘의『미암일기』, 이이의『석담일기』와 함께 귀중한 사료가 된다.
더구나 뛰어난 권벌의 필체와 문장만으로도 매우 소중히 여겨지는 기록이다.
사진 위로부터
보물 제261호 충재일기(沖齋日記)
보물 제261호 충재일기(沖齋日記)
보물 제262호 근사록(近思錄)
*보물 제262호 근사록(近思錄)
(경북 봉화군 삼계서원 소장:사진 위)
『근사록』은 송나라 유학자인 섭채가 성리학의 기본이 되는 주돈이의
『태극도설』과 장재의『서명』등 중요한 문헌만을 골라 만든 성리학의
독본이다. 이 책은 고려 공민왕 19년(1370)에 당시 뛰어난 성리학자인
박상충이 진주목사로 부임하는 이인민에게 선사한 것이다.
이 책은 판식이나 자체로 보아 원판을 보고 다시 새긴 것으로 보인다.
권발이 애독하던 것으로 늘 소매에 넣고 다녔으며, 중종 때에는 경연에서
강의까지 하던 것이다.
고려본이 희귀한 상황에서 중국판을 따라 다시 새긴 것이라 하더라도
매우 귀중한 가치를 지니며, 조선시대 성리학을 연구하는데 있어 반드시
정독해야 할 도서이다. 특히 정조가 친히 머리글을 지어서 붙였다는
것만으로도 더욱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다.
*보물 제896호 충재권벌종손가소장전적(沖齋權벌宗孫家所藏典籍)
(봉화군 삼계서원 소장)
조선 중종 때의 명신이며 학자였던 충재 권벌(1478∼1548) 선생의 종가에
소장되어 있는 것이다. 권벌은 연산군 2년(1496)에 진사가 되고 중종 2년
(1507)에 문과에 급제하여 대간, 정원과 각 조의 판서 등 여러 벼슬을 지냈다.
인종 1년(1545)에 우찬성과 판의금부사를 지냈으며, 을사사화 때 소윤일파에
의하여 삭주로 유배가서 그곳에서 죽었다.
선조 때 억울함이 풀어져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안동의 삼계서원에 모셔졌다.
전적은 약 3,000책이 소장되어 있는데, 지정된 것을 살펴보면『우향계축』
(1478),『사마방목』(1406),『문과잡과방목』(1507),『충재자필일기』등
15종 184책이다.
과거 합격자명단인 『사마방목』은 보물 제524호인 『정덕계유사마방목』
보다 17년이 앞선 것이고, 『문무잡과방목』 역시 지금까지 간행되어
전해지는 본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물 제603호로 지정된
『정덕계유문무잡과방목』보다 6년이나 오래된 본이다. 『을사정난기』는
유일하게 남아있는 것이며, 『충재일기』는 임진왜란 이전에 만들어진
역사적 자료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이는 조선 전기 정치, 사회, 경제사를 연구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사진 위로부터
보물 제896-1호 우향계축(友鄕契軸)
보물 제896-2호 홍치9년병진윤3월사마방목(9年丙辰閏3月司馬榜目)
보물 제896-3호 정덕2년3월문무잡과방목(二年三月文武雜科榜目)
보물 제896-4호 광국원종공신녹권(光國原從功臣錄券)
보물 제896-5호 신편고금사문유취(新編古今事文類聚)
보물 제896-6호 역학계몽요해(易學啓蒙要解)
보물 제896-7호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
사진 위로부터
원장고적첩
암장고적
권별수적
허묵전서
이황서첩
장필진묵
허묵편액제자
김구진묵
권벌은 연산군 2년(1496)에 진사가 되고 중종 2년(1507)에 문과에 급제하여
대간, 정원과 각 조의 판서 등 여러 벼슬을 지냈다. 인종 1년(1545)에
우찬성과 판의금부사를 지냈으며, 을사사화 때 소윤일파에 의하여 삭주로
유배가서 그곳에서 죽었다. 선조 때 억울함이 풀어져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안동의 삼계서원에 모셔졌다.
지정된 유묵을 보면 조선 전기 명필로 손꼽히는 김구(金絿,1488∼1533)
선생이 초서체로 쓴 족자 1점, 퇴계 이황(1501∼1570)의 서첩, 전서체의
대가로 손꼽히는 미수 허목(許穆,1595∼1682) 선생의 『미수전』,
중국 명나라 초서체의 대가인 장동해가 직접 쓴 필적 3폭, 조선 중기
명필들의 필적을 모은 『암장고적』 5책(연산군 ∼인조대)과 『선조고적』
등이다.
이 유묵들은 권벌 및 그의 자제들의 교류와 당시 사대부들의 시문과 생활상도
살필 수 있는 자표로 평가된다.
*사적및 명승 제3호 내성유곡권충재관계유적(乃城酉谷權沖齋關係遺蹟)
조선 중종 때의 문신인 충재 권벌(1478∼1548)선생의 유적지이다.
권벌은 안동출신으로 연산군 2년(1496)에 진사가 되고 중종 2년(1507)에
문과에 급제하여 대간, 정원과 각 조의 판서 등 여러 벼슬을 지냈다.
인종 1년(1545)에 우찬성과 판의금부사를 지냈으며, 을사사화 때 소윤일파에
의하여 삭주로 유배가서 그곳에서 죽었다. 선조 때 억울함이 풀어져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안동의 삼계서원에 모셔졌다.
이곳에는 선생의 뜻을 기념하기 위한 청암정과 석천정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큰아들 청암 권동보가 지은 것으로 지금까지 보존되어 왔다.
남서쪽으로 1㎞쯤 되는 곳의 냇가에는 수명루라는 누각이 있다.
실학자 이중환이 지은 『택리지』에서 우리나라의 빼어난 명승지로 손꼽고
있는 곳으로, 주위의 울창한 소나무숲과 자연경관이 아름답게 어우러져
있는 명승지이다.
사진 위로부터
봉화추원재 전경
좌측면
내부전경
대문채
상실
상부가구
안채전면 처마
동루전면
동루 측면
배산하여 남동향으로 자리하고 있는 본 재실은 북부지방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재실의 형태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재수를 보관하는 창고 및 문집목판을 보관하는 용도로 꾸며진 대문채와
현재 관리인이 거주하는 관리사와 대문채와 대향하여 일자형 상실이
자리하고 있다.
상실은 제관이나 유사들이 사용하는 공간으로 구성되고 있으며 동쪽에는
중층의 누각형 건물로 아래에는 묘소로 통하는 문을 설치하였고 상부는
망재를 지낼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한 듯하다.
전체적으로는 북부지방에서 자주 채택되는 ‘ㅁ’자형 배치를 지니고 있으나
4개의 독립된 건물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기능도 다양하다.
상실은 추원재라는 현판이 걸려있으며, 마당보다는 매우 높게 2단으로
기단을 축조한 후 건물을 앉혔다.
정면 7칸, 측면 1칸 규모로 재실건물로서는 상당한 규모를 지니고 있으며
일종의 중당협실형 평면형을 지니고 있다.
좌측 2칸은 2자 정도 폭의 퇴칸을 두고 온돌방을 들였으며 가운데 4칸에
걸쳐 넓은 대청을 두었다.
그리고 우측은 퇴칸 없이 온돌방을 두었다. 좌측온돌방과 우측온돌방은
모두 대청 쪽으로 사분합들문을 두었으며 정면 쪽으로 쌍여닫이 세살문과
외여닫이문을 달았다.
다만 우측온돌방만 배면과 측면에서 출입할 수 있도록 문을 설치하였으며
대청 배면 쪽은 머름을 둔 쌍여닫이 판문을 설치하였다.
우물마루를 깐 수법과 문틀연귀수법 등 오래된 건축수법들이 남아있다.
좌측온돌방 전면 기둥에 상방을 설치한 흔적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과거에는 우측과 동일한 평면구성이 아닌가 추정되며 퇴칸 상부에도
고미반자가 설치되어 있다.
전면 기둥만 원주를 사용하였으며 상부는 굴도리에 공아를 끼운 판대공을
세운 3량구조로 건물규모에 비해 상부구조가 약한 감이 있다.
대문채는 정면 9칸의 상당한 규모로 대문칸을 중심으로 좌측은 유사방과
재수를 보관하는 창고 및 부엌으로 구성되고 우측은 목판 및 문집을 보관할
수 있는 용도로 꾸며졌다.
좌측부분은 2칸 부엌과 전퇴칸을 둔 온돌방 2칸 및 재수를 보관할 수 있는
고방을 두고 온돌방 앞쪽은 1자폭의 퇴칸에 1자 정도 더 돌출시킨 퇴칸을
두었는데 마루의 구성법이 독특하다.
특히 온돌방과 부엌 및 고방은 외부에서도 출입이 가능토록 하여 행사시
동선이 원활토록 배려듬도 눈에 띤다. 우측부분은 온돌방 한칸과
고방 2칸으로 고방은 목판 및 서책을 보관하기 좋게 우물마루를 깔고
판벽으로 벽체를 마감하여 통풍과 환기가 양호토록 하였다.
동루는 상실 전면 우측편에 자리하고 있는데, 하층은 묘소로 오를 수 있는
대문칸과 고방 및 이층을 오를 수 있는 계단으로 구성되고 상층은 내측과
상실 쪽으로는 개방되고 우측면과 배면부분은 판벽과 판문으로 폐쇄하였다.
판문 아랫부분은 머름을 두었고 상부는 판벽에 풍혈을 두었다.
그리고 내정 쪽으로 난간을 세우고, 각주에 3량구조이며 홑처마 박공지붕의
건물이나 다른 건물과는 달리 결구수법이나 치목수법이 후기 기법을 지니고
있어 건립년대는 그리 오래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관리사는 현재 재실의 관리인이 거주하고 있으나 원래는 향사시 제관들이
머물던 곳으로 추정된다.
평면구성은 가운데 2칸 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들인 일종의
중당협실형이다. 좌측의 부엌은 부설된 것으로 원형은 아니며 통평고대를
사용한 것이 고식이다.
북부지역에 산재하고 있는 많은 재실건축물 가운데 우선 규모면에서
상당한 규모를 지니고 있으며, 상실과 관리사 등 여러 곳에 오래된
건축수법들이 잘 남아있다. 그리고 기능면에서도 다양성을 지니고 있어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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