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강종의 부인 원덕태후 유씨의 묘인
강화 곤릉
고려왕릉
1. 개요
2. 목록
1. 개요
1대부터 34대까지의 고려 왕들의 왕릉 위치가 모두 알려진 것은 아니다. 그리고 고려사 기록에는 주인을 알 수 없는 능호들이 전해진다. 삼국시대의 고구려 왕릉, 백제왕릉, 신라왕릉, 가야왕릉이나 남북국시대의 발해왕릉, 조선왕릉이 그렇듯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 근처에 모인 편인데 잠시 강화도로 도읍을 이전했던 대몽항쟁 시기와 공양왕의 경우만 특이한 케이스로 남한에 위치한다. 능 4기는 대한민국, 나머지는 북한에 있는데 아쉽게도 남한의 고려왕릉들은 고려가 힘들 때(여몽전쟁)나 망한 뒤(공양왕)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양식이 매우 초라하다.
북한 소재 고려왕릉들은 태조의 현릉이나 공민왕의 현릉 등 일부를 제외하면 관리상태가 매우 열악하다. 북한의 산들이 흔히 민둥산이라 자료사진들을 보면 봉분이 마치 반사막지대 같은 황무지 가운데 덩그러니 있거나 한 경우가 태반이다. 사실 북한 치하인 지금뿐 아니라 조선시대에도 후손으로서 조상의 능을 관리해야 할 개성 왕씨가 몰락해 주요 왕릉을 제외하고 그다지 관리를 받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개성 동쪽의 교외 지역인 장단군이 비무장지대 안에 갖혔기에 몇몇 고려왕릉은 비무장지대 내에 소재했을 가능성도 있어 상황이 더욱 암울하다. 이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꾸준한 관리를 받으며 랜드마크가 되고 세계유산으로도 지정된 조선왕릉과는 상당히 대비된다.
구조적으로도 석회를 두껍게 바른 조선왕릉이나 거대한 돌무지덧널무덤이라 돌무지가 무덤을 보호하는 신라왕릉에 비해, 고려왕릉은 별달리 도굴 방어장치가 없는 돌방구조라 도굴하기 쉬워서 굉장히 도굴피해를 많이 당했다. 또한 후대의 조선왕릉은 귀족적 풍조를 배제하려 한 조선왕조의 기풍 때문에 무덤 안에 상징적 물건만 넣고 사치품은 부장하지 않았으므로 그저 귀중품만 노리는 도굴꾼의 표적이 될 일도 적었다. 그러나 귀족정치 시대였던 고려의 왕릉에는 고려청자 같은 사치품을 많이 부장했기 때문에 더욱 더 도굴범의 표적이 되었다.
도굴은 특정시대의 문제가 아니었다. 고려왕릉은 고려, 조선 구한말, 일제강점기, 광복 후 모두 도굴당해서 남북한 각자의 발굴조사기록에도 그야말로 발굴된 유물이 별로 없다고 나온다. 현재 고려왕릉에서 그나마 얻을 수 있는 게 있다면 고려왕들의 얼굴들 정도이다. 그런데 왕릉의 보존 상태나 북측의 부실한 관리 상황을 보면 이조차도 여의치 않아 보인다. 왕건이나 공민왕 정도를 제외하면 왕들의 얼굴이 공개되지 않았다.
고려왕릉의 양식은 기본적으로 통일신라 시기 정립한 양식을 기본으로 한다. 불탑을 모방해 봉분 주변을 둘러싼 난간석, 12지신을 봉분 아래에 부조한 병풍석, 무덤 주변의 석물 배치는 확실히 원성왕릉 같은 신라 후기 양식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신라왕릉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고분 벽화 같이 고구려 양식 영향으로 추정되는 요소가 일부 포함되었다. 이는 고려가 신라와 고구려의 문화를 모두 이어받으려고 했던 국가라는 점을 말해준다.
다만 고려왕릉을 수호하는 인물석들은 조선왕릉은 커녕 전대의 신라왕릉보다도 대체로 섬세한 기교가 부족한 편이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다. 원래는 더 정교한 석상들을 세웠었는데 거란, 몽골 등의 침략으로 날려먹자 후대에 대충 복원했다는 등의 주장도 있다.
불상도 석굴암 본존불 같은 통일신라 불상이 더 사실적이고 고려 불상은 투박하다는 일각의 평가처럼, 고려시대 조각 풍조의 변화에 왕릉 석물도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 허나 현릉과 현정릉을 제외한 대다수 고려왕릉들은 석상이 투박함을 넘어 정성과 퀄리티가 심하게 떨어진다는 점이 이상하고, 그 대상이 다른 권력자의 무덤도 아닌 하필 왕릉이기에 더욱 의문이 남는다.
2. 목록
1. 추존 의조(懿祖)의 능인 온혜릉(溫鞋陵)
건립시기와 위치 : 미상
2. 추존 세조(世祖)와 위숙왕후의 능인 창릉(昌陵)
건립시기 : 미상
소재지 : 황해북도 개풍군 남포리
북한 보존급유적 제554호
3. 제1대 태조(太祖)와 신혜왕후(태조 后)의 능인 현릉(顯陵)
건립시기 : 943년
형식 : 합장릉
소재지 : 황해북도 개풍군 해선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북한 국보 문화유물 제179호
4. 신정왕후(태조 后)의 능인 수릉(壽陵)
형식 : 단릉
5. 신성왕후(태조 后)의 능인 정릉(顯陵)
건립시기 : 1009년3월
형식 : 단릉
소재지 : 경기도 개성시
북한 보존유적 573호
6. 혜종(2대)과 의화왕후(혜종 后)의 능인 순릉(順陵)
건립시기 : 945년
형식 : 합장릉
소재지 : 경기도 개성시
7. 정종(3대)과 문공왕후(정종 后)의 능인 안릉(安陵)
건립시기 : 949년
형식 : 합장릉
소재지 : 경기도 개성시
북한 보존급유적 제552호
8. 광종(4대)과 대목왕후(광종 后)의 능인 헌릉(憲陵)
건립시기 : 975년
형식 : 합장릉
소재지 : 경기도 개성시
9. 경종(5대)과 헌숙왕후(경종 后)의 능인 영릉(榮陵)
건립시기 : 981년
형식 : 합장릉
소재지 : 경기도 개성시
북한 보존유적 569호
10. 헌애왕후(경종 后)의 능인 유릉(幽陵)
건립시기 : 1029년
소재지 : 황해북도 장풍군
형식 : 단릉
11. 헌정왕후(景宗의 后)의 능인 원릉(元陵)
건립시기 : 1009년
12. 성종(6대)과 문덕왕후(성종 后)의 능인 강릉(康陵)
건립시기 : 997년
소재지 : 경기도 개성시
13. 목종(7대)과 선정왕후(목종 后)의 능인 의릉(義陵)
건립시기 : 1012년
위치 유실
14. 현종(8대)의 능인 선릉(宣陵)
건립시기 : 1031년
소재지 : 개풍군 해선리
북한 보존급유적 제547호
15. 현종(8대)의 后인 원정왕후의 능인 화릉(和陵)
건립시기 : 1018년
소재지 : 개풍군 해선리
16. 현종(8대)의 后인 원혜왕후의 능인 회릉(懷陵)
건립시기 : 1022년
소재지 : 개풍군 해선리
17. 현종(8대)의 后인 원성왕후의 능인 명릉(明陵)
건립시기 : 1028년
소재지 : 개풍군 해선리
18. 현종(8대)의 后인 원평왕후의 능인 의릉(宜陵)
건립시기 : 1028년
소재지 : 개풍군 해선리
19. 덕종(9대)의 능인 숙릉(肅陵)
건립시기 : 1034년
소재지 : 개풍군
20. 덕종(9대)의 后인 경성왕후의 능인 질릉(質陵)
건립시기 : 1086년
21. 정종(10대)의 능인 주릉(周陵)
건립시기 : 1046년
22. 정종(10대)의 后인 용신왕후의 능인 현릉(玄陵)
건립시기 : 1036년
소재지 : 경기도 개성시
23. 문종(11대)의 능인 경릉(景陵)
건립시기 : 1083년
북한 보존급유적 제570호
24. 문종(11대)의 后인 인예왕후의 능인 대릉(戴陵)
건립시기 : 1092년
25. 순종(12대)과 선희왕후(순종 后)의 능인 성릉(成陵)
건립시기 : 1083년
소재지 : 경기도 개성시
북한 보존급유적 제568호
26. 선종(13대)과 사숙왕후(선종 后)의 능인 인릉(仁陵)
건립시기 : 1094년
소재지 : 경기도 개성시
27. 헌종(14대)의 능인 은릉(隱陵)
건립시기 : 1097년
위치 유실
28. 숙종(15대)의 능인 영릉(英陵)
건립시기 : 1105년
소재지 : 경기도 개성시
북한 보존급유적 제569호
29. 숙종(15대)의 后인 명의왕후의 능인 숭릉(崇陵)
건립시기 : 1112년
30. 예종(16대)의 능인 유릉(裕陵)
건립시기 : 1122년
소재지 : 개풍군 청교면
31. 예종(16대)의 后인 경화왕후의 능인 자릉(慈陵)
건립시기 : 1109년
소재지 : 개풍군 청교면
32. 예종(16대)의 后인 순덕왕후의 능인 수릉(綏陵)
건립시기 : 1118년
소재지 : 개풍군 청교면
33. 인종(17대)의 능인 장릉(長陵)
건립시기 : 1146년
소재지 : 개풍군 청교면 장릉리
34. 인종(17대)의 后인 공예왕후의 능인 순릉(純陵)
건립시기 : 1183년
소재지 : 개풍군 청교면 장릉리
35. 의종(18대)과 장경왕후의 능인 희릉(禧陵)
건립시기 : 1175년
위치 유실
36. 명종(19대)과 의정왕후의 능인 지릉(智陵)
건립시기 : 1202년
소재지 : 황해북도 장풍군
37. 신종(20대)의 능인 양릉(陽陵)
건립시기 : 1204년
소재지 : 개풍군 청교면 양릉리
38. 신종(20대)의 后인 선정왕후의 능인 진릉(眞陵)
건립시기 : 1222년
39. 희종(21대)의 능인 석릉(碩陵)
건립시기 : 1237년
소재지 : 인천 강화군 양도면 길정리 산 182
대한민국 사적 제369호
40. 희종(21대)의 后인 성평왕후의 능인 소릉(紹陵)
건립시기 : 1247년
소재지 : 강화도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위치는 미상
41. 강종(22대)의 능인 후릉(厚陵)
건립시기 : 1213년
소재지 : 개풍군 영남면
42. 강종(22대)의 后인 원덕왕후의 능인 곤릉(坤陵)
건립시기 : 1239년
소재지 : 인천 강화군 양도면 길정리 산 75
대한민국 사적 제371호
43. 고종(23대)의 능인 홍릉(洪陵)
건립시기 : 1259년
소재지 : 인천 강화군 강화읍 국화리 산 180
대한민국 사적 제224호
44. 元宗(24대 )의 능인 소릉(韶陵)
건립시기 : 1274년
소재지 : 개성 룡흥리 내동
북한 보존급유적 제562호
45. 元宗(24대 )의 后인 정순왕후의 능인 가릉(嘉陵)
건립시기 : 1237년
소재지 : 인천 강화군 양도면 능내리 산 16-1
대한민국 사적 제370호
46. 제25대 충렬왕(忠烈王)의 능인 경릉(慶陵)
건립시기 : 1308년
소재지 : 개성 고릉동
47. 제25대 충렬왕(忠烈王)의 后인 장목왕후의 능인 고릉(高陵)
건립시기 : 1297년
소재지 : 개성 고릉동
48. 제26대 충선왕(忠宣王)의 능인 덕릉(德陵)
건립시기 : 1325년
49. 제27대 충숙왕(忠肅王)의 능인 의릉(毅陵)
건립시기 : 1339년
50. 제27대 충숙왕(忠肅王)의 后인 공원왕후의 능인 영릉(令陵)
건립시기 : 1380년
51. 제28대 충혜왕(忠惠王)의 능인 영릉(永陵)
건립시기 : 1344년
52. 제28대 충혜왕(忠惠王)의 정비인 덕녕공주의 능인 경릉(頃陵)
건립시기 : 1375년
53. 제29대 충목왕(忠穆王)의 능인 명릉(明陵)
건립시기 : 1349년
소재지 : 개풍군 중서면 여릉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북한 보존급유적 제549호
54. 제30대 충정왕(忠定王)의 능인 총릉(聰陵)
건립시기 : 1352년
소재지 : 개풍군 청교면
55. 제31대 공민왕(恭愍王)의 능인 현릉(玄陵)
건립시기 : 1372년
소재지 : 개풍군 중서면 여릉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북한 국보 제123호
56. 제31대 공민왕(恭愍王)의 后인 노국공주의 능인 정릉(正陵)
건립시기 : 1365년
소재지 : 개풍군 중서면 여릉리
57. 제32대 우왕(禑王)
우왕과 창왕은 폐위되어 왕으로 인정받지도 못하고 조선왕조는 이들을 반역자로 간주했기 때문에 다른 왕릉들이 대부분 오랜 세월 동안 자연스럽게 위치가 유실된 것과 달리 의도적으로 매장지가 기록되지 않았다. 어쩌면 매장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서인으로 강등된 후 사사되었기 때문에 능호는 물론 시호, 묘호도 없다. 심지어 기록이 없어 능도 조성되었는지 알 수도 없다.
58. 제33대 창왕(昌王)
우왕과 창왕은 폐위되어 왕으로 인정받지도 못하고 조선왕조는 이들을 반역자로 간주했기 때문에 다른 왕릉들이 대부분 오랜 세월 동안 자연스럽게 위치가 유실된 것과 달리 의도적으로 매장지가 기록되지 않았다. 어쩌면 매장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서인으로 강등된 후 사사되었기 때문에 능호는 물론 시호, 묘호도 없다. 심지어 기록이 없어 능도 조성되었는지 알 수도 없다.
59. 제34대 공양왕(恭讓王)의 恭讓王陵
건립시기 : 미상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와 강원도 삼척시에 공양왕릉이 있다.
대한민국 사적 제191호
강원기념물 제71호
남한에는 고려 왕의 능이 3기(공양왕릉의 능을 2개로 간주할 경우 4기)가 있고, 고려 왕후의 능이 2기가 있다.
희종(21대)의 능인 석릉(碩陵)이 인천 강화군 양도면 길정리 산 182에, 고종(23대)의 능인 홍릉(洪陵)이 인천 강화군 강화읍 국화리 산 180에, 제34대 공양왕(恭讓王)의 恭讓王陵이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와 강원도 삼척시에 있다.
강종(22대)의 后인 원덕왕후의 능인 곤릉(坤陵)이 인천 강화군 양도면 길정리 산 75에, 元宗(24대)의 后인 정순왕후의 능인 가릉(嘉陵)이 인천 강화군 양도면 능내리 산 16-1에 있다.
개성시 내의 역사유적들과 함께 북한의 고려왕릉들도 201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강화 곤릉을 주제로 지은
화남 고재형의 시
고려 강종의 부인 원덕태후 유씨의 묘인
강화 곤릉
강화 곤릉(江華 坤陵)
면적 1,091m2
강화 곤릉(江華 坤陵)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에 있는 고려 강종의 부인 원덕태후 유씨의 무덤이다. 1992년 3월 10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370호 곤릉으로 지정되었으나, 2011년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개요
원덕태후는 고종의 어머니로 강종 1년(1212)에 왕비가 되고 연덕궁주라 하였다. 뒷날 원덕태후는 추대되고 1253년에 정강의 시호가 더해졌는데, 언제 사망하였는 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석물은 없어졌고 봉분과 무덤을 둘러싼 담도 무너졌던 것을 1974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손질하여 고쳤다.
사적 승격 사유
이 유적들은 고려시대 왕릉 또는 왕비릉으로서 묘제상으로는 지정가치가 없으나, 역사성이 인정되고, 고려 공양왕 고릉(사적 제191호)과 고려 고종 홍릉(사적 제224호)이 이미 사적으로 지정된 바 있으므로 경기도 지정문화재(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 것을 국가지정문화재인 사적으로 승격 지정
고려 강종의 부인 원덕태후 유씨의 묘인
강화 곤릉에 관한
안내문
고려 강종의 부인 원덕태후 유씨의 묘인
강화 곤릉
고려 강종의 부인 원덕태후 유씨의 묘인
강화 곤릉
[강화 곤릉~강화 석릉] 구간
탐방로 도중의
이정표
[강화 곤릉~강화 석릉] 구간
탐방로 도중의
어두 고인돌
강화 석릉을 주제로 지은
화남 고재형의 시
고려 희종(재위 1204∼1211)의 묘인
강화 석릉
강화 석릉(江華 碩陵)
주소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 길정리 산182
강화 석릉(江華 碩陵)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에 있는, 고려 희종(재위 1204∼1211)의 무덤이다. 1992년 3월 10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370호 석릉으로 지정되었으나, 2011년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개요
희종(熙宗)은 신종의 첫째 아들로 어머니는 정선태후 김씨이며, 부인은 성평왕후 왕씨이다. 1204년 왕위에 올랐고, 최충헌을 제거하려다 실패하여 희종 7년(1211)에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 강화 교동으로 갔다. 고종 24년(1237) 57세의 나이로 죽자 낙진궁으로 옮겼으며, 10월에 덕정산 남쪽에서 장례를 지내고 석릉이라 하였다.
조선 현종 때 강화유수 조복양이 찾아내어 다시 무덤을 쌓았는데, 그 뒤 석물도 부서지고 무너진 무덤을 1974년 손질하여 고쳤다. 석릉 주변에는 최근에 고려시대 귀족의 무덤이라 생각되는 돌방무덤(석실분)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사적 승격사유
이 유적은 고려시대 왕릉 또는 왕비릉으로서 묘제상으로는 지정가치가 없으나, 역사성이 인정되고, 고려 공양왕 고릉(사적 제191호)과 고려 고종홍릉(사적 제224호)이 이미 사적으로 지정된 바 있으므로 경기도 지정문화재(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 것을 국가지정문화재인 사적으로 승격 지정
강화 석릉에 관한
안내문
고려 희종(재위 1204∼1211)의 묘인
강화 석릉
고려 희종(재위 1204∼1211)의 묘인
강화 석릉
[강화 석릉~강화 가릉] 구간
인천가톨릭대학교 강화캠퍼스 옆 숲길
[강화 석릉~강화 가릉] 구간
인천가톨릭대학교 강화캠퍼스 옆 숲길
[강화 석릉~강화 가릉] 구간
탐방로 도중의
진강정
고려 원종(재위 1259∼1274)의 왕비
순경태후의
능(陵)인
강화 가릉
강화 가릉(江華 嘉陵)
주소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 능내리 산16-2번지
강화 가릉(江華 嘉陵)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에 위치한 고려 원종(재위 1259∼1274)의 왕비 순경태후의 능(陵)이다. 1992년 3월 10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370호 가릉으로 지정되었으나, 2011년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개요
순경태후는 장익공 김약선의 딸로서 고종 22년(1235) 원종이 태자가 되자 태자비인 경목현비가 되었으며, 다음해에 충렬왕을 낳았다. 지금의 자리에는 고종 31년(1244)경 사망한 뒤 모신 것으로 짐작한다. 고려 원종 3년(1262) 정순왕후로 추대되고 충렬왕이 즉위(1274)하여 순경태후로 높여졌다.
무덤 주변의 석물은 부서져 없어졌고, 봉분도 무너진 것을 1974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손질하여 고쳤다.
사적 승격사유
이 유적은 고려시대 왕릉 또는 왕비릉으로서 묘제상으로는 지정가치가 없으나, 역사성이 인정되고, 고려 공양왕 고릉(사적 제191호)과 고려 고종홍릉(사적 제224호)이 이미 사적으로 지정된 바 있으므로 경기도 지정문화재(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 것을 국가지정문화재인 사적으로 승격 지정]
강화 가릉에 관한
안내문
고려 원종(재위 1259∼1274)의 왕비
순경태후의
능(陵)인
강화 가릉
[강화 가릉~탑재 버스 정류장] 구간
탐방로에서 바라본
진강산
강화 나들길 제3코스(고려왕릉 가는 길)의 종점에 있는
완주 표지목
강화도의 화도공용버스터미널 정류장에서
롯데몰.김포공항역 정류장으로 이동할 때 탔던
60-5번 버스의
운행 노선도
2023년12월10일(일요일) 강화 나들길 제3코스(고려왕릉 가는 길) 탐방기 탐방지 : 강화 나들길 제3코스(고려왕릉 가는 길) [강화 나들길 제3코스(고려왕릉 가는 길) : 온수 공영주차장~(0.2km)~전등사~(km)~성공회 온수성당~(2.4km)~갈정 저수지~(2.9km)~이규보 묘~(3.8km)~곤릉~(1.9km)~석릉~(5km)~가릉 [탐방거리 : 16.2km, 소요시간 : 5시간30분] 제3코스 명소 전등사 전등사는 현존하는 한국 사찰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졌으며 부처님의 가피로 나라를 지킨 호국불교 근본도량으로 역사와 권위를 간직한 사찰이다. 삼랑성은 단군의 세 아들이 쌓은 고대의 토성이었고, 삼국시대에는 토성 자리에 석성을 쌓아올려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전등사에는 대웅보전, 약사전, 범종 등 보물급 유적을 비롯하여 많은 문화 유적을 간직하고 있다. 대웅전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나부상은 벌거벗은 여인을 묘사하고 있어, 대웅전 중수를 맡은 도편수가 달아난 여인에 대한 배신감으로 조각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온수리 성공회성당 한국의 전통적인 건축기법에 서양 그리스도교 교회 양식을 적용한 동서 절충식의 목조건물이다. 1906년 영국인 주교 트롤로프(Mark Napier Trollope)가 세웠으며, 성 안드레 성당으로도 불린다. 본당과 종을 달아놓은 2층 문루로 이루어져 있는데, 본당은 정면 9칸 측면 3칸의 규모이다. 용마루 양끝에 십자가를 장식해 놓았으며, 종루에는 본래 서양식 종이 달려 있었으나 1945년 일제에 징발당한 뒤 1989년 새로 우리나라 전통양식의 종을 제작하여 걸었다. 이규보 묘 명조 때 문과에 급제했으나 이듬해 부친이 작고하자 천마산으로 들어가 호를 백운거사라 하고 글을 쓰며 지냈다. 그는 그곳에서 ‘천마산지’ 등을 썼는데 특히 영웅 서사시 ‘동명왕 편’은 민족의 영웅 동명왕의 생애와 발자취를 노래한 서사시로서 우리 문학사에 남긴 큰 업적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고려의 이태백’이라고 불렸다. 고려 왕릉 현재 강화도에 남아 있는 고려의 능은 석릉, 곤릉, 홍릉, 가릉의 4기뿐인데 규모는 아주 작고 봉분과 망주석과 혼유석 정도의 시설 밖에 없으며 호석과 난간석을 갖춘 전형적인 왕릉 구조는 찾아볼 수가 없다.] 탐방코스 : [ 전등사 동문 버스 정류장~(564m)~삼랑성 동문~(731m)~전등사~(0.6km)~삼랑성 서문~(0.5km)~정족산 정상(삼랑성 정상)~(0.2km)~삼랑성 북문~(150m)~정족산 사고~(150m)~전등사~(0.3km)~삼랑성 남문~(1.7km)~대한성공회 온수리성당~(0.5km)~고택 우일각~(1.1km)~청송국수~(2.2km)~길정 저수지~(2.9km)~이규보 묘~(3.8km)~강화 곤릉~(1.9km)~강화 석릉~(5km)~강화 가릉~(0.8km)~탑재 버스 정류장 ] [탐방거리 : 23.1km] 탐방일 : 2023년 12월 10일(일요일) 날씨 : 청명한 날씨 [강화군 길상면 : 최저기온 2도C, 최고기온 12도C]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6시간57분 소요) 07:14~07:47 구산역에서 6호선 지하철을 타고 디지털미디어시티역으로 가서 공항철도 전철로 환승하여 김포공항역 3번 출구로 나옴 [33분 소요] 07:47~07:56 롯데몰.김포공항역 정류장으로 도보로 이동한 후 전등사 동문 정류장으로 가는 60-5번 버스 승차를 대기 07:56~09:20 60-5번 버스를 타고 롯데몰.김포공항역 정류장에서 전등사 동문 정류장으로 이동 [1시간24분 소요, 21개 정류장 이동] 09:20~09:32 전등사 동문 버스 정류장에서 탐방 출발하여 인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산 41-3 번지에 있는 강화 삼랑성(江華 三郞城) 동문으로 이동 [강화 삼랑성(江華 三郞城)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에 있는 연대 미상의 산성. 1964년 6월 10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산41번지 1964년 6월 10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넓이 24만 5997㎡, 둘레 약 1km이다. 성의 축조 연대에 대한 확실한 기록은 없지만 다만 단군(檀君)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전설로 그 이름을 삼랑산성(三郞山城) 혹은 정족산성(鼎足山城)이라고도 한다. 성곽의 축성 구조를 보면 잡석(雜石)으로 축조되어 삼국시대 석성구조(石城構造)를 보여 주고 있으며 고려시대에 보수(補修), 조선시대에 중수(重修)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문은 네 곳에 있으며 문루(門樓)는 남문에만 있어서 종해루(宗海樓)라 하였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이 소장된 마니산의 사고(史庫)가 옮겨와 보존되었었다. 그리고 성내에는 유명한 전등사(傳燈寺)가 있으며, 병인양요(丙寅洋擾) 당시에 프랑스군에 승리한 기념비로서 양헌수 승전비(梁憲洙勝戰碑)가 서 있다. 이러한 삼랑성은 특히 마니산 전설과 더불어 단군신화와 관련되는 흥미있는 성이라고 할 수 있다.] 09:32~09:37 인천 강화군 길상면 전등사로 37-41 번지에 있는 전등사(傳燈寺)로 이동 [강화도 남부 정족산 정족산성(삼랑성) 안에 있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로, 대웅전, 약사전, 범종 등 대한민국의 보물이 있고,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정족사고가 경내에 있다. 고구려 소수림왕 때 건축되었다가 고려 시대를 거치며 증축과 개축을 이어오다 광해군 때 화재로 인한 소실로 다시 재건되었다. 창건될 때는 진종사였으나 후에 전등사로 바뀌었다. 전등사로 들어가는 입구는 동문과 남문 두 곳이 있다. 동문에는 전등사가 호국불교의 진원지임을 증명하는 양헌수승전비가 있다. 병인양요 때 전략적 요충지였던 전등사에 쳐들어온 프랑스군을 물리치고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양헌수 장군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고종 10년인 1873년에 건립한 것이다. 남문에서 종해루를 지나 대조루로 가는 길에는 커다란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는데 700년이 넘은 보호수들로 노승나무, 동승나무로 불린다. 또한 경내에 현대식으로 지은 법당 무설전과 서운갤러리가 있으며, 갤러리에서는 불교미술전이 상시 운영되고 있다. 체험 프로그램으로는 템플스테이가 준비되어 있다. 체험형과 휴식형으로 나누어져 있고, 체험형은 첫날 오후 1시에 시작하며, 사찰 예절, 공양, 108배, 좌선에 이어, 다음날 예불과 스님과의 차담으로 이루어지며 점심 공양 후 끝난다. 이에 비해 휴식형은 첫날 12시에 시작해 사찰 예절, 범종 타종, 예불에 이어 이튿날 예불, 울력(일을 돕는 것), 점심 공양 후 종료한다. 전등사 입장요금 : 무료] 09:37~09:50 전등사를 탐방 09:50~09:56 삼랑성(三郞城) 서문으로 이동 09:56~10:06 정족산(鼎足山, 220m) 정상으로 이동 [정족산 정상이 삼랑성 정상이기도 하다.] [정족산(鼎足山) :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에 있는 산. 높이 : 220m 문화재 : 전등산 약사전(보물 179호), 전등사 대웅전(보물 178호), 삼랑성(사적 135호), 전등사 대조루(시지정 문화재 7호) 마리산(469m) 줄기가 서쪽으로 뻗어 생긴 높이 220m의 산이다. 생김새가 마치 세 발 달린 가마솥과 같다 해서 이름을 정족산(鼎足山)이라 하였다. 그리 높지는 않지만 전등사와 강화 삼랑성(정족산성) 등 많은 유적을 간직하고 있다. 정족산성이라고도 하는 삼랑성은 사적 제130호로, 단군이 세 아들을 시켜 쌓았다고 하는 석성이다. 남문루와 동문·서문·북문 터가 남아 있고 성 안에 고구려 시대에 창건된 전등사가 있다. 산행은 전등사를 기점으로 시작한다. 전등사 요사채를 돌아 오른쪽으로 난 길이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사고터로 가는 길이며, 곧바로 올라가면 산 정상에 이르는 길이다. 정상에 오르면 노송과 나무숲에 둘러싸인 전등사 부근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고 서쪽으로 마리산, 남쪽으로 인천 앞바다의 섬들이 보인다. 산행 시간은 왕복 2시간 정도 걸린다.] 10:06~10:10 사진촬영 10:10~10:13 삼랑성(三郞城) 북문으로 이동 10:13~10:16 정족산 사고(鼎足山史庫)로 이동 [정족산사고(鼎足山史庫) 조선왕조 실록 및 정부문서의 보관소. 소재지 : 인천 강화군 길상면 정족산성 내 전등사 부근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정족산성 내부의 전등사(傳燈寺) 서쪽에 있었으며, 실록의 보관이 중심 업무였다. 강화도에 사고가 운영되기 시작한 것은 1595년(선조 28)이었다. 임진왜란으로 춘추관(春秋館)과 충주(忠州) ·성주(星州)의 사고가 불타고 유일하게 남은 전주(全州)사고의 실록이 해주(海州)를 거쳐 강화부 관아 건물에 보관되었던 것이다. 그 후 그것은 다시 영변의 보현사(普賢寺)와 객사(客舍)을 거쳐 1603년 새로 설치된 강화도 마리산(摩利山) 사고에 옮겨져 복간되었다. 정족산사고는 1653년(효종 4) 마리산 사고에 화재가 일어남으로써 건립이 추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효종대 이후로 강화도가 국가의 위기에 대처할 기지로 적극 개발되었으므로 그 곳에 사고를 둘 필요성이 더욱 커졌다. 1660년(현종 1) 정족산성이 완성되고 실록을 성 내의 사고로 옮기라는 명령이 내려졌을 때 관례대로 장사각(藏史閣)과 함께 선원각(璿源閣)이 세워졌다. 그러나 실제로 이 사고로 실록이 옮겨진 것은 1678년(숙종 4)이었다. 이후 실록이 새로 만들어지는 대로 1부씩 보관하였고 그 밖에 왕실 족보나 의궤(儀軌)를 비롯한 여러 정부문서를 함께 보관하였다. 춘추관에 소속되어 그 곳에서 관장하였으나 현지의 관리는 수호사찰인 전등사에서 맡았다. 정조대에 강화부 관아 위쪽에 외규장각(外奎章閣)이 설치되어 국왕의 초상화나 친필 외에 많은 서책이 보관되었지만, 이 사고는 그것과 별개로 계속 운영되었으며 외규장각과 달리 병인양요 때 피해를 입지 않았다. 1910년 이후 보관 서적들은 규장각 도서들과 함께 조선총독부 학무과 분실로 모여져 함께 관리되었고 지금의 서울대학 규장각도서로 이어졌다. 원래의 건물은 1930년경에 없어진 것으로 보이며, 장사각과 선원각의 현판만이 전등사에 보관되어 있다.] 10:16~10:21 사진촬영 10:21~10:23 전등사(傳燈寺)로 회귀 10:23~10:30 삼랑성(三郞城) 남문으로 이동 10:30~10:32 사진촬영 10:32~10:52 금풍양조장을 지나서 인천 강화군 길상면 온수길38번길 14 번지에 있는 대한성공회 온수리성당으로 이동 [금풍 양조장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에 있는 금풍 양조장은 1931년 처음 오픈한 이래 양환탁 – 양재형 – 양태석으로 3대에 걸쳐 이어지고 있다. 주말 기준 하루 150명 이상의 사람들이 이곳을 보기 위해 강화를 찾는다. 금풍 양조장은 100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났음에도 건축 당시의 원형을 대체로 유지하고 있고, 개항기 이후 강화도 지역의 산업화(양조산업) 과정과 변화·발전상을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 가치가 인정돼 2022년 10월 04일 인천광역시 등록문화재에 등재되었다. 금풍 양조장과 불과 500m 떨어진 곳에 자리 잡은 온수리의 또 다른 명소, 전등사에서도 금풍 양조장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전등사에는 종류별로 다양한 장이 담긴 장독대가 줄지어 있는데, 그 중 커다란 항아리들은 원래 금풍 양조장에서 술을 담그던 항아리라고 한다. 금풍 양조장은 양태석 대표가 가업을 이어 나가기 전 10년 정도 술을 만들지 못하는 상황이 돼 다른 사업자에게 양조장 임대를 했던 적이 있다. 술 항아리를 사용해 술을 빚던 양 대표의 아버지와 다르게 새로운 사업자는 다른 방식을 선택했고, 그동안 사용했던 술 항아리는 2층에 고스란히 쌓여 있었다. 오랜 시간을 간직한 술 항아리에 먼지가 쌓이는 것이 안타까웠던 전등사 측은 술 항아리에 장을 담가 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해 금풍 양조장은 전등사에 술 항아리를 기증하게 되었다고 한다. 2020년 양태석 대표가 금풍양조장에 돌아와 가업을 이어 나가게 되자, 전등사에서는 빌려 갔던 술 항아리의 일부를 다시 돌려주었다. 이에 대해 양태석 대표는 “그간 전등사에서 항아리를 품어 주셨기 때문에 온전히 양조장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된 거 같아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양 대표는 전등사 측에서 항아리를 보존해 주지 않았다면 오랜 시간 방치되어 폐기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금풍막걸리는 국산 농산물인 강화도 쌀을 가지고 만들어진 지역특산주라 온라인으로 판매가 가능하다고 한다. 그런데 사실 막걸리는 깔끔하게 소비자에게 배송되기 쉽지 않은 품목이다. “막걸리를 사서 집에 갔을 때 막걸리 양이 줄었던 적 없으신가요?” 탄산이 있는 막걸리는 안에 있는 탄산이 기압차로 술을 밀어내는 효과가 있어 약간 샌 것처럼 느껴지곤 한다. 양 대표는 탄산이 있는 막걸리는 유통 과정에서 깔끔하고 세련되게 보내기는 어렵다고 생각해 처음 밀봉됐던 상태와 제일 유사하게 유통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심했다고 한다. 그 결과 탄산을 배제하고 고소한 맛을 최대한 살린 무탄산 막걸리를 선택했다. 막걸리의 주원료는 쌀이다. 한 달에 2000병 가까이 막걸리를 생산하다 보면 그만큼 많은 쌀을 소비하게 되고 그 쌀을 담았던 포대는 버려지게 된다. 이를 활용할 순 없을까 고민하던 양 대표는 그대로 버려지면 쓰레기로 전락할 쌀포대를 깨끗하게 씻고 재디자인해 막걸리 파우치로 활용하는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고 한다. 발상의 전환을 통해 만들어진 이색 포장지 ‘쌀포대’는 선물용으로도 인기가 많고 구입하는 손님들도 즐거워한다고 한다. 금풍 양조장에서는 나만의 막걸리를 만들어 볼 수도 있다. 밑술과 덧술의 과정을 거치는 막걸리는 한 병을 마시기 위해 약 2주간의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막걸리 체험을 진행하는 소믈리에님도 막걸리는 사 먹는 걸 추천할 정도로 막걸리 제조는 공이 많이 든다. 밑술 : 고두밥 + 누룩 15분간 치대기 덧술 - 밑술 작업을 마친 막걸리 10일간 매일 하루 두 번 저어주기 - 3일차 새로운 고두밥을 쪄내어 밑술 막걸리와 섞기 - 10일차 걸쭉해진 막걸리를 면보자기에 걸러 맑은 막걸리만 병입 막걸리 만들기 체험이 끝날 무렵, 양조장 앞에서 찍었던 사진은 막걸리 라벨에 깜짝 선물처럼 들어가 있다. 양 대표는 체험을 신청한 손님에 한해 양조장에서 보냈던 시간을 소중히 기억할 수 있도록 기념품으로 만들어 선물한다고 한다. 100년의 시간을 보낸 건축물 앞에서 찍은 흑백사진은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뉴트로' 감성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금풍양조는 할아버님이 1969년 금풍양조장을 인수하여 새롭게 양조를 시작한 해를 기념하기 위해 알콜도수를 6.9도로 한다.] [대한성공회 온수리 성당 성공회 3대주교 트롤로프 신부에 의해 1906년에 건축 한국 땅에 성공회가 들어온 것은 천주교가 100년의 박해를 받은 후 개항과 함께 막 선교의 자유가 주어지기 시작하던 때이다. 당시 조선에서는 외국인 선교사들의 거주 및 여행지역을 법으로 제한하였는데, 서울 중심 100리 안에서만큼은 여행 허가증(호조)없이 자유롭게 여행하면서 교역과 그와 관련된 목적으로 토지를 사거나 건물을 지을 수 있었다. 영국이 강화도를 선교의 거점으로 삼았던 동기는 강화도가 영국 성공회의 뿌리가 되었던 영국 북부 스코틀랜드 서안에 있는 ‘아이오나(Iona)섬’과 유사한 입지인데다 병인·신미양요를 경험한 강화도민들이 프랑스나 미국에는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으나, 수군양성을 위해 강화도에 들어갔었던 영국인들에 대해서는 비교적 우호적이었던 점이 크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강화도는 유배지로 역사적으로 많은 소외와 압박을 받았고, 그전까지는 교회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지역으로 파악되었다. 신도들 스스로 땅을 헌납하고 자금을 마련해 건축 강화도에 지어진 대한 성공회의 두 번째 성당인 온수리 성당(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52호)은 강화읍 길상면 온수리 정족산 자락의 야트막한 언덕에 위치하여 눈앞에는 초지(草芝)들판이 펼쳐지고 염하 물줄기와 서해 바다가 눈에 들어온다. 이 성당은 강화읍의 강화성당(1900, 사적424호)과 달리 선교본부의 지원이나 선교사들의 주도로 지어진 것이 아니라 신도들 스스로가 땅을 헌납하고, 자금을 마련하고 스스로의 노력봉사로 지은 성당이다. 나중에 성공회 3대주교가 된 트롤로프(Mark Napier Trollope) 신부에 의해 1906년에 건축되었다. 강화읍 성당과 유사하게 외삼문형식의 종루를 통해 진입하나 당시 무덤이 많았던 주변의 대지조건 때문에 종루와 성당, 그리고 사제관이 일직선 축이 아니다. 온수리 성당의 정문은 정면 3칸 측면 1칸이며, 가운데 지붕은 우진각으로 처리하여 조선 시대 성곽의 망루 같은 분위기를 담고 있다. 실제로 솟을지붕 아래 종을 매달고 사방으로 벽을 터서 종 소리가 퍼져나가게 꾸몄다. 정문을 들어서면 정문과 직각 축으로 바로 만나는 온수리 성당은 정면3칸, 측면 9칸, 도합 27칸 되는 단층 팔작지붕의 일자형(一字型) 전통 한옥이다. 지붕 용마루 양쪽의 십자가 장식과 지붕 양쪽 끝 합각 벽면에 벽돌로 새긴 십자 장식을 빼놓으면 향교나 관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건물 형태다. 내부는 강화성당과 마찬가지로 '바실리카' 양식으로 열두 사도를 상징하는 열두 개 기둥으로 지성소와 회중석을 구분하고 있다. 그러나 강화성당의 구조와 달리 회중석 가운데 복도가 남녀석을 구분하고, 후진이나 고창(Clear story) 같은 전형적인 바실리카 양식은 생략되었다. 성당과 거의 돌아앉은 사제관(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1호)은 트롤로프신부가 1896년 강화도에 부임하여 선교를 시작하면서 2년 후인 1898년에 건축한 건물이다. 이후 사제관이 퇴락하자 1933년 원형 그대로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사제관은 영국 성공회가 선교를 시작하면서 영국인 사제가 한국 전통 주거문화 속에 어떻게 적응하여 왔는가를 짐작하게 할 수 있는 주거공간이다. 'ㄷ'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한편 한옥성당 옆에는 2004년에 축성된 새 성당이 있다.] 10:52~11:10 대한성공회 온수리성당을 탐방 11:10~11:17 인천 강화군 길상면 온수길 74 번지에 있는 고택인 우일각(羽日閣)으로 이동 [미스터 썬사인의 촬영지이기도 한 우일각! 소재지 : 인천 강화군 길상면 온수길 74 2,500여평의 대지 위에 지어진 99간의 잘 보존된 보기 드문 한옥 저택인 우일각은 지금도 각종 드라마나 영화 촬영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곳이다. 우일각의 역사 1925년 : 강화도의 거부였던 김영각이 우일각 건축 1998년 ~ 2004년 : (주)니코 우일각 매입 및 테마파크와 연꽃 단지 조성을 위한 주변 토지 매입 2002년 : 우일각 전면 복원 및 개보수 2004년 : 우일각 알콜 도색, 주변 제초작업, 화단공사, 후원 징검다리 보수, 문화재관리청 다도 행사, (주)내셔널트러스트 매화마름 관찰행사, 가양주 발표회 2006년 : 우일각 화재 (행랑채 전소 및 문간채 일부 소실) 2007년 : 박리 작업, 도배, 사고석 매입, 연꽃단지 조성 시작 2008년 : CCTV 설치 2009년 : 연잎차 생산, 연꽃 분양 2011년 : 행랑채 철거, 문간채 복원 및 보수, 수중모터 교체 2013년 : KBS2 TV 드라마 '감격시대' 촬영(명월관이라는 기생집으로 사용되었음) 2014년 : 주차장 및 마당 콘크리트 공사, 대문 밖 보도 사고석 매립, 솟을 삼문 앞 조경, 보현선행회 '작은 음악회' 염춘숙의 춤 '갑비고차의 화접' 공연 2015년 : 우일각 둘레 산책로 조성, 소나무 밭 이전 KBS1 TV 드라마 '우리집 꿀단지' 영화 '해어화' 촬영 [우일각의 정자인 상지정은 1943년 마지막 기생의 숨겨진 이야기를 다룬 영화 [해어화](한효주와 천우희가 출연)에서 조선의 마지막 기생들이 모여 수업을 받던 장소로 제공 되기도 했다.] 2016년 : 연못 조경 공사 영화 '대장 김창수' 촬영 2017년 : tvN 드라마 '크로스' 2018년 :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촬영 [애신이 미 영사관에 총 갖다 놓고 넘는 영사관 담장 씬도 우일각에서 찍은 한 컷이었다.] KBS2 TV 드라마 '슈츠' 촬영 SBS 드라마 '사의찬미' 촬영 강화도의 대지주가 건립한 99칸 규모의 근대한옥 우일각(羽日閣)은 그간 일반에게는 공개되지 않은 집이다. 일제시대에 지어진 근대한옥으로, 99칸의 규모가 그대로 보존돼 있으며, 한옥의 변화 양식을 살필 수 있는 집이다. 솟을삼문 옆에 늘어선 대문채와 복도를 통해 안채와 사랑채의 채나눔을 한 본채, 사랑채 복도를 통해 이어지는 별채 등 규모도 규모려니와 공간구성 양식도 특이하다. 팔려고 내놓은 집을 구입해 보수 및 복원 강화도의 길상면에는 삼랑성 외에도 여러 유적이 남아 있다. 전등사를 비롯해 한옥의 전통양식으로 지은 성공회 성당과 사제관도 남아 있고, 조선시대 방어를 위해 쌓았던 초지진(草芝鎭)도 남아 있다. 또 병인양요때 프랑스군을 물리친 양헌수(梁憲洙) 장군의 전승비도 있는가 하면 고려시대 대문장가인 이규보(李奎報)의 묘도 있다. 길상면에서도 온수리(溫水里)는 그 지명처럼 따뜻한 물이 나온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곳 온수리에 일제 때 건축한 99칸 대규모 저택이 있다. 우일각은 일제시대에 강화도의 거부였던 김영각이 지은 조선 전통양식의 기와집으로 우리나라에서 다섯 채 밖에 남지 않은 99간 민간 가옥 중 하나이다. 당초 지었던 원형 거의 그대로의 상태로 보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집을 지은 원형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 경우는 안동과 봉화, 영주 등 경북지방과 녹우당 등 호남 일부지역뿐이다. 이 집을 관리하는 이의 설명에 따르면 당초 이 집은 주인의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집을 팔기 위해 매물로 내어놓았다. 이 땅을 사려던 이는 넓은 땅을 활용해 아파트나 연립주택을 지으려고 했다. 이를 알게 된 한 기업체의 경영자가 우리 전통가옥을 보존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이를 사들여 보수하고 복원해 오늘에 이르렀다. 이 집과 관련된 몇몇 기록을 살펴보면 강화도에는 99칸 규모의 집이 모두 3채였다고 한다. 그중 지금까지 남은 집은 이 집이 유일하다는 것이다. 이 집을 구입한 업체관계자에 따르면 집을 구입한 이후 그간 40억원을 들여 이 집을 보수 및 복원했다. 지금도 이 집을 유지 관리하는데 매년 2억원 가량이 들어간다. 우일각이 당초 지어진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은 이처럼 집을 구입한 이의 노력덕분에 가능한 일이다. 이 집을 구입한 이후 업체측에서는 전통가옥을 테마로 한 파크설립 구상도 했다. 한동안은 체험숙박도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은 당초의 계획이 실현되고 있지는 않은 듯하다. 이 집은 그간 일반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집이다. 취재하는 입장에서도 우선 문화재를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강화도에서 이 집의 존재를 거의 알지 못했다. 시청을 통해 집의 존재를 알게 된 이후에도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근대가옥이라는 점에서 중요성을 높게 두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집을 둘러보면서 이런 생각은 사라졌다. 일제 강점기때 지어진 근대건축으로서 우일각이 지니는 의미는 결코 적지 않다. 당시 전통한옥의 변화과정을 볼 수 있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실용적인 면이 가미된 건축양식을 살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이미 윤보선 대통령 가옥이나 가회동 등의 한옥에서도 나타나는 것으로, 전통적인 한옥구조에서 양식(洋式)의 실용성이 가미된 형태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전통가옥을 취재하는 입장에서 보자면 이는 실로 절묘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전통적인 양식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여기에 실용적인 면을 덧붙였기 때문이다. 일제 감점기 중기 이전까지의 전통가옥들은 기본적으로 우리네 한옥의 기본양식을 따르고 있는 반면, 후기의 전통가옥들은 좁은 중정을 중심으로 한 일본적인 양식이 많이 가미되고 있다. 집을 지은 강화 거부와 관련된 이야기들 우일각을 지은 이는 김영백(金永伯)이다. 그와 관련된 자료는 ‘강화도 남부의 토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거부’라는 것 외에는 거의 나와 있지 않다. 다만 1924년 8월에 발행된 잡지 ‘개벽’과 1998년 1월25일자 조선일보 ‘이규태 코너’에 그에 관한 언급이 나와 있다. 그 내용을 잠시 살펴보자. 먼저 ‘개벽’에 나온 내용은 ‘을인(乙人)’이라는 필자가 강화도를 답사한 내용을 기록한 ‘강도답사기(江都踏査記)’에 나온 것이다. ‘강도’란 강화도의 옛 지명이다. 여기에는 강화도의 특성이나 산업, 그리고 손돌목 등 강화도의 내력과 관련된 이런저런 이야기와 함께 강화의 2대 명물을 소개하고 있다. ‘군내에서 600석 이상 추수하는 부자가 50여호나 되어도 사회사업이라면 모두 머리를 흔드는데 그들 중에서도 길상면 김영백군 부부가 보통학교 건축비로 3630원을 희사했다’는 내용이 명물 중 하나로 소개돼 있다. 이로 미루어보면 당시 김영백이라는 인물이 강화도내에서 상당한 거부로 인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규태 코너에 소개된 이야기는 김영백이라는 인물이 어떻게 거부가 됐는 지와 관련된 내용이다. 이야기인 즉슨 이렇다. “강화 길상면 온수리에 아흔아홉칸짜리 기와집을 짓고 살았던 김영백이라는 거부가 있었다. 한말까지 대대로 이곳에 움막을 짓고 살았던 그는 어느날 헛간을 짓고자 뒷 둔덕을 파내리다가 괭이끝에 쇠붙이가 닿는 소리를 들었다. 자그마한 녹슨 솥이 묻혀 있어 이를 파내 뚜껑을 열어보니 주먹만한 금덩이로 채워져 있었다. 이 횡재 소문을 듣고 강화유수가 불러 자초지종을 물어보고 방을 붙여 금괴를 묻은 장본인을 수소문했다. 그러나 주인이 나타나지 않아 김영백에게 불로소득의 10분의 1인 십일세만 물고 그 금덩이들을 차지하게 한다. 강화도는 고려시대 이래 국난이 있을 때마다 서울의 왕족이나 고관대작들의 피난지였다. 국난 중에 모아 두었던 금덩이를 갖고 강화에 피난온 누군가가 몰래 묻어 두었을 것이다. 피난온 상류층의 일가 전원이 몰살당한 사례가 적지 않았으며 금괴를 묻어둔 은밀한 장소가 소재불명된 경우가 비일비재했을 것이다. 그중 하나가 우연히 발견된 것으로 추정된 것이다.” 이 날짜 이규태 코너에는 이 이야기와 함께 당시 서울에서도 우연히 발견된 금덩이를 둔 실화가 적지 않다면서 ‘일사유사’에 나오는 서울 과부 김학성 모에 관한 이야기도 소개하고 있다. 이들 얘기를 미루어보면 당시 이같은 일이 드물게 있었던 듯하다. 이를 뒷받침하는 내용이 ‘경기도사 7권-일제강점기편’에도 나온다. 이책 제3장 제4절 ‘경기도민의 일상생활과 의식주’에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에 있는 농촌지주의 기와집이 소개되고 있다. 당시 이집에 대한 내용은 전통한옥 전문가인 김홍식 전 명지대 교수가 보고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 내용은 ‘1925년에 지어진 이 집은 전형적인 품(品)자 형을 지니고 있으며, 강화도 남부의 토지 대부분을 소유했던 대지주 김영백(1873~1928)이 자신의 부를 현실화시키면서 지어졌다. 그가 언제 이러한 토지를 보유하게 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원래 초가에 살던 김씨가 1924년 소문난 목수를 불러서 99칸에 이르는 대저택을 기와집으로 지었다’는 것이다. 별채 정자와 부엌마루 등 특이공간 눈길 이 집의 규모는 이미 높은 솟을대문을 중심으로 한 대문채에서부터 느껴진다. 솟을삼문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문간방들이 길게 이어진다. 문간마당을 사이에 두고 다시 안채 및 사랑채로 이어지는 중문과 담장이 있다. 이 집을 관리하는 분의 얘기에 따르면 당초 문간마당에도 행랑채가 있었다고 한다. 안채로 통하는 중문을 들어서면 안마당을 중심으로 ‘ㄷ’자 형의 몸채가 눈에 들어온다. 이 몸채는 안채와 사랑채가 함께 이루고 있는 건물로, 복도를 통해 채나눔을 하고 있다. 안채 대청을 중심으로 대청의 왼쪽 편인 안방과 부엌, 아랫방, 그리고 대청 오른쪽의 건넌방까지가 안채의 공간이다. 그리고 복도를 사이에 두고 오른쪽으로 사랑방과 누마루가 위치한 사랑채 공간이 자리잡았다. 이 집의 안채 대청은 삼겹형태에 정면 3칸 규모여서 매우 크다. 이 집을 조사했던 김홍식 교수도 ‘거의 홀에 가까운 큰 공간’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안채 대청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안방문이나 건넌방 문이 모두 들어열개로 돼 있는 점이다. 안채 공간에 들어열개를 설치한 경우는 전통민가에서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아마도 이것이 근대한옥이어서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안방도 기다란 형태로 매우 넓다. 안방 복도 끝에는 2층으로 된 깊숙한 수납공간이 있다. 대갓집답게 안방 부엌도 매우 넓은 공간이다. 특히 이곳 부엌 한쪽에는 넓은 마루공간이 설치돼 있다. 이런 형태의 부엌도 전통 사대부의 민가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아마도 많은 손님을 맞이할 때나 혹은 가족들이 많이 모이는 제사 등에 부엌에서 여러 사람이 함께 모여 미리 음식을 준비하기 위한 공간이 아닌가 싶다. 안채의 뒤뜰은 마당보다 높게 구성돼 있다. 경사진 지형의 형태를 그대로 살린 것으로 보이는데, 이곳에 별채형태의 정자가 서 있다. 특히 이 정자는 안채보다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서 정자로서의 성격을 충분히 살리고 있다. 또한 이 정자는 밖에서도 출입할 수 있지만, 사랑채 복도와도 연결돼 있어 사랑채로 찾아온 손님을 바로 정자로 안내할 수 있도록 돼 있는 구조다. 문간마당과 몸채를 나누는 각 담장마다에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한쪽 담장에 새겨진 글씨를 보면 ‘수(守)’, ‘신(信)’, ‘교(交)’, ‘붕(朋)’이다. ‘친구와의 사귐에 있어서는 신의를 지켜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을 터다. 비단 이 글자들뿐만 아니라 이곳 담장에는 교훈이 될 만한 글귀들이 안팎으로 쓰여 있다. 이 집의 안채 대청 퇴앞으로 비상 피난통로가 설치된 점도 눈길을 끈다. 사랑채 복도 밑으로 난 작은 통로를 통해 안마당에서 사랑채 뒤쪽 공간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돼 있다. 안채 부엌 뒤쪽으로는 커다란 장독대가 놓여 있고 그옆에 역시 커다란 우물이 있다. 우물 뚜껑을 열어보니 깊이가 꽤 깊다. 한 집안의 흥성과 쇠락이 함께 담긴 건물 한편 앞서 언급한 김홍식 교수의 조사자료에 따르면 1930년대 이후 이 집의 사랑채는 주로 소작을 관리하는 마름들의 사무실로 사용됐다고 한다. 이 집에서는 마름을 통한 토지경영을 했는데 수확한 작물을 집으로 가져오지 않고 마름이 직접 인천으로 가져가 거래를 한 후 현금으로 가져왔다는 것이다. 실제 이 집에는 다른 지방의 대농 지주처럼 곡식을 쌓아두기 위한 넓은 마당이 없다. 한편 이 집은 한때 문화재로 지정되기도 했지만, 문화재 지정에 따른 여러 제약요건 때문에 소유자 측에서 해제를 요구해 지금은 문화재로 지정돼 있지 않다. 그러나 인천시 측에서는 문화재급의 가치를 지닌 이 집의 보존과 활용을 위해 필요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밝히고 있다. 인터넷 블로그에는 50여년전 이 집에 묵었던 사람의 회고담이 소개돼 있다. 당시 그는 결혼하고 신혼여행을 이곳으로 왔는데, 홀로 살며 집을 지키던 여주인이 이 집을 숙박시설로 이용하고 있었다고 한다. 우일각에는 한 집안의 흥성과 쇠락의 역사가 함께 담긴 셈이다. 어쨌든 99칸 규모의 저택이 그 규모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는 점은 다행스럽다.] 11:17~11:35 인천 강화군 길상면 강화남로 100 번지에 있는 청송국수로 이동 11:35~12:04 청송국수 식당에서 떡만두국으로 점심식사 [식사비용 : 8천원] 12:04~12:18 인천 강화군 양도면 길정리 690-1 번지에 있는 길정 저수지로 이동 [길정저수지는 강화도 양도면에 위치한 497,000㎡ 규모의 저수지로, 수심이 깊어 항상 파란빛의 물을 만날 수 있는 넓은 저수지이다. 인천시는 2018년3월28일 길정저수지에서 인천 최초의 수상태양광발전소를 설치하고 준공식을 개최했다. 길정 저수지의 태양광발전소는 한국농어촌공사 강화지사가 13억원의 사업비를 투입해 길정저수지 유휴 수면에 설치했다. 발전소 시설용량은 500kW로, 연간 142가구(가구당 월 350kWh 기준)에 전기를 공급할 수 있는 600MWh의 전력을 생산한다. 이는 석유 연간 10만리터의 대체 효과를 가지며, 약 274톤의 이산화탄소(CO2) 절감을 기대할 수 있는 양이다.] 12:18~12:24 사진촬영 12:24~13:24 인천 강화군 길상면 까치골길 72-17 번지에 있는 이규보 묘로 이동 [이규보 묘(李奎報 墓) 면적 668.9m2 시대 고려시대 소유 여주이씨 문순공파 종중 주소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까치골길 72-17 (길직리) 이규보 묘(李奎報 墓)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길릭리에 있는 고려시대의 문신이자 문장가인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1168∼1241) 선생의 묘소이다. 1995년 3월 2일 인천광역시의 기념물 제15호로 지정되었다. 개요 고려의 문신이자 문장가인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1168∼1241)선생의 묘소이다. 고려의 무신정권 하에서 태어나 무신정권에 적극 협력했던 문인의 한 사람으로, 명종 19년(1191)에 진사시에 합격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문하시랑 평장사에 올랐다. 시문에 능하였던 선생은 중국의 모방이 많았던 당시에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 이야기를 서사시로 엮는 등 민족정신에 바탕을 두고 글을 썼다. 또한 몽고군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천도해서 대장경을 만들 때 민족수호의 충정이 담긴 『대장경각판군신기고문(大藏經刻板君臣祈告文)』을 지었다. 선생이 남긴 문집은 ’동명왕편’을 비롯하여 ’동국이상국집’, ’백운소설’ 등 55권으로, 모두 고대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현재 묘역에는 상석과 장명등(長明燈: 무덤 앞에 세우는 돌로 만든 등)이 있으며, 좌우에는 문인석·무인석·망주석이 한 쌍씩 세워져 있다.] 13:24~13:35 이규보 묘(李奎報 墓)를 탐방 13:35~14:16 인천 강화군 양도면 길정리 산 75 번지에 있는 강화 곤릉(江華 坤陵)으로 이동 [강화 곤릉(江華 坤陵) 면적 1,091m2 강화 곤릉(江華 坤陵)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에 있는 고려 강종의 부인 원덕태후 유씨의 무덤이다. 1992년 3월 10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370호 곤릉으로 지정되었으나, 2011년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개요 원덕태후는 고종의 어머니로 강종 1년(1212)에 왕비가 되고 연덕궁주라 하였다. 뒷날 원덕태후는 추대되고 1253년에 정강의 시호가 더해졌는데, 언제 사망하였는 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석물은 없어졌고 봉분과 무덤을 둘러싼 담도 무너졌던 것을 1974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손질하여 고쳤다. 사적 승격 사유 이 유적들은 고려시대 왕릉 또는 왕비릉으로서 묘제상으로는 지정가치가 없으나, 역사성이 인정되고, 고려 공양왕 고릉(사적 제191호)과 고려 고종 홍릉(사적 제224호)이 이미 사적으로 지정된 바 있으므로 경기도 지정문화재(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 것을 국가지정문화재인 사적으로 승격 지정] 14:16~14:23 사진촬영 후 물을 마시면서 휴식 14:23~15:00 어두 고인돌을 거쳐서 인천 강화군 양도면 길정리 산 182 번지에 있는 강화 석릉(江華 碩陵)으로 이동 [강화 석릉(江華 碩陵) 주소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 길정리 산182 강화 석릉(江華 碩陵)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에 있는, 고려 희종(재위 1204∼1211)의 무덤이다. 1992년 3월 10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370호 석릉으로 지정되었으나, 2011년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개요 희종(熙宗)은 신종의 첫째 아들로 어머니는 정선태후 김씨이며, 부인은 성평왕후 왕씨이다. 1204년 왕위에 올랐고, 최충헌을 제거하려다 실패하여 희종 7년(1211)에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 강화 교동으로 갔다. 고종 24년(1237) 57세의 나이로 죽자 낙진궁으로 옮겼으며, 10월에 덕정산 남쪽에서 장례를 지내고 석릉이라 하였다. 조선 현종 때 강화유수 조복양이 찾아내어 다시 무덤을 쌓았는데, 그 뒤 석물도 부서지고 무너진 무덤을 1974년 손질하여 고쳤다. 석릉 주변에는 최근에 고려시대 귀족의 무덤이라 생각되는 돌방무덤(석실분)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사적 승격사유 이 유적은 고려시대 왕릉 또는 왕비릉으로서 묘제상으로는 지정가치가 없으나, 역사성이 인정되고, 고려 공양왕 고릉(사적 제191호)과 고려 고종홍릉(사적 제224호)이 이미 사적으로 지정된 바 있으므로 경기도 지정문화재(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 것을 국가지정문화재인 사적으로 승격 지정] 15:00~15:11 사진촬영 후 간식 15:11~16:05 진강정을 지나서 인천 강화군 양도면 능내리 산 16-1 번지에 있는 강화 가릉(江華 嘉陵)으로 이동 [강화 가릉(江華 嘉陵) 주소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 능내리 산16-2번지 강화 가릉(江華 嘉陵)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에 위치한 고려 원종(재위 1259∼1274)의 왕비 순경태후의 능(陵)이다. 1992년 3월 10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370호 가릉으로 지정되었으나, 2011년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개요 순경태후는 장익공 김약선의 딸로서 고종 22년(1235) 원종이 태자가 되자 태자비인 경목현비가 되었으며, 다음해에 충렬왕을 낳았다. 지금의 자리에는 고종 31년(1244)경 사망한 뒤 모신 것으로 짐작한다. 고려 원종 3년(1262) 정순왕후로 추대되고 충렬왕이 즉위(1274)하여 순경태후로 높여졌다. 무덤 주변의 석물은 부서져 없어졌고, 봉분도 무너진 것을 1974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손질하여 고쳤다. 사적 승격사유 이 유적은 고려시대 왕릉 또는 왕비릉으로서 묘제상으로는 지정가치가 없으나, 역사성이 인정되고, 고려 공양왕 고릉(사적 제191호)과 고려 고종홍릉(사적 제224호)이 이미 사적으로 지정된 바 있으므로 경기도 지정문화재(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 것을 국가지정문화재인 사적으로 승격 지정] 16:05~16:07 사진촬영 16:07~16:17 인천 강화군 양도면 능내리에 있는 탑재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하여 탐방 완료 16:17~16:52 탑재 버스 정류장에서 화도공용버스터미널로 가는 71번 버스 승차 대기 16:52~16:56 71번 버스를 타고 화도공용버스터미널로 이동 [4분 소요] 16:56~17:25 롯데몰.김포공항역 정류장으로 가는 60-5번 버스 승차 대기 17:25~18:51 화도공용버스터미널 정류장에서 60-5번 버스를 타고 롯데몰.김포공항역 정류장으로 이동 [1시간26분 소요] 18:51~18:53 김포공항역 3번 출구까지 도보로 이동 18:53~19:00 김포공항역에서 디지털미디어시티역으로 가는 공항철도 승차 대기 19:00~19:30 김포공항역에서 공항철도 전철을 타고 디지털미디어시티역으로 가서 6호선으로 환승하여 역촌역으로 이동 [30분 소요] 강화 나들길 제3코스(고려왕릉 가는 길) 지도 강화 나들길 제3코스(고려왕릉 가는 길)의 명소에 관한 안내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