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불수교 130주년을 기념해 열리는 <프랑스 국립 오르세 미술관-이삭줍기전>을 다녀왔습니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명작 130점을 선정해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막을 올린 이번 전시회는 밀레를 비롯해 반 고흐, 르누아르, 모네 등 19세기 인상파 화가들의 주요 작품들을 비싼 비행기 값을 지불하지 않고도 서울에 앉아 다 볼 수 있는 참 좋은 기회입니다.
이번 전시의 간판 작품은 역시 밀레의 <이삭줍기>와 고흐의 <정오의 휴식>입니다. <이삭줍기>는 밀레가 1857년에 그린 작품으로 <만종>과 함께 가장 완성도 높은 그림으로 평가되어 왔습니다. 고흐의 <정오의 휴식>도 그가 죽기 직전인 1890년 마무리한 작품으로 농민들이 한낮의 더위를 피해 건초더미 아래서 휴식을 취하는 모습을 담았는데 특히 노란색을 최대한 활용하던 때의 테크닉이 응축된 걸작으로 사랑 받아 온 작품입니다. 고흐는 밀레가 농촌과 농민을 주제로 그린 작품들을 보며 데생을 공부했을 만큼 그를 진심으로 존경했고, 또 그의 작품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따라서 <이삭줍기>와 <정오의 휴식>은 위대한 두 화가가 서로 어떤 식으로 교감하며 예술적으로 교류했는지를 미루어 짐작케 하는 대단히 의미있는 조합이라고 생각 합니다.
오르세 미술관은 이번 전시를 위해 파격적인 결정을 내렸습니다. 흔히 밑그림이라는 데생 전시를 결심한 것인데, 데생은 특성상 한 번 공개하면 작품 보존을 위해 다시 수년간 빛이 차단된 소장고에 보관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번 밀레의 <이삭줍기>는 데생도 전시되었습니다. 밀레가 이 작품 속 인물들을 데생으로도 남긴 것입니다.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풍텐블로 숲속을 한 번 걸어보라. 키 큰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선 숲속에서 자연에 대한 경이로움과 자신보다 훨씬 더 큰 존재에 대한 경외심 앞에서 스스로 무릎을 꿇고 기도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밀레의 말입니다. 이렇듯 밀레는 자연을 사랑하고 또 하나님을 사랑한 화가로 유명한데 풍텐블로 숲은 파리에서 남쪽으로 60km 쯤 떨어진 곳으로 이 숲을 끼고 서북쪽에 위치한 바르비종은 <바르비종파>라는 풍경화가들의 한 사조를 형성할 만큼 많은 예술가들이 머물며 작품활동을 했던 곳입니다. 이번 전시회의 메인이면서 추수감사절에 가장 잘 어울리는 작품인 <이삭줍기>도 <만종>처럼 바로 이 바르비종 들녘을 배경으로 한 그림인데 이 작품에는 또 하나 아름다운 얘기가 전해집니다.
밀레도 처음부터 사람들의 관심과 인정을 받았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의 그림은 평론가들이 아니라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외쳤던 사상가 장 자크 루소에 의해 가장 높이 평가됐습니다. 어느 날 절친이었던 루소가 밀레를 찾아와 기쁜 소식을 전했습니다. <드디어 자네의 그림을 볼 줄 아는 사람이 나타났네!> 밀레는 친구의 말에 기뻐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의아스러워 했습니다. 아직 한 번도 제대로 인정을 받거나 제 값을 받고 그림을 팔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화랑에 자네 그림을 소개했더니 당장 구입하겠다며 그림을 골라달라고 내게 이렇게 선금까지 맡겼다네.> 루소는 밀레에게 당시로서는 큰 돈이었던 300프랑을 건넸습니다. 하루하루가 힘들어 생활이 말이 아니었던 밀레에게는 그 돈이 그야말로 오랜 가믐에 단비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자신의 그림이 이제 남의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에서도 큰 희망과 자신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밀레가 친구 루소의 집을 방문하고는 깜짝 놀랍니다. 몇 년 전 최악의 궁핍 속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할 때 찾아와 누군가가 자기에게 부탁했다며 큰 돈을 주고 사가지고 간 자신의 작품 <이삭줍기>가 바로 그 루소의 서재에 걸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제서야 밀레는 친구의 속 깊은 마음을 알고 고마움에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가난한 친구 예술가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 남의 이름으로 큰돈을 주고 그림을 사 준 루소와의 우정은 그 후로도 계속됐고 루소야 말로 끝까지 밀레의 가장 든든한 고객이자 후원자였습니다.
쌀쌀한 이 가을날 감동과 사색이 함께하는 밀레의 <이삭줍기전>, 어떻습니까? |
첫댓글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풍텐블로 숲속을 한 번 걸어보라. 키 큰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선 숲속에서 자연에 대한 경이로움과 자신보다 훨씬 더 큰 존재에 대한 경외심 앞에서 스스로 무릎을 꿇고 기도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