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시절부터 인연을 이어 온 사단법인 글로벌 프랜드(최규택 대표)가 설립 20주년 기념 사업으로 한국과 미국의 선린과 두 나라 국민의 우의에 공을 세운 이들을 기려 상을 제정하기로 했다. 주한 미 8군 초대 사령관으로 한국 수호에 큰 공을 세운 월튼 해리스 워커(1889,12.3~1950.12.23) 대장과 주한미군 군수사령관으로 퇴역한 뒤 전후 재건에 힘을 보탠 리처드 시브루이 위트컴(1894.12.27~1982.7.12) 준장의 이름을 따 이르면 내년부터 시상할 예정이다. 두 사람의 공적 사항을 정리한다.
서울 지하철 1호선 도봉역 2번 출구로 나와 큰길을 건너면 이디야 커피점이다. 이곳에서 럭키아파트 쪽으로 걷다 보면 화단처럼 꾸며놓은 공간이 눈에 들어온다. 1950년 12월 23일 뜻밖의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은 월튼 해리스 워커 대장을 기리는 추모 공간으로 2009년 12월 3일 조성됐다.
그런데 실제로 워커 장군 일행이 횡액을 당한 도봉동 596-5번지는 표지석으로부터 140m쯤 떨어진 이면도로에 접한 2층 상가 건물이 들어선 곳이다. 낙동강은 물론, 대한민국을 구한 전쟁영웅이 마지막 삶의 발자취를 남긴 곳이라고 하기엔 부끄러움과 민망함이 교차할 만한 곳이다.
고인이 한국 땅에 처음 발을 디딘 것은 그 해 7월 7일이었다. 그가 유엔군 초대 사령관 자격으로 한국에 도착했지만 북한군의 남침에 속절없이 물러서던 군 지휘부는 철수 생각만 간절했다.
그러나 워커 장군은 "내가 여기서 죽더라도 끝까지 한국을 지키겠다"며 저유명한 발언 '버텨내거나 죽거나'(stand or die)란 말을 남겼다. 1950년 7월 29일 8군 사령부가 예하 부대에 하달한 그의 지시문에는 결의에 찬 다짐이 오롯이 새겨 있다. 그가 강력하게 한국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더라면, 그가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지 못했더라면 맥아더 사령관이 지휘하는 인천 상륙 작전은 1950년 9월 15일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유엔군이 낙동강까지 떠밀리자 미 육군은 8월 초 매튜 리지웨이 중장을 한반도에 파견해 워커의 지휘 방식을 조사했는데 워커의 참모들이 수동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데 놀랐다고 본국에 보고한다. 일부 연대장들은 전투 경험이 거의 없었고 병사들은 투혼을 발휘하던 2차 대전 때와 달랐다. 워커 파면 얘기까지 나올 만큼 맥아더나 참모들은 워커의 지휘력을 신뢰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는 불굴의 뚝심을 발휘한 셈이다.
1912년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그는 1차 세계대전 때 기관총 대대 중대장으로 은성무공훈장을 수상했다. 2차 세계대전 때는 조지 패튼 대장이 전적으로 신뢰하는 사단장으로 그의 오른팔 역할을 했다. 평소에는 조용한 성품이었지만 외모를 딴 별칭 '불독'처럼 지프와 경비행기를 이용해 수시로 전장을 누비며 "낙동강 수호"를 신신당부했다. 그 덕분에 낙동강은 물론, 대한민국을 지켜낼 수 있었음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다부동과 영천, 포항까지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적에게 뚫린 백척간두의 위기에서도 45일을 버텨내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줬다. 당시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에 병력을 총동원했고, 그 바람에 낙동강 전선을 지키는 병력들은 이곳을 막다가 저곳으로 이동해 막는 전술로 임했다. 그 결과 워커 장군에게는 '특급 소방수'란 별명이 붙여졌다. 그 뒤 서울 수복과 압록강 진격까지 워커 장군의 전적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고인은 1950년 성탄을 이틀 앞두고 교통사고로 세상을 등지고 만다. 낙동강 방어에 중대장으로 큰 공을 세운 외아들인 샘 워커 대위에게 은성무공훈장을 수여하려고 의정부로 이동하던 도중 변을 당하고 말았다.
아들 샘 워커 대위는 부친상에도 전장을 떠나지 않으려 했으나 맥아더 사령관이 명령을 내리는 바람에 귀국해 부친의 장례를 치렀다. 워커 장군은 1951년 1월 2일 워싱턴 DC에 있는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됐고, 대장 계급이 추서됐다. 아들 샘 워커는 1977년 최연소 육군 대장으로 진급, 육군 사상 처음으로 부자 4성 장군이 됐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 장성 아들은 모두 142명이나 된다. 마크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 워커와 제임스 밴플리트 제3대 8군 사령관은 부자가 함께 전장에 있었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에도 그 아들은 미 3사단 대대장으로 복무했다. 미군 고위 장성의 자녀 사상자는 35명이었다.
1963년 한국 정부는 주한미군과 외교관 등을 위한 휴양 단지로 워커힐 호텔을 건립하고 1987년에는 호텔 안에 기념비를 세워 고인을 추모했다. 이 호텔은 1973년 선경그룹(현 SK 그룹)이 인수해 운영하고 있다.
한편 워커 장군은 압록강으로 진격하는 과정에 북한의 군수공장 시설 등에 대한 폭격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 같다. 대구 남구에 있는 주한미군 육군 비행장의 이름이 캠프 워커인 것도 이와 관련 있다.
하지만 그런 흠결에도 한국 수호에 미친 그의 공은 결코 작지 않다. 그리고 이제 갈수록 많은 한국인들은 그의 이름도 제대로 들어보지 않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그래서 글로벌 프랜드의 상 제정은 더욱 의미가 있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