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12일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복음: 루카 11,5-13: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한밤중에 온 식구와 잠자리에 든 벗을 깨워 자기가 필요한 것을 얻어낸 사람이 있다. 잠자리에 든 친구는 친구의 끈질긴 요구를 마지못해 들어주었지만, 주무시지도 않고 우리를 깨워 기도하게 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얼마나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주시겠는가? 그분은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벗(요한 15,13 참조)이시기 때문이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9절) 하늘나라는 게으르고 한눈파는 자들이 아니라, 그것을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 이들에게 주어지고 발견되고 열리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 나라의 문은 기도로 청하고 바른 삶으로 찾고 한결같은 신앙으로 두드려야만 열리는 문이다. 기도와 올바른 삶 그리고 한결같은 신앙으로 노력해야 한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12절) 하신다. 여기서 생선은 믿음을 상징한다. 생선은 물세례를 연상할 수 있고 이 세상 파도에 상처를 입지 않는다. 반대로 뱀은 사람을 속여 하느님을 믿지 않게 만든다. 달걀은 희망을 상징한다. 앞으로 병아리가 생겨나듯 곧 눈에 보이리라고 희망하기 때문이다. 전갈은 희망의 반대이다. 뒤를 돌아보면 안 된다. 꼬리에 독침을 품고 있는 전갈을 경계해야 한다.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마태 7,9) 빵은 사랑을 상징한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1코린 13,13)이라 하였고, 음식물 가운데서는 빵이 단연 으뜸이기 때문이다. 돌은 그 반대이다. 돌처럼 단단히 굳은 마음은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것은 당신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주실 줄 아시는 그분이 우리에게 청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하시는 것이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13절) 우리의 마음이 악에 휩쓸리기 쉽고 만유의 하느님과 달리 선에만 이끌리는 존재가 아니지만, 우리 자식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줄 알듯이 그분께서는 성령을 주신다고 하신다. 여기서 성령은 하느님과의 친교 안에 들어감을 뜻하며 또한 성령의 은사를 가리킨다. 그것은 모든 면에서 좋은 것이다. 그것을 얻는 사람은 가장 복되고 칭송을 받을 만한 사람이 될 것이다. 기도로 하느님으로부터 가장 좋은 것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느님 안에 깨어있는 삶이 되도록 노력하여야겠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10월12일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루카 11,5-13
참된 기도가 어떤 것인지 늘 고민합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라는 예수님 말씀을 화두 삼아, 대체 무엇을 청할 것인가? 고민하고 묵상해봅니다.
난데없는 고통이 다가올 때, 예기치 않았던 환난이 밀려올 때, 자녀된 입장에서 사랑하는 아버지께
도움을 청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어린이들이 점차 청소년, 청년, 장년으로 성장해나가듯이, 우리의 기도 역시 성장해나가야 마땅합니다.
어른이 되면 더 이상 아기 때처럼 부모에게 칭얼거리거나 그저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청하기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자녀들은 힘겹게 낳아주시고 지극정성으로 양육해주시고, 잘 교육시켜주신 덕에 한 사회인으로 성장하게 해주신 부모의 은혜에 깊이 감사하면서, 이제 더 이상 부모에게 청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뭔가라도 드리고 싶어합니다.
감사의 마음을 담은 선물도 드리고, 영양제도 챙겨드리고, 용돈도 드리고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기도도 그렇게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마냥 이거 해주세요, 저거 해주세요, 졸라댈 것이 아니라, 이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크신 은혜와 자비에 깊이 감사드리는 감사의 기도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대자연을 창조하시고, 사랑스런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께 찬미의 기도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참된 기도가 어떤 것인지 늘 고민해봅니다.
한 인간 존재가 자신의 창조주이며 근원이신 하느님, 나를 극진히도 사랑하시는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나는 그분을 바라보고 그분을 나른 바라보는 것, 그분이 너무 사랑스러워 그저 가까이 앉아 있는 것만 해도 행복한 상태. 결국 유한한 한 인간 존재가 영원하신 하느님께 항상 연결되며 사랑을 주고받는 것, 그것이 기도가 아닐까요?
그렇다면 우리가 지향하는 청원의 기도를 들어주셔도 좋지만 당장 들어주시지 않아도 괜찮은... 그저 우리가 하느님과 소통하고 대화하는 그 자체로 기뻐하고 감사하는... 그저 우리가 하느님과 함께, 그분 안에 머무는 그 자체에 만족하고 행복해하는...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강론>
(2023. 10. 12. 목)(루카 11,5-13)
<기도>
“너희 가운데 누가 벗이 있는데, 한밤중에 그 벗을 찾아가 이렇게 말하였다고 하자. ‘여보게, 빵 세 개만 꾸어 주게.
내 벗이 길을 가다가 나에게 들렀는데 내놓을 것이 없네.’
그러면 그 사람이 안에서, ‘나를 괴롭히지 말게. 벌써 문을 닫아걸고 아이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네.
그러니 지금 일어나서 건네줄 수가 없네.’ 하고 대답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이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어나서 빵을 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줄곧 졸라 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루카 11,5-8).”
이 말씀의 뜻은, “세속에서는 끈질기게 졸라대야만 겨우 청을 들어 줄 때가 많다.
그러나 아버지 하느님은 그런 분이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너희가 청하면 곧바로 기꺼이 들어 주신다.”입니다.
또는, “세속에서는, 처음에는 청을 들어 주려고 하지 않다가, 끈질기게 졸라대면 못 이기는 척 하고 청을 들어 줄 때가 많다.
그러나 하느님은 너희가 청하면 곧바로 들어 주시는 분이다.
처음부터 너희의 청을 들어 주려고 작정하셨기 때문이다.”입니다.
이 말씀은, 뒤의 18장에 있는 다음 말씀과 함께 읽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루카 18,7-8ㄴ).”
하느님은 미적거리지 않으시는 분이고, 지체 없이 기도를 들어 주시는 분입니다.
상황을 조금 바꿔서, ‘빵 세 개’를 꾸려고 하는 상황이 아니라, 훨씬 더 긴박한 상황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정말로 사랑하는 가족에게 목숨이 위험한 어떤 ‘응급 상황’이 생겼다고 연락이 왔다면?
그러면 누구든지 모든 것을 중단하고, 곧바로 달려갈 것입니다.
한밤중이라면 잠자는 것을 포기하고, 식사 중이라면 먹는 것을 포기하고, 다른 일을 하고 있는 경우라면 그 일들을 중단하고, 즉시 갈 것입니다.
하느님은 바로 그런 분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나’는 하느님께서 정말로 사랑하시는 자녀이고,
그래서 어떤 ‘응급 상황’이 아니더라도 내가 간절하게 청하면, 곧바로 조치를 취하시는 분입니다.
실제로 그런 체험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밤낮으로 부르짖을 필요가 없지 않은가?”
(“끊임없이 끈질기게 기도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느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가장 좋은 때에 주시는 분”이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바로 그 ‘가장 좋은 때’가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생각하시는 ‘가장 좋은 때’와 사람들이 생각하는 ‘가장 좋은 때’가 다를 때, 사람들은 흔히
하느님께서 미적거리신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의 생각에는 ‘지금 당장’이 ‘가장 좋은 때’ 같겠지만, 하느님께서는 몇 년 후나, 몇 십 년 후, 또는 몇 백 년 후를 ‘가장 좋은 때’ 라고 판단하실 수도 있습니다.
<기도에 관해서 말할 때 ‘믿음’만을 강조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냥 ‘믿음’이 아니라, ‘기다릴 줄 아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겨우 기도 한 번 하고 나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무엇인가를 청하는 기도는, 사실, 주시는 것을 잘 받기 위한 준비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언제’ 주실지, 그것을 우리가 모르기 때문에, 잘 받으려면 꾸준히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끈질기게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은, 주실 때까지 계속 떼를 쓰는 일이 아니라, 사실은 차분하게 기다리는 것입니다.
불안해하거나 초조해 하지 않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 11,9-13)”
앞의 말씀은 ‘가장 좋은 때’에 초점을 맞춘 말씀이고, 지금 이 말씀은 ‘가장 좋은 것’에 초점을 맞춘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악한 것을 청해도 좋은 것을(선한 것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렇지만 인간들은 자기가 청한 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고 착각할 때가 많고,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 자기가 청한 것과 다를 때에는 받기를 거부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믿음’만 강조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주님께서 주시는 것이 자기가 원하는 것과 달라도 겸손하고 감사하게 받는 태도가 필요하고, 또 중요합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자기가 원하는 때에 달라고 고집부리면서, 그 요구가 받아들여질 때까지 계속 끈질기게 졸라대는 것을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자신의 욕심과 고집을 꺾을 줄 모른다면, 주시는 것에 대한 감사와 순종이 없다면, 그런 믿음은 참된 믿음이 될 수 없고, 신앙생활에 해가 될 뿐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뜻에 합당한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하고, ‘올바른 것’을 청해야 하고, ‘올바른 문’을 두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 어떤 문이 ‘올바른 문’인지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을 모르니까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기도를 배우게 됩니다.
성령께서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로마 8,26ㄴ).
그리고 성령의 도움을 잘 받는 방법은 기도밖에 없습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