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1566
3월3일 [사순 제2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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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루카15장 1-32절)
<(1)괜찮다, 다 괜찮다>
날씨가 오락가락하지만 이제 또 다시 형제들과 어줍잖은 ‘아마추어 농사’를 슬슬 준비하는 시기입니다.
언젠가 하루 온종일 퇴비와 씨름한 적이 있었습니다. 냄새가 제대로인 퇴비를 한 트럭 실어왔습니다. 밭에 도착해서 골고루 뿌렸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형제들이 다들 코를 쥐고 뒤로 물러나더군요. 강력한 퇴비냄새가 온 몸에 배였던 것입니다.
오늘 탕자의 비유에 등장하는 둘째 아들은 더했겠지요. 그는 가지고 있던 돈을 다 탕진해버리고 살길이 막막해지자 돼지 치는 농장에 취직했습니다. 거기서 주로 했던 일은 어떤 일인지 아십니까? 그들이 생산해내는 막대한 배설물들을 계속해서 치우는 일이었습니다.
언젠가 마땅히 갈 곳 없다며 취직자리 알아봐달라는 ‘의지가 약한’ 그래서 늘 떠도는 한 형제를 돼지 치는 농장에 보내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월급도 그만하면 괜찮고 시골이라 돈 쓸 일도 없고, 금방 돈 모으겠다고 생각했는데, 웬걸, 사흘 만에 전화가 왔습니다.
“신부님, 저 여기서 도저히 일 못하겠어요. 냄새 때문에 돌아버리겠어요.”
제발 조금만 더 견뎌보라는 말에 그 형제는 제게 ‘빽’ 소리를 질렀습니다.
“신부님이 여기 와서 단 한 시간 만이라도 일해 보고, 그런 말 하라구요!”
그때 저는 돼지농장하시는 분들의 고충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더 이상 살길이 없음을 알게 된 둘째 아들의 마침내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리게 되고, 드디어 발길을 아버지 집으로 돌리게 됩니다.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는 둘째 아들의 몰골을 떠올려보십시오. 가관입니다. 제대로 씻기나 했겠습니까? 땀 냄새, 돼지 배설물 냄새, 별의 별 냄새가 하늘을 찔렀습니다. 신발도 어디로 사라졌는지 맨발입니다. 머리카락은 산발에다 떡진 머리입니다. 옷은 갈아입은 지 얼마나 되었는지도 기억 못합니다. 거지 중의 상거지꼴이었습니다.
그를 보는 사람마다 다들 코를 움켜쥐고 멀찌감치 피해갔습니다. 그가 지나가고 나면 다들 투덜거렸습니다.
“저게 사람이냐, 짐승이냐?”
아버지 집 가까이 이르러서는 따가운 눈총들이 더 심했겠지요.
“야, 저게 누구냐? 그 싸가지 없는 둘째 아들 아냐? 꼴좋다! 천하의 불효자식 같으니라구! 빈대도 낯짝이 있지. 그러고도 지가 아버지 집으로 돌아와? 인간의 탈을 쓰고 어떻게 그럴 수 있냐구?”
다들 한 목소리로 둘째 아들을 향해 손가락질하고 쌍욕을 해댔겠지요. 그러나 이 세상에서 단 한 사람, 유일하게 그러지 않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버지였습니다. 그는 왜 그랬냐고 따지지도 않습니다. 싸가지 없는 자식이라며 뒤통수를 치지도 않습니다. 그러고도 네가 인간이냐며 다그치지도 않습니다.
돈 얼마 남았냐며 호주머니를 뒤지지도 않습니다. 그저 말없이 있는 힘을 다해 자신의 품에 끌어 앉습니다. 한손으로는 내 이제 더 이상 너를 놓치지 않겠노라며 끌어안습니다. 다른 한 손으로는 괜찮다, 다 괜찮다, 너만 살아 돌아왔으면 다 괜찮다며 토닥토닥 등을 두드리십니다. 자비하신 우리 하느님의 얼굴을 가장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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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악에서 선을 이끌어내시는 하느님>(20180302)
가끔씩 선하신 하느님, 인간을 끔찍이도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왜 이 세상에 ‘악’의 세력이 버젓이 자라나게 하시는지 의문이 들 때가 있었습니다. 이제야 조금씩 그 이유를 알아가게 되었습니다. 악에서 선을 이끌어내시기 위해서라는 진리.
악행을 저지르는 사악한 사람을 계속 살려두시는 이유도 마찬가지겠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막내 동생 요셉에게 보여준 악행은 참으로 하늘을 찌를 악행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펼쳐지게 되는 요셉의 운명은 참으로 기구한 것이었습니다. 형들로부터 집단 따돌림을 당한 요셉은 홀로 깊은 구덩이 속에 남겨지게 됩니다. 그리고 기적적으로 살아나 어린 나이에 머나먼 타국인 이집트까지 노예로 팔려가게 됩니다.
그때부터 펼쳐지는 요셉의 생애는 마치도 한편의 아름다운 대하소설과 같습니다. 흥미진진하고, 파란만장하고, 눈물겹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아름답습니다.
혈혈단신 이집트 노예로 끌려간 요셉은 하느님의 이끄심에 힘입어, 그리고 요셉 본인의 처절한 사투 같은 노력 끝에 대제국의 제2인자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대기근을 이겨내기 위해 이집트로 찾아와 맞이하게 되는 형제들과의 상봉... 그리고 결정적으로 눈여겨 볼 대목이 있습니다. 자신을 왕따시키고 죽이려고 작정했던 형들을 향한 요셉의 태도입니다. 요즘 표현대로 ‘쿨한’ 요셉의 용서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대인배로서의 요셉의 처신입니다.
형들의 악행에서 시작된 요셉의 드라마는 결국 요셉 가문을 대기근에서 살려주고 구원에로 이끄는 해피엔딩으로 끝맺습니다. 요셉의 관대하고 열린 마음, 매사에 수용적이고 낙관적인 마음이 결국 이스라엘의 구원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을 비롯한 백성의 지도자들이 보여준 모습은 정 반대였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미리 준비시키기 위해 보내신 예언자들을 배척하고 죽였는가 하면, 결정적으로 메시아로 오신 주님조차 처형하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들은 정말 치명적인 실수를 범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적인 욕구들을 지속적으로 챙겨줄 거짓 메시아를 고대했던 일생일대의 큰 과오를 범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항상 악에서조차 선을 끌어내시는 분이십니다. 범세계적 홍수는 노아와의 새로운 계약으로 매듭지어졌고, 파라오의 완고한 마음은 출애굽을 통한 약속의 땅 입국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거역하고 골고타 언덕에서 처형한 끔찍한 사건은 결국 전 인류 구원을 위한 새로운 계약이란 결실을 거두게 만들었습니다. 군사가 던진 창에 찔린 예수님의 옆구리가 열리자 거기서 새로운 이브, 새로운 교회가 탄생되었습니다. 인간의 죄와 악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변형된 것입니다.
결국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관점입니다. 부드러운 시선, 여유롭고 관대한 마음, 만사에 호의적이고 수용적인 태도입니다.
수시로 다가오는 다양한 형태의 악과 죄 앞에서도 인내롭게 하느님의 때를 기다리는 열린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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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너의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루카 15,1-3.11ㄴ-32)
<천국과 지옥, 그리고 자유>
천국은 죄가 없는 곳입니다.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을까요?
어떤 분들은 죄는 우리에게 자유가 있어서 짓는 것이기에, 천국에서는 자유가 없어지기 때문에, 즉 하나만 선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죄를 짓게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하와를 유혹했던 뱀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안의 뱀이 없어진다는 말은 선택권이 없어진다는 말인데 하느님이 인간을 사랑하셔서 주신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자유’입니다.
내 안의 뱀은 절대 죽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지옥이 자유가 없는 곳이고, 천국은 자유가 완전해지는 곳입니다.
이번 주에 어머니와 찜질방에 갔습니다. 함께 처음으로 들어간 곳이 들어갈 때부터 숨이 막히는 한증막입니다. 들어가자마자 땀이 나왔습니다. 제가 나가려고 하는데 어머니가 누가 더 늦게 나가나 시합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저도 자존심이 발동을 하였습니다.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끝까지 참았습니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어머니께서 먼저 “난 당뇨가 있어서...”라고 하시며 슬그머니 나가셨습니다. 그러면서 든 생각이 ‘아, 나가고 싶으면서도 나가지 못하는 곳이 지옥이구나!’였습니다. 자존심이란 놈이 나가고 싶을 때 나갈 수 있는 자유를 빼앗은 것입니다.
자유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인데, 지옥은 자신의 자아에게 자유를 완전히 빼앗겨서
스스로의 힘으로는 빠져나올 수 없는 곳인 것입니다.
그러나 나가고 싶을 때 언제든지 나갈 수 있는 자유가 있다면 그곳이 천국입니다. 결국 자유가 있기에 지옥도 생기고 천국도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자존심이 너무 강하여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해서 한증막에 갇혀 고통을 영원히 당해야 한다면 그 곳이 바로 지옥인 것입니다.
유다가 예수님까지 팔아먹었다고 해서 완전한 자유를 가졌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도 그러고 싶지는 않았지만, 자아와 세상의 힘에 굴복당해 자유를 잃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나중에 자기를 이용했던 사람들에게 돈을 집어던지기는 하지만, 여전히 성모님 앞에서 무릎 꿇고 죄의 용서를 빌 수 있는 자유는 없었던 사람인 것입니다.
고해성사를 하면 마음이 편해질 것 같은데 자존심 때문에, 두렵고 창피해서 무릎을 꿇을 수 없다면 유다와 같은 처지에 있는 것이고 자유를 빼앗겨 지옥에 가까이 와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잘 아는 탕자의 비유입니다. 사실 제목이 잘못되었습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탕자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자비의 아버지도 아닙니다. 바로 아버지와 동생을 받아들일 수 없는 형입니다.
오늘 비유를 들어주신 이유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함께 어울리는 예수님을 못마땅해 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동생보다 더 자유롭지 못한 큰 형과 같은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에게 더 자유로울 수 있도록 권고하시는 것입니다.
오늘의 복음과 제 나름대로는 가장 일치하는 영화가 있다면 저는 전도연씨 주연의 ‘밀양’을 꼽겠습니다.
밀양의 이신애는 오늘의 맏아들을 보여줍니다.
즉 자아에 묶여서 자유가 없는 사람입니다. 교통사고로 죽은 남편에게는 애인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밀양이라는 시골에 와서까지 남들에게 꿀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과시하고 돈이 많은 것처럼, 땅에 투자하겠다는 식으로 계속 떠들고 다닙니다. 여기서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내 자신의 열등감을 돈으로 치장하는 자아가 강한 여자임을 보여줍니다. 그만큼 솔직할 수 있는 자유를 잃은 것입니다.
신애가 노래방에서 놀다가 늦게 들어간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유괴범이 아들을 살리고 싶으면 돈을 달라고 전화를 합니다. 온갖 있는 척을 다 했지만 신애의 통장엔 870만 원 정도뿐이었고, 유괴범의 요구를 모두 들어줄 수 없었던 신애는 싸늘한 아들의 시체를 보아야 했습니다.
신애는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고 하느님의 사랑으로 범인을 용서하겠다고 결심하고, 범인을 찾아갑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힘겹게 ‘주님의 사랑으로 당신을 용서한다’고 말하는 신애 앞에서 범인은 너무나 평안한 모습으로 대답합니다.
“주님께서 저를 용서하셨습니다.”
주님이 자신을 용서해주셔서 너무나 행복하다고 말하는 범인 때문에 신애는 분노하고 화를 참지 못하고 실신합니다.
이 모습이 오늘 복음의 큰 아들의 모습입니다. 죄만 짓고 돌아온 놈도 싫지만, 일만 죽도록 한 자신보다 실컷 죄만 지은 죄인을 단숨에 받아주는 하느님이 더 싫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면서도 교회에 다시 돌아갈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바로 지옥이고 자유를 빼앗겼다는 뜻입니다.
그리고는 그런 고통이 너무도 커서 자살을 시도하게 되고, 이 모습은 유다와 너무도 닮은 모습입니다.
자살을 하는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을 제일 두려워합니다. 신애도 손목을 긋고는 죽음이 다다르자 죽는 것이 두려운 나머지 살려달라며 거리로 나갑니다.
한증막에서 자존심이란 것이 나가고 싶어도 나가지 못하게 만들었던 것처럼, 이것도 저것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바로 자유를 빼앗긴 지옥인 것입니다.
저도 키가 작은 열등감 때문에 키 큰 여자를 좋아하지 않지만, 또 사귀게 되면 키가 큰 사람을 좋아하게 되고, 또 좋아하면 이내 키 작은 사람을 찾게 되었던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못하게 되는 것은 자유를 빼앗겼다는 것인데, 사실 열등감도 교만입니다. 내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상처와 열등감과 같은 트라우마가 새겨지는 곳이 내 자아입니다. 이 자아가 나의 자유를 빼앗고 지옥으로 끌어내리는 것입니다.
EBS 다큐 프라임에서 했던 ‘모성쇼크’에서 부모에게 받은 대로 하게 된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한 엄마는 아들이 미워죽을 지경입니다. 머리를 쥐어박고 소리 지르고 무시해버립니다. 그러나 자식에게 이러는 자신이 더 밉습니다. 알고 보니 그녀의 어머니가 오래 전에 그녀의 오빠만 좋아하고 자신은 구박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머니도 오빠도 용서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고, 아들에게서 오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게 바로 지옥에 사는 것입니다. 자신의 아들을 사랑하고 싶어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한 어머니는 자신이 어렸을 때 자신의 어머니에 “네가 너무 울어서 네 동생이 장애아로 태어났다.”는 말에 너무 큰 상처를 받아서, 자신의 자녀가 우는 것을 보아주지 못합니다.
자유롭기 위해서는 내 안에 나를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것을 청산해야 합니다. 맏아들도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자신이 더 영광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이라는 자존심을 혹은 자아를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해성사를 볼 때 무릎을 꿇고 자신의 죄를 입으로 고백하는 이유는 그래야만 자신의 자아가 죽어서 죄를 용서받기도 이전에 이미 자유로워지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순교복자 수도원의 창립정신은 “면형무아(麵形無我)”입니다. 즉 예수님이 빵의 형태가 되시기 위해서(麵形) 자아를 없애셨듯이(無我), 우리도 세상에 생명의 빵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버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결국 나를 구속하는 것은 내 안의 상처, 혹은 내 자아 안에 새겨진 상처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 자아를 부서 버려 면형무아가 되지 않으면 영원히 그 트라우마 때문에 자유로운 인생을 살지 못하게 됩니다.
그 상처를 긁어낼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아가 강하면 상처는 또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상처받을 수 있는 놈을 없애는 것이 상책입니다.
저는 저 자신을 마구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의 주인을 예수, 마리아, 요셉이라고 받아들입니다.이것이 참 성전이 되는 길이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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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가 15,1-3.11-32 : 아버지, 저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가진 사람들'보다는 '잃은 사람들', 세리 마태오, 간음한 여자, 사마리아 여인, 자캐오 등과 같은 사람들을 가까이하시고 자리를 함께 하신다.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의 이러한 처신을 비난하였다. 자기들 보기에 부정한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가르치시는 주님을 사악하고 불경스런 태도로 비난하였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11절) 이 두 아들은 두 백성을 의미한다. 율법을 가지고 있었던 유대인이 큰 아들, 어리석은 우상숭배를 하는 다른 민족은 작은 아들이다. 율법에 대한 이해가 큰 아들과 작은 아들로 구분을 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작은 아들은 자신에게 돌아올 유산을 달라고 한다. 작은 아들은 아들의 자격을 잃어 마땅하였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서 살아있는 아버지의 너그러움에 기대어 자기 쾌락을 쫓기로 결심한 것이다.
“며칠 뒤에 작은 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13절)고 한다. 아버지에게서 떠났다고 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에게서 떠났다는 의미이다. 그리스도에게서 떠난 사람은 누구나 자기 고장에서 쫓겨난 사람이다. 그는 먼 고장에서 방탕하게 살며, 인자한 아버지이신 당신께서 주신 재물을 모두 허비하였다. 음탕한 욕정의 세계에 사는 것은 어둠의 세계에 사는 것이며 당신 얼굴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것이다. 작은 아들은 이렇게 아버지를 떠난 삶을 살았다.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었다고 했는데, 이는 식량의 기근이 아니라, 선행과 덕행의 기근이었다. 하느님의 말씀을 떠난 자가 진짜 굶주리는 자이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4)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가 곤궁에 허덕이고 굶주림으로 고통받는 것은, 방탕한 쾌락에는 만족이 없기 때문이다. 영원한 양식으로 배를 채울 줄 모르는 자는 늘 굶주릴 것이다.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15절) 아버지에게 의탁하지 않고 낯선 사람에게 자신을 넘기는 사람은 가혹한 심판자에게 당하게 된다.아버지의 사랑을 등진 그는 돼지 치는 신세가 되었다.진흙투성이 돼지우리에 뒹굴며 더러운 오물을 뒤집어쓰니까 그는 아버지의 집의 평화로운 생활을 등지고 떠난 것이 얼마나 비참하고 괴로운 일인지 실감을 하게 된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17절) 그는 죄인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아버지의 아들로 남아있었다.창녀들과 어울리며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했지만, 아버지를 떠나 남의 땅의 포로가 되었으나 그는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불렀다. 그는 아들이라는 영예로운 자격을 잃지 않았다. 성령께서는 죄를 지은 이에게서도 떠나지 않으신다는 말씀이다. 성령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21절) 작은 아들은 아버지께 돌아오며 울부짖는다. 날마다 드리는 기도에서 교회는 작음 아들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음을 증언한다. 아버지는 아들이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아들에게 달려간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20절) 아버지는 아들의 죄를 드러내거나 비참하게 만들지 않으려고 입맞춤으로 아들의 죄를 용서하고 포옹으로 덮어준다. 그렇게 상처의 흔적 하나 남지 않도록 말끔하게 고쳐 준 것이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22절) 가장 좋은 옷은 영원불멸하는 영광을 아들에게 입히고 반지를 끼워줌으로써 예전에 지녔던 명예도 되찾아 준다. 신발을 신겨주는 것은 발도 헐벗지 않게 하고 신발을 신은 채로 옛날의 삶으로 돌아오게 해 준 것이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23절) 되찾은 작은 아들을 위하여 준비된 송아지다.
들에서 돌아온 큰아들, 율법의 백성은 아버지 집에서 춤추며 노래하는 소리가 들리는 데도 안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 유대인들은 아버지의 집인 교회에 와서는 질투 때문에 바깥에 서 있다. 그들은 안에서 울리는 다윗의 수금 소리와 시편을 노래하는 소리를 듣고, 수많은 사람들이 어울려 춤추는 것을 본다. 그러나 들어가려고는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다른 민족 형제들을 심판한다.
아버지가 밖으로 나가 아들에게 말한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31-32절) 아버지의 것이 모두가 그의 것인데, 아버지와 함께 살 던 모든 삶이 매일의 잔치였는데 그것을 알지 못하고 종같이 살아온 큰 아들에게는 기쁨이 없었다. 더구나 이제는 시샘 때문에 형제가 파멸하기를 바라니 아버지의 잔치에 참여하여 기쁨을 맛볼 자격이 없다.
작은 아들은 사랑의 모습을 되찾았기 때문에 즐거워해야 한다는 것이다. 작은 아들이 아버지의 자비로우심으로 잔치에 참여할 자격을 얻었다면 큰 아들도 아버지의 허락이 없으면 그 잔치에 참석하지 못했을 것이다.우리 역시 모두 하느님의 사랑에로 되돌아가야 함을 알고 기도하며 노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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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생태질서의 회복과 통합의 길>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 작은아들은 자신에게 돌아올 유산의 몫을 모두 챙겨 먼 고장으로 떠납니다. 그는 아버지의 집을 떠남으로써 자신을 아버지와 무관한 처지로 내몰았고 다른 이들과의 관계도 단절해버리게 됩니다. 그는 생명이 아닌 재물을 소유한 채 생명공동체에서 스스로 떨어져나간 것입니다.
아버지의 집은 함께 숨쉬고 서로를 수용하며 살아가는 생명의 터입니다. 생명이신 주님과 함께 하는 그곳은 생기가 넘칩니다. 그 생명을 공유하고 나누는 자체가 기쁨의 축제이지요. 끊임없이 생명이 피어나고 유지되고 성장하도록 하는 근원적인 힘은 사랑입니다. 생명으로 하나되는 아버지의 집은 자비의 집입니다.
그런데 작은 아들은 생명이 아닌 자기 욕망의 신기루를 찾아나섭니다. 소유욕에서 비롯된 생명으로부의 단절은 생태 파괴를 가져옵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모든 생명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며 예외없이 존귀하지요. 그러나 이기심과 자기중심주의와 탐욕은 폭력과 죽음을 부를 뿐입니다. 작은 아들은 자비를 등지고 스스로 냉혹함과 무자비의 세계로 들어감으로써 생태질서를 파괴하고 맙니다.
작은 아들은 방종한 생활로 재산을 탕진하고,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조차 얻어먹을 수 없는 생명 결핍상태에 떨어집니다. 자비로 가득한 생명 대신 사라져버릴 재산을 선택한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그는 스스로 망가뜨린 생태환경에서 바닥을 치는 고통을 체험하고서야 ‘제정신’을 차립니다. 생명 고갈을 체험한 그는, 아버지에게 돌아가 용서를 청하고, 종으로라도 살아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아버지는 집을 떠난 아들을 기다리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수없이 사랑의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날이면 날마다 아버지는 아들이 떠나간 길목을 바라보며 사랑의 그리움을 키우고 또 키웠을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은 죽어가는 생명을 잊지 않습니다 생명은 스러져가는 생명에 애정을 갖고, 생명없는 것과 하나되고자 합니다.
간절하고 한없는 사랑에 가득 찬 마음은 저 멀리 돌아오는 아들을 알아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 ‘달려가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춥니다.’(15,20) 아무것도 묻지 않고 따지지 않고, 누더기 옷을 입고 해진 신발을 신은 몰골이 엉망인 있는 그대로의 아들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생태 질서는 수용을 통해 이어져갑니다. 미움, 증오, 분열, 폭력, 다툼, 절망, 어둠, 의혹, 슬픔을 사랑으로 받아들일 때 생태질서는 회복됩니다.
아버지는 생명의 빈자리로 돌아온 아들을 기쁘게 맞이하며 생명의 잔치를 벌입니다. 그런데 큰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먹고 생명을 마시며 살아왔음에도, 다시 생명의 집으로 돌아와 하나되려는 동생을 시기하며 분노를 터뜨립니다. 아버지는 그런 큰아들도 생명의 축제에 초대합니다. 자비로 모두를 받아들이는 아버지의 집은 생명의 집입니다.
우리 모두 작은 아들처럼 이기심과 탐욕에 사로잡혀, 주님 생명의 집에서 멀어져서는 안되겠습니다. 큰 아들처럼 스러져가는 생명의 회복을 거부하지 말아야겠지요. 생명의 집에 사는 이들답게 사랑으로 공생하고 나누며, 서로를 존중하며 조건없이 받아들여야겠습니다. 오늘도 아버지의 생명의 집으로 돌아가, 사랑으로 생명을 싹틔우고 키우며, 통합과 화해를 이룸으로써 생태질서를 회복하는데 투신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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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묵상
미카 예언자는 “허물을 용서해 주시고, 죄를 못 본 체해 주시는” 하느님에 대해 알리고 있습니다. 죄인들을 받아 주시고 그들과 어울리시는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자비로운 행위를 비판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이 비유는 하느님의 인자하심과 죄의 용서에 대해 잘 알려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을 보시고 가엾이 여기시는 분이시며 죄인의 회개를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 나라에서는 잔치가 벌어집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죄악이 크더라도 아무 조건 없이 용서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받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 주목해야 할 인물은 큰아들의 태도입니다. 큰아들은 하느님을 충실히 섬기며 의롭게 사는 신앙인을 상징합니다. 작은아들은 하느님을 저버리고 죄악에 빠져 영적으로 죽은 신앙인을 상징합니다. 큰아들은 자신의 의로움에 대한 자만심을 가져 하느님께 되돌아오는 작은아들의 회개를 시기합니다. 큰아들은 죄인에게 철저한 징벌과 보속이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죄인에게 베푸시는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는 의롭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됩니다. 그들은 이해타산을 앞세워 하느님을 섬기기에 하느님의 자비를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탕자의 아버지’를 통해 죄인의 회개를 애타게 기다리시는 하느님을 만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하느님께 돌아가는 작은아들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자만심과 시기심에 빠져 죄인을 단죄하는 큰아들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관리국장/청주교구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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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밤송이 김기현 요한 신부님]
<울타리 안에서 누리는 것을 헤아려봅시다.>
오늘 복음을 보면서 큰 아들에게 감정이입이 되었습니다. 제가 그런 자리에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많지는 않지만 몇 가지 일이 생각났습니다.
첫 번째는 아주 예전에 신학교 1학년 때 돌아가신 주교님과 함께 살았었는데, 아침 식사 때에 보면 신부님 식탁에는 늘 계란 후라이가 나왔습니다.
그럼 신부님은 그걸 드시지 않고 누군가를 부르셨는데, 거기에 제 이름이 있었을까요? 없었습니다. ^^;
한 번도 불려본 적이 없는데 그럴 때 편애인가? 하는 걸 느끼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같은 모임을 하는 신부님에게 본당의 열악한 사정 때문에 똑같이 모금을 하러 갔는데 나중에 갔던 친구에게는 더 후하게 해 주는 모습을 보면서도 편애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었습니다. 그래서 고운 시선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불편한 마음이 생길 때가 있는데요. 오늘 복음에 나오는 큰 아들도 그런 마음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아버지는 작은 아들을 편애하시는 건가? ... 열심히 자리를 지켜봐야 소용없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저도 그런 마음에 살짝 사로잡혀 있던 차에 비슷한 모습을 바라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에 사로잡히기 시작하면 아버지의 울타리 안에서 누리고 받았던 것들을 쉽게 잊어버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신학교 안에서 먹고 살았던 감사한 기억도 사라지고, 모금을 열어주신 마음도 잊어버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지금 상황도 비슷할지 모르겠습니다. 본당에 계신 신부님들을 생각하면 지금의 처지가 조금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학교에 다니다보니까 다른 마음이 듭니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주변에 어렵게 공부하고 있는 분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생활비나 학비를 걱정하고 아끼며 살아가시는 분들이 있는데요. 그분들을 보면서 ‘내가 생각보다 참 많은 것을 누리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오자마자 잘 마련되어 있는 아파트에서 살고 있고, 한국 티비도 나오고, 전화기도 있고, 외국에 아는 분들이 몇 분 계시다는 것이 참 크고 감사한 일이구나.. 하는 것을 새삼 느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든 생각은 ‘비교’라는 것이 들어오면 이어서 ‘편애하는 건가..’ 하는 불편함이 생기고, 지금 처지에 대한 ‘불평’으로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자비로운 분이셔.. 그런 분이셔..’ 라고 생각하고, 나도 그 울타리 안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누리고 받았는지를 생각해 본다면 다른 마음들, 곧 아버지의 자비를 감동으로 바라보고 나에게 해 주신 일에도 감사하는 마음들이 생길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하루, 아버지의 울타리 안에서 누리고 받은 것들은 무엇인지 한 번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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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되찾은 아들의 비유>
루카복음에 있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루카 15,2-3) 그래서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루카 15,32)입니다. 신앙인이라면 당연히 하느님과 함께 기뻐해야 합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예수님께서 세리들(죄인들)과 어울리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고,그것을 비판했습니다.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루카 15,2)
이 말은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큰아들이 하는 말과 같습니다.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루카 15,30)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죄인들을 처벌해야 하고, 죄인들을 구원에서 제외시켜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큰아들은 작은아들을 처벌해야 하고, 가족 공동체에서 추방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죄 속에서 살던 세리들의 과거의 모습만 생각했고, 회개한 현재의 모습은 보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큰아들은 방탕하게 살던 동생의 과거의 모습만 생각했고,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온 현재의 모습은 보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죄인들 때문에 슬퍼하시는 하느님의 슬픔을 함께 나누지 않았고, 죄인들의 회개를 기뻐하시는 하느님의 기쁨을 함께 나누지 않았습니다. 큰아들은 작은아들 때문에 슬퍼하는 아버지의 슬픔을 함께 나누지 않았고, 작은아들이 돌아와서 기뻐하는 아버지의 기쁨을 함께 나누지 않았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자기들도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고, 자기들이 위선자라는 것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함부로 판단했고, 멸시했습니다. 큰아들은 자기는 효도를 다 했다고 자기 마음대로 생각했고, 자기가 위선자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동생의 죄만 비판했고, 동생을 멸시했습니다.
대부분의 세리들이 죄 속에서 살았던 죄인들이라는 것은 맞습니다. 작은아들은 자기 마음대로 집을 떠나서 방탕하게 살았으니 그가 죄인이라는 것도 맞습니다. 그러나 회개한 세리들은 더 이상 죄인 취급을 받으면 안 됩니다. 작은아들도 회개하고 돌아왔으니 더 이상 죄인 취급을 받으면 안 됩니다. 회개하고 돌아온 사람을 죄인 취급하면서 배척한다면, 그 사람을 받아주신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어떤 바리사이가 성전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루카 18,11-12)
그는 자기가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을 다 잘했다고 자화자찬하고 있습니다. 그 바리사이의 기도는 큰아들이 아버지에게 한 말과 같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루카 15,29)
그는 자기가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고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완벽하게 다 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정말로 죄가 없었을까? 또 큰아들은 정말로 잘못한 일이 하나도 없었을까?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죄 가운데 대표적인 죄는 '위선'입니다. 그들의 선은 겉으로 보기에만 선이고, 사실은 가짜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속으로는 세리들과 다를 것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큰아들도 위선자입니다. 비유의 내용에는 그가 잘못한 일이 구체적으로 안 나오지만, 그가 한 말을 보면 그는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종으로서 했을 뿐이고, 아들로서 일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착한 아들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작은아들과 다를 것 없는 아들이었습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내 것이 다 네 것이다(루카 15,31)."라는 아버지의 말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 말은 물질적인 것들뿐만 아니라 정신적이고 영적인 것들까지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나와 너는 하나다."라는 말이 됩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남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따라서 큰아들과 작은아들도 남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작은아들을 잃었을 때 아버지는 자신의 일부를 잃었고, 그 아들이 돌아왔을 때 잃었던 자신의 일부를 되찾았습니다. 그래서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아버지의 말은(루카 15,32) "내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과 같다."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큰아들은 당연히 기뻐해야 합니다.
사실 바리사이들(율법학자들)과 세리들을 구분하는 일, 큰아들과 작은아들을 구분하는 일은 인간들이 하는 일이고, 하느님 앞에서는 구분되지 않습니다. 모두가 다 죄인들이고, 모두가 다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녀들입니다.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을 가리켜서 죄인이라고 말할 권한이 없습니다. 겸손하게 자신의 죄를 회개할 의무만 있을 뿐입니다.
큰아들도 회개해야 하고,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도 회개해야 합니다. 아버지는 작은아들이 돌아와서 기뻐하고 있지만, 큰아들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어서 여전히 슬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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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1)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루카 15,1-3.11-32 (되찾은 아들의 비유)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그런데 작은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어, 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그가 집에 가까이 이르러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하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돌아오셨습니다. 아우님이 몸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그런데 작은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
아버지가 있습니다.
아버지에게 아들 둘이 있습니다.
작은 아들이 살아계신 아버지께
자기 몫을 요구합니다.
아버지는 작은 아들에게 줍니다.
작은 아들은 자기 몫을 요구함으로써
살아계신 아버지와 관계를 끊습니다.
아버지는 작은 아들에게 나눠줌으로써
작은 아들과 관계를 이어갑니다.
큰 아들은 살아계신 아버지께
무슨 이유인지 아무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큰 아들에게도 줍니다.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가산을 나눠주고
이제는 아무 것도 갖지 않습니다.
오직 두 아들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작은 아들은 자기 몫을 챙겨
살아계신 아버지를 떠납니다.
더 이상 아버지와 함께 하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집 나간 작은 아들을
마음에 애틋하게 담고 있습니다.
따로 있어도 작은 아들과 함께 합니다.
모든 것을 탕진한
작은 아들이 돌아옵니다.
작은 아들이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
아버지는 마냥 좋습니다.
아버지는 잔치를 베풉니다.
큰 아들은 싫습니다.
염치없이 돌아온 동생도
마냥 마음 좋은 아버지도
이들이 벌이는 잔치도.
큰 아들이 드디어 화를 냅니다.
이미 두 아들에게 모든 것을 나눠주어
이제는 아무 것도 갖지 않은 아버지에게.
이미 아버지의 모든 것을 가진
큰 아들이 뒤늦게 화를 냅니다.
자기 몫을 달라고.
아버지는 아무 것도 줄 수 없습니다.
이미 모든 것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가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마음이 아픕니다.
자기 몫을 모두 탕진한 작은 아들보다
자기 몫을 깨닫지 못하는 큰 아들 때문에.
하느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모든 것을 가졌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당신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가졌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당신을 주셨고
이제 우리가 당신이 되어
이제 우리가 당신이 하셨듯이
이제 우리를 모든 이에게 주기를 바라십니다.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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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아버지의 아들딸은 우리의 형제자매입니다.
"아버지의 아들이 살아오니까 기쁘십니까?"
"네 아우가 살아왔는데 기쁘지 않단 말이냐?"
살아 계신 아버지를 마치 세상을 떠난 존재인 양제 몫의 유산을 뻔뻔스럽게 요구하며 스스로 아버지와의 관계를 끊어버리고 제멋대로 살다가 망가질 대로 망가진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작은 아들이 돌아왔습니다.
이미 아들이기를 포기한길 떠난 아들의 뒷자리에 눈을 떼지 못하고 이제나 저제나 돌아오겠지 실 날 같은 희망 거두지 않으며 눈물이 마를 새 없이 기다려온 아버지에게는 세상 어느 것에 비할 수 없는 가장 큰 선물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아들로 다시 받아들여질 희망조차 사치스러웠던 작은 아들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버지’에게는 ‘아들’이었습니다. 가족들 내팽개치고 가출했던 세상 온갖 몹쓸 짓에 몸을 던졌던 뒤도 안 돌아보고 집을 나서는 순간 이미 넌 내 동생도 아니라 마음 먹었던 꼴 보기도 싫은 동생이 돌아왔습니다.
언제나 아버지에게 충실했던 자신에게는 벗들과 어울릴 소박한 술상조차 마다하셨던 때로는 섭섭하고 때로는 두려웠던 아버지는 그를 내쫓지 않았습니다. 꾸중 한 마디 없이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이미 마음속에서 동생의 존재를 지워버린 형은 그저 묵묵히 아버지와 함께 했던 큰 아들은 이 모든 것이 못마땅했습니다.
염치없이 집에 기어들어 온 동생 놈은 그렇다 쳐도, 무엇이 좋은지 속없이 잔치를 베푸는 아버지의 심사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집에 들어온 사람은 ‘동생’이 아니라, 그저 ‘아버지의 아들’일 뿐이었습니다. 이미 동생이 아닌 사람을 아들로 받아들이시는 아버지는 아버지가 아닌 낯선 누군가로 다가왔습니다.
"동생이 살아오니까 기쁘시지요. 오늘 함께 멋지게 어울려요."
"그래 오늘 우리 흠뻑 취해보자구나."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이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오늘도 많은 형제자매들이 아버지의 집을 떠납니다. 오늘도 많은 형제자매들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옵니다.
나는 어제도 오늘도 여전히 아버지의 집을 지키고 있는데 나는 내일도 지금까지처럼 아버지의 집을 지키고 있을 텐데 아버지의 집을 떠나는 형제자매들의 등 뒤에서 거친 말 내뱉지 않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잘 모르고 이렇게 떠나가지만, 언젠가 다시 아버지의 집으로 꼭 돌아오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아버지와 함께 기다릴게 라며 오히려 따뜻한 마음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염없이 후회의 눈물 흘리며 축 쳐진 어깨 가누지 못해 비틀거리며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는 형제자매들을 넉넉한 마음과 환한 웃음으로 받아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다시 열심히 살아가는 형제자매들에게 질시의 눈빛 거두고 혹시나 지난날의 어두움에 힘겨워하지 않을까 따뜻한 사랑으로 어깨 감싸며 다시는 쓰러지지 않을 용기를 심어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돌아온 아들딸들을 오히려 나보다 더 곱게 품에 보듬는 아버지를 향한 원망의 마음 버리고 참으로 곱고 따스한 아버지의 사랑을 조금이라도 더 내 삶에 새기고 새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아버지의 아들딸들은 우리의 사랑을 받아야 할 우리의 형제자매들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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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고흥 도화성당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기억하며..}
언젠가 첫 주임 신부로 사목을 했던 광주 월산동 신자분들 몇 분이 놀러 오셨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하다가... 월산동 본당에 있을 때에 말 없이 열심했던 누구(?)자매님은 잘 계시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매는 벌써 세상을 떠나셨다는 것입니다.
"아뿔싸... 잊고 있었구나!... 그 영혼을... 그때 그 자매님께서 암 투병중이셨는데..."
오늘 복음은 “한 아버지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아버지는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기약도 없는 아들을 날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까맣게 잊고 허랑방탕한 날들을 보내고 있었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한 시도 잊지 아니했습니다.
이렇듯 애타게 기다리던 아버지인지라, 아직도 서로의 거리가 먼데, 먼저 아들을 알아보고서 달려간 것입니다. 그리고 거지가 된 아들의 모습이 측은해서 견딜 수 없어 합니다. 얼마나 고생하고, 얼마나 춥고,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이 모양이 되었을까? 불쌍해서 목을 끌어안습니다. 그렇게라도 살아왔다는 것만이 기뻐서 입을 맞춥니다.
이 감동 깊은 장면이 고운님들의 눈에 선명하게 보이지 않습니까? 멀리서 아들의 모습을 보고 너무도 기뻐서 두 팔을 벌리고 달려가는 백발이 성성한 아버지! 그리고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얼굴을 비벼대면서 입을 맞추는 이 감동 깊은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을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께서도 고운님들 돌아오기를 그토록 기다리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시기 바랍니다.
현재 우리의 모습이 아무리 죄스러워도 다 괜찮습니다. 왜냐면... “너 그래 가지고 무슨 낯짝으로 아비를 찾아 왔느냐?"며 묻지도 따지지도 않으시고, 그리고 한 마디 야단도 치지 않으시는 하느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0장 17절에 보면...
“나는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의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으리라.”
그러자 집을 나갔던 둘째 아들은 차마 열리지 않은 입을 열어 아버지께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아버지는 아들의 마음을 다 알았다는 듯 더 이상 말을 못하게 합니다. 그리고 종들에게 “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겨 주어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즐거운 잔치가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이 왜, 아버지를 떠나갔습니까? 아버지의 간섭과 속박에서 벗어나 제 멋대로 살기를 원해서였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하느님을 떠나 제 마음대로 사고자 하는 마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잃어버린 자식을 애타게 찾는 아버지... 문 밖에 서서 기다리는 아버지... 그리고 그 자식이 돌아왔을 때 즐거워하고 기뻐서 잔치를 차려주시는 아버지이신 것입니다.
구약에 아가서를 보면... 신랑이 신부를 간절하게 기다리며 찬미의 노래를 부릅니다.
"나의 연인이여, 돌아와요..보고 싶어요.."
이런 마음으로 아버지는 매일 매일 아들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나의 아들아, 돌아와..너무 보고싶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아버지의 마음으로... 잃어버린 한 영혼을 기다리다가 찾으셨을 때에 당신의 사랑과 자비를 충만하게 베푸시며 기뻐하십니다.
영적일기를 마무리 하면서...
내 몸과 마음에서 잊혀진 한 영혼을 기억하시기를...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사는지 모르지만...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가 그 한 영혼에게 함께 하기를...아멘.
(매월 첫째주 토요일 은인 감사 미사는 두레박 사제의 개인 사정으로 다음 주 토요일로 옮겨서 은인 감사 미사를 봉헌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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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부산본원 김종오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의말씀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루카 15,21-24).
당신을 떠납니다. 애타게 부르시는 당신의 목소리를 뒤에 두고 떠납니다. 당신의 음성을 들어도 흘려서 듣고 우리 마음을 당신이 두드려도 마음의 문을 닫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부르심보다 우리 욕망에 귀를 기울일 때마다 우리는 당신을 떠납니다.
당신을 떠납니다. 당신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원하는 것을 찾으러 떠납니다. 진정 필요한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지만 우리는 다른 것을 원합니다. 당신께서 원하시는 것을 우리가 원하지 않을 때마다 우리는 당신을 떠납니다.
당신을 떠납니다. 당신께서 걸으신 길이 아니라 우리의 길로 떠납니다. 당신께서 인도하시는 길이 아니라 ‘나의 길’을 고집합니다. 별이 비추는 빛을 따라 걷기보다 캄캄한 어두운 밤길을 방황하며 홀로 걸어갑니다. 당신의 길을 벗어 날 때마다 우리는 당신을 떠납니다.
우리는 떠나도 당신은 못 떠나십니다. 우리는 듣지 않아도 당신은 부르시고, 우리는 마음을 닫아도 당신은 두드리십니다. 우리는 당신을 원하지 않아도 당신은 우리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무관심해도 당신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나의 길’을 고집하여도 당신은 ‘바른 길’을 보여주십니다. 우리가 바른 길을 벗어나 걷더라도 바른 길로 다시 오리라고 당신은 믿어주십니다. 캄캄한 길을 걸어가며 빛을 보지 못해도 당신은 우리를 비추어 주십니다.
‘보아도 볼 수 없고 들어도 듣지 못하지만’ 당신은 보여주시며 들려주십니다. 우리는 떠나도 당신은 죽어도 우리 안에 머무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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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좋은 글을 읽었습니다. 어머니와 두 아들이 기차를 타고 여행을 갔습니다. 어머니는 책을 읽고 있었고, 아이들은 그림책을 읽었습니다. 아이들이 화장실을 가고 싶다고 했을 때입니다. 어머니는 다녀오라고 하면서 계속 책을 읽었습니다. 아이들이 심심하다고 하였을 때입니다. 어머니는 탁자 위에 신문을 깔고 아이들의 운동화를 벗어서 끈을 다시 매보라고 하였습니다. 아이들은 신발의 끈을 풀었고, 다시 매면서 집중력을 키웠고, 손의 근육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내릴 때입니다. 어머니는 신문지를 치웠고, 탁자를 깨끗이 닦았습니다. 늘 책을 가까이 하는 어머니를 본 아이들은 책을 가까이 할 것입니다. 앉은 자리를 깨끗이 정리하는 어머니를 본 아이들은 주변을 잘 정리할 것입니다.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해 주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해야 할 길을 보여주는 어머니의 모습입니다.
시간이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합니다.
첫째 시간은 공간과 함께 우리의 존재를 가능하게 합니다. 시간과 공간 안에 우리는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시간은 변화와 움직임을 가능하게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꽃이 피고,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들이 자라납니다.
셋째 시간은 흐름과 역사의 토대가 됩니다. 시간을 통해서 우리는 과거, 현재, 미래의 인식을 갖게 됩니다. 아직까지 우리는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과학 기술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분입니다.
넷째 시간은 우리의 추억과 우리 기억의 창고가 됩니다. 이 창고 안에 우리는 의미, 가치, 보람, 사랑, 기쁨, 슬픔을 담아냅니다. 다른 시간들은 세상의 모든 생명체가 공유하지만 의미와 가치, 보람과 추억, 기쁨과 슬픔의 시간은 오직 인간만이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커다란 축복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그 시간의 창고에 우리는 무엇을 담아야 할까요?
오늘 우리는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여러분은 누가 주인공인 것 같습니까? 아들을 사랑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아버지, 돌아온 아들에게 잘못을 묻지 않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신 아버지가 있습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열심히 일을 했고, 아버지의 집이 하느님 나라임을 알지 못하고 돌아온 동생에게 잘해 주시는 아버지를 원망하는 큰 아들이 있습니다. 지난 잘못을 뉘우치고 아버지께 용서를 청하던 둘째 아들이 있습니다.
우리들 모두에게는 큰 아들과 같은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것은 무관심입니다. 그것은 나와 상관없는 것들에 대한 외면입니다. 그것은 잘못한 이들에게 용서와 관용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단죄하고 심판하는 것입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태도입니다.
아버지는 하느님 나라에 있으면서도 언제나 집을 나간 둘째 아들들 생각하였습니다. 그 아들을 기다렸습니다. 몸은 비록 하느님 나라에 있었어도 마음은 둘째 아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것이 관심이며, 그것이 사랑입니다. 첫째 아들의 마음으로 사는 것은 몸은 천국에 있다 해도 천국에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은 멀리 떨어진 특별한 공간이 아닙니다. 천국은 고통 중에 있는 사람, 억울한 사람, 정의를 위해서 투신하는 사람,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들과 함께 희망을 이야기하고, 평화를 이야기하고,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이 천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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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의 기쁨>
-하느님을 닮아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자-
순복음교회라는 교회도 있듯이 오늘 복음이야말로 복음 중의 복음, 순복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지만 이보다는 ‘자비로운 아버지의 비유’라함이 더 적절할 것입니다. 아버지이신 하느님이 얼마나 자비로운 분이신지 너무나 잘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 순복음 이야기의 중심은 자비하신 아버지입니다.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기쁨에 동참하라는 것이며 자비하신 아버지를 닮으라는 것입니다. 하여 강론 제목도 ‘하느님의 기쁨-하느님을 닮아 하느님 자녀답게 살자’-로 정했습니다.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환히 드러나는 작은 아들과 큰 아들의 양면을 지닌 죄인들인 우리의 모습입니다.
세례받은 우리를 일컬어 ‘하느님의 자녀’라 부릅니다. 매일 평생, 하루에도 수없이 마음을 다해 ‘하느님의 자녀되어 구세주의 분부대로 삼가아뢰오니’에 이어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우리들입니다.
또 같은 루가복음에서‘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는 주님의 간곡한 당부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사람이 물음이라면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는 답입니다. 필생의 평생과제가 자비하신 아버지를 닮아가는 일임을 깨닫습니다. 과연 살아갈수록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를 닮아가는 ‘자비의 여정’인지요. 이보다 더 중요한 과제는 없을 것입니다.
죄인인 우리들입니다. 세상에 죄인인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하느님 관심의 초점은 ‘무죄한 의인’이 아니라 ‘회개한 죄인’입니다. 오늘 복음의 작은 아들과 큰 아들은 그대로 죄인인 우리의 모습을 반영합니다. 우리의 양면성입니다. 외관상 작은 아들이 큰 죄인 같지만 깊이 속을 들여다 보며 큰 아들 역시 큰 죄인입니다.
자바하신 하느님 아버지는 절대로 발본색원 죄를 추궁하지 않습니다. 무능하다 싶을 정도로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입니다. 자비는 자유입니다. 인격은 자유입니다.
강요하거나 강제하지 않고 인간의 자유를 최대한 존중하고 배려하시는 인격적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이십니다. 참으로 너그러우시고 자비하시며, 무한히 참고 기다리시는 하느님 아버지이십니다.
자식이기는 부모 없다고 작은 아들의 청을 마다하지 않으시는 무책임할 정도로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이십니다. 작은 아들이 타락한 중에도 회개의 촉발점이 된 것은 바로 자비하신 아버지의 추억이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를 떠난 인간의 자유가, 방종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환상의 비극인지 처절히 깨달아 제정신이 든 작은 아들입니다.
완전히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로서의 존엄한 품위를 상실한 작은 아들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출구’는 열려있습니다. 바로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를 향해 돌아가는 회개입니다. 마침내 절망의 나락에서 구원의 빛처럼 작은 아들의 칠흑같은 어둠의 내면을 밝힌 자비하신 아버지의 추억이었고 이어지는 회개입니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 구나.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감동적인 회개입니다. 회개를 통해 자기를 발견했을 때 참된 겸손입니다. 넘어지면 벌떡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회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십시오. 과거 아버지로부터 받은 따뜻한 사랑의 추억이 있었기에 이런 작은 아들의 회개입니다. 정말 누군가로부터 진정 사랑받은 추억이 있으면 결코 자살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사랑의 추억으로 회개하여 일어나 살아갈 것입니다.
작은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환대의 사랑이 감동적입니다. 바로 하느님의 마음이 이러합니다. 오매불망 작은 아들의 귀환을 기다렸던 아버지임이 분명합니다. 그가 아직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는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춥니다. 울었다는 묘사는 없지만 대성통곡 기쁨의 울음을 울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아버지는 죄를 뉘우쳐 회개하는 작은 아들에게 일체의 추궁이나 꾸짖음이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며 잔치를 명하십니다. 회개한 죄인에 대한 하느님의 환대는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의 기쁨입니다. 잃었던 아들을 찾음으로 하느님의 슬픔은 기쁨으로 바뀐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 오직 회개 하나뿐입니다. 회개하여 빈 손, 맨 몸으로 와도 그 자체가 하느님께는 최고의 기쁨의 선물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도 부족할 것이 없는 하느님 아버지이십니다. 회개한 죄인 빼놓고는 하느님께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작은 아들 같은 죄인인 사람들에게 참 좋은 회개의 표징이 되는 말씀입니다. 거지같은 삶에서 회개를 통해 아버지를 만남으로 왕자같은 존엄한 품위를 회복한 작은 아들입니다. 이런 분위기로 미사잔치에 참여하면 얼마나 이상적이겠는지요. 끊임없이 회개한 죄인들을 위해 축제의 미사잔치를 마련해주시는 하느님 아버지입니다.
세상 곳곳에 널려 있는 작은 아들들입니다. 하느님 자녀로서의 존엄한 품위를 상실하고 왕자가 아닌 거지처럼 살아가는 죄인인 작은 아들들은 얼마나 많겠는지요. 아버지의 집인 천국을 바로 옆에 놔두고 지옥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죄인인 작은 아들들말입니다.
큰 아들 역시 죄인이요 그대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거리상으로 가장 아버지와 멀리 떨어져 있던 작은 아들이 내적으로는 가장 가까이 있었던 반면, 거리상으로 가장 아버지와 가까이 있었던 큰 아들은 내적으로는 가장 멀리 있었음이 참 역설적입니다.
아버지의 자녀로서 산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종처럼 살았던 참 자존감 약한 큰 아들이었습니다. 작은 아들을 환대하는 아버지의 사랑에 크게 삐진 큰 아들의 옹졸하고 편협한 적나라한 내면 또한 우리의 모습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큰 아들의 항의와 더불어 격렬한 추궁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저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이 또한 우리의 모습입니다. 생각없이, 종처럼, 완벽주의자로 살아온 큰 아들입니다. 아버지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자비를 전혀 배우지 못했습니다. 함께 했지만 아버지의 마음에서 멀리 있었습니다. 아우를 ‘저 아들’이라 부르며 거리를 둡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차이는 이토록 큽니다.
아버지의 자녀로서 아버지의 자비를 닮아야 할 우리의 평생과제를 다시 상기하게 됩니다. 일체의 화냄이나 실망감 없이 자비하신 아버지답게 큰 아들에게 호소하시는 무력해 보이기까지 한 자비하신 아버지의 대응입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저 아들’에서 ‘저 아우’로 형제임을 환기시키는 아버지입니다. 회개하여 하느님의 기쁨에 참여하라는 큰 아들은 물론 우리 모두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이제 공은 큰 아들에게 넘겨졌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큰 아들의 반응이 없습니다만 아마 회개하여 기쁨의 잔치에 참여하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입니다.
작은 아들, 큰 아들 같은 죄인인 우리들에게 주어진 평생과제는 끊임없는 회개로 자비하신 아버지를 닮아가는 것임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바로 이것 하나가 하느님이 바라시는 바 유일한 소망이자 기쁨입니다. 하여 끊임없는 기도입니다.
기도가 답입니다. 기도하는 대로 살고 사는 대로 기도합니다. 바로 미카 예언자처럼 하느님께 보살펴 달라고, 허물을 용서해 달라고, 자애를 베풀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님, 당신께서 저희의 모든 죄악을 바다 깊은 곳으로 던져 주십시오. 먼 옛날 당신께서 저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저희를 성실히 대하시고, 자애를 베풀어 주십시오.”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회개하여 당신 기쁨의 미사잔치에 참석한 작은 아들, 큰 아들 같은 죄인인 우리 모두에게 한량없는 은혜를 베푸시어 날로 자비하신 당신을 닮아 당신의 자녀답게 살게 하십니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내 모든 잘못을 용서하시고, 내 모든 아픔을 없애시는 분. 내 목숨을 구렁에서 구해 내시고 은총과 자비의 관을 씌워 주시는 분, 주님을!”(시편104,3-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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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친구들과 가끔 당구를 치곤합니다. 그런데 당구를 치다보면 어느 순간, 도저히 길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냥 상대방에게 대신 치라고 할 수 없으니 아무렇게 힘껏 칩니다.
재미있는 것은 포기하고 힘껏 질렀는데 실수로 그 길이 없는 상황을 풀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보았던 길이 아니기 때문에 미안하다는 의미로 인사를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도 이길 수 있습니다.
실수나 실패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요? 사실 진리로 가는 길은 다양합니다. 따라서 틀리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부끄러워하는 것이 진짜 부끄러운 것이 아닐까요?
토마스 에디슨은 1,000번의 실패를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 1,000가지를 발견한 것이 성공이라고 말합니다.
제가 많은 글을 쓰고 있지만, 원고를 작성할 때 단 한 번도 멈추지 않고 단번에 쭉 써내려갈까요? 아닙니다. 수많은 첨삭이라는 실패를 통해서 겨우 제 마음에 드는 글이 나올 수가 있습니다.
실패는 강한 의지를 이끌어내기도 하고 또 반대로 의지를 내려놓게도 만듭니다. 한 길을 끈질기게 갈 수 있는 힘을 주기도 하고, 반대로 변화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투지를 더욱 더 불태우게 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고, 반대로 가지고 있던 지혜까지 상실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실패를 통해 현실을 깨닫게 하기도 하고, 반대로 현실을 어둡게 만드는 것이 실패입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실패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아닐까요? 모두가 실패할 가능성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또한 계속해서 실패를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실패를 어떻게 받아들이며 사느냐에 따라 지금의 모습이 달라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명한 탕자의 비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돌아온 작은아들을 기쁘게 맞아들이는 아버지가 바로 하느님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란 이렇게 다시 돌아오는 사람을 기쁘게 맞아들이는 무한함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작은아들의 모습입니다. 작은아들 스스로 말하듯이 분명히 하늘과 아버지께 큰 죄를 지었습니다. 실패의 순간입니다.
이때 작은아들은 “다 틀렸다.”라고 말하면서 실패에 그냥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유일한 희망이라 할 수 있는 아버지께로 향할 것을 다짐하고, 실제로 찾아가서 용서를 청합니다.
이렇게 실패에 머무르지 않고 희망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을 주님께서는 원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과연 어떨까요? 그 많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언제나 우리를 힘껏 안아주시는 주님이 계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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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외의 모습을 간직합시다.}
소설가 김훈은 말합니다.
“기자를 보면 기자답고, 형사를 보면 형사 같고, 검사를 보면 검사 같은 자들은 노동 때문에 망가진 것이다. 뭘 해먹고 사는지 감이 안 와야 그 인간이 온전한 인간이다.”
이 말에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실 딱 보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사람들이 실제로 있습니다. 여기에는 저 역시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저를 보고서 이렇게 말합니다.
“신부님은 사복을 해도 딱 신부님 같아요."
김훈 작가의 말처럼 저 역시 직업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여기에 파묻혀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물론 이 역시 나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만큼 자신의 자리에 충실하다는 말도 되니까요.
그러나 사람은 참으로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지요. 나만의 독창적인 캐릭터는 의외의 모습들이 모여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 의외의 모습을 내지 못하는 것은 나의 일 안에서 헤어나지 못하기 때문인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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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나 일어나 아버지께 가리라. 가서,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고 말하리라.”(루가 15,1-3,11-32)
참으로 벅찬 아름다움입니다. 죽어서 눕힌 채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아버지께 가는 길이기에 그토록 아름답습니다. 그것도 떳떳하게 성공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서 돌아가는 길이기에 더더욱 가슴 저미도록 아름답습니다. 뉘우치고 돌아가서 행동으로 죄를 고백하는 일, 참으로 이토록 아름다운 일은 없습니다. 그러기에, 이를 두고,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께서 기뻐하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회개는 죄에 대해 뉘우치고 통탄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죄로부터 일어나 아버지께 돌아가는 행위 속에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베드로와 가리옷 유다가 다 같이 스승이신 예수님을 배반하고서 울음으로 통탄해 했지만, 베드로는 예수님께 돌아와 구원의 길을 갔고 유다는 돌아오지 않음으로써 파멸의 길을 간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회개는 ‘뉘우침’이라는 내면적인 통회와 ‘돌아옴’이라는 외면적인 행동이 요청됩니다. 그리고 이 ‘뉘우침’과 ‘돌아옴’ 뒤에는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작은 아들은 넘어지고, 무너지고, 부서진 바로 그 자리에서, 다름 아닌 아버지의 집에서 받은 사랑, ‘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없고서야 어떻게 진정한 회개라 할 수 있을까요?
‘아버지는 돌아오는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춥니다. 그리고 미리 마련해 두었던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반지를 끼워주고, 신발을 신겨줍니다.’(루카 10,20-22 참조)
참으로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사실, 아버지는 아들이 방종으로 유산을 다 탕진하리라는 것을 훤히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방탕한 생활로 재산을 허비할 때에도, 결코 그에게서 신뢰를 거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 당신을 거부하고 배신할 때마저도, 결코 그에게서 희망을 거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가 돌아오리라고 믿고 희망하며 좋은 옷과 반지와 신발을 “미리 마련해” 두었습니다.
마치 바오로 사도가 <로마서>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로마 5,8).
이것이 바로 아들을 향한 결코 멈추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바로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이 오늘 <복음>에서는 잃어버린 아들이 “돌아올 때까지” 믿고 희망하며 기다리는 아버지의 사랑으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비록 죄에 떨어졌을지라도, 결코 멈출 수 없는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입니다.
아들은 이렇게 가산을 탕진할 줄을 뻔히 알면서도, 믿어주고 희망하고 있는 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은 것입니다. 바로 이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그로 하여금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하는 원동력이었던 것입니다. 그를 새로운 삶에로 태어나게 하는 원동력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가슴으로 뉘우치는 것을 넘어,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행동을 넘어, ‘새로운 탄생’에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결코 멈추지 않으시는, 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 말입니다. 비록 보잘 것 없는 죄인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치 전부인 양 소중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지극하신 사랑 말입니다. 오늘, 아버지께서는 그 크신 사랑으로 우리를 품으십니다.
이처럼, 회개는 죄에 때한 깨달음에서 온다기보다, 오히려 ‘사랑에 대한 까달음’에서 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회개란 자신의 죄보다도 더 깊은 하느님의 사랑을 보는 것이며, 상처가 깊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깊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사순시기를 보내는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의 상처를 바라보면서, 오히려 그리스도의 사랑이 깊어갑니다. 하여, 회개는 단순한 죄책이나 자책이 아닌, 그분의 사랑에로의 귀환이요, 그분께 대한 기쁨과 찬미, 탄성의 노래가 됩니다.
오늘 우리는 작은 아들과 함께 이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를 부릅니다.
“나 일어나 아버지께 가리라. 가서,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고 말하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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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반신부의 복음 묵상
<사랑을 기억하라>
저는 램블란트가 그린 ‘탕자의 귀향’을 좋아 합니다. 그 그림은 바로 오늘 복음의 내용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품에 안기는 아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아버지의 눈은 사시가 된 채로 그려져 있습니다. 아버지는 집나간 아들이 그리워 마음과 눈이 늘 아들에게로 향하여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들이 어떤 행동을 취하든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한결같고 또 그칠 수가 없는 법입니다. 자식은 부모를 땅에 묻지만 부모는 자녀를 가슴에 묻습니다. 무릎을 꿇은 작은 아들은 다 닳아버린 신발 때문에 발바닥을 드러낸 채 아버지의 가슴에 모두를 맡겨버렸고 그 주변에서 사람들이 그들을 바라봅니다. 한 구석에서는 희미하게 보일 듯 말 듯 한 여인이 이 장면을 애달프게 지켜보고 있는데 어머니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들이 용서를 청하든 그렇지 않든 돌아온 것만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시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우리의 하느님을 발견합니다. 우리보다 먼저, 그리고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계시며 내가 알기도 전부터 나를 사랑하고 계시는 하느님 아버지, 나의 허물과 잘못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용서하시며 품어주시기에 감사하고 기뻐합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회개한 작은 아들을 볼 수 있습니다. 아들이 옛 생활을 버리고 아버지께 돌아왔는데 그것은 아들이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집의 풍요로움을 기억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아버지의 집 처지가 밖에 보다도 못하였다면 그는 아버지 집을 구지 찾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넉넉함을 기억한다는 것은 큰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자비로우신 아버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허물과 잘못, 죄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는 큰 사랑으로 감싸주시는 아버지는 바로 우리 하느님 아버지이십니다. 단죄하기 전에 풍성한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하느님의 품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집을 나간 아들이나 집안에 붙어있던 아들이 모두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루카15,12). 하여 자기 것을 챙겨서 집을 나갔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생각지도 않고 자기 좋을 대로 한 것입니다. 반면 큰 아들은 아버지의 품 안에 있으면서도 그 사랑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고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루카15,29). 하며 투정을 부렸습니다. 큰 아들의 마음에는 이만큼 했으니 이만큼은 받아야 된다는 보상심리가 잠재하고 있었는데 결국 그것이 밖으로 표출되고 말았습니다. 바로 그 두 아들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큰 아들이든 작은 아들이든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며 아버지 품을 그리워하는 사순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자비와 사랑이 넘치는 아버지 품에서 행복하기를 희망합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 49,15).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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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이병우 루카 신부님]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루카15,2)
이렇게 투덜거리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들려주시는 예수님의 비유 말씀이 바로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15,11-32)입니다.
'복음 중에 복음'이라는 이 비유는 예수님의 존재이유이며, 예수님의 신원 그 자체입니다.
탕자가 되어 집으로 돌아온 작은 아들, 그 아들을 조건없이 품어 안아 주신 아버지, 그리고 그런 모습을 못마땅해 하면서 받아들이지 못하는 큰 아들!
나는 그런 아버지인가?
나는 그런 작은 아들인가?
나는 그런 큰 아들의 모습은 아닌지?
이 비유의 핵심은 회개하는 아들과 그 아들을 조건없이 품어 안아주시는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루카15,21)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루카15,22)
정말 착각하지 말고, 교만 덩어리를 집어 던지고 작은 아들처럼 솔직하게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면서 아버지께 돌아갑시다!
그리고 그런 아들을 품어 안아 주시는 아버지가 되어 봅시다!
그렇게 하는 것이 내가 사는 길, 구원받는 길입니다. 아멘.
"당신께서 저희의 모든 죄악을 바다 깊은 곳으로 던져 주십시오."(미카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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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오로수도회 故 유광수 야고보 신부님]
<아버지>
램브란트의 "탕자의 비유" 그림은 매우 유명하다. 그 그림을 보면 아버지가 돌아온 작은 아들을 껴안고 있는 모습이다.
늙은 아버지의 눈은 지긋이 잠겨 있고 아들을 껴안은 아버지의 한 쪽 손은 아버지의 손이요 다른 한쪽은 어머니의 손이다.
아버지 품에 안긴 작은 아들의 신발은 다 달아서 낡아 떨어졌고 발뒤꿈치는 굳은살이 박혔다. 옷은 남루한 옷차림에 아버지의 품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껴 우는 모습이다. 아버지는 우는 작은 아들의 등을 아버지의 손과 엄마의 손으로 어루만져 주며 감싸주고 있다.
아버지의 재산을 가져다가 다 낭비하며 방탕한 생활을 했던 아들을 나무라는 엄한 아버지의 모습도 그리고 돌아온 아들을 꾸짖는 모습도 없다. 오직 돌아온 아들을 반갑게 반기며 그 동안 아버지 곁을 떠나 고생했던 아들을 위로해주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처음과 똑같이 아들을 사랑해 주는 아버지의 모습이다.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조금도 변함 없이 한결같다. 늘 넉넉함과 포근함이 아버지의 품이고 언제나 반겨주고 안아주는 분이 아버지이시다. 작은 아들의 잘못을 보지 않으시고 오직 돌아온 것만으로도 감격해서 잔치를 벌이시는 아버지이시다.
아버지 앞에 작은 아들의 모습은 정말 가난하고 나약한 모습이다. 얼마나 많이 방탕한 생활을 하며 돌아다녔던지 신발이 다 달았고 맨발로 돌아왔을까?
아버지 집을 떠날 때 그처럼 당당하고 의기 충전했던 모습은 어디 가고 마치 젖떨어진 어린이처럼 아버지 앞에 무릎꿇고 아버지 품에 안기는 어린이의 모습이다.
이 그림의 중심은 방탕한 아들에게 있는 것도 아니고 그의 낭비 생활 또는 그의 귀향에 있는 것도 아니다. 이 비유의 중심은 아버지이시다.
아버지 곁을 떠난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아버지, 아버지의 재산을 다 날려버리고 빈 털털이로 돌아오는 아들을 보고 달려가서 입맞추고 안아주며 반가워하시는 아버지, 예전의 아들의 권리를 되찾아 주시는 아버지의 사랑이 중심이다.
바로 이 아버지가 하느님이시다. 아버지는 유산을 나누어 달라는 아들의 청을 즉각 거절하거나 적어도 바보 같은 짓을 하지 말도록 충고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재산을 나누어주고 작은 아들이 자기 가고 싶은 대로 가도록 놓아주었다. 아마도 아버지는 아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계셨는지도 모른다
즉 아들이 아버지 집을 떠나는 것은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젊음의 충동과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 그리고 멀리 있는 미지의 것에 대한 야망과 새로운 경험에 대한 욕망이었다.
시골에 있는 젊은이들이 답답하게 시골에 틀어 박혀있기 보다는 서울에 올라가서 새로운 세계를 경험해보고 싶어하는 그런 충동이 바로 작은 아들에게도 있었다는 것을 아버지는 알고 계셨는가보다.
아버지는 작은 아들을 말릴 수도 있었을 것이고 꾸짖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미리 막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작은 아들을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두신다. 왜 그러셨을까?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자유를 주셨다. 일단 자유를 주신 이상 하느님은 인간의 자유를 보장해주신다. 자유를 위해 창조된 이상 인간이 제 마음대로 만사를 결정해 가도록 방임해 두신 것이다. 자유를 주고 나서 일일이 간섭을 한다면 그것은 자유를 주신 것이 아니다.
비유에서 작은 아들은 점점 더 깊은 구렁으로 빠져든다. 처음에 아들은 약간의 돈을 소비하는 사람이었고 실패를 몇 번 맛본 사람에 불과했다. 그러나 다음에는 주색에 빠져 흥청거리기 시작했고, 최악의 비참한 지경이 되어 돼지를 돌보다 굶어 죽게 될 신세가 되었다. 그 당시 사람들에게 돼지란 가장 더러운 동물로 취급하였다.
하느님은 인간이 자기가 선택한 길로 가는 것을 그대로 놓아두시며 그 행동의 결과로 밑바닥까지 떨어지도록 그냥 놔두신다. 인간 스스로 모든 것을 결정하고 혼자 서 있을 수 있다고 확신할 때,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이 제 마음대로 결정하게 놔두신다.
그래서 자신의 힘으로만 위로 오르려 할 때 그의 의지와는 반대로 깊은 곳으로 거꾸로 떨어지는 절망을 경험하게 하신다. 이상한 것은 인간은 누구나 자기가 하는 일이 잘 될 때 하느님께 구원을 청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 혼자서 모든 것을 결정하려드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 결정대로 행해져 화를 당할 때 그 탓을 하느님께 돌리려 한다.
작은 아들은 더 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을 때까지 깊은 바닥으로 떨어졌을 때 비로소 자기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하고 말하리라 생각하고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아들은 자기가 아버지께 어떤 것도 요구할 수 없도록 모든 권리를 상실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아버지께 돌아 온 아들을 아버지는 사랑스럽게 받아주셨다.
비유에서 아버지는 아들을 기다리고 있다가 먼저 방탕한 아들에게 달려가 그를 불쌍히 여겨 아들이 자기 죄를 고백하는 것을 채 끝내지도 못하게 했다. 그리고는 아들이 돌아왔다 하여 잔치를 준비하게 했다.
하느님께서도 회개한 죄인을 이렇게 대해 주신다. 사람이 제정신을 차리고 반성하여 다시 돌아 올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의 은총 덕분이다.
하느님께서 다시 받아들이신다는 것은 인간이 지은 죄를 모르시거나 잘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 덕택일 뿐이다. 하느님께 뉘우치고 집으로 돌아온 죄인을 당신의 사랑으로 덮어 주시는 것, 과거의 모든 일을 잊으시고 죄로 생긴 빚을 헤아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죄인을 전보다 더 잘 대해 주신다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의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이다.
아버지의 관대한 성품은 곧 하느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게 해주는 것이다. 무한한 사랑, 사랑으로 돌아온 아들을 감싸 안아주시고 새 옷으로 갈아 입히시고 가락지를 껴주고 돌아온 아들을 축하해주기 위해 잔치를 벌이시고 음악으로 흥을 북돋아 주시는 것에 하느님의 사랑이 묻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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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김훈일 세례자 요한 신부님]
<잃었던 아들의 비유>
잃었던 아들의 비유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예수님의 유명한 비유 중 하나입니다. 재산을 나누어 달라는 작은 아들의 요구를 아버지가 들어주기까지는 순탄치 않았을 것입니다. 세상에 어느 아버지가 자식이 재산을 탕진할 것을 알면서도 나누어 주겠습니까?
아들을 설득도 하고 매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아버지는 답답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뒤로 하고 작은 아들에게 많은 재산을 나누어 줍니다. 오직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기를 바라면서 말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이러한 상황에서 아들을 떠나지 못하게 붙드는 것이 부모로서 올바른 태도인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을 이제 하느님께 온전히 맡깁니다.
고통과 처절한 실패는 있겠지만 하느님께서 그 아들을 바로 세우실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그 아들을 하느님께 맡기고 아들을 떠나보내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고 돌아온 아들은 이제 예전의 그 아들이 아닙니다. 그는 비로소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삶을 올바로 세우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신 하느님의 마음도 같습니다. 우리가 세상살이에 지치고 죄의 고통에 짓눌릴 때 하느님의 사랑을 생각합시다. 하느님께서는 어제도 오늘도 이제 본향인 아버지의 집으로 우리들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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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루카 15, 20)
다시 시작하는
생명의 힘찬
봄입니다.
한 번도 제대로
아버지께로
돌아간 적이 없는
얄팍한 저의 신앙을
아프게 반성합니다.
작은 아들의
발걸음에서
인생의 참된
의미를 다시
보게 됩니다.
다시 일어나
아버지 하느님께로
가는 거기서부터
새로운 삶은 시작됩니다.
우리를 위한
아버지의 사랑을
뜨겁게
만나게 됩니다.
우리를 위해
아파하시고
우리 때문에
기뻐하시는 변함없는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아버지를 통해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의 시간 또한
다시 시작하는
시간이길
기도드립니다 .
가장 진실한 것은
아버지께로 가는
회개의 여정입니다.
하루에도 수백 번
아버지께로 되돌아가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아버지 사랑으로
되돌아갈 때 우리
모두는 하나가 됩니다.
아픔을 치유하는
사랑 가득한 아버지의
기다림입니다.
그 어떤 절망도
아버지의
사랑 앞에서는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 됨을 믿습니다.
삶의 모든 순간이
아버지를 향하고
아버지와 함께하는
순간이길 기도드립니다.
아버지 안에
작은 아들
큰 아들 모두
회개의 잔치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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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편집/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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