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락같이 도둑잡듯 정신 차리고 공부하세요...원운 스님
<능엄경>은 많이 읽히는 경인데 돌아가신 나의 은사(耘虛老師)스님께서 일생동안 이 경을 전공하셨습니다. 수능엄이라는 말은 범어인데, 이를 음역한 것입니다.
범어의 원 이름은 ‘수랑가마(Suramgama)’입니다. 이 말은 두 가지로 번역하는데 ‘필경견고(畢竟堅固) 건상분별(健相分別)’입니다.
‘필경견고’란 끝까지 견고한 것이 금강과 같다는 뜻입니다.
어떤 번뇌도 다 파하도록 강하고 어떤 번뇌에도 파괴되지 않는다는 뜻이요, ‘건상분별’은 씩씩한 재상이 사건을 처리하는 것 같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중간에 끊임도 없고, 판단의 착오도 없고, 시행의 과오도 없다는 것이지요. 공부가 이렇게 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필경견고’는 본질면에 붙인 이름이고, ‘건상분별’은 실천면에 붙인 것입니다.
확실한 진리, 그리고 그 진리에 의해 닦아 나갈 때, 분명 성불할 수 있다는 두 측면을 합쳐서 ‘수랑가마’라고 합니다.
<능엄경>은 아난존자라는 덕 높은 분이 어쩌다가 마등가(摩登伽)라는 여자의 주술사(呪術師)에 홀려 들어갔는데, 그는 주술로 남자의 정신을 빼놓는 기술이 있었습니다.
아난존자는 평소 공부한 것이 좀 있었기에 잠시 최면에 걸렸다가 ‘이게 아닌데’ 하고 정신을 차렸지만 부처님이 그것을 아시고 제자들을 보내 그를 데려왔습니다.
부처님 앞에 꿇어앉은 아난존자는 부처님께 말합니다. “평소 경만 외우고 마음 닦는 공부를 못해 오늘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지금부터 마음 닦는 공부를 하고자 하오니 실제로 공부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세요” 합니다. 부처님 말씀 외우는 데는 내로라할 정도였지만 모습이 아주 우습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아난존자가 공부하는 법을 일러달라고 청함에 따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시방여래께서 보리를 이루신 묘사마타(妙奢摩他)와 삼마(三摩)와 선나(禪那)와 최초방편(最初方便)입니다.
사마타라는 말은 범어로서 고요할 정(靜)으로 번역합니다. 시끄러운 경계를 극복하여 고요하게 만들고, 나쁜 마음을 길들여, 착하게 하고 모든 차별된 현상을 평등하게 보아 나가는 그런 공부를 사마타라고 합니다.
두 번째 삼마는 꼭두각시 환(幻)으로 번역합니다.
환이란 있는 것을 없는 듯이, 없는 것을 있는 듯이 관찰하는 공부입니다.
말하자면 요술쟁이가 아무것도 없는데서 별 것을 다 만들어내듯 하는 것이 환입니다.
마치 빈병에서 비둘기도 나오게 하고 비둘기 궁둥이에서 국수도 나오게 하는 게 환이요 요술인데, 번뇌를 다 때려잡은 뒤에 아무 것도 없어진 뒤에는 다시 끝없는 중생세계로 뛰어들어 울고 웃으며 그들을 자기의 일처럼 구제하라는 것입니다.
사마타가 철저한 자기수행이라면 삼마는 중생을 위해 있는 그대로 활동하는 공부입니다.
깨달은 입장에서 보면 다 쓸데없는 짓이지만 교화해야할 그 사람 입장에 서서 교화하는 것이 바로 삼마이며, 중생을 교화하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사마타만 주장하면 결벽증(潔癖症)에 걸리고 삼마에만 걸리면 남의 사정만 보다가 자신의 공부를 잘못되게 합니다. 그래서 뿌리를 놓치지 말고 현실에 잘 적응하여야 중생교화를 잘 한다는 것입니다.
선나는 이 두 가지, 즉 집안살림과 바깥살림을 균형있게 유지하라는 뜻이에요.
이 세 가지가 공부하는 데는 ‘절대 묘책(妙策)’입니다.
그래서 천태(天台)의 지관(止觀)도 이것에 기준했고, 모든 경에서도 양극에 치우치지 말고 중도에도 머물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맨 나중의 최초방편이란, 그 여러 공부 가운데 가장 최초에 해야 할 공부라는 뜻인데 여기서 말하는 최초란 우리가 말하는 최초의 개념이 아니라 모든 공부의 과정마다에서 최우선적으로 마에 걸리지 않도록 신경 쓰라는 말입니다.
<능엄경> 10권중, 제1권부터 제4권 중반까지는 사마타의 물음에 대한 대답입니다.
그중에도 제1권은 진(眞)과 망(妄)을 바로 알라는 법문이니, 전쟁에 나가는 장수가 적과 아군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하는데 어떻게 구별하라고 하셨는가.
마치 여관집에 무수한 사람이 드나들어도 주인은 늘 제자리에 꼼짝 않고 있듯이 상황 따라, 기분 따라 오가는 마음은 망상이요 사시사철 제자리에 변치 않고 머물러 있는 것은 주인이며 참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다음 제2권과 제3권 전체에서는 어디서나 불성(佛性)을 만나 깨달으라 하셨으니 색리교청(色裏膠淸) 해중함미(海中鹹味), 단청 속의 아교풀, 바닷물의 짠맛과 같이 눈앞에 있는 현실이 그대로가 여래장이라고 하시고, 나아가서는 오온(五蘊) 육입(六入) 십이처(十二處) 십팔계(十八界) 칠대(七大)가 원래 여래장(如來藏)묘진여성(妙眞如性)이라고 하셨습니다.
다음 제4권 전반(前半)에서는 이상의 사마타 삼마, 두 법문말씀에 의해 몇 가지 의문이 생기게 되는데 이를 설법제일로 알려진 부루나존자(富樓那尊者)가 여쭙습니다.
다시 말해 “모두가 본래 여래장이라면 범부도 여래장, 성현도 여래장, 산도 여래장, 강도 여래장이어서 모두가 동일할 터인데 왜 산하대지가 생겼습니까?” 한 것이 첫째 질문입니다.
똑같다면 즉 본래 평등한 여래장이라면 산하대지나 범부는 왜 생겼느냐 것입니다.
이런 형식의 질문을 섭적의난(攝跡疑難윗말에 터 잡아 질문함)이라 하는데 하나의 경전이 성립되는데 꼭 있어야하는 대목입니다.
그 이유는 앞뒤말씀이 모순처럼 보이는 일을 방치하년 경의 정체성이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모두가 원래부터 여래장이라면 이는 천연적으로 부처가 되었다는 얘기인데 천연이라면 자연이요, 자연이라면 인연과는 상반되는 주장으로서 평소 부처님이 주장하시던 인연에 배치되고 도리어 자연외도(自然外道)와 같게 되니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하는 것입니다.
자연외도(自然外道)란 모든 현상이 어떠한 원인이 있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저절로 생긴다는 사견(邪見)을 가진 외도로서, 부처님이 제일 싫어하신 외도입니다.
부처님이 처음 출가하셔서 어디로 가야 생로병사의 고통을 면할까 하시고, 유명한 수행자들을 두루 찾아다니시다가 처음 한 수행자를 만나 이 문제를 물으셨는데 대답하기를 “브라흐마나 하나님의 미움을 사서 그러니 그 하나님을 섬기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유신론입니다.
즉 신에 의지해야 구원받을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부처님이 두 번째 만난 사람이 이 자연외도입니다.
그는 말하기를 “그냥 두면 언젠가는 저절로 고통이 끝날 것이니, 하려고 애쓰지 말라, 하려고 애쓰는 마음이 도리어 잘못이니라.”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냥 놔두면 다 된다”는 얘기와 “우주만법이 본래가 여래장”이라는 얘기가 어떻게 다르냐고 물은 것입니다.
이렇게 크게 두 개의 질문을 던져서 사마타의 수행법을 오해 할 수 있는 소지를 배제하셨으니, 세상이치를 설명하려니 인연이니 자연인 하는 말을 썼지만 여래장자리에는 꼭 인연이라야 된다는 생각, 자연이 아니어야 된다는 생각자체가 망상이니 따지려는 마음으로 보지 말고 분별심을 쉬면 참모습이 보인다고 하셨습니다.
다음, 제4권 후반부터 제8권 중반까지는 두 번째 물음 삼마에 답한 내용입니다.
이 부분을 흔히 수도분이라 부릅니다.
즉 견도분에서 터득한 진리의 세계를 실제로 찾아 들어가는 방법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는 네 토막으로 나누어 말씀하고 계십니다.
첫째는 기초를 바로 잡으라 입니다.
<능엄경>에서 부처님이 수행의 기조로 삼았다고 하는 것은 ‘심인심(審因心) 심업본(審業本)’입니다. 심인심이란 목표를 바르게 설정하라고 하신 내용이요, 심업본이란 그 목표를 성취해나가는 방법이 합당한가를 정확히 살펴 출발하라는 내용입니다.
가을에 콩을 얻고자하는 사람이 팥이나 뚱딴지(돼지감자)를 가지고 가서 심으면 과연 콩이 나오겠습니까. 거두려고 하는 씨가 맞는지를 항상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 심인심입니다.
그래서 나는 평소 <능엄경>을 말할 때 ‘심인심 심업본’은 출발할 때 마음과 수행할 때의 마음이 코드가 맞아야 한다는 얘기를 합니다.
마음으로는 행복을 바라면서 남의 주머니에 손을 넣는다든가, 도둑질한다든가 하면 안 된다는 얘깁니다.
둘째는 요점을 바로 잡으라 입니다. 즉 공부하는 길, 또는 방법을 잘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제5권 초부터 제6권 초에 이르기까지 육진 등 25법이 모두 원통에 통하는 문이나 그중에도 깊고 원만하고 통한 길은 이근(耳根)박에 없다고 소개해 주십니다.
셋째는 제6권 중반부터 내섭(內攝)이니, 삼학과 계율을 소개하셔서 자기의 힘으로 닦아나가는 길을 보여 주셨으니 이는 율종의 이론입니다.
넷째는 외섭(外攝)이니, 부처님의 권위를 마음속으로 받아들이고, 그 가피력으로 해탈을 얻는 길을 보여주셨으니 이는 밀교의 논리입니다. 그래서 <능엄경>을 불교의 종합교과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능엄경>에서 강조한 것 중 내 힘으로 닦아나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바로 계율인데 계율을 철저히 지켜야 합니다.
계율을 지킨다는 것은 자기 얼굴에 먹칠하지 않는 것입니다.
처신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가치가 달라지는 데, 존경받길 바라면서 나쁘게 행동하면 되겠습니까?
건강도 그렇습니다.
어떤 이는 건강관리 한다고 요란을 떨지만 몸 생긴 대로 자고 싶으면 자고 유달리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능엄경>이 계율을 두 어깨에 잘 짊어지고 나가면 영원한 진리와 만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고, <열반경>과도 맥을 같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자신을 닦아나가는데 강조하고 있는 것은 부처님의 권능을 믿고 수행으로서 그 가치를 찾아내는 방법인데, 이것을 능엄주라 합니다.
능엄주를 믿고 외우면서 부처님이 나를 바꿔주실 것이라고 믿고, 부처님 가피력으로 능엄주를 찾으라는 것입니다.
<능엄경>에서 얘기하는 수행은 계율을 잘 닦고, 사마타 삼마 선나 즉 정과 혜를 균등하게 닦고, 그리고 세 번째 능엄주를 외워서 잘 닦으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 나가면 어느 형태든지, 어떤 경계에 가든지 무심한 마음으로 대할 수 있고 어떤 급변하는 상황을 만나게 되도 경계에 휘말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도둑이 들었을 때 도둑을 맞는 경우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도둑이 왔다는 것을 모르고 당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도둑을 잡으려고 맞붙었다가 신체에 해를 입거나 물건을 빼앗기는 것입니다.
이 둘은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도둑이 왔으면 자는 체 하며 살피다가 결정적인 기회가 왔을 때 벼락같이 뒤통수를 쳐서 도둑을 잡아야 합니다. 공부도 이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 공부가 됩니다.
우리가 마음먹고 자기 관리를 해야겠다는 생각만 하고 있으면 되는데, 거의 많은 불자들이 아는 게 너무 많은 게 병이에요.
삼천배를 하면서도 용심(用心)은 못하는 분도 있습니다.
경전 많이 읽고, 불사는 많이 하면서도 마음관리를 하지 못하니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자기관리에 치중해서 무한한 경지를 포용하고, 이렇게 공부하다보면 얼마쯤 가서 징조가 나타난다고 <능엄경>에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밖으로 남에게 자랑하는 불교 말고, 하루 한 번씩이라도 부처님을 생각하는지, 부처님의 가르침이 내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고 있는지를 스스로 점검하세요. 아무리 화가 나도 내가 불자라는 생각으로 생활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원점에 서서 나는 왜 불자인가?, 나는 왜 불자이어야 하는가?, 나는 불자로서 무엇을 하고 있나? 이렇게 끊임없이 자문해야 합니다.
정해진 시간에 부처님을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이 예불입니다.
하루에 한 번, 두 번, 아니 스물네 시간 부처님이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이상한 힘이 생기고, 때려죽일 놈 같은데 때릴 생각이 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 말은 체험해보면 알게 될 것입니다.
능엄경 제7권 후반에 ‘증가분’이라하여 경초의 네 가지 물음 중 셋째 선나에 답하신 법문이 있는데 이를 교가에서는 증과분이라 하여 51단계의 개달음의 세계를 소개해 주셨거니와 나는 감히 주장하노니 이 어리석은 범부가 부처님께 매달리다가 한 생각 쓸 줄 알게 된다면 그 또한 깨달음이 아니겠는가 합니다.
그래서 죄송합니다마는 나는 법부성불 눈높이성불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절에 오래 다니고 웬만큼 기도를 했다는 불자들이라도 제대로 감정 관리도 잘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느 정도 알다보니 공부가 좀 됐다고 생각하기 쉬워요.
그런데 그렇다고 우쭐하면 안 되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부처님께서 최초방편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경초의 네 번째 물음, 최초방편에 답하신 ‘변마장(辨魔障)’이라고 해서 마구니가 온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공부가 되는 만큼 마구니가 드세진다는 것입니다.
돈 실컷 벌겠다고 하면 돈 벌게 해주겠다는 마구니가 와서 자꾸 유혹합니다.
비위에 거슬리게 달려드는 마구니는 역마라 해서 식별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이들 연마는 홀딱 반하게 옵니다.
부처님께서는 마의 지옥이나 육체의 괴로운 모습을 보이고 마의 처참한 모습을 일러주어서 모든 수행자들이 잘못된 길로 들어서지 않도록 경계해 주겠노라고 하셨습니다.
말하자면 공부를 해나가다 좋은 일이 생기면 공부가 잘 되나보다 하고 자만하지 말고, 이게 마구니가 왔구나 하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돈을 잘 벌고, 자식들이 말을 잘 듣고, 하는 일이 잘 되면 ‘기도영험을 보는가 보다’ 이렇게 생각하지 말고 그럴수록 여기에 홀딱 미치지 않았는지 되돌아보라는 얘기입니다.
최초방편이 왜 최초방편이냐 하면 공부하는 사람은 언제나 최초이기 때문입니다.
순간순간이 최초입니다.
공부를 시작하기 전 마에 걸리지 않았는지 생각하는 것도 중요하고,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자기가 한 공부에 속아서 망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마구니의 모습이 더 진하고 강하게 옵니다.
이것을 일러 도고마성(道高魔盛) 즉, 도가 높을수록 마구니도 세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마가 높아진다는 것은 공부가 깊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더 조심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라는 것입니다.
<능엄경>이 <법화경> 전에 설해졌느냐 뒤에 설해졌느냐 하는 것이 뜨거운 논란거리가 되고 있는데, 나는 <법화경> 후라고 하는 쪽에 공감합니다.
왜냐하면 경 자체에서 “나의 이와 같은 계율을 일생 마지막 훈계로 생각하라” 하는 얘기가 9권에 나옵니다.
그것을 보면 <법화경> 설하고 <열반경> 설하기 직전에 <능엄경>을 설하셔서 마지막 훈계로 삼으라고 하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능엄경>은 부처님께서 당신의 생을 마감할 무렵에 즈음해서 주신 거룩한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꼭 지키면 이득이 되겠다.
이런 생각을 내어 생활 속에 구현해야 합니다.
그 방법은 계를 지키는 것밖에 없습니다.
언제든 이해관계는 나에게 있는 법입니다.
이해관계가 눈앞에 나타나면 평소에 알고 있던 것들이 다 망가지는데, 그것을 고치고 나가는 힘이 계율을 지키겠다는 신념입니다.
계를 설하는 까닭은 여러분이 계를 받은 뒤에 계를 잘 지키고, 계 설해 준 사람, 즉 계사를 닮으라는 뜻입니다. <능엄경>의 못다 한 이야기는 계를 받으면서 이어집니다.
그동안 ‘봉선사 경전수행을 통한 깨달음.’ 강설대법회에서 9명의 법사님들이 법문을 하셨는데 공통점은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를 홀리는 것이 많지만 내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으면 그들이 설쳐도 겁날 것이 없다.” 이렇게 지키는 마음을 기르는 것, 이것이 계라는 말씀입니다.
능엄경 제10권에 ‘실제이지(實際理地)에는 불수일진(不受一塵)이나 불사문중(佛事門中)에는 불사일법(不捨一法)’이라 하셔서, 경 전체를 간추린 말씀이 있습니다.
‘실질적인 진리자리에는 먼지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지만, 중생을 교화하는 부분에서는 한 법도 버려서는 안 된다’는 뜻이지요.
청정한 여래장자리에는 원래 무명이 없었지만 하루아침에 까닭 없이 생긴 뒤에는 너와 내가 생겼는데 이제 너나 내나 무명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먼지 하나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능엄경>의 말씀입니다.
우리에게는 잊고 온 고향, 가야할 고향이 분명 있는데,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부처님 말씀을 하나도 버리지 말고 부처님 말씀이 생활화되고 의식화되고 체질화되도록 훈련을 쌓아야 합니다.
그 훈련이 바로 계 받는 일이고, 계를 받은 뒤에는 잠시도 잊지 말고 생활 속에서 꽃을 피우면 분명히 큰 이득을 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