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녹는 달 / 허창옥
꽃 보러 간다. 매화꽃 보러 간다. 매화는 이미 반개해서 이울기 시작했다. 나무에는 새 가지들이 뻗어 나오고 있다. 밭주인은 가지치기를 하고 삽으로 흙을 뒤집고 있다. 그 나무들 아래서 한 여인이 꽃잎을 따고 있다. 곱게 말려서 매화꽃잎차라도 마시려나, 책갈피에 눌러 고이 간직하려나.
나는 일없이 매화나무 사이를 돌아다니다가 밭주인과 여인을 두고 저쪽 밭머리로 간다. 아, 이게 웬일인가. 흙이 밟히는 소리가 기가 막히게 좋다. 세상에 이런 음향은 없으리니, 마른 볏짚을 밟는 것도 같고 낙엽을 밟는 것 같기도 한 희한한 소리가 들린다. 어쩌다 나는 도시 여인이 되어서 흙이 내는 소리를 듣지 못한 채 살고 있는가. 흙이 숨 쉬는 소리를 잊어버리고 살았는가.
발 아래를 유심히 내려다본다. 밭고랑의 흙은 연한 황토색으로 바스락하니 말라있다. 흙은 치솟고 내려앉았으며, 치솟음과 내려앉음이 수천수만의 가늘고 길쭉한 균열을 만들어 놓았다. 발을 디디면 그 틈이 무너지면서 빠지직 소리를 낸다. 그 음향을 즐기며 자꾸만 돌아다닌다. 그러다가 일찍 고개를 내맨 냉이를 보기 위해 허리를 굽히고, 아직은 볕이 멀어 창백한 쑥들도 들여다본다. 흙이 품고 있을 보이지 않는 미생물들과 그것들이 키워갈 새 생명의 낌새를 느껴보려고 손으로 흙을 긁어보고 만져보고 뒤집어보기도 한다. 부드럽고 사랑스럽다.
언 땅이 녹았구나. 녹아서 소리를 내고 있구나. 다시 살기 위해 몸을 뒤채고 있구나. 이건 감동이고 숭고함이다. 이 흙이 나를 만들었고 나를 키우고 마침내 나를 품어줄 것이다. 매화꽃밭에 서서 흙의 노래를 듣는다. 4분의 3박자 왈츠로 듣는다.
《세상의 모든 딸들》이란 책에 '얼음 녹는 달'이란 말이 나온다. 원시 모계사회를 그린 그 책에도 인디언들의 언어처럼 사물이나 현상들이 이렇듯 서술적이고 비유적으로 표현된다. 나는 이들의 어법 그러니까 표현법이 좋았다. 아직 어휘란 개념이 없던 시대. 그 사람들은 그냥 느껴지는 대로 말하고 규정하였던 것이다. 그 원시사회의 사람들이 불현듯 부럽다.
나는 '얼음 녹는 달'에서 '언 땅이 녹는 달'을 파생시킨다. 그게 2월인가, 3월인가는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먼 산 잔설은 아직도 희끗희끗 보이나 심산계곡 물은 녹기 시작했을 터, 지금이 바로 얼음 녹는 달, 언 땅이 녹는 달인 게다. 나는 지금 흙을 밟고 서서 온몸으로 그 생명의 기운을 받아들인다. 대지는 어머니처럼 부푼 젖가슴을 열고 새 생명을 키우기 시작하였다. 바람은 밭머리 대숲에서 수런대고 새들이 낮게 난다. 개 짖는 소리 들린다.
다음엔 좀 더 일찍 길을 나서야겠다. 이제 막 꽃눈이 트기 시작할 때, 먼 산 눈은 그대로 덮여있지만 산 아래에는 물이 흐르기 시작하고 땅이 숨구멍을 여는 해토머리에 길을 나서야겠다. 그때 설중매를 볼 수 있으면 그 고아한 자태를 가슴에 담아오리. 언 땅이 풀어져서 토해내는 숨소리를 들으며 좀 더 납작해져서, 살아있음 다만 그 사실만을 눈물겨워하리. 그리하여 내 안에서 오랫동안 견고하게 얼어붙은 정감의 덩어리도 녹여야겠다.
얼음 녹는 달, 나는 아득한 구석기시대의 거친 여자가 되어 맨발로 흙을 밟으며 가족의 생존을 위해 산야를 뛰어다니고 싶다. 보이는 모든 것, 들리는 모든 소리, 지상의 모든 것을 한껏 기뻐하고 싶다. 들의 꽃과 산새들에 환호하며, 가축을 불러들이고 또 몰고 다니는 눈빛 초롱초롱한 여자로 살아보았으면 좋겠다. 맨발로 거침없이 뛰어다니는 근육질의 여자로도 살아보고 싶다. 오래전에 살림 솜씨 좋은 야문 여인이 되고 싶다는 글을 쓴 적이 있는데 그 문장을 취소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매화꽃밭에서 해도 밟히는 소리를 들으며 그런 밑도 끝도 없고 앞뒤도 맞지 않은 생각을 한다.
어느새 해는 서쪽에서 붉고 매화나무 사이를 지나다니는 바람은 서늘해졌다. 꽃 보자고 왔고 꽃 봤으니 가야지. 이울기 시작한 매화꽃 송이들, 새로 뻗어 나오는 초록빛 가지들, 덤덤하고 부지런한 밭주인, 그리고 매화꽃마냥 어여뻐 보이는 한 여인, 더할 나위 없는 오후 한때였다.
얼음이 녹아서 좋고 흙이 풀어져서 좋다. 그들과 내가 살아있어서 정말 좋다.
첫댓글 허창옥 작가님은
약사이고, 대구수필가협회 회장을 역임하셨지요.
봄의 영상 편지 같은 작품, 잘 읽었습니다.^^
<우리 잘 늙고 있다> 쓰셨던 허창옥 선생님요.~~
"맨발로 거침없이 뛰어다니는 근육질의 여자로도 살아보고 싶다. 오래전에 살림 솜씨 좋은 야문 여인이 되고 싶다는 글을 쓴 적이 있는데 그 문장을 취소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저는 왜 이 문장에 꽂히는 걸까요.ㅎㅎ^^
작가라면 더러 이런 적 있을 듯.
홍 지기님은 아직 그런 적 없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