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많은 노래를 히트시키고
가장 히트한 노래를 만들기도 한 한국 가요계 최고의 별
조용필
그는 한국인 남녀노소가 가장 좋아하는 가수다
1980년대 ‘돌아와요 부산항에’ 는 당시에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가요 1순위였다.
그는 1980년 이후 최고 인기 가요상, 최고 인기 가수상을 무려 35회 이상이나 수상하며
한국 가요계의 정상에 서 있었다.
작은 거인,
국민가수,
가왕이라는 호칭이
그에게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역시 그는 지금까지 우리나라 최고의 가수다.
그는 노래만 잘하는 게 아니었다.
기타 연주, 작사, 작곡, 공연 기획과 연출까지
보통 사람은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의 일들을 해냈다.
가장 많은 히트곡,
그의 ‘고추잠자리’는 방송에서 1위를 24 번이나 하여 당시에 최장 기록을 세웠다.
연말에 뽑는 최고 가수상과 최고 인기 가요상을 10년 이상이나 수상하여,
수상을 고사하기까지 했다.
또한 그의 음반은
1980년 ‘창 밖의 여자’로 백만 장,
1994년에는 개인 음반 천만 장 누적 판매의 기록을 세웠다.
그러면 무엇이 그를 그렇게 가요계 최고의 스타로 만들었을까?
어떤 점이 좋아서 국민들에게 최고의 인기인이 되었을까?
먼저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을 꼽을 수 있다.
중3 때 처음 기타를 잡고 노래와 연주에 열중하자
그의 아버지는 기타를 부수고 노래를 못하게 했다.
그러나 고교를 졸업하던 해 마을 친구들과 클럽을 만들어 노래에 몰입했고,
집을 나와 ‘화이브 핑거스’멤버가 되어 미 8군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 뒤에 ‘김트리오’,
‘그룹 25시’,
‘조용필과 그림자’, 등의 그룹 활동을 하다가
1975년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불렀다.
그 노래는 좀 지난 뒤에 최고의 히트를 했는데, 일본에서도 대히트를 했다.
그는 1978년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을 결성하고,
1979년 음반 1집 ‘창 밖의 여자’를 내면서 가요계에 정식으로 데뷔했다.
그 음반은 100만 장 판매의 신기록을 세웠다.
거듭 히트곡을 내 1994년에는 누적 판매량이 1,000만 장을 넘었다.
그 후 10년 만인 2013년에 낸 음반
제19집 ‘Hello’도 발매 2주 만에 11만 장이 팔리는 히트를 했다.
그러나, 위대한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겪는 시련기가 그에게도 있었다.
1975년 연예인 대마초 파동으로 1977년 은퇴를 선언하고 잠적했다.
그런데 그 휴식기에 발성을 바꾸는 역전의 계기를 만들었다.
정말 위기를 기회로, 시련을 재도약의 전환기로 만드는 위대성을 발휘한 것이다.
그는 민요 ‘한 오백년’을 듣고 우리 민족의 한 맺힌 목소리,
즉 창에서 들을 수 있는 탁음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업그레이드(upgrade)하게 되었다.
민요와 판소리를 부르며 목소리를 연마하여 원하던 탁음을 얻게 된 것이다.
그야 말로 득음을 한 격이다.
그렇게 개선된 목소리로 우리나라 민요인 ‘한 오백년’과 ‘간양록’을 불렀다.
그 노래를 들으면 한(恨)이 없는 사람도 한이 있는 듯,
눈이 찡하여 눈물이 맺히고 애간장이 녹는 듯하다.
그래서 어떤 이는 그의 노래는 영혼을 울리는 감동을 준다고 했다.
그는 미성을 가진 것도 아니고. 선명한 목소리도 아니다.
그런데 미성이나 선명한 목소리보다 훨씬 더 긴장감을 갖게 하는데
풍부한 감정을 정련된 창법으로 조율하기 때문인지 호소력이 강렬하다.
그의 노래에 따른 변화의 목소리를 낼 수 있어
다양한 장르의 노래를 거침없이 소화해냈을 것이다.
그의 노래 중 애절한 목소리 때문에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노래가 있다.
‘비련’이다.
이 노래는 1983년에 나왔는데 조용필이 작사, 작곡하여 직접 부른 노래다.
“기도하는 사랑의 손길로 떨리는 그대를 안고 /
포옹하는 가슴과 가슴이 전하는 사랑의 손길 //
돌고 도는 계절의 바람 속에서 이별하는 시련의 돌을 던지네 //
아 눈물은 두 뺨에 흐르고 그대의 입술을 깨무네 //
용서하오 밀리는 파도를 물새에게 물어보리라 물어보리라 /
몰아치는 비바람을 철새에게 물어 보리라. //
이 노래를 듣던 소녀들이,
“기도하는”의 첫구절이 나오면, “와!~”, 또는 “오빠!~” 하고 함성을 질렀다.
그 소리는 막혔던 목에서 숨이 터져 나오는 절규였다.
그 자지러지는 외침은 무엇을 뜻하는가?
감동의 폭발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소리 지르지 않으면 가슴이나 머리가 터질지도 모를 만큼
최고조의 감정이 솟구쳐 자신도 모르게 뿜어낸 감탄사였을 것이다.
이때 ‘오빠 부대’란 말이 나왔고,
그 후부터 ‘오빠 부대’가 동원되기도 했다.
이 노래를 듣던 14세의 소녀 환자.
그녀는 8년이나 입원했지만 감정 표현을 못하는 장애자였다.
그러나 그 노래를 듣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걸 보고
그녀의 어머니는 딸의 감정 표현을 보고 싶어 경비는 얼마든지 내겠다고 요양원장에게 부탁했다.
그래서 요양원장은 조용필의 매니저에게 전화를 했다.
“돈은 얼마든지 줄 터이니 와서 그 ‘비련’을 한 번 불러주세요.
얼굴이라도 보여주세요.”
이 말을 전해들은 조용필은,
“갑시다.” 단숨에 말했다.
매니저는 너무나 뜻밖이라 놀라서, “예약이 4 군데나 있습니다.”고 응답했다,
“취소. 위약금 물어줘요.”
그 당시 그의 출연료는 대체로 3천~4천 만원이었다 한다.
조용필은 바로 요양원에 달려가서 그 소녀의 손을 잡고 “비련”을 불렀다.
소녀는 물론 그의 부모도 울었다.
주변 사람들은 물론 조용필 자신도 뜨거운 눈물이 흘렀을 것이다.
노래를 마친 그는 자신의 노래 CD를 한 장 주고 소녀와 작별 인사를 했다.
소녀의 어머니가 다가와
“돈은 얼마를, 어떻게 드려야 하나요?”,
“따님의 눈물로 충분합니다.
평생 번 돈보다, 앞으로 더 벌게 될 돈보다 그 눈물이 더 비쌉니다.”
하고 조용필은 총총히 요양원을 떠났다.
이 이야기가 얼마나 사실이고 어떻게 각색되었는지 모르지만
이 ‘비련’을 인터넷으로 검색하면 그 감동적인 스토리가 나온다.
그는 감동을 중시하는 예술인이었다.
자신의 노래에 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손해도 감수할 만큼의 용기를 가진 진정한 예인(藝人)이었던 것이다.
사실 이 노래의 가사는 시적 표현이긴 하지만 애매모호하여 이해하기 어렵다.
누구에게 무슨 뜻을 전하려는지도 확실치 않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가사로 그렇게 곡진한 노래를 만들 수 있었을까?
작가의 상상력인가 타고난 천부적 재능인가.
정말 이 노래를 듣고도 감응이 없다면 정말 인간일까 싶을 만큼 이 노래는 애절하다.
그 곡도, 연주도, 절창도 좋지만 조용필이란 인간에 대해 경외감이 든다.
그가 두 번째로 만난 여인안진현은 24억이나 가지고 있던 부자였다.
그러자 돈보고 결혼했을 거라고 비방하는 소문이 있었다.
그러나 조용필은 24억보다 훨씬 부자다.
그가 받는 저작권료는 연간 몇 억대가 넘고 사후에도 40년이나 받을 수 있다.
그가 무대에 서면 수 천 만원 버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는 안진현의 사후에 그 재산을 모두 사회에 환원했다.
인기인에게는 찬사만 쏟아지는 게 아니고 그에 못지않은 루머와 비난에 시달리기도 한다.
그런 비난에 톱 스타가 자살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 외에도 또 오해를 받은 게 있다.
고향 사람 중의 일부가,
‘그렇게 잘 되었으면서도 고향 사람들에게 인색하다’고 비난했다는 소문이다.
그는 언젠가부터 고향에 가더라도
부모님 산소만 들렀다가 고향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얼른 돌아가곤 했단다.
실제로 그랬을 것이다.
평범한 사람도 하루 세 끼 밥 먹기가 바쁜 게 일반적이다.
한국 사람들은 유치원생도 바쁘다 하지 않는가.
그러니 그는 국민가수로서 얼마나 분망했을 것인가.
충분히 짐작이 간다.
그는 노래만 한 게 아니고
노래를 만드는 작곡도 했고,
기타도 연습해야 했고 콘서트나 순회공연도 여러 번 했다.
그런 준비를 하려면 그가 하나의 몸으로 감당하기 얼마나 버거웠을 것인가.
일부 사람들의 오해이거나 질시였을 것 같다.
그는 많은 전설을 만들어냈다.
공연할 때 최고의 사운드를 내기 위하여 트럭에 4 대분의 기자재를 싣고 갔고,
수십 명의 스태프도 동원했다.
리허설에는 생략이 없을 만큼 공연과 똑같이 해야 한다고 다그치는 바람에
스태프들에게 원망을 듣기도 했다.
그 만큼 냉엄했다.
그래서 그는 우리나라 대중음악 무대를 한 차원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조용필의 공연은 앵콜이 없다.
작위적이지 않다.
미리 앵콜을 준비하여 인기를 끌려하거나 박수를 끌어내려 용쓰지 않는다.
준비한 노래에 최선을 다해 부르고 큰 아쉬움을 남기어 깊은 여운을 안겨주고 의연하게 퇴장한다.
그는 미국 카네기홀, 우리나라 예술의 전당, 일본 NHK홀에서
한국인 최초로 공연하여 절찬을 받았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명 가수였다.
그는 작사, 작곡, 편곡을 하여 싱어송 라이터 개념을 확립했고,
콘서트 문화를 정착시켰다.
트로트를 변형하여 경쾌하게 작곡했으며
민요, 퓨전 블루스, 동요, 락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노래를 만들었다.
‘못 찾겠다 꾀꼬리’,
‘킬리만자로의 표범’
등의 가사는 도저히 노래가 될 것 같지 않다.
그런데 그 노래의 가사와 곡이 너무도 절묘하게 어울린다.
어떻게 만들었기에 그렇게 사람들이 푹 빠져들게 할까.
부르기가 매우 어려운 노래인데 어떻게 그리도 소화를 잘해냈는지 놀랍기만 하다.
‘비련’을 TV 프로 ‘불후의 명곡’에서 어느 가수가 불러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조용필의 노래와 비교가 되어 찬사를 해줄 수가 없다.
노래의 첫 발성, ‘기도하는’ 그 대목은 조용필 아니면 안된다
다른 유명 가수들이 부르더라도
그렇게 긴장감 팽팽한 호소력을 보지 못해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삶이 행복했을까?
그는 누구보다도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
첫 번째 부인과 5년 만에 헤어졌다.
두 번째 부인인 안진현은 10년을 부부로 살다가 심근경색증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더구나 그에게는 슬하에 자녀도 없다.
쓸쓸한 영혼이다. 왜 아이를 두지 않았느냐고 어느 기자가 물었나 보다.
‘나는 음악과 살면 돼요’ 라고 했던 것 같다.
그랬을 것이다.
행복은 비범한 사람보다 평범한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기회가 많다.
단, 행복의 크기는 다를 것이다.
조용필이 누린 행복도, 기회는 적었겠지만
엄청난 크기로 보상 받았을 거라는 짐작을 한다.
조용필은 좋은 노래를 부르느라 그렇게 my way로 살았을 것 같다.
비범한 사람은 그렇게 자기 길을 고독하게 가나 보다.
위대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은
행복을 좇아가는 게 아니라
자신의 역량을 인류와 사회에 남기느라
불편이나 불행을 마다하지 않았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첫댓글 최고의 가왕이지
대단한 조용필 우리나라의 자산
그의 노래 참 많이 들었는데
뭐가바쁜지 참 흘려보내며 듣게되네
돈은 얼마를, 어떻게 드려야 하나요?”,
“따님의 눈물로 충분합니다.
평생 번 돈보다, 앞으로 더 벌게 될 돈보다 그 눈물이 더 비쌉니다.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