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가 감동한 이 한 편의 수필]
인연에 인연이 겹쳐서 글을 쓰는 이야기
인연 수첩 / 노혜숙
食의 연
밥의 힘은 위대하다. 연緣의 시종始終을 주관하기도 하고 종일 주저앉았던 마음을 일으켜 세우기도 한다. 어떤 위로가 밥의 진솔함을 앞설 수 있겠는가. "밥을 잘 먹어야 산다." 노모가 내게 주문처럼 외는 말이다. 사람의 안팎을 아울러 지탱하는 것이 밥이라는 걸 아신 게다. 살肉→살生→쌀. 먹어서 '살肉'이 되고, 그 살 때문에 사람이 살生고, 그래서 '살'이 '쌀'이 되었다는 쌀의 어원은 의미심장하다. 밥은 몸의 한가운데를 관통하며 흘러 들어간다. 밥에는 말의 매끄러운 위장이 없다. 단순하고 우직하게 주인을 돌보고 생색을 내지 않는다. 밥의 힘을 빌지 않은 정신은 빈껍데기다. 사실 생의 대부분이 밥을 위한 노동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그 노동의 절반이 또한 굴욕과 상처 속에 이루어진다. 밥벌이의 수단을 통해 사람의 가치가 매겨지고 혹은, 지배와 피지배의 명암이 엇갈린다. 밥을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생물학적 필요조건이 아니라, 생존의 쟁투에서 살아남기 위한 절박한 행위인 것이다. 밥은 불가항력의 권력으로 삶의 중심에 있다. 말랑하고 따뜻한 밥알의 본질은 이렇듯 엄혹하다. 그 엄혹한 '밥힘'으로 정신의 뼈대가 선다. 건강한 '밥힘'을 업신여기고 오래 버틴 사람을 보지 못 하였다. 한 그릇 '밥힘'으로 어지럽던 정신을 되찾은 저녁, '밥힘'이 '밥모심'이 되어야 하는 까닭을 새삼 깨우친다.
文의 연
노모가 근심을 한다. "골 빠진다. 글 쓰지 마라. 밥이 되는 일도 아닌데." 노모에겐 밥이 되지 않는 일은 헛것이다. 밥을 절대의 가치로 알고 살아오신 노모에게 써먹지 못하는 것의 효용성을 납득 시킬 방법이 내겐 없다. 눈물 젖은 밥을 먹어본 적은 없으나 조촐함에도 구차와 비천의 대가는 있음을 안다. 하여, 밥이 생존을 책임지듯이 문학은 존재를 충만하게 한다는 사실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 답이 밥만큼 구체적이지 않다는 것을 안다. 또 그 답을 글로 증명해 보일 만큼 나의 재능이 탁월한 것도 아니다. 남다른 소명 의식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어쩌면 평생 제 안의 푸닥거리로 끝날지 모를 일이다. 들에 저 홀로 피고 지는 꽃처럼 혼자놀이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굳이 서러울 이유는 없다. 거창한 이름은 차라리 올무다. 지금의 소박한 자유와 혼미한 어둠을 거슬러 나다움과 사람다움의 합수를 찾아가는 여정을 나는 사랑한다. 그 외로운 여정 속에 문학의 연緣은 내게 세상을 향한 소통의 창이다. 그것은 구원을 보장하지 않지만, 삶의 진창을 견디고 위무하고 연민으로 하나 되게 한다. 밥이 존재의 외면을 향해 뻗어가는 힘이라면 문학은 존재의 내면을 향한 끊임없는 성찰의 힘이다. 밥과 문학이 수직의 관계가 아니라 수평의 관계가 될 때 세상은 훨씬 살만해질 거라고 믿는다면 너무 낭만적인가.
物의 연
불을 끈다. 달빛이 비쳐든다. 습도 없이 맑은 음력 열나흘 밤의 달빛은 차분하다. 어둠의 완고함을 물리치고 검정과 하양이 적당히 뒤섞여진 편안함이 있다. 비로소 달빛에 깃들어 안식하는 방 안 사물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빛의 농도에 따른 그것들의 이미지는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형광등 불빛 아래 개별적으로 도드라지던 물건들은 날카로운 모서리를 지우고 다소곳이 풍경처럼 어우러져 있다. 마치 사물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또 다른 세상을 형성하며 거기 굳건하게 존재했었던 것처럼. 주인의 무관심 속에 그들은 철저히 소외되어 있었다. 내게 소용되는 사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들이 내 의식 안으로 들어온 순간, 내 삶을 형성하고 지배하는 사물들의 구체적인 의미와 연緣에 대한 자각은 눈물겨웠다. 궁색한 주인의 배경이 되어 묵묵히 닳아지고 있는 물건들. 그것들은 사물이 아니라 내 일신의 소중한 일부였다. 가까이 멀리, 눈멀고 귀먹어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것들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 의식의 빗장이 열린 느낌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불을 끈 어둠 속에서.
默의 연
늦가을 산사는 적막하다. 그 적막 속에 깊어지는 것들이 있다. 학승의 눈빛, 모과의 향, 산수유의 붉은 빛. 담쟁이로 둘러싸인 돌담을 따라 극락전이 있는 연못가에 이른다. 수초 사이를 헤엄치던 물고기들의 움직임이 부산해진다. 한바탕 흙탕물이 일더니 녀석들의 종적이 묘연하다. 도랑 물소리가 새의 지저귐처럼 수다스럽다. 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반달 홈통으로 연결해 연못에 대고 있다. 한 노승이 그 옆에 쭈그리고 앉아 떨어지는 물을 내려다보고 있다. 기척을 내어도 미동이 없다. 빛바랜 장삼 위로 붉은 감나무 잎 하나 내려앉는다. 조심스레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옆에 같이 쭈그려 앉아 그가 하는 대로 따라 해 볼까. 그래도 실없다 눈치를 주지 않을 것 같다. 나는 더 이상 다가가지 못하고 애먼 담쟁이를 향해 카메라 렌즈를 들이댄다. 그제야 노승이 고개를 들어 나를 본다. 평담한 눈빛에 늙은 감나무처럼 자연스러운 얼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다. 서로 시선을 비키지 않은 채 침묵이 흐른다. 노승의 눈빛에 온기가 스친다.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나 극락전을 향해 걸어간다. 훠이훠이 바람처럼 가벼운 몸짓이다. 단번에 사람이 그냥 사람으로 보일 때가 있다. 그 사람의 전체가 있는 그대로 풍경처럼 내 안에 스민다. 원형질적인 순수의 상호작용, 시공과 성별과 언어를 초월한 감성의 합일. 그 연緣의 흔적은 투명하지만 강렬하다. 노승은 자취 없이 사라지고, 절문에 걸린 풍경만 혼자 요란하다.
연 = 빚債
산다는 건 어쩌면 세상 모든 연緣에 빚을 지는 일인지 모른다. 그렇다면 잘 산다는 건 그 빚을 갚아가는 일쯤 될까. 인연 수첩 속에 남겨진 다양한 흔적들을 추적하다 문득, 궁금해진다. 지금 나는 누구의 연이 되어 그려지고 있을까?
천원天願 / 박정숙 (부산지부)
물끄러미 눈을 마주 본다. 보이지 않은 힘에 눌린다. 부리부리한 눈매가 마치 나를 꾸짖는듯하다. 왜 이리 늦게 왔느냐며 호통을 친다. 서구적인 인상이다. 날카로운 눈초리로 뚫어지게 보는 순간 머리털이 쭈뼛 선다. 혼이 쏙 빠진다. 나도 모르게 무릎을 꿇어 절을 올린다.
오전을 넘어가는 시간은 어둡고 침침하다. 비는 오락가락 반복한다. 원동면의 용화사에는 드문드문 사람이 잦아든다. 오봉산 자락이 포근하게 감싸고 있어 이곳에 절이 있으리라 믿어지지 않는 장소다. 절 마당 한가운데 짙푸른 왕벚나무가 절간을 향해 바람의 목소리를 전한다.
연이란 무엇이냐는 바람의 물음에 살며시 눈을 감는다. 인연이 이끄는 대로 법당 안에 앉았다. 화두를 붙들고 기억을 더듬어 보니 노혜숙 작가의 ‘인연 수첩’이라는 작품이 떠오른다. 이 글은 食의 연, 文의 연, 物의 연, 黙의 연, 債의 연으로 구성되어 있다.
식食의 연에는 어떤 위로가 밥의 진솔함을 앞설 수 있겠는가. “밥을 잘 먹어야 산다.” 노모가 작가에게 주문처럼 외는 말이다. 밥을 먹는다는 것은 생존의 쟁투에서 살아남기 위한 절박한 행위이며 삶의 중심에 있다고 한다.
문文의 연에서는 “골 빠진다. 글 쓰지 마라. 밥이 되는 일도 아닌데.” 노모의 근심을 납득시킬 방법이 작가에게는 없다. 밥이 생존을 책임지듯이 문학은 존재를 충만하게 한다는 사실을 말할 뿐이다. 밥이 존재의 외면을 향해 뻗어가는 힘이라면 문학은 존재의 내면을 향한 끊임없는 성찰의 힘이다. 밥과 문학의 인연은 서로에게 고스란히 배어들었다.
물物의 연은 불을 끄고 달빛이 비쳐드는 방안을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된다. 비로소 달빛에 깃들어 안식하는 방 안 사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물건들은 날카로운 모서리를 지우고 다소곳이 풍경처럼 어우러져 있다. 그것들은 작가의 의식들 안으로 들어온 순간, 삶을 형성하고 지배하는 사물들의 구체적인 의미와 연緣을 획득한다. 그 자각은 눈물겨웠다. 묵묵히 배경이 되어 준 물건들,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일신의 소중한 일부였다. 작가의 만물을 보는 시선이 놀랍다.
묵黙의 연은 입을 다물고 있다. 늦가을의 산사는 적막하다. 그 적막 속에 깊어지는 산수유의 붉은 빛을 따라 극락전이 있는 연못가에 이른다. 한 노승이 떨어지는 물을 내려다보고 있다. 기척을 내어도 미동이 없다. 빛바랜 장삼 위로 붉은 감나무 잎 하나 내려앉는다. 노승의 평담한 눈빛, 감나무처럼 자연스러운 얼굴, 서로 시선을 비키지 않은 채 침묵이 흐른다. 그 연緣의 흔적은 투명하지만 강렬하다. 극락전을 향해 걸어가는 노승의 몸짓이 바람처럼 가볍다. 그 사람의 전체가 있는 그대로 풍경처럼 내 안에 스민다.
마지막 연은 채債의 연이다. 산다는 건 어쩌면 세상 모든 연緣에 빚을 지는 일인지 모른다. 그렇다면 잘 산다는 건 그 빚을 갚아가는 일쯤 될까. 지금 나는 누구의 연이 되어 그려지고 있을까? 천천히 눈을 뜬다.
용화사 앞으로 흐르는 낙동강은 오랜 가뭄을 견디지 못하고 있다. 초록의 녹조가 머리를 풀어 헤치며 이리저리 끌려다닌다. 지분지분한 날씨가 잠자던 낙동강을 흔들어 깨운다. 용화사는 천년고찰이다. 깊은 인연이 또 다른 인연을 끌어당긴 것일까. 그 천 원이 대체 무엇이기에 발걸음이 여기까지 닿았단 말인가.
늘 보던 수더분한 불상이 아니다. 파마머리처럼 꼬불꼬불한 머리카락을 틀어 올렸다. 석불의 미륵은 통일신라시대의 것이란다. 과연 색다르다. 죄짓고는 못 산다는 말이 있다. 나의 속내를 훤히 들여다보는 것 같다. 빠른 동작으로 지갑에서 천 원을 꺼내 불전함에 넣는다. 이름도 모르는 어느 할머니의 저승 가는 노잣돈이다.
백일 전, 인연이 돌고 돌아 내 딸이 직장에서 천 원을 갖고 왔다. 병원에 근무하다 보면 별의별 이야기가 많단다. 구순하고도 중간고개를 넘은 할머니의 친딸이 면회 와서 이제는 그만 편안한 곳으로 가시라 했다. 천 원을 할머니 손에 쥐여주며 저승 가는 길 노잣돈으로 보태라는 사연이었다. 부모가 오래 사니 자식이 아프단다. 아들이 교통사고로 입원 중이었다. 형편이 어려우니, 병원비 결제도 힘들다며 엄마에게 모진 말을 던지고 가버렸다.
인생의 반 너머를 살고도 나는 할머니의 심정을 헤아리기가 어렵다. 죽고 사는 것이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던가. 생사의 길에서 혈육에 대한 미련을 어떻게 끓을 수 있었을까. 마지막 희망을 잃어버린 할머니는 세상을 떠났다. 손에 쥐어져 있던 천 원짜리 한 장만이 남았다. 누구라도 돌아가신 할머니에게 노잣돈을 전해줄 사람이 필요했을까. 병동 간호사 중에서 가장 나이 어린 우리 딸에게 그 천 원이 주어졌다.
마침 미타암 절에 자주 오르락내리락 다닐 때였다. 나는 할머니를 위해 빌어 주겠다며 천 원을 받았다. 아무래도 스무 살 중반의 딸에게는 저승 가는 노잣돈의 무게가 너무 무겁지 않을까 하는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인연은 살아서만이 아니라 죽음의 이면까지에도 닿는 것일까. 기억하는 한 인연은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에도 계속되는 것 같다.
천 원을 반으로 접고 또 접었다. 지갑 속의 천 원에는 할머니의 냄새가 배어 있었다. 그런데 그날 이후, 아무리 노력해도 미타암으로 발길이 돌려지지 않았다. 가까운 통도사에 가서도 지갑에 고이 접어 넣어둔 천 원은 잊혔다. 그렇다고 영 잊은 것은 아니었다. 간혹 떠오를 때마다 점점 머리를 무겁게 짓눌렸다.
인생에서 어떤 선택을 한다는 것은 끝까지 책임이 따르는 일이다. 처음에는 이 선택의 무게를 가늠하지 못했다. 천 원의 인연이 끌어당기는 대로 이곳에 발길을 멈추기까지 백 일이 걸렸다.
마침 용화사가 공양 비천상의 절이란다. 미래의 미륵 부처님도 넉넉한 사람이 넣는 큰돈보다는 인연이 낳은 이 천 원을 값어치 있게 받아 주시지 않을까. 나의 작은 기도가 얹어져서 저승에서는 보다 풍족한 인연으로 꽃 피우기를 빈다.
우중충하던 하늘이 후두두 비를 내린다. 천 원의 무게에 답답했던 마음이 후련해진다. 다시 석불을 향해 몸을 수그린다. 간다는 말도 못다 하고 떠난 한 영혼이 이제는 극락세계에서 편안하시길 두 손 모아 본다. 천 원의 무게가 천 원天願이 되어 천년의 미륵에게 가 닿기를 바란다. 허리를 펴니 작으나마 사람의 할 도리를 한 것 같아 머리가 맑아진다.
인연에 인연이 겹쳐서 글을 쓴다. 노혜숙 작가의 깊이 있는 수필 한 편이 오래도록 여운을 남긴다. 인연은 존재의 시공간 사이를 바람처럼 맴돈다. 그 한 자락이 자판 위에 머문다. 나는 또 다른 누구의 연이 되어 어떻게 그려지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부디 그 연이 빚이 되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