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양리 교회는 톰슨 목사가 삼일만세운동 때 순교한 뒤 송목사가 시무 하게 되었다. 그는 윤희 남편 동구가 분신으로 교회의 참변을 막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늘 교회가 윤희와 명덕이를 보호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도움으로 명덕이는 피아노 솜씨가 날로 좋아지고 있었다. 명덕이가 자기의 소질을 계발할 수 있도록 교회에서 연습하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한편 톰슨 목사의 타계 소식을 듣고 영국에서 건너와 10여년 동안 교회에 봉사한 그의 부인 아이린이 다시 영국으로 돌아갔다. 아이린이 윤희에게 피아노를 가르쳐주었기 때문에 윤희는 교회에서 반주를 맡아 할 수 있게 되었고, 아들 명덕에게도 피아노를 가르칠 수 있었다. 아이린이 떠나는 날은 교인들 백여명이 배웅을 나와 눈물 바다를 이루었다. 아이린의 교회에 대한 봉사 활동은 교인 모두를 감동시킬 만큼 희생적이었다.서양은 줄곧 오대주 다른 지역의 약소 국가에 침략 행위를 자행해왔지만 그들이 남긴 공적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발달한 서구 문명을 전해주었고, 기독교 정신을 뿌리내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들의 선교 활동은 한반도에 천만명의 기독교 정신을 낳았고 이는 우리 민족혼으로 연결돼 마침내 강인한 민족 정신을 일깨운 대혁신에 도움을 주게 된 것이다. 어스름이 내려앉은 저녁. 은은한 달빛이 어둑어둑한 동네 어귀를 돌아 명덕이네 집 처마 위에 머문다. 간간이 찬바람이 불어오는 스산한 초가을 밤이다. 희미한 호롱불에 얼비친 윤희와 아들 명덕의 그림자가 방문을 무대 삼아 힘없이 너울거리고 있었다.
윤희와 아들 명덕이는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식사라고 해봐야 달랑 삶은 감자 두개가 전부였다. 윤희가 저녁상을 차리기 위해 부엌에 들어가 보니 쌀은 다 떨어지고 반찬거리는 아무것도 없었다. 고작 남은 식량이라곤 두개의 감자뿐이었다.그러나 이런 일이 어디 한두번이었던가. 이제는 슬픈 마음도 생기지 않고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하루하루를 허탈한 심정으로 지낼 뿐이었다. 그래도 명덕이는 가난에 대해 아무런 불평 불만이 없는 효자였다. 윤희는 오히려 그런 명덕에게 더 미안할 뿐이었다.감자 한개를 해치우는 건 정말 순식간이었다.
상을 내려놓기 무섭게 식사는 끝이 났다. 간신히 허기만을 달랬을 뿐이다. 윤희가 허탈한 심정으로 텅 빈 밥상을 바라보는 명덕에게 뭔가 말을 꺼내려 할 때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순간 윤희와 명덕은 숨을 죽이며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온 신경을 집중시켰다. 잠시 적막이 흘렀다.
잠깐 동안이었지만 두 사람에겐 그 시간이 아주 길게 느껴졌다. 이 시간에 찾아올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적막속에 들려오는 인기척. 분명 누군가 문 앞에 서 있었다. 긴장감이 감돌았다.
적막을 깨며 남자의 굵은 목소리가 방문을 울렸다.
“계세요? 여기 남동구씨 댁 맞죠?”
남자의 목소리는 죽은 명덕 아빠를 찾고 있었다.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윤희는 망설임도 없이 단걸음에 문을 열고 나갔다. 그는 남편 동구와 가장 친했던 김창규라는 친구였다. 두사람은 상대방을 금방 알아봤다.
“저... 김창규 입니다. 저를 알아보시겠습니까?”
윤희는 환하게 웃으며 화답했다.
“그러믄요! 벌써 15년이 지났는데도 그대로신데요.”
그랬다. 벌써 그렇게 세월이 흘러버렸다. 김창규는 15년전 침략자 일본의 만행을 피해 상해로 돈벌이를 떠났었다.
“윤희씬 그간 얼마나 고생이 많았습니까?”
“고생은 뭘요.... 아참! 얘 명덕아, 어서 나와서 인사 드려야지!”
윤희는 방쪽으로 고개를 돌려 큰소리로 명덕을 불렀다. 명덕이가 열려진 방문으로 머쓱머쓱 걸어 나왔다. 명덕이는 누군지도 모르는 아저씨였지만 그래도 고개를 숙여 정중하게 인사했다. 어린 나이지만 명덕이의 행동은 아주 어른스러웠다.“안녕하십니까?”
“오, 네가 동구의 아들이구나! 어쩜 그렇게 네 아버지를 꼭 빼 닮았니?”
“.......”
“나는 너의 아버지랑 둘도 없이 친한 친구란다. 이젠 다 컸구나, 허허.”
김창규와 윤희는 저녁노을이 붉게 물든 압록강을 앞에 두고 지난 일들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힘들게 살아왔던 윤희의 지난 얘기를 듣는 창규의 눈에 살포시 연민의 빛이 어렸다. 윤희의 여린 어깨가 더욱 가련하고 안타깝게 느껴졌다. 그는 윤희를 가슴 가득 안아주고 싶은 충동까지 일었다. 그러나 선뜻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여전히 그의 마음 속에선 그래서는 안된다는 이성에 의한 통제가 욕망을 간신히 이겨내고 있었다. 물론 그게 보통 힘든 게 아니라는 것쯤은 창규는 이미 오래 전부터 깨닫고 있었다.
창규는 동구와 윤희가 중학교 때부터 서로 좋아하는 사이였다는 걸 어렸을 적부터 잘 알고 있었다. 늘 두 사람 사이에서 묵묵히 지켜보던 창규는 내심 윤희에게 이끌리는 자신을 발견하고 놀라곤 했었다. 친구와의 우정을 지키려고 창규는 무던히도 애쓴 기억이 떠올랐다. 그런데 지금도 여전히 윤희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창규는 기분이 좀 묘해졌다. 창규는 그런 자기의 마음을 들킬세라 딴전을 피우며 윤희에게 말을 걸었다.
“제가 그 당시 상해로 도망갈 때 동구가 여비를 보태줘 큰 도움이 됐었지요.”
“그동안 어떤 일을 하셨나요? 중국으로 떠난 조선인들은 말도 못할 정도로 고생을 많이 한다는데 괜찮으셨어요?”
“그렇습니다. 고생들 많이 했죠. 저도 마찬가지였구요. 다 이 나라의 몇몇 위정자들 때문에 국민들이 고생하는 겁니다. 자기 욕심만 챙기려는 위정자들이 없어지지 않는 한 결코 좋아질 게 없을 겁니다.”
“그렇군요.”
“저도 중국으로 건너간 뒤 무려 십여년 동안이나 죽도록 고생했습니다만 다행히도 하늘이 저를 도왔습니다. 우연히 제 목숨을 건져준 분이 장사밑천을 대줘 돈을 좀 벌게 됐습니다. 이젠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겼고 고향 생각이 나서 이렇게 오게 된 겁니다.”
“네, 잘 하셨어요.”
창규는 평양으로 돌아온 직후 작은 백화점을 냈다. 상해에서 유행하는 상품이면 무엇이든지 평양으로 수입해 장사를 했다. 당시 우리나라엔 수입상이 없던 때라 창규의 백화점은 외국 상품을 수입해 판매하는 최초의 상점이었을 것이다. 때문에 다른 상점들과는 상품의 종류에서부터 많이 달랐다. 백화점엔 서양식 모자와 양복, 와이셔츠, 넥타이, 구두, 아코디언, 피아노, 오르간, 바이올린 등 당시에 어는 상점에서도 취급하지 않던 서양의 물건들이 즐비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이런 물건들이 창규를 통해 서울과 부산 등지로 유통되기까지 했다. 점차 이런 상품들이 전국으로 확산되어 창규의 사업은 날로 번창해갔다. 심지어는 일본인들까지도 창규를 알아보고 인사를 할 정도로 유명인사가 되었으니 실로 그의 백화점 유통사업은 전국적인 규모를 자랑할만 했다. 명덕이는 우연히 거리를 지나다가 평양백화점에 들어가게 됐다.
처음 보는 신기한 물건들이 많았다. 잠시도 눈을 뗄 수가 없어 넋이 빠진 사람처럼 이것저것 둘러보다 피아노를 발견했다. 피아노 있는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뚜껑을 열었다. 하얀 건반을 손으로 두드려 봤다. 경쾌한 소리가 울렸다.
머릿속에 외고 있던 명곡을 하얀 건반 위에 옮겨보았다. 교회에 있는 낡은 피아노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소리가 곱고 아름다웠다. 창규가 서류를 정리하다 말고 잔잔한 피아노의 선율이 귀에 들어와 고개를 들어 피아노쪽으로 돌아다 봤다. 아니 이게 누군가? 피아노 앞에는 낯익은 얼굴이 멀거니 서서 피아노에 푹 빠져 있었다. 창규가 피아노쪽으로 다가가 명덕에게 말을 걸었다.
“얘야, 너 명덕이가 아니냐? 내가 누군지 알겠느냐?”
명덕이는 잠시 창규의 얼굴을 올려다 보더니 기억이 나는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 김창규 아저씨지요?”
“오, 네가 나의 이름까지 다 기억하는구나?”
“저의 어머니께서 자주 말씀해주셨어요. 아저씨께서 저희 집을 많이 도와주신다구요.”
“아 그래? 너 마침 잘 왔다. 잠깐만 기달려라.”
창규는 여성복 코너 쪽으로 바삐 걸어가더니 그 중 가장 화려하면서도 단정한, 고급스러워 보이는 양장 한 벌을 골라 상자에 넣어 정성껏 포장했다. 그는 명덕에게 상자를 건네주며 어머니께 전해드리라고 말했다. 그 날 저녁, 윤희는 선물받은 옷을 입은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더니 기쁨과 신기함이 교차해 멍하니 엷은 미소를 얼굴에 띄우고 서 있었다. 생전 처음 입어본 양장이 신기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자신이 도시의 여인네들과 다른 것이 없어 보여 한편으론 놀랍기도 했다.
윤희는 자신도 옷차림새 하나로 이렇게 달라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뿐이었다. 이리저리 몸을 돌려가며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던 윤희는 문득 상의 주머니에 뭔가 묵직한 것이 느껴져 손을 넣어보았다. 주머니에선 두툼한 편지봉투가 나왔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봉투를 조심스럽게 열어보니 그 안엔 지폐가 뭉치로 들어있었다. 그리고 한 장의 편지가 함께 들어있었다.
윤희는 봉투 안에서 반듯하게 접혀있는 편지를 조심스럽게 펼쳐 읽었다.
<윤희씨, 이렇게 제가 도울 수 있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동구는 저의 생명의 은인이며, 윤희씨는......이렇게 윤희씨를 도와드릴 수 있는 처지가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아무런 오해 마시고 저의 성의를 받아주시기 바랍니다.그리고 명덕이가 좀더 자라면 제 상점 일을 맡기고 싶습니다.내일 시간이 허락되신다면 아사원 중국 식당에서 점심이나 같이 했으면 합니다.윤희씨 양장 입은 모습을 보고 싶군요. 나오시든 안 나오시든 오후 1시에 거기서 기다리겠습니다. 이만 줄입니다. 김창규>
학창 시절 동구와 윤희 사이에서 창규는 윤희에 대한 자기 감정을 추스리기 어려웠었다. 설레는 마음을 참지못할 정도로 가슴이 뛰어 당황스런 적도 여러번 있었다. 그러나 친구의 연인을 어찌할 수 있단 말인가.중국에서 무려 15년동안이나 객지 생활을 하면서 고국에 대한 것은 모두 잊어버려야겠다고 다짐했었다.
특히 잘못된 길로 가려는 자신의 감정을 떨쳐버리려고 무던히도 애썼다. 그러나 이미 친구의 아내가 되어버린 윤희에 대한 짝사랑은 지금까지도 가슴에서 떠나질 않고 있었던 것이다.다음날 창규는 약속 시간 30분 전에 아사원 중국 식당에서 윤희를 기다렸다. 그런데 약속한 오후 1시가 넘어도 윤희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초조했다. 자기가 너무 무리한 청을 한게 아닌가 뒤늦게 후회스러웠다. 역시 윤희는 친구의 아내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섣불리 다가서려다 아예 얼굴조차 볼 수 없게 되어버렸다는 자책감마저 들었다. 낭패였다. 괜한 짓을 했다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해졌다.그런데 약 10여분이 지나자 양장 차림을 한 윤희가 식당 안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창규는 윤희가 눈에 들어오자 심장의 박동이 급속도로 빨라졌다. 남몰래 누군가를 짝사랑하다 들킨 소녀처럼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창규는 윤희가 양장한 모습을 처음 봤다.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그런 윤희가 얼마나 예쁘던지 창규는 하마터면 그녀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할 뻔했다. 자기가 골라준 옷이 그녀에게 너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자 창규는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놀라움에 입이 떨어지지 않는 창규에게 윤희가 다가와 먼저 인사했다.
“좀 늦었어요. 오래 기다리셨죠?”
“아, 아닙니다. 저도 방금 전에 왔습니다. 양장이 아주 잘 어울리네요.”
윤희는 창규의 말에 조금은 부끄러운듯 양볼에 홍조를 띠었다.
“처음 입어 본 거라 좀......”
윤희를 가까이서 보니 더욱 아름다웠다. 어두운 중국집 붉은 유리창으로 은은하게 비쳐드는 태양빛이 윤희를 집중적으로 조명해 더욱 광채가 났다.창규가 윤희를 얼핏 보니 양장은 했지만 버선신을 신고 있었다. 창규는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웃음이 나오려 하다니. 다음에는 하이힐 뾰족 구두를 선물해야겠다고 창규는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윤희는 그날 아주 오랜만에 먹어보는 중국 음식이 정말 맛있게 느껴졌다. 그러나 아들 명덕이가 맘에 걸렸다. 남편 동구 생각도 나고...... 소화가 잘 안되는 것 같았다.그래도 윤희는 창규의 성의를 생각해서 아무런 티도 내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친구의 가족을 돌봐주려는 그의 마음이 천사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밝은 얼굴로 그를 대했다. 그러나 아직은 그가 윤희의 마음 속에 들어와 있지는 않았다.
물론 윤희도 예전부터 창규가 자기를 심중에 두고 있다는 건 느낌으로 알고 있었다.두 사람은 그로부터 일년이 지난 뒤에야 재혼을 하게 된다. 꾸준한 만남을 통해 점차 창규에 대한 윤희의 마음이 열리고 결국 창규의 청혼을 받아들여 두 사람이 합치게 된 것이다.그리고 5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명덕은 이제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스물일곱살 청년이 된 명덕은 평양백화점에서 창규를 도와 일을 하게 되었다. 명덕은 학교 공부에도 열심이었다.윤희와 창규는 결혼한지 5년이 되었지만 부부싸움 한번 하지 않을 정도로 애정이 깊었고 서로를 잘 이해해 주었다. 그리고 생활 수준이 점점 좋아져 고생이란 걸 잊고 행복을 누리며 살게 되었다.창규와 윤희 사이에 사내 아이도 하나 태어났다.
명덕이는 뒤늦게 동생을 보게 되어 누구보다 기뻐했다. 무려 열여덟 살이나 차이가 나는 동생 영근이를 무척 귀여워했다. 명덕은 늘 영근이를 안고, 업고 다니며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토요일 아침이었다. 명덕이는 일찍부터 백화점에 나와 진열돼 있는 물건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오늘따라 명덕은 기분이 좋았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바쁘게 움직였다. 늘 하던 일이지만 오늘은 왠지 더욱 신명이 났다.매장 안에는 대여섯명의 손님들이 물건을 사려고 옷과 모자를 고르고 있었다.
매장 일을 처음 배울 때는 손님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꽤나 신경이 쓰였는데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져서 아무렇지도 않았다. 처음에는 손님이 매장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졸졸 따라다니며 상품에 대해 설명하고 물건을 추천해주느라 땀을 뻘뻘 흘린 적도 많았다.
그러나 꼭 그런 과잉친절이 매상을 올리는 좋은 방법인 것만은 아니었다. 부담을 느끼고 물건을 사지 않는 손님도 꽤 많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맘에드는 물건을 고르려는 손님들에게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시간을 충분히 주는게 가장 좋은 상술이라는 걸 알았다. 그렇다고 그냥 나몰라라 하는 것도 무성의한 태도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손님 스스로 돌아볼 시간을 넉넉히 주고 결정적인 순간에 자기가 나서는 방법을 쓰고 있었다. 명덕은 경력이 쌓이면서 이러한 요령도 저절로 생겨났다.손님 중 한명이 두리번거리며 진열장의 옷을 구경하다말고 상해에서 들여온 하얀 브라우스를 가리키며 가격을 물었다.
“저, 이거 얼만가요?”
명덕이는 낭낭한 여자의 목소리가 자기의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듣고 그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의류코너였다. 잰걸음으로 진열장 앞까지 걸어온 명덕은 순간 숨이 멈춰버릴 것 같았다. 명덕은 자기 눈에 들어온 여자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잠시 동안 얼이 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여성을 본 적이 없었다. 자신과 비슷한 또래로 보였다.
“이거 얼마냐구요?”
명덕은 그제서야 정신이 번쩍 드는지 손님이 가리키는 옷을 들여다봤다. 상해에서 최신 유행하는 브라우스였다. 가격도 비쌌다. 가격을 제대로 말했다가 너무 비싸서 혹 사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명덕은 엉뚱한 대답을 했다.
“네. 이건 좀 비싼데.... 저 손님, 이거 얼마면 사시겠어요?”
여자는 그런 명덕의 대답이 영 맘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돈도 없었기 때문에 그냥 나가려고 했다.
“아니, 왜 그냥 가세요?”
“........”
여자는 문 앞에서 고개만 한번 돌려볼 뿐 아무런 말이 없었다.“그럼 다음에 오시면 제가 반값에 드릴게요.”명덕은 얼굴에 미소를 띠며 친절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어딘지 어색했다. 순간적으로 느낀 감정을 숨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자는 명덕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없이 백화점 문을 열고 나갔다.명덕은 자기딴엔 호의를 보이려 한 건데 오히려 역효과를 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덕은 그녀의 모습이 저멀리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못했다.오영자는 황해도 해주에서 과수원을 크게 하고 있는 아버지 밑에서 자란 5남매 중 막내였다. 그녀의 두 언니는 수녀가 되었고 그녀는 아버지의 각별한 사랑으로 평양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은 숭의여고에 다니고 있었다.
나이는 이제 겨우 15세였지만 키가 크고 조숙한 편이어서 성숙한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영자는 낯선 평양거리를 다니며 눈요기만 하던 양장 브라우스를 오늘은 꼭 하나 사려고 했으나 생각보다 너무 비싸 망설이고 있었는데 명덕이가 불쑥 말을 거는 바람에 그냥 나오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명덕이의 인상은 너무나 특유했고 보는 시선이 왠지 예사롭지 않았다. 그녀도 사실은 명덕에게 어떤 호감 같은게 느껴져 더 이상 얘기를 나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서둘러 백화점을 빠져나간 것이라고 한다.
명덕이를 보는 사람은 누구나 다시 보게 된다. 그는 키가 유난히도 컸으며 얼른 보기에 머리만 검지 않았다면 서양사람 같은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명덕은 상해에서 들여온 멋진 옷을 골라 입을 수 있어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명덕이도 영자를 보는 순간 그런 미인을 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일요일이었다.교회 예배 시간에 명덕이는 피아노 반주를 했다. 한참 예배를 보느라 정신이 빠져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며칠전에 백화점에 왔던 그 여자 손님이 교회에 있었다. 영자는 해주에서 교회를 다녔지만 평양에서도 일요일에 교회를 나가야만 했기 때문에 신양교회로 나오게 된 것이다.명덕이는 찬송가를 반주하면서도 틈나는대로 곁눈질로 영자를 훔쳐봤다.
볼수록 명덕의 눈에는 그녀가 예쁘게만 보였다. 그다지 큰 키는 아니었지만 쌍꺼풀 진 눈이 시원하게 생겼고 이목구비가 뚜렷했다.이렇게 교회에서 다시 만나게 된 두 사람은 몇개월이 지난 뒤 연인관계로 발전했다. 교회안에서도 이젠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두 사람의 관계는 공공연하게 인정을 받았다.
명덕은 학교를 마치고 백화점으로 갔다. 매장 안에 설치되어 있는 유성기 위에 레코드판을 올려 놓고 클래식 음악을 감상하고 있었다. 그동안 가야금이나 피리 소리, 창소리는 많이 들어봤지만 이렇게 서양 음악 특히 오케스트라 연주를 들으니 신비하기까지 했다.명덕이가 음악을 듣고 있을 때 영자가 백화점 문을 열고 들어왔다.
명덕이 음악에 심취해 있었기 때문에 영자는 그냥 그의 뒤에서 가만히 음악을 듣고 서 있었다. 영자도 점차 클래식의 감미로움에 빠져들어갔다. 명덕이는 한참만에야 영자가 온 것을 알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다소 놀라는 표정으로 명덕이 말했다.
“아니, 언제 왔어요?”
“그거 어떤 음악인데 그렇게 감미로운 소리가 나지요? 서양 음악이예요?”
“네, 슈베르트의 세레나데라는 서양 음악인데 곡이 너무 좋아서 난 벌써 열여섯번도 넘게 듣고 있어요.”
“그렇군요.”
두 사람이 대화를 하는 중에도 유성기에선 계속 아름다운 선율이 들려왔다. 두 사람의 아름다운 미래가 음악을 타고 뭉게구름처럼 하늘 위로 펼쳐지는 환상이 그려졌다. 음악 속으로 깊이 빨려들어가는 기분이었다.압록강 너머 서쪽 하늘가에 뉘엿뉘엿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하루 해가 점점 짧아져 가고 있었다.
명덕이와 영자는 해가 저물고 있는 서쪽 하늘을 바라보며 강둑 위를 거닐고 있었다.저쪽 반대편에 평양의 거리가 가물가물 보이고, 집집마다 저녁을 하느라 굴뚝에선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붉은 노을에 짙게 물든 저녁 하늘엔 구름떼가 둥실둥실 떠다니며 한폭의 수채화를 그리고 있었다.
명덕이는 침묵을 깨며 영자에게 먼저 말을 꺼냈다.
“고향이 황해도 해주라고 했죠?”
“네.”“그럼 여기엔 친척이 살고 있나요?”
“아니예요. 그냥 하숙하고 있어요.”
명덕이 그녀의 말을 듣고 고개만 가볍게 끄덕였다.제법 쌀쌀한 바람이 옷깃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제 무더웠던 여름이 한발 물러가고 가을이 성큼 다가온 것 같았다. 세월이 유수와 같이 흘러갔다.두 사람은 강둑길을 따라 천천히 걷다가 마치 약속이라도 한듯 동시에 멈춰섰다. 그리고 상대방을 쳐다봤다.
너무 갑작스럽게 눈빛이 마주친 두 사람은 쑥스러워 시선을 고정시킬 수가 없었다. 다시 고개를 돌려 강너머 저 쪽을 먼산 보듯 바라봤다.몇걸음을 걷다가 명덕이 그녀에게 다시 질문했다.“무슨 공부를 하려고 평양까지 오신 건가요?”
명덕의 질문에 영자는 조금 머뭇거렸다.
“글쎄요. 아직은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러시군요.”
“어쩌면 제가 허영심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닐까 고민 될 때가 많아요.”
“.......”
“사실은 서양 문화를 너무 좋아하다 보니까 괜히 아버지를 졸라서 이렇게 평양까지 오게 된 거였죠.”
“서양 문화라...... 그래서 우리 백화점에 오셨던 거군요? 저도 실은 서양의 문화를 배우기 위해 서양 음악을 공부하고 있어요.”
“네에, 그랬군요.”
명덕을 바라보는 영자의 눈이 티없이 맑게 빛났다. 명덕은 이제 서서히 잿빛으로 변해가는 하늘가를 응시하며 자기의 꿈을 자신감 있게 설명했다. 이런 얘기를 누군가와 함께 나눈다는 건 아마도 명덕에겐 처음 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우리 나라 음악은 피리나 가야금이나 모두 너무 구슬픈 느낌을 주지만 서양 음악은 좀 다른 것 같아요. 웅장한 면도 있고 기쁨, 슬픔, 열정같은 인간의 감성을 모두 잘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네, 맞아요. 서양 음악은 다양한 특징이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무엇보다 서양 문화는 기독교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맘에 들고 또 아직까지 조선에는 서양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으니......”
“그렇군요. 명덕씨는 언제나 누구보다 앞서가는 꿈을 갖고 계시는군요. 아직 우리 나라에서 서양 음악을 한다는 건 대단한 모험이 따를텐데요.”
“그렇긴 하지요. 하지만 저는 서양 악기는 이것저것 다 배우고 싶어요. 그래서 이 다음에 성인이 되면 우리 조선에선 제일 처음으로 악단을 만들 생각입니다.”
자신의 꿈을 영자에게 설명하는 명덕의 목소리엔 자신감이 넘쳐 흘렀다.
■ 최초의 악극단과 연예인의 후예
중·고등 과정을 모두 평양에서 마친 영자는 연극과 발레 그리고 현대 무용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때엔 이미 홍콩, 마카오, 상해 등지에서 서양 문명이 물밀듯이 들어와 이미 평양 땅에서 정착해가는 시대가 열렸다.
영자는 또 상해에서 경험 많은 선생이 가르치는 연극과에서 연극을 배웠다.그 후 명덕이와 영자는 몇년간의 연애 끝에 결혼을 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결혼 후에 조선에서 최초로 신향악극단이라는 이름의 극단을 만들어 순회 공연을 하였다.
말이 순회 공연이었지 당시엔 시설이 제대로 갖춰진 곳이 없었기 때문에 순탄한 공연을 하기가 어려웠다. 극장도 없고 제대로 된 조명 시설도 없었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학교 강당이나 운동장 같은 많은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넓은 장소에서 공연을 해야만 하는 실정이었다.당시 신향악극단이 이 나라에 유행시켰던 유행가가 있었는데 명덕이가 이것을 만들어냈다. 이것이 이른바 뽕짝이라 불리는 트로트였다.
명덕은 찬송가를 조금 고쳐 그 멜로디에다 곡을 붙여 노래를 만들었다. 한마디로 찬송가 개사곡이었다. 이 노래는 창을 잘하는 기생 양춘자의 목소리로 불리워졌다.그런데 이렇게 노래를 불렀더니 분명 서양의 노래지만 가락은 우리 고유의 창을 그대로 옮겨놓은 셈이 되었다.
창을 부르던 습관대로 서양 노래를 부르다보니 창소리 특유의 소리가 나오게 된 것이다. 조선 사람들에겐 오히려 그 가락이 더 듣기가 좋았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귀에 익숙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전국 순회 공연을 통해 불리워지면서 서서히 우리의 유행가로 자리잡게 되었다.한편 명덕이가 개사한 이런 노래들은 일본에까지 널리 알려지게 되었는데, 당시 명덕의 일본인 친구 고가마사오라는 인물이 이 노래를 일본에 퍼뜨렸다.
그는 명덕이 작곡한 곡을 일본으로 가져가 유행시키는데 한몫했다. 이렇게 일본에서 유행한 뽕짝은 조선에서 먼저 시작된 노래였지만 오히려 일본에서 더욱 발전하게 된다. 일본이 먼저 레코드 회사를 차려 그 노래를 대중화시킨 뒤 역으로 조선으로 다시 들여오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뽕짝같은 유행가나 미국의 카우보이 노래가 모두 찬송가와 거의 비슷하게 구슬퍼 듣기가 좋았다.
조선에서는 통상적으로 서양 문화가 상해, 북경, 일본 등지에서 들어오던 것이 이제는 전세계 곳곳에서 들어오기 시작했다. 연예계에도 소질있는 젊은이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기 시작했다. 배우들의 급증과 함께 조선악단이 생기고, K.P.K라는 악극단이 창단되면서 그야말로 조선 연예계의 붐이 조성되기 시작했다.명덕이의 후배 중에 박시춘이란 인물은 작곡에 소질이 있었고, K.P.K. 단장이 된 김해성과 그의 부인 김난영 그리고 그 부부 사이에서 난 숙자와 애자는 4살때부터 얼마나 노래를 잘했는지 커서 가수를 시키면 좋겠다고들 했다.극본도 쓰고 희극도 잘하던 윤부길은 만능재주꾼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도 결혼을 해서 윤항기와 윤복희를 낳고는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그리고 어느 날 가수가 되고 싶다며 남명덕 악단장을 찾아온 17세의 학생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바로 저 유명한 가수 김정구였다. 그는 목청은 좀 약했지만 노래를 얼마나 구성지고 재미있게 하는지 무대에선 인기가 아주 좋아 주목받는 인물이었다.
영자와 가장 친했던 친구로는 전옥이가 있었다. 그녀는 연극의 천재였다. 무엇보다 비극을 잘 소화해냈는데 그녀가 등장한 연극에선 객석이 모두 눈물바다가 될 정도였다. 그래서 그녀는 눈물의 여왕이라 불리워지게 됐다.영자와 전옥은 가장 친한 친구였지만 무대에서는 최대의 라이벌이기도 했다. 영자는 연극도 잘 했지만 특히 무용과 노래에 귀재였다.
전옥은 후에 집안 좋고 신사였던 강씨라는 남자와 결혼해 딸을 낳았는데 영자가 지어준데로 효실이라 불렀다.
아이를 낳고 한달이 되어도 이름을 짓지 못하자 영자가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뜻으로 대신 이름을 지어준 것이었다.강효실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초창기 한국 영화계의 유명한 여배우이면서, 미남 배우 최무룡의 아내, 최민수의 어머니로도 잘 알려져 있다.영자도 비슷한 해에 임신을 하여 아들 석진이를 낳았다. 명덕이가 퍽이나 좋아했었다.
그러나 석진은 두살 때 홍역을 앓다가 그만 죽고 말았다. 영자와 명덕이는 큰 충격을 받고 실의에 빠져버렸다. 석진이가 이담에 크면 효실이와 결혼을 시켜 사돈을 맺겠다고 농담을 주고받기도 했는데 안타까운 일이 벌어지고야 만 것이다.영자는 석진이를 잃고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이런 영자에게 가장 큰 위안이 되었던 사람은 바로 전옥이었다. 전옥은 평상시나 공연 중에나 그녀를 보살펴주느라 바빴다. 항상 위로의 말도 아끼지 않았다. 그녀의 보살핌 덕분에 영자는 자식 잃은 충격에도 불구하고 연극을 계속하며 생활할 수 있었다.
당시의 공연은 여러 곳의 지방을 돌아다니며, 연극, 노래, 무용 등을 곁들여 다채롭게 꾸며졌지만 너무도 가난한 시절이라 극장에 구경나올만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때문에 극단은 운영비도 제대로 뽑지 못할 정도로 사정이 빈궁했다. 참으로 어려운 시절이었다.
■ 연극의 천재 전옥 그리고 유랑 악단
첫아이를 잃고 실의에 빠져있던 영자는 다시 임신을 하여 석훈을 낳았다. 영자의 병은 석훈을 낳고 난 뒤에야 씻은듯이 나았다. 둘째 아이의 탄생이 위안이 되었던 것이다.전옥은 영자가 아기를 낳자 2주 동안 꼼짝없이 산모에게 매여있게 되었다.
전옥이 마치 친엄마나 다름없이 영자를 돌봐주었다. 미역국을 끓여주고 광목으로 기저귀를 만들어주기도 했으며 아기옷까지도 그녀가 전부 준비해주었다. 영자는 누워서 감사의 기도만 할 따름이었다.
“하나님 저렇게 좋은 친구를 제게 보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전옥이를 사랑하사 더욱 훌륭한 연기자가 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또한 그의 후손에게도 자자손손 복을 내려 주시옵소서.”
영자는 석훈이를 낳을 때 병원에 갈 틈이 없었다. 전국 순회공연 중이었기 때문이다. 만삭이 다 되었지만 영자는 무대에 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배가 불러와 어쩔 수 없이 뚱뚱한 어머니 역을 도맡아 하였다.영자는 어떤 배역을 맡든지 관객을 웃기기도 하였고, 울리기도 하면서 완벽하게 소화해냈다. 그래서 그녀에겐 항상 팔방미인이란 별명이 붙어다녔다.반면 전옥은 비련의 여주인공 역을 도맡아했다.
무대에 올라 연기를 하는 그녀는 헝클어진 머리에다 눈물에 젖어 붉게 부어오른 눈동자를 실제와 흡사하게 연기해냈다. 눈가에 슬픔과 고통이 뒤엉켜 절로 우러나는 그녀의 표정연기는 아주 실감났다. 전옥은 무대에 오르기만 하면 얼마나 혼을 다하는 연기를 하는지 무대에서 내려오는 순간부터 저녁내내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혼이 전부 빠져나가 말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무대를 내려온 뒤에도 구석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자신이 실제 비극의 주인공이라도 된 듯 자기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녀는 스스로 실제 그러한 비극의 주인공들이 이 세상엔 많을 거라는 생각에 빠져있곤 했다. 가히 그녀의 노력은 천재라는 소리를 들을 만했다.관객들과 스태프가 한결같이 상당히 어렵다고 염려하는 각본도 아주 잘 소화해내는 그녀의 탁월한 연기력은 눈에 띌 수 밖에 없었다.
그녀가 맡은 연극의 내용 몇 가지는 이랬다.기생노릇을 하며 온갖 고생 끝에 애인을 출세시키지만 결국 배반당하는 비련의 여인.
복수심으로 애인을 죽이고 범행이 발각돼 경찰에 붙잡히는 장면. 그리고 그녀의 두 손엔 차가운 수갑이 채워진 채 끌려가는 장면. 이런 장면들은 아무나 해낼 수 있는 연기는 아니었다. 그녀만큼 감정이입이 잘 되고 그녀만큼 표현력이 뛰어난 배우는 일찍이 없었다.그녀의 천재적인 연기력을 보여주는 사례 한가지를 더 들어보면 이랬다.
아이를 낳고 자신도 영양실조에 걸려 젖이 나오지 않는 산모의 괴로움과 번민을 그린 연극이었다. 당시의 암울했던 시대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비극적인 시나리오다.젖을 얻어먹지 못한 아이는 며칠 동안 울음을 그칠줄 모르고 산모는 아이를 보다못해 결국 죽음을 결심하게 된다. 이른바 동반자살.
먼저 아이를 목졸라 숨지게 하고 자신도 자살하려다 결국 경찰에 붙잡히자 아이를 끌어안으며 급기야는 울분에 찬 절규를 터트리는 산모의 고통. 자기의 분신인 아이를 죽여야만 했던 우리의 지난 시대 비극을 잘 표현한 연극이었다.
그녀는 극중에서 그 시대 산모의 한을 표현하기 위해 장장 15분 동안이나 길고 긴 대사를 혼자서 읊어 나가야 했다. 어떤 배우라해도 이렇게 장시간을 독백하려면 각본에 없는 대사가 마구 튀어 나오기 일쑤였다. 그녀도 역시 마찬가지였다.그러나 각본을 쓴 작가도 배우가 대사를 다르게 읊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정도로 그녀의 연기는 매끄럽고 탁월했다.
관객은 물론 작가, 스태프, 배우, 악사들 모두가 눈물범벅이 될 정도였다. 이런 그녀를 동료들은 심지어 존경심을 갖고 대했다.연극이 끝난 뒤에도 전옥은 마치 자신이 실제 비극의 여주인공 것처럼 슬픈 표정이 쉽사리 지워지지 않았다. 그녀는 연극을 위해 태어난 천재였다.
악극단의 전국 순회공연은 연중 계속되었다. 공연은 했지만 관객이 그다지 많은 편은 아니었다. 그래서 30여명이나 되는 악극단원은 매번 여관비가 모자랄 정도로 고생을 하며 다녔다. 극단의 공연은 중국에까지 활동영역을 넓혀 길림에 있는 중국교포들을 찾아가기까지 했다. 그런데 중국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길림공연을 하던 중 극단은 여관비를 지불하지 못해 다음 공연장으로 떠나지 못하는 불상사도 생겼다. 공연시간은 임박해 오는데 여관 주인은 숙박비를 다 지불해야 보내주겠다고 버티는 바람에 실랑이가 벌어졌다.명덕은 여관주인과 담판을 벌였다.
자신이 남아있을테니 단원들을 모두 보내달라고 간청했고 한참만에야 여관주인의 약속을 받아냈다. 이렇게 해서 단원들은 모두 다음 공연지인 흑룡강으로 떠나고 명덕은 혼자 남아서 볼모의 신세가 되었다. 저녁때가 되자 명덕은 그냥 무작정 남아있을 수가 없었다. 조바심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명덕은 한참 고민을 하더니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명덕은 그날 밤 여관주인에게 편지를 써놓고 몰래 담을 뛰어넘어 흑룡강쪽으로 향했다.
돈이 생기면 바로 갚겠다는 내용의 편지 한 장을 남긴 채. 뒤늦게 명덕이 달아난 사실을 발견한 여관주인 왕씨는 하수인 다섯명을 풀어 잡아오도록 지시했다. 명덕은 한참 전에 여관을 나와 이리저리 갈 길을 찾았지만 낯선 고장이라 쉽게 길을 찾지는 못했다. 지나가는 사람들한테 묻고 또 물어가며 기차역에 간신히 도착할 수 있었다.
■ 연극의 천재 전옥 그리고 유랑 악단
모두에게 아쉬움을 남긴 채 명덕이 기차를 타려고 역 입구로 들어서려는데 여관주인 왕씨가 보낸 다섯명의 하수인이 어느새 왔는지 명덕의 앞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역전에 싸늘한 긴장이 감돌았다. 다섯명의 주먹들이 명덕을 에워싸고 위협했다. 그러나 명덕은 그들에게 호락호락 당할 사람이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배운 쿵후와 태권도 실력이 보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명덕은 방어자세를 취했다. 그들에게 치명상을 주고싶지 않았다. 나중에 갚는다고는 했지만 어쨌든 여관비를 내지 않고 도망간 건 잘못이니까. 한참 동안의 탐색전 끝에 먼저 한명이 명덕에게 달려들었다. 명덕이 몸을 살짝 피하면서 정권으로 그의 가슴을 내질러 그 자리에 눕혔다. 또 한명이 달려들려고 하는 순간 명덕이 몸을 날려 앞발차기로 그의 얼굴을 강타하면서 재빠르게 역 안으로 달아났다. 개찰구를 훌쩍 뛰어넘어 철로 쪽으로 내달렸다. 격투가 시작된지 약 오분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미 기차는 출발하여 속도가 꽤 오르고 있었다. 명덕이 있는 힘을 다해 기차를 따라가 간신히 맨 뒤칸 객차에 오를 수 있었다. 왕씨의 하수인들은 갑작스런 명덕의 도주에 당황했지만 곧바로 역으로 따라 들어갔다. 그러나 이미 기차는 저만큼 떠나가 버린 뒤였다. 명덕은 이미 기차 안으로 사라져버리고 없었다. 그들은 멀어져가는 기차를 바라보며 기진맥진해 했다. 이렇게 해서 명덕은 먼저 보낸 단원들과 간신히 합세할 수 있었다. 단장인 명덕이 합세하자 극단은 다시 활기를 되찾았고 단원들 모두 공연에 열중했다. 그러나 공연은 그들의 열정만큼 흥행에 성공하지는 못했다. 흑룡강에 살고있는 조선족의 숫자가 겨우 수천 명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연을 구경올만큼 여유있는 사람도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흑룡강 공연을 마친 뒤 귀국한 극단은 결국 재정난을 견디지 못해 파산했다.
단원들도 모두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나라를 잃은 연예인들은 노랫가사에서 애국을 찾았고 연극에서 국민의 한을 대변했다. 악극단의 공연은 이렇게 국민들에게는 큰 위안이 되었지만 당시는 일본의 제지가 심했고 대동아 전쟁 중이라 극단을 유지한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무리였다.극단이 해체된 뒤 전옥과 영자 그리고 그의 남편 명덕은 서울로 이사했다.
그들이 이사한 뒤 얼마 안돼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2차대전이 끝나고 온 국민이 자유를 얻은 기쁨에 해방의 물결이 온 나라에 넘실거리고 있었다.이런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악극단은 해체 이후 1년 동안 재건되거나 새로운 극단이 창설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해체의 아픔을 채 잊기도 짧은 시간이었다. 그리고 당시는 끼니를 때우기도 힘든 마당에 사람들이 극장을 찾을 리 없었기 때문에 극단이 있어봤자 얼마 못가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명덕은 이런 어려움을 뒤로하고 신향악극단을 조직해 해방후 첫 공연을 종로에 있는 평화극장에서 개막했다. 막은 올랐지만 객석에 손님이라곤 건달들 너댓명이 고작이었다.이런 암울한 극단의 현실을 걱정하던 영자는 너무 답답한 나머지 병을 얻었다. 영자는 병석에 누워 시름시름 앓았다. 이미 자신의 병이 고쳐질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영자는 일곱살 난 석훈을 두고 가려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녀는 자리에 누워 하나님께 기도했다. 고향 해주에서 수녀가 된 언니를 따라다니며 기도하던 습관이 몸에 배어있었다.
“하나님 저는 이대로 죽는가 봅니다. 저는 세상엔 미련은 없습니다만 우리 아들 석훈이가 맘에 걸립니다. 이제 겨우 일곱살인데 제가 지금 죽으면 명덕이는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 제발 우리 석훈이를 보살펴 주십시오.”1945년 12월 22일 추운 겨울밤. 영자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석훈이를 걱정하며 마침내 조용히 눈을 감았다. 모두에게 아쉬움을 남긴 채.
■ 전옥의 딸 강효실
효실은 성년이 되어 최무룡이란 배우와 만나 결혼했다. 명덕은 3일 동안 내내 영자의 시신 옆에서 잤다. 도저히 영자 옆을 떠날 수가 없었다. 지난 날 그녀와 함께 고생했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아무런 영화도 누리지 못하고 고생만 하다 먼저 떠난 아내가 그저 불쌍하기만 했다. 그는 철모르는 석훈이를 안고 시신 옆에서 한없이 울었다.
“여보, 이제 당신을 볼 수 없게 되었구려. 고생만 실컷 하다가 이렇게 먼저 떠나면 난 어찌 하라는 거요. 우리 석훈이는 어찌하고.....흑흑.”
전옥은 아내를 잃고 괴로워하는 명덕의 애처로운 모습에 덩달아 눈물을 흘렸다. 조문객들도 모두 그런 명덕의 모습에 눈시울을 적셨다.장례는 화장으로 치르기로 했다. 서울 홍제동에 있는 화장터에서 화장을 했다. 영자의 분골은 인왕산 중턱에 뿌려졌다. 묘지를 만들 땅도 돈도 없었다. 당시는 나라의 형편이 매우 어려운 때라 가난한 사람들 대부분은 가족의 분골을 강이나 산에 뿌릴 수 밖에 없었다.
묘지를 만들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시절이었다.전옥은 가장 친했던 친구 영자의 분골이 바람에 날리는 장면을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상념에 잠겼다. 연극과 예술, 그리고 이것을 창조하고 가꿔나가는 인간의 덧없는 인생을 영자의 영혼 앞에서 되새기고 있었다. 그러나 연극인은 이렇게 언젠가는 하늘나라로 떠나가지만 그가 남긴 예술은 영원히 대중과 함께 호흡하며 이 세상을 밝게 비추는 영원한 생명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하고 있었다.
예술이란 인간 삶의 단면을 끄집어내 그것을 작은 테마로 모아 대중에게 보여주고 느끼게 해주는 광대의 몸짓이다. 연극은 비록 작은 무대 위에서 짧은 시간 동안에 펼쳐지는 행위예술이지만 배우와 관객이 함께 호흡하며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아름다운 삶의 공간이다.이 작은 공간을 통해 인간은 삶을 되돌아보고 정의를 깨닫고, 나아가 인간세상의 윤리를 실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던가. 아무도 모르게 사장된 수많은 아름다운 이야기를 찾아서 함께 울어주고 함께 기뻐해주도록 도와주는 것이 바로 예술의 역할이 아니던가. 이러한 인간의 희비와 인간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대중과 함께 나누는 잔치가 바로 악극단이 펼치는 공연에 다름 아닌 것이다.전옥은 영자의 영혼 앞에 다짐하듯 혼잣말을 했다 .
“오로지 악극단을 위해 살다 먼저 떠난 너의 영혼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는구나. 언젠가는 나도 너처럼 한 줌 흙으로 돌아가겠지만 내가 살아있는 한 너의 몫까지 열심히 살아가련다. 네가 못다한 한을 이어받아 우리 악극단을 올바로 세우고야 말겠다. 영자야, 하늘나라에서 꼭 지켜봐다오!”
이렇게 해서 우리나라 초창기 연예계의 큰 별이 하나 떨어졌다. 활짝 피지도 못한 채 짧은 생을 마감한 아쉬운 작별의 순간이었다.그 후 전옥은 백조악극단을 창설했다. 하얀 백조같이 순수하게 살다간 친구 영자의 넋을 기리는 의미에서 이름을 백조악극단이라 지었다. 이 악극단은 해방이후 최고의 악단으로 성장을 거듭하게 된다.
해방 직후 극장의 판도는 외국 영화가 휩쓰는 형국이었다. 국산 영화는 일년에 겨우 서너 편 정도 상영되는 수준에 불과했다. 당시 국산은 ‘유관순’을 비롯해 ‘성벽을 뚫고’, ‘똘똘이의 모험’이라는 영화가 고작이었으니 가히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였다.그러나 전옥의 백조악극단은 전국을 순회하면서 연일 흑자를 올리는 좋은 성과를 보였다. 전옥의 연기를 보러 오는 관객의 물결이 연일 만원사례를 기록했다.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악극단의 전성기가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배우들과 스태프진 할 것 없이 모든 연예인들이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지는 시기가 도래하였다. 연습하랴 공연하랴, 그리고 가족들, 자녀들 부양하랴 남자 연예인 못지않게 힘들었던 게 바로 여성 연기자들이었다. 더욱이 이들 연예인의 후예들의 고생이야말로 이루 말할 필요가 없다.어려서부터 제대로 응석부릴 틈도 없었다.
부모가 공연에 쫓기다 보니 아이들과 따로 어울릴 수 있는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대신에 아이들은 부모들의 공연을 따라다니며 눈으로 귀로 연극을 익혀나가게 되었다. 그래서 연예인의 자손들이 성장해 또 연예인이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환경이 그들을 연예인이 되도록 만든 것이다.
전옥의 딸 강효실은 늘상 무대 뒤에서 엄마의 연기를 지켜보며 자랐다. 후에 효실이가 유명한 연극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어려서부터 엄마 전옥을 따라다니며 탁월한 연기를 유심히 지켜봤기 때문이었다. 효실은 성년이 되어 최무룡이란 배우와 만나 결혼했다. 두 사람 사이엔 아들이 생겼는데 그가 바로 최민수였다. 두 사람은 민수 외에도 딸들을 낳았고 비록 가난한 연극인이었지만 서로의 순수한 사랑에 의지하며 나름대로 행복한 삶을 영위하던 시절이었다.
또 한명의 기인 '이예춘'
강효실은 자신이 낳은 아들 민수가 자라면서 점점 어머니 전옥과 생김새가 닮아가는 걸 느꼈다. 동료 배우들도 민수가 자라면서 전옥을 닮아가자 훌륭한 배우로 키우라고 권하곤 했다.“얘도 이 담에 크면 외할머니를 닮아서 연기를 퍽 잘하겠다.”이들의 예상은 그대로 적중했다. 민수는 자라면서 배우의 길로 들어서게 되며 연기자의 삶을 걷게 된다.당시 연극 무대에선 또 한명의 기인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이예춘이었다.
그는 악역을 도맡아 하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악역임에도 불구하고 연기력이 뛰어나 언제나 관객들의 박수를 독차지하곤 했다. 주연보다 오히려 더 큰 박수를 받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아마도 우리 연예계에 이같은 일화는 전무후무한 현상일 것이다.이예춘은 무대에선 악역을 도맡았지만 실제 그의 생활은 매우 착실했다. 부인에겐 그만한 공처가가 없을 정도로 좋은 남편이었고 천성적으로 호인이라 다들 그를 좋아했다. 그런 그에게도 아들이 생겼다.
이예춘은 명덕에게 자기 아들의 이름을 지어달라고 부탁했다.
“명덕이 형님, 우리 아들한테 줄 멋진 이름 하나 생각해 보십시오!”
명덕이 예춘의 아들에게 지어준 이름이 바로 덕화였다. 그가 바로 청춘 스타 이덕화였다.
예춘은 이름이 너무 좋다고 하면서 명덕에게 냉면 대접을 하겠다며 무척이나 기뻐했다.
“형님은 덕자를 아주 좋아하시나 봐요, 하하하!”
명덕이 이름을 지어준 아이는 또 있었다. 클라리넷 연주에 뛰어난 실력자 꺽다리 엄제건이 딸을 낳았는데 이번에도 역시 명덕이 이 아이의 이름을 지어줬다. 그녀가 바로 엄앵란이었다. 엄앵란은 나중에 신성일과 결혼하여 가정을 이룬다.이름을 예쁘게 지어준다고 아이만 낳으면 모두들 명덕에게 아이의 이름을 부탁했다.이렇게 악극단 생활을 하면서 세월이 흘러 어느덧 아이들이 하나씩 둘씩 태어나 식구가 많이 늘게 되었다. 극단이 공연을 위해 한번 자리를 옮기려면 아이들이 많아 큰 고민거리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회의를 한 결과 아이들은 모두 집에 떼어놓고 다니기로 결정했다. 부모들은 무대 위에서 열화와 같은 박수를 받으며 대중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연예인들이었지만 아이들은 부모와 떨어져 응석도 부리지 못하고 외롭게 자라야 하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연예인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할머니나 친척들의 손에서 자라나게 되었다.석훈이도 예외는 아니었다.
명덕은 아들 석훈을 평양에 살고 있는 어머니 서윤희에게 맡겨놓고 전국 순회 공연을 다녔다. 이렇게 해서 겨우 일곱살에 어머니를 잃은 석훈은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아버지와 떨어져 살아야 하는 아픔을 맞이하게 된다.
■ 6·25를 만난 악극단
명덕은 일곱살 난 아들 석훈을 데리고 5년 동안을 홀아비로 지냈다. 그 사이 명덕은 육군에 입대하여 군악대 대장으로 군생활을 하게 되었다. 군대 생활을 하는 동안 명덕은 미스 리라는 여자와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고 명덕이가 열두살이 되는 해에 재혼을 했다. 명덕은 서울 영천으로 이사해 새살림을 시작했다.
그러나 새 식구와의 단란했던 가정 생활은 잠시 뿐. 명덕은 또 다시 새로운 시련을 맞게 된다. 전쟁의 소용돌이가 이 땅에 몰려온 것이다. 명덕에게도 전쟁의 고통을 안겨주었다.때는 1950년 6월 25일.명덕은 인천에 볼 일을 보러 갔다가 전쟁을 만난다. 처음엔 전쟁이 금방 끝날줄 알고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갔다. 어느새 서울도 인민군이 점령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명덕은 인민군을 피해 달아나다 보니 서울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몸이 달았고 마음은 안타까웠지만 이젠 너무 늦었다. 어쩔 수 없이 명덕은 걷고 또 걸어 대구까지 갔다. 대구는 아직까진 전쟁의 위험에서 벗어나 있었다.
명덕은 새 부인과 아들 석훈이가 몹시 걱정되었다. 자기 혼자 도망왔다는 생각에 자책감도 들었다.대구에 머물면서 명덕은 술이 부쩍 늘었다. 술이 없으면 잠을 이루지 못했다.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5년을 홀아비로 보내면서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마시기 시작한 술이었다.
그런데 이젠 또 전쟁을 만나 헤어진 새 식구와 아들 명덕에 대한 걱정이 떠나질 않아 술 없이는 하루도 버틸 수가 없었다. 가족 걱정에 하루하루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명덕은 이산 가족의 비애를 경험하고 있었다.
두 모자만 남기고 명덕이 사라져 어떻게 먹고 살아야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식량이라곤 한동네에 사는 어떤 이웃이 일러준대로 산풀을 뜯어 삶아먹는 게 고작이었다. 달리 식량을 구할 길이 없었다.
"어머니, 산에 가면 식량으로 쓸 풀을 구할 수 있답니다."
"그러니? 그럼 그걸 어떻게 찾아낸다니?"
"제가 산에 한 번 가봐야겠어요."
"그러려므나."
석훈은 전쟁의 와중에서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경험하게 된다. 석훈이 본 장면들 중에는 아주 기이한 일도 많았다.
전쟁이 한창이던 어느 날 서울 서대문에 있는 형무소에 인민군 탱크가 들이닥쳐 대문을 부수자 갇혀있던 죄수들이 하얀 수의를 입은 채 거리로 뛰쳐나와 만세를 부르며 미친듯이 뛰어다녔다. 석훈은 그런 풍경이 어찌 된 영문인지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다.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며칠 후 저녁, 소희는 먹을 것을 찾다가 참외 한 알을 구해와 저녁으로 때운 적이 있었다. 참외를 다 먹고난 뒤 소희는 석훈에게 아주 심각하게 일렀다.
"참외를 먹고 소변을 빨리 보면 먹은 게 다 꺼지니까 아무리 소변이 마려워도 참아야 한단다."
"네, 어머니. 잘 알겠습니다."
석훈은 새엄마의 말을 고지곧대로 믿고 소변이 마려워도 한참동안이나 참아냈다.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었지만 얼마나 굶주렸으면 그런 생각을 다 했을까. 전쟁의 참상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석훈은 며칠을 굶었더니 위가 쓰려 배를 움켜쥐며 마루에 나가 뒹굴었다. 한참을 뒹굴다 마당을 내려다보니 언뜻 마당 한 쪽 구석에 대파 몇 뿌리가 자라난 게 보였다. 석훈은 당장 마당으로 뛰어내려가 파를 모조리 꺾어와 고추장에 찍어 허겁지겁 먹었다. 그것도 먹을 거라고 배는 조금 불러왔다. 허기를 달래기엔 충분한 양이었다.
그런데 잠시 후 문제가 더욱 심각해졌다. 배는 조금 불렀지만 굶었을 때 보다도 위는 더욱 쓰려왔다. 빈속에 매운 파가 들어가자 뱃속이 심하게 뒤틀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고통스런 나날의 연속이었다. 굶주림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 공포를 알 수 없을 것이다.
고통스럽고도 어렵게 3개월이 지나갔지만 전쟁은 끝날줄 모르고 날로 심각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연합군은 이젠 아예 서울 도심지를 목표로 연일 융단폭격을 퍼부었다.
석훈은 동네 사람들이 가르쳐준대로 지하실로 대피했지만 포탄은 어김없이 석훈의 집에도 떨어져 지붕에 불이 붙었다. 그러나 지하실에 숨어있는 석훈이 이를 발견했을 리가 없었다. 석훈은 포탄 공습이 시작되자 지하실로 숨어 열 손가락으로 눈코귀를 다 막고 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려 공습이 지나가기만 기다렸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눈이 튀어나오고 귀가 멀게 된다고 누군가에게 들은 기억이 났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하고서도 포탄이 날아와 터지는 소리가 너무 커 공포에 몸이 가늘게 떨렸다.
미군을 위시한 연합군의 폭격이 인민군을 몰아내려는 것인지, 아니면 남쪽 땅을 아예 다 없애버리려는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포탄세례는 끊이지 않았다. 포탄 날아가는 소리가 최소한 일초에 한 번씩은 들리는 것 같았다. 포탄 날아가는 소리에 이어 '쨩' 하며 폭발되는 소리와 함께 어마어마한 위력의 파편이 건물들을 박살내고 있었다.
석훈은 지하실에 연기가 너무 꽉 차 바깥으로 서둘러 빠져나왔다. 기침이 심하게 나와 가슴이 쓰릴 지경이었다. 지붕을 올려다봤더니 불이 붙어 활활 타오르고 있었더. 석훈은 걸음아 날 살려라, 하면서 부리나케 대문 밖으로 뛰어나왔다.
석훈이네 집에 세들어 살던 영식이 어머니는 두살박이 영식이를 앉고 바깥으로 뛰쳐나왔다. 영식이 아버지는 다리에 파편을 맞고 피를 철철 흘리고 있었다. 석훈이 영식이를 받아 안았다. 그런 와중에도 포탄이 끊임없이 날아왔다.
"영식 어머니, 빨리 아저씨 다리를 치료하셔야지요!"
그러나 석훈의 얘기가 들리는지 마는지 영식 어머니는 당황스런 표정을 지으며 쓰러진 영식 아버지 다리만 붙잡고 있었다. 영식 어머니 눈에선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흑흑..... 여보 어떡해요?"
아무리 시가전도 필요하겠지만 인구가 많은 서울을 전쟁터로 만들어 포탄을 퍼부어대는 바람에 군인들 보다도 선량한 서민들의 죽어나가는 숫자가 부지기수였다. 서울은 마치 지옥을 방불케했다. 영식 아버지가 다리에 파편을 맞자 영식 어머니도 어찌 할 바를 몰라 쩔쩔매기만 했다. 이를 보다 못한 석훈이 영식이를 안고 먼저 포탄을 피해 안산이라는 언덕 위로 올라가 대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