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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쉼터 스크랩 말(午) 관련 민속문화와 전통사회?
ysoo 추천 0 조회 91 14.01.18 10:5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말 관련 민속문화와 전통사회

 

영혼(靈魂)과 수호신(守護神)의 승용동물(乘用動物) 말(午)

 

천 진 기

 

목 차

1) 문화적 표상의 역사적 전개
2) 생태학적 모형
3) 민속학적 모형
4) 영혼과 수호신의 승용동물 말 상징성

 

 

?말 김유신묘?          ?뱀 만봉筆?

<도1> 오상(午像)

 

말(午)은 12지의 일곱 번째 동물로서 경오(庚午)?임오(壬午)?갑오(甲午)?병오(丙午)?무오(戊午) 등으로 순행하며, 시각으로 오전 11시에서 오후 1시, 방향으로는 정남(正南), 달로는 음력 5월에 해당한다.

 

말의 이미지(image)는 박력과 생동감으로 수렴된다. 외모로 보아 말은 싱싱한 생동감, 뛰어난 순발력, 탄력있는 근육, 미끈하고 탄탄한 체형, 기름진 모발, 각질의 말굽과 거친 숨소리를 가지고 있어 강인한 인상을 준다. 이러한 말은 고래로 원시미술?고분미술?토기?토우?벽화 등에서 나타나고, 구전되는 이야기(신화, 전설, 민담, 속담, 시가), 민속신앙, 민속놀이 등 민속문화 전반에서도 다양하게 전승되고 있어, 말은 일찍부터 우리 생활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말은 역마?승마 등의 교통용, 전마의 군사용, 생산수단의 농경용, 그밖에 말갈기[馬?]는 갓[冠帽]으로, 말가죽은 가죽신[馬靴鞋]?주머니, 말힘줄은 조궁(造弓), 마분(馬糞)은 종이 원료?땔감?거름으로, 말고기는 식용으로 우리 일상생활에 널리 이용되었다.

 

한국인들은 어느 동물보다도 말과 깊은 유대를 맺어 왔다. 그럼에도 우리는 말과 더불어 살아온 생활 기록은 단편적으로만 대할 수 있을 뿐이고, 그나마 무관심의 영역으로 방치해 버렸다. 말과 한국인의 생활사, 이것은 한국인의 단면을 구명하는 일인 동시에 한국인의 실상, 뿌리를 조명하는 작업일 수도 있다.

 

이 장에서는 말에 얽힌 민속문화?문헌자료?고고유물?유적 등을 일견해 봄으로써 우리 민족이 말에 대해 갖고 있는 관념과 태도의 일면을 살펴보고자 한다.

 

 

1) 문화적 표상의 역사적 전개

 

(1) 말이 기록된 문헌 자료

 

문헌상에 나타나는 말의 기사가 어떠한지를 우선 고찰하여 본다. 기원전의 말에 관한 기록으로는 『사기(史記)』조선전(朝鮮傳)이 있다

 

遣太子入謝 獻馬五千匹及饋軍糧

 

이 기록은 한나라와 대결하고 있던 위만조선이 한과 협상과정에서 말 오천 필과 군사에게 먹일 군량을 바치려고 하였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말하는 오천 필은 위만조선(衛滿朝鮮 B.C.194~108) 당시 말의 수가 상당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위만조선 시대에 기마의 습속이 있었으며 이때 말은 전투에 활용되었으리라고 믿는다. 그 다음에 『삼국지(三國志)』 동이(東夷)전 부여조에 나타난 말에 관한 자료이다.

 

?其國善養性 出名馬未玉
?男女淫 婦人妬皆殺之 尤憎拓已殺 尸之國南山上 至腐爛欲得 輸牛馬及與之

 

여기서 부여에서 명마가 산출되고 있음을 알려주고, 일반 ‘민’들은 가정에서 소나 말을 사육하였으며, 필요에 따라서 언제든지 바꿀 수 있는 재물로써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음을 알려 주고 있다. 대부분 기록에는 보통 말이 있다고 서술되고 있는데 부여에만 명마가 난다고 기록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부여가 위치하고 있는 지형적 환경이 말을 중시하고 좋은 말을 생산하게 하였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부여조의 두 번째 기록은 부여의 법속과 풍속을 약술한 자료1)로 시기가 아주 심한 여자를 죽인 후에 시체가 산 위에서 썩게 내버려두는데 여자 집에서 찾아가고자 할 때는 소?말을 보내야 되돌려 보내 준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이 가정에서 사육되었고 재물의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金銀財幣盡於送死 積石爲封 列種松柏 其馬皆小 便登山

 

고구려의 말은 거의 다 작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부여의 말과는 종류가 다르다는 인상을 받게 하며, 작기 때문에 산에 오르는 데 편리하다는 것으로 기마의 습속2)을 전해주는 것이다.

 

1) 이 기록은 일부다처에서 오는 부인의 妬忌罪를 설명한 내용이다. 여기에 관한 논문은 李基白, ?夫餘의 妬忌罪?,?史學志?4(1970) 참조 바람.
2) 한반도의 기마민족설은 사학계에서도 찬반양론이 분분하다. 여기서는 기마민족설에 관난 논의는 논외로 하겠다.

 

 

『삼국지(三國志)』동이전 예조에도 말의 기사가 있다.

 

?其邑落相侵犯 輒相罪責生口牛馬 名之爲責禍
?果下馬 漢桓時獻之(臣松之 果下馬高三尺乘之可於果樹下行 故謂之果下)

 

예(濊)에 말이 있는데 이 자료에 의하면 말은 배상하는데 중요한 재산으로 간주된 듯하며, 산출되는 말이 작고 과수나무 밑을 통과할 수 있어 과하마라고 부른다는 내용이다. 예의 앞 기록과 유사한 것이 부여에도 있었는데, 구체적으로 소?말이 명시된 것을 보아도 이들 가축이 매우 귀중한 재산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고구려에도 말이 작아 산에 오르기 편하다는 점과 과하마의 기록으로 보아 작은 말들이 우리나라에 존재한 것은 틀림없다. 이렇게 볼 때 부여의 명마와 재래의 작은 말의 두 종류가 우리나라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음은 『삼국지』동이전 동옥저의 말에 관한 사료이다.

 

?宜五穀善田種 人性質直疆勇 少牛馬 便持矛步戰

 

이 내용은 밭곡식이 잘 되나 우마가 작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관한 기록에 가운데서 말에 관한 이야기를 쓰면서 우마가 작다고 기술한 것은 이것이 유일한 예라고 할 것이다.

 

『삼국지』동이전 삼한에 관한 기록은 다음이다.

 

?不知乘牛馬 牛馬盡於送死(馬韓條)
?乘駕牛馬…便步戰兵杖與馬韓同(弁辰韓條)

 

마한은 우마를 탈 줄 모른다는 것이고 변?진한은 반대로 우마를 탈 줄 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앞서 진한의 기록에서 우마를 장사지내는 데 다 쓴다는 것은 부장시킨다는 의미인데, 현재까지 고고학적 자료에 의하면 그러한 예가 없다. 이렇게 되면 우마는 장사지내는 의식에만 쓴다는 의미가 되거나, 교통수단으로 쓴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아무튼 위의 기록으로 보아 삼한에도 말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의 『삼국지(三國志)』동이전의 말 기록을 정리하면 다음의 몇 가지로 지적할 수 있다.

첫째, 부여의 명마와 재래의 과하마라는 두 종류의 말이 우리나라에 있었다.

둘째, 예나 부여에서는 말을 재산으로 간주해, 재물과 바꿀 수 있다는 인상을 받게 하고, 동옥저는 말의 수가 적다는 사실이다.

셋째, 삼한지역은 모두 우마가 있으나 마한은 말을 타지 못하는 반면에 변?진한은 말을 타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상에서 한국 고대의 말 기록(記錄)을 대충 살펴보았다. 여기서 언급한 문헌 이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이 논의를 풀어 나가면서 이야기하기로 하겠다.

 

 

(2) 말이 표현된 고고학적 유물

 

말이 유물이나 유적에서 마형(馬形) 혹은 마문(馬紋)의 장식문양으로 사용된 예는 아주 오랜 청동기시대부터 보인다. 이 장에서는 청동기시대의 유물, 신라?가야의 토기와 토우, 고구려의 고분벽화를 중심으로 그것의 형태?의미?기능 등을 살펴보기로 한다.

 

① 청동제 말

원시미술에 나타나는 청동제 유물로는 청동마형대구(靑銅馬形帶鉤), 청동제마(靑銅製馬), 동제마형검파두장(銅製馬形劍把頭飾) 등이 있다.

 

마형대구(馬形帶鉤)3)는 어은동 출토의 청동일괄 유물 중에 들어 있는 유명한 대구(帶鉤)이다. 말은 팽팽한 체구에 갈기를 세우고 꼬리를 짧게 잡아매어 말이 가지는 동력감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 유물은 주술적인 면과 토테미즘(Totemism)과 관계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4)

 

청동제마(靑銅製馬)5)는 체구가 비교적 사실적으로 표현된 마형(馬形)으로 가슴에서 뒤로 구멍이 뚫려 역시 끈으로 몸에 차게 되어 있어 주술적인 의미를 지닌 호부(護符)적인 지물(持物)로 추정된다.6)

 

3) 金元龍, ?原始美術?, 동화출판공사, 1983, 123쪽, 도판 118 馬形帶鉤, 길이 15.6cm, 경북 영천군 금호면 어은동 출토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4) 李殷昌, ?新羅土偶에 나타난 民俗?, 1983, 202~203쪽.
5) 金元龍, 앞의책(1983), 125쪽, 도판 120 ; 韓國馬事會, ?馬事博物館?(도록), 3쪽, 높이 3.22cm, 어은동 출토,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6) 李殷昌, 앞의글(1983), 204~205쪽.

 

 

<도2> ?말과 사슴, 영천어은동 출토, 초기철기시대, 길이 4.5 국박소장?

 

 

<도3> ?말, 호랑이형 띠고리, 영천어은동출토, 초기철기시대 길이 22.4 국박소장?

 

동제마형검파두식(銅製馬形劍把頭飾)7)은 동검의 칼자루 끝에 장착했던 동제장식을 방형 입식의 좌우 두 갈래로 갈라지며 뻗은 양쪽 끝에 각각 두 마리씩 외향식(外向式)으로 입마식(立馬飾)한 것이다.

 

마형(馬形)을 비롯한 청동동물상8)은 농경사회에 있어서의 민속적 표현으로 모두 스키타이 문화요소인 시베리아 지방계 문화의 계보로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신상으로서 풍요?다산?안과?제액 등 주술 축원하는 종족수호신 또는 민족보호신?조상신으로 신앙된다.

 

그리고 동물숭배의 주술적 의미를 지닌 호부적인 보호신, 제사의기로서 토테미즘(Totemism)의 의의를 지닌 동물신으로서 신앙하기도 하였다고 해석되고 있다.9)

 

또한 한반도에서 출토되는 차여구?마구(車輿具?馬具)는 토광묘에서 나타나는 것이 가장 오랜 유물들이다.10) 토광묘는 땅을 파고 묘광(墓壙)을 만든 다음 목관을 묻거나 또는 관을 사용하지 않고 묻는 경우가 있다. 청동기, 철기시대에 걸쳐 나타나며 부장품에서 신분과 재산의 격차를 보이고 있다.

 

7) 金元龍, 앞의글(1977), 88쪽, 도판74, 길이 12cm, 김해 양동리 출토.
8) 청동동물상으로는 이 장에서 언급한 것 이외에 청동호형대구(靑銅虎形帶鉤), 청동녹두형(靑銅鹿頭), 압조형식검파두(鴨鳥形飾劍把頭), 조형식검파두(鳥形飾劍把頭) 등이 있다.

9) 李殷昌, 앞의글(1983), 202~207쪽.
10) 金貞培, 앞의책(1986), 100쪽. 이 글에서 차여구(車輿具), 마구(馬具)가 출토되고 있는 토분묘의 주요 유적과 관계유물을 기술하고 도표로 일목요연하게 제시하고 있다.

 

 

② 말이 표현된 신라?가야의 고분유물

신라?가야지역에서 말이 표현된 고분 유물로는 마각문토기(馬刻文土器), 마각문토제품(馬刻文土製品), 마형토기(馬形土器), 기마인물토기(騎馬人物土器)11), 천마도(天馬圖), 토우(土偶) 등이 있다.

 

말그림 목긴 항아리(馬刻文土器)는 여러 개 있으나 경주 박물관 소장품12)과 동아대박물관 소장품13)이 대표적이다. 이들 모두 대(臺)가 있는 목이 긴 항아리로, 말 그림은 항아리 어깨부분에 일렬 또는 이열로 배치되었다. 이들 말 그림은 정지된 말이 아니라 달리는 모습이며 그 말은 ‘얼룩말’이 많고 보통 ‘여니말’도 있다. 표현기법은 모든 선각으로 통일되었는데 소박하고 고졸한 토속적인 표현이다. 이들 말 그림 목긴 항아리는 토기로 부장했다기 보다는 선각화한 말을 피장자에게 공헌하는 뜻이라 추정된다. 피장자, 곧 영혼이 탈 수 있는 말을 공헌하는 뜻이라 하겠다.14) 이와 유사하게 말을 그린 토제품15)이 고분에 부장되는 사례가 있는데, 이것도 죽은 사람의 영혼이 탈 수 있는 말을 공헌하기 위함이다.

 

마형토기는 이형토기(異形土器)에 속하는 동물형 토기〔動物形土器〕로 무승마형(無乘馬形)인 마형 토기(馬形土器)와 기마형인 기마인물 토기가 있다. 마형 토기는 토기 자체를 말 모양으로 조성한 것으로 주로 가야지역에서 많이 출토된다. 기마인물토기는 말 위에 사람이 타고 있는 모습으로 가야?신라지역에서 출토된다. 대표적인 유물로는 금령총 출토의 기마인물토기16)가 있다.

마형토기와 기마인물토기는 상형(象形)적인 토우의 형태를 갖추고 있지만 한편 용기(容器)적인 토기의 구조를 갖추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추정을 할 수 있다. 선각으로 된 마각화의 말그림 목긴 항아리나 말그림 토제품에서 도토로 조각된 입체적인 말모양(마형토기)으로 전일보한 것이다. 앞에서 말한 유물에서처럼 사람이 없는 무승마형식에서 말을 타고 있는 기마인물형식의 구체적인 양상으로 더욱 발전한 것이다.

 

이들 마각문토기?마각문토제품?마형토기?기마형인물토기 이외에 경주 황남동 천마총에서 출토된 천마도17)가 있다. 백화수피(白樺樹皮)로 된 장니(障泥)에 하늘을 나는 백마가 그려져 있다. 경주 천마총의 천마도는 백화나무 껍질에다 색채로 그린 그 말이 구름 위를 날아가고 있다.

 

11) 지금까지 이들 마각문, 마형 토기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동물형토기에 대하여 많은 연구가 있다. 김원룡(1962, 1978), 이난영(1976), 이은창(1978, 1980, 1983), 정중환(1964), 진홍섭(1977,1978) 등이 있다.
12) 진홍섭, ?土器 土偶 瓦塼?, 144쪽, 도판28.
13) 진홍섭, 앞의책(1987) 140쪽, 도판29.
14) 이은창, ?馬刻文土器와 馬形土器?, 1987, 244쪽.
이은창과 비슷한 논의로는 토기의 용도에 주안점을 둔 김원룡(1962b, 1987b)은 말을 그린 신라토기는 祭器가 분명하다고 주장하면서 말그림을 토기에 부가함으로써 이 단순한 日常土器에 희생을 담는 祭器로서의 격을 부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軍馬와 함께 주인의 무덤으로 매장(埋葬)될 말 대신에 집어넣은 순장용 명기라고 해석하고 있다. 한편 정중환(1964)은 신라마형문토기의 마형문의 기원적 고찰에서 그 기원을 토템적 기원, 순장대신의 토우적 기원, 부제적 기원, 고구려적 기원, 골품적 기원으로 나누어 분석하였으나 補遺에 김원룡(1962b)의 주장을 인용하면서 마형문토기를 순장용 명기로 이해했다. 그런데, 이 순장용명기에 다른 동물도 있는데 굳이 말을 그린 것은 말을 타고 저 세상에 가서 영생하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15) 이은창, 앞의글(1978), 250쪽.
16) 진홍섭, 앞의책(1978), 145쪽, 도판 31, 32.
17) 국립경주박물관, ?국립경주박물관?(도록), 1988, 도판 185.

 

 

<도4> ?騎馬人物型土器 통일신라 금령총 출토, 높이 24.0 국박소장?

 

 

<도5> ?騎馬人物型土器 가야 5~6세기 전 김해 덕산리 높이 23.2 국박소장?

 

 

무덤의 주인공이 타던 말 옆구리에 대던 장니(障泥)에다 하늘을 날고 있는 말을 그린 것도 이 말이 주인공을 태우고 훨훨 날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의 표현이다. 이것이 지니는 뜻도 앞의 경우처럼 피장자에게 드리는 공헌적인 부장이라 생각된다.

 

 

<도6> ?말 新羅土偶 국박소장?

 

여기서 말이 그려진 토기, 토우나 천마도는 그 표현 방법에 있어서는 각기 다르지만 그 지니고 있는 의장과 사상은 다 같은 것으로 모두 피장자(彼葬者)에게 말을 타고 저세상(하늘?冥界)으로 가도록 드리는 공헌적 부장의 뜻을 가지고 있음은 동일하다. 고대사회의 고분축조에 있어서 피장자, 곧 사자의 죽음은 인간의 종말을 짓는다는 생각보다는 저세상〔天界, 光明界〕에 가서 오래오래 삶을 누리도록 바라는 계세사상(繼世思想)이 있었다. 그래서 큰 무덤을 만들고 각종 기물을 부장한 것이다.18)

 

여기서 소개한 유물 이외에 말대가리장식뿔잔?토우(말, 말탄 사람)19)?기마무인상토기20) 등이 있다. 삼국시대의 마구류 중에서 뛰어난 공예품이 많고, 특히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것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마구류에는 안장장식?등자?운주?마탁?마령?재갈?고옆 등의 금동제품21)이 있는데, 여기서 나타나는 각종 의장 문양은 우리나라 고대 미술양식을 추정해 보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도7> ?蠟石製 말 김유신묘 출토 국박소장?

 

말 십이지상 가운데 눈에 띠는 것은 전(傳) 김유신장군묘출토 납석제 12지상이다.22) 오른손에 환두대도를 잡고 왼손을 가슴에 얹은 무사(武士)의 모습이다. 머리는 말 형상을 하고 있다. 머리를 오른쪽으로 돌린 체 양팔을 걷어 올렸으며, 허리의 옆과 아래로 휘날리는 옷자락은 불상(佛像)의 천의(天衣)자락을 연상시킨다.

 

18) 이은창, 앞의글(1978), 251쪽.
19) 진홍섭, 앞의책(1978), 151~153쪽, 도판 61, 93, 94, 95, 97.
20) 이은창, 앞의글(1983), 225~230쪽.

21) 韓炳三, ?古墳美術?, 동화출판공사, 1975, 도판 68, 69, 70, 71, 72, 73, 74, 75.
22) 전 김유신장군묘는 무덤 주위 호석의 12지신상과는 별도로 해당 방위에 따라 12지상을 땅속에 매장한 이중구조이다.

 

 

③ 고구려 고분벽화 속의 말

 

고구려의 고분벽화에는 말을 타고 가는 기사도, 말을 타고 활을 쏘는 수렵도, 죽은 사람의 혼이 타고 가는 개마도(鎧馬圖) 등이 있다. 우선 말이 그려진 고분벽화는 아래와 같다.

 

가) 안악3호분(동수묘) 주실회랑 행렬도-동벽에서 북벽에 걸쳐 전장 10m 일대행렬도에 기사가 그려져 있다.
나) 삼실총 제1실 북벽 기사도-마갑(馬甲)까지 씌운 중무장한 기사(騎士)가 공방을 벌이고 있는 광경
다) 쌍영총 연도서벽 기마상-머리에 쌍깃을 꽂은 고구려의 기마귀인(騎馬貴人)이 상반신을 앞으로 굽히고 달리는 모습
쌍영총 연도동벽 차마인물도-우차 앞에 쌍각식갑주(雙角式甲?)를 입고 장창(長槍)을 쥐고 개마(鎧馬)를 탄 창기병(槍騎兵)이 안장 끝에 단 깃발 장식을 휘날리며 달리고 있다.
라) 무용층 주실동벽 기마인물도-춤추는 모습을 그 아래쪽에 소동을 데리고 구경하고 있다.
무용총 주실서벽 수렵도-말을 탄 기사들이 사슴 호랑이를 쫓아 힘차게 달리는 모습

마) 개마총 현실서벽천정 받침 개마도-무장한 말을 네 사람이 인도해 가는 행렬(行列) 표현됨

 

 

이상의 고구려 고분벽화 중 개마총의 개마도는 앞에서 언급한 신라의 마문?마형토기에서 죽은 자를 저 세상으로 태우고 가는 말의 기능을 한층 더 분명하게 나타내 준다. 말머리에 화관을 쓰고 갑옷을 입고 궁둥이 위에는 각색의 색지를 매단 싸리비 같은 일식을 세운 말이 좌우 두 사람의 마부에 끌려가고 있으며 그 앞에서는 쌍각관의 키 작은 사람과 화려한 입식관을 쓴 귀인이 걸어가고 있다.

 

말에는 등자가 달린 안장이 얹혀 있으나, 사람은 타지 않았다. 그런데 말 앞에 ?총주착개마지상(塚主着鎧馬之像)?이라고 묵서(墨書)가 되어 있어 주인공이 말을 타고 있는 그림이라는 뜻이 된다. 즉, 주인공의 혼이 말을 타고 있어 사람을 그리지는 않았으며, 이 특수한 성장마(盛裝馬)는 영혼을 천상으로 모시기 위한 말이다.

 

 

<도8> ?말 탄 무사 고구려 쌍영총 국박소장?

 

무용총 주실 동벽의 기마인물도, 쌍영총 연도 서벽의 기마상?연도동역의 기마인물은 피장자(被葬者)가 주인공일 것으로 개마총의 개마도와 더불어 말은 피장자인 주인공의 영혼을 태우고 영계〔天界〕를 왕래하는 천마(神馬)일 것이다.

 

이와 같은 천마(神馬)사상은 고구려에서는 벽화의 기마인물도로 표현되었고, 신라와 가야에서는 앞에 말한 마각문토기, 마형문토기 등 토기류, 또는 토제품으로 표현되었고, 천마총의 천마도로 표현되기도 하였다.

 

 

2) 생태학적 모형

 

말은 유제목(有蹄目) 말과에 속하는 포유동물이다. 학명은 Equus caballus L.이다.
말의 조상이라고 생각되는 동물의 화석은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등지에서 볼 수 있다. 이들은 지금으로부터 약 300만 년 전으로 추정된 신생대 제3기층 초기의 지층에서 발견된다.

 

오늘날 가축화된 말은 중앙아시아가 원산으로 추정된다. 말이 형태는 품종에 따라 차이가 많다. 일반적으로 몸은 원통형이며 전신이 짧고 윤택한 털이 나 있다. 털은 목덜미와 꼬리부분에서 길게 자라 각각 갈기와 미총모(꼬리털)를 이루고 있다. 긴 얼굴은 1/3이 뇌를 간직인 두개골이고 나머지는 안면골이다. 말과의 동물은 모두가 성격이 활동적이고 영리하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활동하지만 특히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저녁에 이동한다. 또 무리를 지어 행동한다.

 

털의 색깔은 다양한데, 밤색의 율모(栗毛), 붉은색의 다모(茶毛), 검은색의 청모(靑毛), 황백색의 월모(月毛), 순백색의 백모(白毛), 갈색에서 흑색으로 나중에는 백색으로 변하는 위모(葦毛), 흰백반의 박모(駁毛) 등이 있다.

 

 

<도9> ?말진화도?

 

 

<도10> ?말 모습 현대?

 

말과의 동물의 몸 구조는 뛰기에 적합하도록 되어 있다. 이는 풀을 뜯으며 이동하고, 나무가 적은 트인 초원지대라는 환경이 만들어 낸 몸의 구조로 적의 공격을 피해 달아나기 위한 수단이 된다. 말은 뛰는데 적합한 신체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쇄골이 없이 다리 전체의 운동 폭이 크다. 사지가 길고 발목이라고 부르는 가는 관골에 살이 붙어 있지 않다.
사지의 근육은 몸통 가까운 쪽에 많이 붙어 있고 끝부분은 적다. 따라서 사지 끝은 그만큼 가볍고 걷는 속도의 조절이 쉽다. 운동 중 호흡이나 순환을 하기 위한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는다는 구조상의 특징이 있다.
사지의 끝은 근육이 적은 대신 탄력성이 풍부한 힘줄이 많다. 말은 갤럽(Galop)을 할 때는 한 다리만을 사용하여 순간적으로 전 중량을 지탱해야 하기 때문에 이때 다리를 약간 굽혀 이 부담을 감내한다. 힘줄은 무게를 지탱하고 다음 순간에는 그 탄력으로 다리를 강하게 펼쳐 전진을 돕는다. 이 갤럽주법은 말만이 가지는 특징중의 특징이다. 갤럽은 일종의 도약운동으로 순간 몸 전체가 완전히 공중에 떠 있는 것이다. 이때 몸이 높이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몸의 높이는 그대로 둔 채 무릎만 굽혀 지면에서 떼는데 그친다.

 

 

<도11> ?群馬圖윤두서筆지본담채 30.8x35.5 간송미술관소장?

 

말은 초식동물이다. 말은 초식에 적합한 맹장을 가지고 풀이 풍부한 평원에 살며 대량의 풀을 먹는다. 영양가가 그리 많지 않는 풀만을 먹고 살자면 굉장히 긴 소화기관을 가져야 한다. 육식동물은 맹장이 극히 작지
만 말은 굉장히 커서 여기에 먹은 것을 저장한다. 맹장에는 무수한 박테리아와 원충류로 된 장내세균총이 있어 먹은 풀이 셀룰로이드를 완전히 소화하는 것이다. 소가 먹은 풀을 일단 제1위에 저장해 두었다가 한가할 때 되새김질을 하는 것과 같이 말은 커다란 맹장에서 2차적 소화를 한다.

 

말은 서서 자는 습성이 있다. 말은 서서 쉬고 서서 잘 수가 있다. 선채로도 피로하지 않는 것은 힘줄의 작용에 의한 것이다. 대퇴골과 하퇴골?슬개골(무릎뼈)이 관절을 못 움직이게 고정하고 근의 수축에 의한 에너지 소모를 억제하여 경제적으로 몸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독특한 구조적 기능에 의존한다. 또 무거운 머리를 가누고 있는 길다란 목은 경추(목뼈)에 연한 잘 발달된 목힘줄(項靭帶)의 작용에 의해 지탱된다. 이런 구조 때문에 서서 쉬고 서서 잘 수 있다.

 

말은 따뜻한 봄철 4, 5월에 출산을 가장 많이 한다. 임신기간은 11개월이고 태어나자마자 곧 일어서서 걷기 시작한다. 젖을 떼는 것은 생후 5-6개월이 지난 가을이고 차차 어미로부터 떨어져 혼자 행동한다. 말은 이유기를 포함한 몇 달 동안이 발육의 전성기로서 목의 뼈대와 내장기관 따위가 급속도로 발달한다. 사료는 위가 작기 때문에 몇 차례 나누어 주고, 잘게 부스러뜨린 귀리?밀기울?건초?짚여물?청초 따위를 먹인다.

 

말의 나이는 출생한 해로부터 한 살로 친다. 봄에 태어나 한 살, 그리고 첫 설을 쇠면 두 살이 된다. 말의 수명은 25-30년이 고작이다.23)

 

말의 품종은 형태, 원산지, 능력, 용도 등에 따라 다양하게 분류된다. 일반적으로 용도에 따라 타기 위한 승용(乘用), 끄는데 사용되는 만용(輓用), 짐을 싣는 태용(?用) 등이다. 체중에 따라 경종, 중종, 중간종 등으로 나누기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제주마가 있다. 제주마는 암수 평균 체고가 116cm 정도인 조랑말로서 소형마에 속한다. 제주도의 조랑말은 수컷보다 암컷이 약간 체격이 크고 체장(體長)이 체고(體高)보다 짧다. 제주마는 우리나라에서 오랜 세월을 지내온 관계로 기후, 풍토에 잘 적응되어 있고 체격이 강건하고 번식력이 왕성하다. 조식(粗食)과 조방(粗放)한 사양관리에도 잘 견딘다. 능력이 우수하여 105kg의 짐을 질 수 있고, 1일 32km씩 22일간을 행군하더라도 잘 견디어내는 체력과 인내력이 있다. 특히 굽이 치밀하고 견고한 장점이 있다.

 

23) 오창영, ?말의 생태와 습성? ?말의 생태와 관련민속?, 국립민속박물관 제16회 학술발표회, 1990. 1.22, 5~14쪽.

 

 

3) 민속학적 모형

 

(1) 구비전승되는 말 이야기

 

앞장에서 우리는 고문헌과 고고유물에서 말과 관련된 사항을 대충 살펴보았다. 여기서는 입으로 전해지는 말 이야기, 즉 신화?전설?민담?속담?말띠 속설 등을 소개한다.

 

우선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나오는 말 이야기이다. 한국의 건국신화에서는 말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동부여의 금와왕, 고구려의 주몽, 신라의 혁거세 등 국조(國祖)의 탄생신화에서 말이 등장하고 있다.
『삼국유사』권1, 동부여조에 보면

 

"부루는 늙도록 아이가 없었다. 하루는 산천에 제사하고 후사(後嗣)를 구할 새 타고 있는 말이 곤연(큰 못)에 이르러 큰 돌을 보고 마주 대하여 눈물을 흘렸다. 이에 왕이 이상히 여겨 사람을 시켜 그 돌을 들치니 금빛 개구리모양의 어린애가 있었다. 왕이 기뻐하며, 이것은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주심이라 하고 거두어 기르고 이를 금와(金蛙)라 하였다."

 

이 신화에서 말은 한 나라의 임금탄생을 알려 주는 영물구실을 한다. 말이 없었던들 금와는 영원히 큰 돌 밑에 사장될 운명에 놓였을 것이다. 그리고 부루왕은 말 덕분에 후계자를 찾게 된 것이다. 즉, 말은 성인의 탄생을 알리고 또 암시해 주는 예시적 동물(例示的動物)인 것이다.

 

다음에 이야기될 혁거세 신화는 이러한 말의 의미를 더욱 분명히 해 준다.『삼국유사』 권1,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 보면,

 

"신라 6부의 조상들이 각기 자제를 데리고 알천 언덕에 모여서 백성을 다스릴 덕있는 임금을 세우려고 의논을 하고 이에 높은 곳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 아래 나정 옆에 이상스러운 기운이 땅에 비치더니 거기에 백마 한 마리가 꿇어 앉아서 절하는 형상을 하고 있었다. 이에 찾아가 보니 붉은 알이 있었고 말은 사람을 보자 길게 울다가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그 알을 깨니 단정하고 아름다운 동자가 나왔다. 이 아이를 동천에 목욕을 시키니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이 따라 춤추며 일원이 밝아졌다. 그래서 혁거세(赫居世)라 했다."

 

여기서도 우리는 말이 한 나라의 국조 탄생을 알려 주는 영물(靈物) 내지는 하늘의 사신(使臣)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이상한 기운이 땅에 드리웠다(異氣如電光垂地)?라는 이야기에서 백마는 하늘과 땅 사이를 수직으로 왕래하는 말이다. 이 신화 속에 나오는 말은 하늘을 나는 천마(神馬)로서 그것은 백마이다. 이것은 곧 천마총에 나타나는 백마와 일치되고 있다.

 

천마총은 그 큰 규모나 화려한 부장품으로 보아 왕릉으로 추정되는데, 이 고분에서 출토된 천마가 백마이며 혁거세 탄생신화에 나오는 말 또한 백마이다. 이렇게 볼 때 백마는 최고 지위의 군주인 조상신이 타는 말임을 알 수 있다. 한국인의 말에 대한 영험의식이 곧 하늘의 사자로서 지상과 하늘을 연결하는 매개체로서의 역할을 말이 담당했으리라는 생각이다.

 

『삼국사기』 권제13, 고구려본기 제1, 시조동명성왕 조에 보면 말이 나온다.

 

"금와왕은 유화를 깊숙한 방에 가두었다. 햇볕이 그녀를 비추어 아이를 배고 크기가 닷되드리만한 알을 낳았다. 금와왕이 그 알을 버리게 하여 개와 돼지에서 주었더니 먹지 않고 또 길` 가운데 버리니 소와 말이 피해 다녔다. …금와는 알을 깨고자 했으나 깨지 못하고 어미에 돌려주었다. 유화는 잘 싸서 더운 곳에 두니
한 소년이 그 알에서 나왔는데 그 골격과 모습이 훌륭하였다."

 

여기서 말은 국조 탄생에 직접 개입은 않지만 적어도 무엇을 아는 지혜로운 동물 또는 친근한 동물로 묘사되고 있다. 실제로 말은 사람이 타고 다니는 동물 중에서 가장 머리가 영특하고 총명하며 잘 순종한다24).

말은 대군집?집단생활을 할 줄 알고 주인과 사육사의 구별이 뚜렷하며 보통 고등동물에 가까운 표정과 자세를 가지고 있다. 또한 재치가 있어 눈치 판단으로 그 즉시 모든 것을 해결하는 동물이 말이다.

 

24) 김유신이 술취하여 집에 돌아오는데, 말은 전일 다니던 길을 따라 천관녀의 집에 이르렀고, 유신이 말의 목을 베고 돌아왔다는 설화에도 말의 총명함을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민족문화추진회, ?신증동국여지승람?Ⅳ, 민문고, 1989, 252쪽).

 

 

<도12> ?花鳥翎毛10帖屛風 (말) 장승업筆, 견본담채 141x31.3 허강구장?

 

 

다음 기록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나오는 것으로 삼국시대의 내용이다.

 

? 大曆十四年四月 忽有旋風 從庾信公塚起中有一人乘駿馬如將軍儀伐(삼국유사 권제1 미추왕 죽지랑조) - 김유신이 죽고 난 후에 미추왕릉에 말을 타고 가서 하소연했다는 내용.
? 現慶四己未 百濟鳥會寺 有大赤馬 晝夜六時 ?寺行道(삼국유사 권제1 기이 제1 태종춘추공 조) - 백제 멸망 예시
? 文虎王卽位五年己丑秋八月庾子 王親統大兵, 幸熊津城 會假王夫餘隆作壇刑白馬而盟 先祀天神及山川之靈 然後?血(삼국유사권제1 기이제1 태종춘추공) - 백마를 잡아 맹약함.
? 五年 秋八月 王與勅使柳仁願 熊津都督夫餘隆 盟于熊津就利山…至是刑白馬而盟 先祀祗及川谷之神而後?血(삼국사기 귄제 6 신라본기 제6, 三十 문무왕 上조) - 백마를 잡아 맹약함.
? 四十五年冬十月 王所嘗御內廐馬 詭膝流淚哀鳴(삼국사기, 권제3 신라본기 제3 17내물이사름 조 ) - 왕이 2년 후에 죽음.

? 三年秋九月 王田骨句川 得神馬 名??…五年 三月 神馬??夫餘馬百匹 俱至鶴盤嶺下廻谷(삼국사기, 권제14 고구려본기 제2 삼 대무신왕조 ) - 神馬이야기

 

여기서 나오는 말은 모두 신령스러운 작용을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앞의 금와?혁거세?주몽 등이 탄생할 때 서상(瑞祥)을 알려 주는 것이라든가, 백제가 망할 때 말이 나타나 흉조(凶兆)를 예시하여 주는 것이라든가, 왕의 죽음을 예시한다든가 등 모두 신이한 존재로 등장하고 있다. 또 백마를 잡아서 그 피를 입에 찍어 바름으로써 화친을 맹약하는 의식도 있었다. 신마(神馬) 이야기는 고구려 병사들이 부여의 공격을 받고 곤경에 처했을 때 잃어버렸다가, 부여의 수만 병사들이 고구려왕에서 항복할 때 부여말 100여 필과 함께 돌아왔다는 것이다.

 

말은 왕과 장수(장수)의 능력과 깊은 관련이 있다. 금와왕은 주몽에게 말을 기르게 했는데, 주몽은 준마를 알아보고 일부러 적게 먹여 파리하게 하고, 노마(駑馬)는 잘 먹여서 살찌게 하였다. 금와왕이 살찐 말은 자기가 타고, 파리한 말은 주몽에게 주었다. 명마를 알아보는 능력과 말을 다루는 능력은 왕으로서의 자질이나 능력에 직결된다.25) 또한 훌륭한 장수가 태어나면 어디에선가는 명마가 함께 태어나고 장수가 죽으면 말도 함께 죽는다. 또 명장 뒤에는 명마가 항시 따라 나온다.26)

 

25) ?三國遺事? 卷一 高句麗 條.
26) 이런 설화류는 많다. 김유신 장군이 애마의 목을 잘라 천관녀를 경계한 이야기, 이태조의 화살과 말과의 시함에 관한 이야기, 임진왜란 때 명장과 의병장이 거느렸던 명마와 의마총(義馬塚)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다음에 소개하는 내용은 전형적인 말과 아기 장수 전설에 관한 것이다.

 

"옛날, 평택 잔다리〔細橋里〕 어느 농가에 아이가 하나 태어났다. 어찌나 영리한지 세 살에 못하는 말이 없고 심부름도 잘 했다. 어느 날 이웃 마을 초상집이 있어 아이의 부모가 가는데 아이도 따라 나섰다. 돌아오는 길에 아이가 금방 없어져 이상히 생각했는데 집에 와 보니 먼저 와 있었다. 심상치 않은 일로 생각한 부부가 그날 밤, 자는 아이의 옷을 벗겨 놓고 보니 양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아나고 있었다.

놀란 부부는 이를 그냥 두어서는 큰 일이 나겠다고 생각하여 가위로 날개를 잘래냈다(혹은 인두로 지졌다). 그랬더니 이 아이의 울음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흘러나오는 피는 방안에 가득 피었다. 아이가 죽은 후, 하늘에서 번개가 번쩍이면서 白馬가 내려와 펄쩍펄쩍 뛰며 울다가 죽었다. 그 말의 무덤이 있는 곳이 지금의 「말무던재」다.27) (경기 평택 세교리)"

27) 李惠和, ?아기장수 說話의 新考察? 1983, 269쪽.

 

 

<도13> ?天馬旗조선 153x130 마사박물관 소장?

 

「아기장수전설」에서 「아기장수」가 태어나 장수로서의 초인성(超人性)을 노출하면 부모 또는 관군 아니면 동네사람들에게 피살된다. 그러면 어디선가 백마가 나타나 장수를 따라서 함께 죽는 것이 그 대체적인 구조이다. 즉, 장수의 탄생과 백마의 출현은 항상 함께 이루어진다.

 

말과 관련된 속담28)을 통해서 전통사회에서 말의 관념을 알아보면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① 말이 나면 제주로 보내고 사람이 나면 서울로 보내라.
② 말타면 종 부리고 싶다(욕심이 한이 없다는 말).
③ 말도 사촌까지 상피한다(친적간의 亂行을 경계함).
④ 말귀에 염불.
⑤ 말고기 다 먹고 냄새난다 한다(제 욕심을 다 채운 다음에는 흉본다는 말).
⑥ 말 태우고 버선 깁는다(준비가 늦었다).
⑦ 말꼬리에 파리가 천리 간다.
⑧ 말이 먹다 남은 콩을 못 잊듯 한다(어떤 일에 미련을 가짐).
⑨ 말 죽은 데 금산 체장수 지켜보듯 한다(어떤 이권을 차지하려고 노리고 있음).
⑩ 말 머리에 胎氣가 있다(혼인 때 타고 간 말머리에 태기가 있다는 말로서 신혼 초에 태기가 있다는 뜻이다).

 

우리 조상들은 띠짐승의 습성을 그 띠해에 태어난 사람의 운명과 결부시키는 습속이 있다고 앞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런데 말띠해에는 별나게 띠타령이 심하다. 그래서 ‘말띠 여자 팔자 세다’라는 속담까지 생겨났다. 그러나 중국이나 우리나라 문헌이나 수집된 자료에는 이런 속신을 찾아볼 수 없다.

조선시대에만 해도 말띠 왕비가 많다.29) 그 시대의 왕실에서 사주팔자(四柱八字)를 따질 줄 몰라서 말띠를 왕비로 간택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말띠의 고약한 속신이 우리나라에 토착된 것은 일제강점기 때부터였다. 일본에서는 말해에 태어난 사람은 기질이 세어 이 띠해에 여자가 시집가면 남편을 깔고 앉아 기세를 꺾기 때문에 말띠 태생의 부인을 경원하는 습속이 예전부터 있어 왔다. 이러한 일본의 속신이 일제강점기시대에 우리나라에 들어와 확산된 것이다.

 

28) 송재선, ?우리말 속담 큰 사전?, 동문선, 1983, 320~337쪽
29) 成宗의 繼妃 貞顯王后 坡平尹氏가 壬午生이고, 仁祖妃 仁烈王后 淸州韓氏가 甲午生, 孝宗妃 仁宣王后 張氏가 戊午生, 顯宗妃 明聖王后 金氏도 壬午生이었다.

 

 

 

?장터길, 김홍도筆 지본담채 국박소장?

 

 

?노상과안, 김홍도筆 지본담채 27x22.7 국박소장?

 

 

?말타고 봄놀이가는 그림 신윤복筆 간송미술관소장?

 

 

?말타고 산사에 가는 그림 신윤복筆 간송미술관소장?

 

 

?말타고 매사냥 그림 김홍도筆, 간송미술관소장?

 

<도14> 풍속화에 나타나는 말의 모습

 

 

(2) 말을 받드는 민속신앙

 

우리나라에 있어서 상고시대에는 마제(馬祭)가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사료나 고고유물을 볼 때 말을 위한 마제가 베풀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통일신라 후 혜공왕과 선덕왕대에 중국식 명칭으로 바꿔지면서 중국식 제사방식으로 변경되고 여태까지 있었던 마제는 마조제(馬祖祭 天馬房星)?선목제(先牧祭 ; 처음으로 사람 들에게 방목함을 가르친 사람)?마사제(馬社祭 ; 구중(廐中)의 토신(土神))?마보제(馬步祭 ; 말을 해치는 재앙이 되는 신)에 흡수되었으리라 추측할 수 있겠다.

 

마제는 국가에서 제사할 때는 중국 양식으로, 마을?개인제는 우리나라 양식으로 이중적인 구조를 가지고 각각 병존해 내려왔음에 틀림없다.30)

 

30) 金承燦, ?釜山荷停里의 馬堂祭?, 1980, 32쪽.

 

 

<도15> ?遊馬圖조선 42x90.6 마사박물관?

 

① 국가적 마제

고려시대의 마제에 관한 기록은『고려사』예지(禮志)5 길사소사(吉事小祀)조에 있다.
마조(馬祖)?선목(先牧)?마사(馬事)?마보(馬步)의 마제는 소사(小祀)로서 의종 대부터 상설단을 두고 중춘?중하?중추?중동의 길일을 택해 관리를 파견하여 제의를 베풀었는데, 소우지식(小宇之飾)으로써 배설하였다. 물론 이들 마제는 유식 위에 무속이 습합된 이중적 양식으로 거행되었을 것이다.

 

조선시대의 국가적 마제의 모습은『시용향악보(時用鄕樂譜)』?『태상지(太常志)』등의 기록을 통해 살필 수 있다. 태종 때 초기까지 무격이 마신(馬神)을 행제(行祭)할 만큼 쉽사리 습합된 무속을 분리시키지 못하였다. 그러나 조선조 중?후기에 마제가 제대로 거행되지 못했고 중엽 이후는 마조?마목의 제사만이 마병(馬病)이나 오질(午疾)이 발생하여 폐사가 많을 때 거행된 것 같다.31)

 

31) 김승찬, 앞의글(1980), 31~35쪽.

 

② 마을 공동체 신앙

오늘날까지 일부 지역의 동제당에서는 마상(木馬?石馬?瓷馬?鐵馬등)이나 마신도(馬神圖)가 마을을 수호하는 동신(洞神)으로 혹은 동신이 타고 다니는 승용동물로서 모셔지고 있다.

 

다음의 표는 말과 관련된 마을 공동제의의 양태를 나타낸 것이다.

 

<표 13> 말과 관련된 마을 공동제의

 

 

 

앞의 <표13>를 종합하면 마을 공동제의에서 신앙되는 말이 모셔지게 되는 경위를 다음 몇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32) 물론 제당에 봉안된 말은 기본적으로 동제의 신격으로 마을 사람들에 의해 신앙되고 있다.

 

첫째, 마을 제당에 모신 말(마상(馬像)이든 마도(馬圖)이건 간에)은 마신으로 숭배의 직접적인 대상물이라기 보다는 마을의 수호신인 동신의 신격(성황신, 산신, 장군신)이 타고 다니는 승용(乘用) 사역동물(使役動物)로서의 신성동물로 봉안된 경우이다. 위의 <표>에서 ①②③④⑩⑪⑫의 사례가 그러한 경우이다.

 

둘째, 호환(虎患)과 관련되어 호환을 퇴치하기 위해 말을 마을 수호신으로 모시는 것이다. ①⑨⑪의 사례가 그것으로 첫 번째 경우와 복합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셋째, 마을 내에 솥공장(쇠물)이나 옹기공장이 있어서 그 일이 잘 되게 해달라고 철마(쇠물)를 제물로 제당에 마치어 봉안한다. ⑪사례가 여기에 해당한다.33)

 

넷째, 말에 대한 숭배관념 속에 말이 남성 원리적 생식력이 있다고 생각하여 득남(得男)하기 위해 정성을 드리는 경우(⑤)와 마을 안의 가축의 안강(安康)과 번창을 마당장군(馬堂將軍)에게 기원하는 사례도 있다(⑧⑬⑭).

 

우리 혼속(婚俗) 에서 신랑이 백마를 타고 신부집에 간다. 말은 강건하고 씩씩한 성질의 동물로 남성적이라 할 수 있다. 이 풍속도 남성을 상징하는 남성의 원리에서 이런 풍속이 나온 것이라 생각해 본다.

 

동신(洞神)으로 봉안된 말의 형태는 마상(馬像)과 마도(馬圖) 두 가지이다. 마상(馬像)은 목마?석마?철마?자마(磁馬) 등이며, 마도(馬圖)는 산신?성황신?장군신이 말을 타고 있거나 옆에 데리고 있는 모습이다. 제일(祭日)은 정월 보름, 2월 초, 3월 삼짇날, 7월 백중, 9월 중구 등 다양하다.

 

32) 김승찬은 민간신앙에서 마상(馬像)이 제당에 봉안하게 된 동기를 세가지 종류로 나누었다. 첫째 말에 대한 숭배관념, 둘째 馬病을 막기 위함. 셋째 산신이나 서낭신이 타는 신성물로서 主神의 祭儀에 부수적으로 따르며 독립된 第次없이 봉안된 것 등으로 설명한다.
33) 경북 안동시 도산면 태자동 고리현 마을에도 철마(쇠물) 여러 개가 당집에 봉안되어 있다. 마을사람들에 의하면 옛날 이 마을에 쇠와 관련된 공장이 있었는데 그 일을 잘 되게 해달라고 서낭당에 제물로 바쳤다고 한다.

 

 

③ 가정?개인적 제의

세시풍속에서 정월 상오일(上午日)과 10월 상달의 말날이 있다. 이날이 되면 각 가정에서는 간단히 치성을 드린다.

 

상오일34)에는 말에게 간단히 제사지내고 찬을 주어 말을 숭상하기도 하였으며 이 날 풍속으로 장을 많이 담근다. 말이 좋아하는 콩이 장의 원료이고, 우리말 ‘맛있다’의 ‘맛’과 ‘말’의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에 유감의 원리로 맛있는 장을 만들기 위해 말날(午日)에 장을 많이 담근다고 전한다.

 

『동국세시기』 十月 午日條에 午日稱馬日作赤甑 餠說廐中以禱神祝 其馬健丙午日則不用丙午與病音相似忌馬病也 以戊午日爲貴라 되어 있다.

즉 10월 말날에는 붉은 팥떡을 하여 마구간에 차려놓고 말의 건강을 비는 고사를 지냈다. 이 기록은 18~19세기의 민속이지만 현재 일부 지방에서 우마를 사육하는 가정에는 있으리라 생각된다.

 

무속에는 천연두를 앓은 뒤 13일 만에 두역신(痘疫神)을 전송할 때 베푸는 배송(拜送)굿에서 실마(實馬) 또는 추마(芻馬)를 등장시켜 마부(馬夫)로 하여금 두신(痘神)을 모시고 나가는 무속제의도 있다.35)

 

34) 임동권(1985), 장주근(1984) 참조
35) 李能和, ?朝鮮巫俗考?,?啓明?19호, 1927, 60쪽 “其送神之儀用馬及馬夫以備神乘其他儀仗一如官曺出行之時 無則代以芻馬”

 

 

 

 

 

<도17> ?落馬圖 윤두서筆 조선?

 

 

(3) 말이 등장하는 민속놀이

 

민속놀이에서도 말을 이용하거나 말의 형상을 만들어 노는 경우가 있는데 격구(擊毬)?마상재(馬上才)36), 제주도의 약마희(躍馬戱)가 그것이며, 명절을 비롯해서 빈번하게 놀아지는 윷놀이의 모가 말에 해당된다.

 

격구는 말 위에 붉게 칠한 공(朱漆木丸毛毬)을 장시(長匙 ; 나무로 만든 숟가락)라는 것으로 치는 것으로, 마치 말타고 하키하는 것과 비슷한 방식이지만 축구와는 전혀 다르다.

 

마상재는 단마 혹은 쌍마를 타고 달리는 말 위에서 여러 가지 재주를 피우는 것이다. 그 재주 종류는 ①주마립마상(走馬立馬上),②좌우초마(左右超馬), ③마상도립(馬上倒立), ④횡와마상양사(橫訛馬上佯死), ⑤좌우등과장신(左右??藏身), ⑥종와침마미(縱臥枕馬尾), ⑦쌍마입마상(雙馬立馬上) 등이다. 마상재는 복장은 머리에 전립을 동여매고 홍황색의 호의를 입고 가죽신를 신어 잡아맨다.

 

이외에 2월 초순에 제주도 영등굿에서 약마희(말뛰기 놀음)37)이 있는데 열두 개의 긴 장대나무 끝에 채색 비단으로 말머리와 같이 꾸며 가지고 놀이를 한다.

 

36) ?武藝圖譜通志?에는 마상재와 격구 이외 말과 관련된 놀이와 검법을 설명하고 있다. 기창(騎槍) 마상쌍검(馬上雙劍), 마상월도(馬上月刀), 마상편곤(馬上鞭棍) 등이 소개되어 있다.

37) ?東國與地勝覽? 濟州牧 風俗條 “又二月朔日 於歸德金寧等地 立木?十二迎神祭之 居涯月者 得?形如馬頭者 飾以彩帛 作躍馬戱以娛神 至望日及 罷謂之燃燈 是月禁乘船”.

 

 

(4) 일상생활에서 말의 이용

 

우선 말은 짐을 운반하는데 이용되었고 전시(戰時)에는 전마(戰馬)로서 큰 역할을 맡았으며 치안에도 한 몫을 했다. 그뿐 아니라 통신상의 역마(驛馬)는 파발(擺撥)에 쓰였으며, 농사를 짓는 데도 없어서는 안될 동물이었다. 말고기는 식용으로, 가죽?털?마근(馬筋)은 신발과 장신구 및 활을 만드는데 쓰였다. 말갈기?꼬리는 관모를 만들고 마분은 연료? 비료?약용 등에 쓰였다는 것은 주지하는 사실이다.

 

말의 이용은 단순히 식용 혹은 수렵?농경 및 간단한 경제적 단계에서 정복과 지배의 원활함을 기하기 위하여 정치적?군사적 이용단계까지 발전함에 따라 말의 중요성이 한층 더 인정되었다. 성읍국가에서 삼국시대,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시대에는 농경 모공업품의 원료(피혁, 말총), 군마 특히 교통?통신의 유일한 수단으로 역마제도와 역로를 정비확충하여 갔다.

 

우리나라 최초의 역참제는 『삼국사기』 권제3, 신라본기 제3, 소지 마립간 9년(487) 조에 "처음으로 사방에 우역을 설치하고 왕은 관사에 명하여 관도를 수리케 했다(始置四方郵驛 命所可修理官道)"라는 기록이 보이고 있다.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는 종래 경주 중심에서 수도인 개경 중심의 중앙집권적 관료정치의 실현을 위하여 조속한 명령이 말단까지 전달되도록 무엇보다도 교통기관의 정비가 시급했다. 공문의 전달, 관물의 운송, 유민방지 출장 관사의 숙식 등 제반 편의를 도모할 수 있는 도로망의 전국적인 정연한 체계와 더불어 역참제도를 정비해 나갔다.

 

조선시대의 역제는 고려시대 역제를 답습하여 개경 중심에서 서울 중심으로 바꾸었다.
역마의 운영은 역에는 말과 역정을 상시 대비하여 공문을 전달하는 외에 공무여행자에게 마필을 제공하고 숙식을 알선하여 진상 등 관물의 수송까지 담당하였다.

 

역마를 사용할 때는 마패라는 증표가 필요했다. 마패는 공무(公務) 여행자에 대하여 병조에서 증명서를 발급한 것을 받아 상서원에 마패를 내주었으며 외방에서는 관찰사?병사?수사가 중앙에 보고나 진상을 할 때 발마패를 받아 발마(撥馬)하였다. 마패 제조는 상서원(尙書院)에서 병조에 허락을 얻어 구리로 둥글납작하게 만들었다. 겉면에는 발행연월일과 상서원 인이 새겨 있고 뒷면에는 마필(馬匹)의 수가 새겨 있다.

 

 

<도18> ?편자박기 조영석 筆 18세기초 지본담채 28.7x19.9 국박소장?

 

 

1903년 자동차의 등장으로 기차?항공기 등 근대적 과학기술에 의한 교통수단의 발달은 오랜 역사 속에 그리고 생활속에 필수 불가결했던 말이 생활주변에서 차츰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해방 후 한국 전쟁 전후만 하여도 기병의 군마나 짐을 운반하기 위한 마차 또는 농경용으로 사용했던 말이 그나마 우리 눈에 자주 띄어 왔으나 근자에는 제주도 일부와 민속촌 관광지 일부 그리고 경마장을 제외하고는 거의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제조업체나 상품의 광고를 위해 말의 이미지를 투입해서 말 관계 상표가 나타났다. 그 예로 1,000m를 60초에 주파하는 말의 엄청난 스피드를 이용한 것으로 현대의 ‘포니’ 승용차를 비롯, 동양 고속 등 유통업체에서 말을 심벌마크로 사용하였다. 오늘날 말의 실체는 우리 생활 주변에서 사라졌지만 말의 관념은 그대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4) 영혼과 수호신의 승용동물 말 상징성

 

옛날 우리 조상들의 일상생활에서 동물이 차지하는 부분은 적지 않았다. 고대인에게 있어서 그러한 동물들이 차지했던 이른바 「동물과 인간의 문화」는 설화?고고유물?문헌?민속신앙을 통해서 그 일면을 상고해 볼 수 있다. 또한 한국인의 의식 속에 자리잡고 있던 동물들의 상징적 의미들은 숱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우리들의 의식 속에 잠복해 흐르고 있음을 깨닫게 되다.

 

어떤 동물은 부정적 의식 때문에 꿈에서라도 나타나면 재수없다고 여겨지고, 일상생활에서 귀엽지도 않고 이로운 동물도 아닌 다른 동물에게는 숭배의 대상으로 격상된다. 이러한 의식은 그 동물의 외모나 일상생활에서 해롭거나 이로운 점을 떠나서 그 민족의 문화 속에서 형성된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충성스러운 동물인 개(犬)가 꿈에 나타나면 ‘개꿈’으로 재수가 없다고 생각되었고 외모로 보아 손색이 없는 노루도 불길한 동물로 인식되었던 것이 그 예라 할 수 있다.

 

 

<도19> ?柳下白馬윤두서筆 견본담채 34.3x44.3 해남 윤영선소장?

 

 

지금까지 우리는 한국문화에 나타난 말의 상징적 의미와 그 역할을 문헌자료?고고유물 관련 민속문화를 통해서 고찰하여 보았다. 말에 대한 한국인의 관념은 한마디로 하나같이 ‘신성한 동물’, ‘상서로운 것의 상징’으로 수렴되는 것 같다.

 

『사기』의 기록에서 기원전 위만조선에도 말의 수가 상당했고 기마의 습속, 말이 전투에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삼국지』동이전의 기록으로 부여의 명마와 과하마라는 두 종류의 말이 있었고, 예나 부여에서는 말을 재산으로 간주했고 동옥저는 말의 수가 적었다는 사실, 삼한지역은 모두 우마가 있었으나 마한은 말을 타지 못한 반면에 변?진한은 말을 탔다는 사실 등을 알 수 있었다.

 

청동제 마형유물의 말 부적은 3cm 크기의 휴대용인 것을 볼 때 말은 먼 옛날부터 액막이와 행운을 부르는 상징으로 썼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우리의 민속에서 날개 달린 말 그림이 그려 있는 부적(符籍)을 퇴액진복부(退厄進福符)?신마부(神馬符)로 불렸다는 사실에서도 말의 상징적 의미를 읽을 수 있다.

 

신라와 가야의 마각(馬刻)?마형(馬形)?기마형(騎馬形)의 고분유물과 고구려 고분벽화의 각종 말그림에서는 말이 이승(지상계)과 저승(하늘)을 잇는 영매체로써 피장자와 영혼이 타고 저 세상으로 가는 동물로 이해된다. 말이 그려진 토기?토우?천마도는 그 표현 방법에 있어서는 다를지 몰라도 그것이 지니고 있는 의장과 사상은 다 같은 것이다. 즉, 피장자로 하여금 말을 타고 저세상(하늘, 명계)으로 가도록 드리는 공헌적 부장의 뜻을 가지고 있다.

 

구전설화나 문헌설화에서 말은 신성한 동물?하늘의 사신?중요 인물의 탄생을 알리는 구실을 하는 것으로 이야기된다. 특히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나타난 기록에 의하면 말은 모두 신령스러운 동물로 작용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금와왕?혁거세?주몽 등 국조(國祖)가 탄생할 때에 서상(瑞相)을 나타내 주는 것이라든가, 백제가 망할 때 말이 나타나 흉조를 예시하여 주는 것이라든가 모두 신이한 존재로 등장되고 있다.

 

혁거세 신화와 천마도의 백마는 최고 지위인 조상신이 타는 말로 인식되었고, 후대로 내려오면서 고대 소설?시조?민요 등에서는 신랑?소년?애인?선구자?장수 등이 타고 오는 것으로 되어 있다.

 

 

<도20> ?雙馬人物圖 장승업筆 견본담채 124x 33.6 고대박물관소장?

 

 

세시풍속에서는 말을 여섯 가축의 하나로 인식하고 정월 상오일, 10월 말날에 특별히 말을 위해 제물을 차리고 고사를 지냈다.

 

오늘날까지도 일부 지역의 동제당에 마상이나 마도가 모셔지고 있다. 동제 신당에 봉안된 말은 마을의 수호신인 동신의 신격이 타고 다니는 경우, 호환과 관련되어 호환을 퇴치하기 위해서 봉안된 경우, 솥공장이나 옹기공장이 잘 되도록 기원하기 위해 제물로 봉안되는 경우, 말에 대한 숭배관념에서 봉안되는 경우 등이 있다.

 

민속유희에서도 말이 등장하는데 격구, 마상제, 약마희가 대표적인 놀이이다. 일상생활에서 말의 이용은 단순히 실용 혹은 수렵 및 간단한 경제적 단계에서 정복과 지배를 원활히 하기 위해 정치적?군사적 이용단계로 발전하였다.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 조선시대에는 농경?수공업의 원료 군마 교통?통신의 역마 등으로 다양했다. 근자에는 제주도 일부와 민속촌 관광지와 경마장을 제외하고는 말을 거의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말의 이미지를 투영한 기업이나 상품의 상징으로 오늘날까지도 말의 상징적 의미가 우리 일상생활 속에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표현하는 기법에서는 시대에 따라 달리했지만 말이 지니는 상징적 의미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까지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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