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중심 광화문 네거리. 24시간 편의점을 2년째 운영하는 김동호(35)씨는 냉장캐비닛 중앙칸의 배열을 석 달 전에 바꾸었다. 가장 쉽게 손이 가는 가슴 높이의 진열대를 가득 채운 건 녹차음료. 비타민음료와 이온음료가 버티고 있던 ‘로열석’은 ‘보성녹차’ ‘유기농녹차’ ‘차우린’ 등 10여종의 녹색 캔과 PET병으로 교체됐다. “작년까지 녹차는 일본인 관광객이 주로 찾았으나 지금은 우리나라 사람이 더 많이 사간다”고 김씨는 말했다. “아무래도 몸에 좋다니까 많이들 마셔요. 생수 다음으로 잘 나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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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통차 매장을 찾은 20대 여성들. 젊은층의 차 소비가 눈에 띄게 늘고 있다. /주간조선 김영훈 |
녹차의 바람몰이가 심상치 않다. ‘맛보다는 건강’을 먼저 따지는 웰빙바람에 커피나 콜라 대신 천연주스, 유산균음료 등이 약진한 지 오래지만 녹차의 돌풍은 두드러진다. 작년 하반기부터 롯데칠성, 동원F&B, 동서식품 등 국내 20여개 음료회사가 30종이 넘는 녹차음료를 경쟁적으로 출시하면서 단숨에 300억원 규모의 시장을 형성했다.
“재작년에는 망고 주스가, 작년에는 아미노산음료가 주도했다면 올해의 유행은 녹차입니다.” 편의점업체인 GS25의 식품팀 김종수 부장의 말이다. 그에 따르면 녹차음료 판매량은 2003년에 전년 대비 42% 증가했고 올 3월까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6% 늘었다. 김 부장은 “이런 추세라면 음료 성수기인 여름에는 한 달 판매량 1000만개를 넘을 것”이라고 전망하면서 “그동안 중소기업이 주축이 된 녹차시장에 대기업이 잇따라 진출하며 가열현상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그동안 차에 관심은 있었지만 달여먹는 과정이 번거로워 기피한 소비자가 간편한 녹차음료에 손을 내밀고 있다. ‘차의 폴리페놀 성분은 비타민C보다 100배 강한 항암작용’ ‘카테킨 성분은 체내의 콜레스테롤을 배출시켜 다이어트에 효과’ ‘카페인이 대뇌 중추신경을 각성시켜 머리가 맑아진다’ ‘미 시사주간지 타임이 세계 10대 건강식품으로 녹차를 꼽았다’ 등, 차를 마시지 않는 사람도 이 정도의 지식은 오다가다 들어서 알 만큼 차는 건강식품으로 확고히 자리잡았다. 더구나 차 하면 왠지 ‘우리 것’이라는 자부심과 함께 마음을 정화시키는 은은한 향기가 묻어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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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종 녹차 상품들. |
현재까지는 ‘보성녹차’를 주력상품으로 내세운 동원F&B가 40~50%를 점유하며 선두를 달리고 있지만 동아오츠카의 ‘그린타임’이 1년 만에 13~20% 점유율로 뛰어올랐고 롯데칠성이 지난해 7월 ‘지리산 생녹차’로 시장에 가세하자마자 10%대를 가볍게 넘어섰다. 롯데 고객홍보실 강정용 팀장은 “화개산 찻잎 100%로 만든 지리산 생녹차는 작년 하반기에만 20억원이 넘는 실적을 기록했다. 올해는 40억원 이상의 매출을 올릴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고 밝혔다.
분위기를 감지한 나머지 회사도 발빠른 시장분석과 동시에 1종 이상씩의 시험발매에 나섰다. 해태음료, 웅진식품, 농심, 남양유업 등이 녹차음료를 출시했고 정식품은 베지밀에 녹차를 섞은 ‘녹차베지밀’, 매일유업은 카페라떼 시리즈에 녹차를 가미한 ‘티라떼’ 같은 리뉴얼 제품으로 시장을 노크했다.
차 시장, 3년 만에 2배로 ‘껑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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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편하게 우려먹는 일회용 티백차. |
‘녹풍(綠風)’은 음료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배스킨라빈스, 하겐다즈, 나뚜루, 빙그레, 롯데에서 녹차아이스크림을 출시했고 녹차쿠키 녹차캔디도 나왔다. 해태제과가 작년 12월에 아침식사 대용식으로 출시한 녹차쿠키 ‘칼로리바란스’는 20대 여성층에서 큰 호응을 얻어 두 달 만에 2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이는 해태제과 히트상품 중 상위 20%에 드는 수치”라고 해태 직원은 말했다. 크라운제과는 초코하임을 ‘그린하임’으로, 쿠크다스를 ‘쿠크다스그린’으로 역시 녹차를 첨가시켜 재포장했다.
심지어 국수, 라면, 고추장, 막걸리, 화장품과 사료에까지 녹차가 쓰이고 있다. 차 추출물이 든 비누와 화장품, 차를 말린 입욕제와 세안제가 젊은 여성을 중심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식당에서 후식으로 커피보다 녹차를 찾는 손님이 많아진 지 오래다. 길거리에선 녹차호떡을 굽고 있고 정육매장에서는 찻잎을 먹여서 길렀다는 녹돈(綠豚) 녹우(綠牛) 녹계(綠鷄)가 비싼 값에 팔린다. 그 쓰임새를 다 나열하려니 힘이 들어 <도표>로 처리했다.
한국의 차 시장은 2000억원을 넘어섰다. 4년 만에 2배로 뛰어올랐다. 이는 생수시장과 비슷하고 간장, 두부, 치즈의 매출량보다 큰 규모다. 통계청의 2003년 자료에 따르면 녹차 생산액이 1780억원, 홍차 생산액이 200억원이었다. 녹차는 2001년의 700억원에 비해 2.5배 이상 불어났고 매년 평균 15%의 비율로 커나가고 있다.
차의 약진세에 커피가 타격을 받고 있다. 통계청 자료에는 커피 생산액이 2000년부터 현격한 하강곡선을 그리고 있다. 원두커피와 가정용 인스턴트커피가 급감하였으며 2003년에는 녹차와 홍차를 합친 액수가 일회용 커피믹스 생산액을 능가하였다.
우리나라 차와 커피의 생산액 변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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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
2001년 |
2002년 |
2003년 |
녹차 |
838억원 |
1032억원 |
1301억원 |
1784억원 |
홍차 |
105억원 |
213억원 |
195억원 |
201억원 |
원두커피 |
418억원 |
388억원 |
381억원 |
331억원 |
인스턴트 커피 |
4156억원 |
2923억원 |
2958억원 |
2343억원 | |
<자료:통계청>
녹차를 사용한 제품 |
유형별 |
응용제품(60개 품목) |
차류 |
티백류 녹차류(우전 세작 중작 대작) 엽차 가루차(말차) |
기능성 |
국수 케이크 아이스크림 캔디 초콜릿 양갱 젤리 소금 라면 수제비 메밀 우동 된장 고추장 간장 김치 |
추출액 |
캔음료 녹차소주 껌류 칵테일용 막걸리 코팅쌀 |
카테킨 |
녹차비누 치약 화장품 세안제 입욕제 다이어트식품 |
차염 |
탈취제 사료(녹우 녹돈 녹계) 비료 육류절임 원예재배 생활활성제 | |
<자료:보성군>
이에 대해 커피 부문 1위 업체인 동서식품의 홍보팀은 “우리 자료에는 2002년에 5%, 2003년에 1%, 작년에 6%로 매년 커피시장이 성장하고 있다. 한국은 선진국 대비 1인당 커피 소비량이 적기 때문에 커피의 성장잠재력은 여전히 크다”고 말했다. 그러나 동서식품도 1981년부터 녹차 티백을 커피와 함께 판매하고 있다. “태평양에 이어 우리가 녹차 시장에서 2위를 차지하고 있다”고만 할 뿐 녹차 매출액과 그 증가율은 공개하기를 꺼렸다.
국산 차 시장의 맹주는 아모레 화장품으로 유명한 태평양. 작년 약 900억원의 매출을 기록하여 차 판매액의 절반을 점유했다. 태평양의 투자는 20년 전부터 시작됐다. 차 애호가이던 고 서성환 회장이 1970년대 후반 제주도에 대규모 차밭을 조성하고 여기서 출하된 차로 ‘설록차’란 브랜드를 만들었다. 1996년 세작명차 ‘일로향’을 출시해 가내수공업으로만 이어지던 전통 덖음차를 시장에 끌어냈고 1997년에 드디어 흑자로 전환했다. 2000년대 들어서는 매년 15%가 넘는 고속성장을 기록 중이다. 매출에 크게 기여한 상품은 고급차보다 기계로 대량생산한 일회용 티백 제품. ‘현미녹차’ ‘진향설록차’ 등 간편하게 우려 마실 수 있는 소포장 티백이 인기를 끌고 있다.
유통업체도 ‘히트 칠 만한 차상품을 먼저 유치하자’는 능동적 마케팅을 시작했다. 롯데백화점은 작년 8월에 차 전문매장을 명동 본점 지하1층에 오픈하고 티뮤지엄, 쌍계제다, 설록명차 등의 고가품을 입점했는데 6개월 만에 매출이 45% 늘었다. 사진촬영을 위해 매장을 찾았을 때 맞은편 원두커피 코너는 “차 매장이 생긴 후 우리 매상이 크게 줄었다”며 울상을 지었다. 3월 22일 부산점, 25일 명품관 에비뉴엘에 차 매장을 오픈했고 곧 잠실점에도 입점할 예정이다. 롯데백화점 식품매입팀의 송정호 팀장은 “고급차 외에 티백차도 2002년 8%, 2003년 12%, 2004년 7%로 꾸준히 신장했다. 대부분의 매출이 감소한 이 시기에 놀라운 신장률”이라고 말했다.
중국차 수입량도 덩달아 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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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하고 다채로운 향을 가진 중국차. |
이렇게 많은 차를 어디에서 조달할까? 폭증하는 물량을 국산 차로는 충당하기 힘들다. 한국에서 나는 차는 1년에 2000톤 미만. 그에 비해 일본은 9만톤, 중국은 무려 72만톤을 생산한다. 결국 공급이 달릴 경우 수입할 수밖에 없다. 특히 중국산 차는 값이 싸고 품질도 좋아 식품업체는 일본차보다 중국차의 수입루트를 확보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한국무역협회의 통계자료를 보면 작년 한 해 동안 한국 식품업체에서 수입한 중국산 차는 녹차와 발효차를 합쳐 366톤이었다. 한국차 1년 생산량의 20%에 해당하는 양이다. 녹차는 2003년과 2004년에만 329톤이 들어왔고, 우롱차 홍차 등 발효차는 2001년부터 올 3월까지 658톤이 수입됐다. 주 수입업체는 녹차가 동아오츠카 동서식품 동방에프씨엘, 발효차가 롯데칠성 동국 비엔씨 티뮤지엄이었다.
한국의 차 산지도 탈바꿈하고 있다. 국내 차 생산량의 43%를 점하고 있는 전남 보성군은 1939년 일본 경성화학이 대단위 다원을 조성한 이래 차 생산의 메카로 성장해왔다. 보성군은 1996년부터 차 생산라인과 차 관광사업을 대대적으로 정비했고 그 결과 쌀 생산액이 1104억원인 데 비해 차 판매와 녹차관광을 합친 소득이 1184억원일 만큼 군의 주력산업으로 성장했다(2002년 통계). 537개 농가에서 연간 4830톤의 생엽을 채취하여 966톤의 차를 생산한다.
우리나라 차밭은 보성군과 강진군을 비롯한 전남 동부에 70%, 차 시배지인 지리산록의 경남 하동군 일원과 태평양 다원이 있는 제주도에 30% 분포해 있다. ‘지리산 무공해 야생차’를 모토로 내건 하동군은 1999년부터 생산이 급증하여 화개면과 악양면을 중심으로 1493농가가 437톤의 차를 생산하고 있다. 10년 전에 비하면 7배가 넘는 양이다. 특히 비료와 농약을 쓰지 않은 고급 야생차의 선호도가 높아지면서 지리산은 새로운 차 재배지로 뜨고 있다.
그로 인해 최근 하동군과 전남 구례군 사이에 ‘차 시배지 논쟁’이 일고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흥덕왕편에 기록된 ‘당에 갔다온 사신 대렴이 왕명에 의해 지리산에 차 종자를 심었다’는 대목을 놓고 대렴이 차씨를 심은 곳이 하동군 화개면 쌍계사 주변이냐, 구례군 화엄사 장죽전이냐, 해석이 엇갈리기 때문이다. 이 논쟁은 향후 지리산 야생차 산업과 차 관광사업의 주도권을 가름하는 것이라 두 지자체에는 결코 양보할 수 없는 논쟁이다.
세계 평균 1인당 차 소비량이 500g인 데 비해 한국은 38g. 국제적으로 보면 지금 한국의 녹차열풍은 이제 갓 태어난 아기의 옹알이 수준이다. 1인당 1000g의 차를 마시는 일본인의 절반만 마셔도 차시장 규모는 1조원을 훌쩍 뛰어넘는다. 1조원이면 현재 우리나라 커피시장의 2배에 달하는 액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