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 온달(溫達)을 찾아서
1.
바보 온달(溫達, ?~590년)은 고구려 25대 평원왕(平原王, ?~590)과 26대 영양왕(嬰陽王, ?~618) 때의 장수(將帥)로 평민출신이며 평원왕(平原王)의 사위가 되어 577년 북주(北周) 무제(武帝, 재위 561-577)의 고구려 침략시 큰 공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평강공주(平岡公主)와 바보온달의 로맨스는 한국에서 태어나 교육받아온 모든 이들에게 너무나도 유명한 이야기이며, 영양왕(嬰陽王) 즉위년(590년) 신라(新羅)에게 빼앗긴 한강 이북의 땅을 수복하기 위해 출전한 전투중 아단성(阿旦城)에서 신라군이 쏜 화살에 맞아 전사하게 된다.
온달 장군이 전사한 후, 장군의 시신이 안치된 관(棺)이 움직이지 않아 운구할 수 없게 되었는데 평강공주가 와서 위로하니 비로소 움직일 수 있었다는 이야기는 후손들에게 아름다운 애별리고(愛別離苦)의 슬픔으로 길이 회자되고 있다.
장군이 전사한 아단성(阿旦城)의 위치를 대륙 한강이 위치한 현 단강구수고(丹江口水庫)의 우측으로 바라보았을 때, 평강공주는 남편의 부음(訃音)을 듣고 무려 2,500km나 떨어진 현 알타이산 아래쪽에 위치했던 평양(平壤)에서 달려왔음을 우리는 고찰해 낼 수 있다.
기원후 577년에 일어났던 북주(北周) 무제(武帝,543-578)의 요동침공과 관련해 단재(丹齋, 1880-1936)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선비족(鮮卑族)의 별부(別部)인 우문씨(宇文氏)가 서위(西魏)의 왕위를 빼앗고 북제(北齊)를 병탄하여 중국 강북 수천리를 장악함으로써 일시에 사나운 세력을 떨치니, 후주(後周)의 武帝(우문각-원주)는 영명한 군주였는지라, 모용씨(慕容氏)의 기업을 회복하고자 하여 스스로 대병을 거느리고 고구려(高句麗)의 요동(遼東)을 침범하다가 고구려의 대형(大兄) 바보 溫達(온달)의 용무(勇武)를 만나 끝내 물러간 다음부터는 그 세력이 위축되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 평원왕(平原王)즉위 559년부터 죽기까지(590년)의 32년동안 중국의 북제(北齊), 陳,隨에게 차례로 조공(朝貢)을 바쳤다는 기록밖에 없고, 바보 온달에 관한 기록은 전혀 없다. 열전(列傳)에 가서야 온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위글에서 후주(後周)는 북주(北周)로 바뀌어야 현재 전해지는 연대기(年代記) 기록과 일치하게 되며, 단재 신채호(申采浩, 1880~1936)의 기록을 토대로 고찰해 보면 삼국사기(三國史記)도 결국 일제의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에 의해 교열되었음을 어렵지 않게 분석해 낼 수 있는데, 우리가 고찰해 알고 있는 거대한 고구려가 지방정권 정도에 불과한 한족(漢族)강역의 나라들에 대해 사대굴종했다는 허무맹랑한 말을 통해 조선민족의 민족정신을 훼손하기 위한 일제의 간교한 짓거리라는 사실을 단번에 간파해 낼 수 있는 일이다.
2.
투바공화국(Republic of Tyva, Республика Тыва)은 러시아의 자치공화국으로 아래의 지도에서와 같이 조선사오천년의 백두산(白頭山)인 현 알타이산이 동쪽으로 뻗어나간 이른바 우리역사의 마천대령(摩天大嶺)을 중심으로 위치하면서 바이칼호의 서쪽 초원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주민의 대부분은 투르크족이고 종교는 불교(佛敎)가 우세하며 문화적으로는 몽골과 유사한데, 이 투바공화국에는 온다르(Ondar)라는 성씨가 많이 존재하고 있어 우리가 고찰하고 밝혀내려는 고구려강역 고증(考證)에 좋은 정보를 알려주고 있다.
투바(Тыва/Тува)출신의 유명한 흐미(몽골의 전통 창법) 가수의 이름이 콘가르올 온다르(Kongar-ol Ondar)라고 하듯이, 투바에는 온다르(Ondar)란 성을 지닌 사람이 매우 많이 거주하고 있음이 밝혀지고 있는데, 온다르는 우리가 들었을 때 온달을 뜻한다는 것을 단번에 이해하게 된다.
만주어(滿洲語)에 대한 연구가 점점 심화되어 많은 연구서들이 나오게 되면, 우리는 좀더 자세하게 현 알타이산을 중심으로 강대한 역사를 이어온 고조선(古朝鮮)으로부터 부여(夫餘) 고구려(高句麗) 발해(渤海)로 이어지는 상고역사의 어원(語原)과 현재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말들의 상호연관성과 발음의 유사성까지 밝혀낼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의 말이 우랄-알타이 어족(語族)이라 함은 우리역사의 시원무대가 바로 우랄산과 알타이산을 중심으로 형성되었기에 가능한 말이 아니겠는가?
3.
2023.08.05. 松溪
첫댓글
평온왕이 왕권강화책의 일환으로 중앙귀족의 자제가 아닌 먼 지방호족의 자제를 사위로 삼았다고 봅니다. 그리고 세종대왕이 받침규정을 완벽히 해결하여 온다르가 아닌 온달로 표기 한 듯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