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들의 나라(상) ㅡ12.공포의 시간
12.공포의 시간 추경감은 여러 각도에서 상황을 추정한 보고서를 냈다. 그러나 이튿날 신문에는 엉뚱한 기사가 났다. 조간신문 사회면 밑쪽에 조그만 차영순의 인물 사진과 함께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난 것을 보고 추경감은 씁쓸한 입맛을 다셨다. <해군장관 부인 차영순씨 교통 사고로 국도서 사망> 그리고 기사 내용은 박상천 해군 장관의 부인 차영순(43세)씨가 어젯밤 강화 김포 사이 국도에서 교통 사고로 사망했다. 차영순씨는 강화도 전등사에 불공을 드리고 오다가 뺑소니차에 받쳐 변을 당한 것 같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었다. 이럴 수가... 추경감은 어이가 없었다. 신문에 언제나 진실만 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터무니없는 기사도 날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이건 국민을 우롱하는 짓이야. 추경감은 신대령에게 이런 발표를 할 수 있느냐고 항의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으나 현명하지 못할 뿐 아니라 아무 성과도 없을 것이란 생각을 했다. 그는 기밀을 지켜야 한다는 상부의 지시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 왔기 때문에 함부로 발설 할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차영순씨 사건은 추경감이 추측한대로 엄청난 사건이었다. 민독추가 자기들 말을 들어주지 않은데 대한 첫 번째 보복 조치를 한 것이었다. 그것도 교묘한 방법으로 희생자를 낸 것이었다. 그들이 자기들의 주장을 매스컴에 털어놓을 수도 있는데 정부가 피해 갈 수 있는 길을 택해 준 것은 외부로 노출되는 것을 꺼리는 것이 확실했다. 그들이 하는 짓도 떳떳한 일이 아니지요. 아무리 목적이 좋다고 하더라도 사람을 납치해 가는 범죄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용인 받을 수 없는 짓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당분간 이 사건을 외부에 노출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이 사건이 처음 났을 때 정일만 내각 정보국장이 한 말이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의 말이 적중하고 있는 것이다. 침통한 분위기 속에 다시 정부의 비상대책위가 열렸다. 총리는 한참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가 깜짝 놀랄 말을 했다. 정일만 내각 정보국장의 사의를 대통령 각하께서 받아 들였소 예? 모두가 놀랐다. 정일만이 누구인가? 직급은 정부 조직상 일개 국장에 불과 하지만 그 권력은 총리보다 위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 나라의 모든 일은 정일만의 손바닥 위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통령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을 뿐 아니라 이 나라 내각 체재를 실지로 유지하고 있는 힘이 그에게서 나온다고 할만큼 그는 막강했다. 내각은 물론이고 정계, 재계에서 일어나는 일도 그가 개입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의 비위를 거슬리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장차관들은 다 알고 있었다. 그를 무시하고 그의 뜻을 어긴 각료나 정치인들은 하나 하나 제거되었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 실감나게 들렸었다. 말을 듣지 않는 정치인이나 각료는 우선 그의 재산형성 과정을 문제로 삼았다. 거기서 먼지 가 나오지 않으면 남녀관계, 가족 친인척까지 엮어 넣는 수법을 썼다. 그래도 먼지 가 없으면 만들어내서 올가미를 씨우고 만다. 그러한 무소불위의 강자를 해임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총리의 말에 마음속으로 쾌재를 부르는 사람도 많았으나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정일만 국장은 12년동안 막중한 자리에 있으면서 이 나라를 지탱해온 애국자입니다. 잠시나마 쉬게 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총리의 말이 끝나자 그가 일어섰다. 총리 각하를 비롯한 국무위원 여러분 정말 죄송합니다. 이 한사람 때문에 많은 생명이 위태롭게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대통령 각하께는 제가 스스로 물러나겠다고 간곡히 말씀 드렸습니다. 각하께서는 잠시 그 자리만 물러 가 있다가 사태가 수습된 뒤 다시 도와달라고 하셨습니다. 오직 각하의 말씀을 따를 뿐입니다. 그의 말끝에 모두가 켕기는 것 같은 것을 느꼈다. 이 사태만 끝나면 다시 돌아 올 테니 그렇게 알고 있으라는 듯한 느낌이었다. 후임 정보 국장은 누굽니까? 박인덕 공보부 장관이 큰 소리로 물었다. 후임에는... 총리가 한참 뜸일 들인 뒤에 입을 열었다. 육군 정보부장 성유 소장이 맡게 될 것입니다. 모두가 성유부장을 돌아보았다. 정작 본인은 뜻밖이라는 듯이 놀랐다. 벌떡 일어선 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렇게 해서 그날 오후에 내각 정보국장의 경질이 발표되었다. 이유는 정일만 국장의 건강 때문이라는 비공식 발표도 있었다. 내각은 마침내 해군장관 부인 차영순의 무참한 죽음을 보고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날 늦게 민독추 집행위의 백장군이라는 자로부터 신임 성유 국장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영전을 축하하오. 그런데 내각이 일괄 사퇴를 할 때는 같이 그 자리를 나가야 할 테니까 재임 기간이 한시간이 될지 하루가 될지는 모르겠군요. 백장군의 목소리는 아주 침착했다. 사모님들은 지금... 아, 염려 마십시오. 불행하게도 한 분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지만 나머지 스물 한 분은 건강하게 아주 잘 있습니다. 숫자가 더 줄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제발 사람 목숨을 가지고 장난치는 그런 잔인한 짓은 그만 둡시다. 민주주의와 정의를 위해 일한다는 사람들이 그럴 수가 있습니까? 그 것은 전적으로 당신들 하기 나름입니다.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장난친 것을 말하자면 당신들 내각 정보국을 따를 기관이 있습니까? 그리고 불쌍한 해군장관 부인으로 말한다면 당신들 말대로 교통사고 아니오? 말장난 그만 둡시다! 성유 국장이 고함을 꽥질렀다. 허허허... 성질이 급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렇게 신경질을 내서야 일이 풀리겠소? 백장군의 전화 목소리가 더욱 유들유들해졌다. 우리 만나서 이야기 좀 합시다. 성유 국장이 목청을 가다듬고 차분하게 말했다. 좋소. 오늘 밤 자정에 미국 대사관 앞 정문에서 성유 국장과 단 둘이 만납시다. 만약.... 사태가 대단히 숨가쁘게 돌아가는 것 같았다. 더구나 22 사모님 중 한 사람이 희생된 이후 내각의 분위기는 대단히 달라졌다. 지금 까지 이일을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던 장관까지 말이 적어졌고 일부 장관들은 공포 분위기까지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내각 정보국에서 엄중하게 보도 통제를 하고 있기 때문에 아직 이렇다 할 보도가 나오지는 않았다. 서방의 통신중 하나가 정부에 이상 기류가 있다는 정도의 보도를 했을 뿐 구체적인 내용은 보도되지 않았다. 성유 신임 정보국장이 백장군과 접촉을 시도하고 있을 무렵 미국 정보책임자가 김교중 육군 장관과 시내 호텔의 은밀한 장소에서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다. 미국 정보 책임자는 인질들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건네주었다. 김교중 장관도 그의 사조직이나 다름없는 군의 일부 정보 기관으로부터 대강의 보고를 받아 윤곽을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김교중 장관은 인질들의 행방에 관한 그 중대한 보고를 비상 대책위나 총리, 심지어 대통령에게까지 보고하지 않고 있었다. 정보를 혼자 독점하고 있는 것이 유동적인 지금의 상황에서 처신에 절대로 유리한 점도 있지만 그 보다 그 내용이 자신과도 관계가 있는 군내부가 연관된 일이기 때문이었다. 인질들에 대한 정보는 대략 다음과 같았다. 21명의 사모님들은 지금 서울 시내의 은밀한 곳에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하고 조그만 봉제 공장 같은 건물에 수용되어 있었다. 그들이 산정호수 호텔을 감쪽같이 빠져 나와 거기 까지 온 경로는 참으로 교묘했다. 어느 첩보 영화라도 흉내 내지 못할 방법으로 서울까지 잠입했었다. 산정호수 호텔에서 인질을 감시하고 있던 백장군은 외부로부터 특수 공격 부대가 그 곳으로 가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러니까 정부 쪽에서 하고 있는 아주 깊숙한 내막까지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다. 민독추의 조직원이 비대위나 군 수뇌부에도 있다는 증거가 된다. 백장군은 공격 부대가 출동하기 직전에 서둘러 그 곳을 빠져나갔다. 인질들을 빨리 트럭에 태워라. 백장군이 군복 청년을 보고 명령했다. 트럭에 다 태우기가 어려운데요. 그가 약간 난색을 표했다. 무슨 소리야? 육이오 전쟁때 미군 야전 지프에 열두 명이 타고 후퇴한 기록이 있어. 8톤 트럭에 여자 스물 두명이 못 탄단 말이야? 그, 그렇지만... 여자들이라 아무리 히프가 크다고 하지만 태울 수 있어. 히프가 큰 대신 안 달린 것도 있잖아. 후후후... 그런 긴박한 판국에 백장군은 농담까지 하며 웃었다. 군복청년은 더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나가 여자들을 군 트럭에 태웠다. 백장군의 말대로 차곡차곡 짐짝 재다시피 여자들을 태우니까 놀랍게도 스물 두명 모두를 태울 수 있었다. 그 대신 트럭에 탄 인질들은 숨도 제대로 못 쉴 정도로 포개진 짐짝이 되어 있었다. 여자들이 가지고 있던 핸드백들은 모두 압수되어 내용물에 대한 정밀한 검사를 마친 뒤 그들의 승용차에 실려 있었다. 핸드백을 샅샅이 검사한 백장군의 부하 한사람은 보고서를 백장군에게 주었다. 백장군은 트럭과 함께 승용차 편으로 호텔을 떠나며 보고서를 읽었다. 핸드백의 내용물은 대부분 화장품 류와 현금 등이었다. 어느 사모님은 현금과 수표를 놀라울 정도로 많이 가지고 있기도 했다. 그 뿐 아니라 어느 사모님은 콘돔을 잔뜩 넣어 가지고 있기도 했다. 가정 주부가 핸드백에 콘돔을 넣어 가지고 다닌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지 뻔한 일이었다. 백 장군은 그것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는 어느 장관 부인의 핸드백에서 그런 것이 나왔는가를 잘 보아 두었다. 핸드백 보고서에서 대단히 중요한 정보로 취급된 것은 사모님들의 전화 번호 수첩이었다. 그 전화 번호들은 남편인 장관들의 사교 범위, 성향까지 짐작하게 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 트럭과 승용차는 아무 의심도 받지 않고 호텔을 유유히 빠져 나온 뒤 가깝게 있는 어느 부대로 들어갔다. 근방 부대의 상급 사령부 소속으로 되어 있는 트럭이기 때문에 그 곳에 들어가는데 아무 제약도 받지 않았다. 인질이 빽빽하게 탄 트럭 안에는 기관단총을 빼어든 군복 청년이 여자들을 겨누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트럭은 부대 뒤를 돌아 창고 같은 임시 막사 뒤에 멎었다. 부대 안이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는 아주 외진 곳이었다. 모두 조용히 내려요. 말소리를 내면 이 기관총이 입을 막아 줄 겁니다. 인질을 감시하던 청년이 말했다. 인질들은 발자국 소리도 나지 않게 조용히 모두 내렸다. 인질들은 겁에 질려 모두가 초췌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임시 막사 같은 곳의 문이 열리고 군 앰뷸런스 3대가 나왔다. 환자나 시체를 나르는 차 같았다. 자 일곱 명씩 빨리 타요. 군복 청년 대여섯 명이 어디서 왔는지 나타났다. 그들이 인질들을 일곱 명씩 세대의 앰뷸런스에 태웠다. 한 명이 남는데 그 한 명은 앰뷸런스의 앞좌석에 태웠다. 앞좌석에 탄 사모님은 나이가 가장 많은 정채명 장관의 부인 조여사였다. 앰뷸런스 안에는 기관단총을 든 청년들이 세곳에 다 타고 있었다. 앰뷸런스는 곧 긴급차의 사이렌을 울리면서 부대를 빠져나갔다. 자동차는 산정 호수쪽에서 의정부 쪽으로 오지 않고 그 반대쪽으로 달렸다. 철저한 검문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의정부 쪽에서 전방으로 가는 차량이야 그렇게 심하게 검문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뻔한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거요? 커튼을 젖히고 손바닥만한 차창으로 밖을 내다본 해군장관의 부인 차영순 여사가 기관총 청년을 보고 물었다. 어딘 어디예요. 서울 가는 거지... 청년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지금 우리가 가는 길은 그 반대 방향인데요. 차영순의 이 말에 모두가 긴장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는 것 아니오? 다시는 창밖을 내다보면 안됩니다. 청년이 다시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산정 호수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남향으로 가기 위해 신 철원 쪽으로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신 철원에 이르자 그곳에서 다른 길을 택해 서울로 향하기 시작했다. 각 검문소에서는 부대 표시가 확실한 앰뷸런스를 까다롭게 검문하지 않았다. 자칭 백장군 일행이 인질들을 싣고 간 앰뷸런스는 인근 의무부대에 있던 것이었다. 이 의무 부대를 지휘하고 있던 상급부대의 지휘관 두명이 이 엄청난 일을 도왔던 것이다. 두 사람의 고급 장교중 한 사람은 자취를 감추었고 한 사람은 김교중 장관이 직접 관할하는 군 수사대에 신병이 억류되어 있기 때문에 김교중 장관은 대강의 진상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장교가 절대 입을 열지 않기 때문에 배후는 아직 알 수가 없었다. 김교중은 이 사실을 비대위나 총리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한편 앰뷸런스 세대로 신 철원을 출발한 그들은 유유히 문산을 거쳐 서울의 북부지역에 들어왔다. 상계동의 지하철역 입구에 도착하자 군복청년들은 인질을 한 사람, 한사람 데리고 내려갔다. 인질이 앰뷸런스에서 내리자 남자 한사람씩이 인질 곁에 붙어 섰다. 제일 먼저 차영순 여사가 차에서 내려서자 나이 서른쯤 되어 보이는 신사복 차림의 남자가 곁에 다가섰다. 사모님 여기서부터는 우리 두 사람만이 행동을 합니다. 내가 가자는 대로 따라 가시기만 하면 안전합니다. 젊은이가 나직하게 말하며 차여사에게 슬그머니 팔짱을 끼었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차여사가 사방을 둘러보며 나직하게 물었다. 청년이 대답하지 않았다. 여기가 어디예요? 서울이입니다. 상계동. 청년은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벌써 어둠이 깔려 여기 저기에 전기불빛과 네온사인들이 찬란했다. 많은 인파가 옆을 스쳐 지나갔다. 차영순은 사람들의 모습만 보아도 살 것 같았다.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거예요? 차영순이 청년의 귀밑에 입을 대고 나직하게 다시 물었다. 그건 나도 몰라요. 청년이 무뚝뚝하게 말하며 차영순여사의 팔을 꽉 쥐었다. 청년은 군인이이예요? 그런걸 자꾸 묻지 마십시오. 내가 여기서 사람 살려 하고 소리치면 어떻게 되지요? 차영순이 사방을 돌아보며 물었다. 자기만 이 청년과 팔짱을 끼고 가는 것이 아니라 조민숙여사나 문숙 총리부인도 어떤 남자와 팔짱을 끼고 걷고 있었다. 차영순은 이들이 여기서부터 남녀 2인조로 행동하며 딴 곳으로 옮기고 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소리를 치면 한 사람이 죽게 됩니다. 청년은 갑자기 차영순의 왼손을 잡아끌고 자기의 바지 호주머니로 가지고 갔다. 여기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압니까? 차영순은 그의 호주머니에서 섬뜩하고 날카로운 금속 촉감의 무엇을 느낄 수 있었다. 칼이었다. 차영순은 갑자기 공포가 온몸을 타고 흘렀다. 그들이 지금까지 한 짓으로 보아 능히 그럴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않고 그가 시키는 대로 같이 전철을 탔다. 수많은 남녀노소가 차에 타고 내리지만 아무도 차영순의 입장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야속할 뿐이었다. 청년과 나란히 전철 의자에 앉아 안을 둘러보았다. 맞은편에 앉은 학생 차림의 젊은이가 신문을 보고 있었다. 신문을 이리 저리 넘기며 보았기 때문에 큰 글씨로 된 뉴스는 다 읽을 수 있었으나 자기들의 이야기는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이 장관 사모님 스물 두명이 납치되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뜻이 된다. 그녀의 옆에는 김순주 여사가 나이 마흔도 넘어 보이는 남자와 팔짱을 끼고 점잖게 앉아 있었다. 얼른 보면 부부처럼 보이기도했다. 그들이 차에 흔들리면서 얼마를 갔을 때였다. 다음은 서울역이 되겠습니다. 장내 아나운서의 안내 방송이 있고 얼마 안되어 차가 멎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내리고 다시 탔다. 차내는 다시 정리가 되고 차가 출발했다. 차영순 여사와 외무장관 부인 김순주여사 앞에 젊은 군인 두사람이 서 있었다. 전방 부대에서 휴가라도 나온 것 같았다. 그때 차영순이 김순주 여사의 얼굴을 흘깃 보았다. 대단히 긴장한 표정이었다. 국무위원 사모님 중 가장 미인이고 성격도 활달해 모임이 있을 때는 늘 리드 역할을 해 오던 여자였다. 농담이나 음담패설도 잘 늘어놓아 사람들을 웃기고는 했다. 잔뜩 긴장해있던 김순주 여사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며 소리를 질렀다. 사람 살려요. 이 사람이 나를 납치했어요. 김순주 여사는 벌떡 일어나서 차안의 사람들을 향해 있는 힘을 다해 소리를 질렀다. 차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살려 주세요. 나는 외무장관부인이에요. 이 사람이 나를 납치했어요! 김순주는 함께 옆에 앉아 있는 감시자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차영순 여사도 일어나서 소리를 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얼른 용기가 나지 않아 그냥 있다가 김순주 여사가 두 번째 악을 쓸 때야 일어나기 위해 움찔 거렸다. 꼼짝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요. 소리를 지르거나 움직이면 이게 가만있지 않을 거야. 옆에 있는 사나이가 귓가에 대고 나직하게 말했다. 어느새 그의 칼끝이 차영순 여사의 옆구리에 닿아 있었다. 차여사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김영순이 소리를 쳤으나 누구 하나 선뜻 나서서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았다. 그냥 호기심 어린 얼굴로 김순주여사와 40대 후반의 감시자를 번갈아 볼뿐이었다. 이봐요. 젊은이 나 좀 살려 주어요. 김순주 여사는 앞에 서 있는 군복의 두청년 팔을 붙잡고 울먹이듯이 말했다. 아주머니 차근차근 이야기해 보세요. 이 사람이.... 젊은 군인이 옆의 감시자를 가리키며 말을 걸었다. 그때였다. 감시자가 느닷없이 철썩 하고 김순주 여사의 뺨을 때렸다. 그리고 벽력같은 소리를 질렀다. 이년이 다 나은 줄 알았더니 아직 멀었구먼. 정신 병원에 도로 처넣어야 되겠어. 감시자는 이렇게 말하며 김순주 여사를 우악스럽게 끌어다 자리에 앉히고는 다시 두어 차례 뺨을 때렸다. 금방 김순주의 코에서 피가 흘렀다. 사람 살려! 제발 사람좀 살려 주어요! 얼굴이 피범벅이 된 김순주가 처절한 목소리로 호소했다. 차영순은 일어나서 무어라고 이야기하고 싶었으나 옆구리의 칼 때문에 겁에 질려 떨고만 있었다. 젊은이들 신경 쓸것 없어요. 이 사람은 우리 집 사람인데 벌써 근10년째 이러고 산답니다. 조금 나은 줄 알고 병원에서 데리고 나오면 갑자기 이렇게 발작을 하곤 한답니다. 감시자가 차안의 사람들이 들으란 듯이 이렇게 말했다. 거짓말이에요. 거짓말입니다. 나 좀 살려 주세요. 나는 외무부장관 배소성씨의 처랍니다. 나는 지금 이 사람한테 납치 당했어요. 김순주가 다시 악을 쓰면서 소리를 질렀다. 뭐야? 이 여편네. 이제 외무부 장관이야? 지난달에는 네 서방이 육군 참모총장이라고 떠들더니 이제 외무부 장관으로 승진 한거여? 감시자가 김순주의 양팔을 꼼짝 못하게 쥐고 마주 고함을 질렀다. 이 불쌍한 것아 정신 좀 차려. 네 남편은 장관도 장군도 아니고 미아리에 있는 설렁탕집 주인이야. 감시자가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은 채 김순주를 붙들고 말했다. 얼굴에 피칠을 하고 눈동자가 이상해진 여자가 지하철 안에서 갑자기 내가 장관 부인이라고 떠들어야 믿어 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사람들은 김순주의 남편으로 둔갑한 감시자의 말을 믿는 것 같았다. 여기 저기서 웃는 사람도 있었다. 정말 별 미친년 다 보았다는 표정들이었다. 아주머니 정신 좀 차리세요. 옆에 계신 아저씨가 아주머니의 주인이에요. 팔을 잡혔던 군복 청년이 불쌍하다는 듯이 김순주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젊은이 고맙네. 하지만 너무 신경 쓰지 말게. 곧 조용해 질걸세. 감시자가 이렇게 말하며 호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김순주의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주었다. 아니에요. 이 사람이 나를 납치했어요. 나 뿐 아니라 장관들 부인을 모두 납치했어요. 김순주가 다시 일어서며 악을 썼다. 어허... 이거 큰일 났구먼... 감시자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차내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하하하... 소리를 내어 웃는 사람도 있었다. 아무도 김순주의 말을 받아드리는 사람이 없었다. 쯧쯧쯧... 남자란 여편네를 잘 만나야지... 평생 고생이겠구먼... 차안의 여자들이 혀를 끌끌 차며 미친 여편네를 데리고 사는 남자를 동정했다. 전철은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플래트홈에 닿았고 많은 사람들이 내리고 다시 탔다. 내리는 사람들은 미친 여자 한사람 구경했다는 표정으로 혼자 씩 웃었다. 이렇게 해서 김순주 여사의 필사적인 탈출 계획은 무위로 끝났다. 전철은 서울역을 지나 밤 11시경 사당 역에 도착했다. 역에 도착한 인질들은 들어 올 때와 마찬가지로 남자 한사람씩과 짝을 맞추어 사당역을 빠져나갔다. 그들은 역 앞에 대기하고 있던 미니 버스에 옮겨진 채 어디인지 모르는 곳으로 실려갔다. 같이 온 남자들은 모두 없어지고 백장군과 젊은이 몇 사람만 함께 있었다. 그들도 나중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커다란 창고 같은 곳에 수용되었다. 사당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공장지역 어디라는 짐작만 할 뿐 위치를 확실히 알 수는 없었다. 그들이 학교 교실 같은 곳에 들어 갔을 때 모두 줄을 지어 바닥에 앉게 한 사람은 여자였다. 사모님들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여기는 서울 시내입니다. 여러분의 고생은 모두 이 나라 민주화를 앞당기는 거름이 된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일이 잘 풀려서 여러분이 빨리 집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사람중의 한사람이 접니다. 여러분이 집에 돌아 갈대까지 내가 모시겠습니다. 나는 집행위의 여성부장입니다. 우리가 지금 하는 일은 장난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걸린 일이니 모든 일에 절대 협력 해주시기 바랍니다. 오늘밤은 여기서 자도록 합니다. 바싹 마른 얼굴에 핏기 하나 없는 30대의 여성부장은 이렇게 말하고 나갔다. 헐렁하고 모양 없는 옷을 아무렇게나 걸쳐 입은 여자지만 눈 하나만은 반짝였다. 사모님들은 다른 여자 감시원들이 가져다 준 김밥으로 요기를 한뒤 마루 바닥에 들어 누웠다. 난방이 되지 않아 썰렁하기 짝이 없는 곳이었다. 담요 두장씩만 가져다주고는 그냥 자도록 했다. 모두가 잠이 올 리 없었다. 한참동안 뒤척이고 있던 사모님 중 한 사람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잘 하면 여기서 도망 칠 수도 있을 것 같아. 먼저 이야기를 꺼낸 사람은 외무장관 부인 김순주였다. 그는 전철 안에서도 탈주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그러고도 또 도망칠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여기는 여자들만 감시하고 있는 것 같아. 모두가 네명이야. 무기도 가지지 않은 것 같아. 모두가 나직하게 한마디씩 했다. 내일 아침 아침밥 가져와서 나누어 줄 때 해치우자구. 총리부인 문숙 여사가 결론을 내리듯이 말했다. 이 건물 밖에만 나가면 서울 시내야. 우리가 집단으로 뛰어나가면 성공 할 가능성이 커. 문숙 여사의 이 말은 모든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그 이튿날 아침. 두 사람의 20대 여자가 아침밥을 가지고 들어왔다. 햄버거를 일회용 용기에 담아서 들고 와 나누어주었다. 추운 겨울 아침에 써늘한 햄버거 였지만 찬밥 더운밥을 가릴 형편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두 여자가 햄버거를 다 나누어 준 뒤 식수로 쓸 큰 물통을 마주 들고 들어왔다. 그들이 식수통을 막 놓고 일어설 때였다. 문숙 여사가 눈짓을 하자 사모님들이 우르르 한꺼번에 달려들어 두 여자를 깔아뭉갰다. 으, 윽... 두 여자는 소리칠 틈도 없었다. 수건으로 입을 막고 여자들의 허리끈으로 손발을 묶었다. 두 여자는 구석에 밀쳐지고 담요로 덮어 씨여 졌다. 성공이다! 모두가 흥분으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자 차영순 여사와 팽여사가 좀 나가보고 와요. 문숙 여사가 명령했다. 팽여사란 공보부 장관 부인 팽희자여사를 말했다. 두사람이 비교적 젊고 재빠르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 곧 일어나서 감시원들이 드나들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기다리고 있었다. 1분이 한 시간은 되었다고 느꼈을 때 였다. 두 사람이 들어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