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언니
김 영 희
“새 신을 신고 뛰어 보자 팔짝! 머리가 하늘까지 닿겠네” 혼자 흥얼거리며 작은 마당에서 새로 산 샌들을 신고 걸어 보기도 하고 살
짝 뛰어 보기도 했다. 엄마를 따라 시장에 갔다가 신발 가게 앞을 지나다가 내 눈은 한 곳에 멈추고 말았다. 주황색 바탕에 알록달록 꽃으로 장식된 공주님의 신발이 나를 반겼다. 그날 저녁에 언니에게 흥분된 목소리로 그 신발 얘기를 했다. “6학년이나 되어서 곧 중학교 가면 신지도 못할 신발을 엄마한테 사달라고 하지 마! 사기만 해봐 혼날 줄 알아” 하며 엄포를 놓았다.
세 살 터울인 언니였지만, 살림살이가 넉넉지 못한 집 맏딸인 언니는 일찍 철이 들었고, 반면 나는 늦둥이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잔병치레가 심해 집 안의 응석꾸러기였다. 초등학교도 아홉 살이 되어서야 다니게 되었다. 생일이 빠른 언니는 일곱 살에 입학했기에 언니와 나는 학년으로는 5년 터울이 되었다. 내가 초등학교 입학 당시에 벌써 언니는 6학년이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안 되지만 그때는 한 반 학생 수가 80명에 2부제 수업을 했었다. 그러다 보니 1학년과 6학년이 같은 교실을 사용했고, 언니와 나는 우연찮게도 한 교실을 사용하게 되었다. 숙제도 봐주고 준비물 등을 챙겨주고 시간표에 맞게 가방 정리도 해주었다. 그뿐 아니라 초등 1학년인 나를 데리고 30여 분 걸리는 등굣길에 간판을 읽어 주면서 한글을 가르쳐 주었다.
중학교 때 수놓기, 뜨개질, 바느질 등의 숙제는 하는 둥 마는 둥 던져 놓고 잤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면 멋지게 완성되어 있었다. 이 또한 밤새 예쁘게 만들어 내 머리맡에 놔두고 일찍 출근한 솜씨 좋은 언니의 작품이었다. 학교에 가지고 가면 다들 “와! 정말 잘 만들었다.” 반 친구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기도 하였다.
고등학교 입학 당시 동네 친구들은 20~30명씩 같은 학교로 진학했다. 그런데 나만 중학교 전교생 중 네 명밖에 다니지 않는, 그것도 버스를 중간에 갈아타고 한 시간이나 가야 하는 학교를 언니의 의견에 따라 다녔다. 그 학교는 교복 자율화 시범 학교였기에 다른 학교보다 1년 먼저 사복을 입게 되었다. 내가 입는 옷은 다른 친구들의 옷과는 다르게 세련되고 예쁜 옷이었다. 언니가 여대 앞에서 골라서 사 온 옷들이었기에 친구들이 부러워했다. 옷뿐만 아니라 신발 또한 한 반에 한두 명이 신는 가죽 운동화를 사 주었다. 그 당시 한창 유행하던 작은 카세트도 사 주어서 등. 하교 버스 타고 다닐 때 음악과 영어 방송을 듣고 다녔다. 중증은 아니지만, 지금도 약간의 공주병이 남아 있는데 아마도 이때부터 이 몹쓸 병이 시작된 것 같다.
차림새뿐만 아니라 그 시절 병원에서 태어난 나는 이 또한 자랑 아닌 자랑거리였었다. 그렇게 나 자신 스스로 공주로 착각하며 지내던 어느 날, 엄마로부터 나의 출생에 대한 비밀을 듣게 되었다. 언니가 네 살 때 교통사고가 크게 나서 오랜 기간 병원에 입원해 있었는데, 엄마가 간호하던 중에 진통이 와서 나를 낳게 되었다. 지금도 산모 나이 40세이면 노산인데 만약 병원에서 낳지 않았다면…….
엄마는 늘 곁에서 지켜주는 수호천사이셨고, 언니는 작은엄마 역할을 맡았었다는 걸 내가 엄마가 되어서야 깨달았다. 언니는 그 교통사고의 후유증으로 거의 평생을 치마를 입지 않았다. 교복조차도 바지로 맞춰 입고 다녔을 정도였다. 또한, 여섯 살에 팔과 발에는 화상을 입어 큰 흉터가 남아 있다. 그리고 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언니가 가고 싶었던 학교였는데 언니는 집안 형편을 생각해서 다른 야간 고등학교를 선택 했었다는 것도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야 알게 되었다.
내가 재수 생활을 할 때 같은 서울 하늘에서 학원이 너무 멀어 오고 가는 시간이 오래 걸려 시간이 아깝다는 핑계를 대고 학원 근처에서 자취하였다. 한 번도 집을 떠나 살아 본 적이 없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얻어 한동안은 정말 좋았다. 친구들과 모여 수다도 떨고 라면도 끓여 먹고.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그 즐거움은 끝이 났다. 목욕탕도 없고 재래식 공동 화장실을 사용해야 했기에 급할 때마다 지하철역으로 뛰어가 화장실을 이용한다는 것이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결국 그 불편함은 세 달도 못 넘기고 다시 집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그때도 전세금을 마련해 주고 이사 정리도 해 주었던 언니였다.
초등학교 6학년. 나의 고집으로 산 그 신발을 며칠 동안은 신고 놀다가 언니가 학교에서 돌아올 즈음에 다락방에 감춰 두며 신었었다. 그런데 그날은 마당에서 뛰어노느라 정신이 팔려 언니가 돌아올 시각에 맞춰둔 시계 종소리를 못 듣고 말았다. 대문이 열리고 언니가 들어왔다. 언니를 보는 순간 얼음이 되어버렸다. 언니에게 잔뜩 철없다는 잔소리를 듣고 나서 마음이 편해져 비로소 마음 놓고 신을 수 있었던 그 예쁜 신발.
지금 생각해 보니 언니는 그런 사방이 뚫린 여름용 신발을 신지 않았었다. 아니 맨발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잘 때도 발이 시리다며 다친 발엔 꼭 양말을 신고 잤었다. 언니의 그 아픔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던 것이었는지, 아니면 그냥 못 본 척하며 지냈던 사춘기 시절 이기적인 나.
나이 육십이 되어서야 언니의 그 아픈 발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로 볼 수 있게 되었다. 가족의 무한한 보살핌과 사랑이 비옥한 토양이 되어 그 마음 밭에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날 수 있었던 나. 결혼 후 해마다 김장을 해서 택배로 보내주고, 바닷가에 사는 언니는 생선도 다듬어서 바로 꺼내 해 먹을 수 있게 손질해서 우리 집에 올 때마다 한 보따리씩 가지고 온다. 60이 넘어가는 나이에도 언니에게 도움을 받으면서도 토닥토닥 말다툼해가며 살고 있다. 이렇듯 언니는 언제나 내 편이 되어 주던 세 살 많은 엄마였다. 이제 살뜰히 챙겨주던 친정 식구들이 하나, 둘 떠나고 언니와 나만이 남게 되었다.
환갑을 맞이한 언니에게 명품 백이나 귀금속을 선물할까, 고민했지만 검소하고 소박한 성격인 언니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것 같았다. 내 마음속에 곱게 스며들어있는 고마운 마음을 꾹꾹 눌러 담은 손편지 한 장과 현금을 예쁜 봉투에 담아 선물했다.
어린 시절 추억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유일한 가족인 나의 엄마 언니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