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1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 신석정
저 재를 넘어 가는 저녁 해의 엷은 광선들이 섭섭해 합니다.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
그리고 나의 작은 명상의 새 새끼들이
지금도 저 푸른 하늘에서 날고 있지 않습니까?
이윽고 하늘이 능금처럼 붉어질 때
그 새 새끼들은 어둠과 함께 돌아온다 합니다.
언덕에서는 우리의 어린 양들이 낡은 녹색 침대에 누워서
남은 햇볕을 즐기느라고 돌아오지 않고
조용한 호수 위에는 인제야 저녁 안개가 자욱히 내려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아직은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늙은 산의 고요히 명상하는 얼굴이 멀어가지 않고
머언 숲에서는 밤이 끌고 오는 그 검은 치마자락이
발길에 스치는 발자욱 소리도 들려 오지 않습니다.
멀리 있는 기인 둑을 거쳐서 들려오는 물결 소리도
차츰차츰 멀어갑니다
그것은 늦은 가을부터 우리 전원을 방문하는 까마귀들이 바람을 데리고 멀리 가 버린 까닭이겠습니다.
시방 어머니의 등에서는 어머니의 콧노래 섞인
자장가를 듣고 싶어하는 애기의 잠덧이 있습니다.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
이제야 저 숲 너머 하늘에 작은 별이 하나 나오지 않았습니까?
(조선일보, 1933.11.30)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신석정은 시대적 흐름에 따른 시 세계의 변모를 보이면서도 일관된 시 정신을 견지한 시인이다. “시와 더불어 이순(耳順)이 넘었다. 그 동안 역사의 흙탕물 줄기가 무참하게도 내 정신 세계를 여러 번 짓밟고 달아났다. 그러나 아직껏 허튼 속정(俗情)에 몸을 굽히거나 한눈 팔기에 나를 크게 소모한 점이 없음을 자위한다.”고 시인은 말한다.
▶성격 : 관조적, 목가적
▶어조 : 간절한 호소적 어조
▶특징 : 무위 자연(無爲自然)의 노장 사상(老莊思想), 도연명(陶淵明)의 자연 귀의, 도로우의 자연 친화, 타고르의 명상적인 정서의 조화
▶구성 : ① 황혼 무렵 전원의 아름다운 정경(제1연)
② 전원에 대한 새로운 인식(제2연)
③ 이상향에의 동경(제3연)
▶제재 : 소박한 전원의 순수한 아름다움
▶주제 : 이상향에의 동경
<연구 문제>
1. 이 시에서 주제 의식이 함축되어 있으면서 자아의 단호한 의지가 내포되어 있는 시구를 찾아 쓰라.
☞ 그러나 어머니 아직은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2. 이 시에서 전원에서의 안식과 평화를 함축하고 있는 비유를 찾아 두 어절로 답하라. ☞ 녹색 침대
3. 이 시는 어떠한 방법으로 주제를 형상화하고 있는지 150-180자 정도로 쓰라.
☞ 저녁 해, 언덕, 푸른 하늘, 명상의 새새끼, 능금, 어린 양, 녹색 침대, 남은 햇빛, 조용한 호수, 저녁 안개, 명상하는 늙은 산, 기인 둑, 물결 소리, 작은 별 등의 찬사적 심상에 화평과 안식과 생명의 모태인 어머니의 심상을 결합하여 ‘이상향에의 동경’을 노래하였다.
4. 이 시와 같이 자연 귀의를 노래한 고시조 몇 수를 외워 쓰라.
☞ 말 업슨 청산이요, 태 업슨 유쉬로다.
갑 업슨 청풍이요, 임자 업슨 명월이라.
이 중에 병 업슨 이 몸이 분별 업시 늘그리라. <성혼>
두류산(頭流山) 양단수(兩端水)를 녜 듯고 이제 보니,
도화(桃花) 은 물에 산영(山影)조차 잠겨셰라.
아희야, 무릉(武陵)이 어듸오. 나 옌가 노라. <조식>
산촌(山村)에 눈이 오니 돌길이 무쳐셰라.
시비(柴扉)를 여지 마라, 날 즈리 뉘 이시리.
밤즁만 일편명월(一片明月)이 긔 벗인가 노라. <신흠>
<감상의 길잡이>
신석정의 시는 대체로 전원의 아름다운 풍경이 주는 강한 인상을 동양적 서정, 노장(老莊)적 초탈의 자세로 노래하여 독특한 미감(美感)을 아로새긴다.
저녁 해, 언덕, 푸른 하늘, 명상의 새새끼, 능금, 어린 양, 녹색 침대, 남은 햇빛, 조용한 호수, 저녁 안개, 명상하는 늙은 산, 기인 둑, 물결 소리, 작은 별 등의 찬사와 낙원의 표상에 화평과 안식과 생명의 모태인 어머니의 심상을 결합하여 엮어내는 명상의 노래가 바로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이다.
이 시의 전체적인 구조는 단순하지만, 심상의 통일, 긴 호흡의 명상적 리듬, 차분한 정서 등으로 자연 친화의 심정이 아름답게 표출된 전형적인 목가시다. 쉽고 자연스럽게 읽히는 가운데 조화를 이룬 시적인 가락, 자연의 색채가 빚어내는 친밀감과 타고르다운 환상과 동화적 낭만의 세계, 노장(老莊)의 무위 자연(無爲自然)의 사상을 함축한 것으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