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을 거룩하게
본문: 느헤미야 13:15-22
설교개요
결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안식을 누리자
1. 안식일의 정신: 쉼, 예배, 사랑(15-18절)
출애굽기 20:11 (구약 112쪽), 신명기 5:15(구약 269쪽)
레위기 23:3 (구약 181쪽)
레위기 25:1-12(구약 185쪽)
2. 안식일과 세상 문화의 충돌(19-22절)
갈라디아서 5:13(신약 308쪽)
3. 안식일을 완성하신 예수님
마태복음 11:25-30(신약 18쪽)
히브리서 4:9-11(신약 357쪽)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질문
1. 십계명에서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이유 두 가지가 무엇인가요? (출20장, 신5장)
2. 안식일에 담긴 세 가지 정신이 무엇인가요?
3.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우리를 참된 쉼으로 인도하여 주시나요?
개인 묵상과 소그룹 토론을 위한 질문
1. 최근에 제대로 쉬어본 경험이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잘 쉬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내가 생각하는 쉼의 의미와 조건에 대해 함께 나누어 봅시다.
2. 나는 주일에 온전한 쉼을 누리고 있습니까? 주일에 나의 쉼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무엇입니까?
3. 나는 내 가족과 성도들, 주변 사람들이 주일에 잘 쉴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까?
4. 장차 우리가 누릴 완전한 쉼을 기대하고 소망하고 있습니까? 그 기대와 소망이 지금 우리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미칩니까?
어린이 설교
우리 어린이들 노는 거 좋아하지요? 휴일이나 방학 때 학교나 학원 안 가면 너무너무 좋지요?
주로 뭐 하고 놀아요? 너무 피곤하면 잠도 자고 쉬기도 해야겠지만, 혼자서 아무 것도 안 하면 사실 지루하고 심심해요. 다른 사람들이랑 같이 노는 게 재미있지요!
놀려고 가족들이랑 여행을 가기도 해요. 또는 롯데월드나 에버랜드로 소풍을 가기도 해요. 쉬려고 휴가를 가는 거긴 한데, 사실은 몸은 상당히 피곤하거든요. 우리 어린이들이 휴가 갔다 와서 열이 나거나 감기 걸리는 경우도 자주 있잖아요.
우리가 쉰다고 할 때 단지 몸이 편한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아요. 마음의 쉼이 아주 중요해요. 매일매일의 공부 부담, 숙제 부담에서 잠깐 벗어나서 마음을 푹 놓고 즐거운 일에 집중할 때 우리의 마음이 쉼을 얻어요.
그게 우리가 주일에 예배를 드릴 때 누리는 쉼이에요. 우리 어린이들 중에서 그런 생각 해본 사람 있을지 모르겠어요. 우리 가족은 주일에 쉬지도 못하고 맨날 교회 와서 하루 종일 있다가 간다. 주일을 안식일이라고 하는데, 쉬지도 못하는 게 무슨 안식이냐? 그런 생각 해 본 적 있어요? 강도사님은 어렸을 때 그런 생각 해 봤어요.
하지만 우리가 몸이 쉰다고 참된 쉼이 아니거든요. 머릿속에 부담과 걱정이 많고, 생각이 복잡하면 아무 것도 안 해도 마음이 너무너무 힘들어요. 하지만 예배 가운데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길 구하는 믿음이 생기면 마음이 참 평안해지고 쉼을 누리게 돼요.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구원의 일들을 함께 배우고, 또 다른 성도들과 말씀 안에서 서로 위로하고 교제하는 이게 나에게 너무너무 큰 기쁨이 되고 행복이 되는 거에요.
사실 우리가 천국에서 할 일이 바로 이거거든요. 예배하고 교제하고 또 다스리며 섬기는 일을 영원히 하면서 참된 쉼을 누리게 될 거에요. 천국에서 할 일을 주일에 조금씩 하면서 천국의 쉼을 미리 맛보는 거에요.
그래서 교회 와서 예배 드리고 모이는 게 몸은 조금 힘들어도 참된 쉼을 누리는 거에요. 또 이게 진정한 쉼이라는 걸 점점 더 배우고 깨달아 가는 게 바로 신앙이 자라는 과정이에요.
이제 알았죠? 오늘 예배에서 우리 어린이들도 참된 쉼과 기쁨을 누리길 바라요!
머리말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안식일 규례는 느헤미야가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공동체를 다시 세우기 위해서 가장 중점을 두고 추진해 나간 개혁의 과제들 중 하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 언약식을 거행할 때도 백성의 대표자들이 안식일을 잘 지키겠다고 맹세하면서 서명을 하기도 했습니다.
말하자면 이런 생각이 깔려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심판당한 가장 중요한 원인 중에 하나가 안식일 규례를 지키지 않은 것이다. 앞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면서 복을 받으려면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
그러면서 장사를 금하고 물건을 사고파는 일을 철저히 금하였습니다. 안식일에는 성벽을 걸어잠궈서 이방인 상인들의 출입을 아예 금하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렇게 이방인들 통제하려고 성벽을 완성시켰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이스라엘을 회복하는 데 왜 그렇게 중요한 문제일까요?
이것은 오늘날 우리들과도 관련된 문제입니다. 전통적으로 우리 고신 교회에서는 주일 성수를 강조해 왔습니다. 주일에 소비 행위를 하는 것을 좋지 않게 생각하고 금해 왔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주일 성수를 고리타분하게 느끼는 경우도 많은 것 같습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지켜지기 어려운 비현실적인 원칙같기도 합니다. 오늘날 주일에 물건을 사고파는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신 안식의 복이 얼마나 크고 풍성한지를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보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깊은 안식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안식일의 정신: 쉼, 예배, 사랑
17절에서 느헤미야는 책망합니다. “너희가 어찌 이 악을 행하여 안식일을 범하느냐?” 악을 행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구체적인 모습들을 보면 악한 일들이 아닙니다. 아주 일상적이고 평범한 일들입니다.
유다에서 어떤 사람이 술틀을 밟고 곡식단을 나귀에 실어 운반하고, 포도주와 포도와 여러 가지 짐을 지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와서 음식물을 팝니다. 또 두로 사람이 물고기와 각종 물건을 가져다가 팝니다. 아주 정상적인 활동들입니다. 오히려 아주 권할 만하고 칭찬할 만한 활동들입니다.
그런데 안식일에 행하였기 때문에 악이 되고 안식일을 더럽히는 행동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의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정신은 일하지 말고 쉬라는 것입니다. 식량을 얻고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 필요한 그 어떤 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안식일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입니다.
출애굽기 20장에서 십계명으로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십니다. 엿새 동안은 모든 필요한 일을 힘껏 감당하도록 합니다. 하지만 일곱째 날에는 아무 것도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셨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에 쉬는 것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모든 것을 완성하셨다는 것을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내가 일 안 하고 공부 안 하고 하루 동안 쉬어도 먹고 사는 데 전혀 지장이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쉬어도 된다, 복 주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만일 나의 노력으로부터 이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잠시도 쉴 수 없습니다. 계속해서 일하면서 더 많은 부와 성취를 거두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하지만 내가 누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인정한다면, 안식일에 쉬어도 나의 삶이 유지되고, 오히려 더욱더 복을 누림을 믿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안식일에 일하지 않고 쉬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가장 강력한 선언입니다. 나의 삶을 꾸려 나가고 내게 행복을 주는 주체가 내가 아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내가 누리는 모든 좋은 것들이 왔음을 선언하고, 오직 하나님 한분 외에는 나의 행복을 위해서 그 어떤 것도 필요 없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행하지 않는 것을 통해서 온 몸으로 가장 크고 강력한 선포를 하는 것이 바로 안식일의 쉼입니다.
신명기 5장에서는 십계명을 다시 한 번 선포합니다. 그런데 동일한 안식일 규례에 대해서 지켜야 하는 이유를 조금 다르게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래 애굽 땅에서 종살이를 했었는데, 하나님께서 너희를 노예 생활에서 해방하여 주셨으니까 안식일에 아무 것도 하지 말라고 합니다.
레위기 23장에서는 안식일을 성회로 모이는 날로 설명합니다. 출애굽의 구원을 기념하며 함께 예배하는 날로 삼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매일 매일의 바쁜 일상 속에서 살다 보면 구원의 기쁨과 감격을 잊어버리고 살 수가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누리는 삶이 당연한 것처럼, 저절로 이뤄진 것처럼 매너리즘에 빠져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일상에서 잠시 멈춰 서서 함께 모여 예배하면서 구원의 사실을 기억하고 감사 찬송을 올려 드리도록 하셨습니다.
안식일은 예배하며 구원의 은혜를 기뻐하는 날이었습니다. 이 안식일의 예배의 의미가 확장되어서 연 중에 여러 가지 절기들이 생겨납니다. 유월절, 무교절, 초막절 등등 이스라엘의 모든 절기들은 안식일의 연장선 상에서 출애굽의 구원을 여러 측면에서 기념하는 연중 행사들이었습니다.
출애굽의 구원이 안식일에 미치는 또다른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다른 이웃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4계명은 본인 뿐만 아니라 아들과 딸과 종과 가축과 손님까지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합니다. 안식일 규례에서 중요한 부분은 나만 쉬는 것이 아니라 내 영향력이 미치는 다른 사람들까지 쉬게 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애굽에서 종살이 하다가 자유와 해방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꼭 안식일이 아니더라도 종살이에서 벗어난 것 자체가 쉼입니다. 너가 쉼을 누린 것이 값없이 은혜로 된 것이니까 다른 사람들도 은혜로 쉬게 해 주라는 것입니다. 이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의 정신이 안식일 규례의 아주 핵심적인 부분입니다.
안식일의 사랑의 정신이 확장된 것이 바로 안식년과 희년의 제도입니다. 7년에 한 번씩은 자기 소유의 땅을 농사짓지 않고 놀리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자연적으로 맺히는 곡식이나 열매를 주위의 가난한 사람들과 가축들이 자유롭게 와서 따 먹도록 했습니다. 안식년 제도는 자기 소유의 땅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곡식을 얻을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희년 제도는 더욱 극적입니다. 7년씩 7번이 지나면 49년입니다. 50년 째에 나팔을 불고 희년을 선포하면 그동안의 모든 빚은 탕감됩니다. 종살이에서 풀려 납니다. 다른 사람의 소유로 넘어간 땅은 본래 가문에게로 돌아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 가운데서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다시금 재기의 기회롤 주는 제도입니다.
자기 소유였던 종을 풀어주고 땅을 넘겨 주려면 큰 경제적인 손해를 감당해야만 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바로 내가 가진 모든 소유와 재산과 나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자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애굽의 종이었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값없이 풀어 주셨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며, 하나님의 종입니다. 또한 백성들이 가진 모든 땅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나눠주신 것입니다.
‘비록 지금 일시적으로 내가 좀더 많은 땅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종으로 부리게 되었지만,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잠시 맡겨주신 것이다.’ 이런 은혜에 대한 자각과 청지기 의식이 있는 사람만이 희년이 되면 자기 소유를 내어서 가난한 자들에게 참된 안식을 선물해 줄 수 있었습니다.
안식일의 세 가지 정신을 같이 따라해 볼까요? “쉬고, 예배하고, 사랑하자.” 주님의 날에 쉬고 예배하고 사랑하면서 깊은 안식을 누리는 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2. 안식일과 세상 문화의 충돌
오늘 본문에서 안식일에 여러 가지 영업 활동을 하는 유다에서 온 어떤 사람은 유대인인지, 이방인인지가 나와 있지 않습니다. 무엇이든 실질적으로는 큰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입술로는 무엇이라고 고백하든지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나의 먹고 사는 문제를 책임져 주신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고 살아가는 실제적인 무신론자입니다. 자기 힘으로 생계를 꾸려 나가고자 안식일에도 바쁘게 일을 합니다.
느헤미야가 안식일에 일한 그 사람들과 백성들의 지도자들을 대하는 태도에 차이가 있습니다. 15절과 21절에 보면 안식일에 일을 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경계를 합니다. 경고를 하고 확인을 하는 정도에 그칩니다. 그런데 17절에 유다의 귀족들을 불러다가 꾸짖고 안식일을 범했다고 책망합니다. 물건을 판 사람보다 유대 지도자들에게 더 큰 책임을 묻습니다.
우리가 돈을 주고 재화와 서비스를 구입하면, 다른 사람을 부분적으로 종으로 부리는 게 됩니다. 그 돈을 준 만큼 다른 사람을 내 뜻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됩니다. 유다의 귀족들이 성문을 통제하지 않고 사람들이 장사를 하도록 허용을 했습니다.
이것은 사실은 자신들의 편리와 유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이 제대로 쉬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종들도 쉴 수 있게 해 달라는 안식일의 정신을 어긴 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귀족들을 꾸짖고 책망합니다.
성문을 걸어 잠갔는데도 장사꾼들은 쉽게 포기하지 않습니다. 혹시나 성문이 열릴까 기대하면서 성 밑에서 노숙을 하면서 기다립니다. 느헤미야는 이들로 경계하면서 노숙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겉으로는 위협이지만 사실은 안식으로 초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몰라서 안식일에 제대로 쉬지 못하는 사람들까지도 함께 쉼에 동참하도록 초청하고 있습니다.
22절이 오늘 요절입니다. 레위 사람들에게 몸을 정결하게 하고 와서 성문을 지켜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도록 합니다. 성문을 지키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안으로는 예루살렘 백성들이 상인들에게 일을 시키는 죄를 범하지 않도록 지키는 것입니다. 밖으로는 이방의 상인들도 그 쉼에 동참하도록 도와주고 초청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주일 성수로 주일에 소비 활동을 금하는 것도 이와 동일한 취지입니다. 우리의 편의를 위해서 다른 상인들이 쉬지 못하도록 일을 시키지 말자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더 이상 율법적으로 안식일 규례를 지켜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는 모든 성도들에게 일률적으로 주일에 소비활동을 하는 것은 죄라고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쉼과 예배와 사랑의 정신에 입각해서 볼 때 주일에는 소비 활동을 자제하는 것이 더욱 성경적이라고 보아서, 교회 차원에서는 주일 소비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필요한 것들은 그 전에 미리 준비해 놓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주일에 돈을 쓰면 안 되니까 그 전에 결제를 미리 해 놓고 주일에 물건만 가져오면 괜찮지 않냐고 오해하기도 합니다. 돈을 쓰냐 안 쓰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주일에 다른 사람에게 일을 시키지 않고 쉼을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현대 사회에서 주일 소비를 하지 않는 것이 그리 단순한 문제는 아닙니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소비를 매개로 한 분업화가 철저하게 이루어진 상황 가운데에는 우리가 생존을 하고 일상 생활을 영위하는 것 자체가 누군가의 노동을 반드시 필요로 합니다.
필수 유지 업무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주일에도 일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신자들 가운데 경찰이나 간호사나 방송 업무에 종사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것을 죄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안식을 가로막는 여러 사회적인 저항들이 나타납니다. 주변 상인들이 안식일에 영업 활동을 하는 것은 그만큼 소비가 활발하고 매출이 좋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오랜 기간 페르시아 포로 생활을 하면서 1년 365일 쉴 새 없이 돌아가는 문화에 익숙해졌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후에 안식일 규례를 지키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두로 사람이 팔려고 한 것은 물고기였습니다. 예루살렘은 산지였고, 물고기가 귀했습니다. 블레셋 해변이나 갈릴리 바닷가에서 잡은 물고기를 육로로 운반해야지만 먹을 수 있었습니다. 빨라도 하루에서 이틀은 꼬박 이동해야지만 물고기를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계절에 따라서는 생물을 먹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신선도가 중요한 물고기를 묵혀서 팔 수가 없었습니다. 상인은 물고기가 도착하자마자 안식일에도 팔아야 했습니다. 유대인들 입장에서도 안식일에 쉬면서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물고기 요리를 해서 먹으면 얼마나 맛있고 좋았겠습니까.
2500년 전 옛날에도 안식일을 지키려고 하면 많은 불편과 심지어는 경제적인 손실까지도 감수해야 하는 현실적인 상황이 있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세상의 문화와 충돌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오늘날 이 세상이 전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쉼의 이미지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미지들을 집약해서 레저와 외식 산업이 발달합니다. 평소에 경험해 보지 못했던 맛있는 음식들을 먹고, 다양한 경험들을 하면서 쉼을 누리라고 권합니다. 주일은 레저와 외식 산업이 최대의 매출을 거두는 날입니다.
우리가 주일에 행하는 여러 활동들 가운데 우리는 하나님만으로 기뻐하고 만족합니까? 아니면 우리의 쉼과 만족을 위해 다른 무언가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까? 혹시는 하나님을 예배하기보다는 나의 다양한 경험과 쾌락을 예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의 쉼을 위해서 다른 사람의 노동을 강요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문제는 단지 소비 활동을 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에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소비 활동을 하지 않고 아무 일도 하지 않더라도 가정에서도, 심지어 주일에 교회에서도 얼마든지 안식의 정신에 반하여서 행동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이외에 내게 즐거움을 주는 여러 다른 것들을 탐닉할 수도 있고, 나의 육체적인 쉼을 위해서 다른 사람의 섬김을 강요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으로부터 자유를 주셨습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단지 소비 활동을 할지 말지라고 하는 형식적인 차원을 훨씬 넘어서는 문제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나의 육체의 만족을 추구하는 기회로 삼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어떻게 하면 사랑으로 서로를 섬기면서 안식일의 정신을 온전히 이룰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더욱 높은 차원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예수님과 안식일의 완성
오늘 본문 22절의 마지막 부분에서 느헤미야는 갑자기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내 하나님이여, 나를 위하여 이 일도 기억하시옵고, 주의 크신 은혜대로 나를 아끼시옵소서.” 단지 내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고 있으니 내게 복을 달라는 그런 말이 아닙니다. 안식일을 지키기 위한 나의 노력이 열매맺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단지 안식일의 형식을 지키는 것을 넘어서, 모든 사람들이 쉼과 예배와 사랑의 정신을 이루는 것은 사람의 노력으로만 되지 않습니다. 성령님께서 그 마음 가운데 역사하셔서 오직 하나님 한 분만으로 기뻐하고 자족하는 마음, 다른 사람들을 사랑으로 섬기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 주셔야만 합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도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참된 쉼과 안식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예수님 안에서 참된 쉼이 있습니다. 우리를 억압하고 지배하던 모든 죄의 무게들, 죽음의 공포, 이 땅에서 겪는 모든 비참함들을 예수님께서 다 해방하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짊어졌던 그 인생의 고난의 무게를 예수님께서 대신 짊어지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유자가 되어서 참된 쉼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참된 쉼을 주시기 위해 적극적으로 일하셨습니다. 당시에는 로마의 세속주의와 더불어서 바리새인들의 율법주의가 참된 안식을 방해했습니다. 아무 일도 하지 말고 개인적인 쉼만을 누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바리새인들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자기 백성들의 안식을 적극적으로 이루어 나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안식일에도 쉬지 않고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제대로 식사도 못 하시고 들에 있는 이삭을 급하게 잘라 먹으면서 이동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수고 덕분에 복음이 전파되고, 우리가 믿고 구원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주일에도 쉼없이 일하시는 한 분이 계시다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참된 교사로서 성령님을 통해 우리 마음 가운데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에 복음을 깨닫게 하시고 예수님을 믿게 하십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여러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인생의 여러 비참과 질병들을 치유하고 해결해 주셨습니다.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질병을 고치시고 삶의 여러 조건들을 개선해 나가시면서 우리의 삶 가운데 안식을 방해하는 요소들을 없애 주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쉬지 않고 일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일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참된 쉼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직접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나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할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내 인생을 책임져 주십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쉼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이 쉼을 함께 누리도록 도우시기 바랍니다. 구체적으로 내 사랑하는 가족들,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형제자매들이 주일에 쉴 수 있도록 어떻게 도울까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또 우리 교회의 성도들, 더 나아가서 우리 사회의 어렵고 힘든 분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기쁨으로 자유롭게 섬기시기 바랍니다.
이 땅에서 주일에 누리는 쉼과 예배와 사랑은 우리 앞에 놓인 영원한 안식의 그림자입니다. 먼저 하늘로 들어가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그 영원한 안식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십니다. 그곳에는 우리의 안식을 방해하는 어떤 장애물도 없을 것입니다. 영원히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면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다른 사람들과 사랑을 나누면서 완전한 쉼을 우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매일의 삶 가운데 이 천국의 기쁨과 안식이 날로 넘치길 바랍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라.”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하면서, 우리의 매일의 삶 가운데 참된 쉼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내가 먼저 누린 안식의 기쁨을 다른 사람들과도 나눕시다. 우리의 모든 말과 행동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합시다. 내가 먼저 누린 이 쉼을 주변 사람들도 함께 누리도록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 줍시다. 무엇보다도 나와 주변 사람들이 함께 쉼을 누리도록 주님께 기도합시다. 우리 교회가 안식의 공동체가 되기를 원합니다.
맺음말
오늘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자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다시 한 번 따라해 보실까요? “쉬고 예배하고 사랑하자.” 우리가 처한 현실은 우리가 참된 쉼을 누리지 못하도록 가로막습니다. 하지만 부활 능력으로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께서 일하셔서 우리가 참된 쉼을 누리도록 하십니다.
주님께서 주신 이 안식을 주일 예배 가운데, 또 일상의 삶 가운데 마음껏 누리시길 바랍니다. 복음 안에서 기뻐합시다. 다른 사람들도 이 안식을 함께 누리도록 도와 줍시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안식의 정신을 실천할 수 있을지 지혜와 용기를 주시도록 기도하며 나아갑시다.
이 땅 가운데서 안식을 누리며, 영원한 천국의 안식으로 들어가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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