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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면(仁旨面])
충청남도 서산시에 속하는 행정면.
명칭 유래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 구역 통폐합 때 인정면(仁政面)의 ‘인’자와 노지면(蘆旨面)의 ‘지’자를 따서 인지면(仁旨面)이라 하였다.
형성 및 변천
조선 시대에는 서산군 인정면·노지면·군내면(郡內面) 지역으로,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 구역 통폐합 때 인정면·노지면에 속한 여러 동리(洞里)와 군내면 역리, 마산면 월계리 일부를 합쳐 서산군 인지면이라 하였다. 남정리(南井里)·둔당리(芚堂里)·모월리(毛越里)·산동리(山東里)·성리(成里)·애정리(艾井里)·야당리(野堂里)·차리(車里)·풍전리(豊田里)·화수리(花秀里)·갈산리(葛山里) 등 11개 법정리를 관할하게 하였다. 이후 1973년 갈산리가 서산읍에 편입되면서 10개 리가 되었다. 1995년 서산시와 통합하여 서산시 인지면이 되었다.
자연 환경
인지면의 북쪽과 서쪽은 150m~300m 내외의 산들이 잇달아 늘어서 있는데, 북쪽의 금강산으로부터 장군산, 물래산, 역마산, 청금산으로 하여 남쪽의 도비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그것이다. 이에 반해 동쪽은 풍전저수지로 모아진 물길과 여러 소하천들이 면의 동쪽 경계를 이루며 남쪽으로 흘러 서산시 인지면 산동리 앞에서 서산A지구방조제에 의해 만들어진 간월호로 유입하며 넓은 평야 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남북 방향으로 기다란 모양새를 가진 면의 여러 동리들은 평야와 산지로 동서가 구분되는 지형적 특성을 반영하여 자리 잡고 있다.
현황
2014년 12월 31일 현재 면적은 35.46㎢이며, 그 중 경지가 16.2㎢[45.7%, 전 5.9㎢, 답 10.3㎢], 임야가 14.0㎢[39.5%]를 차지하고 있다. 인구는 총 3,169세대에 7,869명(남자 3,986명, 여자 3,883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10개 법정리에 23개 행정리가 속해 있으며, 그중 둔당리에 인지면 주민센터가 위치하고 있다. 교육 기관으로 차동초등학교·인지초등학교·인지중학교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송곡서원[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07호], 서산 둔당리 지석묘[충청남도 기념물 제63호], 남정리 고인돌 등이 있다. 쌀, 보리를 비롯하여 생강, 마늘, 어리굴젓 등이 많이 생산된다. 인지면은 동쪽으로 부춘동과 석남동, 서쪽과 남쪽으로 부석면, 북쪽으로 팔봉면에 접해 있다.
참고문헌
『여지도서(輿地圖書)』
『호구총수(戶口總數)』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조선총독부, 1912)
越智唯七, 『신구대조 조선전도 부군면리동 명칭일람』(조선총독부, 1917)
『한국지명총람』4-충청남도(한글학회, 1974)
『서산시지』(서산시지편찬위원회, 1998)
이은우, 『서산의 지명사』(서산시, 2008)
『한국지명유래집』-충청편(국토해양부 국토지리정보원, 2010)
『2011 통계로 보는 서산시 모습』(서산시, 2011)
서산시청(http://www.seosan.go.kr/)
산동리(山東里)
충청남도 서산시 인지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 유래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 구역 통폐합 때 산저리의 ‘산’자와 동막리(東幕里)의 ‘동’자를 따서 산동리(山東里)라 하였다. 1789년(정조 13)에 간행된 『호구총수(戶口總數)』에 산저리·동막리, 1911년 간행된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 산져리[山底里], 동막리 등 관련 명칭이 확인된다.
형성 및 변천
산동리는 조선 시대의 서산군 인정면 지역으로,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 구역 통폐합 때 산저리와 동막리를 합쳐 산동리라 하고 서산군 인지면에 속하게 하였다. 1995년 서산군과 서산시가 통합됨에 따라 서산시 인지면 산동리가 되었다.
자연 환경
서남쪽에 있는 도비산을 기대어 마을이 자리 잡고 있고 그 외 대부분 지역이 평야인 전형적인 농촌이다. 마을 앞쪽에 전개되고 있는 넓은 평야는 간척 매립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동쪽의 둔당천을 만날 때까지 펼쳐져 있다. 남북 방향으로 흐르며 마을 동쪽 경계를 이루는 둔당천은 대교천에 합류하여 마을 남쪽을 흐르다 간월호에 유입한다.
현황
산동리는 인지면의 최남단에 위치하고 있다. 2010년 12월 기준으로 면적은 7.08㎢이며, 2014년 12월 31일 현재 인구는 총 146세대에 327명(남자 167명, 여자 160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으뜸 마을인 동막을 비롯하여 산저·구억말·기와집골·큰말 등의 자연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예전에는 천수만의 풍부한 어족 자원과 소금 생산으로 이름난 곳이었다고 한다. 유물·유적으로는 석천암 석조불상군, 석천암 지장보살상 및 석사자상, 산동리 사지 등이다.
참고문헌
『호구총수(戶口總數)』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
越智唯七, 『신구대조 조선전도 부군면리동 명칭일람』(조선총독부, 1917)
『한국지명총람』4-충청남도(한글학회, 1974)
『서산시지』(서산시지편찬위원회, 1998)
이은우, 『서산의 지명사』(서산시, 2008)
『2011 통계로 보는 서산시 모습』(서산시, 2011)
서산시청(http://www.seosan.go.kr/)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해미읍성 서문 밖 순교성지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에 있는 개항기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장.
개설
정분문(靜氛門)이라 불렸던 서산 해미읍성(瑞山海美邑城) 서문은 순교자들의 생사를 가르는 마지막 관문이었다. 성안의 옥에 수감된 천주교인들 가운데 형이 확정된 사람은 서문 밖으로 끌려 나와 처형되었다. 그러니 서문 밖 일대는 ‘사학죄인(邪學罪人)’들의 공식 처형장인 셈이었다. 매질이나 교수 혹은 참수로 사형이 집행되기도 하였고, 곡식을 타작하듯 메어치는 자리개질로 처형하던 돌다리도 있었다.
건립 경위
천주교 박해 당시 서산 해미읍성의 서문 밖 일대는 천주교 신자들에게 가장 두려운 장소였다. 순교의 피로 얼룩진 서산 해미읍성의 서문 밖 일대는 세대가 지나면서 순교자의 열정을 기념하는 성지로 변화되었다. 1956년 유물 보존을 위해 서산성당으로 옮겨 갔던 해미읍성 형장 길의 자리개돌을 1986년 8월 29일 본래의 위치로 되돌려 놓으면서 ‘해미읍성 서문 밖 순교지’가 기념되기 시작하였다. 1989년 6월 24일 세워진 ‘순교 현양비’에는 당시 서산 해미성당 주임 신부 윤종관 가별[세례명: 가브리엘]이 짓고 쓴 비문이 새겨져 있다. 비문에는 순교지의 순교 내력이 담겨 있다.
위치
서산 해미읍성 진남문(鎭南門) 앞의 지방도 647호선을 따라서 성곽을 그대로 끼고 돌아 약 400m 가면 서산 해미읍성 서문이 나온다. 서문 밖의 순교 현양탑과 서산고등학교 정문 앞 일대가 순교지이다.
형태
약 240㎡ 면적의 기념지 안에 순교 현양비와 해미읍성 형장 길의 자리개돌 모조품이 전시되어 있다. 순교 현양비의 상부는 십자가 모양으로 다듬어졌고, 기단에는 ‘서문 밖 순교 성지’라는 가로 글씨와 순교 내력이 적힌 비문이 새겨져 있다.
현황
2011년 현재 해미읍성 서문 밖 순교지의 소유자는 천주교 대전교구이며, 관리자는 해미순교성지이다. 서산 해미읍성의 서문 밖에 지방도 647호선이 있는데, 지방도 647호선 상에는 본래 해미읍성 형장 길의 자리개돌이 놓여 있었다고 한다.
의의와 평가
나라의 명을 거슬러 배교(背敎)를 거부한 사학죄인에게 서산 해미읍성의 서문은 운명의 기로(岐路)와도 같았다. 해가 지는 서쪽은 부정한 것을 버리고 삿된 것을 막는 곳이었다고 한다. 서문 밖이 사학죄인의 처형지가 된 것도 이런 연유였을 것이다. 정분문이라 하였던 서문의 이름처럼 지금은 한적한 소도시의 고요함을 간직하고 있지만, 동시에 진리에 몸 바친 백성들의 핏빛 절규가 서린 역설의 장소이기도 하다.
참고문헌
『서산동문본당 70년사』(서산동문본당 70년사 발간위원회, 1987)
『서산 동문동 성당 100년사-새로운 시작』(서산 동문동 성당 100년사 편찬위원회, 2009)
해미순교성지(http://www.haemi.or.kr)
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큰 바닷가에 임한 해미의 읍성
해미면 산수리에 있는 안흥정(安興亭)은 고려 문종 때부터 오랜 세월에 걸쳐 송나라 사신을 맞아들이고 보내던 곳이라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본현 동쪽 11리 지점에 있다. 고려 문종 31년에 나주도 제고사 태부소경 이당감이 아뢰기를 ‘중국 사신이 왕래하는 고만도(高彎島)의 정자는 수로가 약간 막혀 있어 정박이 불편하오니, 청하건대 홍주(洪州) 관하 정해현 땅에 한 정자를 창건하여 맞이하고 보내는 장소로 삼도록 하소서’라고 하니 제서를 내려 그 말을 따랐다”라는 기록이 있고,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는 “나라 중간에 있는 목장지로서 옛날에 객관이 있었는데, 안흥정이라 일컬었다”라는 글이 실려 있다. 해미면 반양리의 구해미라는 마을은 옛날 정해현의 현청이 있었던 곳이다.
불과 몇 년 전에 서해안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사통팔달의 고장이 된 해미의 형승을 두고 정충기는 『동헌기』에서 “땅이 큰 바닷가에 임해 있다”라고 하였는데, 이 해미에 사적으로 지정된 해미읍성이 있다. 이 성은 음식 축제로 소문난 순천의 낙안읍성과 성밟기 풍속으로 사람들에게 널리 회자되고 있는 고창의 모양성과 더불어 옛 모습을 거의 제대로 갖춘 성이다.
해미면 한가운데에 있는 해미읍성으로 덕산에 있던 병마절도사의 병영을 옮긴 것은 태종 14년(1413)이었다. 병마절도사가 옮겨오면서 이곳에 성이 필요하게 되자 성종 원년에 성을 착공하여 성종 22년에 성벽이 완성되었다. 그 뒤 효종 2년에 청주로 병영을 옮기면서 해미영이 설치되었다. 해미영은 충청도의 다섯 개 영 중 하나로 호서좌영이라고도 불렸다. 청주로 병마절도사영이 옮겨가기 전까지 서해안 방어의 요충지 역할을 했던 해미읍성에 임진왜란 때의 영웅 이순신 장군이 병사영의 군관으로 열 달 정도 근무를 했고, 숙종 때는 온양에 있던 충청도 좌영을 이곳으로 옮겼으며, 다산 정약용이 열흘에 걸쳐 유배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해미현의 염조포 부근에 안희산 봉수가 있어서 서산의 북산 봉수를 받았고, 면천의 창택산 봉수와 연결되었다. 성 둘레에 탱자나무 울타리를 둘렀다고 하여 ‘탱자나무 성’이라고도 하던 해미읍성을 두고 서거정은 이렇게 표현하였다. 백마가 힘차게 세류영(細柳營)에서 우는데 중요한 땅 웅장한 번진(藩鎭)의 절도사가 장성(長城)을 이루었네. 늦가을 하늘 높이 세워진 큰 기의 그림자가 한가롭게 보이고, 진종일 투호하는 소리마저 자세히 들려온다. 아낙네의 소라 같은 쪽진 머리가 떠오르는 듯 산이 둘러싸고 있으며, 바다는 고래 물결로 동하지 아니하고 맑고 깨끗하다. 서녘 바람이 한없이 불어제쳐 얇은 솜옷을 펄럭이니, 먼 길손 만 리 타향의 외로운 정을 견디기 어렵다. 해미읍성을 둘러싼 가야산의 맑고 고요한 모습과 규율이 엄격한 군대의 주둔지를 표현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성은 둘레가 6,630척이고 높이가 13척인 옹성이 둘, 우물이 여섯 개 있었다.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이 성안에 행정 관청과 학교를 비롯한 민가 160여 채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사적으로 지정되면서 성 밖으로 옮겨져, 사람이 살고 있는 전남의 낙안읍성과 달리 죽은 성이 되고 말았다.
해미읍성에서 1866년인 병인양요 이후 천주교인 1천여 명이 처형되었다. 천주교인들은 해미영으로 끌려와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지금도 서 있는 호야나무에 묶여 고문을 당하고 목을 매단 채 죽기도 하였는데 그때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 김진후도 이곳에서 순교했다고 알려진다.
출처:(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2023-09-24 작성자 명사십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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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명 해설과 명품사진들
즐감했어요.
선배 님 감사합니다.
늘 건강하셔서 나날이
즐겁고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사랑하시는 가족과 풍성한
한가위 명절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