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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상(종합) 스크랩 공안의 표현형식과 지도법의 변화(2) / 鄭眞熙(慧達)
내생애 추천 0 조회 31 16.02.03 21:3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공안의 표현형식과 지도법의 변화(2)

 

-마조계선사를 중심으로-

 

 

鄭眞熙(慧達)

 

 

目 次

 

Ⅰ. 들어가는 말
Ⅱ. 선종공안의 정의와 기원
Ⅲ. 공안의 표현형식과 지도법의 변화
   1. 임제
   2. 분양
   3. 법연에서 대혜
   4. 대혜이후
Ⅳ. 맺음말

 

 

한글 요약

 

선사들이 비록 언설이나 문자사용을 금기하지만 후학지도법에는 매우 간결한 언설과 다양한 행위가 가차된다. 이러한 경향은 공안명칭사용이전과 공안집성립이전부터 계속되었으며, 이후 선승(先僧)들의 선문답을 주제로 한 지도법에서 많은 눈 밝은 선자가 배출된 것을 우리는 전적을 통해서 볼 수 있다. 이것은 공안명칭 사용 전부터 공안을 방편으로 한 지도와 수행은 계속되어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후 공안집성립으로 활성화 되다 간화선확립으로 더욱 흥성하게 된 것이다.

 

공안을 구분하여 지도하는 방식은 임제부터 시작되어 분양선소에 이르러서는 공안문답이 더욱 세분되며, 이것은 당면한 학인이 처한 상황과 견처 그리고 그 진위를 바로 알아볼 수 있는 방편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들은 자유자재하고 활발발한 공안이 점점 형식화 되어가는 결과를 초래한다. 또한 분양이 본래 의도한 바와 상반된 결과를 초래한 문자선 풍조는 선종의 불립문자 원칙 위배는 물론이고 이후 선사들의 지도법이 다양하지 못하고 점차 일원화되는데 일조한다.

 

선승들의 자유자재하고 활발발한 선문답을 공안이라 칭하고 공안에 갖가지 해석이 가해져 공안집이 마침내 성립된다. 대혜에 이르러서는 선승(先僧)들의 공안을 참구하는 새로운 간화선수행법이 제창되어 묵조선과 문자선의 병폐에 빠져있던 당시 선종이 다시 흥성한다. 간화선은 선승(先僧)들의 몇몇 공안을 참구하는 수행법으로 본뜻을 드러내고자 하지만 그 흥성 또한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원, 명, 청시대에는 선정겸수와 선교일치가 후학지도법으로 주로 사용된다. 당대(唐代)까지 볼 수 있었던 순수하고 날카로운 칼날 위에 오가던 선풍은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렵게 된다.

 

주제어: 공안표현형식, 공안지도법, 마조계, 공안

 

 

Ⅰ. 들어가는 말

 

?공안의 표현형식과 지도법의 변화? (1)에서 살펴보았듯이 선종 공안은 지도, 수행, 검증, 인가의 역할을 한다. 이처럼 방법상의 역할과 기능상의 역할을 갖추고 있는 공안의 기원은 역사적 흐름에서 접근해야 한다. 공안명칭사용시점과 공안집성립과는 무관하게 공안은 수행과 지도의 방편역할을 하였으며 이전 선사들의 선문답을 주제로 한 지도법에서 많은 눈 밝은 선승들이 배출된다. 이러한 지도법과 수행이 석존부터 즉금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어 온 것을 우리는 전적에서 그 증거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선승들에게서 볼 수 있는 순박한 문답형식의 공안은 문자선이라는 새로운 풍조가 성행하면서 선문학이라는 새로운 형태로 이해된다. 이어 송대 대혜에 이르러서는 화두를 참구하는 간화선수행법이 확립되면서 새로운 공안생성은 어렵게 된다. 하지만 본구불성의 입장은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으며 독자적인 특성을 가지고 이를 표현하고 또한 지도한다.

 

?공안의 표현형식과 지도법의 변화? (1)에서 공안의 추형인 석존과 가섭의 ‘염화미소’로부터 마조 2세까지 형성된 공안을 살펴보았다. 본 논문에서는 임제부터 대혜까지 공안 표현법과 그 지도법을 주로 살펴본다. 또한 대혜이후에는 어떠한 공안이 주로 참구되며 이에 따른 수행법과 지도법에는 어떠한 변화가 있는지 간단히 고찰해 보고자 한다.

 

 

Ⅱ. 선종공안의 정의와 기원

 

?공안의 표현형식과 지도법(1)?1)에서 선에서 공안이 갖는 의미를 살펴보았다.

선에서 공안은 학인지도의 방편과 수행법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방법상의 의미와 깨달음의 여부를 가려내거나 검증하고 인가해 주는 역할을 하는 기능상의 의미를 가진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 필자는 이러한 의미를 갖추고 있는 선종공안의 정의와 그 기원을 선종전적과 근대 학자의 연구 성과를 통해서 소고해 보고자 한다.2)

 

1) 한국불교학 47, 2007년, pp.433-462.
2) 본 논문에서 사용한 ‘공안’ 명칭은 공안명칭사용시점 혹은 공안집성립시기와 무관하게 사용한 것임.

 

벽암록 에 의하면 공안은 당대에 성립되어 송대에 성행했지만 그 유래는 매우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3) 중봉명본?산방야화?는 공안에 공문서와 같은 권위를 부여해 합리성과 정당성을 수립할 뿐만 아니라 공안의 역할과 정의를 설명한다. ?산방야화?에서 언급한 공안의 유래는 벽암록 의 내용과 큰 차이가 없다.4)

일본의 대표적인 학자 스즈끼다이세쓰(鈴木大拙),5) 야나기다세이쟌(柳田聖山),6) 대만의 성옌(聖嚴)스님,7) 홍수평8) 등 일본, 대만, 중국학자는 물론 한국학자 대부분도 ?산방야화?내용을 근거로 하여 공안을 해석하고 정의한다.

 

3) 벽암록 ( 대정장 48, p.221b.)

“옛사람이 마지못하여 기연에 따라 가르침을 베푸셨는데 후세사람들이 이를 공안이라 불렀다.(古人事不獲已。對機垂示。後人喚作公案。)”.

벽암록, 삼교노인서 ( 대정장 48, p.139bc.)

“일찍이 조사스님들의 가르침을 적은 책을 공안이라 불렀는데, 이는 당나라 때에 성립하여 송대에 성행되었다.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謂祖?之書。謂之公案者。倡於唐而盛於宋。其來?矣。)”.

‘其來尙矣’는 ‘그 유래는 참으로 대단하다.’로 번역하는 것보다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로번역해야 문맥이 확실히 들어난다. ‘尙’은 문언문(文言文)에서 ‘오래다’로 번역된다.
4) 중봉명본광록 권11(日本: 中文出版社, 1985), pp.448-452.

“공안은 관청에 있는 문서에다 비유해서 말한 것이다. 국가에 법령이 있어야만 왕도정치가 제대로 실현되는지를 알 수 있다. …… 부처님과 조사들이 깨우치게 된 계기를 공안이라 이름 붙인 이유도 역시 이와 같은 뜻에서이다. 그러나 이것은 한 사람의 억지주장이 아니라 신령스런 근원에 딱 들어맞고, 묘지에 계합하여, 생사의 굴레를 타파하는 것이다. …… 공안이란 바로 번뇌 망상의 어둠을 밝혀주는 지혜의 횃불이며, 보고 듣는 것에 얽매인 결박을 끊어주는 날카로운 칼날이며, 生死命根을 끊어버리는 날카로운 도끼이며, 성인과 범부를 가려내는 신령스러운 거울이다. …… 공안이란 법을 아는 자만이 두려워할 뿐,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그 근처에 어른거리지도 못한다. …… 공안은 선배들이 다른 사람의 스승이 되어서 부득이해 주고받은 짧은 이야기이다. 그러다 그것들이 총림에 전해져서 깨달은 이들이 이것을 공안이라고 후에 이름 붙인 것이다.

(公案乃喩乎 公府之案牘也. 法之所在, 而王道之治亂, 實係焉. …… 夫佛祖機緣, 目之曰公案亦爾. 蓋非一人之臆見, 乃會靈源, 契妙旨, 破生死. …… 夫公案, 卽燭情識昏暗之慧炬也, 揭見聞?膜之金?也, 斷生死命根之利斧也, 鑑聖凡面目之神鏡也. …… 所謂公案者, 惟識法者懼, 苟非其人, ?可窺其彷彿也. …… 蓋前輩旣爲人所師, 不得已而酬酢, 一言半句, 流落叢林, 後之承虛接響者, 目之爲公案.)”

5) 鈴木大拙著 徐進夫譯開悟第一 (臺灣: 志文出版社, 1988), p.79.

“무엇을 공안이라 하는가? 공안은 권위를 말한 것으로, 즉 판단표준이 되는 공문서의 판례를 말한다. 선의 깨달음이 맞는지를 공안으로 시험의 표준을 삼는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공안은 고대선사가 말한 모종의 陳述이며, 혹은 학인에게 답한 모종의 答案이다.

(什?是公案?? 所謂公案, 據一位權威說, 意思就是建立評判標準的公共案例, 而禪的體悟是否正確, 卽以此作爲測驗的準則. 一般而言, 公案就是古代禪師所作的某種陳述, 或對學者所作的某種答語.)”
6) 柳田聖山著, 吳汝鈞譯, 中國禪思想史 (臺灣: 商務印書館, 1985), p.180. “公案雖然稱爲公判, 但有一點不能忽視的是, 此中有我自己的主體性在, ?有一種趨向根原性的層面的質的變化的意義.”
7) 聖嚴法師, 公案, 話頭 (臺灣: 法鼓文化, 1998), p.9.

“오늘날 전해져온 공안은 선종의 사제간 대화나 가르침 그리고 명언을 말한다. 名言은 언어만을 가리킨 것이 아니다. 스승과 제자는 왕왕 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선종은 불립문자인데, 이는 문자와 언어뿐만 아니라 일체 모든 소통방식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공안 속에서의 동작이나 말은 다만 답안을 암시한 것일 뿐, 직접 답을 제공한 것은 아니다.

(流傳到今天的公案, 是禪宗師徒間的對話, 敎誨花名言. 名言不專指言語, 因爲往往師父和弟子都沒有說話. 禪宗‘不立文字’, 所以不光是指文字, 語言而已, 還包括了所有的溝通方式. 公案裡的動作, 說辭只不過暗示答案, ?不直接提供答案.)”
8) 中國禪宗思想史綱 (중국: 남경대학출한사, 1996), p240.

“공안은 본래 관청에서 시비를 판결하는 문서를 가리키는데, 선종이 이를 빌려서 선배(이전)선사의 言行範例를 가지고 시비와 미오를 판단하는데 사용하는 것을 공안이라 한다.

(所謂公案, 原指官府判決是非的案例, 禪宗借用?專指前輩祖師的言行範例, 用來判斷是非迷悟.)”

 

 

이를 종합하여 정리하면 첫째 공안은 관방에서 공포한 공문서와 같은 권위를 가진다. 불조가 보이신 공안에 관공서의 공문서가 갖는 권위를 부여함으로서 공안이 갖는 권위의 합리성과 정당성을 수립한다.

둘째 공안은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방편이다. 불조는 학인이 깨달음의 계기를 일으킬 수 있도록 방편으로 공안을 시설한다. 학인은 깨달음에 도달하고자 공안을 수행방편으로 삼는다.

셋째 공안은 학인을 지도하는 소재, 방편, 판례이다. 공안은 선기를 드러낼 수 있는 일체 모든 표현형식을 포함한다. 또한 이러한 것들은 구두나 문자로 형성되어 후세에 전해지는데 후대선사들은 후학지도의 소재(주제)와 방편 그리고 권위성을 지닌 판례9)로 삼는다.

그러나 후대 문자선 영향으로 공안에 새로운 해석이 덧붙여지는데 이로 인해 공안은 선문학적인 특성을 지니고 그 의의 또한 더욱 복잡해진다. 선종전적과 학자들의 연구 성과에서 볼 수 있는 공안의 정의는 이상 세 가지로 함축된다.

 

9) 판례로서의 공안은 반드시 불조의 실제적 사례와 조금도 어긋남 없이 완전히 결부되어야 한다. 즉 각각의 공안이 가지고 있는 각각의 독립적사상과 성격에 완전히 부합되어야 한다.

 

불조가 학인을 응대한 기연이 구두, 동작, 문자 등으로 형성되어 후대에 전해지고, 후대선사들은 이러한 기연기록에 관공서에서 공포한 법률명령이나 판결안과 같은 권위를 부여하고 학인을 접인 할 때 공안에 의거해 일체시비를 끊게 하거나 또는 미오를 판별한다. 불조자신 또는 그들이 학인을 깨달음으로 이끄는 선기와 관련된 이러한 실제기록들은 학인을 깨달음의 길로 들게 하는 근거나, 또는 인증, 참구의 전거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공안이라 칭하며 공안은 선종의 실천수행과 관계를 깊이 한다.

 

선종공안의 기원은 역사적 유래에서 접근돼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다. 공안명칭사용기점이나 최초 공안집 성립시점에서 그 기원을 찾으면 공안이 갖는 중요한 의의를 소홀히 하게 된다. 따라서 필자는 공안 역사의 흐름에서 그 기원을 고찰해보려고 한다.

 

석존께서 가섭에게 법을 부촉했다10)는 ‘염화미소’를 선종의 첫 번째 공안으로 보기도 한다. 이 공안을 가장 먼저 싣고 있는 전적은 大梵天王問佛決疑經이다. 大梵天王問佛決疑經11)은 구체적이면서도 사실적인 표현법으로 ‘염화미소’의 전 과정을 기술하고 있는데 이것은 후대 선학의 형성과 성립에 중요한 이론적, 역사적 근거가 되기도 한다. 가섭이 석존의 정법을 부촉 받고, 이로부터 서천이십팔조의 조통도 성립된다.
중국선종은 이를 등사의 주요내용으로 하여 중국선종의 역사적 연원을 석존과 연계 시키는 중요한 근거로 삼는다. 언어를 가차하지 않고 실제 사물인 연꽃을 들어 보이신 매우 현실적이고 사실적인 표현형식은 즉금의 선사들에게서도 계속되고 있으며 후대공안의 추형이 된다.

 

10) 석존께서 가섭에게 법을 부촉했다는 사실은 大梵天王問佛決疑經과 조당집, 석가모니 권1 ( 선장 PP.29-30)등에서 전법의 설을 일부 인용하고 있다. 이는 가섭이 석가모니불의 정법을 계승했음을 확립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二租인 아난, 후세선종의 법맥까지 기반까지도 성립하고 있다.

11) 卍續藏 87, p.976a.

“爾時, 裟婆世界主大梵王, 名曰放廣, 以三千大千世界成就之根, 妙法蓮金光明大婆羅華, 捧之上佛 …… 爾時, 如來坐此寶座, 受此蓮華, 無說無言, 但拈蓮華, 入大會中, 八萬四千人天. 時, 大衆皆止?然. 於時, 長老摩訶迦葉見佛拈華示衆佛事, 卽今廓然, 破顔微笑. 佛卽告言, 是也. 我有正法眼藏, 涅槃妙心, 實相無相, 微妙法門, 不立文字, 敎外別傳, 總持任持, 凡夫成佛, 第一義諦, 今方付屬摩訶迦葉. 言已?然.”

大梵天王問佛決疑經을 僞經으로도 보지만, 이 경에서 서술하고 있는 ‘염화미소’는 매우 사실적이고 구체적인 표현으로 ‘염화미소’를 구상하고 있다. ‘염화미소’는 후대 선동의 중요한 역사적 근거임과 동시에 선사들의 후학지도방편의 추형이다. ‘염화미소’가 후대선종에 끼친 종종의 영향을 역사사실로만 접근하여 이를 부정해 버리는 것은 재삼 고려되어야 한다.

 

공안의 명칭해석과 의의에 관한 설명은 벽암록 부터 볼 수 있다고해서 그 유래 또한 벽암록 에서 찾는 것은 재고해 봐야 한다. 그 유래는 벽암록, 삼교노인서 에서 말한 것처럼 최초 공안집성립과 공안명칭 사용시점과 무관하게 오래전 불조가 보이신 가르침에서부터 계속되었다고 본다. 선전적과 근대학자가 언급한 공안과 관련된 해석과 정의는 공안집성립이나 공안명칭사용과 그 시기를 같이한다. 그러므로 대부분 후대공안이 가진 의의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러나 벽암록 은 공안명칭사용 전에도 공안은 이미 수행방편이였음을 명시하고 있다.

?산방야화?는 “공안이란 선배들이 다른 사람의 스승이 되어서 마지못해 주고 받은 짧은 이야기다. 그러나 이것들이 총림에 전해져서 깨달은 이들이 이것을 공안이라고 후에 이름 붙인 것이다.” 선사들이 언설이나 문자사용을 금기하지만 학인을 깨달음으로 이끌기 위해 시설한 지도법에는 아주 간결한 언설과 다양한 행위가 사용된다. 이러한 문답형식을 통한 지도법들은 석존에서 즉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공안명칭사용 전에도 선승들의 선문답을 주제로 하여 펼친 지도법에서 많은 눈 밝은 선자가 배출되었음을 ‘등사’나 ‘어록’에서 우리는 쉽게 볼 수 있다. 즉 공안명칭사용 전에도 공안을 방편으로 한 지도법은 계속되었다는 것이다.

 

세 가지 공안의 정의 외 공안은 매우 중요한 의의를 하나 더 가진다.
공안이 소재, 방편, 판례로 사용되기 전을 살펴봐야 한다. 공안은 즉문즉답으로 자신의 견지를 바로 드러낸 것이다. 불조가 학인의 물음에 언어나 행위를 가차한 것이 바로 답이다. 학인에게 답을 암시한 것이 아니다. 즉 공안명칭사용 전이나 공안집이 성립되기 전에도 불조는 제자를 깨달음에 들게 하기위한 방편으로 마지못해 기연에 따라 언어나 행위를 가차하여 바로 물음에 대한 가르침(답)을 준다. 이를 후세 사람들이 공안이라 칭한 것이다. 이러한 지도법은 석존부터 즉금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어 오고 있다. 그러므로 공안의 역사를 공안명칭사용 혹은 공안집성립시점에서 찾아보려는 것은 무리라고 본다.

 

석존이 가섭에게 정법을 부촉한 사실은 후대선종의 전법계승의 기반을 이룬다. 공안집형성기점을 공안역사의 시작으로 보는 것은 선종전승 계통의 합리성을 부정해버리는 것이 된다. 불조의 전법계승과 역대조사의 사상과 수행법 등을 전하는 등사나 어록을 봐도 공안의 역할은 오래전부터 계속되어 왔으며 공안집성립으로 활성화되다 간화선확립으로 더욱 흥성한다. 그리고 공안의 의의는 시대가 거듭되면서 증가한다.

 

 

Ⅲ. 공안의 표현형식과 지도법의 변화

 

1. 임제

 

황벽의 법을 이은 임제의현(臨濟義玄, ?-866)은 매우 파격적인 언행을 사용하여 선법을 편다.

 

황벽처소에서 ‘祖師西來意’로 깨닫지 못한 임제는 대우의 한마디에 깨닫는다. 임제와 황벽간의 선문답을 보면 황벽이 주장자로 임제를 내리치자 임제는 주장자를 빼앗고 황벽을 쓰러뜨린다.12)

과격한 행위를 가차한 문답형식은 황벽이 백장을 한대 후려치는 행위문답과 같은 모양새이다. 임제는 때린다든지, 불자를 던져버린다든지, ‘우(?, hong)’하면 ‘아(啞,ya)’하는 등 그의 학인접인법은 다양하다. 그러나 그가 주로 사용한 교화방편문은 방과 할이다.13)

임제의 공안표현형식은 이전선사들과 큰 차이는 없지만 문답진행과정은 비교적 격렬하고 활기차며 박동감 넘친다. 임제와 법거량을 하는 선승들 역시 같은 기풍이다. 예를 들면 마곡이 “십이면관세음의 어느 것이 바른 얼굴인가?”하고 묻자 임제가 승상에서 내려와 한 손으론 방석을 걷고 한 손으로는 마곡을 거머잡고 “십이면관세음이 어디로 갔느냐?”고 되묻는다. 이에 마곡이 승상에 앉으려하자 임제가 주장자를 들어 마곡을 때리고, 마곡은 주장자를 막아 잡고 맞붙들고 방장실로 간다.14)

이 상황은 황벽과 임제가 법거량을 했던 상황보다 더욱 격렬하며 잠시 숨 돌릴 여유 없이 긴박하고 활발발하게 선문답이 진행된다. 이처럼 임제의 지도법은 ?圓悟五家宗要?가 기술한 것처럼 방과 할을 번갈아 사용하여 서슬이 퍼런 칼날위에서 사람을 구하듯이 예리하며 필요한 수단은 번갯불처럼 매우 빠르게 강구해 내는 것이 특성이다.15) 격렬하고 숨 돌릴 틈 없이 빠르게 진행되는 지도법은 육조 이래 최고조에 이른다.

 

12) 景德傳燈錄 卷12( 대정장 51), p. 290ab.

“대우가 이르기를 “황벽이 노파심으로 너를 위하여 애를 썼는데 아직도 허물을 찾는가?” 임제가 이 말에 크게 깨닫고 이르기를 “불법에 아들이 얼마 안 되는구나.”

대우가 임제의 옷깃을 거머쥐고 이르기를 “방금은 나에게 모르겠다하더니 이제는 얼마 안 된다고 하니 무엇을 알고 무엇을 깨달았는가?”

임제가 대우의 옆구리를 한대 때리니, 대우가 밀어내면서 이르기를 “너의 스승은 황벽이다. 나와는 관계가 없다.”

임제가 황벽에게 돌아오니, 황벽이 묻기를 “어찌 그리 빨리 돌아왔는가?” 임제가 답하기를 “노파심이 간절했기 때문입니다.”

황벽이 이르기를 “이 대우 늙은이! 만나면 한대 때리지 않을 수 없구먼!”

임제가 이르기를 “만나기를 기다릴 것 없이, 지금 맞으시오.” 그리고는 황벽을 한대 때리니, 황벽이 ‘하하’하고 크게 웃었다(동국역경원역, 한글대장경참조).

 (愚曰。黃蘗恁?老婆。爲汝得徹困。猶覓過在。師於是大悟云。佛法也無多子。

愚乃 ?師衣領云。適來道我不會。而今又道無多子。是多少來。是多少來。

師向愚肋下打一拳。愚托開云。汝師黃蘗。非干我事。

師却返黃蘗。黃蘗問云。汝?太速生。師云。只爲老婆心切。

黃蘗云。遮大愚老漢。待見。與打一頓。

師云。說什?待見。卽今便打。遂鼓黃蘗一掌。黃蘗哈哈大笑。)”

13) 祖堂集 卷19( 禪藏), p.947. “至於化門, 多行喝棒.”
14) 景德傳燈錄 卷12( 대정장 51) p. 291a.

“麻谷(第二世)到參。敷坐具問。十二面觀音。阿那面正。師下繩床。一手收坐具。一手?麻谷云。十二面觀音向什?處去也。麻谷轉身 擬坐繩床。師拈?杖打。麻谷接却。相捉入方丈。”
15) 人天眼目 卷6( 대정장 48), p. 331a.

“全機大用。棒喝交馳。劍刀上求人。電光中垂手(臨濟)。”

 

 

마조에 이르러 지도법상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했던 남종선은 임제에 이르러서는 더욱 날카롭고 격렬하며 방과 할을 번갈아 사용하는 지도법상 새로운 전환점을 맞는다.

또한 임제는 공안을 구분하고 이에 대한 교학방법도 제시한다.

 

 

"임제가 황벽을 떠나 하북성 임제원의 주지임무를 볼 때, 어느 날 보화와 극부를 보고 이르기를 “내가 여기서 황벽의 종지(법)를 세우고자하는데 그대들이 이일을 완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는가?”

보화와 극부가 임제의 말을 듣고는 정중하게 승낙을 하였다. 그러나 삼 일이 지난 후 보화가 임제를 뵙고 묻기를 “스님께서 삼 일전에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임제는 아무 말 없이 보화를 후려친다. 삼 일이 지난 후 극부가 임제를 찾아뵙고 다시 묻기를 “스님께서 지난 날 왜 보화를 때리셨습니까? 임제는 또 극부를 후려친다.

저녁때 소참법문시 임제가 이르기를 “어떤 때는 사람은 뺏고 경계는 빼앗지 않으며, 어떤 때는 경계는 뺏고 사람은 빼앗지 않으며, 어떤 때는 사람과 경계 모두를 뺏고, 어떤 때는 사람과 경계둘 다 빼앗지 않는다.”

어떤 승이 묻기를 “어떤 것이 사람을 뺏고 경계는 빼앗지 않는 것입니까?

임제가 답하기를 “아침에 동쪽에서 올라온 따스한 햇볕이 대지위의 비단을 비춘 것과 같고, 어린 아이의 늘어진 긴 백발이 마치 명주실과 같다.”

다시 묻기를 “어떤 것이 경계는 뺏고 사람은 빼앗지 않는 것입니까?”

임제가 답하기를 “군왕이 명령을 한번 내리니 천하가 다 준수하며, 변방을 지키는 장수는 전쟁할일이 없어졌다.”

승이 다시 묻기를 “어떤 것이 사람과 경계를 다 뺏는 것입니까?”

임제가 답하기를 “병주와 분주는 서로 소식을 끊고 각기 한 지방을 다스렸다.”

승이 또다시 묻기를 “어떤 것이 사람과 경계 모두를 빼앗지 않는 것입니까?” 임제가 답하기를 “임금이 성좌에 오르고, 시골 노인이 노래를 부른다.”16)

 

16) 人天眼目 卷1( 대정장 48), p. 300b.

“師初至河北住院。見普化克符二上座。乃謂曰。我欲於此建立黃蘗宗旨。汝可成?我。

二人珍重下去。三日後。普化却上來問云。和尙三日前說甚?。

師便打。三日後。克符上來問。和尙昨日打普化作甚?。師亦打。

至晩小參云。我有時奪人不奪境。有時奪境不奪人。有時人境俱奪。有時人境俱不奪。

僧問。如何是奪人不奪境。師云。煦日發生鋪地錦。?兒垂髮白如絲。

僧問。如何是奪境不奪人。師云。王令已行天下遍。將軍塞外絶烟塵。

僧問。如何是人境俱奪。師云。幷汾絶信獨處一方。僧問。如何是人境俱不奪。師云。王登寶殿。野老謳歌。”

 

 

四料揀은 근기에 따른 학인접인법이다. 학인의 정도를 먼저 헤아리고, 이들의 근기와 수행상황을 간별 한 후, 다른 지도법을 취한다. 즉 학인의 근기를 넷으로 나누고 본질(人,주관)과 현상(境,객관)의 뺏고(奪,부정함) 빼앗지 않는(不奪,인정함) 것을 통하여 제자를 깨달음으로 이끄는 지도법이다.

임제는 ‘煦日發生’, ‘?兒垂絲’, ‘將軍塞外’, ‘王登寶殿’등으로 각각의 경계를 형용한다.

 

그렇다면 학인의 근기를 어떻게 헤아려서 적당한 지도를 할 것인가? 에 관해 임제는 아래와 같은 설명을 한다.

 

 

"임제가 대중에게 이르기를 “만약 서로 다른 지방의 학인이 오면, 나는 학인의 세 가지 다른 근기에 근거해 다른 지도법을 취하겠다.

만약 중하근기가 오면 나는 그의 경계는 빼앗되, 법은 제거하지 않을 것이며,

혹 중상근기가 오면 나는 경계와 법을 다 빼앗을 것이며,

만약 상상근기가 오면 나는 경계와 법과 사람 모두를 빼앗지 않을 것이며,

만약 출격의 견해를 가진 사람이 오면 나는 곧 전체작용을 나타내어 그를 깨달음으로 이끌되 근기에 따라 차별적으로 뺏고 빼앗지 않는 것을 따지지 않는다.

…… 남원이 풍혈에게 묻기를 “그대가 말한 四料揀은 학인을 구분하는데 어떤 법칙이 있는가?”

풍혈이 답하기를 “무릇 말을 함에 情에 얽매이지 않으면 聖解에 든다.

학인이 情에 얽매이면 正解를 얻지 못하는데, 先聖이 이를 매우 애석하게 생각하여 학인을 위하여 방편 베풀기를 마치 쐐기를 박는 것과 같이하되, 병에 대해 약을 씀에 조그마한 오차도 없다.17)

 

17) 人天眼目 卷1( 대정장 48), p.300c.

“師示衆云。如諸方學人來。山僧此問。作三種根器斷。

如中下根器來。我便奪其境。而不除其法。

或中上根器來。我便境法俱奪。

如上上根器來。我便境法人俱不奪。

如有出格見解人來。山僧此間。便全體作用。不歷根器。

…… 南院?問風穴昭云。汝道。四料揀。料揀何法。

穴云。凡語不滯凡情。旣墮聖解。

學者大病。先聖哀之。爲施方便。如楔出楔。”

 

 

남원은 남원혜옹(南院慧?, ?-952)선사를 가리킨다. 학인이 이원적 사고방식에 쉽게 떨어지기 때문에 인재시교(因材施敎)의 지도법이 필요함을 명시한다. 쐐기(楔)를 박아 고정시키듯이 사종근기의 중생에게 ‘병에 맞추어 약을 쓴다(對症下藥).’는 원칙이다.

 

임제의 지도법은 학인의 근기와 상황에 따라 다르다. 예를 들면 앞에서 언급한 ‘四料揀’외에도 세 가지 학인을 접인방식인 ‘三句’18)와 학인제접시 근기의 활용을 나타내는 ‘三玄三要’,19) 학인의 근기와 상황에 따라 임제가 자주 사용하는 ‘할’을 중심으로 그 용법과 내용차이를 설명하고 있는 ‘四喝’,20) 스승의 입장에서 학인제접방법을 설명한 ‘四照用’ 21)등 다양한 지도법이 있다. 이처럼 임제의 지도법은 먼저 학인을 잘 관찰하는 지혜의 활동이 있고, 그 다음 각기 다른 근기와 학인이 처한 상황에 따라 펼쳐지는 맞춤식지도법이다. 지도자는 학인의 정도를 관찰할 수 있는 지혜의 눈을 먼저 갖춰야한다는 점은 이전선사들과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공안을 분류하고 근기에 따른 지도법이 설명되며 체계를 성립하여 접인하는 방식은 임제에 이르러 성립된 새로운 학인지도법이다.

 

18) 鎭州臨濟慧照禪師語錄 卷1( 대정장 47), p. 497a.

“上堂。僧問。如何是第一句。師云。三要印開朱點側。未容擬議主賓分。

問如何是第二句。師云。妙解豈容無著問。?和爭負截流機。

問如何是第三句。師云。看取棚頭弄傀儡。抽牽都來裏有人。

師又云。一句語須具三玄門。一玄門須具三要。有權有用。汝等諸人。作?生會。下座。”
19) 人天眼目 卷1( 대정장 48), p.302a.

 “一語須具三玄門。一玄門須具三要。有權有實。有照有用。”

20) 人天眼目 卷1( 대정장 48), p.302b.

“師問僧。有時一喝如金剛王寶劍。有時一喝如踞地師子。有時一喝如探竿影草。有時一喝不作一喝用。汝作?生會。僧擬議。師便喝。”
21) 人天眼目 卷1( 대정장 48), p.304a.

“師一日示衆云。我有時先照後用。有時先用後照。有時照用同時。有時照用不同時。先照後用有人在。先用後照有法在。照用同時。驅耕夫之牛。奪饑人之食。敲骨取髓。痛下針錐。照用不同時。有問有答。立主立賓。合水
和泥應機接物。若是過量人。向未擧時。?起便行。猶較些子。”

 

 

임제언교의 특색은 명쾌하고 활발한 은유적인표현법에 있다. 비교적 평범하면서도 재미있는 비유사용은 임제선이 가진 매력중 하나이다. 예를 들면 “붉은 몸뚱이에 한 무위진인이 있어 항상 그대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의 얼굴을 통해서 출입한다.”22) 이것은 후대에도 회자되는 것으로 임제의 새로운 표현법에 의해 색신과 본구자성청정심 그리고 육근, 육경이 알기 쉽고 생동감 넘치게 드러난다. 그러나 언교제한이 반드시 필요함 역시 잊지 않는다.23) 남종이 시종일관 중시한 불입문자 교외별전의 종지가 임제에게도 계승되고 있다. 언어적 매개를 철저히 내 던지고 이원적 대립적 인식활동을 초월한 무한한 진리를 직접 체험케 하는 방과 할 등 행위지도법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학인이 조금이라도 머뭇거리거나 망설이면 번개가 순식간에 내리치는듯한 행위지도법으로 사유 활동에서 벗어나 곧 바로 돈오진리를 깨닫게 한다.

 

22) 鎭州臨濟慧照禪師語錄 卷1( 대정장 47), p.496c.

“上堂云。赤肉團上有一無位眞人。常從汝等諸人面門出入。”
23) 鎭州臨濟慧照禪師語錄 卷1( 대정장 47), p.502c.

“부처란 얻을 것이 없는 것이다.삼승과 오성과 원돈교의 자취마저도 모두 그때 병에 따라 약을 주는 것으로, 실다운법이 있는 것이 아니다. 설사 있다 하더라도 모두가 표현하는 말에 불과한 것이며,문자를 배열해 놓은 것으로, 이렇게 말 해 본 것일 뿐이다.”

(道流。無佛可得。乃至三乘五性圓頓敎迹。皆是一期藥病相治。?無實法。設有皆是相似。表顯路布。文字差排。且如是說。)

 

 

"제방에서 도를 배우는 사람이 말이나 형상에 의지하지 않고 내 앞에 나온 자는 하나도 없다.

산승은 여기에서 그들을 쳐버린다. 손에서 나오면 손으로 치고, 입에서 나오면 입으로 치고, 눈에서 나오면 눈으로 쳐버린다.

홀로 벗어나서 나온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모두가 고인의 부질없는 지식, 언어, 행위를 숭상하고 있다.24)

24) 鎭州臨濟慧照禪師語錄 卷1( 대정장 47), p. 500b.

“如諸方學道流。未有不依物出來底。

山僧向此間從頭打。手上出來手上打。口裏出來口裏打。眼裏出來眼裏打。

未有一箇獨脫出來底。皆是上他古人閑機境。”

 

 

학인이 사유정식에 의지하기 때문에 ‘방’을 쓴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말이나 형상 등 그 어떤 것에 의지해 흉내를 내면 ‘방’을 써서 그 의지한 바를 끊고 바로 깨닫게 하는 것이 임제교학방식이다. ‘방’외에도 임제는 ‘할’도 자주 사용한다. 절을 해도 할이요 불법의 대의를 물어도 할이니 임제는 무위진인을 제외하고 다른 것을 찾으면 곧 바로 할을 한다.25)

 

25) 鎭州臨濟慧照禪師語錄 卷1( 대정장 47), p.496c.

“임제가 법상에 오르자 한 스님이 나와서 절을 하니 임제가 곧 바로 할을 하였다.

승이 이르기를 “노화상께서는 사람을 떠보지 마십시오.”

임제가 이르기를 “그대가 말해보라 할의 落處가 어디인지!” 그 스님이 곧 바로 할을 하였다.

어떤 승이 묻기를 “무엇이 불법의 대의 입니까?” 임제가 바로 할을 하니, 그 승이 절(禮拜)을 하였다.

임제가 묻기를”그대가 한번 말해보라 이 할이 훌륭한 할인가.” 승이 답하기를 “초야의 도적이 크게 패했습니다.” 임제가 묻기를 “잘못이 어디에 있는가?” 승이 답하기를 “두 번 잘못은 용납하지 않습니다.” 임제가 바로 할을 하였다.

(上堂。有僧出禮拜。師便喝。

僧云。老和尙莫探頭好。
師云。爾道落在什?處。僧便喝。

又有僧問。如何是佛法大意。師便喝。僧禮拜。

師云。爾道好喝也無。僧云。草賊大敗。

師云。過在什?處。僧云。再犯不容。師便喝。)”

 

학인의 물음에 불자, 주먹, 방, 할 등으로 답을 하여 자신의 진면목을 바로 드러내도록 지도한다. 이처럼 임제는 불법의 진의를 가장 간단명료한 ‘할’과 ‘방’ 등으로 표현하는데 이 역시도 부득이해서 하는 행위지도법이다. 임제는 언어로 가르침을 펴거나 방과 할을 번갈아 사용하는 표현형식으로 학인을 지도한다.

 

이처럼 임제는 생동적이며 활발발한 비유를 겸비한 언교와 동시에 민첩하고 재빠르게 ‘방’과 ‘할’을 번갈아 사용하는 행위지도법으로 살활이 자재한 선풍을 보여준다. 인재시교의 원칙하에 먼저 학인의 근기와 상황을 검증하고 구분한 후 대기대용의 접인방식을 사용한다. 학인근기에 적합한 언교와 신속하고 날쌘 행위로 학인에게 조금도 머뭇거릴 틈을 주지 않으며 바로 깨달음을 체험케 하는 매우 생동적인 지도법을 취한다. 체계적이고 은유법을 겸비한 언교와 여기에 사납고 매서운 행위지도법을 겸용하여 본구불성을 체증케 하는 방식은 임제부터라고 본다.

 

후대 공안집에 보이는 임제와 관련된 공안은 어떠한 것들이 있으며 무엇을 주제로 하는가? 벽암록 32칙에 ‘定上座問臨濟’ 1칙이 있고, 종용록 에는 4칙이 실려 있으며,26) 선문염송 에는 총 29칙27)의 임제와 관련된 공안이 있다. 모두 본구불성을 주제로 한 공안들이다.

 

26) 臨濟?驢(제13칙), 臨濟眞人(제38칙), 臨濟大悟(제86칙), 臨濟一畵(제95칙).

 

 

2. 분양

 

분양선소(汾陽善昭, 947-1024)는 三句, 四句, 五門句, 三訣, 十八門 등의 기용(機用)으로 학인을 접인한다.28) 이는 선종공안문답을 매우 세밀하게 분별해 놓은 것으로 이 중 十八問29)의 분류가 가장 세밀하다. 18문의 서문(序文)과 결어(結語)를 보면30) 선지식은 학인을 대할 때 가장 먼저 선지식을 찾은 연유와 근기를 살펴 그 상황을 판단해야 한다. 아울러 가르침의 시절인연과 깊이가 학인이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와도 상응해야 한다. 학인의 근기와 상황에 맞지 않는 것을 억지로 끌어다 붙이면 피차에게 이익이 없으니 이를 가장 주의 깊게 살펴야한다는 것이다. 학인이 자신의 경지를 속인다든지 혹은 자신의 경지를 바로 들어 내는 것 등은 18문으로 모두 꿰뚫어볼 수 있다. 아무리 학인이 자신의 진위를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기 때문에 선지식이 장려와 책망을 가리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공안문답의 구분이 선소에 이르러서는 더욱 세밀해지며 학인지도법 또한 격식을 따르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28) 人天眼目 卷2 ( 대정장 48), pp. 307b-308a, 同書卷6 ( 대정장 48), p. 329a.
29) 대정장 48, pp. 307c-308a.

“請益 僧問馬祖。如何是佛。祖云。卽心是佛。趙州云。殿裏底。呈解 問龍牙。天不能蓋。地不能載時如何。牙云。道者合如是。察辨 問臨濟。學人有一問。在和尙處時如何。濟云。速道速道。僧擬議。濟便打。投機 問天皇。疑情未息時如何。皇云。守一非眞。偏僻 問芭蕉。盡大地是箇眼睛。乞師指示。蕉云。貧兒遇?飯。心行 問興化。學人?白未分。乞師方便。化隨聲便打。探拔 問風穴。不會底人。爲甚?不疑。穴云。靈龜行陸地。爭免曳泥?。不會 問玄沙。學人乍入叢林。乞師指示。沙云。汝聞偃溪水聲?。僧云聞。沙云。從這裏入。擎擔 問老宿。世智辨聰。總不要拈出。還我話頭來。宿便打。置 問雲門。?目不見邊際時如何。門云鑒。故 問首山。一切衆生。皆有佛性爲甚?不識。山云識。。 問風穴。大海有珠。如何取得。
穴云。罔象到時光燦爛。離婁行處浪滔天。實 問三聖。學人只見和尙是僧。如何是佛是法。聖云。是佛是法。汝知之乎。假 問徑山。這箇是殿裏底。那箇是佛。山云。這箇是殿裏底。審 問祖師。一切諸法。本來是有。那箇是無。答云。汝問甚分明。何勞更問吾。徵 問睦州。祖師西來當爲何事。州云。爾道。爲何事。僧無語。州便打。明 外道問佛。不問有言無言。世尊良久。道云。世尊大慈大悲。開我迷雲。令我得入。默 外道到佛處無言而立。佛云。甚多。外道道云。世尊大慈大悲。令我得入。”

30) 人天眼目 卷2( 대정장 48), pp.307c-308a.

“열여덟 가지 물음은 대체적으로 실문문과 묵문문이 비교적 분별하기 어려운데, 이것과 참학인이 찾아온 이유를 알고자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나머지는 비교적 쉽게 처리할 수 있는 것들이다. 각 물음 모두는 구체적인 상황과 말의 깊고 얕은 정도가 있어, 기량을 장악하여 실제와 서로 적응하면 된다. 망령되이 억지로 끌어다 붙이려하면 피차간에 이익이 없다. 비록 좋은 인에서 시작되었다하더라도 악과를 부르게 되니 반드시 신중하고 자세히 하여야한다. …… 무릇 어떤 참학인은 편벽된 언구로 장래를 가리고 선사의 안목이 옳고 그른지를 가리려하고, 혹은 자신의 견해를 드러내어 擎頭하기도하고 載角하기도(혹은 기이한 행위로 자신의 견해를 드러내기도 한다) 한다. 만약 열여덟 가지의 물음으로 하나하나 시험하면, 확실한 답을 얻을 수 있다. 당면에서 학인의 속임과 정직을
알 수 있기 때문에 책망과 장려를 줄 수 있으며, 마치 거울에 비추어 보는 것과 같아서 어떠한 요물도 모두 현현하게 되니 어떻게 여우가 본래 모습을 숨길 수 있겠는가!

(汾陽云。大意除實問默問難辨。須識來意。餘者總有時節。言說淺深相度祗應。不得妄生穿鑿。彼此無利益。雖是善因。而招惡果。切須子細。? 凡有學人偏僻言句。或蓋覆將來。辨師家眼目。或呈知見。擎頭戴角。一一試之。盡皆打得。只爲當面識破。或貶或褒。明鏡臨臺。是何精魅之可現。何有妖狐能隱本形者也。)”

 

분양은 송대 문자선흥성에 선구자적역할을 한 인물이다. 분양의 ‘송고백칙’은 백칙의 고인문답기어(古人問答機語)를 모아 여기에 게송과 해석을 붙인 것이며 운문(韻文)형식으로 선기를 표현하고 전달하는 새로운 형식이다. ‘대별백칙(代別百則)’31)은 선문에서 자주 보이는 질문에 대답(代答) 혹은 별답(別答)을 붙인 것이다. 분양의 송고나 대별은 문자를 통해 공안을 천명하거나 선의를 드러내 보이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문자선의 흥성을 야기해 선림에 일대 변화를 가져오며 만당오대이후(晩唐五代以後) 공안지도법에도 중대한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역할을 한다.

 

31) 代語’는 선소가 공안중의 선사를 대신하여 설명을 붙인 것으로,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선사가 학인을 대신하여 설명하는 것으로 대신하여 대답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다른 하나는 선사가 고인을 대신하여 설명하는 것으로, 특히 고대의 조사공안중 물음만 있고 답이 없으면 선사가 고인을 대신하여 답을 하는 것이다.

‘別語’는 선사가 제3자의 입장에 서거나 객관적 입장에서 따로 다른 의미를 함유하고 있는 일구를 더해서 해석하거나 설명을 붙인 것이다.’

 

공안을 구분하여 지도하는 방식은 임제부터지만 분양선소에 이르러서는 공안문답을 더욱 세밀하게 구분하고 당면한 학인이 처한 상황과 견처와 진위를 바로 알아볼 수 있는 방식으로 학인을 지도한다. 이러한 지도 방편들은 자유자재하며 살아 숨 쉬는 공안을 정형적인 틀에 구속시켜 버리는 것이다. 선문학의 형식으로 선법을 해석하는 ‘송고백칙’의 출현은 공안에서 공안이 형성되는 공안지도법의 형식화라는 결과를 초래한다. 분양이 본래 의도한 바와 달리 문자에 집착하는 문자선 풍조는 선종의 불립 문자원칙 위배는 물론 이후 선사들의 지도법상 형식화에도 일조한다.

 

 

3. 법연에서 대혜

 

오조법연(五祖法演, ?-1104)은 최초로 대중에게 조주의 구자무불성화 참구를 제시한 선승으로 본다. 혹자는 법연을 간화선의 시조라고 하지만 이와 관련된 상세한 내용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 여기에서는 우선 法演禪師語錄 卷下의 무자공안 참구에 관련된 법연의 법어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상당하여 제시하기를, 어떤 승이 조주에게 묻기를 “개에게도 불성이있습니까?”

조주가 답하기를 “없다.” 승이 다시 묻기를 “일체중생 모두에게 불성이 있다했는데, 개는 왜 불성이 없다하십니까?”

조주가 답하기를 “개에게는 업식이 있기 때문이다.”

오조가 이르기를 “대중들은 평소 어떻게 알고 있는가? 노승은 평소 다만 조주의 무자만 들어도 충분하다 생각한다. 그대들이 만약 이 무자 하나만 깨닫는다면(체득) 천하의 사람들이 그대들을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대들은 어떻게 조주의 무자를 깨달을 것인가? 철저히 깨달은 사람이 있는가?

있으면 나와서 대답해 보도록 하시오! 나는 그대들이 “있다”고 대답하는 것도 원하지 않고, “없다”고 대답하는 것도 원하지 않으며, 또한 “있다는 것도 아니고 없다는 것도 아니다”고 대답하는 것도 원하지 않으니, 그대들은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인가?32)

32) 法演禪師語錄 卷3( 대정장 47), p.665bc.

“上堂擧。僧問趙州。狗子還有佛性也無。

州云無。僧云。一切衆生皆有佛性。狗子爲什?却無。

州云。爲伊有業識在。

師云。大衆爾諸人。尋常作?生會。老僧尋常只擧無字便休。爾若透得這一箇字。天下人不柰爾何。

爾諸人作?生透。還有透得徹底?。

有則出來道看。我也不要爾道有。也不要爾道無。也不要爾道不有不無。爾作?生道。珍重。”

 

 

오조법연이 조주의 구자무불성화를 중시하였음을 알 수 있는 내용이다. 법연이 조주의 무자화두를 제시하여 학인을 지도했다는 내용은 대혜가 鼓山逮長老에게 보낸 답신에서도 확인 가능하다.

“오조가 백운에 주하고 있을 때, 영원화상에게 보낸 답신에 이르기를 이번 하안거에 여러 장원이 벼 수확을 하지 못해도 걱정이 되지 않는데, 걱정이 되는 것은 한 승당의 수백 명의 납자가 이번 하안거에 한 명도 구자무불성화를 깨닫지 못했으니, 불법이 장차 멸할까 가히 염려스러울 뿐이다.”33)

안거대중이 조주의 무자화두로 하안거동안 공부한 것을 예측 가능케 하는 내용이다.34)

법연은 무자화두 드는 것만으로도 깨달음을 체득하는데 모자람이 없음을 주장한다. 그러나 법연의 어록을 보면 선승(先僧)들의 다른 선문답들도 다수 인용한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대들은 어떻게 조주의 무자를 깨달을 것이며’ 라는 언급은 있지만 구자무불성화로 어떻게 선수행을 지도하고 수행했다는 구체적인 내용들은 보이지 않는다. 위의 내용에 의거해 이때 이미 당대선사들의 선문답이 선수행의 방법으로 제시되었다고 단정하거나, 조주의 무자화두가 송대 간화선수행의 주요화두로 제기된 것은 오조법연에 의해서라는 견해, 그리고 송대 간화선의 출발점까지도 오조법연에서 찾는 것은 무리라 생각 된다.35)

대혜와 관련된 문헌을 봐도 대혜는 처음부터 조주의 무자화두만으로 학인을 지도하지 않았다.36)

법연선사어록 37)에서도 법연은 조주의 ‘구자무불성’을 비롯하여 고인의 많은 선문답을 들어 학인과 자연스럽게 문답 한다. 그리고 행위지도법상 선승(先僧)과 다른 특이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

 

33) 大慧普覺禪師語錄 卷30( 대정장 47), p.942c.

“五祖師翁住白雲時。嘗答靈源和尙書云。今夏諸莊。顆粒不收。不以爲憂。其可憂者。一堂數百衲子。一夏無一人透得箇狗子無佛性話。恐佛法將滅耳。”
34) 안거대중 모두가 하안거동안 구자무불성화만으로 공부를 했다는 말인지? 법연이 ‘구자무불성화’를 중시한 만큼 이를 대표적 예로 들어 하안거동안 깨친 학인이 없음을 말한 것인지? 심층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35) 古尊宿語錄 권13의 조주어록을 보면, “어떤 승이 묻기를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가 답하기를 없다. 승이 이르기를 위로는 제불에서부터 개미에 이르기까지 모두 불성이 있다고 했는데 왜 개에게는 불성이 없습니까? 조주가 답하기를 그에게는 업식성이 있기 때문이다.”( 卍續藏 118, p.157)

이것이 조주 ‘구자무불성화’의 본래 형식이다.

그러나 이 공안은 禪宗史傳인 조당집 과 경덕전등록 의 ?조주전?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으며, 조당집 에는 조주의 ‘구자무불성화’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러나 경덕전등록 권7의?惟寬傳?에는 언급되어 있는데,

“묻기를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유관이 답하기를 있다.

승이 묻기를 화상에게도 있습니까? 유관이 답하기를 나에게는 없다.

승이 이르기를 일체중생 모두에게 불성이 있는데 왜 화상에게만 없습니까?

유관이 답하기를 나는 일체중생이 아니기 때문이다.

승이 이르기를 중생이 아니면 부처입니까? 유관이 이르기를 부처도 아니다.

승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무슨 물건입니까? 유관이 답하기를 물건도 아니다.

승이 이르기를 볼 수 있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유관이 이르기를 생각으로 미치지 못하며, 의논해서 얻지 못하므로 不可思議라 한다.”( 대정장 51, p.255a.)

유관선사(興善惟寬, 755-817)와 학인의 문답내용은 본래 조주의 ‘구자무불성화’의 문답과 비교해 보았을 때 문답의 흐름에 차이가 있다.

‘구자무불성화’는 송대에 이르러 선사들이 고인의 공안을 염송하는 풍조가 늘어나면서 진정극문(1025-1102), 오조법연(?-1104), 굉지정각(1091-1157), 대혜종고(1089-1163), 분양선소(947-1024), 설두중현(980-1052) 등 많은 선사들의 주목을 받았으며, 오조법연에 이르러 ‘구자무불성화’를 중시 한 내용이 언급되고 있다. 이처럼 조주로부터 시작된 ‘구자무불성’은 오랜 시간을 거처 여러 선사들에 의해 언급되어 오면서 오조법연에 이르러 조주의 무자가 중시된 사실은 읽을 수 있으나, 참구하게 했다는 확실한 내용 언급은 없다.

36) 대혜년보 와 대혜어록 권 25-30의 서신내용에 의거하면, 조주의 ‘구자무불성’과 관련된 기록은 대혜41세, 운문산에 주할 때 “首座寮一日因遺火燒?簾, 次日告香, 拈狗子無佛性話云, 欲識佛性義, 當觀時節因緣. 雲門大師道, 若是得底人, 道火何曾燒著口. 遂作頌云, 趙州狗子無佛性, 道火何曾口被燒, 昨夜忽然簾上發, 南海波斯鼻焦.”( 禪藏,pp.651-652) ‘구자무불성화’를 처음 언급하였고 42세 때 동문인 불성법태(佛性法泰)를 방문했을 때 “一日師曰, 香嚴悟道頌, 一擊忘所知五字, 曲盡其妙, 後七句皆注脚耳. 佛性曰, 五祖師翁頌狗子無佛性, 只消趙州露刃劍足矣, 餘皆剩語. 二人欣慰, 各以爲然, 邊境旣肅, 遂作江西之行.”( 禪藏, p.654)은 ‘구자무불성’을 두 번째 언급한 것이며 소흥4년 대혜 46세 때 증시랑에게 보낸 서신에 다른 화두와 함께 ‘구자무불성화’를 언급하고 있으며( 대정장 47, p.919a.); 대혜 50세 경산에 주 할 때 부추밀에게 보낸 서신에서부터 대혜는 ‘구자무불성화’ 참구할 것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대정장 47,p.921c.). 대혜가 조주의 무자화두를 강조한 것은 화두참구를 주장하면서 시작된 것이 아닌, 일정한 시간이 지난 후부터(50세부터)임을 알 수 있다. 

?=? "師四十一歲雲居首座寮一日因遺火燒?
37) 대정장 47, pp.649a-669a.

 

원오극근(?悟克勤, 1063-1135)은 오조법연의 법을 계승한다. 당말부터 문자를 중시하던 풍조는 송대에도 계속되어 선종문헌 편집성행에 일조한다.38) 극근의 벽암록 39)출현으로 당시 송고문학은 최고조에 이른다.

극근이전에는 단순히 송고와 염고하는 것이 대부분 이였지만 벽암록이 示衆, 擧公案, 評唱, 頌, 評唱 등 형식으로 집성되면서, 이후에는 벽암록 형식을 답습한 선문학이 성행한다.

 

38) 당시 문학적 소양이 있는 선승들은, 공안의 참뜻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공안에 들어있는 선의 이치를 알기 쉽게 하기 위해서 송고집을 편찬하게 되었고, 이로인해 송고문학(頌古文學)이 발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부 頌文은 공안 본칙과 같이 의미가 매우 함축적이어서 선승들이 이러한 頌文을 이해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가지
게 되었고, 이를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공안과 송문에 재해석을 하는 평창과 격절의 작업이 진행되었는데, 이에 가장 잘 부응하고 있는 것이 宗門의 第一書라 불리는 원오의 벽암록 이다. 벽암록 은 불교문학에 있어서도 매우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러한 공안집에 附加된 재해석은 선의 이치를 우아하고 화려한 문체로 유감없이 발휘하여 언어문자로 전할 수 없는 심법(心法)을 드러내어 부처님과 조사의 뜻에 바로 계합해 들어가게 하는 종문의 방양을 제시해 주는데 그 의의를 두고 있다고 봐야 한다.

39) 碧巖錄-10권, 100칙이 수록되어 있다. 벽암록은 설두중현(雪竇重顯 980-1052)이 경덕전등록 에 전하는 선문답 중 100칙을 가려 여기에 송문(頌文)을 붙인 頌古百則을 근간으로 하여, 원오극근(1063-1135)이 다시 수시(垂示) 평창(評唱) 착어(著語)를 附加하여 宣和7년(1125)에 완성한 것이다. 建炎(1127-1130)年間에 대혜종고가 ‘敎外別傳,不立文字’의 宗趣에 의거해 벽암록을 태워버렸으나, 元代大德(1297-1307)年間에 張明遠에 의해 다시 간행되어 宗門의 第一書라는 尊稱과 함께 지금까지 성행되고 있다.

 

 

극근은 임제의 ‘四料揀’에 의거한 네 가지 지도방식으로 학인을 제접하고 지도한다.40) 극근 역시 임제의 ‘全機大用, 棒喝交馳’지도법으로 학인을 지도한다. 대중에게 주장자와 불자를 들어 보이거나, 탁자를 한번 친다든지,41) 방과 할을 같이 사용하기도 하며, 대화방식인 언교로 학인을 지도한다.42) 이전선사와 다른 것은 상당과 소참법문시 학인에게 공안의 내용을 설명 해 주거나 단독으로 고칙에 염고(拈古)와 평창(評唱)을 하여 선법을 전달하는 등의 지도방식과 고인의 공안을 사용하여 문답을 주고받는 등은 이전선사와 구분이 되는 방식이다.43) 극근이 보는 공안의 역할은 초학자로 하여금 뜻을 집중케 하고 사량을 끊어버리는 것이다.44) 이것은 고인의 공안에 마음을 집중하여 나타난 수행효과를 말한 것이다. 간화수행법이 유도하는 바(화두참구로 일체사량분별을 끊는)와 매우 흡사하다.

 

40) 佛果圓悟眞覺禪師心要 卷상( 卍續藏 69), p.459b.

“拈一莖草作丈六金身, 拈丈六金身作一莖草, 初無勝劣取捨, 惟在當機. 活卓卓地, 有時奪人不奪境, 有時奪境不奪人, 有是人境俱奪俱不奪。出格超宗, 十成瀟灑。”

佛果圓悟眞覺禪師心要 卷하( 卍續藏 69),p.464b.

“古人爲此大因緣, 若師弟子相見, 未嘗不以是擊揚, 至於食寢閒曠, 靡不攝念於此, 是故一言一句, ?杖?喝, 瞬揚擧動, 悉可投機.”

이것은 학인의 근기와 처한 상황에 따라 시설한 것으로 우열을 분별한 것은 아니며, 이러한 지도법과 언어와 신체동작 등으로 가르침을 베푼 것 모두는 학인으로 하여금 깨닫게 하기 위해서임을 분명히 한다.

41) 拂子: 圓悟佛果禪師語錄 卷1( 대정장 47), p.715c.

“喝一喝。以拂子擊禪床。下座。”,

圓悟佛果禪師語錄 卷1( 대정장 47), p. 717a.

“遂?拂子云。大衆還見?。擊禪床云。還聞?。”. 柱杖子:

圓悟佛果禪師語錄 卷4( 대정장 47), p.732c.

 “遂拈?杖卓一下云。大衆。還知落處?。”
42) 대화방식은 이전의 선사들에게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지도방식이다. 극근의 예를 하나 들면 圓悟佛果禪師語錄 卷2( 대정장 47), p.721a.

“陞座示衆云。鉤頭有餌。句裏無私。已泛扁舟。放行綸線。還有衝浪錦鱗?。僧出云有。師云。高著眼。僧擬議。師云 著。…… 到家一句作?生道。僧擬議。師云了。”

43) 圓悟佛果禪師語錄 卷2( 대정장 47), p.720a.

“上堂。僧問。南泉斬猫兒意旨如何。師云。殺活臨時。進云。趙州戴草鞋又作?生。師云。是他屋裏事。”
44) 佛果圓悟眞覺禪師心要 卷상( 卍續藏 69), p.488b.

“初機晩學, 乍爾要參無?摸處, 先德垂慈, 令看古人公案, 蓋設法繫住其狂橫計, 令?思廬, 到專一之地, 驀然發明心非外得,向來公案乃敲門瓦子矣.”  ?= ?

 

대혜종고(大慧宗?, 1089-1163)는 선승들의 자유자재한 선문답과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지도법을 간화선법으로 일원화하여 새롭게 정립하고 이를 흥성시킨 인물이다. 송대는 물론 중국선종사에 있어 선수행법과 지도법에 새로운 전환점을 되는 과소평가할 수 없는 인물이다.

 

대혜가 주창한 간화선은 불조로부터 내려온 공안을 참구하는 선수행법이다. 대혜서 에서 그가 인용한 선승들의 공안은 狗子無佛性, 放下著, 乾屎?, 竹?子, 庭前柏樹子, 一口吸盡西江水, 東山水上行 등이 있으며 이중 조주의 구자무불성화는 대혜가 가장 많이 참구토록 한 공안으로 간화선수행의 대표적인 공안이다.

 

간화선은 화두위에서 의심 일으키는 것을 매우 중시한다. 만약 화두위에서 의심을 일으키지 않고 논리나 의미로 파악하면 이는 사구가 된다. ‘의(疑)’가 없으면 화두공부의 진전을 기대할 수 없으며 깨달음의 경지에도 들 수 없다. 이처럼 화두위에서의 의심은 간화수행의 관건이다.45)

 

45) 한국선종의 多讀書인 禪家龜鑑에서도 ‘의’의 필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설명을 한다. 卍續藏 80, p.738c.

“參禪須具三要, 一有大信根, 二有大憤心, 三有大疑情. 苟闕其一, 如折足之鼎, 終成廢器. 佛云成佛者信爲根本, 永嘉云修道者先修立志, 蒙山云參禪者不疑言句是大病, 又云大疑之下必有大悟.”

 

 

화두위에서 대의심을 일으켜 의정이 순일하면 이 화두는 활구가 되며 ‘의’는 생사심의 근원인 일체사량분별을 단절시켜 구경에 직입케 한다.
그래서 대혜 간화선을 생사심을 끊어버리는 칼이라 일컫는다.46) 화두참구를 통해 곧바로 본구청정심을 체득하는 간화수행법은 장소와 시간에 구애 없이 일상생활 중 시종일관 오직 화두일념하기를 오래도록 하면 자연히 깨닫는다.47) 이처럼 대혜의 간화선법은 어떠한 수행단계도 설정하지 않고 있으며48) 오직 화두참구만을 강조하고 화두참구는 바로 견성의 열쇠이다. 즉 화두는 간화선수행법의 열쇠이지만 자물쇠를 여는 것은 화두위에서 일으킨 간절한 의심이며 이 의심이 순일하여 화두와 내가 하나가 되었을 때 문은 열리고 본래면목을 철견한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대혜 간화선은 하나의 화두를 타파하면 다른 화두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정전백수자’를 타파했는데도 조주의 ‘무자’ 나 기타의 화두와는 별개의 것이라면 이는 화두종류에 따라 깨달음의 단계를 차별화한 것이 된다. 대혜가 비록 ‘무자’화두를 중심으로 간화선을 제창하지만 대혜어록 어디에도 화두종류에 따라 깨달음의 경지가 다르다는 언급은 없다. 대혜가 화두참구를 제외한 기타 간경, 예불, 송주 등의 공덕을 추구하는 수행법은 금기하지만,49) 화두의 우열은 구분하지 않는다. 때문에 하나의 화두를 타파한 것은 기타 모든 화두를 타파한 것이 된다.

 

46) 大慧普覺禪師語錄 卷26( 대정장 47), p.923a.

“僧問趙州。狗子還有佛性也無。州云無。這一字子。便是箇破生死疑心底刀子也。這刀子杷柄。只在當人手中。敎別人下手不得。須是自家下手始得。”
47) 大慧普覺禪師語錄 卷21( 대정장 47), p.899a.

“若有進無退。日用二六時中應緣處不間斷。則噴地一下亦不難。? 但於日用應緣處不昧。則日月浸久。自然打成一片。”
48) 大慧普覺禪師語錄 卷21( 대정장 47), p. 930c.

千疑萬疑只是一疑。話頭上疑破。則千疑萬疑一時破。”
49) 大慧普覺禪師語錄 卷14( 대정장 47), p.869c,

若一向執著看經,禮佛。希求功德。便是障道。”

 

 

대혜에 이르러 새로운 공안은 생성되지 않는다. 오직 불조의 공안을 활용한 ‘간화’라는 수행법을 통해 깨닫게 하는 지도법을 편다. 예전 공안이 갖는 소박한 특성은 없어지고 공안은 깨달음의 방편 역할을 한다.
화두참구라는 수행법으로 일원화되면서 공안의 본래자재한 생명의 힘은 소진되고 간화수행의 방편으로 귀속되어 버린다.50)

 

50) 화두참구수행이 진행과 동시에 공안은 더 이상 수행방편역할을 하지 않지만, 참구이전의 시점에서 보았을 때는 화두는 방편이라고 칭할 수 있다. 화두참구라는 일원화된 수행법으로 공안이 가지고 있었던 자재한 생명의 힘은 소진되고 간화선법에 구속되어 버린다.

 

대혜는 서신을 통한 새로운 방식으로 사대부들을 지도한다. 이전 선사들이 당면하여 선문답을 주고받으며 지도하는 방식과는 사뭇 다르다. 서신은 대혜가 거주한 사찰과 유배처에서 주로 왕래되었는데51) 이러한 지도법이
비롯된 것은 당시 대혜가 처한 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신체행위를 통한 지도법도 할과 방, 주장자, 불자 등 이전선사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사제간의 문답에 선승(先僧)들의 선문답이 인용되는 빈도는 법연부터 점차 증가된다. 이러한 현상은 극근에 이르러 고인의 공안을 채택하고 이에 해석을 붙여 학인으로 하여금 그 뜻을 올바로 이해하게 하는 선문학의 흥성으로 이어지고, 마침내 대혜에 이르러서는 화두를 참구하는 간화선수행법으로 학인을 지도하는데, 공안 활용이 극치에 이르렀다 할 수 있다.

 

51) 대혜서 는 41인과 왕래한 63통의 서신을 담고 있는데, 이중 22인과의 37통 서신은 귀양처가 아닌 곳에서 왕래한 서신이다.

 

 

4. 대혜이후

 

간화선수행은 대혜이후에도 계속되지만 그러나 원대에는 선정쌍수의 경향이 더욱 두드러진다. 중봉명본(中峯明本, 1263-1323)과 그의 제자 천여유칙(天如惟則, ?-1354?) 모두는 ‘선정쌍수’를 제창하며 염불과 수선이 둘이 아님을 주장한다. 명본은 밖을 향해 추구하는 마음을 일으키거나 고인의 언구에 집착하는 것을 반대한다. 또한 당시 방, 할 등을 무분별하게 난용하는 폐단도 함께 비판한다. 임제 당시의 방과 할은 선기를 그대로 보여준 군더더기 없고 생명력이 충만한 것이었지만, 원대에는 신비와 형식주의에 치우치게 되어 임제선의 정신은 차츰 쇠미해 진다. 천여는 淨土或問에서 심지어 선자도 염불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원대에는 서방정토를 희구하는 것을 반대하고 선정을 확실하게 구분했던 임제와 대혜시대의 지도방식과 상반된 수행법으로 학인을 지도한다. 선과 정이 합류되고 선정쌍수 추세는 더욱 심화되는데 이로 인해 이전의 선의 특색은 차츰 그 빛이 퇴색된다.

 

명초(明初)의 초석범기(楚石梵琦, 1296-1370)는 정토뿐만 아니라 ‘선교일치’해야 한다고 제창한다. 명 중엽의 소암덕보(笑巖德寶, 1512-1581)는 ‘무엇이 나의 본래면목인가(?個是我本來面目)?’, ‘萬法歸一, 一歸何處’ 등을 학인에게 참구토록 한다. 또한 염불선도 제창하는데 소리를 내거나 소리를 내지 않고 마음속으로 ‘아미타불’ 염할 것을 주장한다. ‘선정합류’의 추세가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지도법으로 인해 선종이 좀 더 쉽게 민간에 보급 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반면 남종선사들의 ‘무념무주(無念無住)’와 ‘입처즉진(立處卽眞)’의 정신과 입장은 상실되어 버린다.

 

청초(淸初) 순치(順治)와 강희(康熙)시대에 큰 활약을 한 한월법장(漢月法藏, 1573-1635)은 묵조선을 ‘사선’이라 비하하고, 당시 문자선 풍조와 방과 할을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선도 함께 비판한다. 그러나 간화선을 크게 제창하며 ‘乾屎?’과 ‘庭前柏樹子’ 등 화두와 기봉(機鋒)을 의리(義理)로 설명한다. 하지만 화두와 기봉을 의리로 설명하는 것은 선기(禪機)를 예견해 사유와 해석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용납하지 않는 선의 정신과 특성에는 도리어 상해를 입힌다.

 

원, 명, 청의 선종은 ‘선정쌍수’의 수행을 제창하는 ‘선정합류’의 경향을 띈다. 참구하는 화두 역시 변화가 있는데 대혜시대에는 조주의 ‘무자’공안이 대표적인 화두이다. 그러나 명본에 이르러 자주 등장하는 화두는 ‘麻三斤’, ‘柏樹子’, ‘須彌山’, ‘平常心是道’, ‘雲門顧’, ‘無字話頭’ 등이다. 원, 명간에는 ‘萬法歸一, 一歸何處’화두를, 明의 천기본서(天琦本瑞)선사는 ‘誰’字 참구를 제창한다. 명말청초에는 정토법문의 성행으로 선종공안을 참구하는 것에 국한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연지대사는 ‘염불하는 자가 누구인가?’를 간하라고 지도한다. 청대에는 행주좌와에 ‘아미타불’ 일구를 여의지 않고 함께하는 것이 가장 보편적인 수행법으로 지도된다

(일상생활에서 ‘아미타불’ 일구를 여의지 않고 함께하는 수행법은 지금의 대만불교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이처럼 원,명,청의 선사들은 ‘선정합류’뿐만이 아니고, ‘선교일치’의 수행법으로 제자를 지도한다.

비록 공안명칭은 사용되지 않았지만 활발발한 즉문즉답들이 생성되던 시기의 선종은 생명력이 충만하였다. 그러나 공안명칭이 사용되고 공안집이 형성되어 공안에 갖가지 해석이 가해지게 되면서 중국선종은 쇠퇴의 길로 접어드는 명운을 맞는다. 여기에 공안이 하나의 수행법에 예속되면서 선승의 살아 숨 쉬는 선문답들은 차츰 그 힘이 소진된다. 원명청의 많은 선승들은 선에 정토와 교학까지 합류시킨 수행법으로 후학을 지도한다. 육조에서 당대에 흥성했던 선종의 모습은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렵게 된다.

 

 

Ⅳ. 맺음말

 

?공안의 표현형식과 지도법의 변화(1), (2)?에서 석존의 ‘염화미소’로부터 후세에 개정되었다고 하는 서천이십팔조, 중국선종 초조에서 육조, 그리고 육조이후 오가칠종의 중국남종전승계통에서 중국선종공안역사의 흐름을 살펴보았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국선종출현이 곧 하나의 커다란 공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선사들에게 오가던 자유자재한 선문답들이 시대를 거듭하면서 후대선사들의 선문답주제가 되고, 이로 인해 새로운 공안들이 계속 만들어진다. 그러나 순박한 문답형식의 선승 공안은 문자선이라는 새로운 풍조가 성행하면서 선문학의 시대를 맞아 새로운 형태로 이해되고, 송대 대혜에 이르러서는 화두를 참구하는 간화라는 수행법이 확립되면서 새로운 공안출현은 어렵게 되고 공안 활용은 극치에 이른다.

 

육조까지의 공안형식은 순수 그대로 불성의 불생불멸을 드러내는 것이었으나, 마조와 그 1세의 공안표현형식은 서민적이지만, 행위기능이 더해진 세련된 지도법으로 평상심을 강조한다. 그러나 임제시대에는 학인의 근기와 상황에 따라 공안을 분별하여 지도하는 지도법이 행해지며, 선소는 고인의 공안에 운문(韻文)형식으로 설명을 가하고, 대혜에 이르러 공안은 간화라는 선수행법으로 인해 이전의 활발발한 표현형식은 찾아보기 어렵게 된다. 화두참구라는 하나의 수행법으로 본뜻을 드러내고자 하지만, 조주의 무자화두를 중심으로 한 화두참구만을 강조하는 지도법만 되풀이 된다. 대혜이후에도 이전의 몇몇 공안만을 가지고 참구하는 수행법에 의거한 지도방식이 계속되지만 원대부터는 문자선의 형식에서도 벗어나지 못하고 새롭고 독특한 지도법 또한 제시하지 못하며, 여전히 공안을 참구하는 참구법으로 학인을 지도한다. 그러나 참구하는 대상과 선수행법은 ‘선정쌍수’와 ‘선교일치’의 경향이 두드러지고, 교에 의거해 선을 설하거나 선에 의거해 교를 설하는 등, 마조와 임제 시의 선풍은 점차 소진된다.

 

임제에 이르러 선사들 사이에 오가는 행위문답은 그 과격함이 최고조에 이른다. 임제는 선문답으로 수선자를 전후좌우 어디에도 물러나고 나아갈 수 없게 몰아넣은 다음 갑자기 때리거나 할을 하여 제자들로 하여금 단번에 깨달음의 경지에 들게 하는 지도법을 펼친다. 대만의 인순스님은 이러한 임제의 과격하고 강렬한 지도법은 사제 간에 계승되어 내려온 문풍이며, 또한 지역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고 있는 개성과도 관계가 있다고 분석한다.52)

 

52) 印順, 中國禪宗史 (臺灣: 正門出版社, 1992), pp, 410-414.

즉 홍주종의 주류인 마조로부터 그 이래로 과격한 경향이 나타나고 있는데, 마치 사자가 큰 소리로 우는 것과 같으며, 사람의 마음을 두렵게 해 숨을 죽이게 하는 기풍에는 강직한 힘이 가득 차 있으며, 이러한 기풍을 간직한 홍주종의 주류가 후에 임제종을 이루었고, 임제는 학인의 물음에 그의 종풍의 연원을 표명하고 있다. 홍주와 석두문하 선사들의 지역배경을 보면, 홍주계 선사들은 북방인이 비교적 많으며 강직한 선풍은 북방의 지역특성을 대표하고, 석두문하는 장강유역이남(長江流域以南)사람이 많으며, 온화한 선풍은 남국의 특징을 대표한다고 분석한다.

 

임제이전의 선사들이 방편이 없는 방편으로 학인을 지도하였다 면 임제부터는 학인의 근기와 상황을 나누고 공안을 구분하여 그에 맞는 지도법이 채택되고 수행법이 제시되는 독특하고 다양한 지도법이 학인에게 시행된다. 법연부터 신속하고 칼날처럼 예리하며 힘이 넘치는 강직함은 보이지 않는다. 대혜의 간화라는 일원화된 수행법과 지도법에서는 이전의 날카로움 속에 자애로움이 숨 쉬며 예측할 수 없는 선승의 언교와 무애자재한 행위를 통한 지도법은 다시 기대하기 어렵다. 무애자재한 선수행법이 일색을 띈 수행법으로 획일화됨으로 인해 수행법과 지도법상 선의 활발하고 자재한 특성은 상실된다.

 

즉문즉답형식은 모든 공안의 기본형식이다. 그러나 시간이 거듭되면서 선사들의 지도법에 사물과 행위가 더해지다, 뒤에는 더욱 과격해진 신체동작 등 행위문답으로 발전하면서, 여기에 언어문자로 지도하는 방법이 가세하고, 결국에는 화두참구라는 선수행법으로 학인을 지도한다.

 

선문에서 사제간 오가는 언어는 일반적 입장에선 특수한 의미를 함유한 것처럼 보이지만, 글자 그대로 뜻을 보아도 답은 묻는 바가 아니어서 동문서답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이러한 지도법은 도리어 학인을 깨닫게 하며, 말로 전달하는 일반적인 교육이 미치지 못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이미 상대개념적 사유의미를 벗어났거나 혹은 지성(智性)의 단계에 체류된 언어시설이라고는 하지만 절대진리를 언급하기에는 적합하지 않기에 선자들은 보편적으로 ‘언설을 세우지 않는다.’, ‘언교를 중시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준칙을 삼는다.

그래서 언교가 아닌 다른 길을 모색하던 선지식은 본분사를 보이는데 더욱 직접적이며 효과적인 지도방법을 채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방’과 ‘할’ 등 행위지도방식을 자가의 종풍으로 삼는다. 임제종의 종풍도 이와 마찬가지다.

 

공안에 어떠한 의미를 부여하거나 의리로서 해석되기 이전의 공안은 사제간의 충분하고 성실한 대화로 스승은 제자가 절박하고 간절한 자신만의 의문을 이끌어내게 해 주고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여건까지 마련해 주며, 제자는 이러한 의문이 본인에게서 나온 절박한 상황에 봉착한 문제이기에 자신의 신명을 버리는 정진으로 결국에는 본래면목을 철견하고야 만다. 이러한 과정에서는 새로운 공안들이 무수히 만들어졌으며 이것은 후대선사들의 수행과 지도의 방양이 되었다. 하지만 대혜에 이르러 고인의 공안위에서 의심을 일으키도록 하고 또한 공안에서 일으킨 의심을 자기문제로 만들어가게 하는 지도방식은 참구자 자신으로부터 용솟음치듯 우러나온 절박한 의문이 아니기 때문에 주어진 화두에서 자신의 절박한 문제가 되어 간절한 의심을 가지기까지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간화십종병통도 이러한 과정에서 나온 병폐이다.

주어진 공안을 참구하다보니 공안 역시 계속 생성되지 못하고 결국 중국선종은 원대에 들어서면서 ‘선정쌍수’의 지도법이 성행한다. 현재 한국선종이 가지고 있는 문제도 이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고인의 공안을 신성시하고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며 일부 공안만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눈 밝은 선지식은 학인자신만의 절박한 의문을 일으키도록 충분한 대화로 지도해 주어야 한다. 물론 이러한 과정에서 공안 또한 자연스레 드러나고 계속 생성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었을 때 한국선종은 중국간화선수행병폐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며 하나의 수행법에 대한 맹목적 집착이 아닌 한국 선승의 특색을 갖춘 살아 숨 쉬는 간화선수행이 새로이 정립되고 뿌리내려 후대 선승들의 수행과 지도의 방양이 될 것이다.

 

이상에서 공안표현형식과 선사들의 지도법의 변화를 살펴보았다. 이는 공안의 외적표현형식만을 정리하고 그 변화를 알아본 것으로 공안의 특성상 공안이 함유하고 있는 내용과 사상적 측면으로는 깊이 들어가지 못했다.

 

불조가 부득이 공안을 활용한 것은 후학이 문자언어를 초탈하고 잘못된 길로 들지 않고 바로 심인을 깨닫도록 하기위해서이다. 우리는 불조의 이러한 심체를 잊어서는 안 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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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慧年譜, ( 佛光大藏經, 禪藏).
柳田聖山 著, 吳汝鈞 譯, 中國禪思想史 (臺灣:商務印書館,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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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修平 著, 中國禪學思想史綱, (中國:南京大學出版社, 1996. 2版).
釋聖嚴 著, 公案, 話頭, (臺灣:法鼓文化, 1998).

 

 

[Abstract]

 

The form of expression and teaching methods in development of Kong An (2)

 

Jung, Jin-hie(HeaDarl)

 

Zen cultivators forbade the use of language and written words, but in order to lead learners into the state of enlightenment, they used simplified language and a huge variety of behaviors to achieve the goal, and this remains until nowadays. We can learn from the sutras that, before the use of the name “Kong An” and the compilation of the anthologies of Kong An, earlier monks taught the students though the questions and answers, in this way, had brought forth generations of clairvoyant Zen teachers. This fact points out that the convenient instruction through Kong An existed in the past, but without the name. The compilation of anthologies of Kong An popularized this kind of instruction, which became even more popular when Kanhwa Zen was established.

 

The instructive method that distinguishes Kong An wes first developed by Imje, but Seon-so of Bunyang distinguished them in greater detail. This was also utilized to check the state, the opinions and the trueness of the learners. However, this method was confining the unbound and lively Kong An with lifeless frames, and thus the instruction itself was more and more formalized. The trend of Munza Zen(Zen by words), which was against the intention of Bunyang, defied the principle of the independence from words, and resulted in the monotonous instructions realized by later Zen cultivators.

 

The teachings through questions and answers of earlier Zen cultivators were called “kong An”, and anthologies of Kong An are compiled. At the time of Tae Hye, he advocated the Kanhwa Zen practice by consulting those Kong An, but this idea did not last long either. In Yuan, Ming and Qing Dynasties, they instructed their followers with a was of practice as a mixture of Zen and the pure Land. The simple and acute style, which was the feature of the Zen in Tang Dynasty, was nowhere to be found in the Zen later on.

 

 

Key words:

The from of Kong An, the instruct method of Kong An, department of Ma Jo, Nam Jong, Kong 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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