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 귀하게 여기는 세 가지 보물, 즉 삼보(三寶)가 있는데 바로 불법승(佛法僧)입니다.
불은 부처를 뜻하고, 법은 부처의 가르침, 승은 부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부대중을 뜻합니다.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모신 통도사를 불보사찰, 팔만대장경을 보관한 해인사를 법보사찰,
16국사를 배출한 송광사를 승보사찰이라 합니다.
해인사는 802년(애장왕 3)에 순응(順應)과 이정(利貞) 대사가 창건했다고 합니다.
순응은 신림(神琳)의 제자이고, 신림은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義湘)의 법손입니다.
그래서 해인사는 의상의 화엄종을 계승하는 사찰이 분명하며 해인(海印)이라는 용어 역시 화엄경의 해인삼매에서 따온 말로,
해인삼매는 바다에 모든 사물이 골고루 비춰지지 않는 것이 없는 것처럼
부처님의 마음 속에는 분별의 파도가 없이 맑고 고요하여 모든 사물이 한 번이 비추어져
모든 현상이 빠짐없이 나타나는 부처님의 삼매 경지를 말하며,
해인삼매에 들어가서는 능히 모든 중생의 마음의 행을 분별하여 일체 법문에 다 슬기로움을 얻는다고 합니다.
1. 팔만대장경
석가모니 부처의 열반 후 그의 가르침을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제자들에 의해 처음으로 경전이 만들어집니다.
붓다 사후 첫 번째 우기(雨期)에 라자그리하에서 제자들이 모인 가운데
한 제자가 여시아문(如是我聞-나는 이렇게 들었다)로 시작하면 다른 제자들이 그 내용이 옳다고 인정하면
그 내용을 나뭇잎에 새긴 것이 처음의 경전입니다.
이때의 기록된 내용은 경(經)과 율(律)이었으며, 이 모임을 1차 결집이라 합니다.
약 100년이 지난 뒤 바이샬리에서 2차 결집, 기원전 247년경 아소카왕 재위 때 3차 결집이 있었다고 합니다.
4차 결집은 기원 후 00년 경 카니슈카왕 때라고 하는데,
3차 및 4차 결집은 시대와 모임에 대해 견해 차이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경과 율 이외에 후대의 승려나 논사(論師)들이 해석을 한 것을 모아 기록한 것이 팔만대장경의 내용입니다.
고려는 거란, 여진, 몽골 등 북방민족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현종 때 현화사라는 절을 창건하고 대장경을 새기고자 하였습니다. 현종 2년(1011)경에 시작하여 현종 22년(1031)에 경전을 새긴 것은 일단락되고,
이후 문종(1046~1083) 초기에 다시 새기기 사작하여 선종 4년(1087)에 초조대장경은 완성되었습니다.
* 학자들마다 시기적인 차이가 있다고 주장
문종 17년(1063)거란의 대장경을 받았으며,
의천(義天,1055~1101)은 불경에 대한 해석서들을 주로 정리하여 다시 경판을 만들었는데 이를 속장경(續藏經)이라 합니다.
초조대장경과 속장경은 대구 팔공산 부인사에 보관하였는데 고종 19년(1232) 몽골의 2차 침입 때 불타버리고 맙니다.
초조대장경이 불타 버린 후 부처님의 힘으로 몽골을 물리치고자 다시 대장경을 새기고자 대장도감을 설치하고,
고종 23년~38년(1236~1251), 16년 동안 대장경을 조성하니 이것이 팔만대장경입니다.
강화도에서 주로 새기고, 강화 선원사에 보관하였다가 조선 초기 서울 인근의 지천사에서
다시 해인사로 옮겨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대장경을 봉안하는 건물은 2개이며 남쪽은 수다라장, 북쪽은 법보전이라고 하며, 땅에는 숯과 횟가루, 찰흙을 넣어 일정한 습도를 유지하게끔 하였으며, 판전 창문도 격자창으로 하였고 아랫창과 윗창의 크기를 달리하여 통풍을 원활하게 하였고, 두 건물 사이 기다란 통로는 바람이 통하는 길로 역시 통풍을 위해 둔 장치라 할 수 있습니다.
6.25 당시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 해인사를 폭격하라는 명령이 있었으나 김영환 대령은 이 명령을 이행하지 않아 대장경이 살아남았다는 얘기는 다 아는 사실.
2. 해인사의 문화재
해인사를 대표하는 문화재는 팔만대장경과 판전이며, 이외에도 길상탑, 반야사지 원경왕사비,
대비로전의 비로자나불, 희랑대사좌상 등이 있습니다.
대비로전의 비로자나불상은 불상 내부에 883년(中和 3)에 조성됐다는 기록이 나와
우리나라 목조불상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인정받으며, 2022년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되었습니다.
희랑대사좌상 역시 2020년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되었는데, 희랑은 해인사 희랑대에서 수도 정진하였고,
고려 태조 왕건의 스승이자 후삼국 통일에 도움을 준 인물입니다.
실제 생존 인물을 재현한 좌상으로는 거의 유일하다 할 것입니다.
신라 진성여왕 8년(895)에 건립되어 현재 보물로 지정된 길상탑은 해인사 일주문 밖 약 50m 앞에 있으며,
문수보살의 가피로 혼란한 시기에 도적들에게 목숨을 빼앗긴 56명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훈혁이 조성한 탑입니다.
기단부의 생략과 변형이 심하며, 1966년 도굴된 탑지와 소탑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데,
탑지는 최치원이 적었으며, 소탑 157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원경(元景)왕사는 대각국사를 따라 송나라에 갔다가 귀국하여
숙종 9년(1104)에 승통(僧統)이 되었으며, 예종의 스승이기도 합니다.
귀법사에 머물다 입적하자 ‘원경’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김부일이 비문을 짓고, 이원일이 글씨를 적었다고 합니다.
3. 해강 김규진
유네스코 문화유산인 팔만대장경을 봉안한 장경판전을 보러갈 때 해인사 일주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해인사 일주문의 현판 글씨는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의 서예가 해강 김규진의 글씨입니다.
그래서 서예가 해강을 간략히 알아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해강 김규진 본관은 남평(南平). 자는 용삼(容三), 호는 해강(海岡)·만이천봉주인(萬二千峰主人)·백운거사(白雲居士). 8세 때부터 외삼촌인 서화가 이희수(李喜秀)에게 글씨를 배웠고 18세 때 중국에서 8년간 서화를 공부하고 돌아왔다. 귀국 후 서울로 올라와 왕세자인 영친왕의 사부(師父)가 되어 글씨를 가르쳤고 1902년경 일본에 가서 사진기술을 익혀 1903년 소공동 대한문 앞에 '천연당'(天然堂)이라는 사진관을 열었다. 그후 1913년 다시 그 사진관 안에 '고금서화관'(古今書畵觀)이라는 최초의 근대적 화랑을 개설하여 표구 주문과 함께 서화매매를 알선하기도 했다. 1915년 5월에는 '고금서화관' 신축건물에 다시 '서화연구회'(書畵硏究會)라는 3년 과정의 사설 미술학원을 열어 후진양성과 전람회를 개최했다. 이때 학생들의 교재로〈서법요결 書法要訣〉·〈난죽보 蘭竹譜〉·〈육체필론 六體筆論〉등을 펴냈다. 한편 '서화미술회', '서화협회'에 창립발기인으로 참가했으며 조선총독부 미술전람회의 서예부 심사위원을 맡기도 하는 등 근대서화계몽운동에 적극적인 활동을 계속하다가 66세로 죽었다. 서예의 각체에 두루 능하며 특히 활달한 대필서로 이름을 날렸다. 금강산 구룡연의 20m에 달하는 미륵불 예서, 내금강의 천하기절(大下奇絶) 초서, 법기보살 해서 등 각서가 남아 있고 전국의 궁전·사찰·현판에 많은 글씨를 남겼다. 그중에서도 해인사의 '가야산해인사'(伽倻山海印寺), 부벽루의 '금수강산'(錦繡江山), 서울의 '보신각'(普信閣), '희정당 대조전'(熙政堂 大造殿) 등이 유명하다. 그림으로는 1920년 창덕궁 희정당에 그린 벽화 〈총석정절경 叢石亭絶景〉과 〈금강산만물초승경 金剛山萬物肖勝景〉이 있는데 화려한 색채와 사실적 묘사로 그의 대표작이라 할 만하다. 문인화가답게 호방한 필치가 돋보이는 묵죽이 뛰어나며 근대적 화풍이 엿보이는〈폭포〉·〈말〉등의 작품도 있다. 전국 사찰에 가장 많은 글씨를 남겼으며, 죽농 안순환의 사군자와 함께 적은 것도 많다. 부여 고란사, 강화 전등사, 공주 마곡사, 순천 송광사, 장성 백양사, 완주 송광사와 위봉사, 영천 은해사, 금산 보석사, 서울 개운사 대각루 등의 현판은 죽농과 함께 만든 작품이며, 이외에도 완주 송광사 관음전, 극락전, 강원 고성의 건봉사 불이문, 상주 남장사 ‘노악산 남장사’, 하동 쌍계사 ‘삼신산 쌍계사’, ‘선종대가람’, 영천 은해사 불이문, 서산 개심사 ‘상왕산 개심사’, 태백산 영은사, 영월 금몽암, 대구 금룡사, 포항 오어사, 예산 수덕사와 정혜사, 서울 경국사 등에도 해강의 글씨가 있다. 물론 양산 통도사에도 죽농과 함께 한 작품이 종무소에 있으며, 일주문의 주련 ‘불지종가 국지대찰’도 해강의 글씨이다. |
4. 김봉렬의 해인사 (글)
20세기에 나온 건축 선언 가운데 ‘건축의 주인은 공간이다’라는 말이 있다.
조각과 건축이 다른 점은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내부공간을 갖는다는 점이다.
따라서 생활의 거의 모든 부분이 실내에서 이루어지는 서양건축이나 현대건축에 꼭 들어맞는 말이다.
그러나 한국의 전통건축은 상황이 달랐다.
웬만한 고찰의 대웅전은 20평이 채 안 되어, 실내에 들어가 법회를 열 수 있는 인원은 불과 40명 정도이다.
그러나 대웅전 앞의 마당은 몇백 명이 들어설 수 있는 넓이이다.
기능적으로도 우선 마당과 같은 외부공간이 내부보다 쓸모가 있다.
실내 공간을 갖는 건물은 각 사찰이 그다지 크게 다르지 않다.
예를 들어 순천 선암사의 대웅전이나, 부안 개암사의 대웅전은 시대적으로도, 규모로도, 형태적으로도 유사한 건물이다.
그러나 외부공간은 사정이 다르다. 선암사 마당은 여러 전각들로 감싸진 아늑한 마당이고,
개암사는 아무 건물 없어, 오로지 시원하게 터진 마당에 대웅전만 우뚝한 모습이다.
가람들은 물론이고, 한국의 전통 건축물들을 특징있게 구별해 주는 것은 건물이 아니라,
건물들로 이루어진 외부공간의 모습이다. 따라서 ‘한국건축의 주인은 외부공간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만큼 한국건축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외부공간이라는 말이다.
내부공간과 외부공간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지붕이 있는 공간인가 아닌가의 차이다.
외부공간은 하늘을 지붕으로 삼는다. 지붕이 없는 공간을 의미한다. 따라서 내부공간과는 다른 공간적 성격을 갖는다.
‘1:10 이론’에 의하면 내부공간과 외부공간의 스케일 차이는 거의 10배에 달한다고 한다.
예컨데, 3m 짜리 방안의 크기감을 외부에서 느끼려면 30m 정도의 마당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만큼 외부공간은 넓은 크기를 필요로 한다.
팔만대장경판을 소장하여 법보사찰로 유명한 가야산 해인사로 가 보자.
우선 일주문부터 천왕문까지 전개되는 진입부가 인상적이다.
길고 곧게 펼쳐진 길의 양쪽에는 높은 전나무, 자작나무들이 가로수 열을 이루고 있다.
이들 나무는 단순한 자연물이 아니라, 인공적으로 심어져 진입로의 공간감을 형성하는 나무들의 벽이다.
이 벽들이 좁고 긴 진입 공간을 만들며, 이러한 형태의 공간을 ‘복도형 공간’이라 부른다.
구광루를 올라가면 대적광전 앞에 네모반듯한 마당이 펼쳐진다. 해인사의 중심 마당이면서 각종 법회와 행사가 벌어지는 곳이다.
대적광전과 누각, 승방들로 감싸진 이 마당은 외부라기보다는 ‘방밖에 있는 방’, 즉 반(半)내부적 마당이다.
한국건축에서 가장 발달한 외부공간의 전형적인 모습이며, 이처럼 정사각형에 가까운 외부공간은 ‘방형 공간’이라 부른다.
최종적으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장경판전으로 올라간다.
해인사의 장경판전은 세계적 보물인 팔만대장경판을 보관하기 위해 지은 기다란 2개의 창고건물이다.
대장경판뿐만 아니라, 이 창고건물 역시 국보적 가치가 있는 건물이지만,
그보다 더, 두 개의 건물 사이에 이루어진 긴 마당 역시 국보적인 마당이다.
우선 이 마당은 좌우 폭에 비하여 깊이가 얕다. 하늘에서 보면 가로:세로의 비가 4:1이 넘는다.
보통 마당들이 정사각형에 가까운 것에 비하여, 이 마당은 옆으로 긴 이상한 형태의 마당이다.
그러나 이 이상한 마당이 있기 때문에 기다란 두 개의 판전 건물이 효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이 마당은 앞뒤의 판전을 산맥으로 삼아,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계곡이다. 계곡에는 골바람이 분다.
이 마당의 골바람은 판전 내부로 들어가 실내에 신선한 공기를 공급하여, 대장경판들이 습기에 부식되는 것을 막아준다.
또한 정방형의 ‘방형 공간’이나, 좁고 긴 ‘복도형 공간’에 익숙한 우리의 공간 감각을 여지없이 해체하면서,
낯설고 충격적인, 그러나 안정되고 감동적인 공간을 제공한다. 가야산 해인사의 건축이 감동적인 이유는 건물들에 있지 않다.
일주문, 천왕문은 어느 사찰에서나 볼 수 있는 것들이고, 대적광전은 짜리몽땅한 지붕을 가진 불완전 건물이며,
최근에 중건된 구광루는 우왁스럽고 사납다. 그러나 하나하나의 외부공간들은 완벽하게 구성된 공간의 진수를 맛보게 한다.
그러면서도 변화무쌍하다. 해인사는 진입로의 ‘복도형 공간’, 주마당의 ‘방형 공간’, 그리고 경판전의 ‘역(逆)복도형 공간’ 등,
다양한 모습의 마당을 다 가지고 있다. 해인사의 건축적 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다.
첫댓글 요즘 건축학 전공한 교수님들의 눈으로 본 문화재(사찰)의 배경을 더듬고 있어요..
안영배 교수, 김봉렬 교수님 책은 나만의 시리즈로 묶어서.
문화재(사찰의 전각들, 탑...)가 있는 곳의 공간을 자연과 이어주고, 어떤 공간을 왜 비워줬는지...등에 대해 봅니다. 건축을 전공, 실제로 현장 작업한 눈으로 보는 사찰의 구조는 현대의 건축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있는 것은 편리함을 양보해 애써 살리고, 복잡한 구조에서 비움을 찾아내고.
자연과 함께 공존하며 사람을 살리는 건축을 보며 선조들의 지혜에 감탄합니다.현재 환자(국민)생명을 인질로
한치의 양보없는 행정이나 소위 배운 사람들의 행태와 비교됩니다.
처음 답사 때는 사람을 배웠는데 지금은 그 사람들 속에 들어가 그 사람들의 건축학적?인 부분까지 그냥 그림을 봅니다.
새삼 지식을 넣을 두뇌는 용량 오버된지 오래되어 에러 자주 발생해 그림이라도 익혀두면 나도 그 속에서 살 것 같아서.
답사 자료 준비하느라 애써주셔서 고맙습니다^^ 가르치려면 먼저 공부해야하니
그래서 선생 아니겠습니까.ㅎㅎ
덕분에 이것저것 챙겨 봅니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4.03.15 01:56
김봉렬은 한 때 좋아했었죠.
답사는 너무 할 게 많아요.
역사, 사상, 건축, 미술 등 넓게 보면 깊이가 얕아지는 ...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