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6월 11일 성체 성혈 대축일>
생명의 양식, 구원의 음료
“온 누리의 주 하느님 찬미 받으소서. 주님의 너그러우신 은혜로 저희가 땅을 일구어 얻은 이 빵을 주님께 바치오니 생명의 양식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성체는 생명의 양식이다. 물론 인간은 양식을 통해 생명을 유지한다. 그러나 성체를 생명의 양식이라고 할 때, 이는 단순히 ‘밥’의 의미만은 아니다. ‘사람은 빵으로만 살지 않는다.’(마태 4,4; 루카 4,4) 여기에서 ‘살지 않는다.’라는 말은 ‘살지 못한다.’라는 의미도 포함한다. 사람에겐 빵 그 이상의 양식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아니, 사람은 빵 이상의 존재임을 알려주는 듯하다.
주님의 성체는 분명 거룩함과 존엄함의 존재이긴 하지만 마치 성체를 토속신앙의 명약처럼 여기는 태도는 매우 유감이다. 마치 성체를 영하는 것만으로 무슨 대단한 일이 일어날 것처럼 여기는 것도 한번 성찰해 볼 일이다. 은총은 하느님의 초대와 인간의 응답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으로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성사’다. 다시 말해서 성체의 은총에는 우리 쪽에서의 ‘응답’이라는 실천적 행위가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응답’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면서 성체만 받아 모신다고 될 일이 아니다.
오해하지 마라. ‘성체를 영하는 것’만으로도 성사의 은총은 주어진다. 그러나 그것은 유아적 신앙 수준이다. 어린아이는 떠먹여 주는 양식을 받아먹으며 성장한다. 엄마의 양육 대상일 뿐이다. 하지만 성장하면 엄마의 친구도 될 수 있고, 나아가 엄마의 든든한 자녀 더 나아가 엄마를 부양하는 자녀가 될 수 있다. 신앙생활도 이와 같다. 예수님께서도 “이제 나는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벗이라고 부르겠다.”(요한 15,15)라고 하시지 않았던가? 우리가 성체를 모시는 것은 ‘종’으로서가 아니라 ‘벗’으로서다.
“온 누리의 주 하느님 찬미 받으소서. 주님의 너그러우신 은혜로 저희가 포도를 가꾸어 얻은 이 술을 주님께 바치오니 구원의 음료가 되게 하소서.”
주님의 성혈은 구원의 음료다. 구원의 음료라고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으니 성체가 생명의 양식이라고 할 때 그 생명은 하느님의 생명 곧 구원과 연결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성체가 그냥 빵과 같은 음식이 아니듯 성혈 또한 단순한 음료가 아니다. 미사 때 보통 사제가 대표로 마시지만, 신자들 역시 사제를 통해 성혈을 영하는 것이다. 성체와 성혈은 우리 신앙의 보배다.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려주는 ‘계시’이자, 우리가 어떤 사람들인지 드러내 주는 ‘계시’다. 그런 까닭에 성체 성혈 대축일은 미래지향적인 교회의 축일이다. 교회는 이 세상에서 매일의 미사를 통해 ‘생명의 양식’과 ‘구원의 음료’를 나누는 축제를 거행한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루카 22,19; 1고린 11,24-25)
무엇을 행하라는 걸까?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성체와 성혈로 만들어서 신자들에게 나누어주는 일일까? 아니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으며 그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사랑이었음을 기념(기억)하며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듯이 ‘마지막 만찬’을 계속 반복하는 일일까? 우리가 전례를 열심히 반복하면 예수님의 성체와 성혈로 생명, 구원이 이루어지는 걸까? 마치 성찬의 전례를 ‘신비화’하고 ‘절대화’하는 것은 아닐까?
오해하지 마시라! ‘성찬의 전례’는 그 자체로 거룩하고 하느님의 구원 계획안에 있는 절정의 ‘성사’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만 외운다고 되는 일이 아니듯이 전례만 반복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미사가 신앙생활의 중심인 것은 사실이지만 ‘미사’를 너무 절대시하는 것은 아닐까? 미사가 중심인 것은 미사가 ‘절대적’이고 ‘영험한’ 어떤 것이기 때문이 아니다. 미사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 우리 신앙생활의 핵심이 되기 때문이다. 그 핵심은 진행되는 전례가 아니라 그 전례가 담고 있는 뜻에 있다. 그 뜻을 모르고 그 뜻을 살아가지 않으면서 반복되는 전례는 마치 ‘전례주의자’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미사를 몇 번, 영성체를 몇 번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단순히 숫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이상 또 아는 것도 없다. 숫자의 크기만큼 ‘정성’이 더 들어간 것? 이 정도가 아닐까? 그래서 그렇게 ‘정성’을 들였으니 뭔가 이루어질 거야? 그런 것인가? 이런 표현이 주는 불편한 느낌에 빠지지 말고 한번 진지하게 ‘성찰’해보자. 해마다 반복되는 전례지만 언젠가 우리가 죽으면 더는 할 수 없는 전례이지 않은가? 예수님께서는 “이제 나는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벗이라고 부르겠다.”(요한 15,15)라며 우리를 한껏 세워주셨는데 고작 우리는 저 아래서 금으로 수송아지를 만들어 미친 듯 뛰며 춤추는 백성(탈출 32,8)이어서는 곤란하지 않을까?
오늘 제1독서는 하느님께서 광야에서 너희에게 만나를 먹이신 까닭은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신명 8,3)을 알려주시려는 것이라고 전한다. 제2독서는 “형제 여러분, 우리가 축복하는 그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1코린 10,16)라고 더욱 분명하게 전하고 있다. 말씀으로 사는 일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동참하는 일이 어찌 전례를 반복하는 것만으로 충분할까?
그럼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매일같이 전례를 반복할까? 오늘 복음은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요한 6,57)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려준다. 말씀대로라면 우리는 성체를 받아먹음으로써 예수님에 의해 살게 된다는 의미다. 성체를 받아먹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예수님에 의해 살게 된다는 것은 예수님을 통해 참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기도 하지만 예수님처럼 우리도 각자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살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전례를 반복하여 행하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모든 것을 위한 일이다. 전례는 바로 ‘너희는 이를 행하여라!’라는 말씀으로 완성된다. 곧 우리의 삶을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전례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전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의 삶을 행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성체와 성혈을 나누는 삶이 되어야 하고 그리스도의 성찬례는 무한하신 주님의 자비와 사랑으로 우리를 기르신다. 그런 까닭에 미사는 신앙생활의 중심이 되고 성찬례는 절정의 성사가 되는 것이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시편 8,5)
“주님, 사람이 무엇입니까? 당신께서 이토록 알아주시다니! 인간이 무엇입니까? 당신께서 이토록 헤아려 주시다니!”(시편 144,3)
* 고딕체는 미사 통상문에서 발췌한 글임.
첫댓글 주님과 함께 그길을 따르기 위해 날마다 성체를 모시고
살아갈 힘을 얻을수 있으니 행복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