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아미 맵다 하고 쓰르라미 쓰다 하네 山菜를 맵다드냐 薄酒를 쓰다드냐 우리는 草野에 묻혔으니 맵고 쓴줄 몰라라 -이정신(李廷藎)
지은이에 대하여 이런 해석을 하는 사람도 있다. 조선 후기의 가객 자는 집중(集仲), 호는 백회재(百悔齋), 벼슬은 현감을 지낸 것으로 되어 있으나 자세한 일생은 알려져 있지 않다. 창에 뛰어났고, 사설시조 2수를 포함하여 13수의 시조가 청구영언, 가곡원류, 화원악보 등에 실려 전한다. 청춘에 보던 거울 백발에 곳쳐보니 청춘은 간듸업고 백발만 뵈고야 백발아 청춘이 제갓스랴 네 쫓즌가 노라라는 작품이 가장 유명하다. 다만 이정진(李廷鎭)이란 인물과 혼동되어 다루어지는 경우가 있다.(청구영언의 잘못으로 보인다.)
작품에서 오는 느낌으로는 큰 벼슬은 하지 않은 사람 같다 시조세계에서도 신분이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그 비유가 참말로 기가 막히다 쓰르라미 역시 매미 과에 속하는 같은 매미다 젊은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여름 날 미루나무 꼭대기에서 울어쌌는 바둑알 만한 작은 매미다. 유독 쓰르라미는 나무 꼭대기에 달라붙어서 온 동네를 흔들어대며 야멸차게 울어대는 매미 중에서도 소프라노 톱가수다. 당차고 시원시원하다. 같은 매미지만 야트막한 나무에 매달려서 답답하게 맴맴 거리는 놈과는 사뭇 차원이 다르다
두 가지의 매미 울음소리를 놓고 이렇게 훌륭한 비유를 하고 있다.
어차피 시는 비유문학이다. 비유만 잘 해도 절반은 성공이기 때문이다 문학창작 이론에 보면 그 비유법이란 것이 다양하고 복잡하지만 대충은 직접 간접 활유 같은 비유법이 보통일 수 있다. 그런데 지금 발표되고 있는 현대시조를 대하고 보면 직접비유는 진부한 것이고 간접비유라야 품위가 있고 뜻이 깊은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듯하다. 그런 인식이 지나친 나머지 작품의 뜻 전달이 잘 안 되고 애매모호한 표현으로 두루뭉실 넘어가고 있다. 자유시와 비교하여 구체적이지 못한 것이 가장 두드러지는 현상으로 시조를 안 읽는 이유 중의 큰 이유가 된다.
문득 사봉선생의 말씀이 생각 난다 누가 이름 없는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고지고 뭐 어쩌구저쩌구 했나 보다 이름 없는 생명은 없다. 찾아서 공부를 하라는 말씀이시다. 그래야 구체적이다.
위의 작품은 구태여 어려운 것도 없으면서 그렇다고 해서 결코 쉬운 시는 아니다 그러면서도 절절한 감동으로 온다 매미가 우는 의성어를 정치적 사회적인 병리현상으로까지 환치 시키고 있다. 백성들이야 굶던 말던 한시절 좋은 자리에 있는 기득권자를 여름 한철 매미로 설정을 했다. 콩밭 매는 아낙네는 베적삼이 흠쩍 젖고 있는데 양반네의 웃음 소리가 쓰르라미 매운 울음으로 산천을 흔들고 있다. 게다가 중장 도입에 있어 초장에서 놓았던 맵고 쓴 울음소리와 산채나물과 맛이 조금 떨어지는 술 즉. 서민들이 먹는 술 박주와 잘 엮어 매고 있다. 우리는 지금 써 놓은 시를 공짜로 쉽게 읽고 있지만 이만한 글을 숙성 시키는 일은 그리 쉬운 작업이 아니면서 오늘 날까지 애송되는 佳句다.
그 뿐이 아니다. 기어코 종장에 가서 마침내 오만불손한 기득권층의 따귀를 통쾌하게 후려 치고 있지 않은가. 철썩 소리가 아직도 들려 온다. 버리지 못하는 나의 强骨 기질에 딱 어울리는 작품이다. 초야에 묻혀서 살아가는 민중들은 맵고 쓴 것을 내 놓고 타박할 수 없다. 무엇이고 다 입맛에 달고 단 맛으로 살아가고 있는 노동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맛을 구분하기조차 어려운 처지가 평민들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쓰디쓴 박주 한 잔에 안주로 먹는 산채나물 맛이야 말로 꿀맛이 아니던가.
詩調가 아니고 時調라야 하는 까닭이 오히려 고시조에서 더욱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시대적으로 정치적으로 계절의 감각만이 아닌 당대의 문제들을 거침없이 표현하고 있다. 나라를 빼앗기고 어렵던 시절이나 자유당 독재를 거쳐 군사독재를 살아오는 동안에도 시조문학은 자연이나 관조하고 인생을 논하는 복고풍으로 머물러 있었다. 우리는 그런 면에서 이호우의 바람벌 이 후 매우 부끄러운 역사였다. 역시 시조는 단수 쓰기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얼마나 깔끔하고 감동적이어서 외우기가 쉬운가 외우기가 쉬운 시라야 널리 보급될 수 있다. 그리고 더 써야 할 말이 아직 남아 있다면 사설시조를 간택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지금과 같이 단수 연작 쓰기를 앞으로도 계속 한다면 시조문학 발전은 보장하기 어렵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