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쉬어서 간다/박주일-
나무들도 쉬어서 간다.
‘마디’다.
쉬어서 간 자리
피곤이 고여 있다.
물기가 모여 있다.
스스로 다독거리는 흔적이 보인다.
사람에게도 마디기 필요하다.
조용한 생각들이 모여있다.
<2>-물속에 빠져있는/박주일-
물속에 빠져있는
하늘과 구름
구름은 끝내 물 밖으로 나가버리고
산 어깨 하나가
물 안에 들어왔다.
자작나무며 떡갈나무도 데리고
왔다.
구름이 다시 제자리에 왔다.
구름 또한 산새
울음 몇 점까지 몰고 왔다.
내 생활의 일부가
물속에 있다.
<3>-내 가까이 있는 것들은/박주일-
내 가까이 있는 것들은
말이 없다.
다만 표정이 있을 뿐이다.
거울 안으로
귀뚜라미 울음이 스며있다.
귀뚜라미 울음 몇 줄이
보인다.
내 가까이
입을 벌리고 있는 건
약봉지들이다.
알이 고운 것들은
독의 빛깔이다.
바닥으로 굴러 떨어지는
빨간 알약 하나.
알약의 온몸이 독기에 꽉 차 있다.
그래도 삼켜야 한다.
기다리고 있는 알약
세 개.
<4>-유리창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박주일-
유리창이 서 있는 부분
그 면적만 하얗다.
이미 방은 어둠으로 꽉 차 있다.
어둠이 오다가
유리창의 폭만큼 남겨두고 나머지는
까맣게 먹어버렸다.
나는 시방 그 먹힌 쪽에
꼼짝없이 갇혀있다.
가슴의 절반은 이미
가을 쪽으로 기울어져 있고
참새들은 벌써 제 집들로
가버리고
어둠이 모두를 덜어버리고
조여든다.
유리창도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저물어
안 보인다. 뼈대만 앙상하다.
<5>-아득하구나/박주일-
생각 끝에
소나기가 몰래 왔다.
이제 그대도 알겠지.
철없던 시절
실없는 일이란 것을 알겠제.
가슴 한 쪽이 폭 패이고
무성하던 숲이 폐허가 되고
겨울이 왔구나.
철없이 또 눈발이
간혹 내릴 것이네.
그렇게 되면 다시
잊힌 것들이 조금씩 살아나서
눈발 속으로 끼어들 것이다.
오, 살아있는 한
<<박주일 시인 약력>>
*1925년 경북 경주 출생.
*1953년 경희대학 문학부 국문과 4년 수학.
*전 대구여고 교사, 경주 선덕여상업 교감 역임.
*1969년『현대문학』지에 시가 추천 완료되어 등단.
*시집:『노적(鷺荻)』(공저)\,『미간(眉間)』『모양성(牟陽城)』『신라유물시초(新羅遺物詩抄)』
『는개 그리고 달빛』[물빛 그 영원][가솔송아, 꿈결같구나]등.
*경상북도 문화상(문학부문), 금복문화예술상(金福文化藝術賞) 등 수상.
*대구문학아카데미 대표. [20년]
*2009년 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