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아브라함
롬 4:1-8
1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7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롬 4:1-8 / [아브라함의 믿음] 우리 유대 민족의 조상인 아브라함만 해도 믿음으로 구원받는 이 문제로 어떤 경험을 하였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를 받아들이신 것이 과연 그가 선한 일을 했기 때문입니까? 정말 그렇다면 그는 그 일을 자랑하고도 남을 만하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브라함은 내세워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3) 그래서 성경에도 ㄱ) 여호와께서는 이렇게 믿는 아브라함을 흐뭇하게 생각하시고 그를 인정해 주셨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ㄱ. 70인역 창15:6) 4-5) 그러니 아브라함이 하늘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은 것은 그가 선한 일을 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구원은 값없이 주는 선물입니다. 만일 선한 일을 해야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면 어떻게 구원을 값없이 주는 선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일한 대가로 얻으려고 하는 사람에게 구원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비록 죄인일지라도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자기들을 구원하여 주실 분은 오직 그리스도뿐이심을 믿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해 주십니다. 6) 다윗은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이 하나님께 ㄴ) `죄 없는 자'라고 선언받는 행복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ㄴ. 글자대로는 `의롭다') 7) ㄷ) `얼마나 복되랴. 허물을 용서받은 이들은. 죄지었으나 다시 가리움을 받은 이들은. (ㄷ. 시32:1-2) 8) 얼마나 복되랴. 마음이 간사하지 않고 여호와께서 죄를 묻지 않는 이들은.'
바울은 3장에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행위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의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3:22)를 믿는 믿음에 있음을 선언했습니다(3:28). 이는 유대인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선언이었습니다. 이제 바울은 아브라함과 다윗이라는 이스라엘의 중요한 인물을 통하여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복음을 증명합니다.
아브라함도 다윗도(1-8) 바울은 우리의 행함이 아닌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선포하며 아브라함과 다윗을 예로 듭니다. 이 두 사람은 유대인들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이 두 사람이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면 바울의 주장은 참이 됩니다. 아브라함이 의롭다함을 받은 것은 창세기 15장 6절의 말씀처럼 그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3). 모세보다 먼저 있는 사람이기에 모세의 율법을 지켜 의롭다함을 얻지 않습니다. 또한 다윗은 어떻습니까? 그가 아무리 이스라엘을 신앙적으로나 국가적으로 강성한 나라를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그는 하나님 앞에 큰 범죄를 저지른 자입니다. 다윗은 시편 32편 1-2절의 말씀을 통해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신 자에게 베푸시는 복을 노래합니다. 아브라함도 다윗도 그들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하심을 얻었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은혜(2, 6-8) 바울은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두 가지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그 첫째는 우리의 행위를 자랑치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롭다하심이 행위에 있었다면 우리는 그 의를 자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의롭다 하심이 오직 믿음에 있기에 그 믿음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 앞에 감사만 있을 뿐이지 자랑은 없습니다(2). 둘째는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복이라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다윗을 통하여 이것이 복이라는 사실을 세 번이나 반복합니다.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았다”는 것은 우리의 그 어떤 행위가 아님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복임을 알았습니다. 바울 또한 다윗의 이 고백을 통하여 이것이 복임을 선언합니다. 우리의 품삯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요, 오직 은혜로 주어진 것이기에 우리에게는 자랑이 아니요, 감사와 감격만이 있을 뿐입니다.
적용: 행위가 아닌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이 사실이 그 어떤 것보다 복임을 고백하십니까? 오늘 이 감사를 함께 나누어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믿음은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확신 속에서 나오는 존재의 용기입니다. 절벽에 물이 차고 넘치면 폭포가 되듯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존재들은 폭포수와 같은 힘과 용기가 솟아납니다. 부자는 가장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난초는 사랑을 받으면 더욱 그윽해지고, 벼 이삭도 농부의 사랑을 받으면 한 뼘 더 자라게 됩니다. 사랑을 받으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가장 큰 부자가 됩니다.
< 설 교 >
은혜로 얻은 위대한 선물
로마서 4:1-12 / 이규현 목사
1.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2.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3.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4.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5.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6.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7.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8.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9.그런즉 이 복이 할례자에게냐 혹은 무할례자에게도냐 무릇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 10.그런즉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요 무할례시니라 11.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2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그러하니라
로마서의 대주제는 구원론입니다. 구원의 문제는 신앙의 핵심일 뿐 아니라 우리 인생에 가장 궁극적이고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평소에 먹고 살기에 바쁠 때는 지나쳐버릴 수 있지만,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구원의 문제는 우리 인생을 쥐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됩니다. 이 문제가 잘 해결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절박한 환경에 부딪히면 두 갈래로 나뉘게 됩니다. 구원론의 핵심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이신칭의’ 교리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것을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이 우리 신앙의 기초에 잘 세워지지 않으면 우리 신앙이 아름답게 세워질 수 없기 때문에 다시 확인하고 확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진 구원이 성경에 근거한 안전한 것인가를 계속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칭의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여는 첫 관문입니다. 죄로 인해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롭게 회복되는 출발지점에 칭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정확하게 이해해서 기초를 다지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창세기 15장의 아브라함과 시편 32편의 다윗의 이야기를 가지고 나옵니다. 유대인들은 구약의 인물 중에서 아브라함보다 더 큰 자가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랑스럽게 여겼던 아브라함도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었는데, 그러면 우리는 어떻겠냐고 율법의 행위를 통해 구원을 얻고자 했던 유대인들을 향해 이 문제를 제기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율법이 있기 전의 인물입니다.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행위가 아니고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만약에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결단코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실 아브라함의 행적을 더듬어 보면 그의 삶에서 결정적인 실수들도 많고 행위로 보면 결함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바울은 아브라함이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졌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롬 4:3)」 아브라함마저도 행위에 있어서는 자랑할 것이 없다면 다른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강조합니다. 유대인들이 강조하는 할례도 마찬가지입니다. 할례가 마치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여기지만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기 이전에 이미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아무리 할례를 받았다고 해도 그것으로는 하나님에게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재차 못을 박고 있습니다. 앞서서도 다루었지만 유대인들은 혈통적인 것, 문화적인 접근을 통해 구원을 자랑했습니다. 외적인 조건들을 내세우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신앙에서 외적 조건들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외적인 조건들이 우리의 구원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해줄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도 주일예배에 참여한다는 것은 외적인 행위입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외적인 의식을 치르고 있는 내면에서 정말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의식에 합당한 내용을 담고 있느냐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동안에도 겉으로는 예배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다른 것들을 숭배하는 죄를 범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지만 그 제단이 우상숭배의 제단으로 바뀐 적이 많았습니다. 그러니까 의식 자체, 외적인 조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안에 진실된 내용을 담고 있는가를 계속 확인하지 않으면 우리의 외적인 열심에 스스로 속을 수 있습니다. 교회를 오래 다녔으니까, 혹은 열심히 봉사를 했기 때문에 나는 괜찮은 신자라고 여기고 있습니까? 과연 그런 것들이 나의 구원의 보장이 될 수 있을까를 질문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도 그렇습니다. 교회에서 행하는 공식적인 의식에 참여했다는 것 자체가 구원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진짜 예수를 믿었는가, 실제로 예수를 인격적으로 받아들이고 영접한 경험이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진짜 그런 내용을 가진 사람에게 그 의식을 행할 때 그 의식이 의미가 있습니다. “나 유아 세례받았어!”라며 마치 세례가 구원의 보증이 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군대에서 세례를 받은 경우 찝찝해서 다시 받아야 될 것 같다고 말합니다. 다시 받아도 되고 안 받아도 됩니다. 물에 들어가는 침례를 받느냐 장로교식으로 점례를 받느냐도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의식자체는 핵심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담고 있느냐입니다.
의외로 장로교 교인들이 구원론에서는 약합니다. “오늘 밤 하나님이 부르신다면 천국에 들어간다는 확신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받아주신다면 무엇 때문에 당신을 받아주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대답이 많이 나뉩니다. 우리가 가지는 확신의 근거는 나의 외적인 조건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믿음이 부족해서 안 될 것 같다고 말합니다. 나에 의해서 구원이 결정되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좋을 때는 구원을 얻은 것 같고 믿음이 부족하고 떨어졌을 때는 구원을 얻지 못한 것처럼 불안한 것입니다. 어느 정도 믿음이 좋아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나의 믿음의 상태를 나의 구원의 근거로 삼고 있다면 구원에서 늘 불안한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단에 쉽게 무너집니다. 바울이 계속 강조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말하는데,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면 믿음은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행위가 되면 그것은 나의 자랑과 나의 의가 됩니다. 그러면 당신은 믿음이 없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나를 구별하기 시작합니다.
본문에서 바울이 말씀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2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3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롬 4:2~3)」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는 무슨 말입니까? 이것을 신약 에베소서 2장 8~9절 말씀이 해석해줍니다. 「8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우리가 구원을 얻는 근거는 은혜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의 통로입니다. 믿음도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이고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자랑할 수 없다는 것이 신약의 해석입니다. 내가 믿은 것이 아니라 믿게 하신 것이고, 믿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설득에 굴복한 것입니다. 어느 순간 내가 눈을 떠보니 예수의 십자가 앞에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내 안에 믿음이라는 것이 들어온 것입니다. 행위로서의 믿음이 우리를 구원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로 나갈 수 없는 죄인들입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이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서 우리를 건져내 주신 것입니다. 구원의 원인은 나의 믿음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하고, 우리에게는 자랑할 것이 없고 오직 감사와 찬양을 할 것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도덕적으로 깨끗하게 살아왔다고 장담합니다. 교회 출석도 열심히 하고 성품도 좋고 구제할 일이 있으면 거금도 내어놓습니다. 인간적으로는 상당히 멋진 분입니다. 그런데 안으로 들어가 보면 초점이 자신의 행위에 있습니다. 도덕적으로 탁월하게 살아가는 자신의 삶 자체가 의와 자랑이 되는 것입니다. 외형적으로는 매력적이지만 그것은 십자가를 거스르는 삶입니다. 그런 것을 믿음 생활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대상이 분명해야 하는데 초점이 그리스도여야 하고 십자가 앞에서 진단을 받아 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이 계속 강조하는 것은 우리의 행위, 혹은 우리의 상태는 구원에 전혀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철석같이 믿고 있다 해도 그 확신의 근거가 성경을 근거로 하고 있지 않다면 헛된 것이 됩니다. 요즘에는 무엇을 하든지 비밀번호를 많이 사용합니다. 비슷한 번호를 누른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정확하게 요구하는 번호를 정확히 충족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알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구원은 우리 편에서 고안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편에서 만드신 것, 성경에서 말한 구원의 길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앞으로 로마서가 우리에게 도움을 줄 것입니다. 구원에 관한 한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방식을 우리가 정확하게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의롭다 하심을 받는 은혜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5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6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롬 4:5~6)」 여기에서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세상과 전혀 다른 원리입니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롬 4:4)」 세상에서는 내가 수고한 것에 대한 보상은 당연한 것입니다. 누구나 일을 하고 삯을 받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배우는 법칙은 공짜는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철저히 계산이 되고 있습니다. 누군가 나에게 사랑을 베풀어도 그것은 언젠가 갚아야 하는 빚이지 은혜는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새로운 방식으로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셨습니다. 이것이 은혜라는 원리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시편 32편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일한 것이 하나도 없고, 내어놓을 만한 것도 없고, 주장할 것이 하나도 없는데 하나님의 편에서 일방적으로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여기에 은혜의 원리가 드러납니다. 단지 하나님의 편에서 일방적으로 베풀어주신, 의롭다 해주신 이 은혜를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롬 4:7)」 여기에서 말씀하는 복이 무엇입니까? 분명히 우리에게 허물이 있지만 하나님으로부터 가리움을 받은 것입니다. 죄를 죄로 인정하지 않고 죄가 없는 자로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칭의입니다. 죄가 있지만 그 죄를 가려주셨다는 것입니다. 가려주셨다는 의미가 참 재밌는 표현입니다. 칭의는 죄인이 의인이 되었다는 뜻인데 의로움이 없는 우리를 의인으로 여겨주신 것입니다. 칭의는 법적인 용어인데 우리가 분명히 죄인이지만 ‘이제 죄인이 아니요 의인’이라고 하나님이 선포하신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의인이 되었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당장 달라진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연약하고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주시겠다는 선포를 하신 것입니다. 의로운 것이 아니라 의롭다고 여겨주신 것입니다.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무슨 잘난 것이 있거나 내세울 수 있는 행위가 있었던 것이 전혀 없다는데 주목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편에서 내려주신 은혜일뿐입니다. 그 모든 은혜는 이미 갈보리 언덕에서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해주셨기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우리의 행위를 보시지 않고 하나님이 아들을 통해 입혀주신 그 의의 옷으로 우리를 대하십니다. 우리를 보실 때 죄인으로 보시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을 보는 것처럼 바라보십니다. 이것이 칭의입니다. 마치 대법원에서 무죄를 최종적으로 선포해버린 것과 같습니다. 더 이상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인류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불법을 사해 주시고 죄를 가려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우리가 죄를 또 짓고 짓는다 할지라도 다시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것은 나를 의롭게 여겨주시는 그 신분 때문입니다. 십자가가 우리의 당당함의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중요합니다. 우리의 구원의 문제가 흔들릴 때는 십자가로 나가야 합니다. 십자가를 붙들면 어떤 것으로도 흔들릴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종종 살다 보면 죄를 짓게 되고, 불안해집니다. 특히 사탄이 “너 또 죄지었지? 그러고도 직분자야? 그러고도 교회 다니냐?”, “그러고도 예배를 드리냐? 너가 그러고도 구원을 얻을 것 같으냐?”라며 계속 우리의 행위의 문제를 가지고 흔듭니다. 놀라운 것은 행위를 건드리면 흔들리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한 것은 죄지은 것밖에 없는데 어떻게 얼굴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나?”, “지은 죄가 많아서 안 될 것 같아. 이런 내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나?”라고 고민에 빠집니다. 그래서 칭의 교리가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에게 의로운 것이 있어서가 아니고, 하나님이 제시하신 그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우리 행위의 문제로 흔들리거나 쩔쩔 맬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전에도 죄인이었고, 지금도 죄를 짓고 있고, 앞으로도 죄를 지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솔직하게 ‘나는 죄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다음이 중요합니다. “나는 죄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십자가에 대신하여 죽으셨다”라고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진 의를 믿기 때문에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면 우리의 모든 죄는 더 이상 우리와 상관이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우리의 모든 죄가 그리스도에게로 완전하게 넘겨져 전가되었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에는 백성들이 죄를 지으면 짐승을 끌고 제사장에게 갔습니다. 제사장에게 넘겨주기 전에 죄지은 사람이 동물에 손을 얹어 죄를 동물에 옮기고 그 동물이 대신해서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늘 죄를 지으니까 죄를 지을 때마다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단번에 영원하고 완전한 속죄의 제사가 드려졌습니다. 그분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나의 모든 죄가 전가되었습니다. 더 이상 우리가 처리할 죄가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죄가 우리를 정죄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대선언입니다. 누가 토를 달거나 재심을 요청할 수 없는 완전한 판결입니다. 복음서에 현장에서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이 예수님께 붙잡혀 왔을 때 모두가 돌을 들고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시고 땅에 글을 쓰시는 동안 모든 사람들이 다 도망을 쳤습니다. 어떤 해석으로는 예수님이 땅에 죄목을 썼을 것이라고 합니다. 율법의 잣대로 한다면 모두가 죄인입니다. 들킨 죄인과 안 들킨 죄인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용서의 선포입니다.
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할 일은 이 복을 받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우리의 행위가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기만 하면 됩니다. 이제 나의 불법과 죄들이 가려졌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은혜는 그저 받는 것입니다. 허물이 가리움을 받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우리의 셀 수 없는 죄들을 어떻게 가릴 것이고, 가렸다고 해도 또 짓는 죄들은 또 어떻게 가릴 것입니까? 회개한다고 용서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십자가를 통해 과거의 죄와 미래에 지을 죄까지 다 용서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회개를 요구하시는 것은 더 깊이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한 초청일 뿐이지 용서의 수단은 아닙니다. 더 이상 죄의 문제 때문에 시달리며 살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의롭다고 여김을 받는 것은 우리의 행위와 전혀 상관없이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완전한 용서를 믿어야 합니다. 죄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은 너무도 놀라운 일입니다. 시편 32편은 해결되지 않은 죄가 얼마나 무서운 영향을 미치는가를 말해줍니다.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시 32:3)」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시 32:4)」 이 시는 다윗이 간음사건으로 나단 선지자의 지적이 있기 전까지 얼마나 지옥같이 살았는가를 보여줍니다. 결국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뼈가 쇠합니다. 그 어떤 스트레스보다 가장 강력한 것이 죄로 인한 짓눌림입니다. 다윗의 표현처럼 짓누름을 당하니 어떻게 살겠습니까? 이것은 중병과 같습니다. 죄로 인한 죄책감과 수치심이 우리를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무서운 것은 이것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단절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용서와 구원의 은혜를 선포해도 하나님이 이것은 덮어주지 않으실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안에 스스로 큰 담을 쌓은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 빠지면 예배나 기도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인간의 죄 문제는 존재의 밑바닥으로부터 불안과 두려움이 밀려오기 때문에 삶이 메마르고 옥죄어서 정상적인 삶을 살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으로부터 허물의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워지는 은혜를 입은 것은 복 중의 복이라고 합니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시 32:11)」 죄의 짓눌림이 벗겨지니까 즐거워 어쩔 줄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 중의 은혜요 복음입니다. 자유를 얻은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회개를 하고 마음을 고쳐먹고 살아가려고 해도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든지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시겠다고 하면 모든 문제는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이미 이루어놓으신 일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은혜에 의하여 의인으로 바꾸어주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의 말씀처럼 우리가 성소를 향해 담대히 나아가는 은혜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 앞에 나아오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었기 때문에 어떤 모습으로라도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는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뻔뻔해도 괜찮습니다. 이 뻔뻔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 주어진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죄로 인해 가로막고 있는 모든 어둠이 벗겨지고 의롭다 여겨주시는 새로운 신분의 변화를 받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이 놀라운 일을 행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편에서는 얼마나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셨는가를 알아갈수록 그 은혜에 반응하고 예배와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집중하여 모든 허물을 가려주신 이 복을 믿음으로 받아 누리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새로운 출발을 팡파르를 울리며 너무나 기뻐하고 감사하며 찬송해야 합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려주셨고, 모든 죄짐을 풀어주시며, 모든 것을 가려주신 그 은혜에 감사하면서 의인된 신분에 걸맞은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믿음을 의로 여기시는 하나님
로마서 4:1-17 / 성흥모 목사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를 “불확실성의 시대”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1977년 미국의 경제학자인 ‘존. K. 갈브레이스’가 발간한 저서로 불확실성의 시대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는 경제학자로서 지난 200년간 경제의 발전을 지켜보면서 경제사와 사회사상사를 저술하였습니다. 그는 책에서 예전처럼 확신에 찬 경제학자도, 자본가도, 제국주의자나, 사회주의자도 존재하지 않는 현대를 가리켜 “불확실성의 시대”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일찍이 지나간 날에는 사람들에게 확신을 줄만한 경제이론을 가진 이들이 있었고 분명한 경제관을 가지고, 독보적인 철학을 가진 경제학자들이 있어서 무엇을 판단하는 기준을 제시해주었는데, 오늘날에는 그처럼 확신을 갖게 하는 철학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경제민주화’라는 말을 하는데, 우리나라에 경제학자들이 없어서 정치가들이 경제민주화라는 말을 하는지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매우 불확실한 시대에 틀림없습니다. 우리에게 장밋빛 청사진을 제시하고 밝은 내일을 약속하는 이들이 있는데, 불확실한 공약에 불과합니다.
이용규선교사가 하버드라는 명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몽골 땅에 선교사로 갔습니다. 그가 ‘내려놓음’이라는 책을 써서 유명해졌습니다. 이 책을 읽은 많은 사람들이 “이용규박사는 하버드대학을 졸업하였으니 많은 기회가 있었을 텐데도 몽골 선교사로 갔어. 이 사람은 많이 내려놨구나! 나는 그렇게 못 해왔는데”라고 이해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무언가 높은 자리에 있다가 낮은 자리로 내려왔다는데 독자들은 감동을 받은 것 같습니다. 더 올라가기 위하여 내려놓아야 하는 것처럼 이해한 것이 안타까웠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용규선교사는 그의 다음 책 “더 내려놓음”에서 진정한 내려놓음의 목적을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인생이란 버려야 할 것을 버리고, 내려놓아야 하는 것을 내려놓고, 비워야 하는 것은 비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채우기 위하여 내려놓고 비우는 것입니다. 단순히 비우고 내려놓기 위하여 목적이 아닙니다.
불교나 뉴에이지 사상에서도 우리에게 비우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가르침은 비우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합니다. 인생이란 비우는 것으로, 무소유로 살아갈 존재는 아닙니다. 우리는 보다 더 확실하고 분명한 것을 얻고, 그것으로 채우기 위하여 비우고 내려놓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채우기 위하여 나를 비우고, 세상의 것을 비워야 합니다. 그것이 비움의 목적입니다. 불분명한 것을 버리고 분명한 것으로, 불확실한 것을 비우고 확실한 것으로 채우고 가꾸기 위하여 비워야하고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을 받았고,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으로 채워질 때에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행복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목사로서 교인들에게 “구원받으셨습니까?” 하고 물으면 무슨 구원파 목사인가 하여 조심스럽기는 합니다. “구원받았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으면, “예 구원 받았습니다”라고 대답해요. 그러면 “언제 구원받았느냐”라고 다시 물어오면 “예, 저는 1949. 1. 16에 구원받았습니다.” “그 날이 언제입니까?” “그 날은 제가 이 세상에 태어난 날입니다. 저는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택하신 자녀로, 구원받은 자녀로 태어났습니다.” 이렇게 확신을 가지고 나가면 어떤 사이비 집단의 유혹이라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자신이 구원받은 것에 대한 확신과 간증과 성경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고후 13:5에 보면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구원이란 남의 이야기나 남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구원이기에 나 자신을 시험해보고, 확증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정말 믿음 안에 있는가? 아니면 의심이 가는 부분이 많지만, 대충 믿어두는 것은 아닌가? 이것이 나의 구원이요, 이것이 나의 간증이라는 분명한 것이 있어야 합니다.
찬송가와 성가곡을 많이 작사하신 분으로, 미국의 감리 교인인, 맹인이신 홰니 제인 크로스비(Fanny Jane Crosby 1829-1915) 여사가 있습니다. 홰니 여사는 평생에 9000편의 찬송시를 작사하였습니다. 그는 두 눈을 보지 못하는 가장 불행한 처지에 있었지만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연약한 여성의 몸으로 95세를 살았습니다. 우리 찬송가에 23곡이 수록되어 있는 최다의 작사자입니다.
“다시 태어나도 맹인으로 태어나고 싶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대답은 “저는 다시 태어나도 맹인으로 태어나고 싶습니다. 제가 천국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눈을 뜰 때에 그 처음 만나게 되는 분이 우리 주님이시기에 저는 저의 눈을 가지고 맨 처음 바라볼 수 있는 분이 주님이시기를 소원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처음 눈을 뜰 때에 우리 주님을 바라보겠다는 그의 소원이 참으로 귀하게 여겨집니다. 천국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눈을 뜰 때에 예수님을 바라보겠다고는 하는 그의 말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예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 때문에 가슴이 떨리고, 애타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아침에 눈을 뜨면서 예수님과 함께 눈을 뜨고, 저녁에 하루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어갈 때에도 주님과 함께 누워 잠을 잔다는 생각으로 예수님과 동행하고, 예수님은 내 안에, 나는 주님 안에 거하는 그런 신실한 삶을 살아가야겠습니다. 우리는 일생 예수님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시고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여 주셨습니다.
홰니 여사가 53세 되는 때, 그의 친구이며, 메트로풀리탄 생명보험회사의 설립자요, 초대 사장인 죠셉 내프의 부인이신 P.P. 내프여사가 찾아왔습니다. 그는 아마추어 작곡가였는데, 자기가 작곡한 곡에 맞추어 시 한 편을 써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내프 여사는 피아노에 앉아 한 곡을 흥얼거리며 곡을 연주하였습니다. 그 곡을 듣는 동안 홰니 여사는 지난주일 목사님으로부터 들은 설교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설교의 내용을 정리하면서 한 시를 썼습니다. 홰니 크로스비는 즉석에서 시를 써주었고, 내프여사가 치는 곡에 붙여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 찬송이 우리들이 즐겨 부르는 찬송이 되었고, 세계 많은 성도들이 애송하는 찬송입니다.
“예수를 나의 구주삼고, 성령과 피로써 거듭나니, 이 세상에서 내 영혼이 하늘의 영광 누리도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나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하리로다”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삼아야 하는데,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거듭나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비록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우리의 영혼은 하늘의 영광을 누리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간증이 되어야 하고, 우리의 찬송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성령과 피로써 거듭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이 마음의 평안 정도가 아닙니다. 자식이 잘 되고, 사업이 잘 되라고 믿는 정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조금 믿어보다가 아닌 것 같으면 슬그머니 놓아버리고, 그래도 믿어두는 것이 더 좋은 것 같으니 계속 믿어보자는 그런 정도여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어떤 확신보다도 구원받은 것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겠습니다. 구원받은 증거가 분명해야 됩니다. 받은 것 같기도 하고, 어떤 목사가 죄를 회개하라고 하면 아직도 구원받지 못한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과 감정을 혼돈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말씀에 의지하여 구원받았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성도로 십자가의 도리를 굳게 잡아야 됩니다. 구원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머잖아 의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앞에 설 것을 생각하면 두렵기가 그지없고, 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이 죄라는 것은 우리의 체면을 잘 살려주고, 우리를 얽어매는데, 이런 죄에 빠지면 이성이 마비되고, 점점 더 어리석은 죄악에 빠지고 맙니다. 죄를 다 회개하고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고 싶습니다.
“깨진 유리창 법칙”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빈 건물의 깨진 유리창 하나를 방치하면 연이어 옆의 유리창도 깨진다고 합니다. 이 상황이 계속되다 보면 그 건물은 범죄의 온상이 되고, 인근에 범죄가 속출하면서 일대가 무법천지로 변하게 됩니다. 빈 건물의 깨진 유리창 하나를 방치하였는데, 그 지역이 황폐해지고 공동화되고, 범죄의 온상으로 깡패들이나 출입하게 되고, 사람 살 곳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연구한 사람이 있는데, 미국의 범죄학자 제임스 윌슨과 조지 켈링이란 사람이 1982년에 발표한 이론입니다. 이것을 “깨진 유리창 이론-Broken Window Theory라고 말합니다. 미국의 라토가스 대학의 겔링 교수는 이 ‘브로큰 윈도우’ 법칙에 근거해서 뉴욕 시의 지하철 흉악 범죄를 줄이기 위한 대책으로 낙서를 철저히 지우는 것을 제안했다. 낙서가 방치되어 있는 상태는 창문이 깨져있는 빈집이나 방치된 자동차와 같은 상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뉴욕시에는 무려 5년 동안에 걸쳐 6000대의 지하철 차량의 모든 낙서를 지우면서 범죄를 줄이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지하철 범죄의 75%를 낮출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범죄를 100% 없앨 수는 없습니다.
우리들이 그렇게 죄를 아파하고 버리려고 하고, 회개하지만, 우리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죄, 이 죄가 문제입니다. 죄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습니다. 죄가 우리를 정죄하지 않는 그런 나라에서 살고 싶습니다.
우리들이 세례를 받은 것은 나의 구세주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영접하여 구원받은 확신을 가질 때 그 확신을 근거로 하여 세례를 받습니다.
우리 개혁교회를 이룩하신 요한 칼빈 선생님은 세례란 “하나님에 의하여 그의 자녀로 삼으시는 거룩한 인침이며,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접붙임으로써 새로운 출발”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칼빈이 내린 세례의 정의는 대단히 잘 된 것으로 세례를 그 이상 설명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유명한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세례란 영적 공동체에 참여하는 새로운 존재인 한 인간의 결단이다”로 했습니다. 새로운 존재(New being)라는 말이 아주 중요합니다. 사도바울은 고후5:17에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에 새로운 피조물, 새로 지음을 받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우리들이 세례 받은 것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있다고 하면 세례 받은 것도 구원받은 것에 대한 확증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내가 구원받았기에 세례 받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가 구원받은 것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본문을 연구해보겠습니다. 먼저 1-2절의 말씀을 읽어봅니다.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란 분은 믿음의 조상이요, 매우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의 행위가 깨끗하고 정직하고 죄가 없으므로 하여 의롭다 하시는 말씀을 들었다고 하면 그는 정말 자랑스러운 사람이요, 자기를 내세울만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단언합니다.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게 되었더라면 그에게는 자랑할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도 우리와 같이 성정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3절의 말씀을 잘 알아야 합니다. 3절입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바 되었느니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더니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 그것을 의로 여겨주셨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고 하십니다. 이신칭의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칭함을 받는 교리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아보려면 창세기15:6을 잘 보아야 합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고상한 인격을 가지고 행동이 바르고 하나님 앞에 경건하거나 공의로운 사람이기에 그를 의롭다고 받아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에서 대하여 말하거나 연구할 때는 어떤 사건 하나만을 가지고 말하지 말고, 그의 전체를 놓고 보아야 한다고 합니다. 유명하신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아브라함의 신앙에 대하여 말할 때에는 창세기15:6의 한 말씀만 가지고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전체적이고 보편적인 의미로 이해하라고 말합니다. 루터가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언제나 하나님을 믿을 준비가 되어 있었고, 언제나 믿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창12장에서 고향을 떠나는 것이나, 창22장에서 나오는 100세에 얻은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고 복종하여 결단하는 것을 보면 믿음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의를 순종의 행위에서 찾으려고 하는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순종을 보시고 의롭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을 믿는 것,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의롭게 보시고 있습니다.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는 약속의 말씀 때문에 어떤 기대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으로 하나님을 믿었다는 말을 잘 알아야 합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이 말씀에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었다”는 말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만 믿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였습니다. 좋으신 하나님, 내 생각보다 하나님의 돌아보심을 믿었습니다.
오늘 본문 3절에서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긴 바 되었느니라” 여기에서 ‘믿음’과 ‘의’는 동등한 관계로 봅니다. “여긴다”는 말은 평가한다, 간주한다, 계산한다는 말입니다.
4-5절을 봅니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노동자를 예로 들어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일을 시켰으면 돈을 주어야 합니다. 일한 사람에게 노임을 주는 것을 마땅한 일이지 은혜가 아닙니다. 노동자가 일을 하였으면 채권자가 되고, 주인은 당연히 돈을 주어야 하는 채무자가 됩니다. 내가 일해서 돈을 받는 것처럼 내가 열심히 믿고 노력하여 얻은 구원이라고 하면 하나님이 주셔서 받은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낸 구원이지,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는 구원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구원은 노력한 결과가 아니고 은혜로 주시는 구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고, 믿음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엡2:8-9의 말씀이 이것을 잘 정리하고 있습니다. 엡2:8-9절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고 했습니다.
6-8에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고 하셨습니다. 불법이 사함을 받았습니다. 죄를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므로, 우리 주님을 주인으로 영접하므로 구원받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누구인가를 따지지 않고, 우리가 무엇을 하였는지도 묻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만 믿으면 구원받게 하셨습니다.
10-11절을 봅니다. “그런즉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요 무할례시니라.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아브라함이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았기에 의롭게 된 것이 아니요,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 올라가 드리려고 했기에 의롭다는 것도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무할례시였다는 사실은 아주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이 의롭다 칭함을 받은 것이 할례받기 이전이라고 하는 것은 아브라함이 가졌던 믿음을 통하여 의롭다 함을 받으려는 사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할례 받지 아니한 모든 자의 조상이 되신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할례자의 조상이 아니라, 할례받지 아니한 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12절입니다.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그러하니라”
우리들이 구원받는 것은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고,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을 인정하고, 주님이 나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을 믿어야 됩니다. 다른 방법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믿어야 하고, 다른 길이 없음을 알아야 됩니다. 나를 내세우거나 나의 공로로 구원받는 것으로 알지 말고, 오로지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음을 확신하여야 됩니다.
구원받을 자격도 없는데, 경건하지도 않은 죄인인데, 우리 주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구원받은 것입니다. 이제는 가난해도, 죽음의 고통이 닥쳐와도 주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구원의 감격이 넘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은?
로마서 4:1-16 / 김철한 목사
로마서를 열면 칭의, 즉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말이 나온다. 교회 생활을 하면서 자주 듣게 되는 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나를 어떤 상태에 두는 것인가? 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어느 한정된 시간 동안만 의롭다 함을 얻고 마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영어로 Justification, 죄인을 죄인으로 다루지 않고 의인으로 칭한다는 이 말은 헬라어로 ‘디카이우매노’이다. 이는 현재 분사로 ‘항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러니까 ‘언제나 의롭다 하심을 입으면서’의 뜻이다. 우리는 한 때, 한 순간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 아니다. 우리들이 십자가의 구속을 믿게 될 때 언제나 한결같이 의롭다 하심을 입은 자인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 은혜이며 감격인가? 그러므로 이 의로워지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요, 복 중의 복이다.
이 의로워지는 것이 행위가 아니고 복음을 믿는 믿음임을 로마서 3장에서 확인했다. 로마서 4장에서는 바로 이 의로워짐을 얻는 것이 오직 믿음임을 다시 강조한다. 율법을 자랑하고 율법 구원,행위 구원에 사로잡혀 있는 자들 앞에 다시 한 번 강조하여 오직 믿음, 오직 은혜를 갖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사례자로 아브라함을 들었다. 유대인들이 자랑하는 언약의 조상 아브라함, 그는 행위로서 의로워졌는가? 아니면 믿음으로서 의로워짐을 얻었는가? 만약에 아브라함이 행위로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면 자랑할 것이 아브라함에게는 있게 된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자랑할 것이 없다. 왜냐하면 행위를 보고 의롭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 믿음으로 의로워지는 것은 행위가 아니고 받는 것이다. (롬4:3)
롬4: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창세기 15장을 보면 아브라함은 아들이 없었다. 민족이 창대하게 된다는 언약을 창세기 12장에서 받고 약속의 땅으로 향했으나 그는 세월이 지나가도 자손이 없었다. 창15:1에 가서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환상 중에 임했는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방패와 상급이 되어 주시리라고 하였다.그때 아브라함은 후사를 이어갈 씨가 아직도 주어지지 못한 것에 대하여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게 해달라고 하였다. 아브라함의 인간적인 생각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 “그 사람이 너의 상속자가 아니다. 상속자는 너의 몸에서 나온 자가 상속자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 하늘의 뭇 별을 보게 하였다. “저 별을 셀 수 있는가?” 별이 천공의 밤에 무수히 반짝거리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고 “네 자손이 하늘의 저 셀 수 없는 만큼의 별 같으리라.” 그때 아브라함은 빛나는 별빛과 함께 들려지는 약속 앞에 자신의 할 수 있는 것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았다. 양자 얻기라든지 호적에 올리는 법적 수속이라든지 다 내버리고 그냥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
그때 창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하고 하였다. 아브라함이 아무 것도 일한 것이 없다. 약속을 그냥 믿은 것이다. 그것이 아브라함이 거저 의로 여겨진 바 된 사건이다. 바울은 이 아브라함의 의의 이야기를 예로 들면서 일하지 않았음에도 의로 여겨진 이것이 복이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이 의는 보수가 아니라고 말한다. 보수라는 것은 일한 사람, 땀 흘리며 공을 세운 사람이 받는 삯이다. 한 달 직장 생활을 하고 받는 월급은 보수, 즉 삯이지 은혜가 아니다. 그러므로 의로 여겨진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일하지 않아도 얻은 것이기에 은혜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의로워진다는 것이 감사한 일인가? 옳다 여김을 받은 것이 내가 노력해서, 내가 일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된 것이며 은혜 중의 은혜인 것이다.
2.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것은 최고의 행복이다. (롬4:5)
신자의 의로워지는 칭의는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것이다. 롬4: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의로워지게 된 이런 사람의 대표는 다윗 왕이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를 범하여 죄를 저지르고 그 죄를 은폐하려 우리야를 전쟁터에서 죽게 하였다. 그 죄를 지적하는 나단 앞에서 고꾸라졌다. 다윗은 이런 죄악을 배경으로 회개할 때 시편 51편과 시편 31편을 남겼다. 바로 그 시편 31편 1절 이하에 나오는 다윗의 말을 바울이 인용한다.
롬4:7~8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다윗은 경건하지 못했다. 의를 얻으려 일을 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분명 불법적 죄만 행했다. 그런데 그는 죄가 가리워졌고 정죄되지 아니했고 불법이 사함을 받았다. 하나님 편에서 다윗의 죄가 사하여졌으니 정말 복의 복을 누린 것이다. 죄로 인해 진노함을 받고 머리에 씌워 준 면류관을 마땅히 빼앗겨야 하는데 그 죄가 용서되고 죄인이 하나님께 의로 여겨진다는 것은 측량할 수 없는 행복이다. 다윗이 복을 누리듯 우리도 의로 여김을 받는 것은 마음껏 누릴 수 있는 행복이다.
3. 믿음으로 의로워지는 복은 믿기만 하면 공평하게 누린다. (롬4:10)
감사하고 행복이 넘치는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 이 복이 인종에 따라, 성별에 따라 차이가 있는가? 의롭다 함을 얻으려면 특별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 있고 없는 사람이 있는가? 미국에 태어나면 안되고 한국에 태어나면 되는가? 할례자나, 무할례자나 아무 차별이 없다.
롬4:10의 아브라함을 보라. 의로 여기심을 얻은 것은 할례 시가 아니다. 무할례 시다.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 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다. 따라서 의로워짐의 은혜는 차별이 없다. 남녀의 차별, 종족의 차별, 인종 색깔의 차별, 언어의 차별, 문화와 전통의 차별이 없다. 오직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누구든지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긴다. 유대인이나 한국인이나 차별이 없다. 오직 믿음으로 되어지는 것 뿐이다. 누구나 믿음이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의로워진 것은 롬4:11中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결국 이 의로워지심, 칭의의 선언을 믿는 나를 위한 것이다. 믿기만 하면 의롭다 함을 얻는 아브라함은 나의 조상이 된다. 믿기만 하면 나도 믿는 자의 조상이 된 아브라함처럼 의롭게 여김을 얻고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 씨가 된다. 할례를 받았기에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고 율법을 가졌기에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고 믿기만 하면 나도 차별이 없이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다.
결국 아브라함의 의롭다하심, 다윗의 사함을 받은 행복의 이야기는 모두 다 공로가 아니고 오직 복음을 믿으면 누리게 될 나의 칭의를 위한 설명이다. 그리스도인된 나의 칭의를 분명하게 보여주기 위해 아브라함과 다윗의 실례를 든 것이다. 그리스도인된 나는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들에게 세상의 상속자라고 하신 약속처럼 나도 상속자다. 아무 자격없는 나에게 이 상속자는 얼마나 놀라운 행복의 메시지인가?
4.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변화다.
이는 신학적으로 용서의 다른 말이고 심리적으로 평화가 주어졌다는 말이고 죄인을 의인으로 간주하는 신분의 변화가 주어진 법적 선언이다. 그러므로 롬8:33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누가 나를 고발하겠느냐? 누가 나를 송사하겠느냐? 누가 나를 대적하겠느냐? 누가 나를 정죄하겠느냐? 세상이 아무리 도둑놈, 살인자라고 정죄하고 손가락질을 하더라도 하나님으로부터 나는 용서를 받은 의인이다. 하나님과 회복된 사람이다.
이 시간 의로워졌음을 취하라. 그 순간부터 관계가 회복된다. 죄로 인한 단절이 연결된다. 불통이 소통이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가 아니다. 하나님과 평화로 접어들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났는데 남태평양 군도에서 아직도 전쟁이 끝난 줄 모르고 계속 일본군으로 숨어 살면서 총을 들고 있는 자가 발견된 적이 있다. 종전을 믿으면 되는데 몰라서 억울한 삶을 살았던 것이다. 우리도 칭의를 취하지 않으면 이 일본군 병사와 똑같다. 법적으로 의인이 되었는데 이것을 알지 못하여 죄인으로 살고 거듭 거듭 죄와 씨름하며 고민하고 근심하고 실망하는데 갇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알아야 한다. 믿음으로 나는 의로워졌다. 이 법적 선언이 나를 향한 것이다. 죄의 두려움과 수치심에서 나오라. 하나님과 회복된 자로 살아라. 그것이 칭의의 힘이다. 장래의 진노하심과 상관없는 구원 받은 자로 살아라. 그것이 칭의의 권리다. 칭의의 은혜를 붙잡고 하나님 앞에 기쁨으로 서는 송년주일이 되길 축원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며
로마서 4:1-12 / 피영민 목사
서 론
로마서 4장의 주제는 ‘아브라함의 구원’입니다. 로마서 4장은 아브라함이 어떻게 구원을 받게 되었는지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1절에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은 “아브라함의 구원에 관해서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이 무엇인가?”, “아브라함의 구원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묻습니다. 이에 대한 대답이 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여기심을 받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주석가들도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가 왜 아브라함의 구원 문제에 대해 생각해야 하느냐고 질문합니다. 유대인인 아브라함이 구원을 받았든지 받지 못했는지는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글을 쓰는 사람도 본 적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구원에 관한 문제는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23~24절에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구원에 관한 말씀은 아브라함을 위해서만 기록된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말씀입니다. 로마서 4장에 기록된 구원의 원리는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왜 갑작스럽게 로마서 4장에 아브라함의 구원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사도 바울이 복음을 증거할 때, 율법 외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함을 받는 복음이 나타났다고 증거하는데, 유대인들이 시비를 걸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아, 그러면 너는 우리 조상이 1,400여 년 동안 애지중지해 온 율법을 쓸데없다고 말하는 것이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조상들의 믿음을 쓸데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조상들의 믿음이 어떤 것이었는지 살펴보려면 최고의 조상이라 할 수 있는 아브라함의 구원에 관한 문제를 생각해 봐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내가 아브라함의 믿음과 똑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 조상들의 믿음을 떠난 것이 아니지 않느냐?”며 구원의 원리를 논증하는 것입니다.
“내가 조상들의 믿음을 떠났다고 비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지금 아브라함의 믿음과 구원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과 다른 믿음, 즉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입니다. 로마서 4장은 두 부분으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먼저 1~16절까지는 아브라함의 구원에 관한 세 가지 오류를 다루고 있고, 이후 17~25절은 아브라함이 가지고 있던 구원받는 믿음의 다섯 가지 특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Ⅰ. 아브라함의 구원에 관한 세 가지 오류
첫째, 1~8절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이지, 그 어떤 선행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이 그것을 의로 여기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구제나 선행을 많이 했기 때문에 의로 여기신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행으로 구원받았다는 것은 오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오해하고 아무 근거 없이 아이들에게 “착한 사람이 되어라! 선행을 많이 해야 한다! 그래야 복을 많이 받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무슨 종교를 믿든지 상관없이 일단 선행을 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은 착한 사람이 가는 곳이 아닙니다. 부모가 그렇게 가르치고, 또 그렇게 배웠다면 그것은 잘못 가르치고 배운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구원은 선행으로 이뤄진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유대인 랍비들도 자녀들을 가르칠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착하고 의롭고 선행을 많이 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너희도 천국에 가려면 아브라함과 같이 착하고 의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맞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로마서 4장 1~8절은 아브라함이 착한 일을 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로마서뿐만 아니라 구약성경이 이 사실을 동일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 살 때, 우상 숭배하는 아버지 밑에서 교육을 받았고, 그 역시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또 그는 자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아내 사라에게 다른 사람들을 향해 말할 때 나의 누이라고 소개하도록 거짓말을 두 번씩이나 사주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거짓말쟁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를 두고 일평생 착한 일을 많이 해서 구원받았다고 하는 것은 옳은 주장이 아닙니다.
또 로마서 4장 2절에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행위로 구원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창세기 15장 4~6절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미 연로하여 자식을 낳을 상황이 아니었는데, 하나님은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네 자손들이 하늘의 별처럼 많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원래 이름은 아브람이었고, 사라의 원래 이름은 사래였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이 99세에 아브라함이 되었고, 사래는 89세에 사라가 되었습니다. 이름을 바꿔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15장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사라의 이름을 바꾸시기 전인 아브람과 사래 시절에 받은 말씀입니다.
둘은 모두 나이 많아 생물학적으로 자식을 낳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하나님 약속의 말씀을 듣고 “그럴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나와 내 처는 이미 자식을 낳을 수 없는 몸이 되었습니다”라고 했지만, 하나님이 “아니다. 약속대로 이뤄진다”고 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고 하셨습니다. 구약성경도 아브라함이 선행이나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원리는 다윗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었습니다. 다윗 역시 선행으로 천국에 들어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엄청나게 많은 죄를 지은 사람이었습니다. 충복 우리아의 아내인 밧세바와 간음을 저지르고, 우리아를 전쟁터 일선에 보내어 간접 살인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거스려 인구 조사를 추진했다가 자기 백성 7만 명을 죽이는 헛된 짓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습니다. 다윗의 믿음은 일평생 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하며 살았던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믿음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의롭다 하시고 그의 모든 허물을 덮어주시고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심으로 그를 천국에 받아주셨습니다.
로마서 4장 7~8절에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나 다윗, 그리고 1세기 사람이나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나 하나님께 죄 용서함을 받고 의롭다 함을 받아 구원 받고 천국에 갈 수 있는 길은 다 똑같습니다. 선행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믿어야 의롭다고 여기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죽을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죄를 용서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알라나 석가모니를 믿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9~12절에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에게도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할례를 굉장히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1세기 유대인들 중에는 예수님을 믿음으로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할례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유대주의자’라고 합니다. 바울은 그런 자들을 행악자, 이단자라고 불렀습니다. 믿음으로만 구원 받는 것이지, 왜 거기에 할례를 더하냐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구절 속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언제 의롭다고 여기셨는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할례받기 이전에 하나님이 그를 의롭다고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할례를 받아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할례로 말미암아 인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할례자, 무할례자를 막론하고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사람들의 믿음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진리를 이방인 선교의 중요한 근거로 삼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할례 받은 유대인의 육적인 조상이기 훨씬 이전에 무할례자를 포함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의 영적인 조상이 된 사람입니다.
침례 받으면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 침례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침례, 세례, 영세, 견진, 미사 등이 죄 용서함과 구원을 준다고 가르치는 것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가톨릭에서는 의식이 구원을 준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을 ‘의식구원주의’라고 하는데, 이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의식이 구원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지, 의식 자체가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침례는 받지 않아도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은 침례를 받음으로써 사람들 앞에 공개적으로 공포하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은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공적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침례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침례가 구원의 조건이 되거나 구원의 방편이 되지는 않습니다.
침례교는 ‘신자의 침례’(Believer’s Baptism)를 굳게 믿습니다. 침례교가 장로교와 결정적으로 다른 차이점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제 신앙은 장로교회의 신앙과 99% 같습니다. 그러나 장로교가 어린 아기들에게 유아세례를 주는 것에 대해서는 절대 동조할 수 없습니다.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아이들에게 세례를 주는 것은 성경적인 가르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할례와 유아세례는 서로 연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침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표로써 받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의식이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유아세례 받았으니, 젊은 시절 좀 방탕해도 구원받을 것이다”라고 생각한다면 천만의 말씀입니다. 의식은 구원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구원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으로 받은 것이지, 율법을 지켜서 받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3~16절에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자손을 주시겠고, 그 자손이 번성해 세상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되리라는 약속은 모세가 율법을 받기 약 430년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것은 기원전 1400년대의 일이고,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것은 기원전 1800년대의 일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7절에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예를 들어, 자전거가 필요하다고 떼를 쓰는 아들에게 이번 주 금요일에 자전거를 사주겠다고 어떤 아버지가 월요일에 굳게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금요일이 되자, 이번 시험에 1등하면 사주겠다고 조건을 번복하면 그 아버지를 신실하고 훌륭한 아버지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어떤 약속을 하고 난 후 다시 조건을 덧붙이는 것은 옳은 일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보시고 그를 의롭다 여기셨습니다. 그런데 430년 후 율법을 지키면 의롭다 여기시고 구원하신다고 조건을 바꾸셨다면 그런 하나님을 공정하고 신실한 분이시라 할 수 없습니다. 구원은 율법을 지켜서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율법은 단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로 죄인임을 깨닫게 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있음을 알게 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야 함을 가르쳐 주는 몽학선생의 기능을 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겠다고 하는 율법주의자들은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근본적인 의도를 모르는 자들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의롭다함을 받게 된 것은 선행을 했기 때문도 아니고 할례를 받았기 때문도 아니며, 율법을 지켜서 된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을 믿음으로 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셔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지, 왜 자꾸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죄 사함을 주시고 영생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곧 “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나를 믿는 것이고, 나를 공경하는 것이며, 예수의 말을 듣는 것이 나의 말을 듣는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막 9:7).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하나님을 참되게 믿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만 믿겠다고 하는 사람은 귀신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 하나님은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예수님을 믿으셔야 합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수백 번의 장례 예배를 집례하였습니다. 그런데 장례 때마다 느끼는 것이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소중한 교훈을 받습니다. 여러분들도 여기에서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이 땅에서의 삶은 안개와 같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정하시던 원로 장로님께서 어제 소천하셨습니다. 안개처럼 사라지는 것이 인간의 일생입니다. 그래서 내세에 “천국에 가느냐? 지옥에 가느냐?”하는 것은 결코 사사로운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차대한 문제입니다. 인간의 참된 삶은 현세보다 내세에 있습니다. 내세에 하나님의 복과 영광을 누리며 천국에서 살게 되는 것, 이것이 믿음으로 이뤄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야 합니다.
Ⅱ. 아브라함의 구원받는 믿음의 다섯 가지 특징
믿음의 대상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알라, 석가모니를 믿는다고 하는데, 그런 믿음을 가지고는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구원받지 못하는 믿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받는 믿음은 어떤 특징이 있을까요? 아브라함이 가지고 있던 구원받는 믿음의 다섯 가지 특징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17절에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이셨습니다.
둘째,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능히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으로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이 100세, 아내 사라가 90세였습니다. 생물학적으로 자녀를 갖는 것이 불가능한 상태였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개입하시면 약속을 능히 이루실 것으로 믿었습니다.
미국의 ‘이신론자’(Deist)들 가운데 ‘벤저민 프랭클린’, ‘토마스 제퍼슨’과 같은 사람들은 우주가 자연법칙만으로 돌아간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신관을 일명 ‘시계태엽신관’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한 번 시계태엽을 감아 놓으셨기 때문에 우주는 그저 자연법칙으로 돌아가는 것이지, 예수님의 기적과 같은 초자연적인 것들은 참된 이적이 아니라 마술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믿음은 이신론자들의 주장과 달랐습니다. 자연법칙만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우주에는 자연법칙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주를 자연법칙으로만 움직이시는 것은 아닙니다. 수시로 개입하실 수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하나님 마음대로 자연법칙을 초월하여 역사하시고 개입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기적을 이루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심을 아브라함이 믿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여러분들의 삶에도 얼마든지 개입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얼마든지 기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몸에 병이 있으면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고쳐주시도록 기도할 수 있습니다. 자연법칙을 초월하는 역사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 인류의 삶 속에 개입하시고 섭리하시는 분이심을 믿은 것입니다.
셋째, 아브라함의 믿음은 추상적이거나 이상적이고 환상적인 믿음이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인 믿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내가 늙어 출산이 불가능함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런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무작정 자녀를 낳을 수 있다고 믿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는 청춘이다. 나는 자녀를 낳을 수 있다. 나는 늙지 않았다”라는 식으로 자기 최면을 걸고 적극적 사고방식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현실을 잘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현실 가운데 하나님이 개입하시면 달라질 것을 믿은 것입니다. 이단자들은 비현실적인 믿음을 많이 강조합니다. ‘크리스천 사이언스’라는 이단 집단에서 신도가 병이 들 때 “나는 병이 든 것이 아니다. 병은 가짜다. 나는 아프지 않다”고 주문을 외면 어느 순간 병이 낫는다고 가르칩니다. 귀신 장난이요, 사탄의 역사입니다. 이런 것은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믿음은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것에 대한 자기 최면이 아닙니다.
성도들은 스스로 죄인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유혹에 넘어지기 쉬운 죄성을 가진 자들임을 현실적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현실이 그와 같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으면 하나님이 내 죄를 용서하시고 의롭다 여기시고 천국에 받아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넷째, 아브라함의 믿음은 끝까지 가는 믿음이었습니다. 75세에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은 약속이 이뤄지기까지 무려 25년을 기다렸습니다. 그 때까지 아브라함의 믿음은 조금도 약해지지 않았고, 의심하지도 않았습니다. 참되게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은 믿음이 변질되지 않습니다. 끝까지 가는 것입니다. 교회 왔다가 절이나 성당에 갔다가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엉터리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다섯째, 아브라함의 믿음은 자라나는 믿음이었습니다. 성도의 신앙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이 언제라도 내 삶에 개입하실 수 있음을 믿고, 일평생 변질되지 아니하며 자라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구원받는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천국에 들어가는 참된 믿음을 소유한 자입니다.
결론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인해 하나님은 그를 의롭다고 여겨주셨습니다.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어떻게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을까요? 로마서 4장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통해 그것을 그림처럼 분명하고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선행을 의지하는 사람은 미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는 영생의 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잠시 살다가 가는 것인데, 구원받는 믿음을 가지면 영원한 복, 영생의 복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어떤 약속이라도 능히 이루실 것을 믿으십니까? 믿음만이 복과 영생의 길입니다. 변함없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사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믿음으로 받는 하늘 복
로마서 4:1-9 / 문기태 목사
오늘 많은 사람들은 믿음을 저버리고 하나님 말씀을 무시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 떠나서 자신의 힘으로 성공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소중히 여겨서 하나님을 떠나서는 절대로 살 수 없다고 여기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살면 하나님이 지켜주십니다. 로마서 1장 17절에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의인입니다. 믿음이 있어야 참으로 사람답게 삽니다. 믿음이 있어야 영원히 삽니다. 믿음으로 살아야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결단하고 예수를 믿을 때 우리의 운명이 바뀝니다. 불행한 인생이 행복한 인생으로 바뀝니다. 부정적인 인생이 긍정적인 인생으로 바뀝니다. 무의미하게 방황하던 인생이 인생의 목적과 목표를 발견하고 확신 속에 달려갑니다. 여러분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어떤 복을 주실까요? 오늘 말씀에 복이라는 단어가 여러 번 나오는데 본문을 중심으로 살펴봅시다.
1. 믿음으로 받는 하늘 복은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5, 6)
로마서 3장에서 강조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다 죄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착하고 경건하고 의롭게 보일지 몰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두 죄인이고 불의하다고 성경은 선언합니다. 율법에 비추어 보아도 의롭다고 인정받을 이는 아무도 없고 모두 죄인입니다. 양심에 비추어 보아도 온전히 깨끗한 이는 없고 모두 죄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모두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멸망 당할 수 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왜요? 죄인이니까?
그런데 4장을 시작하면서 죄와 대조되는 의에 대한 말씀을 합니다. 5절에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하나님이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면 그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6절에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라고 기록합니다. 일한 것이 없음에도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일한 것은 자기의 수고로 율법을 지키는 것, 자기의 행위로 의롭게 사는 것, 자기의 노력으로 하나님 앞에 완벽해 지는 것 등을 뜻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할레를 받고 율법을 지키고 절기를 지키는 등 유대인들이 아무리 몸부림 쳐도 자기 노력으로 의롭다고 하나님께 인정 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김을 받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다 지키지도 못했는데, 행위가 완벽하지도 못한데,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살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의롭다고 인정을 받습니까? 하나님이 무엇을 보고 의로 여기십니까? 믿음을 보고 의로 여기십니다. 우리 성경은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이라고 번역을 했는데 개역 성경은 행복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저는 행복이 더 맞는 것 같습니다. 얼마나 행복합니까? 하나님께 의롭다고 의인이라고 인정을 받는데 얼마나 행복합니까? 그것도 일한 것이 없이 다시 말해 자기가 수고한 것이 아무 것도 없이 선물로 공짜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데 얼마나 행복합니까?
그러면서 다윗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다윗이 뭐라고 했습니까? 7,8절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다윗은 죄를 짓고 죄가 하나님 앞에 드러나 큰 고통을 겪었습니다. 얼마나 수치스러웠을까요? 얼마나 괴로웠을까요? 다윗은 죄를 짓고 온종일 끊임없는 신음으로 내 뼈가 녹아 내렸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밤낮으로 짓누르셔서 혀가 여름 가뭄에 풀 마르듯 말라 버렸다고 했습니다. 그럴 정도로 고통스러웠는데 하나님께 죄를 다 고백하였더니 하나님께서 다윗의 죄를 기꺼이 용서해주셨습니다. 그렇게 죄 사함을 받고 죄에서 벗어난 다윗이 얼마나 날아갈 것 같았을까요?
그처럼 큰 죄가 있어서 뼈가 녹아 내리고 혀가 말라 버릴 지경이 되어서 괴로운데 모든 죄를 사함 받는 것이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시고 죄를 다 지워버리셔서 깨끗하게 되는 것입니다. 경건한 것이 별로 없는 데 하나님께서 경건한 사람이라고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또 아브라함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3절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고 여기셨다.' 말씀합니다. 창15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너의 방패이고 너의 상급이다." 그러시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하나님, 저에게 무엇을 주시렵니까? 저는 자식이 아직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데리고 바깥으로 나가 "하늘을 쳐다 보아라.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너의 자손이 저 별들처럼 많아질 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그런 믿음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의심하지 않고 그대로 믿으니까 하나님을 그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속죄 제물로 내주셨습니다. 그의 피를 힘 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일한 것이 없어도 죄 사함을 받고 깨끗하게 됩니다. 의인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경건하다고 인정해 주십니다.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선물로 받으니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온갖 좋은 선물을 하나님께 받아 누리게 됩니다. 영생을 선물로 받습니다.
여러분, 믿음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하늘 복인 의롭다 하심을 받게 되기 바랍니다. 더 이상 죄인으로 고통스러운 인생을 살지 말고 의인으로 인정받고 하늘 복이 넘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2. 믿음으로 받는 하늘 복은 은혜입니다.(4)
우리가 믿음으로 받는 하늘 복은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믿음으로 받는 하늘 복은 은혜입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아주 좋은 선물을 공짜로 받는 것입니다.
4절에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개역 성경은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했습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됩니까? 우리가 회사에 나가 열심히 일을 하고 월급을 받습니다. 월급을 주는 사장에게 고마운 마음이 듭니까? 별로 고마워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수고를 하고 회사에 큰 이득을 안겨 주었으니 그 정도는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제때 월급 안 주면 빚 독촉 하듯이 빨리 달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우리가 병이 나서 병원에 6개월 동안 입원했습니다. 출근도 못하고 일을 하나도 할 수 없었습니다. 퇴원을 하여 당연히 짤렸겠다.고 생각을 하고 회사에 퇴직금을 받으러 갔습니다. 그런데 회사에서 6개월치 월급을 다 주면서 '고생 많았다. 내일부터 다시 출근을 하라.' 한다면 고맙습니까? 별로 고맙지 않습니까? 아마 감사하고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이야기 하며 '일' '품삯' '은혜' '보수' 이야기가 왜 나옵니까?
로마서는 로마교회에 복잡한 문제로 큰 갈등이 있어서 바울이 기록한 편지입니다. 로마교회에는 당시 두 종류의 그리스도인이 있었습니다. 당시 다른 교회들도 비슷한 문제로 갈등을 겪었는데 유대인 그리스도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이 섞여 있었습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은 유대인이라는 자부심이 강하였습니다. 그들은 오랜 시간을 율법을 익히고 율법을 지키며 살았습니다. 할례도 받았습니다. 절기도 꼬박꼬박 지켰습니다. 물론 예수를 메시아로 믿고 교회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있는 이방인들을 보니 할례도 받지 않았고 율법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늘 그게 못 마땅했습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를 받아야 구원 받는다고 했습니다. 구원 받으려면 율법도 지켜야 한다고 말 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누구나 예수를 믿으면 믿음으로 구원 받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것을 바로 잡으려고 바울 사도는 로마서를 통해 율법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그리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예를 들고 있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공짜로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기로 정하시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믿으면 일한 것이 없어도 은혜로 구원 받습니다. 구원과 함께 온갖 좋은 선물이 따라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여전히 일을 하고 품삯을 받는 것처럼 구원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천국에 가려면 힘들게 수고를 하여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천국은 일을 하고 품삯을 받는 것처럼 수고하고 고생한 대가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로 받는 선물 같은 것입니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은혜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일하는 것은 할례, 율법, 절기 같은 것을 잘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 일에 열심인 사람은 감격도 없습니다. 감사한 마음도 없습니다. 정당한 대가를 받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일을 시키고 일하는 사람에게 품삯을 주듯이 가장 좋은 것을 주시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해서 주는 선물처럼 은혜로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당연하게 받지 않고 감사한 마음으로 감격하며 최고의 선물을 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서 일이 무엇이라고요? 율법 지키는 것, 할례 받는 것 등입니다.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것을 자꾸만 품삯으로 착각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좋은 것을 은혜로 주셔도 감격하지도 않고 감사하지도 않습니다. 공짜로 받아야 은혜인 줄 압니다. 감사한 마음이 솟아납니다.
저는 목사가 된 것이 참 좋습니다. 그리고 창원침례교회의 목사인 것이 정말 좋습니다. 나같이 부족하고 약한 사람을 하나님이 붙잡아 귀한 일에 써 주시는 것이 감사합니다. 언젠가도 이야기 했지만 저보다 잘 난 사람이 제 주위에 참 많습니다. 제 주위의 목사님들을 보면 인물도 좋고, 유학도 갖다 오고, 기도도 많이 하고, 책도 많이 읽고, 말도 잘 하고, 열심도 뛰어나고 다 저보다 월등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분들보다 저를 귀하게 써 주시는 것이 감사합니다. 우리 교회가 부흥되는 것을 보고 비결을 말해달라는 분도 있는데 은혜라는 단어 밖에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습니다. 제가 잘 해서 된 것은 없고 다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시작하라고 해서 시작했고 모든 과정을 하나님이 다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좋은 사람을 많이 붙여 주셨고 저는 붙여주신 사람과 함께 당연히 할 일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셨고 필요하면 능력도, 물질도 넘치게 주셨고 우리 교회를 귀하게 사용하셨습니다. 지금까지도 은혜가 넘쳤고 주님의 은혜는 날이 갈수록 더 풍성한 것 같습니다. 교인들이 저를 사랑하여 선물을 주시는 것을 받으며 내가 받아도 되나? 주님의 은혜로 귀한 사랑을 받는구나! 하여 감사합니다. 여러분이 저를 위한 어떤 결정을 해도 제 마음에는 모든 것이 은혜라는 생각으로 가득합니다. 그래서 늘 감사하고 마음에 기쁨이 충만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제가 이 모든 것을 은혜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수고한 것에 대한 대가를 받는 것으로 생각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이 교회를 개척했는데, 내가 이 교회가 이만큼 성장하도록 기여하고 얼마나 큰 수고를 하였는데 나를 이렇게밖에 대우하지 않아? 나보다 못한 사람도 이보다 훨씬 나은 대우를 받는데... 아마 그런 마음을 품으면 그 순간부터 지옥이 따로 없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못마땅하고 불평이 가득하고, 원망이 끝없이 솟아날 것입니다. 온갖 사람들을 미워할 것입니다. 그러면 설교가 제대로 되겠습니까? 기도가 제대로 되겠습니까? 마귀에게 사로잡혀 목회도 엉망이 되고 하루하루가 지긋지긋해 질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일하는 자가 되어 보수를 받으려고 기대하지 말고 아무 공로가 없는 데 이 모든 것을 은혜로 받아 누리고 있다고 여기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모든 삶에 천국이 시작이 됩니다. 가정생활도 그렇고 교회생활도 그렇습니다. 목장도 같습니다. 감사하지 않은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이 유대인처럼 나는 이렇게 헌신하는데 왜들 나처럼 하지 않지? 하는 마음을 품으면 사단에게 속아 넘어갑니다. 은혜를 보지 못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녀가 되지 못하고 하나님께 자꾸만 품삯을 요구하는 품꾼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이 주시려고 하는 영생과 천국은 멀어지고 시시한 품삯을 요구하다가 사라지고 말게 됩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좋은 것을 주셔도 좋은 줄도 모르고 당연하게 생각하다가 망합니다. 하나님은 정말 좋은 것은 다 은혜로 거저 주십니다. 믿는 이들에게 은혜로 하늘의 기업까지 주십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충만해지면 은혜의 복을 받습니다. 은혜를 보는 눈이 열립니다.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게 됩니다. 은혜로 인해 천국을 맛보며 놀라운 삶을 살게 됩니다. 여러분 모두 믿음으로 충만해져 하늘 복인 은혜를 많이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세상 복은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큰 문제가 없는 것들입니다. 겉으로 좋아 보이지만 절대로 좋은 것이 아닙니다. 돈이 많으면 좋겠지요? 그러나 돈이 많다고 다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돈이 많아 큰 집에 살면서 원수처럼 싸우며 불행한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오래 살면 좋겠지요? 오래 살지만 불행하고 괴로운 삶도 많습니다. 그러나 하늘 복은 우리 모두에게 꼭 필요한 것입니다. 영원히 행복하고 존귀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고 그 사랑을 받아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 복을 어떻게 받습니까? 하늘 복은 믿음으로 받습니다. 여러분 모두 하나님의 약속하신 말씀을 믿고 의롭다고 인정 받기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이제는 품삯을 기대하기보다 은혜에 사로잡혀 살기 바랍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로마서 4:1-25 / 이삼규 목사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잡아다가 팔아먹는 한 노예상이 있었습니다. 그는 비싼 값에 노예들을 팔아 돈을 버는 것이 인생 최고의 목표였습니다. 동정이나 '사랑'이란 단어는 사치스러운 감정에 불과했습니다. 주위에서는 그를 `냉혈인간'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마음속에 복음이 들어왔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죄악 된 삶을 정리하고 신학을 공부해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평생 동안 권위의 상징인 목사의 예복을 입지 않았습니다. 항상 노예 복을 입고 예배를 인도했습니다. 사람들이 묻습니다. “목사님은 왜 목사님들이 입는 예복을 입지 않고 노예들이 입는 복장을 하십니까?”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죄의 노예였던 나를 구해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고맙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잊지 않으려고 노예 복을 입습니다.” 이 목사님의 이름은 J.뉴턴입니다.
전 세계 기독교인들이 가장 많이 부르는 찬송가 “amazing grace” 우리나라 찬송가 4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입니다. 이 찬송을 지은 사람이 존 뉴턴 목사입니다. 미국에서 911테러 사건이 있고난 후에 미국인들이 가장 많이 부른 찬송가가 “amazing grace”입니다. 존 뉴턴 목사님은 “놀라운 은혜”를 찬양하였습니다.
지난 주일에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1-3장에서 모든 사람이 죄인임을 선포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이런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였다는 것을 역시 선포합니다.
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엡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 2: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함을 얻어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다면 그 누구도 멸망에서 구원받을 길이 없습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문자적으로는 “카리스”입니다. 카리스라는 말은 기본적으로 ‘사람들 중에 복리를 가져오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서 여러 가지 의미가 파생되었는데, '은혜, 호의, 아름다움(미), 미덕, 사은, 감사, 사의, 친절, 즐거움, 호의의 표현, 돌봄, 감사의 빚, 보답'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고 구원을 얻는 것은 우리의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값없이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호의 즉 은혜(카리스) 때문입니다. 그 증거가 오늘 본문 로마서 4장에 잘 설명되고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4장에서 우리가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얻지 못하고(1-8절), 할례로 의롭다함을 얻지 못하며(9-12절), 율법으로 의롭다함을 얻지 못하고(13-16절)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을 (17-25절) 말씀합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가장 존경하는 믿음의 조상이 있다면 그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족보에도 등장하는 아브라함과 다윗입니다. 그러면 이들이 어떻게 해서 의롭다함을 받고 믿음의 조상이라고 지금까지 불려지고 있을 까요?
먼저 아브라함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의롭다함을 받았습니까?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었습니다. 이 사실을 증명하기 위하여 바울은 세 가지 근거를 제시합니다.
1)아브라함은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지 않은 사람입니다(1-3)
롬 4:1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롬 4: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1절에 나오는 ‘육신으로’라는 말은 사람이 기댈 수 있는 어떤 것, 곧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받기 위해 들고 나갈 수 있는 자랑거리를 말합니다. 즉 2절에 나타나는 ‘행위, 선행’을 의미합니다. 사실 아브라함은 행위로는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살 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기 싫었습니다. 그가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순종하였다면 아버지 데라와 함께 출발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그런데 창세기 11장을 보면 아브라함은 아버지 데라와 함께 하란까지 왔습니다. 하란이 어디입니까? 메소포타미아의 최 변경지대입니다.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버지 데라 때문이었습니다. 데라가 거기서 죽어 장사지낼 때까지 하란을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하란에서 머뭇거리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다시 명령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아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창 12:5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라는 말은 아브라함 편에서 쓸 수 있는 ‘마침내’가 아닙니다. 하나님 편에서 쓸 수 있는 마침내 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에 이끌려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입니다. 들어갔으면 거기서 정착해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 땅에 기근이 있다고 하여 애굽으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이 아닌 애굽에 땅에 내려가서 그가 한 일이 무엇입니까?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일을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런 실수를 한번만 저질렀습니까? 창세기 20장에도 가보면 그랄에서 똑 같은 잘못을 저지르는 것을 봅니다. 아브라함은 우리가 믿음의 조상이라고 존경하지만 사실 존경할만한 구석은 눈 씻고 찾아 볼래야 없습니다. 그는 허물투성이요, 실수투성이의 사람이었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반듯한 행동 때문에 구원받고 의롭다함을 받았다면 저와 여러분은 가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도 희망이 보입니다. 아브라함이 어떤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도 연약한 죄인에 불과합니다. 자기 아내마저 지키지 못하고 누이라고 속이는 비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었습니다.
롬 4: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
창세가 15장을 보면 의미심장한 장면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온 지 어언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일점혈육도 없었습니다. 팔순이 넘은 사람이 하나님의 약속만을 붙들고 산다는 것이 암담했을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찾아와 아브라함을 불러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밖에 나가보니 하늘에는 별들이 총총, 너무나도 황홀하게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창 15: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하나님은 그에게 하늘의 별처럼 많은 후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팔순이 넘은 할아버지에게 자식을 주시겠다는 약속이 가당한 말씀입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믿었습니다.
창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아멘”한 것입니다. 이것은 도저히 믿기지 않은 황당무계한 이야기처럼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아브라함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전적으로 신뢰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놀라게 하고 감동시킨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그 믿음을 하나님은 의로 받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무엇으로 의롭다함을 얻었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행함 때문이라면 자랑할 것이 있겠지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행위로는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오직 은혜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것입니다.
2)아브라함은 할례로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9-12절).
아브라함이 언제 의롭다함을 얻었습니까? 할례를 받은 후입니까? 아니면 할례를 받기 전입니까? 그 시점이 중요한 것입니다. 10절을 보십시다.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
그때 당시 유대인들은 할례를 통하여 그들의 선민의식을 강하게 구축하던 시기입니다. 할례자에게만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하심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물론 다윗은 할례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누린 은총과 칭의를 동일하게 누렸다는 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의롭다함을 받은 때는 할례를 받기 훨씬 이전이었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것은 칭의 사건이 있은 지 14년이 지난 후였습니다(창17:24-26절). 그렇다면 할례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롬 4:11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할례는 믿은 사실을 추후적으로 인증한 도장과 같은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받는 세례 역시 같은 의미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여기에는 믿음이 전제 되어 있습니다. 믿음이 없다면 세례는 헛것에 불과 한 것입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믿음이 있을 때 세례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할례를 선민이 되는 유일한 길로 생각했지만 그것은 엄청나게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할례를 받기 전에 이미 의롭다함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러한 주장은 그 당시 유대인의 사상 체계를 일거에 무너뜨리는 것이었습니다. 폭탄적인 선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구약에 성도들은 할례를 받았습니다. 신약의 성도들은 세례를 받습니다. 그러나 할례나 세례가 결코 의롭게 되는 조건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3)아브라함은 율법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13-17절).
앞에서 바울 사도는 아브라함의 칭의가 할례와 무관하다는 것을 역설하였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바울은 아브라함의 칭의는 율법과도 무관한 것임을 선언합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노력하여 율법이 명하는 바를 준행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인정을 받을 수 있음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당시에 율법이 있었습니까? 아브라함 당시에는 율법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지 수백 년이 지난 후에 나타난 것이 율법입니다. 그러므로 율법과 아브라함이 의롭다함을 받은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바울은 강조합니다. 오히려 아브라함의 칭의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약속과 관련이 있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롬 4:16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 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아브라함의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된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아브라함의 믿음, 의롭다함을 받은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➀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➁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100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에 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토록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하갈이라는 첩을 얻어 대를 이어 보려는 인간적인 술수를 사용하기도 하였고 또한 그 종 다메섹 엘리에셀을 후계자로 삼으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과정을 한꺼번에 생략하시고 결과만을 놓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허물이 있고 실수투성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인정하시면 그것으로 끝납니다.
구약에 나타난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왜 신약에서 말씀합니까?
롬 4:23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롬 4:24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아브라함이 의롭다함을 받은 이야기는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라고 바울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의로 여기심을 받을 수 있습니까?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 하나님을 믿을 때 의롭다함을 받습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고 우리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믿습니까? 우리의 행위나, 할례나,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다함을 얻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감사하십시오.
한걸음 더 나아가 다윗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다윗은 어떻게 의인으로 인정을 받았습니까? 다윗은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국기에 다윗의 별을 새겨 다윗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윗도 인간적으로 보면 허물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시편 32편을 보면 그는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오늘 본문 7-8절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롬 4:7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롬 4:8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이 말씀은 다윗 자신의 신앙고백입니다. 자기가 무조건 용서 받은 사람이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편에서 무조건 다윗의 죄를 용서하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시편 32편은 다윗의 회개의 시편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는 범죄하고 난 후에 처절한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시 32:3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시 32:4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셀라)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빼앗고 그의 남편 우리아를 전쟁에 보내어 죽게 한 일 때문에 그는 괴로워하였습니다. 다윗은 적어도 일년 동안 자신의 범죄를 은폐하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나단 선지자가 찾아와서 그 죄를 지적하기 전까지 그는 자신의 죄를 숨기고 있었습니다. 그때 다윗의 상태가 어떠하였습니까? 뼈가 쇠하고 하나님의 압박을 받아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 같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르는 진리가 있었습니다.
시 32:5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셀라)
다윗은 자기의 죄를 자복함으로 용서를 받았습니다. 다윗도 따지고 보면 죄가 없어서 의롭다함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죄를 잘 처리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무조건 불쌍히 여기시고 허물을 덮어주셨기 때문에 의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두 가지 놀라운 사실을 언급합니다.
➀하나님은 죄를 용서하신다.
➁하나님은 우리 죄를 우리 탓으로 돌리지 않으신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진리를 실감나게 가르쳐 주는 말씀이 바로 노동의 법칙입니다.
롬 4: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롬 4: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해서 받는 삯은 정당한 대가이지 선물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무 일을 안했는데도 일당을 받았다면 그 사람에게는 큰 선물이 됩니다. 노동자는 일한 만큼 삯을 받습니다. 삯을 받는데 특별히 감사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일을 변변히 하지 않았거나 전혀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임금을 받게 된다면 아주 황송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일에 대한 대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거저 받은 것이기 때문에 은혜가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받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격이 없는 사람이 받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물 즉 은혜입니다. 아브라함이 자격이 있었습니까? 다윗이 자격이 있었습니까? 모두다 죄인이요, 자격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의로 여겨 주신 것입니다.
3절에 “여기신바”라는 단어는 ‘간주한다,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어떤 사람의 구좌에 돈을 넣는다는 뜻입니다. 은행에서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로마서 4장에서 11번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긴다, 인정한다, ......으로 계산한다.”는 뜻으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사람이 일을 하면 봉급을 받습니다. 요즘은 웬만한 회사는 사원들에게 직접 현찰을 주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온라인을 통하여 계좌에 입금을 시켜줍니다. 아브라함이나 다윗이 구원받기 위하여 한 일이 없습니다. 이들은 자격 미달 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의롭다 인정하십니다.
5절에 ‘일을 아니한다.’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것은 의롭게 살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경건치 아니한 자’는 성품이 깨끗지 못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라는 말씀은 우리가 예수만 믿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계좌에 예수님의 의를 갖다 넣고 예수님의 계좌에는 우리의 죄를 갖다 넣는다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의롭게 살지 못하였으나 의롭게 산 사람으로 인정하시고 깨끗한 성품이 아닌데도 깨끗한 사람으로 인정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긴다는 의미입니다.
일한 것이 없는데 하나님께로부터 의로 여기심을 받은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믿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진정 이런 행복을 맛보시며 누리십니까? 요즘 동네마다 경로당이나 마을 회관이 생겨서 어른들이 재미있게 노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것이 참 행복입니까? 아무리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재미를 맛본다 할지라도 진정한 행복은 그런데 있지 않습니다.
“죄악 벗은 우리 영혼은 기뻐 뛰며 주를 보겠네 하늘에 계신 주 예수를 영원히 섬기리!”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받을 자격도 없고 일한 것도 없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의롭다함을 받고 구원받은 백성들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감사하십시오. 기뻐 뛰며 찬송하십시오. 주님과 항상 동행하시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것은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로마서 4:1-25 / 조상호 목사
오늘은 로마서 4장1~25절의 말씀을 통해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라는 제목을 가지고 함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22절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여기 22절에 나오는 이것이란? 3절, 9절의 믿음을 뜻합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되었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 아브라함과 다윗을 소개하고, 그리고 이어서 할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아브라함: 여러분! 아브라함이 누구입니까?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까? 아브라함은 유대인의 아버지입니다.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민족이 형성되었고,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아브라함은 유대인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을 예로 들면서, 너희가 그렇게 존경하고 있는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은 율법을 지킨 행위로서가 아니고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살 당시에는 율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BC2000년대 사람이었던 반면,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신 것은 BC1446년이었습니다. 무려 500년 가량의 차이가 있습니다. 아브라함 때에는 율법은 있지도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지켜야 할, 또한 따라야 할 율법이 없는데, 어떻게 율법을 지키겠습니까?
EX) 이번에 호주를 가서 보니 많은 법들이 바뀌었습니다. 대표적으로는 라운드 어바우트에서 우회전할 때나 직진할 때, 신호를 반드시 주어야 한다는 새로운 법이 생겼습니다. 핸들을 돌리다 보면, 꺼지는 깜박이를 다시 껴서 자기가 가야할 방향을 확실하게 밝혀야 합니다. 또 불법 체류자를 고용한 고용주기 불법 체류자를 고용하다가 발각되면 어마어마한 벌금을 물어야 하는 법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고용주들은 불법 체류하시는 분들의 고용을 꺼리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불법 체류자들이 직업을 구하는 것이 과거에 비해, 매우 어려워졌습니다. 이와 같이 많은 법들이 과거와 많이 달라지고, 또한 새롭게 생겨납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법이 없었을 때는 상관이 없었지만, 법이 새롭게 생겼기 때문에 그 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시대에는 지켜야 할 율법이 없었기 때문에, 그가 따르고 지켜야 할 의무 또한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이 의롭다 인정을 받은 것은 율법을 지키는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행위로서가 아닌,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2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또 3절입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여기 본문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을 믿으매>라는 의미는 창세기 15장6절의 말씀을 뜻합니다.
창세기 15장을 보면, 하나님이 어느 날, 별이 수없이 많이 빛나는 밤에 아브라함을 바깥으로 이끌어 내시고 별을 세어 보라고 합니다. 그리고 네 자손도 앞으로 이와 같이 많아 질 것이라고 약속을 주십니다. 나이가 늙어 꼬부랑 할아버지가 될 때까지 자식이 하나도 없던 아브라함은 창세기 15장4절에서 자기 몸을 통하여 후사가 나올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6절에서 수많은 자손을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라고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아브라함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어느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또 5절을 보겠습니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아무리 경건치 아니한 죄인이라 할지라도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는 주님을 믿었을 때, 그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구원의 보편성>이라고 합니다. 어떠한 불의한 죄를 저지른, 사회에서 손가락질 받는 그 어떠한 악한 죄인이라 할지라도 의롭게 하시는 주님을 믿었을 때, 그 믿음을 보시고 그를 의롭게 해주시고, 그에게 구원을 베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절대로 행위로써 의로워 질 수 없습니다. 믿으십니까?
2) 다윗: 이스라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을 꼽으라면 아브라함과 다윗입니다. 물론 모세도 하나님을 대면한 자이고 율법을 받은 자로서 예수님 이전의 역사 속에서 귀하게 쓰임 받았던 인물이지만, 아브라함과 다윗은 그들이 신약과 연결되어 귀하게 쓰임 받았던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의 가장 첫머리에 누구 이름이 나오는 줄 아십니까?
마태복음1장1절,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오늘날 이스라엘 민족을 상징하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다윗의 별>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정치적으로는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어진 왕이었고, 백성들을 잔잔한 물가와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는 어진 목자였습니다. 또한 시편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그는 음악적인 소질도 뛰어났고, 수많은 주옥같은 시를 썼던 아주 멋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종경받는 왕이요, 어진 목자요, 훌륭한 지도자요, 영웅이었던 다윗도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이었다'라고 바울은 본문 로마서 4장6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다윗이 가장 행복한 순간을 느낀 것은 그가 거인 골리앗을 물맷돌로 단번에 무너뜨렸을 때가 아니었습니다. 또한 그가 사울왕에 이어 왕위에 올랐을 때가 아니었습니다. 그럼 언제 그가 행복할 수 있었습니까? 그가 잘못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의로 여겨 주시던 그 순간에, 그는 행복을 느꼈습니다.
사실 다윗의 생애를 살펴보면, 왕이라는 화려함 뒤에, 죄로 뒤범벅되었던 삶이었습니다. 그는 어느 날 낮잠을 즐기고 성벽 위를 거닐다가, 성벽 밑에서 목욕을 하는 한 여인을 보고, 음욕이 생기어 그녀를 궁으로 불러들인 후, 권력을 이용하여 그녀를 범해 버렸습니다. 그녀는 바세바라는 여인이었습니다. 다윗은 그의 범죄를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숨기기로 작정하고 바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전쟁터로 보내고 그것도 가장 위험한 적진 깊숙히 보내어, 급기야는 그를 죽게 만들었습니다.
어쩌면 사건을 완전하게 은폐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이후로 밤잠을 자지 못하였습니다. 밤마다 죄책감이 그를 짓눌렀습니다. 그에게 평안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얼마나 그가 고민하였는지 시편 32편3절과 4절에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내가 나의 죄를 고백하지 않을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또 4절에 "주의 손이 나를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뼈가 녹는 듯 하고 내면에 흐르는 액체가 완전히 말라 버리는 것 같았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말이 시편32편5절에 계속 이어집니다.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 다윗은 결코 의로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도 우리와 똑같은 아니, 더 심한 간통과 살인을 저지른 자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주님께 자기의 죄를 자복했을 때, 주님께서 그의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3) 할례: 바울은 할례와 구원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어리석은 유대인들은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은 것이고 거룩한 백성이 될 수 있다라고 고집하였습니다. "할례 = 구원 , 할례는 구원의 보증 수표다"라고 고집하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통하여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앞서 살펴 본대로 창세기15장 6절에서 아브라함이 의롭다 하심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할례에 대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듣고 시행한 것은 창세기17장25절에서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기, 약 20여년 전에 이미 의롭다 함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것은 의롭다 함을 얻는 필수 절차가 아니라, 이미 의롭다라고 인정받은 것에 대한 싸인에 불과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믿음의 선조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인정을 받은 것은 어떠한 율법을 지키는 행위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남자아이 성기의 양피를 자른 할례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의롭다 칭함을 받은 것은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믿음 때문에 그들이 의롭다 칭함을 받았고 그 결과, 그들은 순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믿음은 구원의 열쇠입니다.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소유했던 이 믿음은 무엇입니까? 의롭다 칭함을 받게 한 그의 믿음은 구체적으로 어떠했는지 우리는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의 믿음은 어떠했습니까? 오늘 이 시간에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게 된 그의 믿음을 해부해 보려 합니다.
첫째로 아브라함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었다:
17절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 믿었던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하나님이요,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이요,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세신 바 되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원래 아브라함은 자신의 처지로서는 믿는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상태였습니다.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웃음거리였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의 이름이 원래 아브람이었습니다. 큰 아버지, 모든 사람의 아버지라는 의미입니다. 당시에 자녀가 많으면 복이기 때문에 그러한 이름을 취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이름의 소유자인 그가 99세까지 이름과 걸맞지 않게, 자식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름 값도 하지 못하던 아브라함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믿었습니다. 무엇을 믿었습니까?
나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가능한 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불가능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불신한다 할지라도, 모든 사람이 고개를 가로 저어도, 그러나 "하나님은 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그러한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믿음의 고백인 것입니다.
EX) 조목사님께서 이번 성회에서 믿음과 확신에 대해서 말씀을 하시면서 여의도로 교회로 옮겼을 때의 비사(秘事)를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께서 기도하는 가운데 여의도에 교회를 세워야겠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70년대초 중동 오일 쇼크로 한국경제에 큰 어려움이 있을 때입니다.
그 때 수많은 사람들이 코웃음을 쳤습니다. 여의도는 모래사장으로써 도로도 없는 허허벌판인데다, 경제가 이렇게 어려운 때에 도저히 교회를 짓을 수 없다고 하며, 수많은 사람들이 반대를 했습니다. 또 다른 유명한 교단에서는 순복음 중앙교회는 곧 망하게 될 것이라는 말들을 공공연하게 했습니다. 교회 내에서도 많은 장로들로 그렇게 말하며 여의도에 교회 세우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나중에는 조목사님께서 여의도에 교회 세우는 것을 강력하게 추진하자, 몇몇 장로들이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후, 10년이 채 지나지 않아 여의도에 교회를 세운 것을 칭찬하는 소리들이 들렸습니다. 한강 고수부지를 활용하여 주차장 문제를 해결하고, 수십만이 모일 수 있는 적당한 장소라는 칭찬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믿음의 사람은 할 수 없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미쳤다고 해도 "하나님은 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그러한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당당하게 소리치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여러분! 노아를 아실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이치에 맞지도 아니하는 일을 했습니다. 어떤 미친 사람이 높은 산꼭대기에서 배를 만들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비웃었습니다. 그래도 노아는 하나님만 믿고 그 분의 말씀에 따랐습니다. 이것이 믿음이요, 신앙입니다.
신앙은 상황만 보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를 보는 것도 아닙니다. 문제로부터 도망하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은 문제 대신,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선이 넉넉히 이루실 그 하나님께 맞추어질 때, 우리는 실패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각이 하나님 대신에, 환경에 맞추어질 때 우리는 실패를 당하게 됩니다. 우리는 베드로를 기억할 수 있습니다. 그는 호수 저편에서 물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물위를 걸어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을 보며 물위를 걷다가 출렁거리는 물로 시각을 돌렸을 때, 그만 물속으로 빠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께서는 무엇을 바라보십니까? 고향을 떠나서 이민 생활하는 가운데, 부모님을 떠나 유학 생활을 하면서 무엇을 보십니까? 오직 주님만 바라보십시요. 넉넉히 이루실 주님만 바라보십시오. 그러할 때, 우리는 실패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믿으십니까?
둘째, 소망의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18절입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여러분! 기네스 북을 아십니까? 거기에 온갖 세계의 기록들이 나오는데, 기네스 북에 따르면, 세계에서 제일 아이를 늦게 낳은 여인은 1956년 10월에 출산 한, 57세의 모 연인이라고 합니다. 할머니가 되어 아이를 낳은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의 나이가 57세를 훨씬 넘기어 100세를 눈앞에 두었고, 또한 그의 아내 사라도 90세를 눈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많은 조상으로 세웠다는 것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자녀를 주셔서 앞으로 수많은 후손들이 그 몸을 통하여 나올 것이라는 사실을 믿었던 것입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아브라함을 치매 환자로 생각할 수도 있습 니다. 100세를 눈앞에 둔 노인네가 자녀를 갖게 된다는 것, 이것이 보통 일 입니까? 어쩌면 이러한 일들은 꿈속에서조차도 불가능한 일인데, 그런데도 그는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약속의 성취를 믿었던 것입니다. 그는 불가능한 환경을 보고도 믿음이 약해지지 아니하였습니다.
19절입니다.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구절입니다. 이 구절에 나오는 죽은 것 같음의 영어 번역은 his body was as good as dead.로서 이미 죽었다는 현재 완료형입니다. 이미 그에게는 생산 능력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교훈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물론 아브라함도 사람이기 때문에 항상 믿음을 가지고 살았던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흉년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명하신 가나안 땅에서 살지 아니하고 애굽으로 내려 간 적도 있었습니다. 또한 창세기17장과 18장에 보면, 아브라함과 그 아내 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속으로 웃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였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의심의 공격을 받지만, 의심에 빠지지 않고 의심을 극복한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자신과 자신의 아내의 몸이 나이 들어 생식 능력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았습니다. 의심은 들었지만, 그것을 넘어서 소망의 하나님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께서는 무엇을 바라보십니까? 누구를 바라보십니까? 오직 주님만 바라보십시오. 사방이 우겨 쌈을 당하여도 우리가 낙담하지 않는 것은 소망의 하나님의 바로 저와 여러분들의 하나님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가장 절망 가운데에서도 우리의 소망이 되시는 하나님, 하신 말씀을 기필코 성취하시는 소망의 하나님을 보십시오. 그 하나님에게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째로, 우리들에게도 아브라함의 믿음이 필요하다:
23~24절입니다.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만약 아브라함의 믿음만 생각하고 나에게, 또한 우리들에게 적용하지 않는다면, 오늘의 말씀은 영웅 아브라함, 위인 아브라함의 전기문을 읽은 것으로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 아브라함은 훌륭했어! 참 대단해! 그는 훌륭해"라고만 생각한다면, 대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 한 사람을 자랑하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얻은 사실은 우리 모두에게도 적용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에서 살리신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환경 가운데에서도 다른 것 보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확신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확신, 약속하신 것을 분명히 성취하실 소망의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고 믿었던 사람입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확신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 잡혀 어느 누가 어떠한 말을 해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EX)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블론딘이라고 하는 사람은 곡예사였는데, 그는 막대기 하나를 손에 들고 미국쪽과 캐나다 사이에 걸어놓은 줄을 타고 거센 몰살과 폭포가 휘몰아치는 나이아가라 폭포를 건너가곤 하였습니다. 어느 날 그가 줄을 타고 미국 쪽에서 캐나다 쪽에 도착하자마자, 수많은 관광객들이 환호하였습니다. 블론디는 자신에게 환호를 보내고 있던 관광객을 향해서 질문을 하였습니다.
"여러분! 제가 다시 한번 이 막대기를 들고 미국쪽으로 건너갈 수 있다고 믿습니까?" 사람들이 여지 저기에서 "예, 믿습니다. 당신이 다시 줄을 타고 건너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블론디는 앞자리에 앉아있던 어린 꼬마들에게 "그러면 여러분들도 내가 다시 미국 쪽으로 건너갈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예, 아저씨는 할수 있어요" 그때 그는 다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이 앞에 있는 소년들 중, 한 소년을 업고 건너갈 수 있다고 믿습니까?" 대답소리가 아까보다는 덜 요란했습니다. 그러나 상당수의 사람들이
"당신은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습니다." 어린 꼬마들도 막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소리치는 꼬마에게
"얘야! 네가 업혀라" 그러나 그 소년은 업히지 않았습니다. 또 다른 꼬마에게
"그러면 네가 업힐래?" 그러나 그 꼬마도 주저하였습니다. 그때, 어떤 꼬마 하나가
"아저씨, 저는 아저씨를 믿어요. 제가 업힐께요"하는 것이었습니다. 드디어 천진난만한 어린 꼬마가 그의 등에 업혔고, 그는 안전벨트를 하여 잘 묶은 다음, 다시 막대기를 들고 미국 쪽으로 건너가는데 성공했습니다.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믿는다고 큰 소리는 쳤지만, 실제로 믿음을 보일 상황에 닥치자, 어린 꼬마 하나 빼고 모두 다 꽁무니를 뺐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말로만이 아닌, 우리의 상식을 초월하여 없는 것을 있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며,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으로 믿으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의로 여겨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어떠한 행함과 실천을 보시고 의롭다 여겨 주신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우리에게도 교훈을 줍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여러분! 경험을 의지하지 않고 이성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믿음의 소유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신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비록 우리의 눈으로는 불가능한 것 같아도 전능하신 하나님, 소망을 하나님을 믿으셔서 주님의 역사하심을 목격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믿음의 의
로마서 4:1-5 / 황광민 목사
들어가는 이야기
여러분! "구원받았습니까?" 라고 물으면 무엇이라고 대답하십니까? 구원파 사람들은 이렇게 잘 묻습니다. 그러면 어떤 분은 "글쎄요, 구원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천국에 가 봐야 알겠지요." 라고 대답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고 부끄러워서 겸손의 자세로 대답하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겸손할 때가 따로 있지 이런 때는 겸손하면 안됩니다. 담대하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았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구원파 사람들은 아주 끈질깁니다. 구원받았다고 대답을 해도 또 묻습니다. "구원받은 것을 무엇을 보고 알지요?" 보통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받으면 당황해 합니다. 혹 "나는 성경에서 믿는 사람은 구원받는다고 했기 때문에 구원받은 것을 믿습니다."라고 대답을 해도 "어느 성경 몇 장 몇 절로 구원받았지요, 언제 몇 년 몇 월 몇 일에 구원받았지요?" 라고 물어댑니다. 그래서 말문이 막히게 되고 대답하지 못하면 자기들을 따라오라고 합니다. 확신을 가지십시오. 자신이 아무리 부족해도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은 믿음으로 구원받는 도리를 실증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이야 기를 통하여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는 진리를 증명합니다. 율법 이전의 믿음의 의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할례 이전의 믿음의 의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공로로 얻는 의가 아닙니다. 이것은 은혜요 선물입니다. 오늘은 봉독한 본문을 중심해서 <믿음의 의>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경청하시는 가운데 구원의 확신을 가지시고 감사하며 찬양 드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브라함과 다윗
바울은 믿음의 의를 증명하기 위하여 두 사람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아브라함과 다윗을 통해서 칭의의 교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선조로서, 한 사람은 위대한 왕으로서 유대인 역사의 중심인물입니다. 마태도 예수님을 소개할 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가장 확실한 두 사람을 들어 믿음으로 구원받는 도리를 증명하였습니다. 그 훌륭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데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그토록 훌륭한 다윗 왕이 믿음으로 구원받음으로 행복해 했다는데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아브라함이 훌륭하다는 것은 유대인들은 다 알고 있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아브라함은 우리가 보기에도 훌륭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조건 없이 믿고 따르는 그의 믿음이 얼마나 훌륭합니까? 고향을 떠나라 하시면 고향을 떠났습니다. 자식을 바치라 하시면 자식을 바쳤습니다. 하나님만 믿고 따랐습니다. 또 조카 롯에게 좋은 길을 양보하던 그의 넓은 마음은 어떻습니까? 어쩌면 아브라함 정도라면 행함으로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되지 않겠습니까? 유대인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율법을 철저히 지키며 공로를 쌓으려고 했던 바리새인들이 유대 신앙의 중심에 있었던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를 단호히 거절합니다. 아브라함도 믿음의 의로 구원받았음을 바울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물론 다윗도 훌륭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신하를 죽게 하고 그의 아내를 빼앗은 무서운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보내셔서 다윗을 책망하셨습니다. 다윗은 곧 회개하고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이 사건을 배경으로 시편 23편을 썼습니다. 그는 자신의 심정을 말하기를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나이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뭄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 라고 하였습니다(3절). 그러나 용서받고 나서는 "허물의 사함을 받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하나님께 정죄를 당치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하였습니다(1-2절). 이 말씀을 바울이 인용하였습니다. 여기서 다윗이 사함을 받고 복되다고 한 것은 은혜로 사함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무슨 공로로 구원을 받았다면 자랑이 있었을 것입니다. 오직 은혜로 구원받았음을 찬양하였습니다.
믿음의 의
이처럼 바울은 아브라함과 다윗을 들어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받는 도리를 증명하였습니다. 공로가 있어 구원받는 것이 아님을 설명하였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훌륭함으로 구원받지 못합니다. 오직 은총으로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아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핵심입니다. 여러분! 창세기 15장을 기억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복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상속자인 자식이 없었으므로 더이상 필요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상속자를 주실 것이며 자손을 하늘의 뭇 별처럼 셀 수 없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이것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공의로 여기셨습니다.
여기서 의로 '여기신다'는 말의 헬라어 뜻은 '통장에 넣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을 의로 평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의로 여기시고 그 의를 그 사람의 통장에 입금시켜 주십니다. 하나님의 의가 믿음의 선을 타고 믿는 자의 통장에 온라인 입금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의가 온라인으로 믿는 이들에게 고스란히 옮겨집니다. 믿음을 가지고 의를 대신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 말은 7절의 '가리우심을 받는다'는 말과 뜻이 통합니다. 이 말은 죄가 없어졌다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여전히 거기 있지만 하나님의 은혜의 보자기로 가리우시고 보지도 않고 인정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죄인 그대로를 의인으로 봐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공로로 값을 치르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은총으로,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할례 이전의 칭의
이제는 믿음의 의와 할례와의 관계를 살펴보겠습니다. 이것은 칭의와 기독교 의식과의 관계도 설명할 수 있습니다. 바울 당시 유대인들은 할례를 중요한 표식으로 생각했습니다. 할례는 하나님이 유대인들을 받아 주시는 수단으로 생각했습니다. 할례를 받으면 구원이 보증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할례 받은 사람은 지옥에 갈 수 없다고 랍비들은 말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지옥의 문에 담았다가 할례 받은 이스라엘 사람은 못 들어가게 하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할례를 행할 때 다음과 같이 축복하고 기도했습니다. "어머니의 태도부터 거룩히 구별된 자에게 복이 있을 지어다. 그의 자녀로 인침을 받은 자에게 복이 있을 지어다." "몸에 아브라함의 인침을 받지 못한 자는 유월절 떡을 먹지 말지어다." 이런 기도와 함께 할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래서 할례에 대한 자긍심이 강합니다. 할례를 너무 믿고 자랑합니다. 그래서 '할례당' 이라는 말까지 생겼습니다.
어떤 분이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설교자가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고 설교하더랍니다. 그래서 유대교나 기독교나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이웃이 누구냐를 설명하는데 "할례 받은 자들만이 우리의 이웃입니다."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다시 기독교와 유대교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너무 할례를 믿고 자랑했습니다. 할례를 구원의 보증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구원은 믿음의 의로 받습니다. 아브라함이 의롭다고 인정받은 것은 할례 받기 이전입니다.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어서 의롭다고 인정받은 것은(창15:6), 할례를 받은 것(창17:10)보다 14년 전의 일입니다. 할례는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고 여김 받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주신 표입니다. 이것은 입학하고 후에 입학식을 치르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사랑을 약속하고 후에 결혼식을 치르는 것과 같습니다. 의식은 내용을 확인하는 표현 일뿐입니다. 11절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세례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례는 구원받는 조건이 아닙니다. 세례는 구원받은 백성들에게 베풀어 갖게 하는 하나님의 자녀의 표입니다. 구원받은 자녀가 되었기에 세례를 베푸는 것입니다. 즉 세례도 구원받는 공로가 될 수 없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받습니다. 아브라함이 할례 받기 전에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건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율법 이전의 칭의
이제는 믿음의 의와 율법과의 관계를 살펴보겠습니다. 율법도 유대인들에게는 특별한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을 율법을 가지고 있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물론 율법은 거룩하고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은 구원의 수단, 칭의의 수단은 아닙니다. 율법은 오직 하나님의 완벽한 표준을 보여주고, 이를 통한 인간의 한계를 보여주며 그리고 이렇게 무능력한 인간을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해 줍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귀한 것이지만 율법을 지켜 행함의 의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생각은 착각입니다.
바울은 율법의 귀함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능력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잘못임을 지적했습니다. 13∼14절을 함께 보십시다.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상속자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파기되었느니라."율법 이전의 믿음의 의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를 증명하기 위하여 아브라함을 예로 들었습니다. 물론 아브라함도 행위에 있어 누구에게 뒤지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행위에 의하지 않고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았습니다. 사실 아브라함은 모세의 율법보다 훨씬 이전의 인물입니다. 바울이 이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인간을 의롭다고 여기시는 것은 율법을 아는 것이나 율법에 따른 행위와는 무관합니다. 오직 은총으로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은혜를 자랑하라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의 은총을 자랑해야 합니다. 2절을 보십시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아브라함도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도무지 없다는 것입니다. 은혜로 구원받는데 무슨 자랑을 하겠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은총을 자랑할 뿐입니다.
또 5절의 말씀을 보십시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느니라." 여기서 일은 행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행위가 없을지라도 믿는 자를 구원하십니다. 경건치 못한 자들도 구원하십니다. 우리가 행한 노력의 보수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 것도 자랑하지 맙시다. 헌금을 많이 드려도 자랑하지 맙시다. 그것으로 구원받지 않았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총이요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총만 자랑해야 합니다. 감사함으로 살아야 합니다.
뉴웰(W. R. Newell) 목사님이 세인트루이스에서 집회를 하였습니다. 하루는 로마서 4장 5절을 가지고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하시는 하나님"을 소개했습니다. 집회가 끝나고 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집회가 끝나고 한 사람이 찾아 왔습니다. 그 사람은 자신이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무엇을 해야 구원을 받을지 모르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여러 사람에게 물어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성경 읽으라면 성경 읽고 기도하라면 기도하고 구제하라면 구제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여전히 불안하여 견딜 수 없다고 하면서 무엇을 해야할지 가르쳐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뉴월 목사가 말했습니다. "오늘 제가 한 설교를 못 들었습니까? 로마서 4장 5절을 다시 보십시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 시나니... 이만 하면 됐지요?" "아니 뭐가 됐다는 겁니까? 제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되죠?" "「일을 아니할지라도」를 읽으세요. 무슨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행위가 없어도, 경건치 않아도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그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갔습니다.
그 다음 날이었습니다. 어제 그 사람이 간증을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앞에 나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제가 명언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저는 수많은 명언을 만났지만 이번에 발견한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 이것이 최고의 명언입니다. 과거에는 제가 무엇을 해야 구원 얻는 줄 알고 잠을 못 이루었지만 이제는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너무 감격하여 잠을 못 잤습니다. 저의 인생은 이제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성도 여러분! 고민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 아닙니다. 무슨 공로로 구원받는 것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총을 자랑하십시오. 그에게 감사하십시오. 감사함으로 은혜를 갚으십시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이 진리를 가지고 구원의 확신을 가지십시오. 감격이 있는 신앙생활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