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씨년 스러운 날씨탓에 마음이 몹시 울적하다. 신김치로 전이나 부쳐서 막걸리나 한잔 할까나...?
전화벨리 울렸다. " 앗! 뱀이다~아~~~ 몸에좋고 맛도좋은 ...... " (우리 딸이 소리로나 몸보신 하라고 핸드폰에 올려놓은 벨소리가 그렇다. 언제 어디서나 건강만은 꼭 챙기라는 그런 뜻이라니 지울수도 없고......) 친구의 전화 였는데 모처럼 스님에게 가잔다. 두달이나 가겠냐고 했는데 꿈쩍 안하더니 어쩐 일일까...?
해가 질 무렵 속옷 몇점을 싸들고 버스를 탔다. 늦게 도착해서 10시가 지나고 한참이 흘렀겠다. 드디어 친구랑 스님을 찾아 가기로 하고 친구의 차로 출발을 하였다. 지금 부지런히 가도 1시가 넘어서 도착을 하겠거니......
처음 가보는 그런 길이라서 목적지에서 많이 어긋났다. 버스 정류장 건너편에 첫번째 집 옆으로 한 5리정도 길이 끝날때 까지 올라 오라는데...... 버스 정류장 건너에 집있는 곳이 여러곳이니 참으로 난감하다. 잘못하여 길도없는 심산유곡으로 빠지면 어쩌나.........?
어찌 어찌하여 찾아 들어가니 스님께서 먼발치 까지 나와 계셨다. 요사체의 봉당에 몇컬레의 신발은 있는데 방문을 바라보니 불은 꺼져있고 어느덧 시계는 1시가 지나고 있었다. 스님께 넙죽 엎드려 큰절로 인사를 드리고 얼싸 손을잡고 반갑게 흔들었다. 아무리 친한 사이의 스님 이지만 우리는 상호 존중의 의미에서 언제나 큰절로 예를 드린다. 그러면 언제나 스님께서도 큰절로 답례를 하신다.
주무시는 보살님을 스님께서 깨우시더니 느닷없이 그시간에 곡차를 하자고 하신다. 어떻게 말릴 틈도 없었다. 보살님 눈치가 보였지만...... 반짝 거리도록 길들여진 괘상판에 몇가지 안주를 올려서 보살님께서 가지고 오셨다. 안주의 면면을 보니 어쩜 내가 좋아하는 그런것들로 가득 할까? 매운 풋고추가 결이 삭은듯한 시원한 동치미와 잘 구워진 김도 있고 시원 새콤한 김치에 구수한 된장도 곁들였다. 그시간에 부드러운 맛의 부침도 만드셨내. 처음 먹어보는 참취나물 절임도 있었는데 산나물로 절임을 하는줄 처음 알았다. 평소에는 곡차를 하시는지 모르지만 한번도 열지않은 120년산 더덕으로 만든 곡차를 친구와 두분이 잡고 힘줘서 겨우 뚜껑을 열었다. 더덕주의 모습이 황홀하다. 이글의 맨 아래에 사진만 올리니 너무 야속하다 마시기를......
적당히 취기가 돌고 저만치 옆에 있는 대한민국 제일의 대금을 탐냈더니 한곡 들려 주신단다. 스님 이시니 상업성이 있는 그런곡이 아니라 대금의 대표격인 정악이라 하신다. 곡의 뜻은 모르지만 소리만은 심금을 울린다. 지금 불어주신 대금이 대금제조 명장인 김종선님의 걸작 이라고 하신다. 그분은 요사체에서 깊은잠이 드셨다는데 날이 밝으면 그분을 뵐수 있으리니......
애고~~~ 문창호지 밖에 빛이 비치나? 아님 동창이 밝아오나......? 문이 희끄무레한 색으로 변해서야 우리 셋이는 나란히 누웠다. 쓰러진 왜송으로 군불을 피우셨다는데 앉아 있는동안 수시로 궁뎅이를 들썩 거려야 했다. 그런 방바닥에 누우니 아~ 쌓였던 피로가 한꺼번에 사라 지는듯...... 황토 방바닥을 고집 하셔서 방바닥이 울퉁불퉁 하기는 하지만 건강에는 최고인듯 하다.
11시 쯤이나 되었을까? 공양주 보살님의 "아직 주무세요?" 라는 소리에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스님은 벌써 밖에서 마지막 겨울 준비를 하신듯 옆에 계시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사시불공이 끝난 시간이었다.
흑미를 반쯤 섞어서 윤기가 흐르는 밥을 공기 가득 담은 다음 김치에 콩나물을 넣고 맵게 끓인 국에다가 얼얼한 속을 달랬다. 아침공양 전에 김종선님을 만나 인사를 드렸다. 쥐띠라고 하시니 벌써 환갑이 되신걸까...? 연세나 작위에 비하여 참으로 겸손 하시다.
八자를 연상 하게끔 양옆이 고상하게 흘러내린 눈섶하며 인중이 길어서 인가? 성품은 온화하고 조용 하시다.
아픈 역사의 시절 한창 김두한이 주먹세계를 평정 할 때 왕십리 나와바리를 굳건하게 지키고 김두한님과도 각별한 사이셨던 의리의 사나이 김산님의 자재분 이시다. 어릴적 젓대(피리, 대금, 퉁소 등의 옛 관악기 종류) 소리에 매료되어 피리만 분다고 엄하기로 소문난 선친께 쫓겨 나기를 여러번. 급기야는 집에 들어 가지도 못하는 그런 지경에 이르렀지만......
상당한 영화를 누릴 수 있었지만 모두 버리고 부친으로 부터 버림을 받으면서 대금 만큼은 놓을수 없었다고 지난 고회를 밝히시는데......... 이런 분들이 이나라에 계시기에 전통은 굳건하게 이어져 가나보다.
우리 김종선님께서는 박정희 대통령께서 외국을 방문 하실때 수년간을 수행 하셨다는데 1m 남짓한 대나무 대금 하나로 외국에 우리의 멋을 알리고 찬사를 받으셨다는데 그런 영화를 누빈 분이라고는 도저히 믿기 어려울 정도로 다정다감 하시다. 쌍골죽(대나무 양쪽에 골이 있음 : 대금 재료로 쓰임)으로 설움도 당하셨지만 그래도 대금에 대한 미련은 버릴수가 없었다고......
우리모두는 널리 알려진 대금연주의 명인 이생강님을 알것이다. 이생강님은 상업적이거나 저잣거리의 대금에는 따를자가 없지만 정통성을 잇는데는 바로 사진속의 김종선님을 예기 하신다니 그분을 만난 우리는 참으로 행운이라 아니 할 수가 없다. 그러니까 이생강님과는 사회의 서로를 필요로 한 형제간이라 하셨다.
무공스님께서 대금에 심취를 하신 이유도 김종선님의 대금 연주에 매료 되어서 청하기를 여러번, 결국 스님의 간청에 어쩔수 없이 승락을 하시고 대금 스승님이 되셨다고 하신다. 그러니까 무공스님의 대금 스승님은 대금명장 김종선님이시다.
김종선님께서는 한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송해씨가 사회를 보는 "전국 노래자랑"에 국악 반주자로 4년을 지내셨다고 술회를 하신다. 그러나, 탁한 연예계를 견디지 못하시고 결국에는 생활 보장이 확실한 그자리를 떠나시어 정통성의 맥을 찾기로 결심 하셨다고 하신다.
좌로부터 무공스님, 대금명장 김종선님, 우리친구 신태철님, 그다음이 스님의 동생으로 대덕 연구단지 어느 연구소의 기술소장님이라고 하신다. 연구소 소장님의 아래, 스님의 두번째 동생 또한 스님이신데 경북의 어느 바닷가에 여상스님은 계신다. 예전에 여상스님께서 강원도로 찾아 오셨기에 대접을 해드린것이 고작 연밥이었으니 참으로 미안하기 그지없다. 그렇다고 스님께 원주명물 옻닭을 대접 하기도 그렇고......
우리 친구도 스님과 나와는 다른 각도에서 정말로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나름대로 길지는 않지만 깊이있는 대화를 나누는듯......
친구가 자기집 가훈을 써달라고 졸라대니 스님께서 거절을 안하시고 쾌히 그러겠노라고 하신다. 우리는 경치좋은 뜨락을 떠나서 스님의 방으로 향했다.
친구는 한참동안을 먹을 갈았다. 점도를 확인하신 스님께서 드디어 대필을 들으시고 정신 집중을 하신다. 몇합정도 지났을까......? 일필휘지(一筆揮之)로 번듯 써내려 가시니 가히 필체가 영남제일 문필가 답다.
친구의 가훈이 멋스러운 모습으로 태어나고... 김종선님의 농이 옳을것 같은 느낌은 내가봐도 작품이 격이 높아 보였다. 사례는 어떻게 하냐고 하니까 가훈을 법당에 올리고 불전이나 놓으라고 하신다.
작품의 생명은 낙관에 있는것. 아무리 잘쓰신 작품이라 하여도 낙관이 없으면 생명이 없는것 그날 스님께서는 흔쾌히 낙관을 찍으셨다.
형제간에도 사이가 좋으신듯 동생인 연구소장님께 집안 내력에 대한 자부심을 읊은 글을 한시로 남기셨다. 그것을 감상하며 스님 형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소장님 표정으로만 봐도 경이로운 그런 분위기가 아닐런지......
밤이 찾아올 무렵 스승님과 제자의 이야기는 끝이없고...... 뜨락에 피워놓은 불길이 따뜻하다. 마치 두분의 다감한 그런만큼 따뜻한듯 별 말씀이 없으신 김종선님도 이날따라 국악에 대한 소회를 한동안 밝히셨다.
맥을 이어 가는이 없음을 한하시고...... 두분의 말씀은 어느덧 저녁으로 접어 들었다.
함께 대금 보존에 대한 예기를 마치고
날은 저물어 어느덧 저녁예불 시간이 되었다.
밖에서 너무 오래 있었던 탓일까? 따뜻한 차한잔 하자고 하신다. 귀한손님에게만 대접 하신다는 장뇌삼 꽃차와 으름덩굴 열매차를 적당히 섞어서 한잔에 또한잔을 들이키니 산삼 향기가 입안 가득 하도다.
밖의 찬공기에 고뿔이라도 걸리셨나......? 연신 화장지를 만지작 거리신다. 그렇기도 하려니...... 몇시간째 밖에서 예기꽃을 피우셨으니
아휴~ 스님의 팔자 콧수염과 덥석부리 턱수염을 깎으시면 좋으련만 ...... 왠지 수척하신 모습이 조금은 안스럽다.
고란사에 계실때 법당에서 대금으로 찬불가를 연주 하셨단다. 그모습을 어느 사진 작가가 찍어서 보냈다는데 정말 멋지시다.
지난 봄철 어느날 희방사에 계실때 폭포위의 바위에서 한곡 하셨다나...?
아! 스님 말씀대로라면 120년 묵은 더덕으로 담근 북한산 곡차라고 하신다. 더덕의 크기로 보아 남한에는 저렇게 굵은 더덕을 본일도 없다. 버섯이 서너조각 있었는데 영지와 참나무 상황인듯 하였다. |
첫댓글 자료 고맙습니다 대송님 풍기분이라서 관심이 많으시군요 자주 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