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The United States Of America)
- 북아메리카-
▶ 개관 : 공식명칭 - 미국 (The United States Of America-美國)
위치 - 북아메리카
인구 - 약 33,291만명 (세계 3위) 23,01,21
GDP - 약 22조6,752억 달러 세계 1위
수도 - 와싱턴 D.C (한국과 시간 -13시간 차)
면적 - 약 982만㎢
기후 - 온대성기후, 냉대성기후
종족 - 백인(80%), 흑인(12.8%), 아시아계
언어 - 영어
정부 - 연방공화제 / 양원제 (대통령)
종교 - 개신교(52%), 로마가톨릭(24%), 모르몬교
화폐 - 미국 달러 1USD=1236.50원 (23,01)
국가번호 - 1
약칭은 U.S.A.이다. 50주와 1수도구로 이루어진 본토 외에 해외속령(海外屬領)
으로 푸에르토리코·사모아제도·웨이크섬·괌섬과 국제연합의 신탁통치령인 마샬
제도·메리아나제도· 캐롤라인제도 등을 보유하며, 세계 각국의 이민들과, 노예
로 이입된 아프리카 흑인 및 토착 인디언들로 이루어진 복합민족국가이다.
그러나 백인종이 77.4%로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고, 흑인종은 13.2%, 아
시아계 5.4%, 원주민은 1.4%, 기타가 2.6%이다.
세계에서 가장 거대 경제부국으로,세계경제의 주도권을 행사하고 있다.
그러나 1950년대 후반부터 서독 등,유럽 여러 나라와 일본의 경제부흥이 진전됨
에 따라 제2차세계대전 이전과 같은 미국 경제의 압도적 지배력은 약화되고,
1958년 이후, 국제수지가 적자를 기록하기도 하였다.
2014년 현재 1인당 국민소득은 5만 4629달러이다.
▶ 미국의 형성 및 변천 : 1492년 콜럼버스(Columbus,C.)의 신대륙 발견 이래, 아메리카
대륙은 유럽 열강들의 식민지 개척경쟁의 대상이었다. 16세기에 들어 퀘벡에
프랑스령 식민지가 건설된 것을 필두로 하여, 현재의 뉴욕에 근거지를 마련한
네덜란드, 그리고 국내의 복잡한 문제를 식민지건설로써 어느 정도 해결해 보
려한 영국 등이 북미대륙을 무대로 각축전을 벌이게 되었다.
1606년 유럽 열강 가운데서 최초로 영국이 버지니아 일대에 이주민 정착지를
건설하기 시작. 그러나 미국대륙에서의 식민지건설은 많은 어려움과 난관을 경
험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1620년 종교박해를 피해 네덜란드에 갔던 청교도
일파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지금의 매사추세츠주에
상륙해 플리머스 식민지를 건설했다. 이후 1733년까지 영국은 북아메리카의
대서양 연안에 13개의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그렇지만 북아메리카대륙에서는 기존의 원주민이었던 인디언, 영국의 식민지,
그리고 18세기에 건설된 프랑스의 식민지 등, 3파의 항전이 계속되었다. 결국,
이 싸움에서 영국이 승리, 북미대륙 지배권은 영국이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본국과 식민지인과의 대립과 알력이 본격화됨을 뜻하는 것이었다.
1773년 ‘보스턴 차당사건(The Boston Tea Party事件)’을 계기로 영국 정부가
강력한 응징조치를 취하자, 북미대륙의 영국식민지들 사이에서는 공동의 저항
운동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1774년 9월 필라델피아에서 식민지 대표들이 모여
제1차 대륙회의를 개최하였다.
1775년 4월 영국군과 식민지人 사이에 유혈충돌이 벌어져 이로써 아메리카혁
명의 막이 올랐다. 1776년 1월의 대륙회의에서는 처음으로 독립문제가 공개적
으로 논의되어, 이에 따라 북미대륙 13개 영국 민지는 개별적으로 독립정부를
수립, 마침내 1776년 7월 4일, 독립선언서가 대륙회의에서 공식적으로 채택돼
영국으로부터의 미국 독립이 정식으로 선포되었다.
미국의 독립혁명은 영국 본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전쟁이었던 동시에, 식민
지 내부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확립을 위한 혁명이기도 했다. 미국의 독립
은 1783년 파리조약에서 승인됐으며, 미국은 1787년 필라델피아에서 헌법회
의를 열고 연방헌법을 제정하였다.
이후 미국은 프랑스·스페인·멕시코 등으로부터 영토를 획득하여 1848년경 거의
현재와 같은 대륙국가로 발전하였다. 그러는 가운데 미국은 정치적 민주주의를
나름 발전시켰고 개척지의 확장과 더불어 산업혁명, 교통혁명이 진행되었다.
원래 미국의 북부, 남부는 식민지 건설 당시부터 그 성격을 달리하고 있었다.
북부는 그 건설단계에서 북유럽 및 서유럽으로부터의 이민을 받아들여 산업자
본가들이 많았으나, 남부는 여전 보수적이며 흑인노예제에 기초한 농업자본가
들이 우세하였다.
1861년에 시작된 미국의 남북전쟁은 명분상으로는 주권론(州權論)을 주장하는
남부와, 합중국론(合衆國論)을 주장하는 북부와의 헌법상의 해석문제를 둘러싼
싸움이었다.
1865년 북부의 승리로 남북전쟁이 종결되자, 미국의 민주주의는 더욱 확고한
기반을 확보, 마침내 1870년 흑인들에게도 투표권 부여되어 노예제도가 폐지
되기에 이르렀다.
남북전쟁이 끝난 다음 약 25년 동안, 미국사회는 급속도의 경제혁명을 경험하
였다.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의 과정에서 대기업과 산업주의의 원리가 국민생
활 속에서 자리를 굳혀가고 있었다.
1865년부터 1900년까지 이른바 산업주의시대가 활짝 꽃피게 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으니, 첫째 남북전쟁에서 승리한 북부의 기업가와 상인들은 자신들
의 경제활동을 순조롭게 추진할 수 있었고, 둘째 풍부한 천연자원과 넓은 국내
시장을 가지고 있었던 미국은 열강들의 식민지쟁탈 경쟁에 휘말리지 않고 국내
발전을 추진할 수 있었고, 셋째 유럽으로부터 끊임없는 이민 물결을 흡수하여
노동력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으며, 넷째 기업에 대한 정부 후원과 법원의 친기
업가적 법률제정 등의 덕분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팽창과 풍요의 이면에는 사회의 안정과 결속을 위태롭게 할
정도의 극심한 빈곤과 부패, 그리고 계급갈등이 내재하여 있었다.
즉, 극심한 빈곤과 소득 불균등, 경제력의 집중에 의한 독점현상은 미국 국민
전체의 경제적 자유와 정치적 민주주의를 위협하게 되었다. 이런 사회·경제적
분위기에 대한 문제의식이 팽배해지는 가운데, 사회정의운동과 정치개혁운동
을 공통분모로 하는 이른바 혁신주의운동(Progressive Movement)이 일어났다.
한편, 이 기간 동안 유럽의 열강들은 전세계에 걸쳐 영토와 이권을 확대해 가는
제국주의시대를 열고 있었다. 미국도 뒤늦게 이와 같은 시대적인 조류를 타기
시작하였다.
1898년 스페인과의 전쟁을 계기로 제국주의 대열에 본격적으로 끼여든 미국은
중국에서의 세력분할 경쟁에서 한 발 뒤진 것을 만회하기 위해 ‘문호개방정책
(Open Door Policy)’을 선언하고 나섰다.
반면 미국은, 먼로 독트린(Monroe Doctrine) 선언 이후, 라틴아메리카에 대해서
는 특수한 이해관계를 내세워 우월성을 주장했다. 1914년 유럽에서 제1차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미국은 즉각 중립을 선언했으나, 영국과 독일 등과의 경제적
이해관계로 말미암아 전쟁에 개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대통령 윌슨(Wilson,T.W.)은 러시아혁명의 발발 등으로, 연합국의 전열에
차질이 생기자, 결국 1917년 4월 독일과의 전쟁을 선포, 제1차세계대전에 참전
하였다. 제1차세계대전이 끝난 뒤, 미국의 1920년대는 경제적 번영을 구가하며
기업적 가치관과 물질주의가 우세해져 사회가 정신적인 획일화의 방향으로 치
달았던 이른바 대중사회의 시대였다.
곧이어 미국을 강타한 것은 1929년의 대공황이었다. 그러나 1933년 루스벨트
(Roosevelt,F.D.)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뉴딜정책(New Deal Policy)을 추진,
미국 자본주의의 위기를 어느 정도 극복하였다.
한편, 1940년대에 들어서자 세계는 유럽과 아시아에서 또 한 차례 세계대전을
경험하게 되었다. 미국도 수많은 논란 끝에 참전주의자가 선거에서 승리
전체주의에 대한 반대를 명분으로 제2차세계대전에 개입하였다.
제2차세계대전이 연합국 승리로 끝나자, 미국은 세계적 차원에서의 자본주의
체제 수호의 선봉장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소련과의 체제경쟁이 가속화되어
가는 가운데, 이른바 냉전 논리도 정착화되어 미국은 세계적인 규모로 자본주
의의 지원자·옹호자 구실을 도맡게 되었지만, 유럽과 일본의 부흥에 따라 일등
국가의 위치는 약화되어 갔다.
그러나 건국 이후, 19세기 말까지는 국가적 기능의 중요성이 아직 낮았고 주의
힘이 강력하였으나, 20세기에 들어와 대내적으로는 독점산업자본의 거대화와
대외적으론 국제적 경쟁이 극심해진 데다가, 더욱이 제2차세계대전 후 세계의
지도국가로서의 비중이 커지는 등, 정세 변화에 따라, 중앙정부의 권력강화를
모색하고 있다.
미국독립 당시 유럽은 프랑스혁명 뒤의 혼란기였에 미국은 분쟁에 휘말려들지
않으려고 중립주의를 취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먼로주의라고 하는 비개입고립
주의로 미국외교의 기본자세였다.
그러나 19세기 말 국내의 자본주의체제가 정돈되고, 개척지가 메워지자 태평양
으로 적극 진출하였으며, 제1·2차세계대전 때는 먼로주의를 관철하지 못하고
수동적으로 개입하기에 이르렀다.
제2차세계대전 뒤, 전쟁 중에 지대한 구실을 수행하였던 미국은 유럽의 피폐,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대두 등의 국제정세에 비추어 외교정책을 적극적
인 개입주의로 전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제연합에의 참가, 마샬플랜에 의한 유럽의 부흥원조, 중국의 공산화, 더욱이
소련과의 냉전격화 등의 상황변화에 따라, 미국은 공산주의에 대한 ‘봉쇄정책’
에서 ‘반격정책’으로의 전환을 목표로 하는 상호방위조약 체결과 신흥 제국에
대한 경제·군사적 원조를 세계적인 규모로 확대하기에 이르렀다.
1989년 몰타에서의 미·소 마지막 정상회담을 계기로 탈이념과 탈냉전을 선언하
고, 1990년부터 시작된 공산사회주의 사회의 붕괴로 소련이라는 국명이 사라지
면서 미국 단독의 힘 중심으로 세계 서가 재편되었다
▶ 여행정보 : 치안상태-양호 / 긴급연락처 : 대사관 1-202-939-5600
팁 문화 : 레스토랑, 택시는 이용요금의 15~20%, 호텔, 공항에선 가방 당 1달러
전력전압 : 220 / 230 / 240V 콘센트 3구
▶ 국가 명칭 : 1507년, 독일의 지도학자 마르틴 발트제뮐러가 세계 지도를 만들었는데,
그는 이 지도에서 서반구에 있는 땅을 이탈리아의 탐험가이자 지도학자인 아메
리고 베스푸치의 이름을 따서 "아메리카"라고 명명했다.
과거 영국 식민지 시대에 미국 독립선언서에서 "미합중국의 만장일치 선언"
(unanimous Declaration of the thirteen united States of America)이라고 나와 처음
으로, 이 나라 현재 명칭이 쓰이는데, 1777년 11월 15일에 제2차 대륙회의에서
연합헌장(Articles of Confederation)을 채택하면서 "이 연합의 입구는 '미합중국'
(The United States of America)이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오늘날의 국호가 확립
되었다.
한편 오늘날 대한민국 및 중화권에서 쓰이는 '미국'(美國)이라는 명칭은 청나라
시대 중국인들이 '아메리칸'을 중국어 발음에 가깝게 적은 음역인 '美利堅'에서
왔다. 이 말의 기원은 미국이라는 뜻인 'American'에서 나온다. 당시 청나라 시
대 중국인들은 이것을 '메리칸'으로 들었고, 가까운 중국어 발음인 '메이리지안
(美利堅)'이라고 했다. 당시 조선인들이 이를 한국어식 한자음으로 읽어 '美利
堅(미리견)', '미국(美國)'으로 읽고 표기했다. 일본에선 '亞米利加'(아미리가)로
표기했으며, 이를 줄여 '베이코쿠(米國)'로 표기하기도 했다. 북한에서는 현재
에도 일본식 음역인 '미국(米國)'을 사용한다.
▶ 역사 : 아메리카 원주민과 유럽의 식민지화
알래스카 원주민을 비롯한 북아메리카 본토 원주민들은 주로 아시아에서 이주
해 온 것으로 보인다. 12,000년 ~ 40,000년 전에 아메리카에 온 것으로 보이는
이들 북아메리카의 동남부와 서남부의 원주민 집단은, 진보한 농경과 건축을 통
해, 국가 수준의 사회를 이룩했고, 북미 전지역에 걸쳐 다양하고 복잡한 문화를
형성했으나, 유럽인들에 의해 전파된 천연두 등, 수많은 외래 질병과 전쟁 및 노
예화와 착취로 인해, 수많은 아메리카 토착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1492년경 8천만 명에 이르렀던 원주민의 인구는, 1650년경에는 8백만 명 정도
로 줄어었는데, 이는 유럽 흑사병의 인류의 대재앙이라고 서술하기도 한다)
1492년, 제노바 출신 탐험가 크리스토 콜롬버스는 포르투칵의 지원을 얻지 못하
자, 이사벨 1세의 주도로 카스티아와 아라곤왕국이 연합해 성립된, 스페인 왕실
과 계약을 맺어 카리브 海 제도까지 다다라, 원주민들과 처음으로 조우하였다.
1513년 4월 2일(조선 문종 시기), 스페인의 정복자 후안 폰세 데 레온이 스스로
"라 플로리다" (La Florida)라고 부른 땅에, 처음으로 발을 디뎠는데, 이때가 유럽
인으로는 최초로 미국 본토에 도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지역에 스페인 정착지가 들어서고, 연이어 오늘날의 미국 서남부지역인 멕시
코까지 이어졌다. 프랑스人 모피 무역상 쿠레르 데 브와들은 오대湖 주변 지역
에 누벨 프랑스라는 전초 식민지를 건설했고, 마침내 프랑스는 멕시코만(灣)에
이르는 북아메리카 내륙 지방 대부분을 자신들의 영토로 주장했다.
정착에 성공한 초기 영국인 정착지로는 1607년(조선 선조/광해군 시절) 제임스
타운의 버지니아 식민지와 1620년 청교도들의 플리머스 식민지다. 1619년에
이들 식민지는, 이미 버지니아 회의를 구성했는데, 이는 메이플러워 협약보다도
앞선, 미국 최초의 민주적인 의회였다. 1628년(조선 인조 6년)에 메사추세츠 灣
식민지회사의 칙허로 말미암아, 이주민들이 대거 흘러들어오게 되며, 1629년에
메릴랜드에 1634년에 뉴 잉글랜드에는 10,000여명의 청교도들이 살게 되었다.
1610년대 말에서 미국 혁명에 이르기까지 약 50,000명의 죄수들이 영국령 아메
리카 식민지로 이송되었다.
1614년부터 네덜란드 정착민이 맨해튼 섬의 뉴 암스테르담 등, 허드슨江, 하구
를 따라 정착했다. 이주해 온 대다수 인구는 잉글랜드의 청교도, 프랑스와 스위
스의 위그노, 아프리카 노예로서 이주하거나 중남미 식민지에서 들어온(이미 사
탕수수 농장의 노동력을 위해 도입되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었다. 이들은
남부 곳곳에 이주하여 미국의 역사가 태동했다.
1674년, 영란전쟁 이후, 네덜란드는 자신들의 아메리카 영토를 영국에 할양했으
며, 뉴 네덜란드州는 뉴욕州로 개명되었다. 새 이주민 다수는, 특히 남부로 몰렸
는데, 이들은 계약 노동자들로, 1630년~1680년 사이에(조선 인조/숙종시대-
일본 에도시대) 버지니아의 전체 이주민 가운데, 약 2/3가 계약 노동자들로 남부
대지주들의 플랜테이션이나 잡일을 위해 고용되었다가, 계약 후에 자유 시민이
되었다.
1729년 북부와 남부의 경제·사회적인 갈등으로 캐롤라이나가 노스캐롤라이나와
사우스케롤라이나로 분리되고, 1732년 스페인을 견제키 위해 조지아에 식민지
가 설치되면서, 이후 미합중국이 될 영국의 식민지 13개가 모두 성립됐다.
이들 각 주는 대부분의 남성 자유민들이 참여하는 선거 통해 지방 정부를 두었
는데, 옛 영국인의 권리에 헌신하고 공화주의를 고무시킨 지방 자치 관념이 발
전하였다. 모든 주에서 아프리카 노예무역을 합법화했다.
아메리카 식민지는 출산율이 높고 사망률이 낮으며, 여성을 포함한 이민자가
끊임없이 유입하여 인구가 급속 증가했다. (미국의 평균수명은 영국의 평균수명
보다 10세 이상 앞서 있었다.)
프렌치 인디언 전쟁에서 영국군이 프랑스에게 캐나다를 빼앗았으나, 이 곳의
프랑스語를 쓰는 주민들은, 남쪽 식민지와는 정치적 독립된 상태를 유지했다.
아메리카 토착민들을 제외한 이들 13개 식민지의 인구는 1770년에 260만여 명
으로 당시 영국의 1/3 수준이었으며, 아메리카 인구의 1/5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노예들이었다.
아메리카 식민지는 영국에 조세를 납부했으나, 영국 의회에 대표자를 두지는 못
했다. 1730년~1740년대의(조선 영조시대) 대각성 운동이라는 기독교 부흥주의
운동이 있었는데, 이 운동으로 미국 대학의 역사가 시작되어, 많은 대학들이
설립됐다. 1636년(이조 병자호란 시절)에 하버드 대학교, 이후에 윌리엄 앤 메리
대학교, 예일, 프린스턴, 펜실베니아 대학교 등, 명문 사립대학들이 설립되었다.
미국 독립과 영토 확장 - 1760년대와 1770년대 초(조선 영조시대) 혁명기에에
아메리카 식민지와 영국간의 미국 독립전쟁(1775년 ~ 1781년)이 발발, 1776년
7월 4일에 이 회의에서 토머스 제퍼슨이 초안을 쓴 독립선언서를 채택했다.
이 날이 오늘날 미국의 독립기념일이다.(조선 영조임금 붕어 / 정조 즉위 시기)
프랑스의 지원을 받은 아메리카 군대가 영국을 무찔러, 영국은 미합중국의 독립
을 인정하고, 미시시피 江 동쪽의 아메리카 영토에 대한 주권 승인했다. 독립
당시 미국의 수도는 뉴욕이었다. 1789년에(정조-경북 안동 병산서원 시대) 미국
헌법이 비준됐으며, 1789년에 조지 워싱턴이 대통령 취임, 1790년 수도를 필라
델피아로 옮김. 1800년에는 수도를 다시 워싱턴 D.C로 옮겼다.
노예제에 대한 입장은 유동적이었는데, 미국 헌법 1조9항에서는 아프리카 노예
무역 폐지를 20년간 유보했다. 북부州에선 1780년에서 1804년 사이에 노예제
를 폐지했으나, 남부 주에서는 "특별한 관습"(peculiar institution)을 옹호하며 노예
州로 남았다. 1800년경의 제2차 대각성 운동으로 노예제도 폐지 운동을 비롯한
다양한 사회 개혁 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다.
미국은 서부로 영토 확장하며 아메리카 인디언 전쟁이 일어났으며 인디언 제거
정책을 펴서 원주민들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보내졌다.
1803년(조선 23대 순조시대)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이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
매입하여 국토의 면적은 거의 두배로 늘어났다.
미국 군대가 플로리다를 수 차례 침입하면서 1819년 미국은 스페인에게서 플로
리다와 멕시코 만 등의 연안 영토를 할양받게 된다. 1845년에(조선 25대 철종)
미국은 텍사스 공화국을 병합, 1846년 영국과 오리건 조약을 맺으면서 미국은
오늘날의 미국 북서부를 통치하게 된다.
멕시코, 미국 전쟁에서 미국이 승리, 1848년에 캘리포니아와 미국 남서부를
할양 받게 되었다. 1848년~49년의 캘리포니아 골드 러시로 서부 이주 가속화.
철도가 부설되면서 정착민들의 이동이 쉬워지고, 원주민과의 갈등도 커졌고,
평원의 인디언들 원주민 문화는 큰 타격을 입었다.
내전과 산업화 - 노예주와 자유주는 州와 연방 정부간의 관계를 놓고 갈등했으
며, 신설 주의 노예제 시행 여부를 놓고 폭력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런 가운데,
노예제 반대 입장인 공화당 후보 에이브러햄 링컨이 1860년 대통령으로 선출되
었다. 링컨 취임에 앞서 일곱 노예주는 분리 독립을 선언하여 남부 연합을 결성
했다. 남부 연합이 섬터 요새를 공격하면서 미국 내전이 발발했으며, 노예주 네
곳이 남부 연합에 추가로 가입했다. 이에 링컨은 노예해방 선언에서 남부 연합
노예의 자유 선언을 했다.
1865년에(조선 25대 철종~26대 고종 시대) 남부 맹방이 패배하여 미국 헌법은
3차례 수정되어 당시 노예 신분이었던 아프리카 노예 4백만여 명이 자유를 보장
받아 미국 시민이 되었고, 투표권을 부여받았다.
1865년 링컨이 암살 당하면서, 새로이 해방된 노예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한편,
남부州를 재건하고 재통합하는 목표로 했던 공화당 재건정책이 급진화되었다.
1876년(조선 고종) 대선 논쟁이 1877년 합의로 해결되면서 미국의 재건 정책이
종식되었으며, 많은 아프리카계 미국 시민들이 시민권을 박탈당하였다.
북부에서는 도시화가 이루어지고 남유럽과 동유럽에서 많은 이민자들이 유입되
면서 미국의 산업화가 더욱 진전하였다.
1929년까지 지속된 이민 물결로 노동력이 유입되고 미국 문화가 변화하였다.
국가 기반 시설이 발전하면서 경제는 호황을 이루게되었다.
1867년(조선 고종) 러시아에서 알래스카를 매입하면서 미국 본토 영토 확장이
일단락되었다. 영토 잃은 원주민이 1890년 운디드니 학살로 최후의 대규모 무장
투쟁을 벌였으나 실패했다.
1893년, 태평양 하와이 왕국의 왕정이 미국 거류민들이 주동한 정변으로 전복되
자, 1898년에 미국은 이 군도(群島)를 병합했다.
같은 해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승리, 푸에르토리코, 괌, 필리핀을 병합했다.
(50여년 뒤 필리핀은 미국에서 독립했으나, 푸에르토리코와 괌은 미국 영토로
남아있다.)
세계 대전과 대공항 - 제2차 세계대전 초기 미국은 중립을 유지하다가 1939년
나치 독일이 폴란드 침공하면서,, 1941년 3월 무기대여법을 통해 연합국에 물자
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진주만을 급습하면서 미국은
연합군에 참전했다. 참전으로 미국의 자본 투자와 산업 능력이 높아졌다.
주요 참전국 가운데 유일하게 미국은 전쟁 덕분에 부유해진 나라였다.[
유럽전선에서 연합국이 승리하자 1945년 샌프란시스코회의에서 전후에 발효한
UN 헌장이 도출되었다.
최초 핵무기 개발한 미국은 그 해 8월에 일본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핵무기를 처
음으로 사용했다. 1945년 9월 2일 일본이 항복하여 제2치 세계대전이 끝났다.
▶ 광복 이전의 한미관계
(1) 수호조약체결까지의 관계-조선에 접근하려는 미국 첫 시도는 1845년에 있었다.
1845년 2월 미국 하원의 해사분과위원회(海事分科委員會) 위원장인 프래트는
제28차 본회의에서 ‘일본과 조선에 파견할 통상사절 연장’이라는 제목의 결의
안을 제출하였다. 이 결의안 주요 목적은 일본과 통상의 길 트는 데 있었고,
우리나라는 일본에 사절단을 파견하면서 더불어 들러보자는 부수적 관심의 대
상에 그쳤다.
아편전쟁을 계기로 서구열강이 중국대륙에 상륙하자, 미국은 1844년 중국과
왕샤조약(望厦條約)을 체결하여 중국진출 발판을 굳혔는데, 이에 미국 하원의
프래트 의원은 북중국으로 통하는 해상로를 가로막고 있는 일본 및 한국과도
접촉해 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프래트 결의안은 미국의 내정문
제로 밀려나 사장되었었는데, 9년 만에 미국은 일본과 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리고 그 후 21년이 지나서 비로소 조선왕조와의 통상에 관심을 표명하였다.
그 사이 1855년(철종 6)과 1865년(고종 2) 두 번에 걸쳐 미국 상인들이 동해안
의 통천(通川)과 연일(延日) 연안에 표류한 일이 있었는데, 조선 정부는 이들을
육로를 통하여 청나라에 호송시켰다.
대원군의 천주교탄압이 고조되던 때인 1866년 5월 미국 서프라이즈호가 평안
도 철산 해안에서 난파당하자, 선원들을 구조하여 역시 청나라에 이송하였다.
1866년 7월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평양 경내까지
들어와서 상품교역을 시도하다가 평양사람들의 분노를 사 선체가 불타고 선원
24명이 모두 피살되었다.
이보다 몇 달 전인 1866년 초 9명의 프랑스인 신부들이 조선 정부에 의하여 피
살되었고, 이에 따라 프랑스는 신부 학살을 응징하기 위해, 1866년 9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함대 파견하여 무력 시위하였다. 이것이 병인양요였다.
미국은 이에 편승해 셔먼호 피습사건에 관하여 프랑스와 공동으로 대처하자고
제안하였다. 미국의 공동대처 제안의 목적은 프랑스함대 힘을 빌리자는 데에
있었지만, 동시에 프랑스의 단독 원정에 따른 조선에 대한 프랑스의 독점적 지
배권의 획득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미국은 결국 프랑스함대의 원정에
따라나서지 않았다.
1866년은 남북전쟁(1861∼1865)이 끝난 지 1년밖에 안 되던 해였으므로, 미국
은 전후복구작업에 몰두해야 하였다. 그 밖에도 1866년은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가 멕시코를 병합하려던 때였으므로, 미국은 국경을 접하고 있는 멕시코문
제로 프랑스와 신경전을 벌여야 하였다.
이와 같은 이유로 미국은 프랑스함대의 한반도 출정에 편승하여 셔먼호피습사
건을 문책하려던 당초 계획을 포기해야 했다. 병인양요때 프랑스함대를 물리
친 대원군은, 서양의 세력을 과소평가하게 되었고 척화비를 전국에 세우는 등,
쇄국정책을 한층 더 강화해 갔다.
조선의 쇄국의 열기가 더욱 고조되어 가고 있는 가운데, 슈펠트(Shufeldt,R.)와
페비거(Febiger,J.) 제독은 1866년과 1867년 각기 셔먼호의 일부 선원들이 살아
있다는 소문을 듣고 조선을 찾았다. 그러나 이들은 아무런 정보도 입수하지 못
하고 평화적으로 조선 정부와 접근하기는 불가능하다는 믿음만 얻게 되었다.
미국에서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남북전쟁의 충격도 서서히 가라앉고 중국과의
교역량도 증대되자, 조선과 수교 필요성이 점증해 갔다. 즉, 중국 북부에 개항
장이 늘어나자 그쪽으로 항해하는 미국 상선들 안전을 위하,여 조선과의 친선
관계가 요구되었으며, 또한 일본 內 개항지와 중국 북부의 항구들을 해로로 연
결하는 중간선상에 한반도가 돌출돼 있으므로, 한반도의 지리적 중요성을 중
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피시(Fish,H.) 국무장관이 1870년 한미수교의 목적을 설명한 대로, 수교의 주된
동기는 ‘조난 당한 선원들을 구조하고 보호할 수 있는 조약을 얻어내는 데’ 있
었다. 그러나 조선이 좀처럼 문을 안 열어주자 미국은 ‘함포외교’를 단행했다.
피시는 “미국 정부의 위엄을 보이기 위해서는 적당한 무력시위가 요구된다.”
고 지적하며 아시아함대 총사령관인 로저스(Rodgers,J.) 제독을 원정군 사령관
으로 임명하였다. 1,230명 병력의 증기기관 전함들은 1871년 5월 30일 한강
하류에 당도, 신미양요가 시작, 6월 로저스함대는 강화도의 광성진(廣城鎭)·
초지진(草芝鎭)·덕진진(德津鎭)을 점령, 2일간에 걸친 한미간의 강화도 격전은
처절하였는데, 이 격돌은 봉건시대의 조선군과 근대병기의 접전이었다.
광성진의 수비사령관 어재연(魚在淵)과 그의 아우 재순(在淳)을 비롯한 수비대
는 돌을 던지고 흙을 뿌리며, 창과 칼을 휘두르면서 최후까지 저항하다 장렬히
산화하였다.
로저스 원정함대는 강력 저항에 부딪혀 더 이상 진격이 어렵다고 판단, 중국의
북부항구 즈푸(芝罘)로 회군하였다. 미국은 조선이 무력에 쉽게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체험한 뒤 전략을 변경, 중국의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이용하
려 했다.
로저스함대와 조선군 간의 강화도 접전이 있은 지 7년 만이며 일본이 강화도
조약으로 쇄국 조선의 문호를 개방한 지 2년 만인 1878년 4월, 미국 의회에서
는 다시 조선과의 통상수교안이 제안되었다.
미 상원 해사분과위원장인 서전트(Sargent,A.)는 일본의 통상조약에 자극되어
조선과의 수교를 촉구하고 나섰다.
그는 결의안을 통해, “조선왕조가 1876년 한일수교조약에 의해 완전한 독립국
가가 되었고, 조선 왕이 세계의 국가가족으로서 그의 위대한 국가를 등록할
의향을 보였으며, 다른 국가들과 상호통상과 평화혜택을 누리도록 할 의사가
있는 한,미국과의 수교는 가능하다.”라고 역설하고,조선과의 통상, 미국 조난
선원들의 보호, 조선내 미국인의 채광권 획득, 러시아의 한반도 진출억제 등을
위해 한미통상 보호조약이 필요하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결의안에서 미국 내 태평양 연안의 주들이 조선과 해운수송 및 교역으로
이윤을 볼 수 있을 것이며, 동부의 여러 주들도 조선에 광대한 시장을 개척함
으로써 공산품을 수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서전트 의원은 또 조선과 수교하게 되면 미국 선박들이 조선으로부터 식량과
물자를 보급받을 수 있으며, 미국 고래잡이 어선들도 위험하고 적대적인 조선
해안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다고 밝혔다.
그 밖에도 서전트는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팽창을 견제하고 미국의 영향력을
증진하기 위하여 한미수교가 요구된다고 피력하였고, 미국이 유럽문화권에
속한 모든 나라 중 가장 조선에 가까운 국가라는 것을 되풀이하여 강조하기도
하였다. 서전트는 동해에 떠 있는 섬나라 일본을 한미수교를 매개로 강력 무
장국가로 발전시키면, 동해로 뻗는 러시아 세력을 견제하게 될 거라고 하였다.
또한, 조선에는 금·은·동, 소금이 풍부하나 채광권이 정부에 의하여 규제되고
있다고 지적, 미국은 조선의 교육제도·군사문제·토목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지
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히기도 하였다.
그러나 서전트 상원의원의 결의안은 상원이 휴회로 들어가 자동 폐기되고
말았다. 33년 전 프래트 의원의 결의안과 같은 운명을 맞이하였던 것이다.
그로부터 2년 뒤, 1880년 미국은 슈펠트 제독으로 하여금 일본의 도움을 받아
조선과 개항교섭을 추진하도록 하였으나 일본측은 조선인의 반일감정을 들어
중재를 거절하였다. 이에 따라 슈펠트는 군함 타이콘데로가를 이끌고 1880년
5월 부산항에 당도하였지만, 조선 관리와의 접촉에 실패하고 다시 일본으로 되
돌아갔다.
이에 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장(李鴻章)은 슈펠트가 일본을 통해 조선에 접근하
려한 것을 불쾌히 여겨 자신이 조선개항협상을 주선하겠다고 나섰다. 이렇게
한미수교협상은 톈진(天津)에서 1882년 3월부터 시작되었다.
이홍장은 조선이 청나라의 부속국임을 한미조약에 삽입시키려 하였고, 슈펠트
는 이를 반대했다. 결국, 타협안으로서 슈펠트는 별도 공한에서 조선이 청국과
는 부속적인 관계에 있다는 점을 인정하기로 했으며, 조선도 미국 대통령에게
조선이 청국에 부속한다는 서한을 보내기로 하였다.
마침내 한미수호조약은 1882년 5월 22일 미국을 대표한 슈펠트 제독과 조선을
대표한 전권대관(全權大官) 신헌(申櫶) 및 전권부관(全權副官) 경리통리기무아
문사(經理統理機務衙門事) 김홍집(金弘集) 사이에 서명되었다.
조선왕조는 1876년 이미 일본에 문호를 개방한 터였기에 미국에 개방을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 수교에 응하였다. 뿐만 아니라 조선왕조는 미국을
끌어들여 일본·청국·러시아를 견제해 보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청일전쟁과 영일동맹을 거치면서 조선에서 일본의 지위가 점차 강화되어 가자
일부 미국인들은 일본 세력의 비대가 극동에서 미국과의 충돌로 치달을 것을
우려하기 시작했다. 주한미국공사 알렌(Allen,H.)은 “일본이 극동에서 우리에
게 계속 말썽을 부려 언젠가는 일본과 칼을 맞대지 않으면 안 될지도 모른다.”
고 경고하였다. 그러나 루스벨트(Roosevelt,T.) 미국 대통령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개인적으로 일본의 사무라이정신을 숭상, 일본인을 좋아했을 뿐만 아니
라, 동북아시아에서 일본을 키워 러시아의 남하를 막아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 밖에도 루스벨트는 임오군란·갑신정변·동학란 등 거듭되는 사회적·정치적
혼란으로 흔들리는 조선에 대한 경멸감을 갖고 있었다. 러일전쟁이 벌어지고
일본의 우세가 판명되자, 루스벨트의 조선정책은 더욱 분명해져 갔다.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일본에 맡겨야 한다는 정책이 그것이었다.
루스벨트는 1905년 1월 러일전쟁이 종반에 들어서자, 조선인들은 “그들 자신
의 방위를 위하여 한 주먹도 날릴 수 없기 때문에, 미국은 조선을 위하여 개입
해 줄 여지가 없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므로 그는 러·일간에 “평화가 지금 달
성된다면 조선은 일본의 보호국이 되는 길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고 밝힌
바도 있다. ♣ 1905년(을사늑약) - 고종, 대원군, 민비들 우리끼리 치고박고
아우성 치다가 망조가 들었던 시기.
일본은 1905년 봄 루스벨트에게 평화중재의 역할을 맡아 주도록 부탁하였다.
루스벨트는 러·일 두 나라 중 어느 한 편의 결정적 승리가 극동의 세력균형을
깨뜨리고 만다고 판단, 중재에 끼여들기로 하였다.
루스벨트는 자신이 중재하는 러·일간의 평화협정이 체결될 기미 보이자 휴전
이 매듭지어지기 전, 자신의 중재 댓가로 일본에게서 무언가 얻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즉, 일본의 계속적인 팽창으로 위협을 받고 있었던 미국의 식민지
필리핀의 안전을 일본으로부터 보장받아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일본이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지배권에 도전하지 않으면, 그 대가로 일본
의 한국지배를 인정해 준다는 기막힌 착상을 떠올렸던 것이다.
1905년 7월 루스벨트는 육군장관 태프트(Taft,W.)를 필리핀에 파견할 우연한
기회를 얻게 됐다. 루스벨트는 태프트를 필리핀 여행길에 일본을 방문하도록
하여 수상 가쓰라[桂太郎]와 태프트-가쓰라밀약을 체결하게 하였다.
1905년 7월 29일 동경(東京)에서 서명된 이 밀약 골자는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일본은 필리핀에 대해 하등의 침략적 의도를 품지 않고 미국의 지배를
인정한다.
둘째, 미·일·영 3국은 극동 평화 유지 위해 실질적 동맹관계를 유지한다.
셋째, 러일전쟁의 원인이 된 조선은 일본이 지배할 것을 승인한다.
이 비밀협약의 내용을 루스벨트에게 건네자 그는 “귀하(테프트)와 가쓰라가 체
결한 내용은 절대적으로 옳았다. 나는 귀하가 가쓰라에게 확약한 말을 하나도
빠짐 없이 확인하더라고 전하라.”고 당부하기까지 하였다.
조선인들이 “자신의 방위를 위하여 한 주먹도 날릴 수 없기 때문에”,
“지금 평화가 달성된다면 조선은 일본의 보호국이 되는 길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라고 몇 달 전 피력한 한반도정책을, 루스벨트는 태프트-가쓰라밀약을
통하여 실현하였던 것이다.
[개항 이후 미국 문화의 이식]
알렌은 선교의사로서 중국의 상해(上海)·남경(南京) 등에서 활동하다가 1885년
고종의 허락 받아 선교병원 광혜원(廣惠院)을 개원했는데 우리나라 최초 근대
병원이었다. 광혜원에서 제중원(濟衆院)으로 이름을 바꾼 이 병원은 1886년
의학교 설립, 16명의 학생을 뽑았다. 1899년 제중원의학교가 설립되었고 9년
뒤 졸업생을 내었다. 세브란스의학교의 모태이다.
제중원이 1886년 처음으로 의학교 설립한 데 이어 아펜젤러(Appenzeller,H.)가
1885년 8월 두 학생을 대상으로 수업을 시작, 배재학당이라는 교명과 간판을
하사하였다. 이어 언더우드(Underwood, H.)가 1886년 고아원 형태의 경신학교
(儆新學校)를 시작, 1915년 3월 경신학교 대학부를 세웠는데 이것이 연희대학
교의 모태이다.
한편, 스크랜턴(Scranton,M.) 선교사는 1886년 5월 여학생 한 사람을 상대로
학교를 개설, 이화학당의 출발이었다. 이어
1887년 서울에 정신여학교(貞信女學校),
1894년 평양에 정의여학교(正義女學校), 1895년 동래 일신여학교(一新女學校),
1896년 평양 숭현여학교(崇賢女學校), 1897년 인천 영화여학교(永化女學校),
1898년 서울에 배화여학교(培花女學校)가 미션학교로 개설되었다.
1887년 미국의 전기기사 멕케이는 경복궁 안 건청궁(乾淸宮) 부근에 증기발전
기 두 대를 설치하고 에디슨전등 두 개를 가설했다. 콜브란(Colbran)과 보스트
윅(Bostwik,H.R.)은 서울 시내 전차·전등·전화 가설경영권을 얻어 조선왕실과
공동출자로 한성전기주식회사를 1898년에 설립하였다. 이 회사는 서대문과
홍릉 사이에 단선궤도전차 개통식을 1899년 가졌다. 1900년 동대문발전소에
125㎾ 직류·교류 양용발전기를 증설, 종로 민가에 전등을 달게 하였다.
카이로·얄타·포츠담 회담과 38선의 획정
1943년 11월 말 루스벨트 미국대통령은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처칠(Churchill,W.) 영국수상, 장개석(蔣介石) 중화민국총통과 전후 극동문제
처리를 위해 3자회담을 열었는데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카이로선언이다.
이 선언은 일본이 1914년 이후 획득한 모든 영토를 연합국이 박탈하고 중국은
만주·대만·팽호군도를 다시 일본으로부터 돌려받는다고 명기하였다.
한국은 ‘적당한 절차’를 거쳐 독립시킨다고 단서를 달아놓았다.
카이로선언의 초안은 미국측이 작성한 것으로서, 루스벨트 대통령의 특별보좌
관 홉킨스(Hopkins,H.)에 의하여 기초되었다. 홉킨스는 애당초 그의 초안에서
한국의 독립을 ‘가능한 한 빠른 시간 내에’ 실현시킨다고 적었지만, 이 초안을
보고받은 루스벨트는 ‘적당한 시기’에 독립시킨다고 그 시기를 늦추고 말았다.
한국은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고 있었던 나라이므로 자치능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자치능력이 결여된 한국에 광복과 더불어 독립을 부여할
때 한국은 정치·사회적 혼란 속에 빠져들고, 그렇게 되면 북방에 있는 중국과
소련이 한국지배를 위하여 19세기 말과 같이 또다시 각축전을 벌이게 될 것이
생각했던 것이다.
따라서,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한국의 정치적 혼란 방지를 위하여 즉각 독
립을 부여할 수는 없다고 판단하였고, 상당 기간 주변 강대국들에 의한 신탁통
치가 요구된다고 믿었다.
루스벨트는 한국의 정치적 혼란과 이를 방지하기 위한 조처로서 신탁통치를
생각하였고, 신탁통치 실시를 위하여 한국의 즉각적인 독립을 반대하고 ‘적당
한 시기’로 늦추었던 것이다.
얄타회담은 1945년 2월, 루스벨트 미국대통령, 처칠 영국수상, 스탈린 소련수
상 간에 열렸다. 얄타회담 중 루스벨트는, 스탈린에게 한국에서의 신탁통치 실
시를 제안하였다.
신탁위임국으로는 미·중·소 3국을 들었으며, 기간은 20년 내지 30년으로 제의
하였다. 스탈린은 신탁통치 실시에는 동의하였으나 신탁통치 기간이 단축돼야
한다고 이의를 제기하였고, 외국군의 한국주둔도 반대하는 입장을 시사했다.
루스벨트와 스탈린의 한국신탁통치 토의는 단순 상호의견교환 정도에 그쳤다.
얄타회담이 끝난고 두 달 만에 루스벨트가 죽고(1945년 4월 12일) 트루먼 부통
령이 승계하였다. 1945년 7월 포츠담 회담이 3국 수뇌간에 열렸다.
포츠담선언은 일본에 무조건항복을 요구하였고, 이에 5월 8일 항복한 독일에
대한 점령통치 일반원칙을 선언하였으며, 그 밖에 전후처리문제들에 관하여
언급하였다. 그 중, 포츠담선언은 “카이로선언의 내용은 준수되어야 한다.”고
명기하였다.
미국은 포츠담회담 중 소련측이, 대일전(對日戰)에 참전하기를 요구하였지만,
소련이 대일전에 참전하게 될 경우, 소련이 한반도를 모두 점령해 버릴 것을
우려하였다.
그 결과 미국은 한국독립을 보장한 카이로선언은 준수돼야 한다고 포츠담선언
에 명기함으로써, 소련이 한반도에 상륙한다 해도 카이로선언에 따라 한국을
독립시키도록 유도하려 하였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중 한반도 상륙작전을 포기하였다. 한반도에 주둔한
일본군의 결사적 저항으로 희생이 클 뿐만 아니라, 일본 본토상륙을 위한 부담
때문에 군사력을 한반도 상륙에 빼돌릴 여유가 없었다는 데 그 이유가 있었다.
미국은 그 대신 소련이 한·소국경선을 육로로 넘어 한반도로 진격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미국은 1945년 8월 6일과 9일 각각 일본의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에
인류 최초 원자탄을 투하하였다. 8월 10일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시사하였고,
이로써 미국의 일본 본토 상륙작전은 필요없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이 항복의사를 밝힌 날은 8월 10일이었고, 이때는 이미 소련군이
한·소 국경선을 넘어 한반도 북단으로 점령하여 들어오기 시작한 이후였다.
미국은 일본상륙작전이 취소되었고, 그로 인해 병력에 여유가 생기자, 한반도
점령을 새삼 고려하게 되었고, 이를 위해 8월 11일 <일반명령 1호>를 작성,
발표하였다. <일반명령 1호>는 북위 38도선 이북에 있는 일본군은 소련군
사령관에게 항복절차를 밟고, 그 이남에 있는 일본군은 미군 사령관에게 항복
하라는 내용이었다.
이에 따라 북위 38도선 이북은 소련군의 점령하에 들어갔고 그 이남은 미군의
점령하에 놓이게 되었다. 38선 획정은 표면적으론 일본군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취해진 군사적 조처였으나, 정치적으론 소련의 남하를 38선에서 저지하
려는 강대국 정치의 소산이었다.
광복 이후의 한미관계
일본이 패망하자 미국, 소련은 1945년 8월 25일 한국의 38도선 분단점령을 발
표하고, 이어 맥아더(MacArthur,D.) 사령부가 미군에 의한 남한분할정책을 발표
함에 따라, 9월 8일 하지(Hodge,R.) 중장 휘하의 미군이 인천에 상륙함으로써
향후 3년간의 미군에 의한 남한의 군정이 시작되었다.
1945년 9월 11일 하지의 미군시정방침의 발표와 아놀드(Arnold,A.L.) 소장의
미군정 장관 취임에 이어, 19일 ‘재조선(在朝鮮) 미육군사령부 군정청’이라는
공식명칭으로 발족해 남한 통치에 들어간 미군정청은, 통치 초기부터, 한국인
의 정신적 지주였던 임시정부의 부인, 신탁통치안의 고수, 미온적인 대공정책
등으로 우익 정치지도자들과 불편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특히, 이승만(李承晩)과 하지는 정치적 견해 차이로 반목이 극심하였다. 이에
따라 하지는 김규식(金奎植)중심의 중간우파와 여운형(呂運亨) 중심의 중간좌
파에 의한 좌우합작을 통해 난국에 처한 한국의 정치적 국면을 타개하려 하였
으나 이러한 시도는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미국은 1947년경부터 시작된 미소의 냉전에 따라 모스크바협정 노선을
버리고 한반도문제를 국제연합에 넘기기로 정책을 전환해, 1947년 10월 국제
연합에 ‘한국독립촉진결의안’을 제출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이승만의 복안대로 남한단독정부가 수립되고, 미군정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 15일 0시를 기하여 폐지되었다.
대한민국이 출범하자 미국은 제일 먼저 한국을 승인하고 초대 주한 미국대표
로 무초(Mucho,J.J., 1949년 대사 승격)를 임명하고, 한국에서도 초대 주미대
사로 장면(張勉)을 임명함으로써 약 반세기 만에 양국 공식외교가 재개되었다.
한국은 건국 초기부터 북한의 군사적 위협, 신생국가로서의 경제사정 등으로
대미 일변도의 외교를 펴, 미국으로부터 군사·경제 원조를 획득하는 데 집중적
으로 노력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제2차세계대전 후, 군사비 삭감해야 할 국내사정 때문에 병력을
감축해야 했고,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 아래, 한국을
미국의 방위선에서 제외, 1949년 6월 500여 명의 병력과 군사고문단만을 남기
고 미군을 전면 철수, 이것이 6·25전쟁 유발의 큰 요인의 하나가 되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트루먼 미국대통령은 즉각 군대 출동 무기 급송하는 등
한국에 대한 결연한 방어의지를 보이고 38선 획정을 백지화하여 UN군을 북진
시켰다. 또한, 전시 중의 군사·경제 원조뿐 아니라, 전후에도 경제원조를 강화
하여 부흥사업을 적극 도왔다.
광복 이후, 특히 6·25전쟁 이후 강화된 미국의 한국에 대한 경제원조는 1961년
초까지 한국경제에서 거의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했고, 그 뒤 현재까지도 무역
·자본도입·합작투자 등 경제 전반에 걸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1980년 미국 국제개발처 발표에 따르면, 미국은 1946년~1979년까지 한국에
146억 810만 달러의 경제원조를 제공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 중 1960년대
까지 제공한 무상원조는 47억 원이었다.
한국은 세계 전체로 볼 때 이스라엘과 더불어 미국 원조를 가장 많이 받은 나
라 중 하나이며, 1950∼1980년 사이에 50억2700만 달러의 군사원조를 미국
으로부터 받았다. 6·25전쟁 이후의 경제원조는 적금투자의 형식으로 바뀌어
초과지불의 짐을 덜어주고 인플레이션의 압력을 줄여주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무상원조 때의 한국경제는 미국에 대한 의존적 타성 때문
에 경제적 자립의욕을 저해하는 결과를 초래했고, 1962년 무상원조가 끊어지
고 차관으로 전환되면서 경제가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한국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 1962년부터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실시하기 시작
했고, 도움을 받는 경제에서 협조하는 형태로 바뀌었고, 미국에 의존적이었던
한국경제는 자립경제로 성장할 가능성을 확보하였으며, 노동집약적 산업이 자
본집약적인 형태로 변화하게 되었다.
한편, 미국으로의 한국인 이민의 역사는 그 뿌리가 깊은데, 185년 서재필(徐載
弼)을 포함한 한국인의 이민이 처음 실시된 이래, 유학생 및 노동자의 이민이
행해졌다. 1902년 하와이 사탕수수밭 노동자로 121명이 도미하는 등, 1905년
에 이르러 한국인 이민자가 7,000명에 달하게 되었다.
1980년대에 들어와서는 한국교포가 아시아계에서 네번째로 많은 숫자를 기록
하고 있으며, 그 중 한국이민은 수적으로 가장 급격히 증가한 소수민족으로서
미국이민국에 기록되어 있다.
1988년 한국의 재미교민 101만5547명, 체류자 7만3620명이었으나, 1995년
1월 현재 재미교민 166만1034명, 체류자 14만650명으로 크게 늘어났다.
2014년 현재 교민은 약 223만 명이다. 지역적으론 캘리포니아·로스앤젤레스·
뉴욕·시카고·호놀룰루 등에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다.
9:01
미국 남서부 1부 살아있는 지구의 역사, 그_#001 - 길이: 9:01
미국의 탄생 : 식민지에서 미국 독립까지 (미국 역사)
https://www.youtube.com/watch?v=a3e3ZtzYBpc < 42: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