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1570
3월7일 [사순 제3주간 수요일]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결국 사랑입니다>
처음에 사람들은 "이 규칙만큼은, 이 조항만은 꼭 필요하다"며 법을 제정하지만 다들 나중에 후회하기 마련입니다.
최초에는 서로의 편의를 위해, 서로의 유익을 위해 만들어진 내규가 언젠가 두통거리로 남게 되는 것을 한두 번 본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체나 공동체, 집단을 원활하게 운영하기 위해서, 더욱이 특정한 목표를 지닌 공동체라면 함께 살아가기 위한 규칙을 만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희 수도 공동체도 기존에 만들어졌던 생활지침서를 바탕으로 현 시대 상황을 반영해서 새로이 작성했습니다. 새로운 생활지침서를 작성해나가면서 저는 진심으로 기도하는 마음으로 임했습니다.
후배들이 어떻게 하면 더 의미 있는 수도생활을 해나갈 수 있을까? 더 수도자다운 삶을 살 수 있을까? 고민 고민하면서 겨우 개정작업을 마쳤습니다.
그러나 후배들에게 와 닿는 느낌은 또 그게 아니었던가 봅니다. 너무나 구체적이고 세밀한 내용들, 기본적이고 상식적인 것들이어서 어린애 취급받는 느낌도 받았는가 봅니다.
제정자의 마음, 의도를 헤아려보면 모든 규칙들은 한 마디 한 마디 모두 타당하고 옳은 말씀들이지만, 그 규칙을 실천해야 할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언제나 부담스럽고 껄끄러운 것들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법이나 규칙을 대하는 자세도 천태만상입니다. "큰 일" 나는 것이 아니라면 은근슬쩍 적당 적당히 넘어가는 저 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규칙과 위반 그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다리기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한 번 정해진 규칙이라면 비록 그 법이 조금 미흡할지라도 목숨 걸고 지켜나가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참으로 진지하고 성실한 사람들입니다.
이왕 지킬 계명이라면 "왜, 하필 이 따위 계명을 다 만들어 사람 괴롭히지?" 등등의 불평불만을 늘어놓지 않고 확실히 계명을 준수합니다. 계명을 확실히 준수하는 가운데, 그 계명 안에 깃들어 있는 진정한 의미, 교훈을 깨닫습니다. 계명 안에 살아계시는 하느님과 형제의 얼굴을 찾아나갑니다.
이런 사람은 진정 규칙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서 틀 안에 들어가 틀을 깨고 나오는 사람입니다. 법 안에 들어가 법의 틀을 깨고 나오는 사람입니다.
규칙을 지켜야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한평생 규칙으로 인해 스트레스 받고 고민하고 고통스러워하기보다는 차라리 규칙 안으로 들어가 확실히 규칙을 지킴으로서 규칙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노력이 참으로 소중합니다.
사실 이 세상의 모든 규칙을 모두 합하면 단 한 가지의 규칙이 남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사랑의 규칙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계명을 모두 합하면 단 한 가지 계명이 남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사랑의 계명입니다.
결국 구약의 모든 율법 조항들은 사랑의 계명을 기본 토대로 하고 있으며, 그 목적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율법을 준수하면서, 안식일 계명을 지키면서, 금육을 지키면서 단지 규칙을 지켜내야만 한다는 의무감에서 준수하게 되면 그보다 더 괴로운 일은 없습니다.
결국 사랑이 필요하며 사랑만이 모든 율법의 기본이기에 사랑으로 지켜나가야 할 것입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소죄?>
제가 유학 처음 나와서 윤리 시험을 볼 때였습니다. 대죄, 소죄를 구분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대죄가 되려면 자신이 죄를 짓고 있는지를 알아야 하고 또 자신의 의지로 죄를 지어야 하며 그 죄를 짓는 대상이 무거운 것이어야 합니다.
제가 말을 잘 못할 때이기 때문에 교수님은 쉽게 질문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차를 훔쳤어, 그게 대죄야 소죄야?” 저는 그때도 대죄와 소죄를 구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당연하다는 듯이 “대죄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예상한대로 “어떤 사람이 100원을 훔쳤다면 그건 대죄야, 소죄야?”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또 당연하다는 듯이 “대죄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교수님은 놀라서 아주 작은 것을 훔쳤는데 어떻게 대죄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당돌하게, “만약 교수님께서 100원을 훔쳤다면 대죄에요, 소죄에요?”라고 물었더니 “그거야... 상황에 따라 다르지...” 하시며 대답을 못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대죄, 소죄를 구분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대죄는 지으면 안 되지만 소죄는 지어도 괜찮은 것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작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생각보다 큰 것일 경우가 있고 그 반대일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무슨 큰일을 해 드려야 그 분이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하느님은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것들을 더 좋아하십니다.
소화 데레사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크게 빛나는 별들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분은 어떤 큰일을 하신 분이 아닙니다. 그저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지 않는다든지, 기침하는 수녀님의 옆에 앉아 그것을 참아낸다든지, 빨래할 때 물이 튀는 것을 피하지 않고 맞는다든지 하는 작은 희생들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그 작은 희생들이 하느님께는 성당을 몇 개 짓는 것보다 수많은 사람을 회개시키는 것보다 더 큰 선물이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가장 작은 계명 하나라도 어기거나 어기도록 가르치는 사람은 하느님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 취급을 당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수난 당하실 때 사람들로부터 많은 조롱과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눈을 가리고 뺨을 때리며 누가 때렸는지 알아맞혀보라고 놀리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얼굴에 오물을 던지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십자가에 달려계신 그 분께 하느님의 아들이면 내려와보라고 조롱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은혜를 입었음에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습니다. 과연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만 소리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가벼운 죄를 지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아무것도 모르고 예수님을 괴롭히는 이들보다 많은 은혜를 받고도 예수님을 배신한 군중들이 예수님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하지는 않았을까요?
어떤 때는 작은 것들이 사람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할 때도 있습니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의 작은 잘못은 상관없는 다른 사람들의 큰 잘못보다 자신을 더 아프게 할 수 있습니다.
영성지도를 받다보니 어떤 신부님들은 너무 엄격하시고 또 어떤 신부님들은 너무 자상하신 분들도 만나게 됩니다. 사실 극단적은 것은 다 좋지 않습니다. 특히 자상한 모습으로 “그런 것들은 괜찮아!”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을 더 조심해야합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지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고 작은 것까지도 다 지키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신자분들이 많은 선물을 주시지만 받는 사람은 그 물질적 가치로 받지만은 않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도 할머니의 꾸깃꾸깃한 천 원짜리 지폐와 비교할 수 없습니다.
아주 작은 것 안에 모든 것이 다 들어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겉보기엔 크지만 속은 비어있을 수도 있습니다. 작은 것을 크게 여길 줄 알아야 하느님나라에서 큰 사람 대접을 받게 될 것입니다.
작은 것들을 무시하며 살아서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릴 수도 있지만, 반대로 일상에서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은 오늘 하루의 작은 일들을 작지 않게 사는 것입니다.
주님 눈에 작고 의미 없는 것이 없습니다. 소화 데레사처럼 작은 것을 크게 볼 줄 아는 사랑의 마음을 갖고 오늘 하루도 일상의 작은 봉헌을 주님께 드리도록 합시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5,17-19: 스스로 계명을 지키고 남에게도 지키도록 가르쳐라
예수님은 율법을 없애러 오지 아니하고 완성하러 왔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식사의 신비를 당신의 수난으로 완성하셨을 때 율법을 완성하셨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사람들이 건네준 신 포도주를 드신 다음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고 하심으로써 당신에 관해 쓰인 율법과 예언서의 말씀이 모두 이루어졌다고 분명히 보여주셨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의 파스카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기 때문입니다.”(1코린 5,7)라고 한다.
그러므로 거룩한 계명들은 어느 것 하나도 폐지해서도 고쳐서도 안 된다. 모든 것을 그대로 보존하며 잘 가르쳐 하늘 나라의 영광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인간적으로 작고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하찮은 것이 아니라 필요하게 여기신다.주님께서는 그 계명들을 모두 가르치셨고 또 지키셨기 때문이다. 작은 것들도 하늘나라라는 위대한 미래를 가리킨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17절) 율법과 예언서는 둘 다 유효하다. 이 책들을 보면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들과 살아가는 일에 관한 법이 담겨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를 둘 다 완성하셨다. 우리도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갈 때, 그 율법을 완성하게 될 것이다. 말씀을 실천하며 우리는 주님의 계명을 완성해 갈 것이다.
우리에게는 주 하느님께서 만드실 새 하늘과 새 땅이 약속되어 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되면, 그에 따라 옛 것은 사라질 것이다.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18절)라는 말씀은 율법에서 가장 작다고 여겨지는 것조차도 영적 상징으로 가득 차 있으며, 이 모든 것이 복음서에 요약되어 있음을 알려주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19절)는 곧바로 지옥과 벌을 떠올려야 한다. 이 계명들 가운데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은 마지막 날에 가장 작은 자, 내쳐진 자요 말째가 되어 벌을 받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제쳐 놓는 이는 누구나 당신과 맞서는 자로 여겨 옆으로 제쳐 놓으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사람이 하늘 나라에서 업신여김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지금 중요한 `사순시기를 지내고 있다. 부활을 향한 여정을 계속하고 있다. 이것이 단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행사로만 끝난다면, 우리가 맞는 부활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 부활은 우리 자신의 새로운 탄생을 촉구하고 있으며, 또한 영광스러운 나 자신의 하느님 안의 변화를 요청하고 있다.여기에 우리가 부활을 축하하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제 하느님의 사랑의 계명을 통하여 우리 자신이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올바로 실천하도록 하자.
=====================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평등과 상호존중을 통한 율법의 완성>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 모든 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의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작은 계명 하나라도 스스로 지키고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라 불릴 것이다.”(5,17-19)
하느님께서는 이집트를 탈출하여 사십년 동안 광야를 떠도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끄시고 가르치시며 지켜주십니다. 십계명과 율법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계약의 표지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율법을 하느님께서 직접 주신 삶의 법으로 여겼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율법을 엄격히 지킴으로써 하느님 앞에 의로워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지키기 쉬운 율법들을 강조하고, 율법의 근본정신인 사랑과 상관없는 세부규율들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껍데기 로 만들어버린 것이지요. 예수 시대에는 율법이 기득권을 옹호하고 정당화하여, 백성들을 옭아매고 신분 차별을 조장하는 도구로 전락했습니다. 율법을 통해 신분 상승을 노리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율법이 그 근본정신을 상실한 채 틀과 형식에 쏠려버린 것이었지요. 문자에 갇혀 율법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망각해버린 것입니다. 하느님께로 이끄는 길이었던 율법이 오히려 걸림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과 삶으로 율법의 정신을 되살리고 완성하려 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죽음에 이르는 십자가 여정을 통해 율법을 완성하셨지요.
어떻게 율법을 완성할 수 있을까요?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자기 자신처럼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22,37.39) 율법의 최종목적도 사랑입니다. 따라서 사랑과 헌신과 섬김의 정신으로 율법을 살아낼 때 율법은 완성될 것입니다. 그 본래의 정신인 의로움과 사랑이 회복될 때 율법은 완성됩니다.
평등과 상호존중과 정의가 무시된 채 사랑이 이루어질 수는 없습니다. 요즈음 사회 전반에 확산되고 있는 미투운동은 사랑의 완성과는 무관한 왜곡되고 오염된 사랑의 질서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가해자들은 아랫사람 특히 여성을 자신의 성적 욕구충족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사회적 지위를 악용하여 성을 권력의 도구로 삼아 저항할 수 없는 약자를 유린했습니다.
성은 결코 누군가의 도구일 수 없는 고귀한 인격의 표현입니다. 성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일치와 인격적인 통합을 지향합니다. 사랑으로 일치함으로써 신의를 지키며 서로에게 헌신하게 되지요. 이렇듯 서로의 성을 사랑으로 존중해줌으로써 인간적 품위와 가치를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남성 중심의 문화에서 비롯된 그릇된 의식과 생활양식을 평등의 문화로 바꿔가야겠지요.
사랑이 빠진 교회나 각종 법규, 제도는 제정신을 잃고 비틀거리는 주정뱅이에 지나지 않음을 기억해야겠습니다. 평등과 공정과 상호존중이 생략된 언행은 율법을 파괴할 뿐입니다. 성추행과 성폭력이 일상화 되어버린 슬픈 현실을 직시하며, 사랑의 완성을 위한 회개를 시작해야겠습니다. 돈도 지식도 사회적 지위도 서로를 섬기는 도구일 뿐임을 기억하며, 평등의 터 위에서 고귀한 인격을 존중함으로써 율법을 완성해 나가는 오늘이길 희망합니다.
=====================
<매일미사> 오늘의묵상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계명과 법규가 평생 우리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 방법을 알려 주십니다. 그분께서는 율법의 613개 조항을 하나로 관통하는 정신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 주님께서는 십계명과 그에 관련된 법규를 사랑의 계명으로 바꾸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계명을 스스로 지키고 가르치신 구세주이십니다. 율법과 예언서를 하느님의 사랑으로 완성하신 분이십니다. 안식일 법과 정결 법의 근본정신은 거룩하신 하느님을 섬기며 사랑하는 것에 있습니다.
우리의 보잘것없는 행위 안에 하느님의 사랑을 담는다면 무한한 가치를 지니는 행위로 바뀝니다. 아주 작은 계명이나 법규를 하느님의 사랑으로 지킨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참다운 제자가 되며 하늘 나라에서 큰 사람 대접을 받습니다. 신앙생활 안에 사랑의 정신이 없어지면 우리는 율법주의자가 되어 버립니다. 우리가 남에게 보이거나 인정받으려고 하느님의 주요 계명을 잘 지킨다면 하늘 나라에서 작은 몫을 얻게 됩니다.
이 사순 시기에 우리는 형식적이고 타성적인 신앙에서 벗어나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단식하고 금육하는 이유는 하느님과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으로 하느님의 법을 지키고 완성하는 새로운 길을 우리에게 제시하십니다. 바리사이들의 위선과 형식주의에 빠지지 말고 하느님께서 즐겨 받으시는 삶을 살도록 질책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고 완성하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의 가족과 이웃과의 만남에서 찾아보아야 하겠습니다.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관리국장/청주교구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
[인천교구 밤송이 김기현 요한 신부님]
<신앙적인 체험들을 나누고 공유합시다>
신부가 되고 생긴 취미 중에 하나는 책방에 가는 것입니다. 순순한 의도로 책을 읽고 싶어서가는 건 아닌 것 같구요.^^;
‘무언가 써내고 이야기 하려면 책을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이나 절박한 마음 때문에 책방을 찾고, 책을 사게 됩니다.
주로 구월동에 있는 교보문고를 많이 가는데! 가끔 더 다양한 종교서적을 보고 싶을 때는 바오로 서점이나 개신교 서점을 갑니다.
그런데 사목을 하면서 점점 발걸음이 개신교 서점 쪽으로 많이 기울어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개신교 서점에 가보면 실제적인 사목 자료나 사목 경험을 공유하는 책들이 많이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선교를 어떻게 하는지, 기도회를 어떻게 준비하고 분위기를 만들어 가는지, 신앙 교육을 어떻게 하는지 등에 대한 실제적인 자료들, 곧 현장의 자료들이 많습니다.
그 자료들은 저에게 좋은 디딤돌이 되어 주었습니다. 개신교 자료들을 읽고 참고하면서, ‘가톨릭에도 많은 시도와 경험들이 공유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아쉬움이 종종 생겼습니다.
저부터도 제가 가지고 있는 자료들을 공유하는 것을 주저하고 망설였던 것도 이런 생각들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강론이 내 밑천인데, 여기저기 공개하면 나중에 못 써먹게 되는 거 아닌가... 별로 대단치도 않은 자료들을 공개했다가 욕만 먹는 거 아닌가... 신부가 겸손해야지, 잘났다고 나서는 건 아닌가...’
그래서 신학교에 있을 때 동기 중의 한 명이 ‘그 동안 우리가 쓴 강론을 모아보자.’고 할 때에도 저는 동참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신부가 된 이후에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생각들을 합니다.
‘다른 분들의 사목적인 시도와 경험들이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는데, 도움만 받고 내 자료들을 공개하지 않는 것은 잘못인 것 같다. ... 내가 가진 부족한 자료들이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좀 더 나은 사목을 하는 데에 디딤돌이 될 수 있다면, 공개하지 않아 욕을 먹지 않는 것보다 공개하고 욕을 먹는 편이 낫겠다..’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 경험과 시도들을 공개하고 나누게 되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신자들도 신앙 안에서 체험하고 시도한 일들을 공유하고 나누는 일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여러 가지 모임들 안에서 생활 나눔이나 복음 묵상을 많이 하는데요. 모두가 자기 이야기를 꺼내기를 주저하고 망설인다면 서로에게서 배우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을 겁니다.
하지만 신앙 안에서 실천하고 있는 일들이나 경험들을 공유한다면, ‘아, 나도 저렇게 해봐야겠다... 정말 성실히 살아가는구나, 나도 본받아야지...’ 하며, 누군가의 체험담을 디딤돌로 서로가 성장하고 변화될 수 있을 거입니다. 그 일이 주님께서 바라시는 일이기도 합니다.
오늘 독서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두 눈으로 본 것들을 잊지 않도록 하여라. ... 또한 자자손손에게 그것들을 알려 주어라."
말씀대로 신앙 안에서 체험한 일들을 내 마음에 새기고, 그 일을 감추기보다는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공유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나눔과 고백이 서로에게 더 나은 신앙인이 되기 위한 디딤돌이 되어 줄 것입니다.
=====================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과 율법>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여기서 ‘율법’과 ‘예언서들’은, 구약성경에 들어 있는 하느님의 말씀들, 계명들, 율법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의 계명들과 율법들이 미완성 상태여서 그것들을 완성하러 오셨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들의 ‘실천’이 미완성 상태이고 부족한 상태이기 때문에 제대로 실천할 수 있도록 가르치러 오셨다는 뜻입니다.
‘완성’이라는 말에서 어떤 부자의 이야기가 바로 연상됩니다. 어떤 부자가 예수님께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을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십계명을 잘 지키면 된다고 말씀하셨고, 그는 자기가 십계명을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다고 대답했습니다.(마르 10,17-20) 예수님께서 그의 말을 인정하시면서도 그에게 부족한 점이 있음을 지적하셨고, 그 부족한 점을 해결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이르셨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 10,21)
여기서 예수님께서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셨다는 것은, 그의 십계명 실천을 인정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의 ‘실천’이 완벽했다는 뜻은 아니고, ‘지향’을 인정하셨다는 뜻입니다. (바리사이들 같은 위선자는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그의 부족한 점은,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지 못한 것, 사랑 실천이 부족한 것,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희망하면서도 실제 삶으로는 부귀영화를 추구하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것 등입니다.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라는 말씀은,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는 방법이기도 하고, 사랑을 제대로, 온전히 실천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나를 따라라.”라는 말씀은, 사도들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따르라는 뜻일 수도 있고, 온 삶을 다 바쳐서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만 추구하라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그 부자는 착하게 살고 있고, 십계명을 잘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재물 때문에 마음이 갈라져 있어서 그의 계명 실천과 사랑 실천에 부족한 점이 생겼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완성’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이 말씀은 “원수를 사랑하여라.”라는 계명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원수도 사랑할 정도로 사랑을 실천해야 계명 실천이 완성되고, 완전해집니다. (내가 미워하고 싫어하는 원수 같은 사람들을 제외하고, 좋아하고 친한 사람들에게만 사랑을 실천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고, 따라서 신앙생활과 계명 실천이 불완전해집니다.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아무리 신앙생활을 잘해도, 완성되지 않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마태 5,18)
이 말씀은, 계명들과 율법들에 들어 있는 하느님의 뜻, 또는 하느님의 사랑은 영원히 변함없다는 뜻입니다. (인간들이 마음대로 변경하거나 왜곡하면 안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성경의 음식에 관한 율법을 폐지하셨는데(마르 7,18-19), 그 율법에 들어 있는 하느님의 뜻, 즉 사람들이 모두 거룩해지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까지 폐지하신 것은 아닙니다. 또 안식일 규정 때문에 바리사이들과 자주 다투셨는데, 그 일들을 겉으로만 보면,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안 지키신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사람을 위하여 생긴 날’인(마르 2,27) 안식일을 완전하게 지키는 방법을 가르치신 일입니다. 십계명은 곧 사랑의 계명입니다. 사랑을 제대로 실천하는 것이 곧 십계명을 제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19)
여기서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라는 말씀은,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라는 뜻입니다. (반대로,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라는 말씀은, “하늘나라에 들어갈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남을 죄짓게 하는 죄’에 대해서 매우 엄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달고 바다 깊은 곳에 빠지는 편이 낫다."(마태 18,6)
하느님과 예수님의 계명들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서 왜곡하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남을 죄짓게 하는 죄’를 짓는 일이 됩니다.
대표적인 예가 ‘코르반 관행’입니다.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느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 모세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자는 사형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너희는 누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제가 드릴 공양은 코르반, 곧 하느님께 바치는 예물입니다.’ 하고 말하면 된다고 한다. 그러면서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해 드리지 못하게 한다. 너희는 이렇게 너희가 전하는 전통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폐기하는 것이다. 너희는 이런 짓들을 많이 한다."(마르 7,9-13)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누구든지 자신의 잘못된 말이나 행실로 다른 사람들을 죄짓게 만드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베드로 2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실 그는(바오로는) 모든 편지에서 이러한 것들을 이야기합니다. 그 가운데에는 더러 알아듣기 어려운 것들이 있는데, 무식하고 믿음이 확고하지 못한 자들은 다른 성경 구절들을 곡해하듯이 그것들도 곡해하여 스스로 멸망을 불러옵니다."(2베드 3,16)
자기 마음대로 성경과 교리를 해석하고 왜곡하는 일은 멸망을 자초하는 일입니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예수님은 자유이십니다>
마태오 5,17-19 (예수님과 율법)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예수님은 자유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유이십니다.
아픈 이를 보듬기 위해
안식일을 깨신 자유이십니다.
의인과 죄인 갈라 세운
아무도 감히 넘지 않은
인습의 벽을 넘으신 자유이십니다.
하느님을 구실 삼아
가난한 순례자 먹이 삼는
사제, 율법학자, 환전상들을
채찍으로 내려치신
굴복하지 않는 자유이십니다.
성전 안에 감금당한
가진 자의 하느님을
하느님 닮은 사람 안에 다시 모시려
기꺼이 십자가 지신 자유이십니다.
살림과 섬김이라는
사랑의 정신은 희미해지고
생기 없는 죽은 문자만 남아
하느님과 사람을 갈라놓고
힘없는 선한 사람 죄인으로 낙인찍는
스스로 거룩한 이들에게 빼앗긴 법을
빼앗은 이들에게서 되찾아
하느님과 사람을 잇는 일치의 법으로
사람 살리는 생명의 법으로
서로를 섬기는 상생의 법으로 세우시려
스스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으신
예수님은 자유이십니다.
"하느님 법은 벗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봉헌하는 십자가에서 완성됩니다."
=====================
[광주대교구 고흥 도화성당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참 쉽죠....>
저는 사제이지만, 참 불효자입니다. 예전에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목포에 어머니 혼자 살고 계셨습니다. 저 빼고 5남매를 둔 어머니는 자식들 집에서 함께 사는 것이 지옥살이 같다고 하셔서 평생을 목포 집에 사셨던 것입니다. 예전에는 가끔 어머니께 전화를 드리면 첫 마디가 “조 신부님, 밥 먹었소!”라고 묻습니다. 그러면 저는 버럭 큰 소리로 “아따... 요즘 밥 못 먹고 사는 사람 있대요. 엄마나 잘 묵고 아프시지 마쇼잉...” 하고 끊습니다. 대화 시간은 1분도 안 걸립니다. 그래서 그때 제 별명이 '용건만 간단히'이었습 니다.
그런데 요즈음 어머니가 연세가 더 드셔서 당신 스스로 요양병원에 머물러 계십니다. 자주 찾아뵙지 못하지만, 가끔 어머니께 전화 드리면, ‘지금도 늘 아침 밥 거르지 말고 잘 먹으라.’고 잔소리를 하십니다. 전에는 그 말소리를 무척 귀찮게 여기는데... 어머니 돌아가시고 나면 그런 잔소리 해 줄 사람도 없을 것 생각하고, “알았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고맙다고 하시면서 마음이 편안하고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저도 나름대로 “율법의 근본정신을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행복하고 편안합니다.” ㅋㅋㅋ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율법의 근본정신은 사랑입니다.” 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저 따뜻한 말 한 마디로 사랑을 실천하여 행복하고 편안한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기가 아주 쉽죵... 사랑하기 너무 쉽죠.
특히, 오늘 예수님께서는 저희의 행복함과 편안함을 위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그런데 어느 날 율법 교사가 예수님께 '율법의 근본정신이 뭐냐?'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근본정신은 “사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그 사랑을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그 사랑이신 하느님께서는 늘 우리 곁에 계시며 저희의 기도에 늘 귀를 기울여 들어주십니다. 응, 그래.... 응, 그랬구나! 응, 힘들었겠다. 응, 이제 걱정하지 마라!”
구약에 신명기서 4장7절에 보면...저희에게 잘 살 수 있는 하느님의 법을 주십니다.
“우리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는, 주 우리 하느님 같은 신을 모신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 있느냐?”
말하자면, 하느님은 늘 우리의 기도에 “항상 준비하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예) 17세기 프랑스 파리 가까운 곳에 카르멜 수도원에... 순례 객을 위해 15년 동안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고, 청소하는 일을 일하면서도 늘 하느님이 함께 하심을 느끼고 살았던 라우렌시오라는 수도자가 있었습니다. 부엌의 성자라고 불리던 그 라우렌시오 수사님은... 가끔 순례자들이 당신에게 ‘힘들어서 불평할 일이 없냐?’라는 질문에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불평할 시간이 없습니다. 왜냐면... 나는 음식을 만들면서 계속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주님, 이 음식을 먹는 자에게 당신의 평화를 주소서. 아멘.”
그리고 청소하면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당신의 아름다운 동산을 더욱 아름답게 하소서. 아멘.”
“저는 하느님께 기도하는 시간 외에는 남은 시간이 없습니다.”
“하느님께 기도하는 시간외에는 남은 시간이 없습니다.”
너무나 큰 울림을 주는 말씀입니다. 라우렌시오 수사님의 이 큰 울림소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방법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라우렌시오 수사님이 하셨던 따뜻한 말씀 한 마디를 가슴에 담고 하루를 살아갑니다.
“하느님께 기도하는 시간외에는 남은 시간이 없습니다.”
영적일기를 마무리 하면서...
“하느님께 기도하는 시간외에는 남은 시간이 없습니다.”
이 “따뜻한 말씀 한 마디로...” 주님의 뜨거운 사랑이 우리의 마음 안에서 굳게 살아 움직이는 복되고 은혜로운 날이 되시기를...아멘.
=====================
[예수성심전교수도회 부산본원 김종오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의말씀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마태오.5,19)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갈망하지만 부끄러운 날들이 더 많습니다. 살면서 사랑하기보다 미워하는 일에 우리가 더 대범하고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땅에서 사는 동안 우리는 ‘하늘나라에서 작은 자’들입니다.
‘하늘나라에서 작은 자’가 되는 것은 땅에서 우리가 큰 사람이 되고 싶기 때문입니다. 땅에서 키우는 우리의 욕망만큼 하늘에서는 작아집니다. 땅에서 더 큰 사람이 되고자 하였던 아담과 이브도 그렇게 작은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말씀을 거슬러 존엄성을 훼손하고 자신을 부끄럽게 만들 때마다. 우리는 땅에 떨어진 아담과 이브가 됩니다. ‘알몸’임을 알아차리고 아무리 가리려고 애쓰지만 부끄럽기만 한 것은 그만큼 우리가 넘지 말아야 할 경계선을 자주 넘어서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아담이 오셨지만 우리는 아직도 옛 아담이요 옛 이브입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고,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하는 나약한 우리의 의지를 키우는 사순시기입니다.
새로운 계명은 우리가 해야 할 것을 명하지만 우리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합니다. 계명은 주님께서 원하시고 우리는 원하는 욕망으로 삽니다. 지키고 살아야 하는 의무적 계명이 아니라, 지키고 살고 싶은 계명이 될 때, 우리는 땅에서 살지만 하늘에서 살게 됩니다.
땅보다 하늘에서 큰 사람이 되려면 계명에 대한 우리의 열정을 살려야 합니다. 땅에서 큰 사람이 되려고 천지창조 때부터 키워 온 우리의 욕망보다, 새로운 아담에 대한 열정을 키워야 합니다. 새 사람이 되려는 열정만큼 우리는 하늘에서 ‘큰 사람’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땅이 아니라 하늘에서 ‘큰 사람’이 되기로 약속한 사람들입니다.
=====================
[서울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
꼭 읽어야 하는데 읽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약을 사면 설명서가 있습니다. 저는 거의 읽어보지 않았습니다. 자동차를 사면 설명서가 있습니다. 역시 거의 읽어 보지 않았습니다. 전자제품을 사면 대부분 설명서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것들도 제대로 읽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혹 문제가 되면 잘 아는 분들에게 알려달라고 하였습니다.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차이는 바로 거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처음부터 전문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설명서를 꼼꼼하게 읽고, 설명서에 있는 대로 해보는 사람들이 시간이 지나면 전문가가 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음식점에서 뛰어 다녀도 말을 잘 하지 않습니다. 기차 안에서 떠들어도 말을 잘 하지 않습니다. 부모님에게 아이는 귀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기가 죽을까봐 말을 하지 않습니다. 이웃들도 시간이 지나기를 바라면서 참습니다. 그런 아이들이 자라면 지켜야할 규범과 예의를 무시하기 마련입니다. 어려서부터 참는 것을 배운다면, 기도하는 법을 배운다면 아이는 자라서 남을 도울 수 있고, 힘들 때면 하느님께 기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능력이 있는 사람, 권위가 있는 사람, 전문가들이 잘못을 해도 말을 잘 하지 못합니다. 그 사람들이 쌓아온 업적, 인맥, 권력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권위와 능력을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성직자도, 예술인도, 문학인도, 학자도 예외가 없습니다. 외적인 능력과 권위를 담아낼 내적인 성찰과 영성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성당에서 주보를 정리하고, 화장실 청소를 하고, 마당의 쓰레기를 치우고, 약수터에서 물을 떠오고, 봉고차를 운전하고, 장례가 나면 연도를 가는 사제들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사제들에게 ‘신부님은 그런 거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라고 말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오히려 그런 사제들에게 ‘잘 하셨습니다.’라고 말을 하면 좋겠습니다. 말을 함부로 하고, 늦은 시간까지 술자리를 하고, 강론을 성실하게 준비하지 않고, 고백성사를 힘들어하고, 미사 시간에 늦는 사제들에게는 ‘신부님 여기서 그러시면 안 됩니다.’라고 말을 하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사제를 사랑하고, 사제를 위하는 것입니다.
건축하는 사람들은 설계도를 따라서 건물을 지어야 합니다. 자동차를 만드는 사람들도 도면에 따라서 자동차를 만들어야 합니다. 약을 만드는 사람도 약을 만드는 공정에 따라서 약을 만들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인들은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과 율법’에 따라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를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주는 설계도와 같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여러분 중에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될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완성하러 왔습니다. 이 계명들 중에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라 불릴 것입니다.”
성당에 나오면서 부부싸움을 한다면, 성당에 나오면서 교통신호를 무시한다면, 성당에 나오면서 주변 사람들의 험담을 한다면, 성당에 나오면서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서 산다면, 성당에 나오면서 자녀들을 소유물처럼 생각한다면 이는 율법과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서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승차권을 사지도 않고 버스에 타려고 하는 무임승차입니다. 율법과 계명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상대방에게 해 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먼저 실행하는 것입니다. 벗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입니다.
###############
(2)
영화 ‘프란치스코’를 보았습니다. 교구청에 있기 때문에 ‘시사회’에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2년 전 ‘교황 방한 준비위원회’에서 일을 하던 때를 생각하였습니다.
영화는 시종일관 잔잔함 감동을 주었습니다. 연출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참된 목자의 삶을 살아가는 교황님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교황님은 사제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행동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교회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사제는 겸손해야 하고, 교회는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청빈과 겸손’으로 쓰러져 가는 교회를 다시 일으켰던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가난한 이들의 벗이 되셨습니다.
영화에서 교황님은 두 개의 교회를 이야기 하였습니다. 하나는 스스로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교회입니다. 권위와 조직으로 운영되는 교회입니다. 다른 하나는 복음을 선포하는 교회입니다. 성령께 의탁하고, 성모님의 전구를 청하며, 늘 변화하려고 노력하는 교회입니다. 절망 중에서도 희망의 빛을 찾으며, 슬픔 중에서도 하느님의 위로를 느끼는 교회입니다. 사순시기의 묵상으로 영화 ‘프란치스코’를 보면 좋겠습니다.
성지순례를 하면서 유대인들의 ‘안식일’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안식일에는 가족들이 모두 모인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하나의 빵을 축복한 후에 가족들에게 나누어 준다는 것입니다. 회당에 가서 함께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가족들은 모두가 대화에 참여하고, 아이들까지도 대화에서 자신들의 의견을 말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안식일은 신앙의 학교이고, 안식일은 가족의 아픔을 나누는 치유의 시간이며, 안식일은 세상의 것들을 잠시 뒤로하고 하느님께 기도하는 날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성전이 파괴되었어도, 2000년 동안 나라를 잃어버렸어도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한 유대인들의 힘인 것 같았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새로운 땅에서 살아가게 될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실천하라고 가르쳐 주는 규정과 법규들을 잘 들어라. 그래야 너희가 살 수 있고, 주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 그곳을 차지할 것이다. 평생 너희 마음에서 떠나지 않게 하여라. 또한 자자손손에게 그것들을 알려 주어라.”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계명과 규정을 더욱 충실하게 실천하는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우리는 사순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기도, 희생, 나눔, 봉사’를 충실하게 실천하여서 하느님 나라에서 큰 사람으로 불릴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신앙인들은 세상 사람들이 치열하게 살아가는 그 모습보다 더 치열하게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해서라면 율법과 계명을 지키고,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생각해 봅니다. 나는 늦은 시간까지 사람들의 머리카락을 손질하는 미용실의 직원보다 더 성실하게 살고 있는가! 나는 정해진 시간에 기차를 출발시키려고 노력하는 승무원보다 더 충실하게 나에게 주어진 일들을 수행했는가! 영화에서 교황님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유대교가 없었다면 가톨릭이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분쟁과 대립보다는 대화와 협력이 더 많은 결실을 맺을 수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하느님을 위한 일이라면 아주 작은 일이라도 충실하게 해야 하고,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라면 사소한 것이라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된 수행자修行者의 삶>
-기본에 충실한 삶-
어제 강론은 기도에 대해 많이 강조했습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는 순간 ‘실천’이라는 말이 마음에 깊이 와 닿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기도 많이 하고 많이 알아도 실천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기도따로 삶따로가 아닙니다. 기도는 삶의 실천으로 입증되어야 합니다. 사랑은 구체적 실천을 통해 진짜임이 드러납니다. 문득 예전에도 인용했던 예화가 생각납니다. 많은 수도자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던 지금은 이미 고인이 된 선배수도사제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입니까?”
“규칙대로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다.”
수도자들이 물을 때마다 이렇게 답변했다는 것입니다. 복잡할 것 없습니다. 잘 사는 길은 아주 단순합니다. 규칙대로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는 말이 참 평범하지만 명답입니다. 영성에 대해 말하기전 삶의 기본에, 상식과 양식에 충실하라는, 수도자가 되기 이전에 먼저 사람이 되라는 옛 장상의 충고도 잊지 못합니다.
수행생활의 기반위에 관상생활입니다. 불가의 삼학의 우선 순서도 계정혜戒定慧입니다. 계율戒律 준수의 기반위에 선정禪定의 관상이요 지혜智惠입니다. 계율준수의 수행이 없는 영성생활은 사상누각, 모래위에 집짓기처럼 참으로 허술하고 위태합니다. 제가 예전에 늘 강조했던 말도 생각이 납니다.
“일과표의 궤도에 충실하십시오. 일과표의 궤도에 충실한 것이 해결의 지름길입니다. 마음따라, 감정따라 살지 말고, 일과표의 궤도따라 사십시오. 이렇게 일과표의 궤도에 충실하다 보면 때가 되면 떠났던 마음도, 감정도 본연의 제자리로 돌아와 마음의 안정과 평화입니다. 일과표의 궤도에 항구하십시오. 바로 구원의 길입니다. 성공적 정주생활의 비결입니다.”
영성생활은 비상하거나 뜬구름 잡는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영적일수록 현실적이라 했습니다. 가까이 있는 지켜야 할 규칙에 충실하고 항구한 것이 바로 영성생활의 토대입니다. 바로 이것이 기본에 충실한 본질적 삶입니다. 이래야 비로소 수행자라 할 수 있습니다. 분도 규칙도 거의 모두가 실천해야할 수행사항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오늘날 요원의 불길처럼 번지는 미투운동을 보십시오. 십계명중 ‘6.간음하지 마라’, ‘9.남의 아내를 탐내지 마라.’는 두계명을 위반한 경우가 아닙니까? 이 두 계명을 위반함으로 공든탑이 무너지듯 속절없이 무너지는 삶들입니다. 미투운동에 연루된 가해자에 대한 댓글도 잊지 못합니다.
“그의 철학과 가치관은 허위임이, 가짜임이 드러났다. 윤리가 결여된 모든 것들은 추호의 가치도 없다.”
문득 ‘죄없는 자가 돌로 치라.’는 간음한 여인에 대해 분노하는 군중들에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이들 미투의 가해 남성들을 비난하기에 앞서 모든 남성들은 반성하고 자숙해야 할 것입니다. 모두의 가능성이기 때문입니다. 하여 식욕, 성욕, 물욕의 욕망을 제어하는데 구체적 규정과 법규들을 실천하여 습관화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오늘 제1독서의 주제는 ‘모세와 하느님의 법’이고, 복음은 ‘예수님과 율법’입니다. 두분 다 얼마나 하느님의 법인 율법에 각별한 애정을 쏟으셨는지 짐작이 갑니다.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실천하라고 가르쳐 주는 규정과 법규들을 잘 들어라.--- 보아라, 너희가 들어가 차지하게 될 땅에서 그대로 실천하도록, 나는 주 나의 하느님께서 나에게 명령하신 대로 규정과 법규들을 가르쳐 주었다. 너희는 그것을 잘 지키고 실천하여라. 그리하면 민족들이 너희의 지혜와 슬기를 보게 될 것이다.”
그대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유독 강조되는 말마디가 ‘실천’입니다. 규정과 법규들의 실천에 충실함이 바로 지혜와 슬기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기본에 충실한 본질적 삶을 살 때 주님도 늘 그들과 함께 하시니 지혜롭고 슬기로운 삶입니다. 계속 이어지는 모세의 간곡한 당부입니다.
“너희는 오로지 조심하고 단단히 정신을 차려, 너희가 두 눈으로 본 것들을 잊지 않도록 하여라. 그것이 평생 너희 마음에서 떠나지 않도록 하여라.”
늘 하느님 현존 속에 살라는 말씀입니다. 매일 미사와 성무일도 분위기를 늘 생생히 간직하고 깨어 살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하느님 법에 대한 예수님의 자세도 추상같고 단호하기가 모세를 능가합니다. 새 모세 예수님이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기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법규나 규정들, 율법이나 예언서는 하느님 사랑의 선물입니다. 정말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들을 사랑하며 실천에 옮깁니다. 물론 율법의 완성은 사랑으로 이루어질 것이며 그 구체적 방법은 계속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진정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할 때 마음의 순수요 그가 하는 모든 사랑의 행위는 율법의 완성에로 이끌 것입니다. 그러나 우선 그 마음의 순수와 사랑에 이르기까지는 구체적 계명과 규칙을 준수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늘 초심자初心者의 열정으로 돌아가 계명과 규칙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가까이 있습니다. 오늘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 중심의 일과표의 궤도에, 또 우리의 3대서원, 정주와 수도승다운 생활, 순종의 실천에 충실하고 항구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수행생활에 항구하고 충실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아멘.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떤 부모로부터 자녀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공부를 너무 못해서 이번에 꼴찌를 했다는 것이지요. 주변 사람들에게 너무나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 수 없다고 아이에게 말했더니 아이가 뜻밖의 말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내가 공부 못하기는 하지만, 꼴찌가 그렇게 부끄러운 거야? 그래도 이렇게 건강한 아들 둔 것이 더 나은 것 아냐?"
생각해 보니 꼴찌했다는 사실만 부끄러워했지, 아들을 제대로 바라보지 않았다는 사실에 큰 반성을 할 수 있었답니다. 하긴 어떤 부모는 사고로 일찍 자녀를 잃고 나서 “꼴찌라도 하는 아이가 있었으면 한이 없겠네요.”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일까요? 공부 잘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건강하게 잘 지내는 것일까요?
사실 많은 이들이 완벽함을 추구합니다. 이것도 잘 하고, 저것도 잘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건강은 당연한 것이고, 여기에 공부도 잘 해야 한다고 요구하지요. 노력을 하면 안 되는 것이 없다고 말하면서요. 그러나 공부만 잘 하는 아이보다 공부만 못 하는 아이가 더 훌륭한 아이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자녀는 부모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좋은 모범을 줄 수도 있고, 또 나쁜 모범을 줄 수도 있습니다. 특히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모습으로 좋은 모범을 보인다면, 자녀 역시 책임감을 가지고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살 가능성이 훨씬 더 높아집니다. 그리고 중요한 가치를 쫓아서 사는 부모의 모범이 자녀 역시 중요한 가치를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하는 좋은 모범들이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한 줄기 빛과 같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좋은 모범보다는 내 자신의 세속적인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려다보니 세상은 더욱 더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 주님께서는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고 하십니다. 사실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구약의 모든 것을 폐지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에 어긋나는 말과 행동을 자주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율법이나 예언사들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지요. 그보다는 그 안에 담긴 내용인 사랑이 세상 밖으로 실천되는 것이 더 중요했고 이로써 율법이나 예언서의 완성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글이나 말로만은 완성되지 않습니다. 바로 직접 몸으로 보여주는 행동이 담긴 모범을 통해 주님의 뜻이 이 세상에 완성될 수 있습니다.
###############
{병원에서... }
병원에 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특히 맑고 화창한 날에 병원으로 향할 때는 괜히 마음이 더 슬퍼지기도 합니다. 병원에 가면 죄다 아픈 사람뿐이거든요. 많은 사람이 병으로 아파하고 괴로워하는 것을 목격합니다. 또 많은 이는 아주 긴 시간을 병과 싸우면서 병실에 누워있기도 합니다.
이 모습들을 보면 절대로 유쾌하지만은 않습니다. 저 역시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일까요? 저 역시 아프다는 표시를 해야 할 것 같아서 괜히 우울한 마음이 생긴 것일까요?
그런데 이렇게 병중에 있으면서도 사람들에게 밝은 모습을 보이는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다. 병원에서 오래 살기 힘들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들에게 위로를 전하고 또한 모범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자신도 많이 아프면서도 다른 이들에게 희망을 전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 모습에 많은 이들이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프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는 일반적인 생각들을 깨뜨리는 모습으로 좋은 모범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희망을 전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 이 순간을 감사하면서, 하느님과 함께 하는 희망을 간직하는 사람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절망에 빠지지 않고 기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
[파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민족들과 다른 점을 하나를 들라면,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그들이 ‘율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 하나를 들라면,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가 ‘복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나 그리스도인이 다른 이들과 구별 짓게 하는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지도자들이 강조하는 문자적 의미의 율법준수를 종종 거부하시곤 하셨습니다. 곧 안식일법도 정결례법도 단식도 지키지 않으시고, 모세의 이름이 아닌 당신 자신의 이름으로 가르치고, 죄의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래서 ‘율법의 파괴자’라는 낙인이 찍히기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이 폐기되거나 단절된 것이 아니라, ‘율법의 완성’으로서의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이는 복음을 예표하고 있던 구약의 율법이 이제는 복음 안에서 완성되었음을 말해줍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것으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율법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도록,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감시자 노릇을 하였습니다.”(갈라 3,34)
“율법은 단지 무엇이 죄가 되는지를 알려줄 따름 이었습니다”(로마 3,20)
결국, 당신 자신이 구약이 지향하고 있는 종말론적인 목표임을 드러내십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마태 5,18)
이는 율법의 단절이 아니라 영속성을 말해줍니다. 곧 율법이 폐지되는 것이 아니라, 그 불완전함이 보충되고 완전하게 되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다면, 대체 율법의 성취는 어디에서 이루어지는 것일까?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 계명들 가운데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으로 불리 것이다.”(마태 5,19)
이는 율법이 당신의 가르침과 행위를 계속하는 당신의 제자들에게서 이루어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가장 작은 계명 하나라도 소홀히 하지 않고 잘 지키는 데서 이루어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율법은 지켜질 때라야, 비로소 그 행위 안에서 성취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율법을 ‘먼저’ ‘지켜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지키는’ 것으로 가르치라는 말씀입니다. 곧 알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말로만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스스로 지킴으로써 타인들에게 가르치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율법은 지켜질 때 비로소 그 행위 안에서 성취되게 됩니다. 곧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 안에서 성취됩니다. 그러니 “스스로”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스로 지킨다는 것’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이가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곧 계명을 주신 분을 사랑하는 일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결국, 사랑이 율법을 완성합니다.
사도 요한은 그의 편지에서 말합니다.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됩니다.”(1요한 2,5)
그리고 그는 <복음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계명을 받아들이고 지키는 사람이 바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
하오니, 주님!
제가 말씀의 계명을 스스로 지킴으로 당신을 사랑하는 이가 되게 하소서.
말로만이 아니라 행실로 사랑하게 하소서!
행실로 사랑하되, 진리 안에서 사랑하게 하소서!
비록 작은 것 하나에라도 깊은 사랑을 담고 행하게 하소서! 아멘.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반신부의 복음 묵상
<(1)율법의 완성자>
시골 본당 신부를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자동차를 운전하고 성당으로 가고 있는데 앞에 트럭이 길을 막고 있었습니다. 왕복 1차선 길에서 얼마나 천천히 가던지 답답함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추월해서는 안 되는 곳이지만 속도를 내어 추월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경찰에 잡히고 말았습니다. 면허증을 주면서 “죄송합니다.” 하였더니 그분이 “신부님이시네요! 바쁘신가 보죠?” 하였습니다. 속이 상해서 “제가 잘못하였으니 딱지나 끊으시지요!” 말했더니 “그냥 가십시오. 다음부터는 천천히 다니십시오.” 하며 친절하게 보내주었습니다.
다음날이었습니다. 지역 관할 경찰간부 소양교육에 제가 강사로 초빙된 날입니다. 경찰서장을 비롯하여 70여 명이 모여 있었습니다. 저는 전날의 일을 서두로 꺼냈습니다. “제가 잘못을 범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냥 보내주셔서 부끄러움이 더 컸습니다. 정말 좋은 말을 하기는 쉽지만 말한 대로 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앞으로 제가 잘못을 범하거든 앞으로는 꼭 벌점을 주십시오!” 한바탕 웃고 나서야 강의를 할 수 있었습니다.
가르치는 대로 행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근본정신을 사랑으로 요약하셨습니다. 율법의 완성은 계명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데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계명 준수만으로는 율법이 완성될 수 없습니다. 교통법규를 지키는 것도 법이니까 지킨다는 것보다 다른 사람의 안전과 공공의 유익을 위해서 그리고 나의 생명을 지키는 차원에서 지킨다면 그것은 큰 사랑의 행위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에 더 신경을 쓰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지만 사소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부터 챙기는 모범을 보여야겠습니다. 어떤 모임을 가보면 과속을 한 것이나 음주운전을 한 것을 자랑삼아 얘기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5,19).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과연 언행일치의 삶을 살고 있는가? 지금 마음을 어디에 두고 사는가를 점검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앞에서 결정한 것은 미루지 말고 그분의 뜻대로 실천하시고 가장 사소한 것이 가장 중요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구약성경의 말씀을 이루려고 오셨다'는 뜻입니다. 규정에 담긴 정신과 의미, 가르침은 세월의 흐름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현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율법의 완성자이십니다.
따라서 무슨 일을 하든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좋아하는 자들처럼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진심으로 실행하십시오”(에페6,6). 여러분은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2). 그리하여 율법을 완성하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2)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우리는 살아가면서 가능한 행복하게 잘 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노력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어느 한 순간 걸려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저 사람은 법 없이도 살 사람이야!’ 라는 소리를 듣는 사람도 아무의 도움도 필요 없을 만큼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넘어지는 이유를 보면 욕심에서 비롯됩니다.
야고보사도는 “여러분의 싸움은 어디에서 오며 여러분의 다툼은 어디에서 옵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여러가지 욕정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합니다. 살인까지 하며 시기를 해 보지만 얻어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또 다투고 싸웁니다”(야고4,1-2).하고 말합니다. 불교에서도 탐욕과 어리석음과 성냄이 인간을 병들게 만드는 독이라고 가르칩니다. 욕심을 부리지 않으면 화를 내고 다투는 일이 없을 텐데 욕심 때문에 남과는 물론 심지어 형제와도 등지게 되기도 합니다. 기대가 크면 클수록 서로를 힘들게 하고 자유를 억압하며 담을 높이 쌓게 됩니다.
얼마 전 한 어르신이 자녀들에게 유언으로 유산을 분배하고 세상을 뜨셨는데 자녀들에게 큰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자녀들은 모두 내로라할 만큼 큰 재산을 가진, 그야말로 살 만한 사람들이었는데 서로 서운함을 가지고 등지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재산이 없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재산은 분명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인데 재산이 사람을 죽입니다. 그 담을 허물 수 있는 은총을 간구합니다. 담을 허문다는 것은 용서하는 것입니다.
사실 용서라는 것이 말같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랑을 받은 사람이 사랑할 수 있듯이 하느님으로부터 진정한 용서를 경험한 사람은 진정으로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을 성찰해 볼 때 하느님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삶을 살아온 날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마음을 다잡으려 하지만 인간의 연약함에 넘어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알게 모르게 하느님과 이웃으로부터 용서를 받아왔고 앞으로도 분명 용서를 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내가 용서를 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 비로소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용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이 용서 덕분에 죄악으로부터의 자유와 해방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그 자유에 이르기까지 고통을 수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당신을 못박은 사람들을 위해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 하고 기도하신 예수님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또한 사람들이 돌을 던질 때에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하고 기도하며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사도7,60) 하고 애원하였던 스테파노의 마음을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용서는 선물로 주어졌지만 만약 우리가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을 담고 있게 되면 하느님과 이웃으로부터 고립되게 되고 영적으로 뿐 아니라 육적으로도 건강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18,22)
용서는 결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 아닙니다. 선행도 아닙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먼저 주님의 사랑과 용서를 받은 만큼 우리도 이웃을 용서해야 합니다. 설령 전혀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나쁜 사람이라도! 어느 날, 내가 용서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가슴깊이 느낄 수 있는 은혜가 주어지길 기도합니다.
“악을 악으로 갚거나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말고 오히려 축복해 주십시오. 바로 이렇게 하라고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복을 상속받게 하려는 것입니다.”(1베드 3,9)
더 큰 사랑으로 주님 안에서 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19)
<'십계명과 새계명!'>
다른 종교까지 포함해서 믿는 사람들의 숫자를 헤아린다면 그 숫자는 참으로 어마어마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하느님의 나라로 더 가까이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 세상이 더 혼란한 이유는 왜일까?
제대로 믿지 않고, 지켜야 것들을 제대로 지키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 하느님의 나라는 나로부터 시작되니까요.
오늘 독서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합니다. 가르쳐 준 규정과 법규들을 잘 지키고 실천하면 살 수 있고,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신명4,1.5-9 참조)
우리가 지켜야 할 십계명과 새계명이 더 간절하게 다가오는 오늘입니다.
1.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여라.
2.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3.주일을 거룩히 지내라.
4.부모에게 효도하라.
5.사람을 죽이지 마라.
6.간음하지 마라.
7.도둑질을 하지 마라.
8.거짓 증언하지 마라.
9.남의 아내를 탐내지 마라.
10.남의 재물을 탐내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새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3,34)
더 나은 세상, 더 나은 하느님의 나라 건설을 위해서, 우리가 지키기로 약속한 십계명과 새계명을 마음 깊이 새기고, 이를 더 지키려고 노력하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한반도의 평화와 세계 평화를 위하여 애쓰시는 문재인 디모테오 대통령님처럼... ㅎㅎ
=====================
[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모세는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법규에 충실할 것을 당부합니다. 그것이 이 민족들과의 구별을 할 수 잣대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아울러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규정과 법규들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합니다.
“우리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는, 주 우리 하느님 같은 신을 모신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 또한 내가 오늘 너희 앞에 내놓는 이 모든 율법처럼 올바른 규정과 법규들을 가진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신명 4,7-8)
그래서 모세는 거듭 강조하며 하느님께서 규정해 주시는 법에 충실할 것을 당부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오로지 조심하고 단단히 정신을 차려, 너희가 두 눈으로 본 것들을 잊지 않도록 하여라. 그것들이 평생 너희 마음에서 떠나지 않게 하여라. 또한 자자손손에게 그것들을 알려 주어라.”(9절)
예수님께서도 모세처럼 하느님의 법에 충실할 것을 아울러 당부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마태 5,17-18)
그래서 주님께서 작은 법 하나라도 어기는 사람은 하늘 나라에서 작은 사람이라 불릴 것이라하시고 반대로 작은 것이라도 지키고 또 남에게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 릴 것이라고 하시지요.
이곳에 와서 주일마다 또 다른 본당에서 한국어 미사를 봉헌합니다. 그리로 가려면 회장단 몇 교우가 교대로 운전을 해서 다녀옵니다. 그곳을 가기 위해서 한 동네를 지나가게 되는데 유별나게 읍내도 그렇지만 시골길은 좁습니다. 가끔씩 마주 보고 오는 차들이 차선을 잘 지키며 운전을 잘 해 주기를 바라지요. 가늘고 희미하기도 하지만 그어진 노란 중앙선이 고맙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 선을 사이에 두고 서로 교통법규에 충실해서 그 차선을 넘어 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 법은 한결 같이 지켜야 하지요. 때로는 급커브에서 지키기가 힘든데 그것은 속력을 줄이고 주의해야 하는 것입니다.
선진국의 특징이라고 할까요? 법 준수에는 철저한 것이지요. 한 예로 중앙 차선을 이야기 했지만 공중도덕도 그렇고 지켜야 할 윤리도 마찬가지로 다 공동체에서는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 법이라고 하겠습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의 여정 마무리가 되는 모압 평야에서 자주 하느님께서 세우신 법에 충실할 것을 거듭 강조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사막의 여러 악 조건에서도 수련을 하며 깨우치는 하느님과의 충실한 관계와 삶을 터득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또한 약속의 땅에서 다른 민족들의 문화와 관습에서 흔들림 없이 살아남을 수 있는 교육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생활하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법은 내가 지키기에는 수고스럽지만 내세우거나 남에게 지우기에는 쉽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아주 작은 것이라도 스스로 지키고 남에게 가르치는 사람이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 대접을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
[서울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윤리도덕 원천을 하늘나라에 둬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오 5,18~18)
가톨릭 신앙인과 비 신앙인의 차이는 그 사는 자세가 매우 다르답니다. 신앙인은 하늘이 보고 천사 마귀가 옆에 있고 영혼 기록을 의식합니다. 그러나 비 신앙인은 보는 이 없고 아무도 모른다니 인간짐승 같겠지요.
그래서 'Me too'란 건 하늘교육을 제대로 받고 못 받고의 문제입니다. 교리배운 신앙인도 육욕억제 힘든데 무신론자면 고등동물로 족하겠죠. 윤리와 도덕을 고작 공자맹자 삼강오륜에 의존했으니 실패한 거거든요.
신앙인들은 예수님 말씀대로 윤리도덕 원천을 하늘나라에 두고 삽니다. 가톨릭 교리교육은 하늘나라에서 큰사람 되게 하는 영생용 교육입니다.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5, 19)
꽃샘추위도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려 합니다.
율법과 예언서는
하느님 백성의
정체성을 다시 한 번
일깨워줍니다.
율법과 예언서의
바탕은 분명 믿음입니다.
실천하는 믿음이 없으면
율법과 예언서 또한
한낱 지식에
불과할 것입니다.
실천하는 믿음은
창조와 삶의
기본원리입니다.
율법과 예언서는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우리들을
반석 위에 집을 짓도록
이끌어갑니다.
실천을 통한
내적인 변화가 필요한
우리의 사순시기입니다.
율법의 가치는
지키고 가르치는
우리의 정신에 있습니다.
우리의 삶으로부터
율법의 가치는
더욱 높아지고
깊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욕심에 가려진 율법을
당신 삶으로
완성시키십니다.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을
우리 또한
스스로 지키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율법과 예언서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실천을 강조합니다.
실천하는 믿음이
그 어떤 일보다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삶의 길이란
아는 것을 실천하는
믿음의 길입니다.
하느님 백성답게
믿음을 실천하는
변화의 시간되시길
기도드립니다.
=====================
Since 2013. 10. 24
편집/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보내드립니다■
010-3284-9295(문자만 가능)
카톡ID jijiveve 또는 SNS
이름, 본명, 지역(본당), 연락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