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동벽화마을을 돌고 나온것이 지동시장이다.
지동시장은 왜인지 모르겠지만 순대가 유명하다.
순대국집이 여럿 보인다.
간만에 갔더니 수원천이 복원되어져 있었다.
전에 갔을때 한참 공사중이던데.
저 수원천에 세워진 성벽은 끊어진 수원화성과 이어져 있다.
간판이며 분위기며 아직은 시골장날 같은 느낌이 물씬하다.
정겹다.
수원천은
수원시의 북쪽 광교산에서 발원하여 광교저수지를 거쳐
영화동 · 북수동 · 팔달로 · 매산로 등 수원의 구시가지를 관통한다.
이후 권선구 대황교동에서 황구지천에 합류하는 준용하천이다.
발원지에서 광교저수지에 이르는 데까지는 광교천이라고 따로 부른다.
구시가지내 수원천 주변에는 북수문(화홍문), 남수문 그리고 방화수류정 등의 문화재가 있다.
정조가 화성 축성을 할 때 이들 건축물뿐만 아니라 수원천변에 버드나무를 심는 등
수원천의 자연 경관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한 흔적이 뚜렷하다.
1993년 매교~지동교 사이에 하천 구간이 복개되어 도로로 이용되다가
최근에 서울의 청계천처럼 자연형 하천으로 복원할 계획을 세우고 추진 중에 있다.
수원천이 지나는 세류동에 정조 때 세운 상류천(上柳川) · 하류천(下柳川)이라는 도로 표지석이 있다.
이를 통해 옛 이름은 유천(柳川)임을 알 수 있다.
『동국여도』에 장족역(長足驛, 현재의 원천동) 서쪽에 흐르는 하천을 사근천(沙近川)이라고 표기하고 있는데,
아마도 수원천보다 좀 더 서쪽에 있는 서호천과 혼동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나름 유서 있는 곳이였군 수원천이 ㅡ,.ㅡㅋ
수원 재래시장중에서 못골시장이 유명할거 같다.
매스컴도 좀 타고 했으니 ㅋㅋㅋ
재래시장 다시 살리기 성공 케이스로 나왔다고 본적이 있다
전에도 한번 여게에서 소개 한적이 있다.
http://cafe.daum.net/hanryulove/9t3V/908
맛나보인다.
날이 쌀쌀해지니 만두 생각이 난다.
직접 뻥하고 튀겨주는 곳이다.
돈을 쓸어 담는다는 족발집
유명족발집이다.
줄서서 족발을 사가는게 보인다 ㅋㅋㅋㅋㅋ
저 돈통 좀 보소 ㅡ,.ㅡㅋ
시장 돌다가 목이 말라서 마신 식혜
1000원인데 살얼음 때문인지 엄청 시원했다.
친구중에 읍단위서 살던 친구가 있었다.
처음 서울에 올라서 저런 전을 시장에서 파는 걸 보고 컬쳐쇼크를 느꼈다고 한다-_-
사먹어 본적고 없고 집에서 하는 음식인줄았는데
근데 시험 삼아 사먹어 보니 맛있어서 자주 사서 먹었다는 이야기가 ㅋㅋㅋ
보글보글 청국장이 당긴다.
콩국수는 왜 여름에만 파는지;;
겨울에도 팔아줬으면 ㅡ,ㅡㅋ
뽕짝이 울려퍼지는 리어카
이런 풍경은 고속도로나 가야 볼 수 있건만 뭔가 정겹다.
수원 팔달시장쪽에 통닭거리같은게 있는데
거기에 많은 닭집이 몰려있다.
그 중 저 진미통닭집은 최고라고 소문난 집이고 항상 상전벽해이다 ㅋㅋㅋ
줄서서 먹어야함 ㅡ,ㅡ;;
본인은 아직ㅡ,.ㅡ;;
팔달문 시장
여긴 주로 옷이나 침구류등을 많이 판다.
팔달문쪽에 시장은 지동시장,못골시장.미나리시장,팔달문시장,영동시장
이렇게 있는 걸로 안다.
다 거기서 거기로 모여있지만 시장마다 파는 메인이 조금씩 다른거 같다.
여튼 보기 드문 거대한 재래시장터를 형성하고 있고 이용객도 많은걸로 안다.
지금은 그 힘이 약해졌지만 수원 번화가중 하나가 팔달문 즉 남문이었다.
그래 항시 유동인구가 장난 아니였던게 기억이 난다.
어릴 떄 여기서 자주 분식류 먹었던게 기억난다 ㅋㅋㅋ
여기 말고 유명한 집 있었는데 사라져서 아쉽다.
보수공사 중인 팔달문
정조는 왜 팔달문시장을 만들었을까역사적으로 수원사람은 ‘깍쟁이’로 불렸다.
개성상인은 송상, 서울상인은 경상으로 불리는데 수원상인은 왜 깍쟁이일까?
옛날에는 ‘가게’를 ‘가가’로, 상인을 ‘가가쟁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변해 ‘깍쟁이’가 되었다.
즉, 수원에 그만큼 가게가 많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수원에 가게가 이렇게 많아진 데는 정조의 힘이 컸다.수원은 정조의 도시다.
비극적으로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가 간직했던 개혁의 꿈을 이룰 무대로 정조가 선택한 땅, 수원!
정조는 여기서 어떤 세상을 열고 싶었던 것일까?
수원은 ‘유경’이다정조는 부국강병의 근원이 상공업에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한양의 상권은 이미 기득권과 손잡고 금난전권을 비롯한 막대한 이권을 확보한 상태였다.
“그렇다면 아예 무대를 옮기자.”
정조는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에서 한양으로 올라오는 길목인 수원에 신도시를 건설하기로 했다.
그런데 수원은 물이 부족했다.
정조는 수원 곳곳에 버드나무를 심어 제방을 튼튼하게 하고,
물길을 확충하여 저수지와 농경지를 만들었다. 이에 수원은 ‘유경’이라고도 불렸다.
‘버드나무가 많은 수도’라는 뜻이다.
실제로 팔달문시장 앞을 흐르는 수원천은 버드나무가 하도 많아 ‘버드내’라고 불리기까지 한다. 정조의 부름에 응한 선비상인들 수원에 사회기반시설을 조성한 정조는 수원성을 짓고 그 남문인 팔달문에 시장을 열었다.
그것이 오늘날 수원의 팔달문시장이다. 그러니까 수원 팔달문시장은 ‘왕이 만든 시장’이다.
시장을 연 정조는 전국의 대상인들을 불러 모았다.
정조의 부름에 응한 상인들이 팔달문시장으로 속속 모여들었다.
이들은 정조처럼 부국강병의 근본이 상공업에 있다고 보고 일찍이 상업에 투신한 선비상인들이었다.
이처럼 뿌리가 선비에 있다 보니 수원상계는 이(利)보다는 의(義)를 따르고,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중시하는 기풍이 조성되었다.
일제강점기에 교육 사업에 헌신하는 상인들이 특히 많았던 사실도 이와 무관치 않다.
그런데도 ‘깍쟁이’로 불린다면 수원 상인으로선 억울할 법하다.평양유상의 맥은 끊겼으나 수원상인은 깍쟁이가 아니다. 정조가 사랑한 도시 유경의 상인이니 유상이다.
선비 상인들이니 유상이기도 하다.
평양상인도 유상으로 불렸다. 평양 역시 버드나무가 많아 ‘유경’으로 불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양의 버드나무와 수원의 버드나무는 의미가 다르다.
평양 사람들의 심성이 너무 거칠어 이를 유화시키려고 심은 것이 평양의 버드나무라면,
수원의 버드나무는 정조가 백성들을 행복하게 해 주고 싶은 마음으로 심은 애민의 나무이기 때문이다.
또한 사회주의가 들어서면서 평양유상의 맥은 끊기고 말았다.
출처 왕이 만든 시장 -그곳에서 만난 유상들 서평
첫댓글 좋은사진,, 좋은음악,, 거기다 역사공부까지 하게 되네요..
사진 정말 정겹게 잘 찍으셨네요 저도 수원 함 가야겠습니다 ㅎ
사진으로 보니 멋있습니다...요샌 쭝꿔아자씨 아잠마들이 지천으로 깔렸다고 하데요...
그리운 내고향도 수원입니다....아~..반가워라..초,중,고를 모두 수원에서 보낸사람으로.. 17년전 신도시로 이사와서는..뻘쭘하게 꼭같은 모양새를하고 섯는 아파트들하며 .. 차를끌고가야 장을볼수있는 마트를 가야하는데..골목마다 돌아서면 재미난게 많았던.. 어릴때 엄마치마 꼬리를 놓칠새라 꼭잡고 다녔던.. 영동시장이며, 지동시장골목들이 너무 그리웠었는데...이렇게 볼 수있게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첫댓글 좋은사진,, 좋은음악,, 거기다 역사공부까지 하게 되네요..
사진 정말 정겹게 잘 찍으셨네요 저도 수원 함 가야겠습니다 ㅎ
사진으로 보니 멋있습니다...
요샌 쭝꿔아자씨 아잠마들이 지천으로 깔렸다고 하데요...
그리운 내고향도 수원입니다....아~..반가워라..
초,중,고를 모두 수원에서 보낸사람으로..
17년전 신도시로 이사와서는..뻘쭘하게 꼭같은 모양새를하고 섯는 아파트들하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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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끌고가야 장을볼수있는 마트를 가야하는데..
골목마다 돌아서면 재미난게 많았던.. 어릴때 엄마치마 꼬리를 놓칠새라 꼭잡고 다녔던..
영동시장이며, 지동시장골목들이 너무 그리웠었는데...
이렇게 볼 수있게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