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들이 일생에 한 번은 올라야 할 산으로 꼽는 후지산(해발 고도 3776m)을 오르다 지난 26일 세상을 떠난 세계적인 암벽등반가 구라카미 게이타(38)는 지난 2021년 심장이 좋지 않다는 진단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암벽 등반을 선택했다"며 새 루트 개척에 매달리다 끝내 이 산에 목숨을 바쳤다.
구라카미는 후지산의 야마나시 사면에 있는 요시다 루트에 들어선 지 다섯 시간 만에 여덟 번째 스테이션에서 의식을 잃어 친구가 응급구조를 요청,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끝내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고 일본의 YBS 뉴스 투데이를 인용해 익스플로러스웹이 27일(현지시간) 전했다.
1985년 군마현 태생인 고인은 심장 이상이 심각함을 알고 있었다. 페이스메이커를 달고 등반도 멀리해야 한다고 의료진은 권했지만 그는 끝내 거부했다. 스스로도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잘 알았을 것이다.
고교 때 산을 타기 시작한 그는 볼더링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10여년이 흘러 그는 전통적인 암벽등반 기법으로 해외 거벽 도전에 매달렸다. 특히 새 루트 개척에 각별한 열정을 비쳤다.
2015년 그는 파트너 사토 유스케와 함께 일본에서도 가장 멀티-피치 암벽 루트로 통하는 미주가키산의 모아이 사면에 일명 '천일의 라피스 라줄리' 루트를 개척했다. 2년 뒤에는 영국의 이름난 E9 6c 슬랩 루트인 '워크 오브 라이프'(Walk of Life)를 다섯 번째로 올랐다.
고인은 아웃도어 의류 브랜드 파타고니아의 암벽등반 홍보대사로 기용될 정도로 탄탄한 기량을 인정받았다고 저팬 투데이와 NYT는 전했다. 미국 피플 닷컴은 파타고니아로부터 코멘트를 곧바로 듣지 못했다고 전했다.
그는 물리학 학위 소지자였으며 등반에 대해 초연한 견해를 곧잘 밝히곤 했다. 등반이란 “콘택 포인트들의 연속이며 자연과 사람, 과거와 미래가 거기 깃들어 있음을 발견한다. 나는 물리적 예술과 철학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프리 클라이밍을 갈망한다”고 적었다
심장 이상을 처음 감지한 것은 2021년이었다. 친구들과 사이클로 근력 강화 훈련을 하던 중 갑자기 실신해 병원에 실려갔다. 당장 등반을 그만 두지 않으면 목숨을 잃을 것이란 경고를 들었다. 페이스메이커를 심장에 달라고 의사들은 권했지만 그는 중환자실에서 사흘 동안 고민하다 끝내 거부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듬해 일본 잡지와 인터뷰를 하며 그 이유를 털어놓았다. "내 생각에 등반을 포기하는 일은 나중에 후회할 선택 같았다. 등반하지 않고 70이나 80까지 산다고 내게 정말로 행복한 삶일까?”
그는 프리 솔로 암벽등반가로 이름난 킬리안 조넷과 스티브 하우스의 솔로 등반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이듬해 그는 볼더링에 귀의, 달리기와 등반 등에 하루 18시간 논스톱으로 매달렸다. 그는 90%쯤 몸이 돌아왔다고 느꼈다. 그는 점차 등반에 다시 몰두했지만 언제나 심장제세동기(AED)를 갖고 다녔다.
“난 목숨을 잃는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등반이 있는 삶을 선택했다. 하지만 등반이나 내 아내와 가족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시간이 오면 등반을 포기하는 일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등반에 매달렸음은 분명하다. 지난주에도 난이도 5.13의 단독 로프 등반 '프리덤'을 타는 자신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을 올렸다.
구라카미가 세상을 떠난 날, 저팬 타임스와 AP 통신 보도에 따르면 다른 산악인 3명의 주검들이 후지산 정상 아래 분화구 안에서 발견됐다. 이들 주검을 발견한 구조대는 지난 23일 실종된 것으로 알려진 다카하시 에리코(53)를 수색 중이었는데 다카하시 외에 다른 둘의 주검도 발견하게 됐다고 저팬 투데이와 NHK 방송이 전했다. 세 사람은 모두 각자 다른 길로 후지 산 정상에 이르렀던 것으로 보인다. 두 주검은 운명을 다한 지 무려 한 달가량 지난 것으로 보도됐다.
다카하시는 지난 21일 저녁 정상을 향해 출발, 다음날 정상 근처에서 촬영한 사진들을 가족에게 전송했다고 미국 일간 뉴욕 타임스(NYT)가 전했다.
당국은 현재 피해자들의 신원과 함께 이들이 어떻게 목숨을 잃게 됐는지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번 참사는 후지 산 등반 시즌이 시작하기도 전에 벌어져 안타까움을 더한다. 야마나시현은 내달 1일, 시즈오카현은 다음 달 10일부터 두 달가량만 후지산 등산을 허용한다. 경찰은 입산 시기 외엔 산행 자제를 요청하지만 등산에 나서는 사람이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야마나시현은 입산 시기에 등산객이 몰리는 것을 막기 위해 올해 예약 시스템을 도입했다. 하루 4000명만 후지산 등산 인원을 제한한다. 등산객을 대상으로 기존에 받던 '보전 협력금' 1000엔(약 8700원) 외에 통행료 2000엔(1만 7400원)을 걷기로 했다. 야마나시현 홈페이지에 접속해 등산 인원수와 날짜, 쉼터 예약상황 등을 기록하는 것은 물론, 동영상 시청도 사실상 의무화했다.
후지산은 일년의 거의 대부분을 눈에 덮여 있어 7월부터 9월까지가 등반하기에 가장 좋은 때로 알려져 있다. 많은 이들은 밤에 출발해 다음날 아침 장엄한 일출을 눈과 카메라에 담으려 한다.
AP에 따르면 매년 이곳을 찾는 이들은 30만명에 이른다. 일년 중 어느 때라도 기온이 극적으로 떨어져 만반의 준비를 갖추지 않으면 저체온증 등으로 목숨을 잃을 수 있어 철저한 준비를 요한다. 엔저 현상에 힘입어 여느 때보다 올 여름 후지산을 찾는 국내 등산 애호가들이 많을 것으로 보여 각별히 유의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