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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문과 제2기 30년 발자취를 담은 영상물을 제작하여 지난 토요일(11월 19일) 홈커밍데이에서
성황리에 상영하였습니다. 영상물은 용량이 2.2G에 달하여 쉽게 올릴 수가 없습니다.
우선 영상물 대본 축약본을 올려서 모든 동문들과 우리 학과 초창기 상황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조금 긴 편이지만, 이 대본을 끝까지 읽어보시면 중문과 제2기 80학번의 발자취를 짐작해볼 수 있을 겁니다.
행사 후기는 나중에 따로 올려드리겠습니다. ---김영문 ***
경북대 중어중문학과 제2기(‘80학번) 30년 발자취 대본
운명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팔공산 자락에 팔공 학번으로 입학했으니 말입니다.
팔공산 자락 경대에 다시 팔공 학번이 입학하기 위해선 2080년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2180년 2280년이 되어야 합니다. 100년마다 한 번씩 있는 운명의 이벤트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운명의 선택처럼 팔공년에 팔공산 자락 경대에 입학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예비고사 마지막 세대로,
또 본고사 마지막 세대로, 우리나라 교육 역사의 중요한 한 마디를
몸으로 체험하고 영혼으로 겪어내며,
우리 기쁜 젊은 날, 우리 슬픈 젊은 날을 함께 할
복현 동산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현인이 숨어서 도(道)를 닦는다는 복현(伏賢) 언덕으로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당시 현실은 우리의 꿈을 험난한 가시밭길로 이끌었습니다.
1979년 10월 26일 독재자 박정희가 그의 심복 김재규에게 살해되고,
마침내 80년 민주의 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기득권을 지키려는 독재의 잔재들은 총칼로
민주 발전의 앞날을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복현동에서, 동성로에서, 중앙로에서 매운 최루탄에 눈물 흘리며,
목숨을 건 투쟁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러나 신군부의 수뇌로 떠오른 희대의 독재자 전두환은
1980년 5월 18일,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내리고
모든 대학에 휴교령을 발령하였습니다.
꿈 많은 우리의 풋내기 대학생활은 그렇게 처참하게 박탈당했습니다.
모든 대학에는 중무장을 한 장갑차가 진주하였고,
중간고사 준비를 위해 교문으로 들어서던 대학생을 향해
살벌한 총구를 겨누던 그 80년의 봄을 잊지 못합니다.
같은 시기 광주에서는 우리와 똑 같은 나이의 친구들이
독재자의 총칼 아래 무참히 죽어갔습니다.
현재까지 조사된 바에 의하면,
600여명의 광주의 젊은이들이 독재자의 총칼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우리의 친구들은 폭도로 비하되었고,
살아남은 우리들은 가슴 깊이 죄책감과 울분을 안고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캠퍼스를 뺏긴 우리는 향촌동, 반월당, 대백뒷골목 골방을 전전하며,
우그러진 막걸리 주전자와 술잔으로 울분을 달래며,
수많은 불면의 밤을 지샜습니다. 저 얼룩무늬 교련복을 입고...
1학기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는 전부 레포트로 대체되었고,
우리는 군인들의 총칼이 감시하는 가운데
교문에 설치되어 있는 레포트 회수 박스에,
배운 적도 없는 내용의 레포트를 쓰레기처럼 던져 넣었습니다.
1980년 9월에 가서야 휴교령은 해제되었고,
우리는 배우지도 않은 과목의 성적표를 받았습니다.
수많은 동학들이 쌍권총 학사경고 성적표를 받았습니다.
이 성적표는 지금 이 자리에 계신 어떤 동학의 1학년 학사경고 성적표입니다.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점, 널리 양해바랍니다. 와중에 한문 점수가 제일 좋군요. ^^
이 암흑의 현실에속에서 우리는 학교로는 등교하지도 못하고,
도시락을 싸들고 시내 당구장으로 등교하기도 하였고,
일종의 현실도피의 심정으로 포커 판을 전전하기도 하였습니다.
적지 않은 판돈이 오고가는 가운데 서양 그림 카드에
맹목적으로 자신의 두뇌를 마비시키기도 하였습니다.
포커판에서 꿈꾼 로열 이스탐불처럼
우리의 꿈은 어쩌면 아득한 신기루 같았습니다.
그렇게 악몽같은 1학년 어문계열 생활이 끝나고
우리는 1981년에 인문대학 중어중문학과 2학년으로 진입하였습니다.
80학번 어문계열 1학년 대표가 모두 중문과로 들어왔고,
당시 새로운 학문에 목말라 하던 기라성 같은 인재들이 중문과로 들어왔습니다.
어쨌든 우리는 새로 시간표를 짜야 했고,
우리는 주로 인문대학 215호실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음, 김광조 선생님 성함도 보이네요.
요즘은 대학원생이나 공부하는 「당송팔대가문선」, 「고금문선」, 「시경석의」 등의 고문과
「현대중국어문」, 「아Q정전」 등의 현대문,
「간명중국문학사」와 같은 이론 과목을 배웠습니다.
내용을 보면 더욱 입이 벌어집니다.
한유(韓愈)의 「원도(原道)」...
붓을 의인화한 소설 한유의 「모영전(毛穎傳)」...
번체자로 되어 있는 현대중국어 교재...
誰是老師(Shéi shì lǎoshī)? ‘누가 선생님인가’
제목이 의미심장하네요...
이태백과 두보도 배우고...
그 유명한 노신(魯迅)의 「아Q정전」도 한 학기만에 원문으로 다 읽었고...
시경의 「관관저구, 재하지주」도 원문으로 읽었습니다.
그렇게 알동말동 전공 공부를 했습니다.
와중에 79학번 선배님들이 주최한 제1회 중문과의 밤에도 참여하였습니다.
합창단에 김경조, 편성현, 간병룡, 김창묵, 김영문, 황수일의 얼굴이 보이네요...
여학생들은 오순섭(현수), 권석희, 김춘화, 주말순, 김희춘, 이재현, 이점순 다 있습니다.
근데 황수일형과 편성현 동학이 합창단이라니, 믿기지 않네요...^^
체육대회에도 부지런히 참가하여 매우 훌륭한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인문대학 체육대회에서는 거의 우승과 준우승을 차지하였죠.
저 유명한 자주색 체육복과 고색창연한 교련복을 보십시오.
요즘 대학생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정장입니다.
그리고 사복경찰들이 교내에 상주하고 있는 엄혹한 상황에서도
독재의 총칼과 싸우기 위해,
지하서클에 참여하기도 하고, 적극적으로 민주화 시위에 동참하기도 했습니다.
희미하게 인쇄된 민중가요 악보를 들고 남몰래 숨죽여
「아침이슬」, 「상록수」, 「금관의 예수」, 「사노라면」, 「강변에서」, 「못생긴 얼굴」,
「맹인부부가수」, 「불나비」 등등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단골 사회과학 서점에 부탁하면, 당시 금서였던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 조태일의 「국토」, 양성우의 「북치는 앉은뱅이」 등의 시집을
책상 밑으로 몰래 전해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 때 그 쾌감이란...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학문은
다양한 서적을 탐독하며 우리의 인식을 심화하였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독재와의 싸움은 끝없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렇게 서투르지만 뜨거운 1981년도 끝나고
우리는 이제 중문과를 떠맡아 살림을 살아야 할 3학년이 되었습니다.
전공 공부를 위해 중문과 최초로 중국어회화 스터디 그룹을 창설하였습니다.
회화 선생님은 김경조 동학이었고,
권석희, 김춘화, 정화수, 서홍제,
송승영, 김영문, 박해태, 권오상 동학이 그 멤버였습니다.
서홍제, 권오상 동학이 중국어회화 스터디 그룹 멤버였다니 놀라울 뿐입니다. ^^
젊음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또 슬픕니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사랑과 실연 사이에서
우리의 젊은 날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저 일청담에서 얼마나 많은 술을 마셨을까요?
아, 「일청담 목욕사건」에 대해서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 주범이 황수일, 김영문, 김경조, 박원현 등등,
나중에 자세히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그 똥물에 어떻게 몸을 담궜을까?
꽃시계의 전설을 아십니까?
당시에도 마찬가지지만,
지금도 꽃시계는 땅 속에서 어떤 사람이 직접 돌린다는 전설이... 믿거나 말거나...”
그 불합리한 세월이 속절없이 흘러간다고,
박모 동학께서 꽃시계의 초침을 시침에다 둘둘 감아 놓아
한 동안 경대 꽃시계가 작동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뜨거운 가슴으로 치기와 객기를 부리며,
우리 슬픈 젊은 날을 보냈습니다.
후배들과도 다정한 한 때를 보내고...
선배들과도 정답게 어울렸습니다.
오순섭(현수) 동학은 한 장의 사진 뒤편에 이렇게 써놓았습니다.
‘1981. 10. 23
---첫눈이 오기 전---
인사대 체육대회
조팽규, 김영철 선배 그리고
석희와 나 !’
근데 왜 조평규 선배가 조팽규가 되고, 김영근 선배가 김영철이 된 거죠?
오현수 동학! 젊은 나이에 어찌된 일이죠?”
류원하 동학은 잘생긴 외모로 늘 여학생 후배들을 달고 다녔어요.
항상 좌우에 1명씩...
젊으신 정인숙 선생님께서도 엄청난 인기를 누리셨죠...
빼어난 미모로 복현 언덕을 환하게 밝히던 우리 여성 동학들...
설레는 봄날을 그냥 보낼 수가 없었죠...
지금의 걸그룹보다도 아름다운 외모인 듯...
아, 빨간 홍매보다 풋풋하고 이뻐요... 아 옛날이여~~
김희춘, 이재현, 오순섭(현수), 김춘화, 이점순(영주)
벚꽃보다 아름다워요...
2학년, 3학년을 거치면서 남학생들은 군대에 입대하기 시작했고,
아쉬운 밤, 흐뭇한 밤, 뽀얀 담배 연기....
그렇게 하나둘 씩 우리 곁을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교정에 남은 우리 학군 장교 후보생들
박원현, 현정욱, 류준걸, 편성현 동학은 굳건히 복현 언덕을 지켜주었습니다.
황수일, 정원규, 김교식 등 복학생 형님들도 우리의 든든한 물주가 되어주었죠.
먼저 군대에 간 동학들은 3년 뒤 다시 복학하여,
꽃같은 복학생이란 이름을 휘날리며, 다시 찬란한 대학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끝까지 자리를 지킨 동학들은 그 아련한 젊음에 부대끼며,
유천으로 금오산으로 MT를 다녔습니다.
세 사람이 앉는 당시 완행열차... 지금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수줍음과 어색함과 사랑과 우정과 젊음과 낭만의 자리...
오늘 그대 오시려나... 저 바다 건너서...
지금도 그 노랫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옵니다.
현정욱 동학이 들고 있는 카세트,
당시 MT에서 반드시 준비해야 할 1호 품목이었습니다.
그 카세트로 고고, 디스코 음악을 들으며, 우리의 젊음을 마구 비벼댔습니다.
그리고 졸업여행, 3박 4일 전국일주 여행이었습니다.
먼저 퇴계 선생의 유적지인 도산서원...
너무나 그립고 아련하고 풋풋한 시절... 그때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도담삼봉과 단양 고수동굴을 거쳐 오대산에 도착했습니다.
그날 저녁 세계선수권 야구대회에서 한 대화 선수가 일본을 상대로
역전 쓰리런 홈런을 쳤고, 김모 동학은 과음으로 인사불성이 되었습니다.
오대산 새벽 안개가 싱그럽네요...
오대산 월정사를 거쳐... 강릉 경포대에 도착했습니다.
경포대 바닷가... 김교식형, 권오상, 신영선,
이 세 사람은 모였다 하면 대구고 동문회 합니다....
그날 평소 원한으로 황수일 형을 동해바다에 수장시켰습니다.
근데 어떻게 살아왔지...칰
지금은 불탄 낙산사 입구입니다.
해수관음보살께서 나타나실란가? 모두 바다를 뚫어지게 바라봅니다.
권오상 동학의 엉덩이가 아주 매력적이네요...^^
그리고 이어서 설악산 울산바위에 올랐습니다.
어, 수일 형, 언제 살아왔는교?
울산바위 유래를 설명하는 아주머니의 설명에
너무나 초롱초롱하게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홍진 선생님 표정 보십시오,
‘자식들, 수업시간에도 좀 집중혀봐...’
이어서 남설악 오색약수를 마셨습니다.
수일 왈 : “영선아 약수 맛이 워떴노?”
영선 왈 : “아이고 형, 떫떠부리 합니다. 마시지 마이소...”
내설악으로 넘어가는 한계령정상...
아, 한계령... 장수들 칼 씻은 물을 거쳐...
당시 동양 최대의 인공호수로 대대적인 선전을 해대던
소양호에서 뱃놀이를 했습니다.
뱃놀이 내내,
‘해저문 소양강에 황혼이 지면...’
소양강 처녀 가사가 맴돌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서울을 거쳐 호암박물관
서서히 졸업여행은 마지막 일정으로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졸업여행 마지막 일정, 막걸리 내기 묵찌빠, 이런 권오상 혼자 윈이네...
이어서 82년도 가을,
중문과의 가장 큰 행사인 제2회 중문과의 밤도 성황리에 개최하였습니다.
황수일 형 확회장 인사... ‘내 잘 생깄나?’
중국어 연극 「好儿子」
주인공: 김영문, 어머니: 권석희, 주인공 동생(아샹): 오순섭(현수),
주인공 부인: 전향희(81학번), 주인공 친구: 심성호(81학번), 동네 아저씨: 송승영,
경찰: 장경섭, 하녀: 이인선(81학번) 연출: 김경조, 지도교수: 정인숙.
중문과 최초의 학회지 「태산」지도 제2기의 손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교수님들은 2기가 너무 일을 많이 벌린다고 걱정이 많았습니다.
이 「태산」지도 예산이 없어서
해를 넘겨 83년도 제3기 예산으로 발행할 정도였으니까요”
지금은 모두 컴퓨터로 쉽게 편집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인쇄비용을 아끼기 위해 모두 손으로 써서 책을 만들었습니다.
「태산」 창간호는 오순섭(현수) 동학이 편집장을 맡았고,
후배인 심성호, 강효금, 이경언, 김희태 동학이 편집위원으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리고 김영문, 이왕식, 박성호, 정점숙 동학이 직접 필사하여 완성하였습니다.
전부 177쪽에 달하는 방대한 양입니다.
그렇게 다사다난했던 3학년 세월은 끝이 났습니다.
이제 취직과 대학원 공부에 매진하기 위해 도서관에 자리를 잡아야 했습니다.
불안하고 불확실한 미래가 더욱 절실하게 다가서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도서관에 머리를 파묻고 있는 동안에도,
도서관밖에는 화려한 봄이 와, 벚꽃이 흐드러졌고,
저 화사한 버찌로에는 쌍쌍의 캠퍼스 커플들이 사랑을 속삭이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도서관에서 책을 붙들고 있는 동안
우리 학교 곳곳의 벚꽃은 유난히 화사하고 아름다웠습니다.
그리고 무심하게도 시계탑에는 다시 신록이 우거졌고,
일청담에도 여름 녹음이 짙어졌으며...
우리의 사랑과 낭만이 깃든 지도못에도 연꽃이 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러브로드에 가을이 왔습니다.
러브로드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데이트를 하다가, 아는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랑은 반드시 깨어진다는 전설도 있었죠...
교양과정부 앞 만오원(晩梧園)에도 단풍이 붉게 물들고,
야외박물관인 월파원(月坡園)에 낙엽이 휘날릴 무렵...
우리는 이제 젊음과 열정과 사랑과 낭만,
우리의 가장 화려한 시대를 장식한 정든 복현 동산을 떠날 준비를 해야 했습니다.
다들 어색한 정장을 차려입고, 그렇게 이별 연습을 해야 했습니다.
마지막 남은 대학의 청춘을 한 장의 사진 속에 남겨야 했습니다.
허허, 졸업사진을 찍는데도 같은 곳을 바라보는 동학들이 하나도 없네요...
중문과 제2회의 특징이죠... 나는 나의 길을 간다(我走我的路)...
그렇게 정든 친구들, 정든 선생님들과 캠퍼스에서의 마지막 사진을 찍었습니다.
나이는 먹기 싫어도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졸업은 하기 싫어도, 떼밀려서 할 수밖에 없습니다.
1984년 2월 우리는 아쉬운 기념사진 한 장 남기고,
다시는 되돌아오지 못하는 청춘을,
복현골 구석구석에 남겨두고, 험난한 세상 속으로 떠나갔습니다.
저렇듯 천진하게 풍선을 든 앳띤 후배들을 남겨두고,
반겨주지 않는 세파 속으로 휩쓸려 들어갔습니다.
몸은 경향 각지로 흩어졌어도 우리의 가장 소중한 시절을 함께 했다는 기억은
쉽게 흩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시절의 추억을 따라,
우리는 서로의 자리를 확인하며 작은 모임들을 갖기 시작하였습니다.
1985년 서울 거주 경대 중문과 동문 11명의 명단입니다.
문영주 형의 소재는 지금도 불명이네요... 어느 하늘 아래에 계신지...
졸업 직후인 85-86년부터 동창회 결성 움직임이 있었고,
79, 80학번이 주축이 되어 1987년 경대 중문과 동창회가 결성되었습니다.
그리고 1987년 7월 31일 「동창회보」 창간호가 발간되었습니다.
1988년 9월 15일에 발간된 「동창회보」 제3호에 벌써 동문찾기 운동이 벌어졌으니...
우리 경대 중문과의 동문 사랑은 참으로 유별난 데가 있습니다.
이후 매년 개최되는 경대 중문과 동문 가족체전에는 제2기 동문들이
특히 많이 참석하였습니다.
제2기 동문들은 늘 솔선수범하여 후배들을 이끌어왔습니다.
이제는 어릴 때처럼 몸이 말을 듣지 않아서, 응원부대로 전락했더라도
열심히 자리를 꿰차고 앉아, 술이라도 마셔줍니다.
남윤호, 어릴 때 무리하여 거의 죽도록 아팠습니다.
그런데도 의연히 술을 마시며 자리를 빛내줍니다.
그러나 반드시 술을 줄여야 합니다.
80 동기회의 영원한 총무... 서홍제,
조만간 회장님으로 승신시켜줘야 합니다.
아, 홍제는 우리 여학생 후배들에겐 영원한 젊은 오빠입니다.
야, 홍제야, 니 80학번 맞나?
류원하, 역시 후배 여학생들의 로망입니다. 너무 잘 생겼죠?
노래도 가수 뺨치는 수준입니다.
한때 밤 업소의 가수로 활동했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근데 족구 하는 건 첨 봅니다. 운동은 젬병인데 사진 잘 찍었네요
기성용처럼 보입니다.”
김덕환, 80학번 만능 스포츠 맨입니다.
수업은 안들어와도 체육대회에는 꼭 참석했습니다.
졸업후 동문 체육대회에도 한 번도 빠짐없이 개근했습니다.
공로패 수여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들(김민상)이 세계적인 성악 가수입니다. 상상이 가십니까?”
강내우, 역시 체육대회 개근상을 줘야 합니다.
한때 동창회장을 역임했습니다.
근데 동창회는 다 말아먹고, 86후배와 연애질 끝에
지금 가정을 꾸려 잘 살고 있습니다.
동창회는 뒷전이었고 연애사업에 엄청난 공을 들였던 것입니다.”
썬그라스 벗으면 주름이 꽤 많습니다. 그러나 한때 80학번의 스타였습니다.”
강내우 과 커플 가족은 동창회 발전에 기여한 공로가 혁혁합니다.”
2010년 중문과 총동창회 송년모임엔 20여년 만에
전설의 제2기 학회장 황수일 형이 왕림하셨습니다.
기존 상근 멤버 외에 도사같은 풍모로 변한 허진국 동학도 자리를 했네요.”
대구에서 꾸준히 제2기 동기회를 유지해왔습니다.
점점 몸은 늙어가지만, 우리의 우정은 변함이 없습니다.
작년에 수일 형이 가세하여 더욱 힘이 실리게 되었습니다.
김덕환, 허진국 초등학교 동기로, 대학 동기이니 끈질긴 인연입니다.
남윤호 사장의 은행나무에서 제2기 동기들이 늘 정다운 술판을 벌입니다.
포항의 경제계 대표인 최병호 사장님은 이 술자리의 단골 멤버입니다.
어, 내우 너무 자주 나오네... 역시 정다운 동기입니다.
황수일 형, 허진국, 서로 웬수 비슷한 사이인데, 친한 척 하네요... ^^
남해에서도 작은 모임을 가졌습니다.
제일 앞에 선 분이 정원규 형입니다.
오랜 중국 파견 근무를 끝내고 최근 귀국하여
남해대학 행정처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웬만한 스님보다도 도력이 높은 진정한 수행인입니다.
불교서적 번역으로도 명성이 자자합니다.
김경조 동학은 유창한 중국어 실력을 바탕으로 한중 무역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남해 용문사에서 김영문, 김경조, 황수일,
연륜은 속일 수 없어서 적당히 머리도 벗어지고, 적당히 배도 나왔습니다.”
한국외대 부속외고 중국어과에 재직 중인 박규용 박사,
이번 모임에 참석은 못하지만 사진으로 인사를 대신하겠다고 합니다.
김영문 박사, 5년이 넘는 기간 동안
소명문선(昭明文選) 번역 작업의 핵심 멤버로 활동하며,
올해 초에 문선역주(文選譯註) 한글 번역본 전10권을 출간하였습니다.
사진은 문선역주 출간기념회 번역자대표 발언입니다.”
류준걸, 농민신문사 국장으로 서울에 거주합니다. 곱게 늙어가고 있네요.
황수일 형, 중장비 사업을 하면서 상당히 오랫동안 기공 수련을 해왔습니다.
지금은 육임신문(六壬神門)의 고수로 호를 성곡(惺谷)으로 쓰며,
청정한 수행자로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에필로그***
사진을 보내온 동학들의 상황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엮다보니,
더 많은 동학들의 이야기가 소홀하게 취급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 동학들의 삶도 아름답고 소중합니다.
이제 경대 중문과 진입 30년을 맞아
이렇게 한 자리에 모이고 보니, 너무나 많은 것이 달라졌습니다.
20대 홍안의 얼굴은 50대 중년으로 잔주름이 늘었고,
검은 철사 같던 머리칼은 조금씩 빠지고 희어져,
초로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이점순 동학은 이영주로, 오순섭 동학은 오현수로 이름까지 바뀌었습니다.
심지어 우리의 친구 권상태 동학은
이제는 돌아오지 못할 저 먼 곳으로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마도 오늘 같이 기쁜 날 상태의 영혼도 우리와 함께 하리라 믿습니다.
지나간 30년 동안 격변의 세월에 시달리며,
그래도 우리는 초심을 잃지 않고 용케 여기까지 버텨왔습니다.
고초의 세월은 우리를 단련시키는 용광로일 뿐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세월을 견디며 한 해 한 해 더해 가는 연륜 위에 깊은 지혜를 쌓고 있습니다.
이제 앞으로의 30년 아니 60년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지 말고,
서로서로 다정한 눈길을 주고 받으며,
한 그루 한 그루의 나무가 서로 기대어 광활한 숲을 이루는 것처럼
우리 그렇게 살아갑시다.
중문과 2기 동기 여러분.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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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영상물 제작에 애써주신 권기태(93) 동학, 너무너무 고마워요^^
당시 홍진 샘 나이가 지금 우리보다두 훨씬 젊으셨쥬?
그랬었지...
선배님들의 역사가 오롯이 남겨있네요~~뜻깊은 만남과 추억을 회상하는 좋은 자리였네요...
거의 25년만에 만난 친구도 있었는데, 참으로 즐거운 자리였다네...
첫 사진에 박홍영 선배 얼굴도 보이는 거 같은디유?
맞아, 지금 충북대학교 정외과 교수로 있지...
선배님들! 너무 멋 있으십니다.
즐감하고 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