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민안전 배상보험" 알고 계셨나요? 🚨
길가다 다치면 지자체(구청)에서 보험금이 지급됩니다.
우리나라 사람 누구나 가입되어 있어서
청구만 하면 되는 최고 2천만원짜리 공짜보험..
우리나라 국민 모두가 자동으로 가입되어 있는
정부 보험이 있다는 것, 알고 계셨나요?
지자체에서 자동으로 가입 시켰기 때문에,
우리는 일이 터지면 청구만 하면 되는 보험인데요.
아직도 이 보험을 모르고 계신 분들이 있어서
다시 정리했습니다.
어느 특정 지역이 아니라 전국 모두 해당됩니다.
최대 보장범위가 2천만원이나 되지만
우리가 내는 비용은 하나도 없이 정부가 보장해주는
보험입니다.
엄청나게 유용한 내용이니 꼭 알아두시고
주변에도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시민 안전보험은 지자체에서 직접 보험사 혹은
공제 회와 계약하여 지역민이 피해를 입었을 경우
이에 대해 보상을 해주는 보험 제도 입니다.
즉, 지역민이라면 누구나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죠.
개인적으로 신청해서 가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지역에 거주하는 모든 주민들은 자동으로
가입되는 보험인데 문제는 제대로 홍보가 되지않아
대부분이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시민 안전 보험의 보장 범위 및 몇가지 사례를
살펴보겠습니다. (ex : 서울시)
1. 작년 1월 수업을 마치고 하교 하던 초등학생 A군은
학교 앞 스쿨존에서 차량과 충돌해 골절 수술
(보험금 1,000만원 지급)
2. 버스에서 내리다 넘어져 버스와 충돌한 C씨
(보험금 600만원 지급)
3. 지하철 환승통로 경사로에서 넘어져 다친 D씨
(150만원 지급)
4. 작년 7월 용인시 물류창고 화재로 숨진 B씨
(1,000만원 지급)
특히, 요즘같은 겨울철 빈번한 낙상사고와
화재같은 경우가 그런데요.
보장 범위와 보험금은 지자체마다 차이가 있지만,
상해, 교통사고, 강도, 화재 등 거의 일상에서
벌어질 수 있는 대부분의 사고에 대해 보험금을 지급
받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반드시 신청을 해야만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일상에서 이래저래 다쳐보신 분들이 허다할텐데,
지역에서 보험금 받았다는 이야기를 거의
못 들어본 이유는 대부분이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험금 지급 신청은 각 지자체에 요청하시면 됩니다.
지금 이순간에도 몰라서 한 푼도 못 받고 계시는
분들이 많이 있을 겁니다.
앞에 밝혔지만 지역민이면 어떠한 조건 없이 무조건
다 받을 수 있는 보험이기 때문에 반드시 알고 계시고,
지인분들께도 꼭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최고 2000만원까지 받을 수 있는 보험이라니!!!
더구나 내가 보험에 가입하지도 않았는데...
많이 많이 알려져서 필요한 사람들이
혜택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알고 먹자! 10가지 잡곡의
효능 ~~~
○ 팥
팥은 달고 독이 없으며, 성질이 따뜻합니다. 성분은 섬유질, 단백질, 지방, 당질, 회분, 비타민B1이 다량 함유되어 각기병등의 치료약으로도 널리쓰이며, 당뇨병에는 팥과 호박, 다시마를 삶아 먹으면 좋으며, 삶아 먹으면 신장염을 낫게하고, 팥꽃의 즙을 내어 바르면 주근깨를 퇴치합니다. 고혈압 치료도 되며, 설사를 멈추는 효능이 있습니다.
○ 강낭콩
식물성섬유질과 아미노산, 단백질, 사포닌의 성분들이 있어, 활성산소를 몰아주며 변비해소, 간건강, 면역력강화, 이뇨작용, 당뇨병개선, 여성갱년기완화, 항암효과가 있습니다.
○ 찰현미
현미에는 비타민E, D, F가 풍부하여 피부를 좋게 하며, 뼈건강에도 좋습니다. 현미에 함유되어 있는 섬유소는 혈중콜레스테롤의 수치를 낮춰주며, 음식내의 콜레스테롤이 장으로부터 혈액으로 흡수되는 것을 막아줍니다. 또, 현미에 있는 섬유소는 당분의 흡수를 늦춰주어 인슐린을 분비하는 췌장의 부담을 덜어주므로 당뇨환자들에게도 좋으며, 현미가 대변량을 증가시켜 대변이 장내를 통과하는 시간을 단축시켜주고 대장암을 예방합니다.
○ 찰수수
소화를 도우며, 몸을 따뜻히 해주고 냉한체질에 좋습니다. 위장을 보호해주며 소화장애를 도와줍니다. 설사를 멈추게하고, 신진대사를 도우며, 철, 무기질, 인의 성분이 풍부하여 단백질생성을 돕습니다. 페놀성분이 있어 항암효과도 뛰어납니다. 면역기능향상과 항진작용을 하며, 청혈제역할과 빈혈치료에도 쓰입니다.
○ 보리
비타민B1, B2, 섬유질, 베타클루칸이 풍부하여, 각기병예방에 좋으며, 변비, 포만감을 통한 다이어트효과, 혈당저하로 인한 당뇨병개선, 대장암예방,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춰주는 베타클루칸의 효능으로 성인병 예방에 좋습니다.
○ 서리태
안토시아닌, 이소플라본이 풍부합니다. 피부를 매끄럽게 하는 효능 및 갱년기장애를 앓는 여성에게 좋으며, 노화방지, 두뇌발달, 치매예방, 검은콩에 함유된 풍부한 레시틴은 혈관벽, 세포에 쌓인 콜레스테롤과 노폐물을 녹여냄으로써 혈액순환 개선에 기여합니다. 체내독소제거에도 탁월하며, 탈모예방에도 효과가 있습니다.
○ 조
소화기계통의 과잉된 열을 없애주고, 소변이 잦고 붉을 때, 눈 충혈, 코피가 자주나는 사람들에게 좋으며, 신장에 이로움을 주고, 습열제거, 발육촉진, 산후회복 등에 좋습니다.
○ 녹두
비타민B1, B2, B6, 판토텐산, 니아신 등이 많이 함유되어 있습니다. 항산화 기능을 가진 플라보노이드 함량도 높으므로 간의 해독과정에서 발생하는 활성산소를 잡아줍니다. 본초강목에도 녹두에 대해 해독작용이 강하며, 위와 장을 튼튼하게 하고, 오래도록 섭취해도 부작용이 없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껍질에 광택이 없고, 거칠고, 진녹색을 띈 작은 크기의 녹두가 좋습니다.
○ 찰기장
지방질, 비타민A, 당분, 단백질 등이 풍부합니다. 예전에는 떡을 만들때나 쓰였지만, 웰빙식을 우선으로 하는 요즘엔 밥에 섞어서 섭취합니다. 장을 튼튼하게 하며, 신장병개선, 풍열억제, 혈류개선을 통하여 해독작용을 한다고 합니다.
○ 흑미
흑미를 꾸준히 섭취하게되면 면역기능 향상 및 질병예방에 효능이 있습니다. 셀레늄이 다량함유 되어 있어, 암의 예방에 효과적이며, 임산부들의 빈혈에도 좋습니다. 당뇨와 고혈압 같은 성인병에도 좋습니다.
[건강백세] 내용중에
#한국사
#고려사
역사 속 숨은 인물도 흐른다.
ㅡ무장 출신 아닌 늙은 장군 강감찬 6 마지막 편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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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올린 글에서처럼 고려는 거란2차 침략 후, 고려는 8년 동안 거란 재침략에 대비하여 철저히 대비 했습니다. 그리고 거란3차 침략을 잘 막아내고 '귀주대첩'에서 대승리까지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거란의 고려침략과 조선 정묘호란(1627),
병자호란(1636)을 비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조선 정묘, 병자호란은 거란 고려 전쟁 600년 후 벌어진 전쟁입니다. 당시 조선 왕 인조와 서인정권이 보인 행태는 정말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이번 시리즈 내내 내가 올린 글에서 강조하고 있지만 당시 인조와 서인정권은 역사를 너무 몰랐습니다.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당시 후금인 여진도 거란1차침략 때처럼 먼저 정묘호란을 일으켜 압도적 전력으로 고려를 압박하며 경고합니다. 하지만 조선에는 고려 서희같은 외교관은 없었습니다
단지 후금은 명과 싸우는 것이 더 급해서 조선이 명과 협조하지 않겠다는 확약과 함께 조선과는 형제지맹을 맺고 후금이 형이 되었다는 자긍심만으로 물러 서 줍니다.
후금도 당시 명나라를 치기위해서 후방인 조선을 눌러 놓을 필요가 있었기에 정묘호란을 먼저 일으킨 것입니다.
이처럼 정묘호란은 조선에 겁만 주려는 것이 목적이었지 전면적인 침략은 아니었습니다.
거란1차침략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송과 명을 앞에 놔두고 고려나 조선을 전면적으로 침략하는 것은 큰 부담입니다.
앞 편에서 썼듯이 인조반정이후 서인 인조정권이 이러한 점을 잘 살펴 광해처럼 중립외교를 더 충실히 해 나가야 했었습니다.
그러나 인조나 서인정권이 인조반정 첫번째 명분으로 '친명배금정책'을 표방해놔서 어쩔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래서 인조반정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악 쿠테타임)
그래도 정권을 잡고 현실을 보며 정신을 차렸어야 합니다. 하지만 서인정권은 같은 반정공신이자 북방을 지키는 병마절도사 이괄을 기찰정치로 훈련까지 감시하며 역모로 몰아 반란을 일으키게 합니다. 반란군에 한양까지 점령 당합니다. 인조는 한양을 버리고 도망까지 갑니다.
이괄 난으로 많은 조선 장수와 병사들이 죽습니다.
당시 후금은 거란과 몽골 침략 역사를 되새기며 조선 침략을 연구하고 있을 때 조선은
내전으로 정묘 병자호란 때 막아낼 장수나 병사를 잃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후 '후금'에서 '청'으로 황제국을 칭한 여진은 정묘호란 이후 9년 만에 조선을 다시 침략해 옵니다.
조선은 9년 동안 거란2차침략 후 고려와 달리 거의 준비도 안 합니다. 거란3차침략 때처럼 전면적으로 싸울 생각보다는 몽골 때 고려무신정권이 행한 것처럼 강화도로 도망 가 가족들 안전과 자기들 보신만을 생각합니다
병자호란 당시 '청'은 달랐습니다.
제대로 역사를 배우고 왔습니다
청군은 거란2차침략에서는 실패한 전격전에 가속도까지 붙여 놀라운 속도로 진격해 한양을 점령합니다.
얼마나 빨랐으면 조선 왕 인조가 강화도로 도망도 못 가고 준비도 안된 남한산성으로 피합니다.
당시 청 군사는 4만5천명에 불과 했습니다. 거란의 침략때와 비교하면 아주 적은 숫자입니다.
기록을 보면 청군은 하루 평균 78km를 진군한 것으로 나옵니다. 이로부터 약 300여년 뒤 제2차 세계대전 때 전격전으로 유명한 독일군 에르빈 롬멜 기갑사단이 하루에 70km를 못 넘은 걸 생각하면 청나라가 얼마나 신속하게 남하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청은 거란이 왕을 놓쳐 실패했다는 것을 잘 알고 왕이 도망치기 전에 잡기위해 이런 속도를 낸 것입니다.
또한 청은 몽골 침략때 실패한 강화도 점령을 위해 수군을 양성하여 한양 점령 후 얼마 안 되어 강화도를 점령해 버립니다. 거기에 피해있던 왕자와 왕비등을 포로로 잡습니다.
믿었던 강화도마저 점령당하고, 남한산성 식량도 다 떨어지고, 청이 가져온 새로운 대포로 남한산성 안까지 폭탄이 날아들자 인조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남한산성에 들어간지 두 달이 안 되어 항복합니다. 그리고 청황제 발 아래에서 치욕적인 삼전도 굴욕으로 알려진 항복의식을 거행합니다.
이처럼 침략자인 당시 후금에서 '청'이라 칭한 여진은 거란과 몽골 고려침략을 철저히 공부하며 대비했습니다. 침략자가 더 지난 비슷한 역사 공부를 많이한 세계사 유례없는 어처구니없는 경우였습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는 없다>
윗 말은 신채효선생이 했다고 전해지지만 확실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중요한 말입니다. 병자호란당시 인조와 서인정권이 제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해야할 이유입니다.
특히 정치지도자들이 문제입니다
이제 귀주대첩으로 본격적으로 들어 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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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거란 2차 전쟁을 직접겪은 거란장수 소배압은 진격도중 작은 전투에서 패배나 피해에 굴하지 않고 중간 주요 성들을 처다보지도 않고 그냥 개경으로 달린다. 2차 침략때 실패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 였다. 보급로건 뭐건 필요한 식량은 현지 조달한다는 생각으로, 퇴각로 걱정은 뒤로하고, 오직 수도 개경과 현종만을 목적으로 내달렸다.
그러나 고려는 더 준비를 잘하고 있었다. 강감찬과 현종의 현명한 대처로 개경 진입이 불가능해지자 거란군은 절대절명 위기에 빠지게 된다. 개경을 목표로 직도작전을 펼치는 바람에 후방의 퇴각길이 위험하였다. 현종의 개경주변 청야전술로 보급까지 불가능해 지자 고립될 위험을 느끼고 거란장수 소배압은 결국 퇴각을 결정하게 된다(1019년 1월)
1019년 1월 23일, 퇴각하는 중에 거란군이 청천강을 건너며 남쪽의 연주(평안남도 개천군), 북쪽의 위주(평안남도 영변군) 등에서 강민첨 대장군 기병대에 유격당하여 500여급이 죽었다.
이처럼 해안길 방면을 강민첨이 틀어막았기에 소배압은 내륙길을 택했다.
강감찬은 소배압이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보고 내륙길 마지막 관문인 귀주성(평안북도 구성시) 앞 평원에서 거란군을 막아섰다.
드디어 1019년 2월 1일, 거란군은 퇴각길 마지막 전투를 예상하고 귀주벌판에서 대회전은 준비하며 포진을 시작한다.
거란군 정예부대 10만, 고려강감찬 부대 20만이 정면으로 마주 섰다.
귀주성 앞쪽으로는 2갈래의 하천이 흐르고 있었다. 거란군은 하천에 배수진을 치고 하천을 뒤로 두고 싸우게 된다.
거란군이 퇴로가 없는 위험한 배수진을 친 것은 기병 위주 거란군으로서는 보병 위주 고려군이 먼저 들어 오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따라서 후방이 강으로 막혀있어 대회전 중 우회 침투를 허용할 위험이 없는 포진이라 생각한다.
강감찬부대가 숫적으로 두 배나 더 많았지만 거란군은 훈련이 잘 된 정예기병이었고 고려군은 거의 민방위병 수준이었다. 게다가 기병이 유리한 벌판이었다. 강감찬부대가 숫적으로는 많았지만 거란군보다 불리한 상황이었다.
드디어 귀주벌판에서 양측 대 혈투가 시작되었다. 고려에서는 거란기병을 상대하기 위해 검차(고려걸란전쟁 드라마에서도 검차를 복원해서 첫 회에 나왔다)를 동원했다.
귀주벌판에서 대혈투가 시작되고 양측의 끊임없는 공방전이 지속된다. 검차를 동원한 고려와 이를 뚫으려는 거란기병의 한치 양보도 없는 공방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초반 싸움에서 강감찬 부대가 많이 밀리고 있었다.
그런데 별안간 고려군 1만 정예기병이 거란군 뒤쪽에서 나타난다. 이 기병대는 개경이 위험하다해서 개경을 도우려 개경으로 미리 보내진 김종현 장군의 1만기병이었다.
그런데 거란군이 철수했다는 소리를 듣고 다시 귀주로 향했던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거란군보다 먼저 도착했어야 하는데 늦게 도착했다.
이것이 강감찬의 전략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로 늦게 도착한 것인지는 확실 치 않지만 이게 강감찬에게는 신의 한 수가 되었다
뒷 걱정을 안 하려고 배수진을 치고 고려와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던 거란군에게 후미에서 갑자기 고려기병이 1만명이나 등장하니 거란군은 혼비백산을 한다.
이 1만의 기마병부대는 그야말로 거란의 후미에서부터 맹렬히 공격해 들어가 거란군 진열을 헤집어 놓게 된다.
이때 또 하늘도 고려군을 돕는다.
북쪽에서부터 불던 강한 바람이 남풍으로 바뀜과 동시에 소나기까지 내리게 된다.
즉 바람방향이 고려군쪽으로 불다가 거란군쪽으로 향해 불었던 것이다. 이럴 경우 고려군이 쏜 화살이 두 배정도 더 멀리 간다.
게다가 평안도 벌판에 2월달 추운 날씨에다 소나기까지 내리고 강한바람까지 거란군을 향해부니 거란군에게는 엄청난 부담이 되었다.
앞에서는 강한 비바람, 뒤에서는 고려군 1만 기병이 몰아치니 거란군 진형은 수습불가 상태로 무너져 버리고 만다. 거란군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치기에 바빴다.
이때 대원수이자 부원사인 강민첨 고려군 별동대가 이들을 추격하여 반령(귀주벌판)으로 몰아 넣기 시작한다.
결국 이 전투는 포위 섬멸전으로 마무리 되어 갔다. 포위 섬멸전은 당하는 쪽이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는 것이 보통이다. 거란군 10만 명중 살아 돌아간 이가 겨우 수천명에 불과했다.
거란장수 소배압은 갑옷까지 벗어 던지고 간신히 목슴을 건져 달아났다. 하지만 거란군은 최고위급 부대 지휘관 4명이 죽을 정도로 고위 계층 장수 손실도 컸다.
보다시피 귀주대첩에서 수공은 전혀 없었다. 단지 거란군이 배수진 쳐 놨다보니 피할데 없어 물에 빠져 죽은 거란군은 부지기 수였다. 강을 뒤 덮을만 했다.
어쨌던 그야말로 의심의 여지가 없는 고려군 대승 중 대승이었다.
살수대첩, 한산도 대첩과 더불어 한국사 3대 대첩 중 하나로 꼽히는
'귀주대첩'이 전설이 되는 순간이었다.
고려거란3차 전쟁은 고려군에 의한 전쟁초기 성공적인 기선 제압, 거란군 전격전을대비한 청야전술과 유격 전술, 귀주대첩에서 보여준 전술까지 철저한 작전 계획을 세우고 완벽하게 실행함으로써 재침입을 해 온 거란군을 격퇴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조선인조와 서인정권이 고려의 이러한 점을 배워야 했는데 몽골침략때 무신정권의 못된 짓만 배웠다.
이처럼 강감찬 귀주대첩 그 승리는 위대했다.
그러나 귀주대첩은 그 이후 120년간 고려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평화로운 시대를 열었고 고려 전성기를 열었다는 것에 훨씬 더 큰 의의가 있었다.
우리 대부분은 이 점에 대해서는 거의 모른다. 그냥 귀주대첩 자체 큰 승리만 기억한다.
고려의 귀주대첩 승리로
동아시아 여러 나라가 팽팽한 세력 균형을 유지하며 오래도록 평화가 이어진 시기는 사실 역사상 찾아봐도 거의 없다.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며 동아시아 최강 국력을 자랑한 거란군을 귀주 대첩으로 크게 물리친 덕택에 요나라는 정복전쟁을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북송, 요나라, 고려, 서하 등 4개국 간의 평화 균형 체제는 훗날 여진족인 금나라가 흥기하여 요나라와 북송을 공격할 때까지 계속 이어지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강감찬은 단순히 구국영웅 이상이다. 동아시아 역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인물인 셈이다.
강감찬은 대기만성형으로 정말 복받은 사람이었다.
강감찬이 거란의 침입을 격파한 이후 나라에 계속해서 풍년이 들었는데 백성들이
"이게 다 강감찬 공 덕분이다"
라며 칭송했다고 한다.
강감찬이 거란을 물리친 후 고려는 현종 때부터 인종 때까지에 이르는 100여년 간 한국 역사 전체를 통틀어 정치, 경제, 문화, 군사적으로 가장 빛나던 시기가 되었다.
강감찬은 귀주대첩이 이후 10년 동안 말년 복인답게 편히 살다 84살까지 천수를 누렸다.
강감찬은 문관 출신으로 정식 무관직을 제수받은 적이 없다. 84년 간의 긴 일생 동안 갑옷 입은 건 제3차 고려거란전쟁 때 3개월 뿐이었다.
그래도 귀주대첩 의의가 엄청나다보니 우리는 강감찬을 평생 장군으로만 산 인물로 기억한다.
이것으로 강감찬 시리즈는 끝 마친다.
긴 글 읽어주신 분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한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