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비나무 속 여자
-윤은주
골목보다 긴 어둠을 돌아 우체통처럼 작은 집 앞, 차가 멈춘다
지나던 바람 한 토막 불 꺼진 열쇠 구멍으로 여자보다 먼저 숨어든다
아코디언 주름처럼 낯선 거실 안 풍경이 펼쳐진다
피로를 가득 입고 온 옷자락이 바닥에 무겁게 쓸린다
언젠가 이 집에 왔었던가 오래된 서랍 어디쯤
깊숙이 보관했던 빛바랜 종이처럼, 여자의 눈을 향해
(오랜만이군 ....) 주술에서 풀려난 가재도구들이 돌아보며 말했다
소파에 누군가 커피처럼 엎지르고 닦지 않은, 오래된 적막
백 년쯤 전부터 사용한 적 없어 보이는 얼음보다 차가운 벽난로
그 위 꽃병 속 플라스틱 꽃들이 졸고 있다
낡은 피아노 페달처럼 실어증에 걸린 마루
가만히 발을 내딛자, 삐그덕
한 가지 파찰음만 반복하는 나무 마루
한 바퀴 빙 돌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자
어디선가 환청처럼 웃음소리가 들렸다
피아노 위 액자 속의 아이들이 까르르
벽난로에 불이 켜지고 플라스틱 꽃들이 깨어나 기지개를 켠다
식탁 위 찐 감자 한 알, 그녀를 쳐다본다
거울에 비친 여자, 물에 젖은 빵처럼 푸석하다
투명인간처럼 사라질 것 같은
여자가 침대에 젖은 몸을 눕힌다
몽롱한 눈으로 천장에 나무를 심다 잠 속으로 빠져든다
꿈속에 들리는 동굴 속 물 떨어지는 소리, 뚝, 뚝, 뚝
문틈에 껴있던 잠이 물소리에 젖는다
고장 난 라디오의 잡음처럼 바람이 불어왔다
창밖 가까운 숲에서 들려오는 여우의 울음
한밤중 집안으로 젖어드는 숨소리
눈을 뜬다 그녀는 없고
날마다 낯선 여자가 누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