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성보에 관한 안내문
광성보(광성돈대, 손돌목돈대, 용두돈대)
소재지 : 인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23-1
한국NGO신문 기사입력일 : 2023.01.01.
기자명 : 정진해 문화재전문 대기자
덕진진에서 강화해협의 해변을 따라 북쪽으로 약 2km의 거리에 자리하는 광성보에는 광성돈대, 손돌목돈대, 용두돈대가 위치한다. 광성보가 처음 이곳에 만들어지기 시작할 때는 고려시대 때 몽골의 침입에 대항하여 개경에서 강화도로 천도한 강도시기(1232~1270년)에 지금의 선원면, 불은면, 길상면 일대의 해안에 흙과 돌을 이용하여 축성했다.
조선시대에 오면서 강화가 국가의 보장지로 주목받으면서 관방시설이 수차에 걸쳐 정비되었다. 1618년(광해군 10)에 외성이 보수 되었고, 1658년(효종 9년)에 광성보를 만들게 되었다. 다시 1691년(숙종 17)에 허물어진 상태의 외성을 보수하면서 여장까지 갖춘 외성이 완성(1692년)에 완성되면서 광성보 소속 광성돈대, 오두돈대, 용두돈대, 화도돈대 등이 완성됐다.
광성보는 신미양요(1871년) 때 백병전의 현장이다. 당시 미국의 로저스가 통상을 요구하면서 함대를 이끌고 1,230명의 병력으로 침공했다. 이때 이미 해병 450명으로 초지진, 덕진진을 점령한 후 광성보에 이르자 백병전이 시작되었다. 당시 조선군 지휘관 어재연 장군 이하 전 병사가 열악한 무기로 용감하게 싸웠다. 포탄이 부족하면 칼과 창으로 싸웠고 돌과 주먹으로 싸웠으나 한발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백병전을 벌였지만, 지휘관 어재연 장군과 그의 아우 어재순, 군관과 49인의 장사, 200여 명의 병사가 전사했다. 이때 파괴되어 폐허가 되어 있던 것을 1977년 옛 모습을 복원하게 되었다. 안해루, 광성돈, 손돌목돈, 용두돈과 전사한 무명용사들의 묘, 어재연 장군의 쌍충비각 등 보수 정화됐다.
안해루는 영조 21년에 광성보를 개축하면서 성문을 건립했는데 이를 안해루(按海樓)라 명명했다. 광성보는 해안에 세운 소규모의 성곽으로, 안해루는 성의 안과 밖을 오가는 문이다. 홍예문을 안과 밖이 같은 모양이며 2단의 홍예 기석을 쌓고 그 위에 홍예석과 선단석을 연결함으로써 문이 완성되고 홍예문 위에는 여장을 설치하고 안쪽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의 누각을 두었다. 성문의 안쪽 좌우에는 누각을 오르내리는 계단을 두었고 북쪽으로는 성벽이 광성돈대와 연결되어 있다. 누각의 좌우에는 각각 협문을 두었다.
안해루의 북쪽에는 광성돈대가 자리한다. 반원형의 돈대로 서벽은 직선이고, 동벽은 볼록한 반원형으로, 마치 다리미 바닥모양으로 둘레가 142m이다. 광성보 전투에서 활약을 보였지만, 신무기로 무장한 미국 해군을 맞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당시 미군은 9인치, 8인치 등 85문의 대포를 쏘았으나 조선군은 정조준도 어려운 대포와 소포로 적과 마주했다. 홍이포는 포구에서 화약과 포탄을 장전한 후 포 뒤쪽 구멍에서 점화해 사격하는 포구장전식 화포이다. 사정거리 700m정도, 포알은 화약이 폭발하는 힘으로 날아가지만, 포알은 폭발하지 않았다. 소포는 불량기라 하여 프랑스군이 쓰던 것으로, 사정거리 300m로 포알은 대포와 같다. 미군의 전쟁사에 ‘48시간 전쟁’으로 기록되어 있는 광성보 전투에서 조선 군대는 어재연 장군을 포함해 430여 명이 전사하고 20여 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광성보와 돈대들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1977년 전적비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광성돈대가 복원되고 포좌 4개소와 포 3문을 복원 설치했다.
안해루에서 손돌목돈대로 가는 길에는 뿌리를 드러낸 나무들이 옛 강화외성의 흔적을 잡고 있고 신미양요 순국무명용사비는 순국한 용사들의 넋을 달래기 위한 비로, 비문 뒷면에는 한글로 신미양요가 일어났던 당시 우리 수비군의 활약상을 기록하여 놓았다. 쌍충비각에는 신미양요 때 중군 어재연과 그의 동생 어재순의 순절을 기념하는 비와 함께 당시 순국한 장병들의 충절을 기리는 광성파수순절비(廣城把守殉節碑)가 세워져 있다. 어재연, 어재순 형제를 기린 비문은 ‘凜乎忠勇(름호충용) 日月光輝(일월광휘) 兄弟賓從(형제빈종) 視死如歸(시사여귀) '늠름한 충성과 용맹은 해와 달처럼 빛나고, 형제가 서로 뒤따라서 죽음을 집으로 돌아가는 것 같이 하였네.' 兄死於國(형사어국) 弟死於兄(제사어형) 一門忠友(일문충우) 百世風聲(백세풍성) '형은 나라 위해 죽고 아우는 형을 위해 죽으니, 한 가문의 충성과 우애, 오랜 세대를 두고 이를 날리리라.'
<광성파수순절비>에는 본영 천총(千摠) 김현경과 본진 별장(別將) 박치성의 추모 시문이 있고, 뒷면에는 전사한 병사 49명의 명단이 있는데, 마지막 구절에 '半百武士(반백무사) 一心殉國(일심순국) 危忠卓節(위충탁절) 千秋不泐(천추불륵) '반백의 무사가 한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높은 충성 높은 지조와 절개를 긴 세월이 지나도 잊을 수 없으리.' 나라를 위해 몸바친 순국의 의미를 새겼다. 쌍충비 앞에는 순미순의총(辛未殉義塚)이라는 7기의 무덤이 있다. 이 무덤은 신미양요 때 목숨을 잃은 무명용사들의 신원을 알 수 없어 7기의 분묘에 합장하여 묻은 묘이다.
손돌목 돈대는 조선 숙종 5년(1679)에 쌓은 48개 돈대 중 하나로 신미양요 때 미군과 치열한 전투 벌였던 격전지로, 광성보에서 가장 높은 구릉 정상부에 둥근 형태로 자리 잡고 있다. 원래 돈대 중앙에 3칸의 무기고와 포좌 3개가 있었지만, 신미양요 때 미국 해군과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던 현장이다. 이때 격렬한 전투로 인해 모두 파괴되었던 돈대를 1976~7년 강화 중요 국방유적 복원정화사업으로 복원했다. 일명 손석항(孫石項)돈대로도 불리며 남북 간 지름이 30m, 동서 간은 34m로 평면 원형에 가까운 돈대로, 둘레는 108m, 돈대 넓이는 778㎡에 달한다.
손돌목 돈대에서 동쪽으로 내려다보이는 곳에 용두돈대가 있으며, 그 앞의 염하(강화해협)를 뱃사공 손돌이 왕의 오해로 억울하게 죽은 곳이라 하여 손돌목이라 부른다. 손돌목의 손돌은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으로 강화로 피난 가던 고종 임금을 배에 태웠던 뱃사공의 이름에서 따왔다. 배에 오른 고종이 이곳을 지날 때 배가 심하게 요동치자 손돌 뱃사공이 자신을 죽이려고 배를 이곳으로 몰았다고 의심한 나머지 손돌을 처형했다. 손돌은 죽기 전 임금이 건너갈 수 있도록 "바가지를 물에 띄우고 그것을 따라가면 반드시 뱃길이 트인다"고 말한 후 죽음을 맞았다. 정말 바가지를 따라가니 뱃길이 열리고 고종은 무사히 강화 땅에 오를 수 있었다. 비로소 자신이 오해한 것을 안 고종은 손돌뱃사공을 후하게 장사지내 주도록 했다. 염하 건너편 동남쪽에 덕포진이 있는데, 덕포진 언덕 위에 손돌의 묘가 있어 늘 염하의 물살을 지켜보고 있다.
손돌목돈대 아래에는 용의 머리처럼 염하강에 불쑥 나와 있는 용두돈대가 자리한다. 길게 바다로 향해 굽어진 길이 용의 머리 같아 붙인 이름으로 이곳은 염하와 바로 맞대고 있는 천혜의 요새이자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며, 신미양요 때 미군과 격렬한 전투를 치른 격전지이기도 하다. 용두돈대는 광성보에 소속되어 있으며 강화 54돈대 중 가장 마지막으로 합류한 돈대이다. 광성보 내 강화외성의 부속시설이었던 해안가의 용도를 돈대로 명명함으로써 돈대 대열에 올랐다.
용두돈대에는 포좌와 출입문이 없다. 강화도의 돈대 중 바다 쪽으로 가장 돌출된 암반 위에 지어진 돈대는 암벽 상단 모양에 따라 축성하여 돈대 앞머리는 부채꼴을 하고 있다. 또한 단층 구조를 하고 있으며, 긴 용도를 갖고 있다. 용도 양편으로 총안이 뚫린 여장이 설치되어 있다.
1977년 강화 중요 국방유적 복원정화사업으로 돈대 중앙에는 고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로 쓰인 ‘강화전적지정화기념비’가 세워져 있으며, 비 뒷면에는 이은상이 짓고 김충현이 글씨를 쓴 비문이 새겨져 있다.
손돌목돈대 아래 해안에는 12좌의 광성포대가 있다. 이 포대는 고종 11년 용진진, 광성진, 덕진진, 초진지에 포대를 설치할 때 함께 만들어진 포대이다. 광성포대는 손돌목돈대 주변 3곳에 설치되었는데 각각 9좌, 4좌, 3좌의 포좌를 갖추고 있었으며 이 중 가장 규모가 큰 중앙포대는 길이 80m, 포좌의 크기 약 6m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1875년 운양호사건을 계기로 외세에 문호를 개방함에 따라 파괴되었던 것을 2004년 발굴조사를 거쳐 복원되었다.
광성보의 문루인
안해루(按海樓)
광성돈대(좌)와 안해루(우)
광성돈대에 관한 안내문
광성돈대
광성돈대
광성돈대와
그 뒤로 보이는
안해루
쌍충비에 관한 안내문
쌍충비각
손돌목돈대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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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돌목돈대
손돌목돈대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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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돌목돈대
손돌목돈대
손돌목돈대에서 바라본
강화해협의 부래도
손돌목돈대에서 바라본
강화해협
손돌목돈대에서 바라본
강화해협
[손돌목돈대~용두돈대] 구간
탐방로에서 뒤돌아본
손돌목돈대
용두돈대에 관한 안내문
용두돈대
용두돈대
용두돈대
용두돈대에서
이성수
용두돈대에서 바라본
강화해협의 부래도
용두돈대에서
사진 좌측에 보이는 부래도
막다른 길에 위치한
용두돈대로
오는 길
떠나면서 뒤돌아본
용두돈대
[덕진진에서 강화해협의 해변을 따라 북쪽으로 약 2km의 거리에 자리하는 광성보에는 광성돈대, 손돌목돈대, 용두돈대가 위치한다. 광성보가 처음 이곳에 만들어지기 시작할 때는 고려시대 때 몽골의 침입에 대항하여 개경에서 강화도로 천도한 강도시기(1232~1270년)에 지금의 선원면, 불은면, 길상면 일대의 해안에 흙과 돌을 이용하여 축성했다.
조선시대에 오면서 강화가 국가의 보장지로 주목받으면서 관방시설이 수차에 걸쳐 정비되었다. 1618년(광해군 10)에 외성이 보수 되었고, 1658년(효종 9년)에 광성보를 만들게 되었다. 다시 1691년(숙종 17)에 허물어진 상태의 외성을 보수하면서 여장까지 갖춘 외성이 완성(1692년)에 완성되면서 광성보 소속 광성돈대, 오두돈대, 용두돈대, 화도돈대 등이 완성됐다.
광성보는 신미양요(1871년) 때 백병전의 현장이다. 당시 미국의 로저스가 통상을 요구하면서 함대를 이끌고 1,230명의 병력으로 침공했다. 이때 이미 해병 450명으로 초지진, 덕진진을 점령한 후 광성보에 이르자 백병전이 시작되었다. 당시 조선군 지휘관 어재연 장군 이하 전 병사가 열악한 무기로 용감하게 싸웠다. 포탄이 부족하면 칼과 창으로 싸웠고 돌과 주먹으로 싸웠으나 한발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백병전을 벌였지만, 지휘관 어재연 장군과 그의 아우 어재순, 군관과 49인의 장사, 200여 명의 병사가 전사했다. 이때 파괴되어 폐허가 되어 있던 것을 1977년 옛 모습을 복원하게 되었다. 안해루, 광성돈, 손돌목돈, 용두돈과 전사한 무명용사들의 묘, 어재연 장군의 쌍충비각 등이 보수 정화됐다.]
광성포대에 관한 안내문
광성포대
광성포대에서 바라본
강화해협
광성포대
강화 덕진진에 관한
안내문
강화 덕진진(江華 德津鎭) : 조선시대에 강화해협을 지키던 요새. 1971년 12월 29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강화 12진보(鎭堡)의 하나이며, 덕진진은 덕포진과 더불어 해협의 관문을 지키는 강화도 제1의 포대였다. 덕진진은 본디 수영(水營)에 속하여 첨사(僉使)를 두고 있었는데, 1666년(현종 7년)에 강화유수 서필원(徐必遠)이 임금에게 청하여 첨사를 경기 김포시 덕포로 옮기고 이곳에 별장을 두었다. 1677(숙종 3년)에는 유수 허질(許秩)이 임금에게 청하여 만호(萬戶)로 승격시켰다. 1874년(고종 11년)에 축조한 남장 포대는 15문의 포대가 남아 있다.
1866년 병인양요 때는 양헌수(梁憲洙)의 부대가 밤의 어둠을 타서 이 진을 거쳐 삼랑성(三郞城:일명 정족산성, 鼎足山城)으로 들어가 프랑스군을 격파하였고, 1871년 신미양요 때는 J.로저스 중장이 이끄는 미국 극동함대와 이곳에서 치열한 포격전을 벌였다. 그러나 초지진(草芝鎭)에 상륙한 미국해병대에 의하여 점령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이때 성첩(城堞)과 문루(門樓)가 모두 파괴되고, 문루터만 남게 되었다. 1976년에 문루인 공조루(控潮樓)를 다시 세우고 돈대(墩臺)를 보수하였으며 남장 포대도 개축하였다. 공조루(控潮樓)의 공조(控潮)는 “바다를 제어한다”는 뜻이다.
덕진진의 문루인
공조루(控潮樓)
공조루(控潮樓)
공조루(좌)와 강화해협(우)
남장포대에 관한 안내문
남장포대
남장포대에서 바라본
초지대교
남장포대
덕진돈대
덕진돈대에 관한
안내문
덕진돈대
덕진진에 있는
경고비에 관한 안내문
덕진진에 있는
경고비
[덕진진~세븐일레븐 강화초지점] 구간
탐방로에서 바라본
초지대교
[덕진진~세븐일레븐 강화초지점] 구간
탐방로 도중의
어부생선구이맛집
세븐일레븐 강화초지점에서
새우탕 컵라면으로 간식
인천 강화군 길상면 해안동로 118 번지에 있는
세븐일레븐 강화초지점
강화 초지진에 관한 안내문
강화 초지진(江華 草芝鎭) :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에 해안선을 지키기 위하여 설치한 진. 1971년 12월 29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 624번지
크기
1971년 12월 29일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면적은 4,233m2이다.
1656년(효종 7) 강화유수(江華留守) 홍중보(洪重普)가 처음 설치하였다. 66년(현종 7) 병마만호(兵馬萬戶)를 두었다가 1763년(영조 39)에 첨사(僉使)로 승격시켰는데 이 때의 병력은 병마첨절별사(兵馬僉節別使) 1명, 군관 11명, 사병 98명, 돈군(墩軍) 18명, 목자(牧子) 210명, 진선(鎭船) 3척과 무기 다수가 있었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이 곳에서 프랑스 함대의 로즈 소장과 싸웠으며, 1871년(고종 8)에는 미국 아시아함대의 로저스 중장이 이 곳에 침입하였을 때 필사의 방어전을 전개하다 함락된 바 있었고, 1875년(고종 12)에는 일본 군함 운요호[雲揚號]와도 이 곳에서 교전하였다.
이 초지진은 모두 허물어져 돈(墩)의 터와 성의 기초만 남아 있었던 것을 1973년 초지돈만 복원하였다. 돈에는 3곳의 포좌(砲座)가 있고 총좌(銃座)가 100여 곳 있다. 성은 높이 4m 정도에 장축이 100m쯤 되는 타원형의 돈이다. 돈 안에는 조선 말의 대포 1문이 포각 속에 전시되어 있는데, 포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집 홍살로 되어 있으며, 대포의 길이는 2.32m, 입지름 40cm이다.
현재의 초지진(초지돈대) 자리에 있는 두 소나무는 신미양·운요호의 침공 때 격전 중 날아온 적들의 포탄 파편과 총알에 의해 상처의 흔적을 간직한 역사의 산 증거 나무들이다. 격변의 시대 열강의 침입에 맞서 장렬하게 싸운 선조들의 기상을 간직한 채 400여 년 동안 초지돈대를 의연히 지키고 있다. 두 소나무는 굵은 줄기가 위로 솟구쳐 여러 갈래로 뻗은 모양으로 가지가 늘어지면서 삿갓 모양으로 쳐져 아름다운 수형이 있으며 생육상태가 양호하다. 수려한 모양의 희귀 노거수로서 생물학적 가치가 크며 역사 문화적 가치 또한 크다.
강화 초지진에 관한 안내문
강화 초지진
강화 초지진
강화 초지진에 있는
조선시대에 사용했던 대포
초지진에서 바라본
초지대교
강화 초지진
초지진의 명물인
2그루의 소나무
초지진의 명물인
2그루의 소나무에 관한
안내문
초지진의 명물인
2그루의 소나무
강화 초지진
초지대교 버스 정류장 옆에 있는
초지인삼해수탕
초지대교 버스 정류장에서 구래역으로 갈 때 탄
70번 버스의
운행노선도
2023년12월25일(월요일) 강화 나들길 [제6코스(화남생가 가는 길)&제2코스(호국돈대 길)] 탐방기
탐방지 : 강화 나들길 [제6코스(화남생가 가는 길) & 강화 나들길 제2코스(호국돈대 길)]
[강화 나들길 제6코스(화남생가 가는 길)은 강화버스터미널에서 광성보를 잇는 구간이다. 총 18.8㎞구간으로 터미널을 벗어나면 바로 고식이 들판, 조산평이라고 불리는 너른 논이 이어진다. 바람결에 몸을 흔드는 벼 이삭의 배웅을 받으며 도감산을 오르면 진달래, 생강나무 꽃이 발길마다 따라와 탄성이 절로 나온다. 나무 틈 사이로 보이는 푸르디푸른 논은 자연이 만든 예술품처럼 아름답기 그지없다. 화남 고재형 선생의 고향 두두미 마을은 ''세상의 모든 꽃이 이곳에 모두 있다.''라는 말이 너무도 잘 어울리는 조용하고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강화 나들길 제2코스(호국 돈대길)
강화 나들길 제2코스 : [갑곶돈대 안내소~용진진~용당돈대~화도돈대~오두돈대~광성보~용두돈대~덕진진~초지진 관광안내소]/온수사거리~온수주차장] (약17km/6시간)
강화도는 오래전부터 나라를 지켜낸 소중한 터전이자 외국의 문화와 물자가 들고 나던 관문이었다. 그만큼 외국과의 교류 및 충돌이 잦았던 곳이기도 하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운요호 사건이다.
특히, 광성보는 1871년 4월 미국이 통상을 요구하며 함대를 이끌고 침공할 당시, 초지진, 덕진진을 점령한 후 광성보에 이르러 백병전을 전개한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렇듯 강화나들길 2코스에는 항쟁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갑곶돈대, 광성보 등 진, 보, 돈대가 다른 코스에 비해 유독 많이 남아 있다. 그래서 나들길 명칭도 ‘호국돈대길’이다. 아픈 역사를 지니고 있는 길이지만 풍경만은 전국의 여느 코스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강화나들길 2코스는 갑곶돈대에서부터 초지진까지 총 17km의 둑길로 6시간 정도가 소요되지만 유적지마다 가지고 있는 다양한 이야기와 시원한 바다풍경 그리고 고즈넉한 숲길을 걷다 보면 지루할 틈이 없다.
여기에 계절별로 다르게 피어 있는 들꽃을 보는 재미 또한 강화나들길 2코스만이 가지고 있는 매력이다.]
탐방코스: [강화버스터미널 버스 정류장~(2.4km)~지혜의 숲 도서관~(250m)~대문고개~(1.4km)~선원사~(50m)~선원사지~(3.1km)~삼동암천~(2.7km)~화남생가터~(5.3km)~광성보~(2.5km)~덕진진~(2.3km)~세븐일레븐 강화초지점~(850m)~초지진~(860m)~초지대교 버스 정류장] (거리 21.7km)
탐방일 : 2023년 12월 25일(월요일)
날씨 : 청명한 날씨 [강화군 강화읍 최저기온 영하 5C, 최고기온 2도C]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5시간56분 소요)
09:46~10:05 구산역에서 6호선 지하철을 타고 합정역으로 간 후 6번 출구로 나옴 [19분 소요]
10:05~10:06 합정역 버스 정류장까지 도보로 이동한 후 강화여객자동차터미널로 가는 3000번 버스 승차 대기
10:06~11:32 3000번 버스를 타고 합정역 정류장을 출발하여 강화여객자동차터미널 정류장으로 이동 [1시간 26분, 37개 정류장 이동]
* 11:32~12:00 인천 강화군 강화읍 중앙로 43 번지에 있는 강화여객자동차터미널에서 탐방출발하여 인천 강화군 선원면 대문고개로 131 번지에 있는 지혜의 숲 도서관으로 이동
* 12:00~12:05 대문고개로 이동
* 12:05~12:18 인천 강화군 선원면 선원사지로 222 번지에 있는 선원사로 이동
* 12:18~12:20 사진촬영
* 12:20~12:21 강화 선원사지로 이동
[강화 선원사지(江華 禪源寺址)
인천광역시 강화군에 있는 고려시대 대몽항쟁 당시 고려대장경 목판을 조각하던 곳으로 추정되는 사찰터. 사적.
소재지 : 인천 강화군 선원면 지산리 산133번지
1977년11월 29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선원사는 고려시대에 몽골의 침략을 받아 강화도로 도읍을 옮긴 후 1245년(고려 고종 32)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최우(崔瑀)가 자신의 원찰(願刹)이자 대몽항쟁의 정신적 지주로 삼고자 창건한 곳이다. 강화도 피난 당시 국찰(國刹)의 격을 갖던 사찰이었으며. 충렬왕 때에는 임시 궁궐로 사용하기도 했다. 특히 대장도감(大藏都監)을 설치하여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목판을 조각, 봉안하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때 조각된 팔만대장경 목판은 현재 합천 해인사에 봉안되어 있는데 1398년(조선 태조 7)한양의 지천사(支天寺)로 옮겼다가 1456년경(세조 2)해인사로 다시 옮긴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려시대의 선원사는 순천 송광사와 함께 2대 선찰(禪刹)로 손꼽혔으나 1398년(조선 태조 7) 이후 아무런 기록이 없으며, 그 터는 잊혀져 흔적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1976년 동국대학교 강화도학술조사단이 지표조사를 통해 처음 발견하여, 몇 개의 주춧돌과 보상화무늬 전돌, 범자(梵字) 새긴 기와, 지붕에 얹었던 잡상 등을 확인하였다. 이후 선원면(仙源面) 도감마을, 도감산에 있는 절터이므로 학술적·역사적 가치와 지역 연원에 근거하여, 1977년 사적 강화선원사지로 지정되었으나 위치에 대한 논란이 있다.
1996년부터 2001년까지 4차례에 걸쳐 동국대학교박물관이 발굴조사 한 결과, 독립된 건물지 21개소와 부속 행랑지 7개소가 확인되었으며, 건물들은 북고남저의 지형 위에 동서로 긴 4개의 층단을 두고 빼곡히 들어서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중앙부 대형건물지(기단길이 38m)에는 삼존불을 지탱한 것으로 보이는 불단 유구가 확인되었고, 5개의 건물지에서 온돌시설과 배수시설 등이 확인되었으나 탑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지역은 건물지가 집중되어 있는 중심구역으로 남북길이 180m, 동서너비 180m정도이다. 출토유물은 자기류, 기와류, 소형 청동탄생불, 금동나한상, 탄화된 사경편 등이 주를 이루고 있다. 자기류(총 2,300여 점)는 12세기 후반∼14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청자편이 대부분(94%)이고, 기와류는 평기와가 가장 많다. 막새, 취두, 잡상 등이 출토되었는데, 이중 막새류는 연화문, 범자문, 귀목문이 대부분인데 ‘박씨(朴氏)·유씨(劉氏)’명(銘) 막새도 있다. 취두편은 모두 21개가 조사되었다.
출토 유물로 보면 절터와 관련된 유적으로 추정되나,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고려팔만대장경』을 판각했던 선원사(禪源寺) 터로 볼 수 있는 고고학적 자료가 확인되지 않아 논란이 되고 있다. 더구나 1931년 편찬된 『속수증보강도지(續修增補江都誌)』에 “선원면 선행리 충렬사 앞 인근 일대가 선원사의 유지”라 되어 있어, 향토사가들은 이를 근거로 현재 선원사지는 가궐터(假闕址)이며, 충렬사 전면 터가 선원사지라고 주장하고 있다. 문헌사학계에서도 현 위치가 문헌자료와 배치된다는 이유로, 선원면 선행리의 충렬사 부근이 선원사지이며, 대단히 많은 수량의 치미, 용두, 잡상이 출토된 현 선원사지는 사찰이라기보다 궁궐과 가까운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던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2013년 5월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이 강화군 선원면 신정리에서 발견한 건물 터가 고려시대 가궐(假闕) 터로 추정되고 있어, 앞으로의 조사에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특징
사역이 크게 네 구역으로 구분되어 층단식(層段式)으로 대지가 마련되어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의의와 평가
남한지역에 현존하는 고려시대 사찰 터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 12:21~12:25 사진촬영
* 12:25~13:22 혈구산이 보이는 삼동암천(三同岩川)으로 이동
[삼동암천(三同岩川)
인천광역시 강화군의 선원면 혈구산에서 발원하여 삼동암리 부근에서 여러 지류들을 합류한 다음 염하로 유입하는 하천이다. 『강도지』에 '마장천(馬場川)'이라 표기되어 있으며 "근원이 두 갈래인데 하나는 혈굴산에서 출발하고 다른 하나는 진강산에서 출발하여 대청포로 들어간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옛 이름이 마장천이고 마장천 하구를 대청포(大靑浦)라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주요 지류로는 퇴모산에서 발원하는 평촌천과 혈구산에서 발원하는 매제이천, 적정산에서 발원하는 신도현천 · 쟁정천 · 교동천 · 박공현천 · 사복천 등이 있다. 동쪽으로 흘러 불은면 고능리 화도배수갑문을 통해 염하로 유입한다. 상류부에 대청들이 있고 하류에 만월들이 있으며, 유역 내에 지방 지정문화재 기념물 26호인 허유진묘가 소재한다.]
* 13:22~13:52 강화군 불은면 두운리(옛 이름은 두두미 마을)에 있는 화남생가터로 이동
[화남 고재형 선생의 생가터 주소는 화남2길 28-1이며, 생가는 헐리고 새로 지은 2층 집에서 인척분이 거주하고 있다.]
[‘강화나들길’이란 이름이 생기기도 한참 전 이 길을 먼저 걸었던 선비가 있었다. 강화도에서 나고 자란 선비 화남 고재형은 환갑 나이에 나귀를 타고 고향 강화를 둘러보았고 그때 느낀 감상을 256편의 시와 산문으로 남겼다. 요즘 유행한 강화도 나들이길 가이드북인 셈이다. 이것이 <심도기행>이다. 심도는 강화도의 옛 이름. 외래 문명이 홍수처럼 밀려들던 시기, 당장 내일의 운명을 알 수 없는 시기에 강화도가 이렇게 아름다웠노라고 글로써 후세에 전하고자 했다.
“이름은 건평이지만 물 많은 수평인가
둑에 가득 봄물 차니 논에 물을 대기 좋다.
밭 갈면서 책 읽는 이 모두가 군자이니
그러한 가운데서 맑은 기운을 얻는구나.”
- 화남 고재형 <심도기행> 中 ‘건평동’ -
1906년 화남이 집필한 <심도기행>은 100년이 지난 2008년 전체가 완전하게 번역됐다. 그 안에는 강화의 역사뿐 아니라 산천과 풍류가 오롯이 남아 있어 글 몇 줄 읽는 것만으로도 눈앞에 생생한 그림이 그려진다. 이를 기초로 조성된 것이 강화나들길이다.]
* 13:52~15:05 인천 강화군 불은면 해안동로466번길 27 번지에 있는 광성보(廣城堡)로 이동
* 15:05~15:45 [광성돈대(廣城墩臺)~쌍충비각~손돌목돈대(孫乭項墩臺)~용두돈대(龍頭墩臺, 인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산 125 번지)]의 동선으로 광성보(廣城堡)를 탐방
[광성보(광성돈대, 손돌목돈대, 용두돈대)
소재지 : 인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23-1
한국NGO신문 기사입력일 : 2023.01.01.
기자명 : 정진해 문화재전문 대기자
덕진진에서 강화해협의 해변을 따라 북쪽으로 약 2km의 거리에 자리하는 광성보에는 광성돈대, 손돌목돈대, 용두돈대가 위치한다. 광성보가 처음 이곳에 만들어지기 시작할 때는 고려시대 때 몽골의 침입에 대항하여 개경에서 강화도로 천도한 강도시기(1232~1270년)에 지금의 선원면, 불은면, 길상면 일대의 해안에 흙과 돌을 이용하여 축성했다.
조선시대에 오면서 강화가 국가의 보장지로 주목받으면서 관방시설이 수차에 걸쳐 정비되었다. 1618년(광해군 10)에 외성이 보수 되었고, 1658년(효종 9년)에 광성보를 만들게 되었다. 다시 1691년(숙종 17)에 허물어진 상태의 외성을 보수하면서 여장까지 갖춘 외성이 완성(1692년)에 완성되면서 광성보 소속 광성돈대, 오두돈대, 용두돈대, 화도돈대 등이 완성됐다.
광성보는 신미양요(1871년) 때 백병전의 현장이다. 당시 미국의 로저스가 통상을 요구하면서 함대를 이끌고 1,230명의 병력으로 침공했다. 이때 이미 해병 450명으로 초지진, 덕진진을 점령한 후 광성보에 이르자 백병전이 시작되었다. 당시 조선군 지휘관 어재연 장군 이하 전 병사가 열악한 무기로 용감하게 싸웠다. 포탄이 부족하면 칼과 창으로 싸웠고 돌과 주먹으로 싸웠으나 한발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백병전을 벌였지만, 지휘관 어재연 장군과 그의 아우 어재순, 군관과 49인의 장사, 200여 명의 병사가 전사했다. 이때 파괴되어 폐허가 되어 있던 것을 1977년 옛 모습을 복원하게 되었다. 안해루, 광성돈, 손돌목돈, 용두돈과 전사한 무명용사들의 묘, 어재연 장군의 쌍충비각 등 보수 정화됐다.
안해루는 영조 21년에 광성보를 개축하면서 성문을 건립했는데 이를 안해루(按海樓)라 명명했다. 광성보는 해안에 세운 소규모의 성곽으로, 안해루는 성의 안과 밖을 오가는 문이다. 홍예문을 안과 밖이 같은 모양이며 2단의 홍예 기석을 쌓고 그 위에 홍예석과 선단석을 연결함으로써 문이 완성되고 홍예문 위에는 여장을 설치하고 안쪽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의 누각을 두었다. 성문의 안쪽 좌우에는 누각을 오르내리는 계단을 두었고 북쪽으로는 성벽이 광성돈대와 연결되어 있다. 누각의 좌우에는 각각 협문을 두었다.
안해루의 북쪽에는 광성돈대가 자리한다. 반원형의 돈대로 서벽은 직선이고, 동벽은 볼록한 반원형으로, 마치 다리미 바닥모양으로 둘레가 142m이다. 광성보 전투에서 활약을 보였지만, 신무기로 무장한 미국 해군을 맞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당시 미군은 9인치, 8인치 등 85문의 대포를 쏘았으나 조선군은 정조준도 어려운 대포와 소포로 적과 마주했다. 홍이포는 포구에서 화약과 포탄을 장전한 후 포 뒤쪽 구멍에서 점화해 사격하는 포구장전식 화포이다. 사정거리 700m정도, 포알은 화약이 폭발하는 힘으로 날아가지만, 포알은 폭발하지 않았다. 소포는 불량기라 하여 프랑스군이 쓰던 것으로, 사정거리 300m로 포알은 대포와 같다. 미군의 전쟁사에 ‘48시간 전쟁’으로 기록되어 있는 광성보 전투에서 조선 군대는 어재연 장군을 포함해 430여 명이 전사하고 20여 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광성보와 돈대들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1977년 전적비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광성돈대가 복원되고 포좌 4개소와 포 3문을 복원 설치했다.
안해루에서 손돌목돈대로 가는 길에는 뿌리를 드러낸 나무들이 옛 강화외성의 흔적을 잡고 있고 신미양요 순국무명용사비는 순국한 용사들의 넋을 달래기 위한 비로, 비문 뒷면에는 한글로 신미양요가 일어났던 당시 우리 수비군의 활약상을 기록하여 놓았다. 쌍충비각에는 신미양요 때 중군 어재연과 그의 동생 어재순의 순절을 기념하는 비와 함께 당시 순국한 장병들의 충절을 기리는 광성파수순절비(廣城把守殉節碑)가 세워져 있다. 어재연, 어재순 형제를 기린 비문은 ‘凜乎忠勇(름호충용) 日月光輝(일월광휘) 兄弟賓從(형제빈종) 視死如歸(시사여귀) '늠름한 충성과 용맹은 해와 달처럼 빛나고, 형제가 서로 뒤따라서 죽음을 집으로 돌아가는 것 같이 하였네.' 兄死於國(형사어국) 弟死於兄(제사어형) 一門忠友(일문충우) 百世風聲(백세풍성) '형은 나라 위해 죽고 아우는 형을 위해 죽으니, 한 가문의 충성과 우애, 오랜 세대를 두고 이를 날리리라.'
<광성파수순절비>에는 본영 천총(千摠) 김현경과 본진 별장(別將) 박치성의 추모 시문이 있고, 뒷면에는 전사한 병사 49명의 명단이 있는데, 마지막 구절에 '半百武士(반백무사) 一心殉國(일심순국) 危忠卓節(위충탁절) 千秋不泐(천추불륵) '반백의 무사가 한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높은 충성 높은 지조와 절개를 긴 세월이 지나도 잊을 수 없으리.' 나라를 위해 몸바친 순국의 의미를 새겼다. 쌍충비 앞에는 순미순의총(辛未殉義塚)이라는 7기의 무덤이 있다. 이 무덤은 신미양요 때 목숨을 잃은 무명용사들의 신원을 알 수 없어 7기의 분묘에 합장하여 묻은 묘이다.
손돌목 돈대는 조선 숙종 5년(1679)에 쌓은 48개 돈대 중 하나로 신미양요 때 미군과 치열한 전투 벌였던 격전지로, 광성보에서 가장 높은 구릉 정상부에 둥근 형태로 자리 잡고 있다. 원래 돈대 중앙에 3칸의 무기고와 포좌 3개가 있었지만, 신미양요 때 미국 해군과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던 현장이다. 이때 격렬한 전투로 인해 모두 파괴되었던 돈대를 1976~7년 강화 중요 국방유적 복원정화사업으로 복원했다. 일명 손석항(孫石項)돈대로도 불리며 남북 간 지름이 30m, 동서 간은 34m로 평면 원형에 가까운 돈대로, 둘레는 108m, 돈대 넓이는 778㎡에 달한다.
손돌목 돈대에서 동쪽으로 내려다보이는 곳에 용두돈대가 있으며, 그 앞의 염하(강화해협)를 뱃사공 손돌이 왕의 오해로 억울하게 죽은 곳이라 하여 손돌목이라 부른다. 손돌목의 손돌은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으로 강화로 피난 가던 고종 임금을 배에 태웠던 뱃사공의 이름에서 따왔다. 배에 오른 고종이 이곳을 지날 때 배가 심하게 요동치자 손돌 뱃사공이 자신을 죽이려고 배를 이곳으로 몰았다고 의심한 나머지 손돌을 처형했다. 손돌은 죽기 전 임금이 건너갈 수 있도록 "바가지를 물에 띄우고 그것을 따라가면 반드시 뱃길이 트인다"고 말한 후 죽음을 맞았다. 정말 바가지를 따라가니 뱃길이 열리고 고종은 무사히 강화 땅에 오를 수 있었다. 비로소 자신이 오해한 것을 안 고종은 손돌뱃사공을 후하게 장사지내 주도록 했다. 염하 건너편 동남쪽에 덕포진이 있는데, 덕포진 언덕 위에 손돌의 묘가 있어 늘 염하의 물살을 지켜보고 있다.
손돌목돈대 아래에는 용의 머리처럼 염하강에 불쑥 나와 있는 용두돈대가 자리한다. 길게 바다로 향해 굽어진 길이 용의 머리 같아 붙인 이름으로 이곳은 염하와 바로 맞대고 있는 천혜의 요새이자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며, 신미양요 때 미군과 격렬한 전투를 치른 격전지이기도 하다. 용두돈대는 광성보에 소속되어 있으며 강화 54돈대 중 가장 마지막으로 합류한 돈대이다. 광성보 내 강화외성의 부속시설이었던 해안가의 용도를 돈대로 명명함으로써 돈대 대열에 올랐다.
용두돈대에는 포좌와 출입문이 없다. 강화도의 돈대 중 바다 쪽으로 가장 돌출된 암반 위에 지어진 돈대는 암벽 상단 모양에 따라 축성하여 돈대 앞머리는 부채꼴을 하고 있다. 또한 단층 구조를 하고 있으며, 긴 용도를 갖고 있다. 용도 양편으로 총안이 뚫린 여장이 설치되어 있다.
1977년 강화 중요 국방유적 복원정화사업으로 돈대 중앙에는 고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로 쓰인 ‘강화전적지정화기념비’가 세워져 있으며, 비 뒷면에는 이은상이 짓고 김충현이 글씨를 쓴 비문이 새겨져 있다.
손돌목돈대 아래 해안에는 12좌의 광성포대가 있다. 이 포대는 고종 11년 용진진, 광성진, 덕진진, 초진지에 포대를 설치할 때 함께 만들어진 포대이다. 광성포대는 손돌목돈대 주변 3곳에 설치되었는데 각각 9좌, 4좌, 3좌의 포좌를 갖추고 있었으며 이 중 가장 규모가 큰 중앙포대는 길이 80m, 포좌의 크기 약 6m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1875년 운양호사건을 계기로 외세에 문호를 개방함에 따라 파괴되었던 것을 2004년 발굴조사를 거쳐 복원되었다.]
[덕진진에서 강화해협의 해변을 따라 북쪽으로 약 2km의 거리에 자리하는 광성보에는 광성돈대, 손돌목돈대, 용두돈대가 위치한다. 광성보가 처음 이곳에 만들어지기 시작할 때는 고려시대 때 몽골의 침입에 대항하여 개경에서 강화도로 천도한 강도시기(1232~1270년)에 지금의 선원면, 불은면, 길상면 일대의 해안에 흙과 돌을 이용하여 축성했다.
조선시대에 오면서 강화가 국가의 보장지로 주목받으면서 관방시설이 수차에 걸쳐 정비되었다. 1618년(광해군 10)에 외성이 보수 되었고, 1658년(효종 9년)에 광성보를 만들게 되었다. 다시 1691년(숙종 17)에 허물어진 상태의 외성을 보수하면서 여장까지 갖춘 외성이 완성(1692년)에 완성되면서 광성보 소속 광성돈대, 오두돈대, 용두돈대, 화도돈대 등이 완성됐다.
광성보는 신미양요(1871년) 때 백병전의 현장이다. 당시 미국의 로저스가 통상을 요구하면서 함대를 이끌고 1,230명의 병력으로 침공했다. 이때 이미 해병 450명으로 초지진, 덕진진을 점령한 후 광성보에 이르자 백병전이 시작되었다. 당시 조선군 지휘관 어재연 장군 이하 전 병사가 열악한 무기로 용감하게 싸웠다. 포탄이 부족하면 칼과 창으로 싸웠고 돌과 주먹으로 싸웠으나 한발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백병전을 벌였지만, 지휘관 어재연 장군과 그의 아우 어재순, 군관과 49인의 장사, 200여 명의 병사가 전사했다. 이때 파괴되어 폐허가 되어 있던 것을 1977년 옛 모습을 복원하게 되었다. 안해루, 광성돈, 손돌목돈, 용두돈과 전사한 무명용사들의 묘, 어재연 장군의 쌍충비각 등이 보수 정화됐다.]
* 15:45~16:09 인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355 번지에 있는 강화 덕진진(江華 德津鎭)으로 이동
[강화 덕진진(江華 德津鎭) : 조선시대에 강화해협을 지키던 요새. 1971년 12월 29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강화 12진보(鎭堡)의 하나이며, 덕진진은 덕포진과 더불어 해협의 관문을 지키는 강화도 제1의 포대였다. 덕진진은 본디 수영(水營)에 속하여 첨사(僉使)를 두고 있었는데, 1666년(현종 7년)에 강화유수 서필원(徐必遠)이 임금에게 청하여 첨사를 경기 김포시 덕포로 옮기고 이곳에 별장을 두었다. 1677(숙종 3년)에는 유수 허질(許秩)이 임금에게 청하여 만호(萬戶)로 승격시켰다. 1874년(고종 11년)에 축조한 남장 포대는 15문의 포대가 남아 있다.
1866년 병인양요 때는 양헌수(梁憲洙)의 부대가 밤의 어둠을 타서 이 진을 거쳐 삼랑성(三郞城:일명 정족산성, 鼎足山城)으로 들어가 프랑스군을 격파하였고, 1871년 신미양요 때는 J.로저스 중장이 이끄는 미국 극동함대와 이곳에서 치열한 포격전을 벌였다. 그러나 초지진(草芝鎭)에 상륙한 미국해병대에 의하여 점령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이때 성첩(城堞)과 문루(門樓)가 모두 파괴되고, 문루터만 남게 되었다. 1976년에 문루인 공조루(控潮樓)를 다시 세우고 돈대(墩臺)를 보수하였으며 남장 포대도 개축하였다. 공조루(控潮樓)의 공조(控潮)는 “바다를 제어한다”는 뜻이다.]
* 16:09~16:21 [덕진진의 문루인 공조루(控潮樓)~남장포대~덕진돈대~경고비]의 동선으로 강화 덕진진(江華 德津鎭)을 탐방
* 16:21~16:43 인천 강화군 길상면 해안동로 118 번지에 있는 세븐일레븐 강화초지점으로 이동
* 16:43~17:10 세븐일레븐 강화초지점에서 새우탕 컵라면으로 간식 [비용 : 1,400원]
* 17:10~17:15 인천 강화군 길상면 해안동로 58 번지에 있는 강화 초지진(江華 草芝鎭)으로 이동
[강화 초지진(江華 草芝鎭) :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에 해안선을 지키기 위하여 설치한 진. 1971년 12월 29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 624번지
크기
1971년 12월 29일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면적은 4,233m2이다.
1656년(효종 7) 강화유수(江華留守) 홍중보(洪重普)가 처음 설치하였다. 66년(현종 7) 병마만호(兵馬萬戶)를 두었다가 1763년(영조 39)에 첨사(僉使)로 승격시켰는데 이 때의 병력은 병마첨절별사(兵馬僉節別使) 1명, 군관 11명, 사병 98명, 돈군(墩軍) 18명, 목자(牧子) 210명, 진선(鎭船) 3척과 무기 다수가 있었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이 곳에서 프랑스 함대의 로즈 소장과 싸웠으며, 1871년(고종 8)에는 미국 아시아함대의 로저스 중장이 이 곳에 침입하였을 때 필사의 방어전을 전개하다 함락된 바 있었고, 1875년(고종 12)에는 일본 군함 운요호[雲揚號]와도 이 곳에서 교전하였다.
이 초지진은 모두 허물어져 돈(墩)의 터와 성의 기초만 남아 있었던 것을 1973년 초지돈만 복원하였다. 돈에는 3곳의 포좌(砲座)가 있고 총좌(銃座)가 100여 곳 있다. 성은 높이 4m 정도에 장축이 100m쯤 되는 타원형의 돈이다. 돈 안에는 조선 말의 대포 1문이 포각 속에 전시되어 있는데, 포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집 홍살로 되어 있으며, 대포의 길이는 2.32m, 입지름 40cm이다.
현재의 초지진(초지돈대) 자리에 있는 두 소나무는 신미양·운요호의 침공 때 격전 중 날아온 적들의 포탄 파편과 총알에 의해 상처의 흔적을 간직한 역사의 산 증거 나무들이다. 격변의 시대 열강의 침입에 맞서 장렬하게 싸운 선조들의 기상을 간직한 채 400여 년 동안 초지돈대를 의연히 지키고 있다. 두 소나무는 굵은 줄기가 위로 솟구쳐 여러 갈래로 뻗은 모양으로 가지가 늘어지면서 삿갓 모양으로 쳐져 아름다운 수형이 있으며 생육상태가 양호하다. 수려한 모양의 희귀 노거수로서 생물학적 가치가 크며 역사 문화적 가치 또한 크다.]
* 17:15~17:22 강화 초지진(江華 草芝鎭)과 수령이 약 400년 된 2그루의 소나무를 사진촬영
* 17:22~17:28 인천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에 있는 초지대교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하여 탐방 완료
* 17:28~17:36 초지대교 버스 정류장에서 구래역으로 가는 70번 버스 승차 대기
* 17:36~18:03 70번 버스를 타고 초지대교 버스 정류장에서 구래역으로 이동 [27분 소요]
* 18:03~18:07 구래역에서 김포공항역으로 가는 김포골드라인 전철 승차 대기
* 18:07~19:05 김포골드라인 전철을 타고 김포공항역으로 가서 공항철도로 1차 환승하여 디지털미디어시티역으로 간 후 6호선으로 2차 환승하여 역촌역으로 이동 [58분 소요]
강화 나들길 제6코스(화남생가 가는 길) 지도
강화 나들길 제6코스(화남생가 가는 길)
안내문
강화 나들길 제6코스(화남생가 가는 길)의
볼거리에 관한 안내문
강화 나들길 제2코스(호국돈대 길) 지도
강화 나들길 제2코스(호국돈대 길)
안내문
강화 나들길 제2코스(호국돈대 길)의
볼거리에 관한
안내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