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운사 일주문
- 안암동, 태조 이성계 신덕왕후의 능지를 찾기위해 돌아본 명당
- ‘국보’ 보타사 마애보살좌상, 자비로움이 비처럼 흘러내려...
# 태조실록에 나오는 지명 안암동
신문로에 있는 서울역사박물관 앞 마당에 새겨져 있는 수서전도, 성곽밖으로 안암동이란 이름이 보인다.(사진=위성지 여행작가)
네이버를 통해 안암동에 대한 사전 조사를 했다. 앗! 안암동은 조선 태조실록에도 나오는 지명이었다. 실록에는 ‘앉일바위’(여러 사람이 편안하게 앉을 수 있는 넓은 바위)로 적혀 있다. 태조 이성계가 신덕왕후의 능지를 찾기 위해 돌아본 명당이라고 한다.
안암역에서 내렸다. 1, 2번 출구 사이의 골목으로 들어섰다. 개운산 자락의 개운사와 보타사에 가는 길이다. 술집이 즐비했다. 고려대생은 인생을 막걸리에 걸었다고 한다. 막걸리 맛집 골목이 아니지만 군데군데 막걸리를 파는 집이 보인다. 골목 사이에 있는 전봇대에는 온통 원룸, 하숙, 자취방 등을 전단이 빽빽이 붙어 있다.
불과 500m 걸었을까. 개운사 일주문이 나타났다. 일주문을 들어서자 커다란 주차장과 공사 중인 승가대학과 불교어산작법학교(불교 의례, 의식을 가르치는 학교)가 보였다. 조금 산만해 보였다. 저 멀리 계단 위에 개운사의 전각이 한 줄로 나열해 있다. 마치 중세의 성처럼 보였다.
이렇게 보이는 데는 이유가 있다. 대웅전으로 가는 길목에 커다란 아치형 종루가 서 있기 때문이다. 마치 중세 성문 같은 모양을 한 육중한 대리석 아치 위에 한옥으로 지은 종루가 있다. 종루 옆에 있는, 요사채와 종무실로 쓰는 건물 역시 1층은 콘크리트 건물이고 그 위에 한옥을 지었다. ‘절에는 모든 형태의 건물(한옥)이 다 있다고 하더니 국적 없는 건물도 있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 무학대사가 조선 태조때 창건한 개운사
관음전에 모셔진 목조아미타래여래좌상.
개운사의 역사는 깊다. 무학대사가 조선 태조 1396년에 동대문 밖 5리 정도 되는 안암산 기슭에 창건했다. 원래의 이름은 영도사였다. 1779년 정조는 당대 최고의 지략가였던 홍국영의 누이를 후궁으로 맞았다. 원빈 홍 씨다. 빈이 된지 얼마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정조는 개운사 인근에 원빈을 모셨다. 원빈 홍 씨의 원찰(願刹) 역할을 개운사에 맡기기 위한 것이었다.
이 무렵에 인파 스님이 지금의 자리로 사찰을 옮겼다. 이름도 이때 개운사로 바꾼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개운사가 조선 왕실과 인연이 있음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대웅전 추녀 밑에 있는 장식에 용과 잉어가 장식된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조각은 왕실과 관련이 없으면 쓸 수 없는 것이다.
개운사 관음전(옛 이름 미타전)에는 고려시대의 목조불상이 모셔져 있다.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다. 13세기 전반에 제작된 가장 오래된 ‘나무 부처님’ 중 하나다. 단엄한 상호, 세련되고 뛰어난 조각 기법, 균형감 있는 조형감각, 긴장감 넘치는 선묘 등이 잘 어우러져 있다고 평가받는다.
특히 이 목조불상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중수발원문(1274년)과 화엄경이 나왔다. 특히 지금까지 발견된 화엄경 중 불상에 보관된 유일한 경우다. 그 가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는 게 불교계의 얘기다.
# 대웅전 팔상도...조선시대의 불화문화재 자랑거리
석가모니의 일생을 8단계로 나누어 그린 팔상도.
대웅전에 봉안된 팔상도도 개운사는 물론 우리나라가 자랑해야 할 조선시대의 불화 문화재다. 팔상도는 석가모니의 일생을 8단계로 나누어 그린 그림이다. 특히 화폭마다 제목을 적어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한 게 이 불화의 특징이라고 한다.
개운사는 사실 조계종단 승가 교육의 요람으로 유명하다. 개운사 경내에 승가대학이 있다. 지금은 보수공사 중인데 어떤 이유 때문인지 공사가 중단된 채 있다. 승가대학은 개운사 앞에 ‘승가원 행복마을’이라는 이름으로 운영되고 있다. 일제 강점기 때 일제는 한국 불교를 일본의 국교인 조동종 불교에 예속시키려 했다. 조동종은 좌선만을 강조하는 종파다. 이 때문에 선종 불교 중심의 한국에서는 이단으로 취급했다.
이에 맞서 싸운 사람이 근대불교의 어른인 정호 스님과 석전 스님 그리고 한용운 선생이다. 그들의 힘을 합친 곳이 바로 개운사다. 이광수, 최남선, 홍명희, 정인보, 신석정, 조종현, 조지훈, 서정주, 김달진 등 뛰어난 문인은 물론 경허 스님, 청담 스님 등도 개운사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이런 전통을 이어받아 1981년 개운사에 중앙승가대학을 개교하고 교육 도량을 사용했다. 이어가서 들을 예정인 보타사가 바로 정호 스님이, 이 절 안에 있던 대원암에서 승가대학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는 불교전문강원을 열었다. 또 탄허 스님은 대원암에서 화엄경 80권 전부를 번역한 <신화엄경합론>을 펴낸 곳이다.
# 정호스님이 불교전문강원 개최가 승가대 출발
보타사 대웅전.
개운사를 나오자 ‘보타사 가는 길’이라는 안내판이 보였다. 개운사에서 100여m 떨어져 있다. 개운사에서 보타사가 가는 골목길은 온통 불토의 세계 같다. 중앙승가대학교 보육교사교육원, 연화 어린이집, 승복사, 승가마트 등 불교와 유관한 기관과 상점들이 즐비했다. 이런 풍경을 가진 안암동 골목도 하나의 문헌이다. 역사는 반드시 문자로 기록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 바로 보타사다. 보타사는 개운사의 말사다. 보타사는 작았다. 일주문도, 해탈문도 없다. 심지어 현판도 녹색 바탕의 나무에 절 이름을 적어두었을 뿐이다. 경내로 들어가자 한창 공사 중이다. 대웅전만을 남기고 낡아 허물어져 가던 대원암, 관음전 그리고 죽로지실은 불사 중이었다.
공사장 한쪽에 가림막 통로가 있다. 보타사 마애보살좌상으로 가는 길이다. 보타사 암벽에 섬세한 관음보살이 앉아 계셨다.
고려시대 조각된 보타사 마애보살좌상.
이 불상은 고려시대에 조각된 불상이다. 원래는 백불이었다. 석회를 걷어내 바위 색을 띠고 있다. 높이 5m, 폭 4.3m나 된다. 머리 위에는 납작한 바위가 있다. 부처님에게 ‘우산’이 씌운 듯하다. 머리에는 좌우 옆으로 뿔이 있는 보관을 쓰고 있고 길고 커다란 귀걸이를 차고 있다. 전형적인 불교 양식이다. 오밀조밀한 얼굴에는 옅은 미소를 띠고 있다. 천의를 걸친 어깨 위로 자비로움이 비처럼 흘러내리고 있다. 마애보살좌상은 국보로 지정됐다.
위성지 여행작가 입력 2022.11.25
첫댓글 완벽한
개운사.보타사
해설
춘수님
감사합니다
오실래나?
안오실래나? ㅎ
참석에 짝짝짝 입니다 ^^
훌륭하신 해설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