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돌아왔다!
오랜만에 올리는 리뷰 게시물입니다. 그간 활동이 뜸하기도 했지만 제가 얼마 전 실수로 탈퇴를 하는 바람에 기존 회원 등급이 날아가버렸어요. 그것을 복구하는 차원에서 활동을 재개하고자 합니다.
폐업했던 오마스가 2023년에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쌍수를 들고 환호했습니다. 우아하면서도 중후한 모양새가 마음에 쏙 들었거든요. 그런데 모든 모델들이 한 번에 나오는 게 아니라 순차적으로 나오는 것 같더라고요? 그렇게 처음에는 오기바(Ogiva)부터 나왔고 몇 달 후 기다리던 파라곤(Paragon)이 나왔어요. 예약 주문이었지만요. 그렇게 예약 주문을 넣고 한 달쯤 기다렸을까? 펜이 도착했습니다. 저는 와일드 ST 라인업을 골랐는데 이유는 후술토록 하겠습니다.
오마스에 대하여
소장님 저서에 따르면 오마스는 1925년 볼로냐에서 개업한 유서 깊은 회사입니다. 만년필 부품 제조업자였던 아르만도 시모니(Armando Simoni)가 사업을 확장하여 Officine Meccaniche Armando Simoni를 설립한 것입니다. 사명이 워낙 길어서 머리글자를 따 오마스(Omas)라고 불리게 된 거죠. 발음하기 쉬운, 잘 지어진 이름이라고 봅니다. 저는 어떤 언어로도 발음하기 쉬운 이름을 잘 지어진 이름이라고 생각해요. 1984년에는 아르떼 이탈리아나를 선보이며 전성기를 구가했지만 2016년에 폐업하고 맙니다. 하지만 2018년, 앙코라가 오마스를 인수하여 2023년에 우리 곁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예나 지금이나 아름답다
파라곤은 아르만도 시모니가 1930년대에 선보인 모델입니다. 당시 최상급 셀룰로이드를 썼는데 지금은 아닙니다. 이에 대해서는 후술할게요. 오마스의 모델 중 형이 가장 큰 모델입니다. 과거에도 파라곤이 가장 큰 모델이었지만 오버사이즈 파라곤도 있었던 것으로 보아 모델 이원화를 하지 않았는가 해요. 추후에 오버 사이즈 파라곤도 출품할지는 모르겠습니다. 저는 지금 크기도로 충분히 만족하지만요.
외형은 과거 12각형 배럴이었던 파라곤의 모습을 그대로 계승했습니다. 하지만 디테일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이는데요. 우선 클립 모양새입니다. 롤 클립이라는 점은 같지만 사다리꼴에 가까웠던 과거와는 달리 역삼각형에 가까워졌습니다. 그리고 캡탑은 금속으로 처리했어요. 그리고 Paragon이라는 모델명을 새겼고요. 중결링의 문양도 사각이 아닌 삼각으로 새겨서 좀 달라졌어요. 가장 큰 특징은 재질입니다. 과거에는 셀룰로이드를 썼지만 지금은 레진으로 바뀌었습니다. 환경 규제 때문에 셀룰로이드를 쓸 수가 없게 되기도 했지만 오래되면 변색되고 갈리지는 문제점도 있습니다. 즉 시대가 바뀌면서 문제점이 드러나게 되어 이용하지 않게 된 거죠. 프레온 가스와 GCB가 더 이상 쓰이지 않는 것처럼요. 하지만 셀룰로이드에서 레진으로 바뀌어서 좋은 점이 하나 있어요. 소장님 저서 <만년필입니다>를 178쪽을 보면 셀룰로이드는 금형으로 찍어낼 수 없어서 드릴로 일일이 내경을 파내야 했어요. 드릴로 파내는 건 사출 성형 만큼 매끄럽지 못해서 조금만 오래 쓰면 피스톤 헤드가 풀을 먹인 것처럼 뻑뻑해졌는데 지금은 이 문제에서는 자유로울 거예요. 실제로 구형 모델과 현 모델은 손에 느껴지는 질감도 조금 다릅니다. 그리고 피더는 에보나이트인데 왜인지 박하 냄새가 나네요? 약품 처리를 했을까요?
색상은 와일드, 블루 로얄, 블루 사프론, 블루 루첸, 블랙 루첸, 사프트 그린이 있는데 저는 와일드 ST가 가장 우아하고 중후해 보여서 이 색상으로 골랐습니다. 저는 젊고 활기찬 느낌보다는 어둡고 중후한 게 좋더라고요. 사족으로 자동차 내장재도 메탈보다는 우드를 선호합니다.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다!
파라곤이 대형이라면 대형 모델인데 굳이 세분화하자면 오버사이즈가 아닌, 풀사이즈 모델 쯤 될 거예요. 12mm가 못 되는 그립 존은 생각보다 잡기 편안했어요. 무게 중심이 그립 존 쪽으로 기울어 있는데 이는 필기 시에 그렇게까지 큰 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이 펜은 장기간 필기해도 손이 피로하지 않아요. 다만 본인이 다한증이 있다거나 손에 지방분이 많다면 가끔씩 쉬어가면서 필기하시기 바랍니다.
▲'풀사이즈급이니만큼 작은 크기는 절대 아니다'
무게도 썩 무거운 편은 아니에요. 그래서 파라곤은 여자 분들이 쓰셔도 전혀 무리가 없는, 아주 잘 만들어진 몇 안 되는 펜이라고 봐요.
가볍다, 무겁다는 개인차가 존재하지만 저는 캡 포함 40g 미만이면 가볍다고 봅니다.
주체할 수 없는 출력
저는 오마스를 가장 이탈리아 펜다운 이탈리아 펜이라고 생각해요. B촉으로 구매했는데 국외 리뷰를 보면 F나 M촉을 권합니다. 실제 필획을 보니 M촉하고 B촉은 차이가 매우 컸어요. 만년필을 20년이나 썼고 어지간한 출력은 통제 가능하다고 자부해왔는데 이건 힘들었어요. 성능을 극한까지 이끌어내는 데 집중하는 게 전형적인 이탈리아 펜답습니다. 흡사 500마력에 100kg·m가 넘는 성능을 내는 리무진을 모는 것 같달까요?
제가 사용하는 노트는 옥스퍼드 액티브 북입니다. 6mm에 80g/㎡급 노트입니다. 국내에서 구하기가 어렵고 가격 또한 상당히 비싼 편이지만 번짐과 비침이 적어서 애용하는 노트예요. 좌측은 워터맨 텐더 퍼플 잉크로 썼고 우측은 그라폰 파버카스텔 스톤 그레이로 썼어요. 텐더 퍼플은 이 노트조차 출력을 감당하기 어려웠는지 비침이 있는 반면 스톤 그레이는 비침이 없었어요. 데일리 펜으로 사용해야겠다면 F나 M촉을, 넘치는 출력을 가감 없이 즐기고 싶다면 B촉을 권합니다.
오마스는 비주류일까?
오마스는 동양에서도 서양에서도 비주류 모델로 취급되는 것 같아요. 펜쇼에서 오마스 파라곤을 전시했는데 제 전시물을 보던 외국인 관람객이 제 파라곤을 보고는 아주 반가워했어요. 본인도 같은 모델을 가지고 있다면서요(색상은 다르지만). 2016년에 우리 곁을 떠나서 2023년에 돌아왔으니 7년의 공백이 있었지요. 7년이면 졸업장 두 개는 뗄 세월입니다. 돌아온 지 1년이 채 못 됐으니 소수의 매니아가 아닌 한 잘 모를 수 있어요. 좀 더 높아진 상품성과 품질로 돌아왔으니 오마스도 많이 알려지면 좋겠습니다.
에필로그
워낙 오랜만에 쓰는 리뷰라서 감이 많이 떨어졌습니다. 어떻게 리뷰를 써야할지 몰라서 제가 게재했던 리뷰 게시물까지 참고했습니다. 그간 너무 오래 쉬고 있었어요. 펜쇼가 가까워지고 있었고 필사본 노트를 전시할 계획이 있어서 다른 것들을 다 제쳐놓고 필사 완성에만 열을 올렸거든요. 자유 게시물이라도 좀 올리면서 감을 유지했어야 했는데 생각을 잘못했어요. 그리고 제가 어느 정도 알려지게 됐는지 펜쇼 현장에서 저를 알아보시는 분도 계시더라고요? 문구계가 생각보다 판이 좁은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하긴, 문구 취미 좀 오래 즐기신 분들은 중고나라에 어떤 필기구가 올라오면 소유주가 누구인지 알 정도니까요.
첫댓글
앙코라 만년필을 산 적이 있는데, 구성품 부록에 앙코라 창업자 쥐세페 자니니가 볼로냐에서 친구 알만도 시모니와 함께 사업에 뛰어들었다 라고 적혀있었어요
동업을 말하는건 아닌거 같고 알만도 시모니와 함께한 인연을 자랑스레 여기는거 같더군요.
의외의 인연이 있네요. 오마스는 부활했는데 찾아보니 앙코라는 어찌된 영문인지 홈페이지가 없어졌네요. 폐업은 아니길 바랍니다.
오 왠지 텔아비브님은 오마스 가셨을거 같은 느낌이었는데, 멋진 리뷰네요. 펜쇼 때 옆자리에서 그 내공에 탄복했었는데...
내공까지 갈 게 없습니다. 제 전시품은 사실 돈만 내면 다 살 수 있는 것들이어서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리뷰의 정석 같아요~ 자세한 리뷰 감사합니다~~
정석이랄 것까지는 없습니다. 여러 차례 리뷰 게시물을 올리고 수정하면서 지금의 형태가 나왔지요.
음.. 배럴의 저런 무늬? 모양?은 개인적으로는 이상한 모양이라고 생각되서.. 아름답다시니 역시 사람들의 취향은 다양하다란 생각듭니다. ^^;
뭔가 움직이는 거같은 물과 기름같은 느낌이 위험해보이기도 하고 매력적인거 같습니다 .
와일드가 아니어도 다른 선택지가 있습니다. 실물로 보면 또 다를 수 있고요.
오마스의 부활이네요. 선의의 경쟁이 계속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네, 저도 그러면 좋겠습니다. 오마스가 오래오래 존속하길!
오마스 아코도 부활 했으면 좋겠어요
순차적으로 재출시되지 않을까요? 다음 모델은 360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