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근 신부
연중 제28주간 목요일
로마 3,21-30ㄱ
루카 11,47-54
어제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에 대한 불행선언 세 가지를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어제 <복음>의 마지막 부분에서부터 율법교사들에게도 세 가지 불행선언을 하십니다.
율법교사들에 대한 첫 번째 불행 선언입니다.
“너희 율법교사들도 불행하여라!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놓고,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루카 11,46)
율법교사들의 언행의 불일치에 대한 질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가르치면서도 자신들은 율법을 실행하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는 짐을 지웠던 것입니다.
사실, 그들은 율법보다도 율법에 대한 자신들의 해석을 존중했고,
더구나 그것을 지나치게 세분화하여 모세의 율법 외에도 613개의 규범을 지키게 하였던 것입니다.
결국, 백성들에게 견디기 어려운 짐을 지워놓으면서도 자신들은 스스로
지키지 않았던 것입니다(마태 23,3).
두 번째 불행선언입니다.
“너희는 불행하여라! 바로 너희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의 무덤을 너희가 만들기 때문이다”
(루카 11,47)
율법교사들이 진리를 핍박하고 있음에 대한 질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예언자들의 무덤은 꾸미면서도 실은 그 예언자들을 죽인 조상들의 소행을 본 따라
살아가고 있음에 대한 질책입니다.
곧 그의 조상들이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였듯이, 지혜이신 당신을 핍박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그들이 “모든 예언자들의 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루카 11,50)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세 번째 불행선언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교사들아! 너희는 지식의 열쇠를 치워버리고서,
자기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버렸기 때문이다”(루카 11,52)
그들은 율법을 독점하고 있으면서도 율법 안에서 지식의 열쇠를 치워버리고,
하늘나라로 들어가지도 않고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막고 있음에 대한 질타라 할 수 있습니다.
“지식의 열쇠”란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을 해석하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름 아닌 말씀이 바로 문이신 당신을 여는 열쇠라 할 것입니다.
사실, 성경의 모든 말씀이 그분을 가리키고 그분에 관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열쇠”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나라로 들어가는 문이신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는 “지식의 열쇠”를 치워버리고,
천국의 문으로 들어가는 이들마저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결과를 초래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지식의 열쇠”는 그리스도 주님이십니다.
율법교사들이 이 “열쇠”를 치워버렸지만, 사도들이 그것을 찾았습니다.
주님께서 사도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준다.”
우리는 지금까지 사흘 동안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책망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그들을 책망하시다가 저녁식사도 못 잡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 그들 역시 식사를 하지 못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계속 질책 당하느라 기분이 몹시 상했을 테니까 말입니다.
이를 오늘 복음의 마지막에서는 그들이
“독한 앙심을 품고 ~그분을 옭아매려고 노렸던 것이다.”(루카 11,53)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질책당할 때는 어떻게 하는지를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 질책을 받아들이고 겸손하게 회개하는지, 아니면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처럼
오히려 광분하고 화를 내며 앙갚음하려고 기회를 노리는지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장 큰 위기의 순간이 곧 가장 큰 은혜의 순간임을 항상 기억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파주 올리베따노 베네딕토회 이영근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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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균 신부
연중 제28주간 목요일
로마 3,21-30ㄱ
루카 11,47-54
세탁소 간판
200년 전 덴마크에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 청년은 진리가 무엇인지 아는 것에 대해 무척 목말라했고
그 답을 구하고자 신학교에 갔습니다.
신학교에 가서 이런저런 하느님과 세상의 진리라고 하는 것들에 대해서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청년의 마음의 샘은 여전히 말라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청년은 세탁을 하기 위해 학교에서 나와 세탁소를 찾았습니다.
저 멀리 ‘세탁합니다’라는 문구가 씌여진 간판이 나지막하게 걸려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청년은 급히 그 문구가 씌여진 점포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옷을 세탁할 수 있냐고 묻자 주인은 이곳은 간판 만드는 가게지
세탁소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청년은 진짜 세탁소를 찾아가서 세탁물을 맡기고 기숙사로 오는 길에
학교 정문 머릿돌에 씌어져 있는 교훈을 보았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해줄 것이다.” 그후 청년은 학교를 나왔습니다.
이 청년이 바로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입니다.
진리를 얻은 사람들의 느낌과 소감을 들은 사람이 결코 진리 그 자체를
얻은 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 역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음의 진리를 체험 안에서 알고 그것을
삶으로 살아가기보다는 오히려 그 진리를 체험한 사람의 증언만으로
우리가 진리를 안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마치 세탁소 간판을 보고 진짜 세탁소로 착각한 그 청년처럼 말입니다.
서울대교구 최영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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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진 신부
연중 제28주간 목요일
로마 3,21-30ㄱ
루카 11,47-54
재건축
우리는 헌집은 두꺼비에게 주고 새집을 지어 새 정신, 새 마음,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시멘트으로 지은 집은 40년을 지탱 못하고 허물어져 새로 지어야하고
문화적, 삶의 편리를 따라 살면 엣 날에 지은 집은 불편하여 집안 내부를 고쳐야 합니다.
수도원도 사방에 하자가 생겨 이곳을 고치고 저 곳 수리하여야 합니다.
사람이 만든 조직도 시대에 부응한 형태를 새로운 형태로 바꾸지 않으면
불편하고 인간조건을 보다 좋게 할 수 없습니다.
자본주위를 재건축하려 공산주의가 생기고 공산주의가 불합리하여 민주주의가 생겨
재건축을 할려고 하지만 또 다른 결함이 생겨 모두가 잘 살기 위하여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드는 형태를 원합니다.
오래된 건물을 새 건물로 바꾸듯이 한 자리에 오래 머무는 관리자나 지도자는
새로운 인물로 바꾸어야 합니다.
교회는 본당 신부를 한 곳에 오래 있게 하지 않고 3년 5년 인사이동을 하는 이유는
본당의 발전을 위하여 필요한 것입니다.
요사이 교회 안에 문제가 된 희망 원은 시작은 참으로 좋은 뜻으로 희망이 없는 사람에게
희망을 주려고 대구교구에서 전 신자가 후원회를 조직하여 후원금으로 유지하고
그곳에 관계하는 사람은 봉사적이고 그리스도적 마음으로 일을 하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곳저곳에 불합리한 일이 일어나
마침내 재건축을 해야 할 시기가 온 것입니다.
잘못된 관례를 고치고 사업체에서 이익을 보려하지 말고
그런 관례가 발생하면 새 것으로 변화 시킬 가난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잘못된 것을 찾아 잘못한 사람은 진정으로 사과하고 더 잘하겠다는 결심하고
능력이 부족하면 더 양심적 단체에 넘기고 떠나야 하지만
그래도 구관이 명관이다 하듯이 고쳐쓰고 새로운 형태로 바꾸어 관리해야합니다.
개인도 자기 안에 머물러 변화 없이 살았으면 변화 되어야 합니다.
돌같은 마음을 살 같은 마음으로 바꾸고 매일 새날을 맞이하듯 새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나도 모르게 나의 인격의 일부가 망가져 가고 알 수 없는 사람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회두의 길을 알려주시고 회두하는 사람에게 새 생명을 주십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성당에서 기도하실 때
“ 허물어지는 내 집을 고쳐다오.”
이 말을 듣고 집에 옷감을 성당에 던져 넣고 이것으로 수리 하세요 하였다는 말이 아닌 것을 알고
허물어 가는 교회를 다시 재건축하라는 명령을 따르려고
새 수도회를 새워, 12세기 성인을 통하여 교회는 새롭게 변화 되였습니다.
오늘도 새롭게 가난한 마음으로 교회가 재건축될 시간입니다.
주님!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새로운 교회로 변화되도록 기도합니다.
분도회 이석진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