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4월 4~5일 경남 울산군(蔚山郡) 하상면(下廂面) 병영리(兵營里)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이곳은 조선시대 경상좌도병마절도사영(慶尙左道兵馬節度使營)이 있던 곳으로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청년회 간부인 양석룡(楊錫龍)·이현우(李鉉禹) 등은 동면(同面) 서리(西里)에 있는 박영하(朴永夏)의 집에서 만나 4월 4일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들은 동지를 규합하는 한편 태극기를 제작하고 대한독립만세라고 대서특필한 큰 깃발을 만드는 등 사전준비를 진행하였다. 4월 4일 오전 9시경 청년회원들은 속속 일신학교(日新學校, 후에 병영초등학교)로 집결하였다. 이들은 양석룡이 선두에서 큰 깃발을 세우자 모두 태극기를 꺼내 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가행진에 들어갔다. 이때 경찰관주재소의 연락을 받고 울산경찰서에서 일본 경찰과 군인이 출동하였다. 이들은 양석룡을 구타하며 깃발을 빼앗고 선두에서 지휘하던 주도자를 검거하였다. 일본 군경에 의해 무력진압으로 해산당한 이들은 김세진(金世鎭)의 집에 피신하여 다음날 다시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하였다. 이들은 4월 5일 오후 3시경 일신학교 부근에 다시 모여 주재소로 시위행진을 벌였다. 시위군중은 점차 늘어났고, 주재소 앞에서 울산에서 지원 나온 일본 군경과 대치하였다. 시위군중은 전날 연행해 간 주도자의 석방을 요구하며 일본 군경과 육박전을 벌이는 등 격렬하게 항쟁하였다. 이때 일제가 군중에게 발포하는 만행을 저질러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강문필은 이날의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4월 10일 부산지방법원 울산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9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受刑人名簿
每日申報(1919. 4. 8)
兵營三一獨立萬歲運動略史(兵營三一奉祭會, 1969) 47면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3권 204~208면 |